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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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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궁염은 1888년 남궁억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에서 유학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하고, 이승만 등과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했으며, 구미외교위원부 위원과 임시 위원장을 역임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 1938년 일시 귀국하여 광산을 운영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해 노력했다. 해방 후에는 뉴욕 총영사를 역임하며 한인 교민들의 정착에 기여했고, 1960년 4.19 혁명 이후 총영사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은퇴했다. 1961년 사망 후,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남궁염은 1888년 3월 17일 한성부 정동에서 남궁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배웠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개화파 인사 박영효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랜돌프 매건 대학교를 다녔다. 대학 재학 중 이승만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1]

1928년 허정, 이기붕 등과 삼일신보사(三一申報社)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8년 일시 귀국하여 충청북도 제천군 금성면의 삼화성광산(三火星鑛山)을 운영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1]

1945년 8월 해방 이후,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뉴욕 동지회를 이끌었다. 그해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동지회 뉴욕지부를 지도했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뉴욕 한인회를 지도하였다.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남궁염을 뉴욕 총영사로 임명했다.[1]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일체의 비용을 받지 않았으나 자신이 활동비를 조달하고 영사관 건물을 마련하였다. 가난한 나라의 청빈한 외교관이었으나 한인 교민들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5년 7월 8일에는 외자청(外資廳) 겸임 이사관에 임명되었다.[3]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사퇴하자, 그해 6월 총영사직을 사직하고 하와이로 은퇴하였다. 사직서는 그해 7월 14일에 수리되었다.

심장병으로 고생하다가 1961년 11월 29일 사망하였다.[4]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1974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유골은 강원도 홍천 선영에 묻혔다.[4]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1. 유학과 독립운동 (1905년 ~ 1945년)

남궁염은 1888년 3월 17일 한성부 정동에서 남궁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배웠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개화파 인사 박영효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버지니아 주 랜돌프 매건 대학교를 다녔다. 대학 재학 중 우연히 이승만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1]

1928년 허정, 이기붕 등과 함께 삼일신보사(三一申報社)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8년 일시 귀국하여 충청북도 제천군 금성면의 삼화성광산(三火星鑛山)을 운영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1]

2. 1. 1.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1921년 북미한인학생회(北美韓人學生會) 대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며, 같은 해 미국 뉴욕에서 이승만, 이용직(李容稷) 등과 함께 조국 광복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였다. 또한 허정, 이기붕 등과 함께 동지회의 뉴욕 지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歐美委員部) 위원으로 피선되었고, 1924년 구미위원부의 임시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재미한인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1]

1933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뉴욕지부 대표 후보로 활동하였다. 1941년 다시 구미위원부 위원에 재선임되고 1942년 이후 북미동지회(北美同志會) 총부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경제위원을 역임하면서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1]

2. 1. 2. 구미외교위원부 활동

192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으로 피선되었고,[1] 1924년 구미위원부의 임시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재미한인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1] 1941년 다시 구미위원부 위원에 재선임되었다.[1]

2. 1. 3. 언론, 통일 운동 참여

미국 유학 중 남궁염은 1921년 북미한인학생회(北美韓人學生會) 대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며, 같은 해 미국 뉴욕에서 이승만, 이용직 등과 함께 조국 광복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였다.[1] 허정, 이기붕 등과 함께 동지회의 뉴욕 지부 결성에도 참여하였다.[1] 192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歐美委員部) 위원으로 피선되었고, 1924년 구미위원부 임시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재미한인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1]

1928년 허정, 이기붕 등과 함께 삼일신보사(三一申報社)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33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뉴욕지부 대표후보로 활동하였다.[1] 1938년 일시 귀국하여 충청북도 제천군 금성면의 삼화성광산(三火星鑛山)을 운영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1] 1941년 다시 구미위원부 위원에 재선임되고, 1942년 이후 북미동지회(北美同志會) 총부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경제위원을 역임하면서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1]

2. 1. 4. 광산 운영과 재미 한인사회 활동

1938년 일시 귀국하여 충청북도 제천군 금성면의 삼화성광산(三火星鑛山)을 운영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1941년 다시 구미위원부 위원에 재선임되고 1942년 이후 북미동지회(北美同志會) 총부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경제위원을 역임하면서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2. 2. 외교관, 교민단체 활동 (1945년 ~ 1960년)

1949년 8월 15일,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성대하게 거행된 대한민국 건국 첫 돌 기념 행사.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부터 이매리, 이원순 부부, 한 사람 건너 남궁염 초대 뉴욕 총영사와 근우회 총무였던 부인 우복자 여사.


남궁염은 이승만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뉴욕 동지회를 이끌었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그해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동지회 뉴욕지부를 지도했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뉴욕 한인회를 지도하였다.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남궁염을 뉴욕 총영사로 임명했다.[1] 그의 부인 우조안[2]은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 동지회 지부장이 되었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매년 하순 혹은 가을에 개최되는 미국내 한인대회에 반드시 참석하였다.

남궁염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일체의 비용을 받지 않았으나 자신이 활동비를 조달하고 영사관 건물을 마련하였다. 가난한 나라의 청빈한 외교관이었으나 한인 교민들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5년 7월 8일에는 외자청(外資廳) 겸임 이사관에 임명되었다.[3]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사퇴하자, 그해 6월 총영사직을 사직하고 하와이로 은퇴하였다. 사직서는 그해 7월 14일에 수리되었다.

