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천섬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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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천섬 철수는 1955년 2월, 중화민국이 중국 공산당과의 군사적 열세로 인해 다천 군도에서 철수한 사건이다. 1949년 국공 내전에서 패배한 중화민국은 타이완으로 후퇴한 후에도 중국 동남부 연안 도서를 점령하고 있었으나, 1955년 1월 이장산 섬이 함락되면서 다천 섬의 방어 기반이 약화되었다. 이에 중화민국은 미국 제7함대의 지원을 받아 다천 섬의 주민과 군인들을 타이완으로 이주시키는 '킹콩 작전'을 수행했고, 이후 다천 섬은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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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천섬 철수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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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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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양안 관계 중국 내전 |
장소 | 다천 군도, 저장 성, 중화민국(현재 자오장 구, 타이저우 시, 중국) |
기간 | 1955년 1월 19일 – 1955년 2월 26일 |
결과 | 중국 인민해방군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중화민국 미국 (1912) 영국 |
교전국 2 | 중화인민공화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앨프리드 M. 프라이드 (미국) 장징궈 (중화민국) |
지휘관 2 | 장아이핑 (중국) |
전력 | |
전력 1 | 15,000명 |
전력 2 | 28,000명 |
피해 규모 | |
피해 규모 1 | 경미 |
피해 규모 2 | 경미 |
관련 정보 | |
다른 이름 | 대진도 철퇴 (금강계획) |
2. 역사적 배경
1949년 중국 국민당과 중화민국 정부는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에 밀려 타이완(臺灣)으로 옮겼지만(국부천대), 국부군(國府軍)은 상하이 해안에서 하이난섬에 이르는 중국 동남부 연안의 크고 작은 섬들과 그 부근의 본토 해안에서 중공군에 대한 군사 작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50년 5월 1일 하이난섬이 중공군에 의해 함락되고, 중공군이 잇따라 본토 부근의 섬들을 점령하면서 중화민국의 지배 지역은 타이완 성과 인근 푸젠 성의 작은 섬들(진마지구), 그리고 저장성의 다천 군도 등으로 축소되었다.
1955년 1월 18일, 중공군은 다천 섬 옆의 이장산 섬(一江山島)을 점령했다. 이장산 섬은 다천 군도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섬이었다. 이장산 섬 함락으로 물자 공급이 어려워지자, 중화민국 정부는 다천 군도를 포기하고 주민과 수비대를 타이완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1955년 2월 8일 중화민국 정부는 장징궈를 다천 군도로 보내 철수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2월 11일 주민과 수비대의 철수가 완료되자 장징궈가 직접 다천 군도에 있던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내리면서 중화민국 저장성 정부의 폐지를 선언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관할이 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이미 이장산도 전투를 공격했을 때 다천섬 열도를 목표로 삼았지만, 두 곳을 동시에 점령할 능력이 없었다. 인민해방군이 이장산도 전투 동안 다천섬 열도를 폭격한 것은 주로 다천섬 열도의 국민당 수비대가 이장산도를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1954년 11월 1일부터 11월 4일까지 인민해방군 공군은 다천섬 열도를 폭격하기 위해 49차례 출격했지만, 투하된 721발의 폭탄 중 목표물을 맞춘 것은 단 한 발도 없었다. 1954년 11월 10일, 인민해방군 폭격기는 28차례, 인민해방군 전투기는 폭격기를 지원하기 위해 46차례 출격하여 다천섬 열도의 국민당 군함을 공격했으나, 단지 5척의 군함에 경미한 피해만 입혔을 뿐이었다.
이후 중화민국 정부의 실효 지배 범위에는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중·미얀마 국경 지대 제외).
2. 1. 제1차 타이완 해협 위기
1949년, 중국 국민당이 이끄는 중화민국 정부는 중국 대륙에서의 통치권을 상실하고 타이완으로 퇴각했지만, 중국 공산당에 대한 군사 작전을 지속했다. 그러나 1950년이 되자, 저우산 군도, 하이난 섬이 중국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에 빼앗겼다. 국민당은 타이완 및 푸젠성과 저장성 연안의 일부 도서만을 유지하는 데 그쳤으며, 동중국해 연안에서의 해상 게릴라 전술로 공산당에 대항했다.한국 전쟁의 영향으로 연안부에서의 침공 작전이 휴지되기 시작하고, 중국의 시선이 점차 한반도로 이전하는 것을 계기로 타이완 측은 반격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전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 대륙 반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국 전쟁이 수습되면서 공산당의 시선은 다시 연안부로 향하기 시작했다.
