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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나오키 (야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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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하시 나오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해설가, 지도자, 사업가이다. 오이타현 출신으로 고등학교 시절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고,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1968년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하여 언더핸드 투수로 활약했다. 1973년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고, 1979년에는 20승을 기록하며 퍼시픽 리그 월간 MVP를 수상했다. 1981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이적, 이후 세이부 라이온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1986년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투수 코치를 거쳐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일본인 최초로 투수 코치를 역임했다. 현재는 NHK 메이저 리그 중계 메인 해설자로 활동하며, 사업가로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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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나오키 (야구인) - [인물]에 관한 문서
선수 정보
선수명다카하시 나오키
로마자 표기Naoki Takahashi
한자 표기高橋 直樹
출생일1945년 2월 15일
출생지오이타현 사이키시
사망일알 수 없음
신장183cm
체중70kg
수비 위치투수
투구우투
타석우타
프로 입단 연도1967년
드래프트 순위3순위
첫 출장1969년 4월 13일
마지막 경기1986년 5월 1일
선수 경력
아마추어닛폰 강관
프로도에이 플라이어스 (1968~1980)
닛타쿠홈 플라이어스 (1968~1980)
닛폰햄 파이터스 (1968~1980)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1~1982)
세이부 라이온스 (1982~1985)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6)
코치 경력
코치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993~1995)
캔자스시티 로열스 (1997)
유통경제대학
학력
고등학교오이타현립 쓰쿠미 고등학교
대학교와세다대학

2. 프로 입단 전

오이타현 사이키시 출신으로 오이타 현립 쓰쿠미 고등학교 시절에는 1963년 하계 고시엔 대회(제45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1] 이듬해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여 도쿄 6대학 리그에서는 야기사와 소로쿠, 미와타 가쓰토시의 후보 선수로 12경기에 등판해 2승 2패를 기록했다. 1967년에 열린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선 도에이 플라이어스로부터 3순위로 지명을 받았는데 드래프트의 교섭권을 보류한 채로 닛폰 강관에 입사, 1968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에이스로서 출전했다. 이 대회의 1차전 상대인 미쓰비시 중공업 미즈시마와의 경기에서 마쓰오카 히로무와 투수전을 펼친 끝에 1대 0으로 승리하는 등 맹활약했다.[4]

중학교 시절에는 오이타현 전체 모의고사에서 26위를 기록했고, 쓰쿠미 고등학교 보통과 입학 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했다. 입학 초에는 오버스로였으나 언더스로로 전향했다.[1]

1963년의 여름 고시엔에 출전. 1회전에서 주쿄상의 미와다 가쓰토시와 투수전을 벌여 3-4로 역전패했다.[2] 1년 후배 팀 동료로는 대기 투수 이케다 시게키, 3루수 나카무라 구니아키가 있었다. 처음에는 도쿄 대학 입학을 검토했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소케이센(와세다-게이오전)에 동경을 품었던 다카하시는 메이지 진구 야구장의 마운드에 서기 위해 이듬해 일반 입시를 통해 와세다 대학교 상학부에 진학, 미와다와 대학 동기가 되었다. 다른 동기에는 외야수 하야시다 마사토 등이 있다.

1966년 춘계 리그에서는 다부치 고이치에게 6호 홈런을 허용했다.

1967년 드래프트 3순위로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지명되었다. 프로에서 통용될 자신감이 없어 사회인 야구에서 실력을 시험할 목적으로 드래프트 교섭권을 보류한 채 일본강관에 입사했다.[3]

이후 드래프트 최종 기한(1968년 10월 10일) 전에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했다. 등번호는 이시카와 요조의 은퇴로 비어있던 '''14'''번을 부여받았다.

2. 1. 오이타 현립 쓰쿠미 고등학교 시절

다카하시 나오키는 오이타현 사이키시 출신으로, 오이타 현립 쓰쿠미 고등학교 시절인 1963년 하계 고시엔 대회(제45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1] 1회전에서 주쿄상의 미와다 가쓰토시와 투수전을 벌였으나 3-4로 역전패했다.[2] 1년 후배 팀 동료로는 대기 투수 이케다 시게키, 3루수 나카무라 구니아키가 있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오이타현 전체 모의고사에서 26위를 기록했고, 쓰쿠미 고등학교 보통과 입학 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했다. 입학 초에는 오버스로였으나 언더스로로 전향했다.[1]

처음에는 도쿄 대학 입학을 검토했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소케이센(와세다-게이오전)에 동경을 품었던 다카하시는 메이지 진구 야구장의 마운드에 서기 위해 이듬해 일반 입시를 통해 와세다 대학교 상학부에 진학, 미와다와 대학 동기가 되었다.

