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남목마성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남목마성은 말이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목장 둘레에 돌로 쌓은 담장이다. 조선시대에 울산 지역에 설치된 방어진목장 등 3개의 목장 중 하나로, 1469년에는 방어진 목장의 규모와 사육된 말의 수가 기록되었다. 1651년에 새로운 마성이 축조되었으며, 현재 염포동에서 미포까지 약 5.1km 구간에 걸쳐 성벽이 남아있다. 남목마성이 위치한 지역은 원래 '남목'이었으나 목장이 설치되면서 '남목'으로 불리게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651년 작품 - 봉은사 목 삼불상
    봉은사 목 삼불상은 17세기 조각승 승일에 의해 제작된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약사불과 아미타불은 1651년에, 석가불은 1689년에 조성되었으며 통견 형식의 불의를 입고 있다.
  • 1651년 작품 - 속초 신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속초 신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1651년에 제작된 아미타여래 삼존 형식의 불상으로, 17세기 불교 조각사 연구의 중요한 기준이자 무염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아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 울산 동구의 건축물 - 방어진시외버스정류장
    울산광역시 동구에 위치했던 방어진시외버스정류장은 부산 방면 노선을 운행했으며 과거 부산교통이 운행한 방어진 ↔ 부산 노선은 울산을 경유하여 약 1시간 30분이 소요되었고 배차 간격은 1시간, 요금은 6,500원이었다.
  • 울산 동구의 건축물 - 전하 e편한세상
남목마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남목마성
남목마성
국가울산광역시
유형기념물
지정 번호18
지정일1998년 10월 19일
주소울산광역시 동구 동부동 산197-1번지 외 14필지
수량1개소
문화재청 ID23,00180000,26
꼬리표울산 동부동

2. 역사

마성(馬城)은 말이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목장 둘레를 돌로 막아 쌓은 담장이다. 조선시대에 축조되어 1897년(고종 34) 폐지될 때까지 운영되었다.[1] 현재 남아있는 남목마성은 염포동 중리와 성내 경계지점에서부터 남목으로 넘어오는 도로 남쪽 산기슭을 지나 동쪽으로 미포에까지 약 5.1km에 이르고 있다.[1] 이 지역의 원래 명칭은 '남목(南木)'이었으나, 목장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남목(南牧)'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전한다.[1]

2. 1. 조선 전기 목장 설치

조선 시대에는 나라에서 사용할 말을 기르기 위해 해안가와 섬 등을 중심으로 200여 개의 목장을 설치하였다. 울산 지역에는 조선 전기에 방어진목장(구목장), 방암산목장, 이길곶목장 등 3개의 목장이 설치되었으나, 방암산목장과 이길곶목장은 완성되지 못하고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1]

울산에 있는 목장은 중앙의 사복시 소속이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1469년)에 따르면, 방어진에 목장이 있었으며, 여기서 키운 말이 360필, 그 둘레가 47리였다는 기록이 있다. 해동제국기(1471년)에 실려 있는 염포지도에는 염포와 양정의 경계선을 따라 심천곡을 거쳐 성골에서 강동동의 경계에까지 마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1]

2. 2. 15세기 기록

경상도속찬지리지(1469년)에는 방어진에 목장이 있었으며, 여기서 키운 말이 360필, 그 둘레가 47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 신숙주가 1471년에 편찬한 『해동제국기』에 실려 있는 「염포지도」에는 염포와 양정의 경계선을 따라 심천곡을 거쳐 성골에서 강동동의 경계에까지 마성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1]

2. 3. 17세기 신마성 축조

鶴城誌중국어(1749년)에는 1651년(효종 2년)에 새로운 마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실제로 남목마성에서 "순치 8년(1651) 신묘 2월 일 주회 377보 축"(順治八年(1651) 辛卯二月日 周回三百七十七步築)이란 명문이 새겨진 바위가 발견되어 이 성이 1651년에 쌓은 신마성임이 밝혀졌다.[1]

신마성의 규모는 牧場地圖중국어(1663)에는 동서 10리, 남북 15리로, 鶴城誌중국어(1749)에는 3,626보(步)로, 蔚山府邑誌중국어(1832)에는 1,930보로, 蔚山牧場牧誌중국어(1871)에는 1,913파(把)로 기록되어 있다.[1]

2. 4. 축조 방식 및 참여

남목마성은 내벽과 외벽으로 된 협축(夾築) 방식으로 축조되었으며, 너비 1.8〜2m, 높이 1.5〜2m 정도로 남아있다. 1651년 칠읍갱축(七邑更築) 기록[1]과 성돌에 새겨진 지명을 통해 울산, 문경, 청도, 밀양, 영천, 경주, 언양, 흥해 등 여러 지역 주민들이 축성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성벽에서 발견된 성돌에는 언양, 청도, 흥해 등의 지명이 새겨져 있어, 구간을 나눠 축성했음을 알 수 있다.[1]

3. 현재 남아있는 남목마성

현재 남목마성은 염포동 중리와 성내 경계지점에서부터 남목으로 넘어오는 도로 남쪽 산기슭을 지나 동쪽 미포에까지 5.1km에 이르고 있다. 남목마성의 도면상 전체 길이는 약 5.11km 정도이다. 성벽은 내벽과 외벽으로 된 협축(夾築)이 기본이며 너비 1.8m~2m, 높이 1.5m~2m 정도 남아있다.[1]

4. 명칭 유래

남목마성이 위치한 지역의 원래 명칭은 '남목(南木)'이었으나, 목장이 설치되면서 '남목(南牧)'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