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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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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창익은 1896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로, 3·1 만세 운동 참여로 퇴학당한 후 일본 유학, 모스크바 국제공산당대회 대표 참가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노동공제회 가입, 암태도 소작 쟁의 지지,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선출 등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청년전위동맹, 조선독립동맹 등에서 활동했다. 해방 후 북조선신민당 부위원장,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하며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으나, 김일성의 일인 독재에 반대하다가 숙청되어 1957년 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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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익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초상화
초상화
이름최창익
한자崔昌益
로마자 표기Choe Chang-ik
별칭최창석
최창순
최동우
이건우
직책
부수상내각 부수상
부수상 임기 시작1952년 11월 29일
부수상 임기 종료1956년 9월 23일
부수상 수상김일성
부수상 동시 재임자박헌영
홍명희
허가이
최용건
박의완
박창옥
김일
국가 통제상국가통제상
국가 통제상 임기 시작1952년 5월 8일
국가 통제상 임기 종료1955년 8월
국가 통제상 수상김일성
국가 통제상 전임김원봉
국가 통제상 후임이효순
재정상재정상
재정상 임기 시작1954년 3월 23일
재정상 임기 종료1954년 11월
재정상 수상김일성
재정상 전임윤공흠
재정상 후임이효순
부수상 임기 시작21948년 9월 9일
부수상 임기 종료21952년 11월 29일
부수상 수상2김일성
부수상 전임2신설
부수상 후임2이효순
개인 정보
출생일1896년
출생지조선 함경북도 온성군
사망일1960년
사망지평양
국적한국
별명최창석, 최창순, 최동우, 리건우
한국 이름 정보
한글최창익
한자崔昌益
로마자 표기Choe Chang-ik
매큔-라이샤워 표기법Ch'oe Ch'angik
출생 지역북한
일본어 정보
제목崔昌益
사진[[File:Choi Chang-ik.jpg|250px]]
한자崔昌益
히라가나さい しょうえき
가타카나チェ・チャンイク
개인 정보
원어명崔昌益
출생일1896년 2월 29일
출생지조선 함경도 온성 남양면
사망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사망일1957년 10월 6일
국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직책제3대 부수상
임기1953년 3월 31일 ~ 1956년 9월 19일
주석김두봉
수상김일성
직책2제3대 재정상
임기21954년 3월 23일 ~ 1954년 11월 22일
국적2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2김두봉
수상2김일성
거주지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
학력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 학사
소련 모스크바 대학교 대학원 철학 석사 수료
경력독립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
정치인
조선로동당 고문 겸 당무위원
별명최창석(崔昌錫), 최창순(崔昌淳), 최동우(崔東宇), 이건우(李建宇), 최태현
종교무종교
배우자허정숙(재혼)
자녀최동국(아들)
군복무인민군 지상군 준장 전역(1949년)
친인척허헌(계취 장인)
최원도(친손)
정당조선로동당

2. 생애

최창익은 1896년 조선 온성군에서 태어났다.[3] 정확한 출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고등학교 5학년 때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제적당했다.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 영어학교(현 세이소쿠학원 고등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후 와세다 대학교 경제정치학부에서 수학하며 학생회를 조직하고 활동했다. 전주, 옥구, 군산 등 한국 지역에 잠입하여 사회주의와 평등에 대한 강연을 하는 순회 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결국 석방되었고, 1925년 2월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했다.

1923년 6월,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노동공제회 회원이 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조선공산청년동맹을 설립하는 데 참여하여 위원으로 활동했고, 9월에는 한국노동대회 회의를 주도하다 경찰에 체포되었다.[4] 1924년 4월에는 조선청년동맹 설립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8개월 후에는 서울청년회와 관련 없는 사회주의자동맹을 설립하는 데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졸업 후 최창익은 서울청년회 대표로 코민테른 세계대회에 참석했다. 귀국 중 김좌진의 신민 그룹(만주 신민성의 반란 집단)에 참여하여 조직 내 공산주의 연맹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1925년 10월 김좌진의 그룹에서 탈퇴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같은 달 일본 당국은 신민 그룹에 연루된 혐의로 그를 체포했다. 1926년 최창익과 신민 그룹 회원 박두희는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공산주의자 회의에 참석했다. 1927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간부가 되었다. 1928년 2월에는 소위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1935년 탈옥했다.