2. 2. 와세다 대학 시절

다카하시 나오키는 오이타현 사이키시 출신으로 오이타 현립 쓰쿠미 고등학교 시절인 1963년 하계 고시엔 대회(제45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2] 중학교 시절에는 오이타현 전체 모의고사에서 26위를 기록했고, 쓰쿠미 고등학교 보통과 입학 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할 정도로 학업 성적이 우수했다. 고등학교 입학 초에는 오버스로였으나 언더스로로 전향했다.[1]

이듬해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여 도쿄 6대학 리그에서는 야기사와 소로쿠, 미와타 가쓰토시의 후보 선수로 12경기에 등판해 2승 2패를 기록했다. 와세다 대학 입학은 중학교 시절부터 소케이센(와세다-게이오전)에 동경을 품었던 다카하시가 메이지 진구 야구장의 마운드에 서기 위해 일반 입시를 통해 와세다 대학교 상학부에 진학한 결과였다.[1] 1966년 춘계 리그에서는 다부치 고이치에게 6호 홈런을 허용하기도 했다.

1967년에 열린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선 도에이 플라이어스로부터 3순위로 지명을 받았는데 드래프트의 교섭권을 보류한 채로 닛폰 강관에 입사,[3] 1968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에이스로서 출전했다. 이 대회의 1차전 상대인 미쓰비시 중공업 미즈시마와의 경기에서 마쓰오카 히로무와 투수전을 펼친 끝에 1대 0으로 승리하는 등 맹활약했다.[4]

2. 3. 닛폰 강관 시절

오이타현 사이키시 출신으로 오이타 현립 쓰쿠미 고등학교 시절에는 1963년 하계 고시엔 대회(제45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1] 1회전에서 주쿄상의 미와다 가쓰토시와 투수전을 벌여 3-4로 역전패했다.[2] 1년 후배 팀 동료로는 대기 투수 이케다 시게키, 3루수 나카무라 구니아키가 있었다. 이듬해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여 도쿄 6대학 리그에서는 야기사와 소로쿠, 미와타 가쓰토시의 후보 선수로 12경기에 등판해 2승 2패를 기록했다.

1967년 드래프트 3순위로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지명되었다. 프로에서 통용될 자신감이 없어 사회인 야구에서 실력을 시험할 목적으로 드래프트 교섭권을 보류한 채 일본강관에 입사했다.[3] 1968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에이스로서 출전했다. 이 대회의 1차전 상대인 미쓰비시 중공업 미즈시마와의 경기에서 마쓰오카 히로무와 투수전을 펼친 끝에 1대 0으로 승리하는 등 맹활약했다.[4]

중학교 시절에는 오이타현 전체 모의고사에서 26위를 기록했고, 쓰쿠미 고등학교 보통과 입학 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했다. 입학 초에는 오버스로였으나 언더스로로 전향했다.[1] 처음에는 도쿄 대학 입학을 검토했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소케이센(와세다-게이오전)에 동경을 품었던 다카하시는 메이지 진구 야구장의 마운드에 서기 위해 이듬해 일반 입시를 통해 와세다 대학교 상학부에 진학, 미와다와 대학 동기가 되었다. 다른 동기에는 외야수 하야시다 마사토 등이 있다.

3. 프로 야구 선수 시절

1968년 드래프트 최종 기한을 앞두고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하여 도바시 마사유키로부터 등번호 '''21'''번을 물려받았다. 느긋한 움직임으로부터 손목을 꺾어 공을 쥐고 있는 부분을 보여주는 폼으로 던진 측면에 가까운 언더핸드 투수로서 1969년부터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했고, 5월까지 5승, 그 후 한동안 승리에서 멀어졌지만 7월 후반부터 8승을 거두는 등 시즌 13승(12선발승)을 기록하며 팀을 대표하는 에이스가 되었다.

