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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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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익훈은 1619년에 태어난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김반의 아들이자 김장생의 손자이다.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특히 숙종 때 인경왕후의 종조부로서 권력을 얻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신대출척을 주도하여 남인을 축출하는 데 기여했으나, 남인 제거를 시도하며 서인 내부 갈등을 겪었다. 1689년 남인에게 살해당했으며, 사후 복권되었으나 소론 집권으로 다시 추탈되기도 했다. 1760년 영조 때 최종 복권되었고, 1871년 충헌공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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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익훈
한자 이름金益勳
김익훈의 묘소(경기도 광주 퇴촌면 무수리 소재)
김익훈의 묘소(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무수리 소재)
무숙(懋叔)
광남(光南)
시호충헌(忠獻)
가계
아버지김반
어머니부여 김씨 측실(생모), 구 안동 김씨 부인(적모), 연산 서씨 부인(계적모), 함양 여씨 측실(서모)
형제김익희(이복 적형), 김익겸(이복 적형), 김익경(동복 아우)
친인척김집(친중부), 김장생(친조부), 김만기(친가 배다른 조카), 김만중(친가 배다른 조카), 인경왕후(친가 배다른 종손녀), 김춘택(친가 배다른 종증손)
배우자정실 신 안동 김씨 부인, 첩실 구 안동 김씨 측실
자녀3남(적장남 김만채, 서차남 김만게, 적삼남 김만선)
경력
주요 경력한성부 서윤
생애
출생1619년, 조선 한성
사망1689년 (향년 71세), 조선 평안도 평양
묘소광남 김익훈 선생 묘(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무수리 산 4-3번지 소재)
군사 경력
복무조선 관군 군사
복무 기간1648년~1683년
지휘조선 충청도 병마절도사
계급조선 순무영 어영대장
직책조선 충청도병마절도사
임기1687년 9월 초순~1689년 2월 말순
임금조선 숙종 이돈
정치 성향
정당서인 후예 성향 노론 세력
기타 정보
분야유교 성리학
거주지조선 한성부
서훈 이조판서

2. 생애

김익훈은 1619년 김반의 아들이자 김장생의 손자로 태어났으며, 광산 김씨(光山金氏) 출신이다.[1] 음서로 관직에 올라 의금부도사, 남원부사 등을 역임했다. 1667년에는 사도시정이 되었다.[2]

1678년 광주부윤을 거쳐 어영대장이 되었고, 전라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1680년 다시 광주부윤으로 재임명되었으나, 이후 파면되었다.

1689년 3월 11일, 남인에게 살해당했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였다.[3]

2. 1. 생애 초기



김익훈은 1619년 김장생의 손자이자 참판을 지내고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김반서얼 출생 아들(서자)이다. 예학자이자 북벌론자이며 효종 때 민회빈 강씨의 사면 복권을 주장하던 신독재 김집의 조카였다. 인경왕후의 조부이자 병자호란 때의 순절신 김익겸(金益兼)은 그의 형이며, 인경왕후의 친정아버지인 김만기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저자 김만중 형제들은 그의 조카였다.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송시열은 이이와 친할아버지 김장생, 둘째 숙부 김집의 학맥을 계승한 서인의 학자이며 성리학, 예학의 권위자였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인조 때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강화도로 피난갔다가, 여진족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김익훈(金益勳)은 1619년에 태어났으며, 광산 김씨(光山金氏) 출신이다.[1]

2. 2. 정치 활동

1675년 남인 홍우원, 허목, 북인 윤휴 등이 예송 논쟁을 빌미로 송시열을 사형시키려 하자, 김익훈은 김석주와 모의하여 남인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수립하였다.[4]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윤휴, 허목, 허적 등 남인을 정계에서 축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남인의 역모를 미연에 방지한 공로가 인정되어 보사공신(保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광남군(光南君)에 책록되었다.[4]

식암 김석주
김익훈과 함께 남인 제거 공작을 주도하였다.

2. 2. 1. 관료 생활

1648년(인조 26) 음보로 출사하여 의금부도사에 제수되고 사옹원 직장을 거쳐 전생서 주부, 1652년(효종 3) 사복시 주부를 지냈다. 이후 사복시판관, 호서, 영남 점마 등 여러 관직을 지내고 현종 때 금부도사, 남원 부사, 사복시의 첨정(僉正), 내승(內乘)을 겸했고 장성부사로 취임,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이후 공조정랑, 한성부 서윤, 군기시첨정, 사도시정 등을 지내고 수원부사로 나갔다. 1653년 내승, 1660년 남원부사를 지냈다.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장악원정, 돈녕부도정을 거쳐 외직인 남원부사, 수원방어사, 광주방어사(廣州防禦使), 충청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이 기간 중 송시열송준길의 예론을 문제삼아 종통과 적통으로 양분하려 한다는 윤선도, 허목 등을 비판, 공격하였다.

1678년(숙종 4년)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부임하였으나 남인의 탄핵을 당했다. 어영대장에 임명되었다가 전라병사로 임명되었으나 또 반대파의 반대로 1680년(숙종 7) 다시 광주부윤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 우윤 겸 부총관이 되었다.[2]

2. 2. 2. 경신대출척과 남인 제거 기도

1675년 남인 홍우원, 허목, 북인 윤휴 등이 예송 논쟁을 빌미로 송시열을 사형시키려 하자, 김익훈은 김석주와 모의하여 남인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수립한다.