1936년 중국 국민정부에 정치 망명을 요청하여 허가받았다. 한국국민혁명당에 참여하여 한커우에서 전위동맹을 결성했고, 1937년 아내 허정숙과 결혼했다. 1938년 5월에는 김원봉의 한국국민혁명당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 사령관이 되었으나, 장제스국민당 자금 지원에 불만을 제기하고 김원봉의 조직을 떠났다. 그는 무정, 김두봉과 함께 옌안으로 갔다.

1941년 1월, 중국공산당의 자금 지원을 받아 이건우, 무정과 함께 진동에 "河北 조선청년연맹"을 설립했다. 1942년 김두봉, 이건우, 무정, 한빈과 함께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여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정치위원회에 임명되었고, 12월 김두봉, 무정과 함께 평양으로 귀국했다. 1946년 3월 조선신민당을 창당하여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8월 조선신민당과 조선공산당의 북조선로동당 통합에 참여했다. 9월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는 최창익을 상무위원으로 선출했다.

1948년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와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참석했다. 9월 최창익은 북한 최초의 재정상이 되었고, 1952년에는 부수상, 1954년에는 재정상, 1955년에는 북한의 국가검열성상이 되었다.

1956년 박창옥, 윤공흠과 함께 김일성을 비판하여 당에서 제명되었다(8월 종파 사건). 양돈장으로 추방되었다. 중국소련의 간섭을 받아 1956년 9월 조선노동당 중앙총회에서 박창옥의 중앙위원 자격이 회복되었다. 1956년 11월 중순,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물질문화 및 역사문물보호국장에 임명되었으나 최창익은 이를 거부하고 원사라는 학자의 지위로 과학 연구에 종사하도록 요구했다.

1957년 반당파벌사건의 영향으로 소련으로부터의 비판이 상당히 약해진 것을 확인한 김일성은 반대파를 제거하기 시작, 같은 해 9월 박창옥과 함께 투옥되었다. 군사 쿠데타에 참여한 혐의를 받아 1960년 1월 비밀재판에서 사형(총살)을 선고받았다.

2. 1. 생애 초반

최창익은 1896년 함경북도 온성 남양면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반당 종파분자로 숙청되었고, 대한민국에서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그의 생일은 한동안 알려지지 않았다.[3]

한학을 공부하다가 근처의 신식 소학교에 들어갔고, 1917년 경성부로 올라가 1918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19년 고등학교 2학년 때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고 그 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 입학했고, 일본 유학 중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대학 졸업 후, 비밀리에 조선에 잠입, 충청남도 강경, 전북특별자치도 전주, 옥구, 군산 등지에서 신문물의 존재와 사회주의, 평등에 대해 순회강연을 하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잠시 감금되었다가 풀려났다. 1923년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7월 암태도 소작 쟁의를 지지하였다.[10]

2. 2.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활동

1923년 조선노동공제회에 가입했으며, 그해 7월 암태도 소작 쟁의가 발생하자 이를 지지하였다. 7월 12일 서울 천도교 강당에서 최창익, 김영엽 등 연사들이 암태도 소작인들을 성원하는 강연회를 열었다.[10] 1924년만주에 갔다가 4월 21일 조직된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그해 12월 다시 입국하여 경성공산주의청년회의 별동조직인 사회주의자동맹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모스크바 국제공산당대회에 서울청년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돌아오던 길에 만주 영안현(寧安縣)에 내려 김좌진, 김종진, 김진익, 김혁 등이 만든 신민부에 가담하였다가 1925년 10월 탈퇴하고 귀국했다.

1926년 신민부 단원 박두희 등과 함께 소련에서 열리는 공산주의자 회의에 신민부 접근대표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되었으며, 김영만과 함께 모스크바코민테른에 대하여 화요파 조선공산당은 비정통이며 총의에 의해 열린 당이 아니니 승인하지 말 것을 주장하기로 하였다. 그해 11월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변증법을 연구하였다.

