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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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증은 1629년에 태어나 1714년에 사망한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호는 명재(明齋)이며, 노성 윤씨 가문 출신이다. 그는 김집, 송시열 등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특히 아버지 윤선거의 무실학(務實學)을 계승하여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관을 가졌다. 윤증은 송시열과의 갈등으로 '회니 논쟁'을 겪었으며, 이후 소론의 영수가 되어 노론과 대립했다. 그는 정치 활동보다는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명재유고》, 《명재의례문답》 등의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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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항은 서인 및 노론의 중진으로 예송 논쟁에서 서인 측 입장을 대변하고 영의정을 역임했으나 기사환국으로 유배되어 사사된 조선 시대 문신이다.
윤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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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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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름 | 윤증 |
한자 이름 | 尹拯 |
로마자 표기 | Yun Jeung |
출생 | 1629년 |
사망 | 1714년 |
본관 | 파평 윤씨 |
학문 및 사상 | |
학문 분야 | 성리학 |
주요 저서 | 명재유고 |
활동 | |
주요 활동 | 조선 후기 성리학자, 교육자 |
스승 | 송시열 |
학문적 특징 | 예송논쟁에서 스승인 송시열과 대립 |
정치적 입장 | 서인 내에서도 소론의 중심 인물 |
가족 관계 | |
부친 | 윤선거 |
친척 | 윤휴 |
기타 | |
영향 | 조선 후기 사상계에 큰 영향 |
2. 생애
윤증은 1629년 정선방(貞善坊, 현재 종로구)에서 태어났다.[4] 1642년, 산에서 아버지에게서 성리학을 공부했다.[5]
1669년 아버지 윤선거가 세상을 떠나자, 남인계 인사들이 윤선거의 빈소를 찾아와 조문했다. 이때 윤증은 남인 윤휴의 조문을 받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송시열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9]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남긴 편지 중 송시열에게 허목, 윤휴와 화해하라는 권고가 담긴 편지를 송시열에게 전했다. 그는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이자 스승인 송시열 사이에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9]
1674년 (현종 15년) 인선왕후가 사망하며 발생한 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이 승리하면서 송시열, 김수항 등은 관직을 잃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윤증은 남인과의 친분 덕분에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9]
숙종 초, 송시열 일파가 남인에게 화를 입었을 때, 윤증은 장인 권시가 남인인 점과 아버지 윤선거를 옹호한 윤휴 등과의 인연으로 처벌을 면했다. 이 일로 송시열은 윤증을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9]
윤선거가 죽은 후, 윤증은 송시열에게 묘지명을 부탁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혼자 살아남은 일을 비꼬는 내용을 묘지명에 썼다. 윤증은 여러 차례 수정과 삭제를 요구했지만 송시열은 거절했다. 이 일로 윤증은 송시열을 비판하며 사제 관계를 끊었고, 이 사건은 '회니시비'로 불리게 되었다.[9]
이후 김익훈, 김석주가 남인을 몰아내기 위해 역모를 조작한 사건에 대한 처벌 문제와 남인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뉠 때, 윤증은 소론에 가담하여 영수로 추대되었다. 그는 송시열을 "의와 이를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같이 쓴다"고 비판했다.[9]
윤증은 윤휴가 윤선거를 추모하는 글을 보냈을 때, 그 내용이 윤선거를 우유부단하다고 조롱하는 것이었기에 윤휴와 절교했다. 이후 윤휴가 장희빈 편에 서자 그를 사악하다고 비난했다.[9]
외척 김석주와 김익훈 등이 허새의 옥사를 조작하여 남인을 몰살하려 하자,[11] 윤증은 김익훈 처벌과 남인에 대한 사과를 주장했다.[11]
1680년 (숙종 6년) 박세채 등이 출사를 권했지만, 윤증은 세도 교체, 외척의 정치 간섭 금지, 김익훈과 김석주 처벌, 서인의 남인에 대한 사과와 원한 해소를 출사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 일로 송시열의 문하 동문인 최신과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최신이 송시열의 무죄를 주장하며 윤증의 사적인 편지를 공개하여 스승을 배반했다는 논란이 일었다.[9]
경신환국 이후 남인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온건론을 주장하며 소론의 영수가 된 윤증은 강경 처벌을 주장하는 송시열의 노론과 대립하였다. 1683년(숙종 9년) 임금의 부름을 받고 과천까지 갔으나 나량좌의 집에서 박세채에게 3대 명분론을 제시하고 귀향하였다. 이후에도 사헌부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후학 양성과 교육에 힘썼다.[1]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했을 때, 윤증은 온건론을 주장한 점이 참작되어 처벌을 면했다. 그러나 인현왕후 폐출에 심히 분개하였으며, 갑술옥사 때는 남인에 대한 온건론이나 화합론을 거두었다. 그는 직접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으나 소론의 영수로서 막후에서 소론 계열을 지원하였다.
권상하는 송시열을 공격한 회니시비의 주인공인 동문 윤증에게 적대적이었다. 1715년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와 유계의 공저였으나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유계의 손자 유상기 사이에 각자 자신의 조상이 단독으로 쓴 책이라며 저작자 논쟁을 일으켰다. 이때 권상하는 서문을 써주면서 유계의 저술이라고 하여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러자 권상하는 윤증이 스승을 배신(배사)하였다며 그를 공격하였다.