1973년 6월 16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경기에서 타자 27명을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고[19][20], 1974년 8월 18일 긴테쓰와의 경기에서 ‘선발로서 리드한 채로 5회를 던진 후 한 번은 3루수로서 수비를 맡고, 세이브를 기록할 수 있는 조건에서 구원 등판하여 9회까지 던진 후 팀이 승리’함으로써 역사상 유일하게 ‘혼자서 한 경기에서의 승리 투수와 세이브 투수의 양쪽 모두 기록’을 달성했다(룰 개정에 의해 다음 시즌부터 달성하는 자체가 불가능해졌다.[21]).

1975년에는 17승(15선발승)을 올리는 등(1977년 17선발승으로 선발승 기록 갱신) 도에이 시대 말기부터 오랫동안 부동의 에이스로서 활약했다. 1979년 나루토 스프링 캠프 때에는 부드러운 표정을 커버하기 위해 콧수염을 기르기 시작했으며 현재에도 안경과 함께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고 있다. 그해 4월에는 퍼시픽 리그월간 MVP를 수상했고 최종적으로는 시즌 최다 무볼넷 경기 11차례라는 퍼시픽 리그 기록과 시즌 20승(16선발승)을 남겼다.

1981년 오사와 게이지 감독의 마무리 투수 보강의 팀 개혁과 맞물리는 형태로 에나쓰 유타카와의 맞트레이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전격으로 이적했다.[22] 20승 에이스와 구원 에이스와의 맞트레이드로 대형 맞트레이드가 성사되면서 화제가 되었다. 당시 오사와는 다카하시에게 투수진의 중심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어서 히로시마의 마쓰다 고헤이 구단주와 고바 다케시 감독에게 에나쓰의 영입을 신청했을 때 맞교환의 조건으로 다카하시의 이름을 거론하자 “다카하시만은 내놓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22] 그러나 히로시마 측은 조건을 양보하지 않았고 고심 끝에 결정했다고 훗날 밝혔다. 히로시마에서는 2년 동안 2승(1선발승)을 기록했다.

1982년 6월에 후루사와 겐지, 오하라 데쓰야와의 맞트레이드로 세이부 라이온스에 이적했다. 와세다 대학 선배인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 밑에서 다시 한 번 익숙한 퍼시픽 리그에서 7승(모두 선발)을 올리는 등 라이온스가 도코로자와로 연고지를 이전한 이후 첫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이듬해 1983년에는 13승(모두 선발) 3패를 기록하여 최고 승률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5년 오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트레이드로 이적하여 이듬해 1986년에 은퇴했다. 41세까지 현역 생활을 계속했으며, 통산 169승(158선발승) 가운데 167승(157선발승)을 퍼시픽 리그에서 기록했다.

3. 1. 도에이 플라이어스·닛타쿠홈 플라이어스·닛폰햄 파이터스 시절

1968년 드래프트 최종 기한을 앞두고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하여 도바시 마사유키로부터 등번호 '''21'''번을 물려받았다. 느긋한 움직임으로부터 손목을 꺾어 공을 쥐고 있는 부분을 보여주는 폼으로 던진 측면에 가까운 언더핸드 투수로서 1969년부터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했고, 5월까지 5승, 그 후 한동안 승리에서 멀어졌지만 7월 후반부터 8승을 거두는 등 시즌 13승(12선발승)을 기록하며 팀을 대표하는 에이스가 되었다.

1973년 6월 16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경기에서 타자 27명을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고[19][20], 1974년 8월 18일 긴테쓰와의 경기에서 ‘선발로서 리드한 채로 5회를 던진 후 한 번은 3루수로서 수비를 맡고, 세이브를 기록할 수 있는 조건에서 구원 등판하여 9회까지 던진 후 팀이 승리’함으로써 역사상 유일하게 ‘혼자서 한 경기에서의 승리 투수와 세이브 투수의 양쪽 모두 기록’을 달성했다(룰 개정에 의해 다음 시즌부터 달성하는 자체가 불가능해졌다.[21]).

1975년에는 17승(15선발승)을 올리는 등(1977년 17선발승으로 선발승 기록 갱신) 도에이 시대 말기부터 오랫동안 부동의 에이스로서 활약했다. 1979년 나루토 스프링 캠프 때에는 부드러운 표정을 커버하기 위해 콧수염을 기르기 시작했으며 현재에도 안경과 함께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고 있다. 그해 4월에는 퍼시픽 리그월간 MVP를 수상했고 최종적으로는 시즌 최다 무볼넷 경기 11차례라는 퍼시픽 리그 기록과 시즌 20승(16선발승)을 남겼다.