1928년 2월 경성부에서 조선인 통합 공산당 조직을 결성했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검거된 통일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6년 동안 투옥되었다. 1934년 석방되었으나 조선총독부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그의 주변을 감시하였다.

1934년 12월 좌파 성향의 출판사 신건설사 사건으로 경성부 삼청동에서 체포되었으나 탈옥, 1935년 1월중국으로 망명한다. 1923년 6월, 최창익은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노동공제회 회원이 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조선공산청년동맹을 설립하는 데 참여하여 위원으로 활동했다. 9월에는 한국노동대회 회의를 주도하다 경찰에 체포되었다.[4]

졸업 후 최창익은 서울청년회 대표로 코민테른 세계대회에 참석했다. 귀국 중 김좌진의 신민 그룹(만주 신민성의 반란 집단)에 참여하여 조직 내 공산주의 연맹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1936년 중국 국민정부에 정치 망명을 요청하여 허가받았다. 한국국민혁명당에 참여하여 한커우에서 전위동맹을 결성했다. 1938년 5월에는 김원봉의 한국국민혁명당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 사령관이 되었으나, 장제스국민당 자금 지원에 불만을 제기하고 김원봉의 조직을 떠났다. 그는 무정, 김두봉과 함께 연안으로 갔다.

1941년 1월, 중국공산당의 자금 지원을 받아 이건우, 무정과 함께 진동에 "河北 조선청년연맹"을 설립했다. 1942년 김두봉, 이건우, 무정, 한빈과 함께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여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2. 3. 망명과 민족혁명당 활동

1935년 배편으로 상하이에 도착하여, 난징에서 김원봉을 만났다. 이후 난징과 우한(武漢), 옌안(延安) 등지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의 비밀조직에서 활동했다.

1935년 10월 김규식, 김원봉 등과 함께 난징에서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였다.[11] 그러나 민족혁명당이 자본주의 정당으로 변질되어간다고 비판하며, 지청천, 조소앙 계열은 물론이고 김규식과도 자주 마찰을 빚었다. 조소앙, 지청천 등은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하여 김구 세력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11] 최창익은 이들의 탈퇴에 만족하지 않고, 사회주의공산주의정당으로 거듭나 노동자와 피착취 하층민의 권익을 옹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소앙, 지청천 등이 떠난 뒤에도 김원봉과 자주 갈등했다.[11] 민족혁명당을 계급정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최창익 세력과 '중국 안에서는 우리 민족의 계급적 토대가 없어서 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은 있을 수 없으므로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민족해방과 함께 민주 공화국의 건설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김원봉 세력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11] 최창익은 김원봉의 이념이 선명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중국과의 연합전선을 수립하는 문제에서도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를[11] 졸업하고 중국 국민당과 관계를 유지하며 국부군(중국 국민당군)과의 연합전선을 원했지만, 최창익은 민족혁명당을 계급 정당으로 만들고자 중국 공산군과의 연합을 원했다.[12] 결국 최창익 등은 김원봉 중심의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하여 조선청년전시복무단 등을 만들었다가 중국공산군 지역인 옌안으로 가서 화북조선독립동맹에 참가했다.[12]

1940년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였던 김두봉이 옌안으로 떠나자, 최창익은 조선의용대 내 사회주의자들에게 화북으로 가자고 연락했고, 각 소대 내 사회주의자들이 이탈하여 그를 따랐다.

1936년 6월 최창익 등 50여 명은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창건하여 위원장이 되었다.[13] 전위동맹 본부를 한커우(漢口)로 옮겼고, 이건우(李建宇)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1937년 김성숙 등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여 연대하였다. 1938년 5월 다시 충칭으로 돌아가 김원봉이 조직한 재무한조선청년전시복무단의 지휘를 맡기도 하였으나, 전위동맹 조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협상을 추진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관계를 가지고 대일선전전에 주력하는 입장을 고수했고, 최창익은 김원봉과 의사충돌 뒤 결별하고 화북으로 가게 된다. 망명생활 중 최창석, 최창순, 최동우, 이건우, 최태현 등 다양한 가명을 사용하였다.