회니시비 이후 윤증을 공격했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권상하는 가례원류 사건 이후로 윤증과 원수가 되었다.
그 뒤 송시열의 비문을 지으면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는 내용을 비문에 기록하였다.[12] 이는 소론계 유생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노론에서는 그를 스승을 배신한 자로 몰아 계속 공격을 가하였다.
1710년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어 한성부에 입경하여 사은숙배한 뒤 다시 고향 노성으로 내려갔고, 1714년 1월 30일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86세였다. 그가 죽자 숙종은 직접 하교를 내려 애도했다.[13]
2. 1. 출생과 가계
1629년 한성부 정선방(貞善坊, 현재 종로구)에서 태어났다.[4] 할아버지는 윤황(尹煌),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할머니는 창녕 성씨로 서인(西人)이자 성리학의 대학자 우계 성혼(成渾)의 딸이었으며, 윤증은 성혼의 진외증손이었다. 윤증이 태어날 무렵 그의 본가는 충청남도 노성에 있었으므로, 노성 출신으로도 본다.윤증의 집안은 노성 윤씨라고도 불린다. 윤증의 고조부 윤돈이 처가가 있는 충청남도 노성에 정착하면서 '노성 윤씨'라는 별명을 얻었다.[6] 파평 윤씨가 노성 지방에 들어온 것은 윤탁의 손자 윤돈 때부터다.
윤돈(尹墩, 1519~1577)은 선대가 장단(長端)에 살았는데, 부모와 함께 서울에 거주하다가 처향인 노성 근방 이산현(尼山縣) 득윤면(得尹面) 당후촌(塘後村)으로 이주하였다. 윤돈의 처는 문화 류씨(文化柳氏)로 이곳에 살던 재지사족이다. 파평 윤씨가 노성에 들어와 재지사족으로 위상이 높아진 것은 윤돈의 손자 대부터다.
노성의 파평 윤씨는 입향조인 윤돈의 손자 윤황(尹煌) 대에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일원이 되었고, 증손인 윤선거의 형제와 종형제에 이르러 기호학맥을 잇는 호서학파(湖西學派)의 큰 맥을 형성하였다. 또한, 무안 박씨(務安朴氏), 광산 김씨(光山金氏), 은진 송씨(恩津宋氏) 등 호서의 명문가와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노성의 파평 윤씨는 학연과 혼인 관계에서 명망 있는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노성의 파평 윤씨가 기호학파에 연원하는 것은 윤황과 그의 동생 윤전이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한 데서 비롯된다. 성혼은 율곡 이이와 함께 기호학파의 종장(宗匠)이다. 성혼은 조선 도학의 도통인 조광조(趙光祖)에 학문의 연원을 두고 있으며, 조광조의 문인인 백인걸(白人傑)과 성수침(成守琛)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성수침은 성혼의 아버지이다. 성혼은 가학을 전수받아 계승하였고, 윤황과 윤전은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윤황은 성혼의 사위가 되었다. 이러한 혈연과 학연은 성혼의 가학이 노성 윤씨 가문으로 전승되는 계기가 되었다.
2. 2. 수학과 청소년기
윤증은 명재라는 호를 썼는데, 나중에는 논산군 이성 유봉 아래에 살면서 '유봉'이라는 호도 사용했다.[8] 처음에는 아버지 윤선거와 유계에게서 배웠다. 할아버지 윤황은 우계 성혼의 사위이자 제자였고, 아버지 윤선거를 통해 성혼의 학맥을 이었지만, 이후 송준길의 문하에도 드나들었으며, 장인인 남인 탄옹 권시와 신독재 김집에게서도 배웠다. 이후 스승 김집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29세 때에는 김집의 권유로 김집의 수제자이자 당시 회천에 살던 송시열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주자대전〉을 배웠다.
(그러나 정견 차이와 아버지 윤선거 비문 등으로 관계가 악화, 절교하게 된다.)