1954년 5월 15일, 인민해방 해군 동해 함대의 지원으로 화동 군구 부대가 다천 섬 주변의 섬에 상륙하여, 포병 진지나 어뢰정 기지를 건설했다. 국민당군 측도 해군 함정과 공군기를 투입했지만, 오히려 손해가 잇따랐고, 11월 14일 인민해방군의 어뢰정이 국민당군 해군 호위 구축함 '타이핑'(구 미국 해군 에바츠급 호위 구축함데커)의 격침에 성공하여, 제해권을 장악했다.
1955년 1월 18일, 인민해방군은 이장산 섬을 공격하여, 고립 상태의 수비대 720명을 전멸시키고, 동 섬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제1차 타이완 해협 위기). 당시 이장산 섬은 다천 섬 방어선으로 여겨졌고, 이를 잃음으로써 다천 섬의 방어도 매우 어려워졌다. 또한 타이완과의 거리도 있어, 중화민국 정부에 의한 물자 공급이 어려워졌다. 더욱이, 전년에 타이완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미·중 상호 방위 조약'의 적용 범위에 다천 섬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점도 있어, 중화민국 정부는 다천 섬의 포기를 결정했다.
3. 다천 섬 철수 (킹콩 작전)
1949년 중국 국민당과 중화민국 정부는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에 밀려 타이완으로 옮겼지만(국부천대), 국부군은 상하이 해안에서 하이난섬에 이르는 중국 동남부 연안의 섬들과 그 부근의 본토 해안에서 중공군에 대한 군사 작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50년 5월 1일 하이난섬이 중공군에 의해 함락되고, 중공군이 잇따라 본토 부근의 섬들을 점령하면서 중화민국의 지배 지역은 타이완 성과 인근 푸젠 성의 작은 섬들(진마지구), 그리고 저장성의 다천 군도 등으로 축소되었다.
1955년 1월 18일 중공군은 다천 섬 옆의 이장산 섬(一江山島)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장산 섬은 다천 군도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섬이었다. 이장산 섬 함락으로 물자 공급이 곤란해지자, 중화민국 정부는 다천 군도를 포기하고 주민과 수비대를 타이완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상하 다천섬, 어산도, 피산도로부터의 철수 작전은 金刚计划|진강지화|en|Operation King Kong중국어으로 명명되었다.
3. 1. 철수 과정
1955년 1월 18일, 중공군은 다천 섬 옆의 이장산 섬(一江山島)을 점령했다. 이장산 섬은 다천 군도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섬이었다. 이장산 섬 함락으로 물자 공급이 곤란해지자, 중화민국 정부는 다천 군도를 포기하고 주민과 수비대를 타이완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1]1955년 2월 8일, 중화민국 정부는 장징궈를 다천 군도로 보내 철수를 지휘하도록 했다. 2월 11일 주민과 수비대의 철수가 완료되자 장징궈가 직접 다천 군도에 있던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내리면서 중화민국 저장성(浙江省) 정부의 폐지를 선언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관할이 되었다.[1]
이장산도 전투 후, 인민해방군은 즉시 다천섬으로 주의를 돌렸다. 1955년 1월 19일, 다천섬을 목표로 한 첫 번째 인민해방군 폭격 임무가 수행되었다. 이전의 실패한 폭격 임무로 인해, 중화민국군은 충분히 대비하지 않았다. 그 결과, 섬의 통신 시설이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주둔 중인 중화민국군은 암호화되지 않은 무전기를 사용해야 했고, 인민해방군은 노획한 중화민국군 장비를 사용해 통신을 가로챌 수 있었다.[1]
같은 날 두 번째 공격이 발생했다. 중화민국군 수비대가 재정비하여 대공 방어를 구축했지만, 두 번째 공격은 군사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저수지를 타격했다. 저수지가 파괴되고 신선한 물 공급이 어려워지자, 군도를 방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1955년 2월 2일, 인민해방군 공군은 남록산 군도를 폭격했다.[1]

중화민국 국민 정부는 1955년 2월 미 해군에 의해 200마일 이상 남쪽의 타이완으로 철수를 실시하기로 미국과 최종 합의했다. 1955년 2월 5일 철수 결정이 내려졌고, 미국 제7함대는 132척의 선박과 4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14,500명의 민간인, 10,000명의 중화민국군 군인, 4,000명의 유격대원과 약 36287400.00kg의 군사장비와 물자를 섬에서 이동시켰다. 철수 후, 다천섬의 마지막 중화민국 국기는 장징궈에 의해 내려졌고, 중화민국의 저장성 정부는 해산되었다.[1]

다천섬, 어산도, 피산도로부터의 철수 작전은 다천섬으로부터의 철수는 미국 제7함대가 지원했지만, 어산도, 피산도로부터의 철수는 중화민국군이 독자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1] 지원에 나선 제7함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1][2][3]