1938년 10월 중국무한이 일본군에 함락된 뒤 전시복무단의 일부를 이끌고 연안으로 가서 '청년연합회' 조직에 참가한다.[14] 김원봉의 노선에 반대하다가[15] 결국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충칭을 떠났다.

2. 4. 혁명 활동과 조선독립동맹

1935년 배편으로 상하이에 도착, 중국에 건너가 난징에서 김원봉을 만났다. 그 뒤 난징과 우한(武漢), 옌안(延安) 등지의 공산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의 비밀조직에서 활동했다. 1935년 10월 김규식, 김원봉 등과 함께 난징에서 조선민족혁명당 창당 조직에 참여했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이 자본주의 정당으로 변질되어간다며 불평했고, 지청천, 조소앙 계열은 물론이고 김규식과도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11]

조소앙, 지청천 등이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하여 김구 세력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자,[11] 최창익은 이들의 탈퇴에 만족하지 않고 사회주의공산주의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소앙, 지청천 등이 떠난 뒤에도 김원봉과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 그는 민족혁명당을 계급정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김원봉은 '중국 안에서는 우리 민족의 계급적 토대가 없어서 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은 있을 수 없으므로 민족혁명당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민족해방과 함께 민주 공화국의 건설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11] 그는 김원봉이 이념이 선명하지 못하다고 보고 불만을 품게 된다.

중국과의 연합전선을 수립하는 문제에서도 황포군관학교를[11] 졸업하고 중국 국민당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김원봉은 국부군(중국 국민당군)과의 연합전선을 바랬는데 반해, 민족혁명당을 계급 정당으로 만들려 했던 최창익은 중국 공산군과의 연합을 바랐다.[12] 이에 최창익 등은 김원봉 중심의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하여 조선청년전시복무단 등을 만들었다가 결국 중국공산군의 지역인 옌안으로 가서 화북조선독립동맹에 참가했다.[12]

1940년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였던 김두봉이 상하이 임시정부내 보수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 임정 참여를 거부하고 옌안으로 떠나자, 최창익은 조선의용대내 사회주의자들에게 함께 화북으로 가자고 연락하였고, 각 소대 내 사회주의자들이 이탈하여 그를 따랐다.

1936년 6월 최창익 등 50여 명은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한다고 선포하고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창건하고, 최창익이 위원장이 되었다.[13] 그해 전위동맹 본부를 한커우(漢口)로 옮겼다. 전위동맹에서 활동할 무렵 그는 이건우(李建宇)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1937년에는 운암 김성숙 등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여 연대하였다. 1938년 5월 다시 충칭으로 돌아가 김원봉이 조직한 재무한조선청년전시복무단의 지휘를 맡기도 하였으나, 전위동맹 조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협상을 추진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관계를 가지고 대일선전전에 주력하는 입장을 고수했고, 그는 부르주아와 결탁한다는 이유를 들어 김원봉과 의사충돌 뒤 결별하고 화북으로 가게 된다. 망명생활 중 그는 최창석, 최창순, 최동우, 이건우, 최태현 등 다양한 가명을 사용하였다.

1938년 10월 중국무한(武漢)이 일본군에 함락된 뒤 전시복무단의 일부를 이끌고 연안으로 가서 '청년연합회' 조직에 참가한다.[14] 김원봉의 노선에 반대[15] 하다 결국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충칭을 떠났다.

1938년 11월 최창익은 전시복무단 일부 및 조선의용대원 중 공산주의자 일부를 이끌고 화북의 연안(延安)으로 이동, 무정(武亭), 김두봉(金枓奉) 등과 연합하여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화북지역에 주둔중이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 아래 두게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합하는데 반대하여 화북으로 올라온 조선의용대원들을 합류시켜 무정 등과 함께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개칭하고 조선독립동맹의 군사단체로 활용하였다.