이후 송시열에게도 가르침을 받았으며,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훗날 부친 윤선거의 비문 문제, 김익훈과 김석주의 역모 처리 문제, 그리고 정치적 견해 차이 등으로 송시열과 크게 다툰 뒤 관계를 끊었다. 송시열 역시 그의 스승이었기에, 이 일은 노론과 남인 양쪽에서 그를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당색으로는 서인 가문 출신이었지만, 한때 장인이자 남인인 권시의 문하에도 드나들며 공부했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서인 사대부와 부녀자들은 모두 자결을 선택했고, 그의 어머니 공주이씨 역시 자결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윤선거는 혼자 피신해 있다가 살아남았고, 이는 아들인 윤증에게도 멍에가 되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윤증은 1629년 정선방(현재 종로구)에서 태어났다.[4] 1642년, 그는 산에서 아버지에게서 성리학을 공부했다.[5]
2. 3. 정치 활동
1669년 아버지 윤선거가 세상을 떠나자, 남인계 인사들이 윤선거의 빈소를 찾아와 조문했다. 이때 윤증은 남인 윤휴의 조문을 받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송시열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남긴 편지 중 송시열에게 허목, 윤휴와 화해하라는 권고가 담긴 편지를 송시열에게 전했다. 그는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이자 스승인 송시열 사이에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송시열은 윤증의 뜻을 높이 평가하여 처음에는 윤선거의 편지를 읽고도 불쾌감을 숨겼지만, 뒤늦게 윤증이 윤휴의 조문을 받은 것을 알고는 몹시 불쾌해했다.[9]1674년 (현종 15년) 인선왕후가 사망하며 발생한 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이 승리하면서 송시열, 김수항 등은 관직을 잃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윤증은 남인과의 친분 덕분에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9]
숙종 초, 송시열 일파가 남인에게 화를 입었을 때, 윤증은 장인 권시가 남인인 점과 아버지 윤선거를 옹호한 윤휴 등과의 인연으로 처벌을 면했다. 이 일로 송시열은 윤증을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9]
윤선거가 죽은 후, 윤증은 송시열에게 묘지명을 부탁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혼자 살아남은 일을 비꼬는 내용을 묘지명에 썼다. 윤증은 여러 차례 수정과 삭제를 요구했지만 송시열은 거절했다. 이 일로 윤증은 송시열을 비판하며 사제 관계를 끊었고, 이 사건은 '회니시비'로 불리게 되었다.[9]
이후 김익훈, 김석주가 남인을 몰아내기 위해 역모를 조작한 사건에 대한 처벌 문제와 남인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뉠 때, 윤증은 소론에 가담하여 영수로 추대되었다. 그는 송시열을 "의와 이를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같이 쓴다"고 비판했다.[9]
윤증은 윤휴가 윤선거를 추모하는 글을 보냈을 때, 그 내용이 윤선거를 우유부단하다고 조롱하는 것이었기에 윤휴와 절교했다. 이후 윤휴가 장희빈 편에 서자 그를 사악하다고 비난했다.[9]
외척 김석주와 김익훈 등이 허새의 옥사를 조작하여 남인을 몰살하려 하자,[11] 윤증은 김익훈 처벌과 남인에 대한 사과를 주장했다.[11]
1680년 (숙종 6년) 박세채 등이 출사를 권했지만, 윤증은 세도 교체, 외척의 정치 간섭 금지, 김익훈과 김석주 처벌, 서인의 남인에 대한 사과와 원한 해소를 출사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 일로 송시열의 문하 동문인 최신과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최신이 송시열의 무죄를 주장하며 윤증의 사적인 편지를 공개하여 스승을 배반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윤증을 천거한 김수항, 민정중 등도 윤증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송시열을 비난했다고 비판했다.[9]
2. 3. 1.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그는 일찍이 김집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김집이 송시열이 주자학에 정통하니 나중에 그에게 배우라고 함에 따라 윤증은 29세 되던 해에 송시열에게 사사하여 주자대전 등을 배웠다.[8] 효종 말년에 학업과 행실이 뛰어나다는 명목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8]에 제수되었다.첫 스승 김집이 죽자 이후 송시열의 문하에 출입하며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아버지 윤선거는 송시열의 학문적 재주는 뛰어나지만 병통과 치우침이 강하므로 주의하라 당부하기도 하였다.
이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심전력하여, 스승인 송시열, 권시 등을 찾아 학문을 담론하는 한편 황산서원(黃山書院)에서 주자서를 강학하는 등 벼슬보다는 주로 학문과 교육에 뜻을 두었다. 1663년(현종 4) 천거되어 내시교관이 되었으나 사퇴했다. 1664년(현종 5년) 다시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세자익위사 익찬(翊贊), 집의(執義)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2. 3. 2. 정계 입문과 예송 논쟁
1669년 아버지 윤선거가 죽자 남인계 인사들도 윤선거의 빈소를 찾아와 조문했다. 부친상 때 윤증은 남인 윤휴(尹鑴)의 조문을 받았는데, 이 사실을 전해들은 송시열은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남긴 편지 중 송시열에게 허목, 윤휴에게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밀라는 권고를 적은 편지를 스승 송시열에게 전달하였다. 군사부일체의 의리를 확신한 그는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스승 간에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 하에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가 남긴 편지를 전달했다. 윤증의 뜻을 높이 평가한 송시열은 처음에 윤선거의 편지를 읽고도 불쾌감을 숨겼다. 그러나 뒤늦게 그가 윤휴의 조문을 받은 것을 알게 되자 심히 불쾌해하였다.이후 공조랑·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74년(현종 15)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발생한 2차 예송 논쟁에서 남인이 승리하면서 송시열, 김수항 등은 삭탈관작당하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때 윤증은 남인들과의 친분관계로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숙종 초에 송시열 일파가 남인에게 화를 입었을 때 윤증은 그의 장인 권시가 남인인 것과 아버지 윤선거를 비호, 두둔한 윤휴 등과의 관계 등 남인과의 인연관계로 처벌을 면한 일로 해서 더욱 송시열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 숙종 즉위 이후에도 호조참의·대사헌·우참찬·좌찬성·우의정·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2. 3. 3. 회니 논쟁과 소론의 영수
병자호란 때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혼자 살아나온 것을 송시열이 그의 묘비명에 비꼬는 내용을 쓰자, 윤증은 여러 차례 수정과 삭제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일로 윤증은 스승 송시열을 비판하며 사제 관계를 끊었고, 이 사건은 두 사람의 거주지(송시열은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 윤증은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를 따서 '회니논쟁'으로 불린다.[9]이후 남인을 몰아내기 위해 역모를 조작한 김익훈, 김석주에 대한 처벌 문제와 남인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서인이 강경파(노론)와 온건파(소론)로 나뉠 때, 윤증은 소론에 가담하여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그는 송시열을 "의와 이를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같이 쓴다"고 비판했다.[9]
1674년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고, 숙종 초 송시열 일파가 남인에게 피해를 입을 때 윤증은 남인과의 인연으로 화를 면하여 송시열의 의심을 샀다. 윤증은 해명했지만 서인들은 믿지 않았다.