종류 | 함명 |
---|---|
항공모함 6척 | 에식스, 요크타운, 와스프, 키어사지, 미드웨이 (2월 6일 도착), 프린스턴[4] |
중순양함 3척 | 기함 헬레나, 피츠버그[5], 톨레도[6] |
구축함 25척 | (플레처 등) |
로켓 상륙함 2척 | |
소해함 4척 | |
공격 수송함 3척 | |
공격 화물 수송함 2척 | |
고속 수송함 2척 | |
전차 상륙함 7척 | |
기타 | 5척 |
1955년 2월 6일, 미국 제7함대의 지원 아래 중화민국 해군의 선단이 지룽을 출항했다. 2월 8일, 중화민국 정부는 장징궈를 지휘관으로 주민 이송 계획을 실시, 2월 11일 마지막 주민 및 수비대의 철수가 완료되자 장징궈가 직접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내리고, 동시에 타이완 본섬에 있던 중화민국 저장성정부의 폐지를 선언했다. 국민당이 다천섬을 떠날 때 가옥과 어선을 철저히 파괴하고, 수만 개의 지뢰를 섬에 설치했지만, 미국 제7함대 제독이 반대 의견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위다웨이의 강력한 지시에 따라 초토 작전을 실행하게 되었다.[1]
이후, 인민해방군이 다천섬에 상륙하여 무혈 점령했고, 다천섬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실효 지배하에 들어갔다. 철수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몇 명의 주민들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1]
3. 2. 미국의 역할
1955년 2월, 중화민국 정부는 오랜 논쟁 끝에 다천섬과 인근 군도를 미국 해군의 지원을 받아 타이완으로 철수하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1955년 2월 5일 철수 결정이 내려졌고, 미국 제7함대는 132척의 선박과 4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14,500명의 민간인, 10,000명의 중화민국군 군인, 4,000명의 유격대원, 그리고 40,000톤의 군사장비 및 물자를 섬에서 이동시켰다.[1]
상하 다천섬, 어산도, 피산도로부터의 철수 작전은 金刚计划|진강지화|en|Operation King Kong중국어으로 명명되었다. 다천섬 철수는 미국 제7함대가 지원했지만, 어산도와 피산도 철수는 중화민국군이 독자적으로 실시했다.[1] 제7함대의 함대 편성은 다음과 같다.[1][2][3]
함종 | 함명 |
---|---|
항공모함 6척 | 에식스, 요크타운, 와스프, 키어사지, 미드웨이 (2월 6일 도착), 프린스턴[4] |
중순양함 3척 | 기함 헬레나, 피츠버그[5], 톨레도[6] |
구축함 25척 | (플레처 등) |
로켓 상륙함 2척 | |
소해함 4척 | |
공격 수송함 3척 | |
공격 화물 수송함 2척 | |
고속 수송함 2척 | |
전차 상륙함 7척 | |
그 외 | 5척 |
4. 철수 이후
1955년 2월 8일 중국 인민해방군은 북기산섬(北麂山島|북기산도중국어)을 점령했고, 2월 12일까지 다천 열도 전체를 장악했다. 2월 13일에는 남기산 열도 전체가 인민해방군에 의해 점령되었다.[1]
중화민국은 다천 열도 남쪽 남록산 열도에 연대급 병력을 주둔시켜 저항했으나, 현지 사령관은 2월 26일 철수를 결정했다.[1]
다천도에서 철수한 주민들은 지룽항을 통해 타이완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화롄현, 타이둥현, 타이베이현(현 신베이시), 가오슝현(현 가오슝시) 등 타이완 각지에 정착했으며, 이들이 살던 곳은 "다천신촌" 또는 "이장신촌" 등으로 불렸다. 가오슝시 치진구에는 장제스를 기리는 사당인 장공감은당(蔣公感恩堂)이 세워졌다.[8] 핑둥현 신위안향의 장제스 동상은 철거될 뻔했으나, 주민들의 요청으로 보존되었다.[9]
4. 1. 중화인민공화국의 점령
1955년 1월 18일, 중공군은 다천 섬 옆의 이장산 섬(一江山島)을 점령했다. 이장산 섬은 다천 군도 방어에 중요한 섬이었고, 이 섬의 함락으로 중화민국은 다천 군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1]1955년 2월 8일, 중화민국 정부는 장징궈를 다천 군도로 보내 철수를 지휘하도록 했다. 2월 11일 주민과 수비대의 철수가 완료되자 장징궈가 직접 다천 군도에 있던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내리고 중화민국 저장성(浙江省) 정부의 폐지를 선언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관할이 되었다.[1] 이후 북기산섬(北麂山島|북기산도중국어)은 중국 인민해방군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2월 12일까지 다천 열도는 완전히 중공군의 손에 넘어갔다. 2월 13일, 남기산 열도 전체가 인민해방군에 점령되었다.[1]
국민당은 상징적인 저항을 위해 다천 열도 남쪽의 남록산 열도에 단 하나의 연대를 주둔시켰고, 이 연대는 2월 26일까지 저항했다. 현지 사령관은 저항이 헛됨을 깨닫고 철수 허가를 요청하여 승인받았다.[1]