1680년(숙종 6) 김석주와 함께, 남인과 왕족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등이 허견과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을 하였다. 이로써 1680년 경신대출척을 일으켜 윤휴, 허목, 허적 등 남인을 정계에서 축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남인의 역모를 미연에 방지한 공로가 인정되어 보사공신(保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광남군(光南君)에 책록되었다.[4]

2. 2. 3. 노소 분당과 기사환국

1689년 송시열, 김수항 등이 숙종의 왕자 균(후일의 경종)의 세자 정호를 반대하다가 기사환국이 발생한다.

후궁 장씨가 왕자를 낳자 남인들은 과거사 청산에 나섰다. 남인 허새·허영 등을 역모로 고변해 죽게 만든 임술고변의 기획자 김석주는 이미 사망했으므로 김익훈이 주요 대상이었다. 남인들은 의금부에 국청을 설치하고 1689년 2월 25일 김익훈 등 6인을 체포해 투옥했다. 고변자 이회는 허새가 화약과 화전(火箭: 불화살)을 주었다고 진술하다가 다섯 차례의 혹독한 형신(刑訊: 형장을 치며 묻는 것) 끝에 “김익훈이 은 100냥을 주어 화약과 화전을 샀다”고 실토했다.[5]

김익훈은 죽은 김석주에게 정치공작의 책임을 전부 떠넘겼으나 끝내 장하(杖下)에서 물고(物故)되었다.[5] 그는 공신호를 빼앗기고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다. 이후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죄명으로 평안도 평양까지 압송되어 추국, 그해 3월 남인 형관으로부터 장형과 고문을 연이어 당하다가 형문을 받던 중 죽었다. 당시 그의 향년 71세였다.

2. 3. 사후

1694년 (숙종 20)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우승지인 김만채가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복권되고 증 이조판서(吏曺判書)가 추증되었다.[3] 그러나 경종이 즉위한 뒤 소론이 집권하면서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 1720년(경종 즉위년) 다시 손자 김진상(金鎭商)이 조부의 억울함을 상소했다가 그해 가을 전라 감사(全羅監司) 한지(韓祉) 등이 반론을 제기하는 등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으나, 곧 묻혀졌다. 이후 영조 때인 1760년 최종 복권되었다.

아들 김만채 등은 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유배되었고, 시신은 가까운 친지들에 의해 장사하고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무수리에 안장되었다. 묘는 처음 임시로 고장(藁葬)하였다가, 복관된 뒤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번천리에 장사했다가, 뒤에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무수리 산 4-3번지에 이장되었다.

1871년(고종 8년) 3월 충헌공(忠獻公)의 시호가 내려졌다.[1]

3. 가계


  • 할아버지 : 김장생
  • 아버지 : 김반
  • 의모(적모) : 김씨, 첨추(僉樞) 김진려(金進礪)의 딸(金氏|김씨|중국어, 1590년 ~ 1611년)
  • * 이복형 : 김익렬(金益烈)
  • * 이복형 : 김익희(金益熙)
  • 의모(계적모) : 연산 서씨(徐氏), 증 참판 서주(徐澍)의 딸(連山 徐氏|연산 서씨|중국어, 1596년 ~ 1637년)
  • * 이복형 : 김익겸(金益兼)
  • 서모 : 아버지 김반의 첩
  • * 이복동생 : 김익후(金益煦)
  • '''생모''' : 아버지 김반의 첩
  • * 동복동생 : 김익경(金益炅, 1629년 ~ 1675년)
  • 부인 : 신 안동 김씨(安東 金氏, ? ~ 1676년) - 김언의 딸
  • * 첫째아들(장남) : 김만채(金萬埰)
  • ** 손자 : 김진항(金鎭恒)
  • ** 손자 : 김진상(金鎭商)
  • * 막내아들 : 김만선(金萬墡)
  • ** 손자 : 김진서(金鎭瑞) - 생부 : 김만기
  • 측실 : 구 안동 김씨 첩실
  • * 둘째아들(서자) : 김만게(金萬垍)
  • 장인 : 김언

4. 기타

허영 허새의 옥사가 확대된 사건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서인 유생들은 사태를 확대시킨 김익훈과 김석주의 처벌을 원하였다. 그러나 상경한 송시열이 당초 약속을 뒤집고 김익훈과 김석주의 편을 들면서 실망한 서인 유생들은 윤선거윤증의 편으로 돌아서게 된다.

그의 8대손 김영현의 딸은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서재필의 부인이었다.

5. 김익훈을 연기한 배우

참조

[1] 웹사이트 김익훈(金益勳) http://encykorea.aks[...] 2020-07-07
[2] 웹사이트 Kim Ikhun http://terms.naver.c[...]
[3] 웹사이트 Kim Ik-hun:Korean Historical people's Information http://people.aks.ac[...]
[4]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eoul600.visi[...] 2010-01-03
[5] 웹사이트 http://sunday.jo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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