1941년 1월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받고 화북 진동(晋東)에서 무정, 이건우(李建宇) 등과 함께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하고 단원을 모집하였다.

성립 당초의 연합회는 회장에 무정, 조직부장에 이유민, 선전부장에 장진광, 경제부장에 한득지, 위원에 이건우 등으로 되어 있다.[14] 이유민과 장진광 등은 항일군정대학 소속이어서 '청년연합회'는 당초 중국공산당과 행동을 같이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만으로 청년연합회가 구성된 것은 아니었고 최창익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혁명당세력의 일부도 참가했다.[14]

당시 일본 측의 정보자료에 의하면 '(1939년에) 앞서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이건우, 즉 최창익이 연안에 가서 중국 공산군의 대장정에 참가한 후[16]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과 포병단장을 역임한 무정을 비롯한 연안에 있던 조선인 20여 명과 함께 재화북조선인반전단체의 기본 조직으로서 1939년 연맹조직위원회를 만들었다가 다시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의 왕지연(王志延) 등과 교섭하여 조선의용대의 중국공산군 지역에의 흡수를 위해 조직한 것이 화북조선청년연합회[16] 라 한다.

1942년 8월 김두봉, 무정, 한빈 등과 더불어 조선독립동맹 창당에 참여했다.

성립 당초의 주도층은 주석에는 김두봉, 중앙집행위원에 무정, 최창익, 한빈, 김창만, 김학무, 박효삼, 이유민, 이춘암, 진한중, 채국번 등이었다.[12] 성립 당초에는 약 300명 정도로 출발했으나 그 수가 점점 증가하여 8.15 당시에는 약 2000명으로 증가.[12] 하였다. 무정의 양보로 무난하게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자신이 이끌고 온 전시복무단 및 조선의용대 탈퇴자들을 무정이 이끌던 군사와 합쳐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고, 주요 지휘관의 한사람이 되었다.

2. 5. 광복 이후

1945년 8월 중국 체류 중 조선공산당 정치국 국원에 추대되었다.[8] 1945년 12월 김두봉, 무정과 함께 평양으로 귀국하여, 1946년 2월 조선독립동맹의 38선 이북 귀환자들과 함께 북조선신민당을 창건하였다.[17]

1946년 3월 북조선신민당의 부위원장을 맡았으며,[17] 같은 해 8월 북조선신민당과 조선공산당의 북조선노동당 통합에 참여했다. 이후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에 선임되었다.[17] 귀국 후 국내 여성공산주의 운동가인 허정숙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허정숙은 이미 일곱 번의 이혼 경력이 있었고, 최창익은 아내 허정숙의 과거를 알게 되면서 그녀를 불신하게 되었다.

그 뒤 북조선노동당 상임위원, 북조선인민위원회 검열국장을 거쳐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1948년 9월 북조선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재정상을 맡았다.[7] 1952년 북조선내각 부수상에 취임하여 재정상을 겸임했다.

2. 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참여와 숙청

1948년 2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및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9월 북한 정권 수립 후 초대 내각에서 재정상을 맡았다.[18] 한국전쟁 이후 1952년에는 내각 부수상에 취임했으며, 1953년 2월 부수상 겸 재정상이 되었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경제 개발 문제를 놓고 중공업 우선론자와 반(反) 중공업 우선론자로 의견이 갈렸다. 최창익은 반 중공업 노선을 택했다.[19]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등은 반 중공업 노선을 지지하는 새로운 세력을 형성했다.[19] 1954년 내각 개편 때 다시 재정상이 되었다가 1954년 11월 20일 해임되었다. 1955년 11월에는 국가검열성상이 되었다.

1956년, 최창익은 8월 종파사건을 일으켜 김일성을 비판했다가 숙청당했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의 최창익(재정상, 제2열 왼쪽에서 두 번째)

2. 6. 1. 김일성 비판 운동

1956년 초, 소련파인 박창옥 등이 김일성의 1인 독재를 비판하면서 최창익은 소련파에 동조했다. 그해 4월 조선로동당 3차 대회에 참여했다.