1981년 오사와 게이지 감독의 마무리 투수 보강의 팀 개혁과 맞물리는 형태로 에나쓰 유타카와의 맞트레이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전격으로 이적했다.[22] 20승 에이스와 구원 에이스와의 맞트레이드로 대형 맞트레이드가 성사되면서 화제가 되었다. 당시 오사와는 다카하시에게 투수진의 중심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어서 히로시마의 마쓰다 고헤이 구단주와 고바 다케시 감독에게 에나쓰의 영입을 신청했을 때 맞교환의 조건으로 다카하시의 이름을 거론하자 “다카하시만은 내놓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22] 그러나 히로시마 측은 조건을 양보하지 않았고 고심 끝에 결정했다고 훗날 밝혔다.

3. 2.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1981년 에나쓰 유타카와의 맞트레이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이적했다.[22] 20승 에이스와 구원 에이스와의 맞트레이드로 대형 맞트레이드가 성사되면서 화제가 되었다. 당시 닛폰햄 파이터스 감독이던 오사와 게이지는 다카하시에게 투수진의 중심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어서 히로시마의 마쓰다 고헤이 구단주와 고바 다케시 감독에게 에나쓰의 영입을 신청했을 때 맞교환의 조건으로 다카하시의 이름을 거론하자 “다카하시만은 내놓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22] 그러나 히로시마 측은 조건을 양보하지 않았고 고심 끝에 결정했다고 훗날 밝혔다. 히로시마에서는 2년 동안 2승(1선발승)을 기록했고 시즌 중인 1982년 6월에 후루사와 겐지, 오하라 데쓰야와의 맞트레이드로 세이부 라이온스에 이적했다.

3. 3.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1982년 6월에 후루사와 겐지, 오하라 데쓰야와의 맞트레이드로 세이부 라이온스에 이적했다.[22] 와세다 대학 선배인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 밑에서 다시 한 번 익숙한 퍼시픽 리그에서 7승(모두 선발)을 올리는 등 라이온스가 도코로자와로 연고지를 이전한 이후 첫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22] 이듬해 1983년에는 13승(모두 선발) 3패를 기록하여 최고 승률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5년 오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3. 4.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다카하시 나오키는 1985년 오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이적하여 이듬해 1986년에 은퇴했다. 41세까지 현역 생활을 계속했으며, 통산 169승(158선발승) 가운데 167승(157선발승)을 퍼시픽 리그에서 기록했다. 1986년 오프에 타 구단으로부터의 오퍼가 있었지만, 스스로 은퇴를 결심하면서 NPB에 소속된 현역 선수는 모두 전후 출생이 되었다.

4. 은퇴 후

1987년부터 1992년까지 니혼 TV 해설자,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군 투수 코치를 맡았고 1996년에는 NHK에서 메이저 리그 중계의 해설을 맡았다. 1997년에는 메이저 리그 팀인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투수 코치로 발탁돼 1년간 맡았다.

1998년부터는 NHK의 메이저 리그 중계 메인 해설자로 활동 중에 있고 2010년부터 류쓰 케이자이 대학 경식 야구부의 코치를 맡고 있다.

은퇴 후에는 니혼 TV '○요일 나이트→극공간 프로야구' · 라디오 일본 '자이언츠 나이트' 야구 해설자(1987년 - 1992년)를 거쳐, 대학 선배이자 세이부 시절 코치였던 곤도 아키히토가 감독을 맡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1군 투수 코치(1993년 - 1994년)를 역임했다. 요코하마 퇴단 후에는 재빨리 메이저 리그에 눈을 돌려, NHK '메이저 리그 중계' 야구 해설자(1995년 - 1996년)를 역임했으며, 1997년에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일본인 최초의 투수 코치로 취임했다. 귀국 후 1998년부터는 NHK '메이저 리그 중계' 야구 해설자가 주가 되었고, 요코하마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외에 류츠케이자이 대학 코치(2010년 - 2015년)도 역임했다. 2015년 8월 22일, 니혼햄 대 오릭스전(도쿄 돔)의 시구식에 등판하여, 옛 투구를 선보였다[14][15]

4. 1. 야구 해설가 및 지도자

1987년부터 1992년까지 니혼 TV 해설자를 맡았고, 1993년부터 1995년까지는 곤도 아키히토가 감독을 맡았던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군 투수 코치를 역임했다.[14][15] 1996년에는 NHK에서 메이저 리그 중계 해설을 맡았다. 1997년에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일본인 최초로 투수 코치로 발탁되어 1년간 활동했다.