윤증은 윤휴가 윤선거를 추모하는 글을 보냈을 때, 그 내용이 윤선거를 우유부단하다고 조롱하는 것이었기에 탄식하며 윤휴와 절교했다. 이후 윤휴가 장희빈 편에 서자 그를 사악하다고 비난했다.
외척 김석주와 김익훈 등이 허새의 옥사를 조작하여 남인을 몰살하려 하자,[11] 윤증은 김익훈 처벌과 남인에 대한 사과를 주장했다.
1680년 (숙종 6) 박세채 등이 출사를 권했으나, 윤증은 세도가 교체, 외척의 정치 간섭 금지, 김익훈과 김석주 처벌, 서인의 남인에 대한 사과와 원한 해소를 출사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 일로 송시열의 문하 동문인 최신과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최신이 송시열의 무죄를 주장하며 윤증의 사적인 편지를 공개하여 스승을 배반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윤증을 천거한 김수항, 민정중 등도 윤증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송시열을 비난했다고 비판했다. 1680년 사헌부집의를 거쳐 성균관 사업이 되었다가 그해 말 다시 사헌부집의가 되었다.
1682년 호조참의를 거쳐 1683년 행 호군으로 전임되었다가 사직하였으나 다시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윤증의 송시열과의 절교는 배사(背師) 문제로 확대되어 노론·소론 간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송시열은 유교적 도덕정치를 내세웠으나, 훈척인 김익훈, 김석주를 옹호하여 명분을 잃었고, 윤증을 내세운 소론은 명분을 고수하려 했다.
2. 3. 4. 송시열, 윤휴와의 갈등
1669년 아버지 윤선거가 죽자 남인계 인사들도 윤선거의 빈소를 찾아와 조문했다. 부친상 때 윤증은 남인 윤휴(尹鑴)의 조문을 받았는데, 이 사실을 전해들은 송시열은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남긴 편지 중 송시열에게 허목, 윤휴에게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밀라는 권고를 적은 편지를 스승 송시열에게 전달하였다. 군사부일체의 의리를 확신한 그는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스승 간에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하에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가 남긴 편지를 전달했다. 윤증의 뜻을 높이 평가한 송시열은 처음에 윤선거의 편지를 읽고도 불쾌감을 숨겼으나, 뒤늦게 그가 윤휴의 조문을 받은 것을 알고 심히 불쾌해하였다.1674년(현종 15)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발생한 2차 예송 논쟁에서 남인이 승리하면서 송시열, 김수항 등은 삭탈관작당하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때 윤증은 남인들과의 친분관계로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숙종 초에 송시열 일파가 남인에게 화를 입었을 때 윤증은 그의 장인 권시가 남인인 것과 아버지 윤선거를 비호, 두둔한 윤휴 등과의 관계 등 남인과의 인연관계로 처벌을 면한 일로 해서 더욱 송시열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
윤선거가 죽자 그의 아들이자 우암 송시열의 제자인 윤증은 묘지명을 친히 그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윤선거의 피난을 못마땅히 여기며 비꼬았고, 이는 회니시비의 원인이 된다. 한편 그는 생전의 윤선거에게 윤휴와 절교할 것을 여러번 권고하였다. 그러나 윤선거는 윤휴와 계속 만났고, 윤휴는 나중에 아버지를 추도하는 제문이라며 윤증에게 추도사를 보낸다.
송시열과의 관계상 받지 않으려다 받았지만, 내용은 윤선거가 우유부단하다고 조롱하는 내용이었으므로 윤증은 윤휴의 추도사를 받고 탄식했다 한다. 이후 윤휴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윤휴가 허목 등과 함께 장희빈의 편을 들게 되자 그를 사악한 인물이라며 비난하였다.
외척 김석주와 김익훈 등이 역모를 날조하여,[11] 남인을 일망타진할 목적으로 허새의 옥사를 조작하자 그는 김익훈의 처벌을 주장하고, 이어 남인에 대한 사과를 주장하였다.
