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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와 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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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사와 게이지는 일본의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선수 시절에는 난카이 호크스에서 외야수로 활약했으며, 감독으로서 롯데 오리온스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를 이끌었다. 릿쿄 대학 졸업 후 난카이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으며, 수비 능력을 바탕으로 1959년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감독으로서 닛폰햄을 두 차례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1981년 일본 시리즈 준우승을 기록했다. 그는 '오야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친근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사랑받았으며, 2010년 담낭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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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와 게이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명오사와 아키라
출생일1932년 3월 14일
사망일2010년 10월 7일
출생지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
신장173
체중77
利き腕오른쪽
타석오른쪽
게이지 오사와 1956 스캔10001
1956년 올스타전 당시의 오사와
선수 경력
포지션외야수
프로 입단 연도1956년
첫 출장1956년 3월 24일
마지막 출장1965년 10월 8일
고등학교가나가와현립 히라쓰카 공업 학교
가나가와현립 쇼코 고등학교
대학교릿쿄 대학
선수 경력난카이 호크스 (1956 - 1964)
도쿄 오리온스 (1965)
감독/코치 경력
감독/코치 경력도쿄 오리온스/롯데 오리온스 (1966 - 1972)
닛폰햄 파이터스 (1976 - 1984, 1993 - 1994)

2. 선수 시절

1932년 3월 14일 가나가와현 가타세에서 태어난 오사와 게이지는 형들의 영향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야구 외에도 스모, 육상 등 다양한 스포츠에 재능을 보였다. 학창 시절에는 장난기가 심했고, 잦은 폭력 사건으로 퇴학당하기도 했다. 1947년 맏형의 도움으로 가나가와 현립 상공고등학교에 재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야구에 전념했다.

1950년 여름, 고등학교 2학년 때 팀의 에이스로서 가나가와현 대회에서 우승하며 학교를 고시엔 대회에 진출시켰다. 1차전에서 승리했지만, 2차전에서 패배했다. 1951년 하계 고시엔 가나가와현 예선에서는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폭행 사건을 일으켜 1년간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후 릿쿄 대학 선배였던 당시 주심의 권유로 릿쿄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릿쿄 대학에서는 1학년 때부터 외야수로 출전했지만, 고등학교 시절 징계 문제로 출전 정지를 당했다. 1953년 춘계 리그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리그 통산 94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255, 2홈런, 32타점을 기록했으며, 베스트 나인을 두 차례 수상했다. 1954년에는 좌익수로서 보기 드문 좌익 땅볼을 기록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 릿쿄 대학 감독 스나오시 구니노부의 폭력적인 훈련 방식에 반발하여 하급생들과 함께 감독 퇴진 운동을 주도했다. 훗날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감독과의 관계를 회복했다.[15][16]

2. 1. 학창 시절 (1932~1955)

1932년 3월 14일 가나가와현 가타세에서 태어났다.[103] 맏형 기요시, 둘째 형 기미오의 영향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야구 외에도 스모, 육상 등 다른 스포츠에서도 뛰어났다.[103] 학창 시절에는 장난기가 심했다. 1945년 구제 중학교인 히라쓰카 공업학교에 입학했으나,[4] 학교 안팎에서 폭력 사건을 자주 일으키고 현지에서 나이가 많은 깡패와 싸움을 일으켜 경찰이 찾아올 정도로 구설수에 올라 퇴학당했다.[5] 1947년 4월 맏형이자 주부니혼군 소속 프로 야구 선수였던 기요시의 주선으로 맏형의 모교인 가나가와 현립 상공고등학교에 2학년으로 재입학했다.[5] 맏형의 간곡한 설득으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야구에 몰두했다.[7]

1학년 때 하계 고시엔 가나가와현 대회 예선 결승에서 사사키 신야가 소속된 쇼난 고등학교에게 패했는데,[8] 이 해의 쇼난 고등학교는 고시엔 대회에서 전국 제패를 달성했다. 1950년 여름, 2학년 때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여 가나가와현 대회에서 우승, 학교 창설 이래 처음으로 고시엔 대회 출전을 이뤘다.[9] 1차전에서는 센다이 제1고등학교(미야기현)에게 대승을 거두었지만 2차전에서는 우쓰노미야 공업고등학교(도치기현)의 간다 마사오(훗날 다이요 웨일스에 입단), 요시나리 다케오의 배터리에 막혀 패했다. 같은 해 추계 간토 대회 가나가와현 예선 결승에서 쇼난 고등학교의 에이스 모로키 스케히로에게 막혀 탈락했다.

