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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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군 전투는 208년 적벽 대전 이후, 조조, 유비, 손권 세력 간에 형주 남군을 차지하기 위해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통칭한다. 적벽 대전에서 승리한 유비-손권 연합군은 조조군을 강릉으로 몰아 남군을 점령하려 했고, 이후 주유는 조조의 장수 조인과 대치하며 남군 공략을 시도했다. 관우는 조인의 북쪽 보급로를 차단했고, 주유는 조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남군을 점령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유비는 형주를 차지하고 세력을 확장했으며, 손권은 형주 지역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조조는 형주 지역의 주요 거점을 상실하며 세력이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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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분쟁 명칭 | 남군 전투 |
부분 | 적벽 대전 |
시기 | 208년 겨울 – 209년 |
위치 | 형주 강릉현, 후베이성, 중국 |
원인 | 알 수 없음 |
영토 | 알 수 없음 |
결과 | 연합군의 부분적 승리 조조, 양양 방어 성공 연합군, 형주 대부분 확보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손권과 유비 |
교전국 2 | 조조 |
지휘관 | |
손권 & 유비군 지휘관 | 주유 정포 한당 여몽 능통 주태 감녕 유비 관우 장비 뇌서 |
조조군 지휘관 | 조인 서황 우금 진교 악진 이통 문빙 |
병력 규모 | |
손권 & 유비군 규모 | 40,000+ |
조조군 규모 | 120,000+ |
피해 규모 | |
손권 & 유비군 피해 | 알 수 없음 |
조조군 피해 | 알 수 없음 |
2. 역사적 배경
장판 전투 이후 유비와 손권은 동맹을 맺고 208년 적벽 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조조는 몇 기의 군사들만 데리고 겨우 근거지인 허창으로 빠져나가 군마를 재정비했고, 이 틈을 타 유비와 손권은 형주를 탈환하기로 결정한다.[1]
적벽 대전에서 대승을 거둔 연합군은 도주하는 조조군을 강릉현으로 몰아 남군을 점령하려는 전략을 실행했다.[4]
적벽 대전 이후 형주는 조조, 유비, 손권 세력에게 분할되었다. 조조는 형주 북부(남양군 등)를 유지했고, 유비는 형주 남부 4군(장사, 영릉, 계양, 무릉)을 점령했다. 손권은 형주 남군 대부분을 차지하고 주유를 남군태수로 임명했으나, 남군의 일부 지역은 여전히 조조의 세력하에 있었다.
2. 1. 적벽 대전
장판 전투 이후 유비와 손권은 동맹을 맺고 208년 적벽 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조조는 몇 기의 군사들만 데리고 겨우 근거지인 허창으로 빠져나가 군마를 재정비했고, 이 틈을 타 유비와 손권은 형주를 탈환하기로 결정한다.[1]적벽 대전에서 대승을 거둔 연합군은 도주하는 조조군을 강릉현으로 몰아 남군을 점령하려는 전략을 실행했다.[4]
2. 2. 형주 분할
적벽 대전 이후 형주는 조조, 유비, 손권 세력에게 분할되었다. 조조는 형주 북부(남양군 등)를 유지했고, 유비는 형주 남부 4군(장사, 영릉, 계양, 무릉)을 점령했다. 손권은 형주 남군 대부분을 차지하고 주유를 남군태수로 임명했으나, 남군의 일부 지역은 여전히 조조의 세력하에 있었다.3. 전투 과정
적벽 대전에서 승리한 주유는 형주 남군을 지키던 조인을 공격하여 형주를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조인은 1년 동안 끈질기게 저항하여, 전투는 장기전으로 이어졌다.[15]
주유는 감녕에게 이릉을 공격하게 했고, 감녕은 이릉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조인은 군사를 보내 감녕을 포위했고, 감녕은 주유에게 위급함을 알렸다.[16] 주유는 여몽의 계책에 따라 능통에게 후방을 맡기고 자신은 여몽과 함께 감녕을 구하러 갔다. 감녕의 포위가 풀린 후, 주유는 강을 건너 북쪽 해안에 주둔하며 조인과 결전을 준비했다.
주유는 직접 전투를 지휘하다가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17] 회복 후 직접 군영을 시찰하며 병사들을 격려했다.