8월, 소련파 박창옥은 소련공산당의 개인숭배 비판 노선을 배경으로 김일성을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연안파인 최창익과 연합 전선을 폈다.[21] 그는 집단지도체제를 원했지만, 김일성의 빨치산 계열은 다수결로 하자, 민주적인 방법으로 하자는 말만 되풀이하고 묵살하였다. 그는 소련파의 움직임을 보아 소련중국이 협조하리라 확신하고 김일성 공격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 중앙검열위원회의 감시에 포착되었고, 소련을 방문 중이던 김일성1956년 8월 당 전원회의 개최 전에 부랴부랴 귀국하게 된다.[21] 당 전원회의에서 소련파의 박창옥과 연안파의 최창익은 김일성의 독재화를 정면 비판하면서 소련 공산당의 20차 당 대회에서 결정한 바처럼 개인 독재를 버리고 모든 당 기관을 집체적 지도 체제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1] 또 이러한 집체적 지도 체제를 내각, 군을 비롯한 각 사회단체에도 적용[21]해야 한다며 김일성을 강하게 밀어붙였다.[22]

또한 최창익은 김일성빨치산 투쟁만이 조선 독립의 유일한 전통은 아니며 만주 외에도 여러 곳에서 조선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했다.[22]

2. 6. 2. 8월 종파사건과 숙청

1956년 8월 종파사건 당시 최창익은 연안파의 핵심 인물로서 김일성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으나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최창익은 박헌영의 남로당 계열을 숙청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25]

김일성6.25 전쟁을 거치며 의 지휘권을 장악했고, 그의 빨치산파는 '군부파'로 불리며 김일성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소련파연안파를 공격했다.[22]

김일성은 최창익과 박창옥을 사대주의, 종파주의자로 몰아 숙청했다. 그러나 소련중국의 반발로 북한 내정에 대한 간섭이 발생하자, 김일성은 최창익과 박창옥을 중앙위원으로 복귀시키고 다른 4명에 대한 출당 조치도 철회했다.[24]

박헌영 일파 숙청 이후 최창익은 당 중앙위원회에서 8번째 서열에 올랐다.[25] 그러나 1956년 12월, 박헌영 일파가 제거된 직후, 소련파김일성 비판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조선로동당을 장악한 군부파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김일성의 일인 독재를 비판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공개 비판을 받고 서열이 밀려났다.

이후 최창익은 ML파를 옹호하며 "항일무장투쟁 세력이 국외에서 항일(투쟁)을 하였다면 ML파 등은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고 주장하여[26] 국외와 국내를 분리하고, 어려운 항일무장투쟁과 국내 운동을 같은 위치에 놓으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27]

김일성은 최창익 등을 숙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2. 7. 최후

재판 과정에서 그의 처 허정숙은 그가 반당 종파행위에 가담했다며 불리한 증언을 했다. 그러나 이미 아내와의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최창익은 동요하지 않고 태연하게 재판에 임했다.[28] 소련중국은 최창익과 박광옥에 대한 북한의 처리에 반대했지만, 재판은 계속 진행되었다.

1956년 9월 18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 계열의 고희만은 소련 외무성 극동국 1등 서기관 라자레프를 만나 사건을 설명했다. 고희만은 사건의 주동자가 최창익이며, 박광옥이 사람들을 끌어들였다고 주장했다.[28] 또한 이들이 지도부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며 소련 대사관을 찾아갔으나, 대사관 측이 처음에는 받아주지 않다가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주었다고 전했다.[28] 북한은 사람을 보내 최창익이 사건을 선동했다고 알렸지만, 소련은 계속 그를 옹호하였다.

이후 최창익은 같은 연안파인 김두봉, 장안파 계열인 최익한 등과 함께 반당종파행위라는 죄목으로 1957년 9월 1일 제명 및 숙청되어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다. 사형 선고가 내려지고 형 집행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중국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 등의 반대[29]로 사형은 모면하고 수감되었으며, 당 중앙위원 신분은 유지되었다.