1951년 하계 고시엔 가나가와현 예선 2차전에서 즈시카이세이 고등학교와 맞붙었는데, 이 경기에서 자신있게 던진 스트라이크를 볼로 판정받거나 확실히 세이프라고 생각한 터치 플레이를 두 번이나 아웃당하는 등 구심의 판정에 불복했다. 경기는 연장전 끝에 밀어내기 볼넷으로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분이 풀리지 않은 오사와는 경기 종료 후 구장 화장실에서 우연히 주심을 만나 다른 동료 선수 한 명과 함께 주심을 발로 걷어차는 등 폭행을 저질러 가나가와 상공고등학교 야구부는 1년 간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훗날 오사와에게 피해를 당한 주심이 자택을 방문하여 자신이 릿쿄 대학 경식 야구부 선배라고 밝힌 뒤 “릿쿄 대학에는 자네처럼 야구를 잘하면서도 승부 근성과 운동 능력이 있는 선수가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말해 스카웃 됐다.[10]

체육특기생 추천을 받고 릿쿄 대학 문학부에 진학하여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는 1학년 춘계 리그전부터 외야수로 출전했지만, 직후 시마오카 기치로 메이지 대학 감독이 ‘출신 고교가 1년 간 출전 정지 처분을 받고 있는 와중에 오사와가 출전한 것 자체가 이상하다’라며 이의를 제기했고, 그 결과 모교인 가나가와 상공고등학교의 징계가 해제될 때까지 오사와도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다.[11] 1953년 춘계 리그에서는 에이스 고지마 구니카즈(훗날 도쿄 가스에서 활약)를 이끌고 우승했다. 같은 해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도 결승전에서 아나부키 요시오 등이 소속된 주오 대학을 누르고 첫 우승을 차지했다. 그 후 메이지 대학, 와세다 대학의 ‘양강 시대’가 되면서 우승하지 못했다. 리그 통산 94경기에 출전하여 314타수 80안타, 타율 0.255, 2홈런, 32타점을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을 두 차례 차지했다. 1954년 추계 리그 도쿄 대학과의 경기에서는 좌익수로서 좌익 땅볼이라는 보기 드문 기록을 남겼다. 상대 타자 하라다 야스오가 좌익수 앞으로 안타성 타구를 날렸는데 오사와는 정위치보다 약간 앞에서 지키고 있던 터라 타구를 원바운드로 잡아내자마자 곧바로 1루로 송구하여 타자 주자를 아웃시켰다.[12]

대학 동기로는 호사카 유키나가, 후루타 마사유키, 1년 후배인 아즈마 미노루, 호리모토 리쓰오, 야토 다카오, 2년 후배로는 훗날 ‘릿쿄 3인방’이라고 불리는 나가시마 시게오, 스기우라 다다시, 모토야시키 긴고 등이 있었다.

당시 릿쿄 대학 감독인 스나오시 구니노부는 연습에서 실수를 하는 부원에게 방망이로 머리를 내리쳐서 고막이 터지도록 구타했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로 허벅지에 피가 나올 정도로 걷어차는 등 폭력적인 훈련을 했다.[13] 오사와는 스나오시의 훈련 방식에 견디지 못한 나가시마, 스기우라 등의 하급생들로부터 ‘감독이 그만두든지, 아니면 우리가 그만두든지 둘 중 하나’라고 간청받았다. 오사와는 스나오시를 직접 만나 스기우라를 비롯한 하급생들의 의견을 말했지만 스나오시는 “내가 반성할 필요가 어디 있어? 너희들이 같이 야구를 그만둬도 상관없어. 나는 내 방식을 바꾸지 않겠다”[14]라고 거절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OB회를 통해서 스나오시는 감독직에서 사임하게 됐는데 이로써 오사와는 “‘스나오시 감독 배척 운동’의 주모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다.[15]

훗날 오사와는 “젊은 객기라해도 내가 한 행동은 은사에게 취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반성했다.[15] 스나오시와는 훗날 앙금은 없어졌다고 하며 1992년 말에는 오사와가 직접 앞장서서 야구부 OB들을 모아놓고 스나오시를 위한 모임을 열었다.[16]