1680년(숙종 6) 학덕으로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어 김수항·민정중 등이 윤증에게 경연에 나오도록 청하고, 박세채·조지겸 등이 거듭 출사를 권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이때 그는 송시열, 김석주, 김익훈, 김만기, 민정중, 민유중 등의 세도가 바뀌어야 하고, 외척이 정치에 간섭하지 않아야 되며, 남인의 역모를 날조한 김익훈, 김석주 등을 처벌해야 되며, 역모를 날조한 것에 대한 서인 측의 사과와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풀어져야만 출사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일로 한때 송시열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동문 최신(崔愼)에게 편지를 주고 받았으나, 최신이 자신의 스승 송시열의 죄 없음을 변명한다는 핑계로 윤증이 보낸 사서(私書)를 공개하면서 그가 스승을 배반했다고 했으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그를 천거한 김수항, 민정중 등도 윤증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스승을 배신하고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비난했다.
송시열과는 사적으로도 인척관계였다.[14] 송시열은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와 개인적으로 친구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윤선거 혼자 빠져나온 강화도 사건을 계기로 윤선거를 경멸하면서 윤선거와의 관계가 멀어진다. 이는 윤증과의 관계 악화로까지 이어져 회니논쟁과 노론, 소론 분당의 원인이 된다.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고, 윤선거는 송시열의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그런데 윤선거의 할아버지 윤창세는 윤황과 윤전 형제와 딸 1명을 두었는데, 윤창세의 사위인 은진송씨 송희조는 송시열의 5촌 당숙이 된다. 또, 윤창세의 아들 윤전의 딸이 사촌 형 송시형과 결혼한다. 송시열의 사촌 형수는 윤선거의 사촌 누이가 되고, 송시열의 당숙모는 윤선거의 고모였다.
윤황은 윤문거와 윤선거 형제를 두는데, 윤문거의 아들 윤박이 송시열의 딸과 결혼하였다.[15] 윤선거의 손자이자 윤증의 아들 윤행교는 다시 은진송씨 송기후의 딸과 결혼하는데, 송기후는 송시열의 5촌 조카이자, 사촌동생 송시염의 아들이다.
백호 윤휴 역시 그의 사돈이었다. 윤증의 할아버지 팔송 윤황의 딸이 권준과 결혼했는데 권준은 경주 부윤 권첩의 아들이다. 권첩의 넷째 딸이자 고모부 권준의 누이동생이 백호 윤휴와 결혼하였다.
2. 4. 생애 후반
경신환국 이후 남인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온건론을 주장하며 소론의 영수가 된 윤증은 강경 처벌을 주장하는 송시열의 노론과 대립하였다. 1683년(숙종 9년) 임금의 부름을 받고 과천까지 갔으나 나량좌의 집에서 박세채에게 3대 명분론을 제시하고 귀향하였다. 이후에도 사헌부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후학 양성과 교육에 힘썼다.[1]1684년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1]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했을 때, 윤증은 온건론을 주장한 점이 참작되어 처벌을 면했다. 그러나 인현왕후 폐출에 심히 분개하였으며, 갑술옥사 때는 남인에 대한 온건론이나 화합론을 거두었다. 그는 직접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으나 소론의 영수로서 막후에서 소론 계열을 지원하였다. 1695년 의정부우참찬을 거쳐 1701년 의정부좌찬성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1]

권상하는 특히 송시열을 공격한 회니시비의 주인공인 동문 윤증에게 적대적이었다. 1715년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와 유계의 공저였으나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유계의 손자 유상기 사이에 각자 자신의 조상이 단독으로 쓴 책이라며 저작자 논쟁을 일으켰다. 이때 권상하는 서문을 써주면서 유계의 저술이라고 하여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러자 권상하는 윤증이 스승을 배신(배사)하였다며 그를 공격하였다.
회니시비 이후 윤증을 공격했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권상하는 가례원류 사건 이후로 윤증과 원수가 되었다.
그 뒤 송시열의 비문을 지으면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는 내용을 비문에 기록하였다.[12] 이는 소론계 유생 유규 등 8백여 명의 성균관 소론계 유생들에게 비판을 받았고, 사간원대사간 이관명, 홍문관수찬 어유구 등 소론 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았으나 권상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2] 오히려 노론에서는 그를 스승을 배신한 자로 몰아 계속 공격을 가하였다.