한편, 유비는 주유에게 관우를 보내 북쪽 길을 끊도록 요청했다. 조인의 부하 이통은 관우를 공격하여 조인을 구출하는 등 복잡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조인은 상황이 급해지자 철수를 명했고,[18] 주유는 남군(강릉)을 차지하게 되었다.
3. 0. 1. 주유와 조인의 대치
적벽 대전에서 승리한 후, 주유는 형주 남군을 지키던 조인을 공격하여 형주를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조인은 1년 동안 끈질기게 저항하여, 전투는 장기전으로 이어졌다.[15]주유는 감녕에게 이릉을 공격하게 했고, 감녕은 이릉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조인은 군사를 보내 감녕을 포위했고, 감녕은 주유에게 위급함을 알렸다.[16] 주유는 여몽의 계책에 따라 능통에게 후방을 맡기고, 자신은 여몽과 함께 감녕을 구하러 갔다. 감녕의 포위가 풀린 후, 주유는 강을 건너 북쪽 해안에 주둔하며 조인과 결전을 준비했다.
주유는 직접 전투를 지휘하다가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17] 회복 후 직접 군영을 시찰하며 병사들을 격려했다.
한편, 유비는 주유에게 관우를 보내 북쪽 길을 끊도록 요청했다. 조인의 부하 이통은 관우를 공격하여 조인을 구출하는 등 복잡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조인은 상황이 급해지자 철수를 명했고, 주유는 남군(강릉)을 차지하게 되었다.
3. 0. 2. 관우의 북쪽 봉쇄
유비는 주유에게 관우를 파견하여 조인의 북쪽 보급로를 차단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주유는 유비의 요청을 받아들여 관우에게 2천 명의 병력을 지원했다. 관우는 한수를 따라 북상하여 조인의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으나, 조조의 장수 악진, 문빙, 이통 등의 저항에 부딪혔다.[8][9][10][13][14]3. 0. 3. 조인의 철수
1년 이상 지속된 공방전 끝에, 조인은 보급 문제와 주유의 압박으로 인해 결국 강릉성에서 철수했다.[18] 주유는 남군(강릉)을 점령하고, 손권 세력은 형주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을 확보하게 되었다.3. 0. 4. 주유의 남군 공략
주유는 장흠, 서성, 정봉 등의 장수를 보내 남군을 공격했으나, 조인의 방어에 고전했다. 감녕이 이릉을 점령했으나, 조인의 반격으로 포위되었다. 주유는 능통을 남겨두고 직접 이릉을 구원하러 갔다.[1]주유는 부하 주태를 시켜 기습하게 하고, 조홍, 조순, 우금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군사를 재정비하게 했지만, 주유의 계략에 빠져 크게 패하게 했다. 주유는 남군성 바로 아래까지 추격하여 성문이 열린 것을 보고 곧바로 들어갔으나, 조조의 계략에 빠져 활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1]
서성과 정봉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한 주유는 부상을 치료하고 부하 정보를 시켜 진영의 방비를 단단히 했다. 조인의 부하 우금이 싸움을 걸었으나 응하지 않았고, 조인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주유에게 싸움을 걸자, 주유는 부하 반장을 내보내 맞서게 했으나 부상이 악화되어 쓰러졌다.[1]
주유는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에 속은 조인 등은 진교에게 성을 맡기고 주유의 영채를 습격했지만, 한당, 장흠, 주태, 반장, 서성, 정봉, 진무, 여몽 등에게 역습을 당해 포위되어 궤멸당하고, 조인은 겨우 부하 10명만 데리고 남군성 부근에 당도했다.[1]
감녕의 포위가 풀린 후, 주유는 강을 건너 북쪽 해안에 주둔하고 조인과 결전할 날을 정했다. 주유는 직접 말을 타고 싸움을 지휘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오른쪽 겨드랑이를 맞아 상처가 매우 심했으므로 곧바로 돌아왔다.[2]
조인은 주유가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왔으나, 주유는 직접 일어나서 군영을 시찰하고 관리와 병사들을 격려했다.[2]
3. 0. 5. 제갈량의 계략
주유는 조인과의 전투에서 활을 맞아 부상을 입었으나, 정보에게 진영 방비를 단단히 하도록 지시했다.[1] 우금이 싸움을 걸어왔지만 응하지 않았고, 조인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왔을 때도 반장을 내보내 대응했으나 부상이 악화되어 쓰러졌다.[1]주유는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에 속은 조인은 진교에게 성을 맡기고 주유의 영채를 습격했다.[1] 그러나 이것은 주유의 계략이었고, 조인은 한당, 장흠, 주태, 반장, 서성, 정봉, 진무, 여몽 등에게 역습을 당해 궤멸당했다.[1] 조인은 겨우 10여 명의 부하만 데리고 조홍과 함께 남군성 부근에 도착했으나, 능통과 감녕에게 길이 막혀 하후돈이 있는 양양성으로 도망쳤다.[1]
주유가 정보와 함께 남군성에 입성하려 했으나, 유비의 참모였던 제갈량이 조운을 시켜 진교를 끌어내고 이미 남군성을 점령한 뒤였다.[1] 주유는 격분하여 남군성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제갈량은 또다시 계략을 써서 형주성과 양양성까지 점령했다. 형주성에는 장비를, 양양성에는 관우를 보내 성을 점령하게 했다.[1]
4. 결과 및 영향
적벽 대전과 남군 전투의 결과, 조조는 형주 지역의 주요 거점을 잃고 천하통일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3] 유비는 형주 남부를 차지하며 촉한 건국의 기반을 마련했고,[19] 손권은 형주로 세력을 넓혔으나 유비와의 갈등이 깊어져 적벽 대전의 동맹이 깨지는 원인이 되었다.[19][20][21]
4. 1. 유비 세력의 성장