1955년 2월 6일, 미국 제7함대의 지원 아래 중화민국 해군 선단이 지룽을 출항했다. 2월 8일, 중화민국 정부는 장징궈를 지휘관으로 주민 이송 계획을 실시했고, 2월 11일 마지막 주민과 수비대 철수가 완료되자 장징궈가 직접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내리고, 동시에 타이완 본섬에 있던 중화민국 저장성정부의 폐지를 선언했다.[1] 국민당은 다천섬을 떠날 때 가옥과 어선을 철저히 파괴하고 수만 개의 지뢰를 설치했지만, 미국 제7함대 제독은 이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당시 국방부장이었던 위다웨이의 강력한 지시로 초토화 작전이 실행되었다.[1]
이후 인민해방군이 다천섬에 상륙하여 무혈 점령했고, 다천섬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실효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섬에는 철수하지 못한 몇 명의 주민들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1]
4. 2. 주민들의 이주와 정착
1955년 2월 6일, 미국 제7함대의 지원 아래 중화민국 해군의 선단이 지룽을 출항했다. 2월 8일, 중화민국 정부는 장징궈를 지휘관으로 주민 이송 계획을 실시, 2월 11일 마지막 주민 및 수비대의 철수가 완료되자 장징궈가 직접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내리고, 동시에 타이완 본섬에 있던 중화민국 저장성 정부의 폐지를 선언했다.다천도에서 철수한 주민들은 지룽항에 상륙한 후 정부에 의해 화롄현, 타이둥현, 타이베이현(현 신베이시), 가오슝현(현 가오슝시) 등 타이완 각지에 거주지가 제공되었다. 현재에도 "다천신촌"이나 "이장신촌"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으며, 다천도 철수 작전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가오슝시 치진구에는, 전 다천도 주민들에 의해, 장제스를 모시는 사당 "장공감은당(蔣公感恩堂)"이 세워졌다.[8] 핑둥현신위안향 내에 있는 전 다천도 주민 커뮤니티 내에 세워진 장제스의 동상이 국유지 내에 있다는 이유로 "전환기 정의 촉진 조례"에 의해 철거 명령이 내려졌지만, 전 섬 주민들의 장제스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고려하여, 현지 중국 국민당 소속 입법위원의 중재로 보존되게 되었다.[9]
5. 결과 및 영향
중국 공산당은 이 군도들을 점령함으로써 주요 해안 해운로에 대한 중국 국민당의 위협을 제거하고, 해안 지역을 공격할 수 있는 국민당의 기지를 없앴다. 그러나 진먼 섬과 마쭈 열도는 성공적으로 방어되었다.
5. 1. 백단(白團)의 관여
1954년 11월 15일, 백단의 일원이었던 니시우라 스스무와 타카다 토시타네는 대만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중화민국군 간부들은 다천섬 철수 여부에 대해 질문했다. 니시우라 스스무와 타카다 토시타네는 과달카날 전투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는 섬을 방어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설명했다.6. 평가 및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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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 중화민국 관점
(이전 출력이 비어있었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가 제공되면 다시 시도해주세요.)6. 2. 중화인민공화국 관점
(빈 문서)참조
[1]
간행물
〈遷臺初期中華民國海軍的建軍發展(1949.12-1958.8)〉
https://books.google[...]
國防部史政編譯室
2017-06-01
[2]
웹사이트
February 7, 1955: Evacuation of Chinese from Tachen Islands
https://www.history.[...]
2021-08-18
[3]
서적
《劉廣凱將軍報國憶往》
https://books.google[...]
中央研究院近代史研究所
[4]
간행물
VS-37 Sawbucks
https://www.history.[...]
2020-09-14
[5]
웹사이트
Pittsburgh III (CA-72)
https://www.history.[...]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2020-09-21
[6]
웹사이트
USS Toledo (CA-133)
https://www.history.[...]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2020-09-21
[7]
웹사이트
"「白団」物語 of 偕行社"
https://web.archive.[...]
2021-10-28
[8]
뉴스
蔣介石を廟にまつる元島民 独裁を支えた「郷愁の絆」、今は揺らいで
https://www.asahi.co[...]
2023-12-24
[9]
뉴스
屏東首例促轉條例欲拆蔣公銅像 大陳新村居民籲尊重歷史記憶盼保留
https://www.chinatim[...]
2024-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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