2. 4. 1. 사직과 은둔
경신환국 후 남인을 처벌하는 데 있어서 온건론을 주장하는 소론의 영수가 되어 강경 처벌을 주장하는 송시열의 노론과 싸웠다. 1683년(숙종 9년) 임금의 부름으로 과천까지 왔으나 나량좌의 집에서 박세채에게 3대 명분론을 제시하고 귀향하였다. 이후에도 사헌부대사헌 등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나아가지 않았으며 후학 양성과 교육에 힘을 쏟았다.[1]1684년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나가지 않았다.[1]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했을 때는 이와 같은 점이 참작되어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현왕후 폐출에 심히 분개하였으며, 갑술옥사 때는 남인에 대한 온건론이나 화합론을 거둔다. 그는 출사하지는 않았으나 소론의 영수로서 막후에서 소론계열을 지원하였다. 1695년 의정부우참찬을 거쳐 1701년 의정부좌찬성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1]
2. 4. 2. 권상하, 노론과의 갈등
경신환국 이후 남인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온건론을 주장하며 소론의 영수가 된 윤증은 강경 처벌을 주장하는 송시열의 노론과 대립하였다. 1683년(숙종 9년) 임금의 부름을 받고 과천까지 갔으나 나량좌의 집에서 박세채에게 3대 명분론을 제시하고 귀향하였다. 이후에도 사헌부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후학 양성과 교육에 힘썼다.1684년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했을 때, 윤증은 온건론을 주장한 점이 참작되어 처벌을 면했다. 그러나 인현왕후 폐출에 심히 분개하였으며, 갑술옥사 때는 남인에 대한 온건론이나 화합론을 거두었다. 그는 직접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으나 소론의 영수로서 막후에서 소론 계열을 지원하였다. 1695년 의정부우참찬을 거쳐 1701년 의정부좌찬성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권상하는 특히 송시열을 공격한 회니시비의 주인공인 동문 윤증에게 적대적이었다. 1715년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와 유계의 공저였으나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유계의 손자 유상기 사이에 각자 자신의 조상이 단독으로 쓴 책이라며 저작자 논쟁을 일으켰다. 이때 권상하는 서문을 써주면서 유계의 저술이라고 하여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러자 권상하는 윤증이 스승을 배신(배사)하였다며 그를 공격하였다.
회니시비 이후 윤증을 공격했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권상하는 가례원류 사건 이후로 윤증과 원수가 되었다.
그 뒤 송시열의 비문을 지으면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는 내용을 비문에 기록하였다.[12] 이는 소론계 유생 유규 등 8백여 명의 성균관 소론계 유생들에게 비판을 받았고, 사간원대사간 이관명, 홍문관수찬 어유구 등 소론 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았으나 권상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2] 오히려 노론에서는 그를 스승을 배신한 자로 몰아 계속 공격을 가하였다.
2. 5. 최후
1710년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어 한성부에 입경하여 사은숙배한 뒤 다시 고향 노성으로 내려갔고, 1714년 1월 30일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86세였다. 그가 죽자 숙종은 직접 하교를 내려 애도했다.[13]숙종은 그의 부고 후 조회를 파하고 애도하였으며, 친히 조시(弔詩)를 지어 보냈고, 2300여 명의 문상객이 방문했다 한다.
3. 사상과 학문
윤증은 평생 재야의 선비로 살면서 자신의 학문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는 이론 탐구보다 실천을 중시한 가학(家學)의 영향으로 보인다. 윤증의 사상은 《명재유고》 등 제자들의 기록과 편지글에 나타난 무실학(務實學)에서 찾을 수 있다.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은 현실과 타협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한 반면,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은 명분을 중시했다는 견해가 있다. 윤증이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스승 송시열과 대립한 것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6]
3. 1. 가학적 연원
윤증의 집안은 노성 윤씨라고도 불린다. 윤증의 고조부인 윤돈이 처가가 있는 충청남도 노성에 정착하면서 '노성 윤씨'라는 별칭을 얻었다.[6]파평 윤씨가 노성에 정착하여 재지사족(在地士族, 그 지역에 기반을 둔 양반 가문)으로 성장한 것은 윤돈의 손자 윤황(尹煌) 대에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속하면서부터이다. 윤황의 후손들은 호서학파(湖西學派)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고, 광산 김씨(光山金氏), 은진 송씨(恩津宋氏) 등 호서 지역의 명문가와 혼인 관계를 맺으며 학문적,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가문으로 성장했다.
노성 파평 윤씨가 기호학파와 연결되는 것은 윤황과 그의 동생 윤전이 성혼의 제자로 공부하면서부터이다. 성혼은 조광조(趙光祖)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받은 인물로, 그의 가르침은 윤황을 통해 노성 윤씨 가문에 전해졌다.
조선 성리학은 이황 · 이이 이후 영남 · 기호학파로 나뉜다. 기호학파는 성혼과 이이를 중심으로 기호 지방에 퍼져나갔지만, 점차 연산(連山) · 회덕(懷德) · 노성(魯城)으로 중심지가 옮겨졌다. 이 지역의 기호학파는 예학(禮學)을 중요시하고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을 강조했으며, 서인(西人) 정파에 속했다.[7]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지만,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 정치적 견해 차이 등으로 송시열과 갈등을 겪고 결국 절교했다.
윤증은 김집, 유계, 송시열, 송준길 등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웠지만, 그의 학문적 기반은 윤황, 윤선거로 이어지는 가학(家學,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학문)이었다. 특히 아버지 윤선거는 실심(實心), 실공(實功), 실덕(實德)을 강조하는 무실학(務實學, 실질적인 학문)을 중시했는데, 이는 윤증의 학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성혼의 학문은 아버지 성수침(成守琛)을 통해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진다. 윤황이 성혼의 제자가 된 것은 고조부 윤탁(尹倬)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와 교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16]
성혼은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인심도심(人心道心)에 대해 이황과 이이의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다.[17] 이황은 사단과 칠정, 인심과 도심을 이(理)와 기(氣)로 나누어 설명하고 이(理)의 우위를 강조했지만, 이이는 사단과 칠정 모두 기(氣)로 나타나지만 이(理)가 작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성혼은 이황의 이분법적 설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이(理)와 기(氣)가 각각 발현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만 동의했다. 그는 마음이 나타난 후에야 이(理)와 기(氣)를 정의할 수 있다고 보아, 이황의 도덕적 가치 강조와 이이의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론을 절충했다.[20] 윤증 또한 이러한 절충적 입장을 따랐다.