2. 2. 1. 뉴욕 총영사 임명

남궁염은 이승만독립운동을 돕고 뉴욕 동지회를 이끌었다. 1945년 8월 해방 후, 그해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동지회 뉴욕지부를 지도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뉴욕 한인회를 지도하였다.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남궁염을 뉴욕 총영사로 임명했다.[1]

남궁염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비용을 받지 않았으나, 직접 활동비를 마련하고 영사관 건물을 준비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인 교민들의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 1955년 7월 8일에는 외자청(外資廳) 겸임 이사관(兼任理事官)에 임명되었다.[3] 1960년 4.19로 이승만이 사퇴하자, 그해 6월 총영사직을 사직하고 하와이로 은퇴하였다. 사직서는 그해 7월 14일에 수리되었다.

2. 2. 2. 청빈한 외교관

남궁염은 이승만독립운동을 도왔으며, 뉴욕 동지회를 이끌었다. 1945년 8월, 해방 후 그해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동지회 뉴욕지부를 지도하였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도 귀국하지 않고 뉴욕 한인회를 지도하였다.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뉴욕 총영사로 활동했다.[1]

그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일체의 비용을 받지 않았으나, 스스로 활동비를 마련하고 영사관 건물을 준비하였다. 가난한 나라의 청빈한 외교관이었으나 재미동포들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5년 7월 8일에는 외자청(外資廳) 겸임 이사관(兼任理事官)에 임명되었다.[3]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사퇴하자, 그해 6월 총영사직을 사직하고 하와이로 은퇴하였다. 사직서는 그해 7월 14일에 수리되었다.

2. 2. 3. 외자청 이사관 겸임

1955년 7월 8일 외자청 겸임 이사관에 임명되었다.[3]

2. 2. 4. 은퇴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사퇴하자, 그해 6월 남궁염도 뉴욕 총영사직을 사직하고 하와이로 은퇴하였다. 사직서는 7월 14일에 수리되었다.[1]

심장병으로 고생하다가 1961년 11월 29일 사망하였다.[4]

2. 3. 사망과 사후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1974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유골은 강원도 홍천 선영에 묻혔다.[4]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아들 준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미우주항공국 리서치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었고, 딸 혜원(당시 54세)은 아시아개발은행에 근무하던 민병휘와 결혼하여 필리핀 마닐라에서 인터내셔널 스쿨의 카운슬러로 있었다.[4] 아들 진은 미농무성 산림국 육종고문으로 있으면서 당시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임목육종학 교수로 재직하였다.[4]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할아버지남궁영(南宮泳)조선 중추부도사(都事) 역임
할머니덕수 이씨(德水 李氏)
아버지남궁억(南宮檍)1863년 12월 27일 ~ 1939년 4월 5일, 호는 한서(翰西)
어머니양혜덕(梁惠德)1866년 9월 13일 - 1937년 1월 20일
여동생남궁숙경(南宮三仁)1896년 - , 남궁삼인으로도 불림
매제윤광선(尹光善)1898년 11월 17일 ~ 1950년?, 한국독립운동윤치호의 아들
외조카윤용구(尹龍求)1919년 2월 16일 - ?
외조카윤정구(尹鼎求)1927년 - , 기업인, 고려원양(주) 전무 역임
외조카윤명구(尹明求)1930년 - ?
외조카딸윤자희음악인
외조카딸윤정희
조카사위채동규(蔡東圭)1917년 - 2003년 12월 18일[5],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제2대 학장, 대한약학회 회장 역임
외조카딸윤성희1929년 -
조카사위원석연(元錫淵)1922년 - 2003년 11월 5일, 화가
부인우조앤1899년 - ?
아들남궁준1924년 -
남궁혜원1930년 -
아들남궁진


4. 이승만과의 관계

랜돌프 매건 대학 재학 중, 이승만에게서 당시 조지 워싱턴 대학 의학부 학생이던 우복자를 소개받아 교제했다. 1924년 8월 20일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승만은 우복자의 친정 아버지 우흥태와 YMCA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고, 후일 중매를 서게 되었다.[6]

결혼식 직전 신부 아버지가 이미 귀국하여 다시 나오기 힘들자, 이승만이 우흥태를 대리하여 신부를 데리고 입장했다. 우복자는 1919년 필라델피아 한인대회에 미국 유학생 신분으로 참가하여 이승만과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다.[6]

이러한 인연으로 남궁염은 이승만을 장인처럼 대우하였고, 이승만은 이후 뉴욕 방문 시 거의 남궁염의 집에 들러 묵었으며, 이승만을 할아버지처럼 따랐던 남궁염의 자녀들과 허드슨 강변에서 종종 낚시를 했다고 한다.[6]

부인 우복자는 이승만이 약혼자 프란체스카를 오스트리아에서 뉴욕으로 데려오던 날, 이승만과 함께 마중을 나갔고 결혼식에서 신부 들러리를 섰으며, 틈틈이 조선 사회에 대한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6]

우복자의 친부가 이승만의 큰 누님 남편인 우태명이라는 주장도 있다.[6]

참조

[1] 뉴스 정부인사발령 동아일보 1949-02-23
[2] 문서 본명 우복자
[3] 뉴스 정부인사발령 경향신문 1955-07-08
[4] 뉴스 뉴욕한인 이야기/ 남궁염 초대 뉴욕총영사 http://www.koreatime[...] 미주한국일보
[5] 웹인용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https://web.archive.[...] 2013-05-16
[6] 웹인용 조선~이승만 도미(1905) - 탑골공원 사진 https://mehansa.com/[...] 2024-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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