적벽 대전에서 승리한 후, 유비는 제갈량의 도움을 받아 형주 평정전을 벌여 형주 남부의 여러 군을 점령하면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확보했다.[19] 무릉군, 장사군, 계양군, 영릉군을 항복시켰다.[20] 이 과정에서 뇌서가 노강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하후연에게 진압된 후,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유비에게 합류하여 유비 세력이 더욱 강화되었다.[19]유비는 제갈량을 군사 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임명하여 장사, 계양, 영릉의 행정 업무를 감독하게 했다. 또한 상랑을 자귀, 이도, 무산, 이릉 현을 담당하게 했는데,[21] 이 지역들은 훗날 익주 공격에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이처럼 형주 대부분 지역을 확보하고 뛰어난 인재들을 등용한 유비는 훗날 촉한을 건국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4. 2. 손권 세력의 확장
주유는 남군을 점령하여 손권 세력의 영향력을 형주 지역으로 확장했다. 하지만 주유 사후 형주를 둘러싼 유비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는 훗날 적벽 대전의 동맹이 깨지고, 손권이 조조와 연합하여 관우를 공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형주 공방전)[19][20][21]4. 3. 조조 세력의 약화
적벽 대전에서 패배한 조조는 남군을 조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허창으로 돌아가 군세를 재정비했다. 그러나 남군 전투에서 조인이 주유에게 패배하면서 형주 지역의 주요 거점을 상실했다.[3] 이로써 조조의 천하통일 계획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3]5. 대중문화
삼국지연의에서는 한현이 위연에게 살해된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위연이 언제 유비의 신하가 되었는지, 이 전투에 참여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1]
관우와 황충의 대결은 여러 문학 작품에서 극적인 효과를 위해 사용되었으며, 경극과 같은 다른 문화 작품의 원천이 되었다.[1]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대결은 없었다.[1]
진 삼국무쌍 4에서 이 전투는 "남만 땅을 위한 경쟁"으로 불린다.[1]
5. 1.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중국어에 묘사된 것과는 달리, 한현은 위연에게 살해되지 않았으며, 위연이 언제 유비의 신하가 되었는지, 또는 위연이 이 전투에 참여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1]극적인 효과를 위해, 많은 문학 작품에서 유비가 양자강 남쪽의 4개 군을 정복하는 내용에는 관우와 황충의 대결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경극과 같은 다른 문화 작품의 원천이 되었다.[1]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 중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1]
''진 삼국무쌍 4''에서 이 전투는 "남만 땅을 위한 경쟁"으로 불린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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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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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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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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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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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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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Man C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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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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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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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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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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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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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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