성혼은 학문 방법으로 강학(講學, 지속적인 공부), 성찰(省察,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고침), 지경(持敬, 마음가짐을 바로잡음)을 제시했다. 이는 윤증과 윤선거의 실심을 세우고 실공을 실천하는 무실학과 연결된다.[21]
윤선거는 윤황을 통해 성혼의 학문을 접하고, 김집의 제자로서 이이의 학문에도 영향을 받았다. 그는 예학(禮學)을 중시하여 예에 맞는 행동이 인욕(人慾)을 막고 천리(天理)를 알게 한다고 보았다. 윤증 역시 예학을 중요하게 여겼다.[22] 윤선거는 실심(實心)을 강조하여, 실심이 없으면 예를 배워도 형식에 그칠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실심을 바탕으로 실천을 통해 이치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3. 2. 무실학
윤선거가 말한 실심과 실공을 통한 학문을 무실학이라고 한다. 실심은 마음을 세우는 것(입지, 入志)이며, 실공은 실심을 위해 독서와 실천으로 공부하는 것을 뜻한다. 실심과 실공은 모두 성리학에서 말하는 성(性)을 찾기 위한 방법이다. 윤증은 독서를 통해 옛 성현의 가르침을 받고, 매사에 독서한 내용을 상기하고 때에 맞게 실천해야 깨닫는 것이 있으며, 나날이 깨닫는 것이 쌓이면 자연스레 이치를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실심과 실공으로 이치를 구했다면 그것이 바로 실덕이다.무실은 자기 수양에서 끝나지 않는다. 수양을 통해 덕을 갖추었을 때 이를 세상으로 향하게 한다면 그것이 실학(實學)이다. 개개인이 마음을 바로 세우고 예를 공부하고 이를 실천하여 이치를 안다면 세상 또한 바른 이치로 흘러간다는 내용이다. 실덕(實德)에서 실학으로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논어》 〈이인里仁〉편에서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必有隣)’라고 하였다. 덕이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질 때 비로소 덕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무리를 이루게 되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실이란 실심과 실공 이후 실질적인 쓸모와 실용성을 거둘 수 있어야 한다.
무실학에서 말하는 실심과 실공은 성(性)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데, 성을 천리(天理)로 보는 《중용》의 가르침 이후 성을 구하기 위해 학문과 수양을 하는 것이 성리학자들의 목표였다. 실에 힘쓴다는 뜻의 무실이란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학문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혼과 이이, 이황의 이론을 살펴보았듯이 이전의 성리학자들은 성(性)을 탐구함에 있어서 사람의 본성과 우주적 본질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이론적 탐구에 몰두 하였다. 윤증은 독자적인 이론을 내세우기 보다는 해명된 이론을 받아들여 이해하고 습득하는데 몰두 하였다.
예를 들어 윤증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도심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이이의 학설이 아닌 성혼의 쪽을 입장을 바꾼다. 성을 향해 발현한다면 비록 발현 한 것이 기이지만 이 또한 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이이와 성혼 양 쪽의 학설을 모두 이용하고 있다.[23] 인심도심설에서도 인욕(人慾)이라는 용어를 추가하여 도심뿐만 아니라 인심 또한 본연의 성으로 인식한다. 인심은 선천적인 인간의 육체적 욕구이며, 성인이던 소인이던 모두가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천리에 속하며 선하다고 보았다. 다만 인심이 지나칠 경우는 바로 인욕으로 보았으며 이를 절제해야 한다고 보았다.[24]
성혼에서 윤증으로 이어지는 학문은 실천하는 학문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으며 이를 실학이라고 보았다. 몸과 마음을 바르게 유지하는 것과 이를 통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도(道)를 구하려는 실천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무실학이 조선 후기 실용주의 학문으로 정의되는 실학과는 세세한 차이가 있더라도 잦은 전쟁으로 휘청이는 나라와 백성에게 도움이 되려는 학문을 하려 했다는 점에서 후대의 실학과 큰 흐름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4. 평가와 비판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墓碣名)을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송시열은 병자호란 당시 친구와 친척, 부인이 모두 순절했는데 윤선거만 홀로 살아나온 것을 두고 윤선거를 경멸하고 멀리했다. 송시열이 지은 윤선거의 묘비명 내용 중 자신은 덕이 부족하여 그 뜻(윤선거가 피신한 뜻)을 알지 못하겠다며 야유하는 뜻을 적자, 윤증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시정이나 삭제를 요구했으나 송시열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로 감정이 상한 윤증이 송시열을 비판함으로써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갈등은 송시열의 집이 회덕(懷德: 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에, 윤증의 집은 이성(泥城: 현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에 있었던 연유로 '회니(懷泥)의 반목', '회니논쟁' 또는 '회니의 사건'이라 부른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역모를 날조한 김익훈, 김석주에 대한 처벌 문제와,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로 서인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리될 때 그는 소론에 가담하였으며, 이후 그를 지지하는 사류(士類)들에 의해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1674년 숙종 즉위 직후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했다. 