1957년 10월 문화선전성 문화유물보존관리국장으로 강등되었으나[29], 다시 투옥되어 평양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사망 당시 향년 61세였다.

3. 사상과 신념

그는 해방 이후 오랫동안 한반도가 황폐화된 것이 전적으로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탓이라고 규정했다. 1946년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경제적 영향을 분석하면서 "일본 침략자본 세력의 급속한 총체적 파괴 과정에서 조선 경제는 대부분의 조선민중을 프롤레타리아로 만들었다"고 말했다.[17] 당시 조선 백성들이 가난을 면치 못하는 것은 일제와 총독부의 가혹한 수탈과 세금 독촉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을 통해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이 깨어났다"며 그는 조선에서 계급투쟁의 언어는 곧 반식민주의 민족투쟁의 언어라고 주장했다.[17]

4. 가족 관계



: 허정숙과 결혼했으나 후에 이혼했다.[9] 김일성을 맹렬하게 공격한 탓에 그의 가족들은 평양에서 쫓겨나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소련에 유학 중이던 손자 최원도와 아들 최동국은 귀국하지 않고 계속 소련에 머물렀다.[30][31] 1949년 당시 최창익의 아들은 스베르들롭스크에서 법을 공부하고 있었고,[30] 손자 최원도는 타슈켄트에서 농업을 공부하고 있었다.[31]

5. 평가와 비판

최창익은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 건설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이자, 김일성의 권력 독점에 저항한 민주주의적인 인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26] 그러나 기회주의자, 종파주의자라는 비판과 함께,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거부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33]

북한의 작가 천세봉은 그의 소설 '조선의 봄'에서 최창익을 기회주의자로 묘사했다.[20] 이청원은 최창익이 맑스-레닌주의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고, 민족 해방 운동에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확립하지 못한 소부르주아라고 비판했다.[26]

6. 기타

석윤기는 자신의 소설 《봄우뢰》에서 최창익이 '안영호의 애인을 빼앗아 도피한 후 그녀를 버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내용을 언급하였다.[20]

참조

[1] 서적 Tyranny of the weak Cornell University Press 2013-07
[2] 웹사이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16-12-14
[3] 웹사이트 http://kpsa.or.kr/mo[...] 2024-05 # dead link date
[4] 웹사이트 최창익 http://terms.naver.c[...] 2016-12-14
[5] 서적 岩波小辞典 現代韓国・朝鮮
[6] 서적 Tyranny of the weak Cornell University Press 2013-07
[7] 서적 岩波小辞典 現代韓国・朝鮮
[8] 서적 岩波小辞典 現代韓国・朝鮮
[9] 서적 岩波小辞典 現代韓国・朝鮮
[10] 서적 송건호전집 3 한길사 2002
[11] 서적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 서해문집 2008
[12] 서적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 서해문집 2008
[13] 서적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시대의창 2005
[14] 서적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 서해문집 2008
[15] 서적 조선로동당연구 역사비평사 2006
[16] 서적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 서해문집 2008
[17] 서적 북조선 탄생 서해문집 2006
[18] 뉴스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48-09-11
[19] 서적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 역사비평사 2000
[20] 서적 총서 불멸의 역사와 북한문학 깊은샘 2008
[21] 서적 인간중심철학과 한국의 민주주의 시대정신 2009
[22] 서적 인간중심철학과 한국의 민주주의 시대정신 2009
[23] 서적 북한 민족주의운동 연구 역사비평사 2008
[24] 서적 북한체제의 형성과 한반도 국제정치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25] 서적 김정일 정권과 한반도 장래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5
[26] 서적 북한의 역사 만들기 푸른역사 2003
[27] 서적 북한의 역사 만들기 푸른역사 2003
[28] 서적 북한 민족주의운동 연구 역사비평사 2008
[29] 뉴스 동아일보 1957-10-14
[30] 서적 북조선 탄생 서해문집 2006
[31] 서적 북조선 탄생 서해문집 2006
[32] 기타 # 추가 정보가 없어서 기타로 분류
[33] 서적 총서 불멸의 역사와 북한문학 깊은샘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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