3. 지도자 시절

1965년, 33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한 오사와 게이지는 이듬해인 1966년부터 도쿄·롯데에서 타격 코치를 맡았고, 1969년부터 1971년 시즌 도중까지 2군 감독을 역임했다. 1970년에는 2군 감독으로서 이스턴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오사와에게 지도를 받은 도쿠쓰 다카히로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현역 시절에 오사와는 홈런 타자가 아니었지만 애버리지 타자를 잘 키워나갔다. 그래서 내가 애버리지 타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었다.|현역 시절에 오사와는 홈런 타자가 아니었지만 평균적인 타자를 잘 키워나갔다. 그래서 내가 평균적인 타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었다.일본어[108]

1968년 시즌이 끝난 후, 육상 단거리 달리기 선수였던 이지마 히데오가 롯데에 입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109] 이지마의 입단 후 1969년 시즌 개막 때까지 일대일 지도를 맡았다.[110] 1971년, 2군으로 내려간 이지마가 경기에 출전하여 타석에 들어선 것은 오사와의 의향이었다고 한다.[109]

3. 1. 롯데 오리온스 감독 (1971~1972)

1971년 7월 23일,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8경기 차로 선두를 빼앗기자 구단주 나카무라 나가요시는 당시 1군 감독이던 노닌 와타루를 2군 감독으로 강등시키고 오사와를 1군 감독으로 임명했다.[111] 7월 24일 시점에서 2위를 기록하여 선두 한큐와는 8경기 차였지만 7월 30일부터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열린 한큐와의 4연전에서 4연승을 기록하며 승차를 없앴다.[112]

구단은 오사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시즌 도중인 8월 3일에 5년 계약을 맺었다.[113] 시즌 종료 후, 오사와는 ‘타격만으로는 일본 최고의 팀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에노모토 기하치, 에토 신이치, 앨트 로페즈를 방출하고 노무라 오사무, 무라카미 기미야스, 도야마 요시아키를 영입했다. 수비에 약점이 있는 선수들을 방출하고 젊은 선수들을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단행하여 1972년 시즌에 돌입했으나, 단 한 번도 상위권에 들지 못한 채 5위로 내려앉았다. 전년도에 193개의 홈런을 기록했던 강력한 타선을 해체하면서까지 강화하려던 투수진이 무너지면서 팀 평균 자책점 4.54라는 당시 퍼시픽 리그 최악의 신기록을 세웠다.

시즌 종료 후 구단주가 오사와의 연임을 생각하고 있던 나카무라 나가요시에서 신격호로 바뀌면서, 신격호와 같은 재일 한국인이면서도 당시 롯데 산하 도쿄 타임스에서 평론가로 활동하며 자신이 운영하는 기획사도 롯데로부터 자금 원조를 받고 있던 가네다 마사이치(일본으로 귀화)가 신격호로부터 감독직 제안을 받았다. 오사와의 사임을 주장하고 있던 본사 측에서는 가네다를 영입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고,[114] 일부 임원들이 나카무라가 매수한 후쿠오카 야구(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로 옮긴 것에 더해 위약금을 받는 것을 조건으로 5년 계약을 파기하고 해임시켰다. 오사와는 위약금으로 150억의 수표를 받았다고 한다.

3. 2. 닛폰햄 파이터스 감독 (1976~1984, 1993~1994)

1975년 10월, 미하라 오사무 구단 사장의 요청으로 닛폰햄 파이터스 감독으로 취임했다. 요미우리에서 하리모토 이사오를 트레이드로 방출하고 다카하시 가즈미, 도미타 마사루를 영입했으며, 한신에서 무라카미 마사노리, 긴테쓰에서 나가부치 요조를 영입하는 등 대형 보강을 단행했다.[115]