1998년부터는 NHK의 메이저 리그 중계 메인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요코하마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외에 2010년부터 2015년까지 류쓰 케이자이 대학 경식 야구부의 코치를 역임했다. 2015년 8월 22일, 니혼햄 대 오릭스전(도쿄 돔)의 시구식에 등판하여 옛 투구를 선보였다.[14][15]

4. 2. 사업가

2004년, 요코하마시 고호쿠구에서 대형 접골원 ‘리리아타운 접골원’을 개업했다. 원내에 ‘다카하시 나오키 스포츠 케어 오피스’를 마련해 야구 선수를 꿈꾸는 청소년들의 신체 관리의 중요함을 전하고 있다.[14][15] 2006년에는 쌀겨 100%의 효소 목욕탕인 ‘살롱 드 효소’를 개업했는데 프로 야구 선수나 연예인, 각계 저명인이 신체 관리를 위해 방문하는 것으로 언론에 보도됐다. 그 외에도 부동산 임대 사업에도 종사하고 있다. 사업가로서 성공한 야구인으로 소개돼 강연 활동과 환갑 야구, 소년 야구 지도 등 자원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5. 야구 이외의 활동 및 에피소드

2004년, 요코하마시 고호쿠구에서 대형 접골원 ‘리리아타운 접골원’을 개업하여 원내에 ‘다카하시 나오키 스포츠 케어 오피스’를 마련, 야구 선수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신체 관리의 중요성을 전하고 있다. 2006년에는 쌀겨 100% 효소 목욕탕인 ‘살롱 드 효소’를 개업했는데, 프로 야구 선수나 연예인, 각계 저명인사들이 신체 관리를 위해 방문하는 것으로 언론에 보도됐다. 부동산 임대 사업에도 종사하고 있으며, 사업가로서 성공한 야구인으로 소개돼 강연 활동과 환갑 야구, 소년 야구 지도 등 자원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몸이 약해서 초등학교 입학을 1년 늦췄다. 현역 시절이던 1980년에는 도쿄 12채널에서 방영된 드라마 《미라클 걸》 제1화 ‘프로 야구 에이스를 노려라! 살인귀의 표적’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잡지 《애견의 친구》에서 자신의 애견과 함께 지면에 등장, 애견가의 일면도 보였다. 도쿄 오다이바에 있는 오에도온센 모노가타리의 설립에 관여하여 연극공방 나카무라 극장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졌다.

친척에는 정치가인 고토다 마사즈미, 고토다 마사하루, 여배우 미즈노 마키, 배우 아리카와 히로시가 있다. 가족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하치스카 마사카쓰의 후예인데, 여배우 샤쿠 유미코도 친척에 해당한다. 국내외를 불문하고 YOSHIKI, 미카와 겐이치, 모리 미쓰코, 이즈미 핀코, 오와다 신야 등 예능계나 각계 저명인사, 정계와도 친분이 깊다. 간다 우노의 부친과 동급생으로 야구 동료이기도 하다.

60세가 넘은 나이에 아메바 블로그에서 자신의 블로그를 개설했다. 다카하시 나오키는 매우 꼼꼼한 성격으로, 현역 시절의 락커는 깨끗하게 정리 정돈되어 있었다고 에가와 유타카와 이시게 히로노리가 말했다.[17]。젊은 시절의 이토 츠토무는 다카하시에게 '네 사인에 고개를 젓지 않겠다'는 말을 들은 것이 격려가 되었다고 한다.[18]

6. 상세 정보

6. 1. 출신 학교

6. 2. 선수 경력

닛폰 강관에서 선수 생활을 하였다. 1968년부터 1980년까지 도에이 플라이어스·닛타쿠홈 플라이어스·닛폰햄 파이터스, 1981년부터 1982년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세이부 라이온스, 198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선수 생활을 하였다.