숙종 초에 송시열 일파가 남인에게 화를 입었을 때 윤증이 남인과의 인연관계로 화를 면하자 송시열은 더욱 그를 의심했다. 이후 송시열은 그를 의심했고, 서인 역시 그를 의심하였다. 그는 이를 해명하였으나 서인들은 그의 해명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는 송시열을 "대인의 의와 소인의 이익을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같이 쓴다"(義利雙行王覇竝用)고 비난했으며,[9] 왕조실록을 기록하는 사국(史局)의 사관들에게도 친히 편지를 보내어 아버지의 일을 변호하고, 다시 이이가 젊어서 불문에 들었던 일을 끌어서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했다. 이이가 입산한 일을 지적하자 서인계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그가 선현을 모독했다고 그를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10]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가 전부 자신에게 있다며 자신의 부덕이라 했으나, 숙종은 듣지 않고 윤증을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이후 서인, 남인계 사림 학자들과 간관(諫官)들 사이에 비난과 변명의 상소가 계속되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 측은 현실과의 일정한 타협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최우선의 의미를 두었던 것이고, 윤증을 내세운 소론 측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명분을 고수하려 했던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스승인 송시열과 감정 대립을 벌인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5. 저서
- 《명재유고》
- 《명재의례문답》
- 《명재유서》
- 명재유고|明齋遺顧한국어
- 명재의례문답|明齋疑禮問答한국어
- 명재유서|明齋遺書한국어
6. 가족 관계
윤증의 집안은 노성 윤씨라고도 불린다. 고조부 윤돈이 처가가 있는 충청남도 노성에 정착하면서 이러한 별칭을 얻었다.[6]
관계 | 이름 | 비고 |
---|---|---|
고조부 | 윤돈(尹暾) | |
증조부 | 윤창세(尹昌世) | |
증조모 | 청주 경씨(淸州慶氏) | 경혼(慶渾)의 딸 |
조부 | 윤황(尹煌) | |
조모 | 창녕 성씨 | 우계 성혼의 딸 |
백부 | 윤훈거(尹勛擧) | |
백부 | 윤순거(尹舜擧) | |
백부 | 윤상거(尹商擧) | |
백부 | 윤문거(尹文擧) | |
숙부 | 윤민거(尹民擧) | |
숙부 | 윤경거(尹耕擧) | |
숙부 | 윤시거(尹時擧) | |
고모 | 윤씨 | |
고숙 | 권준 | 남인 당원, 백호 윤휴의 처남 |
아버지 | 윤선거(尹宣擧) | |
어머니 | 공주이씨 | |
동생 | 윤추(尹推) | 1632년 ~ 1707년 |
누이 | 반남인 박세후(朴世垕)에게 출가 | |
누이 | 전주인 이정여(李正輿)에게 출가 | |
누이 | 안동인 권준(權儁)에게 출가 | |
동생 | 윤발(尹撥) | |
동생 | 윤졸(尹拙) | |
동생 | 윤읍(尹挹) | |
부인 | 권아(權雅) | 1632년 ~, 탄옹 권시의 장녀 |
장남 | 윤행교(尹行敎) | |
차남 | 윤충교(尹忠敎) | |
장녀 | 풍천인 임진영(任震英)에게 출가 | |
진외증조부 | 성혼 | 호는 우계 |
7. 관련 문화재
참조
[1]
서적
The History of Korea
East-West Center Press, Honolulu
[2]
서적
Voice from the North: Resurrecting Regional Identity Through the Life and Work of Yi Sihang (1672–1736)
Stan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Women and Confucian Cultures in Premodern China, Korea, and Japan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4]
웹사이트
조선 후기 윤증(尹拯)의 삶 재조명-2
http://www.blo.co.kr[...]
[5]
웹사이트
윤증
http://encykorea.aks[...]
[6]
서적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위즈덤하우스
[7]
간행물
명재 윤증의 학문연원과 그 학맥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8]
서적
발칙한 조선의 지식인을 만나다
비전비앤피 애플북스
[9]
서적
명재유고
[10]
기타
[11]
일반
[12]
일반
[13]
서적
발칙한 조선의 지식인을 만나다
비전비앤피 애플북스
2009
[14]
일반
[15]
일반
[16]
논문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학문연원(學問淵源)과 그 학맥(學脈)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07
[17]
일반
[18]
일반
[19]
일반
[20]
논문
우계 성혼의 성리설과 조선 후기 절충파
동양철학연구회
2004
[21]
논문
우계 성혼의 도학사상
한국사상문화학회
[22]
논문
미촌 윤선거의 생애와 사상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3]
논문
윤증의 유학과 우계 성혼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4]
논문
명재 윤증의 심학 사상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5]
뉴스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6) ‘반계수록’의 산실을 찾아서 (下)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7-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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