연도주요 내용
1976년리그 5위 기록
1977년도미타, 바비 미첼을 중심으로 분투했지만 투수진이 무너지면서 리그 5위[115]
1978년다카하시 나오키, 무라카미, 사에키 가즈시 등 투수 3인방이 맹활약, 미첼은 리그 최다 36홈런으로 홈런왕 차지. 난카이에서 트레이드로 입단한 가시와바라 준이치는 타율 0.294, 24홈런 기록, 후루야 히데오는 1년차부터 주전 3루수로 고정[116]되며 닛폰햄 최초로 A클래스(1~3위) 진입. 2년 연속 100만 명 이상 관객 동원[115]
1979년다카시로 노부히로가 신인 최초로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수상[115]
1980년신인 기다 이사무가 22승 8패 4세이브로 퍼시픽 리그 신인왕최우수 선수 동시 수상.[115] 후기 시즌 긴테쓰와 우승 경쟁 중 최종전 패배로 우승 좌절
1981년히로시마와 트레이드로 다카하시 나오키 방출, 에나쓰 유타카 영입.[115] 마시바 시게쿠니 15승 무패, 오카베 노리아키 최우수 평균 자책점, 다카하시 가즈미 14승, 에나쓰 28SP로 최우수 구원 투수 달성. 토니 솔레이터 홈런왕 및 승리타점왕, 시마다 마코토 타율 및 도루 2위.[115] 후기 우승, 플레이오프에서 롯데 꺾고 1974년 구단 인수 후 첫 리그 우승. 일본 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2승 4패로 패배
1982년에이스 구도 미키오 등 투수진 붕괴로 전기 시즌 4위.[115] 후기 시즌 다카하시 사토시 선발 복귀, 신인 다나카 유키오 등 투수진 분투로 2년 연속 우승.[115] 우승 직전 구도 손가락 골절 부상. 플레이오프 1차전 구도 선발 등판, 세이부에게 1승 3패로 패배
1983년토미 크루즈, 솔레이터 맹활약, 후타무라 다다미 신인왕 수상, 투수진 부진으로 3위[115], 6년 연속 A클래스. 시즌 후 감독 사임, 육성부장 발탁
1984년팀 최하위, 우에무라 감독 사임 후 감독 복귀, 구단 최악 14연패, 9년 만에 최하위



1992년 도바시 마사유키 감독 취임, 팀은 5위. 오사와는 도바시 해임 반대, 선수와 코칭 스태프 반대로 도바시 사임.[122] 오 사다하루, 우에다 도시하루 영입 시도 실패 후 구단 요청으로 감독 복귀.

연도주요 내용
1993년대학 후배 다네모 마사유키 2군 감독, 호리모토 리쓰오 2군 코치 초빙, 한신 은퇴 후루야 히데오 2군 코치 복귀.[123] 시라이 야스카쓰 선발 전향, 신인 야마하라 가즈토시 마무리 발탁(부진으로 가네이시 아키히토 구원 전향, 13세이브, 평균 자책점 2.09). 히로세 데쓰로 주전 유격수 및 주장 발탁. 다나카 유키오, 니시자키 유키히로 부활, 릭 슈 맹활약, 세이부와 경쟁 끝에 1경기차 리그 2위. “마쿠하리 해변의 이라부 해파리에 쏘였다” 발언, 오야붕(親分일본어) 신어·유행어 대상 ‘대중어 부문·금상’ 선정
1994년주력 투타 부상 속출, 최하위(6위). 5개 구단 상대 모두 패, 타율, 득점, 안타, 타점, 평균 자책점, 실점, 도루 모두 리그 최하위. 9월 29일, 홈 도쿄 돔 최종전 후 팬들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 감독 사임 및 닛폰햄 퇴단