6. 3. 지도자·기타 경력

니혼 TV 야구 해설위원(1987년 ~ 1992년)을 거쳐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군 투수 코치(1993년 ~ 1995년)를 역임했다. 1996년과 1998년부터는 NHK에서 프로 야구 메이저 리그 해설위원을 맡고 있다. 1997년에는 캔자스시티 로열스 투수 코치를 맡았다.

6. 4. 수상·타이틀 경력

6. 5. 개인 기록

다카하시 나오키는 1969년 4월 13일 한큐 브레이브스전에서 첫 등판 및 첫 선발로 나와 6⅓이닝 5실점(4자책점)을 기록했다. 같은 경기에서 프랜시스 아그윌리로부터 첫 탈삼진을 기록했다. 4월 23일 난카이 호크스전에서는 9이닝 3실점으로 첫 승리와 첫 완투 승리를 동시에 달성했다. 6월 4일 한큐 브레이브스전에서는 첫 완봉 승리를 거두었다. 1974년 6월 8일 롯데 오리온스전에서는 9회초에 구원 등판하여 1이닝 무실점으로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1978년 4월 9일 한큐 브레이브스전에서 9이닝 3실점(1자책점) 완투 승리로 통산 100승을 달성했다(역대 72번째). 같은 해 8월 26일 롯데 오리온스전에서는 3회초 레론 리로부터 탈삼진을 기록하며 통산 1000탈삼진을 달성했다(역대 56번째). 1983년 6월 15일 긴테쓰 버펄로스전에서는 9이닝 1실점 완투 승리로 통산 150승을 달성했다(역대 36번째).

1979년에는 시즌 11개 무볼넷 경기를 기록하며 퍼시픽 리그 기록을 세웠다. 1973년 6월 16일 긴테쓰 버펄로스전에서는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역대 47번째). 일본 프로 야구 올스타전에는 6회(1975년, 1977년 ~ 1980년, 1983년) 출전했다.

6. 6. 등번호

다카하시 나오키는 1968년에 14번, 1969년부터 1980년까지 21번, 1981년부터 1982년 시즌 도중까지 16번, 1982년 시즌 도중부터 1985년까지 17번, 1986년에 19번을 사용했다. 지도자 생활을 할때는 1993년부터 1995년까지 75번, 1993년부터 1994년까지 77번을 사용했다.

참조

[1]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14年12月1日号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4-12-01
[2] 서적 全国高等学校野球選手権大会70年史 朝日新聞社編 1989
[3] 간행물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別冊夏祭号 1954-1972東映フライヤーズ暴れん坊伝説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20
[4] 서적 都市対抗野球大会60年史 日本野球連盟 毎日新聞社 1990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웹사이트 史上初の「0球セーブ」に「勝ち星・セーブの両獲り」も! 本当にあった“珍セーブ”記録 https://baseballking[...] BASEBALL KING 2020-07-28
[9] 웹사이트 球場史 http://www.jingu-sta[...]
[10] 서적 プロ野球を創った名選手・異色選手400人 講談社 1999
[11] 간행물 よみがえる1970年代のプロ野球 Part6 1979年編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22-06
[12] 간행물 【セ・パ誕生70年記念特別企画】よみがえる1980年代のプロ野球 Part.6 [1980年編]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20
[13] 웹사이트 【11月10日】1980年(昭55) “優勝請負人”江夏、東京へ エースと守護神のトレード https://web.archive.[...] 2007-11-10
[14] 뉴스 日本ハムOB高橋直樹氏ノーバン始球式で斎藤佑に檄 - 野球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15] Youtube 【プロ野球パ】レジェンド・高橋直樹氏が衰え知らずのメモリアルピッチ披露 2015/08/22 F-Bs https://www.youtube.[...]
[16] 간행물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2月号 1974-1987 日本ハムファイターズ後楽園伝説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21
[17] Youtube 【真実】衣笠祥雄さんがマウンドで江夏豊さんにかけた言葉がすごすぎる... https://www.youtube.[...]
[18] Youtube 若き伊東勤捕手が味わった屈辱! https://www.youtube.[...]
[19] 문서
[2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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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웹인용 【11月10日】1980年(昭55) “優勝請負人”江夏、東京へ エースと守護神のトレード http://www.sponichi.[...] 2007-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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