4. 평가 및 영향


  • '''오야붕'''(親分일본어)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선글라스를 쓴 관록 있는 외모, 두목과 같은 성격, 친근한 말투에서 비롯되었다. 호텔에서 사람들이 "오야붕"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호텔 관계자가 야쿠자 두목으로 착각하고 전전긍긍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130] 프로 야구계에서 '오야붕'이라는 별명은 현역 시절 감독인 쓰루오카 가즈토가 먼저 사용했지만, 오사와는 저서에서 쓰루오카에게는 '상'(さん일본어)을 붙여 '쓰루오카 오야붕'이라고는 쓰지 않았다고 밝혔다. 현역 시절 별명은 앳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포포짱'(ポッポちゃん일본어)이었는데, 난카이의 하와이 캠프 때 O자형 다리를 가진 비둘기가 걷는 모습을 보고 선수 중 누군가가 '오사와랑 꼭 닮았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130]
  • 에나쓰 유타카를 닛폰햄에 영입할 때, 혼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 구단주 마쓰다 고헤이의 자택으로 찾아가 마쓰다와 동석한 고바 다케시 앞에서 술을 마시며 열변을 토해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히로시마는 다른 구단의 조건을 들은 후 결론을 내려고 했지만, 오사와의 열의에 마쓰다가 '제가 졌습니다. 결정합시다'라고 말하며 그 자리에서 협상이 이뤄졌다고 한다.[131] 에나쓰는 닛폰햄 입단 당시 오사와에 대해 "도로 공사 현장 감독 같은 분위기로 선수를 두들겨 패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라고 말했지만, 오사와의 두목같은 기질을 좋아했고 이후 오사와가 살아있을 때까지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오사와도 에나쓰를 '우리의 승리 패턴은 에나쓰가 나오는 시합'이라고 말하며 신뢰를 보였고, 에나쓰가 소속된 3년 간 닛폰햄은 리그 최강팀으로 발전했다.
  • 감독으로서의 통산 성적은 1547경기에 출전하여 725승 99무 723패, 승률은 5할 1리이다. 오사와는 "승리하면서 감독 생활을 끝낼 수 있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다. 명장이라니 분에 겨운 소리이지만 저금 2(승패마진 +2)인가. 딱 좋게 끝낼 수 있었다"라고 자신의 감독 성적을 되돌아보았다.
  • 통산 퇴장 횟수는 7회[132]이며, 터피 로즈(14회), 마티 브라운(12회), 가네다 마사이치, 오치아이 히로미쓰(8회)에 이어 5위를 기록했다.[133] 감독으로서의 퇴장 횟수 7회는 2009년 8월 27일 브라운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프로 야구 최다 기록이었다. 《선데이 모닝》에서 퇴장 관련 이슈가 나오면 '폭력 반대'를 외치거나 통산 퇴장 횟수 순위가 적힌 플립 차트가 제시되는 등 매번 웃음을 자아냈다.
  • 시마다 마코토는 "그라운드에서 결과를 남기면 아무리 술을 마시고 몇 시에 돌아오든 불평을 늘어놓지 않는다. 선수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라고 말했다.[134]
  • 1976년 6월 17일 한큐전에서 한큐 투수 다케무라 가즈요시가 빈볼을 던지자 1루 코치 박스에 있던 오사와는 마운드로 달려가 분노했지만, 그 후에도 다시 빈볼을 던지자 다케무라를 구타하여 퇴장당했다.[135] 이 일로 퍼시픽 리그 연맹으로부터 10일 간의 출전 정지와 벌금 100000JPY의 징계가 내려졌지만, 출전 정지 기간에는 대리 감독을 복수의 코치로 시켜 코치의 지휘 능력을 벤치에서 체크했다. 1983년 6월 28일 긴테쓰전에서는 수비방해를 둘러싸고 누심에게 거칠게 항의하다가 경기 종료 후 퇴장 명령을 받았다.[136]
  • 오리온스 감독 시절, 난카이 에이스 에모토 다케노리가 오리온스 선두 타자에게 몸에 맞는 공을 던진 것에 격분하여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날 뻔했지만, 포수 겸 감독 노무라 가쓰야의 중재로 상황이 종료됐다. 에모토와 오사와는 이후 친해져서 에모토가 은퇴했을 때 "안타깝다. 에모토, 좀 더 야구를 했어야 했다"라며 선수 생활을 계속하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 스포츠 프로그램에서 페넌트레이스 개막 전 12개 구단 감독들이 총출연하여 팀의 준비 태세를 이야기하는 기획에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 모리 마사아키가 "우리 팀은 빗대어 말하자면 아직 벚꽃이 30% 정도 피었을 뿐이다"라고 발언했을 때 오사와는 "왜 너는 진심으로 말을 못하냐!"라고 일갈했다. 1993년에는 오사와의 발언에 대해 세이부 코치가 트집을 잡자, 오사와는 "세이부의 코치는 아기 너구리에 우미보즈, 모리는 기후의 저금통이다"라고 비유했다. 하지만 오사와는 모리와 친분이 있었고, 일부러 그런 발언을 했다고 한다. 세이부와의 우승 경쟁에서 패해 2위로 끝난 1993년, 오사와는 일본 시리즈를 앞두고 세이부 훈련장에 나타나 "1승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모리에게 "퍼시픽 리그 대표로 일본 시리즈에 나가는 거니까 꼭 우승하라고. 힘내라"며 따뜻한 말을 돌려주었고, 모리는 "역시 오사와답다. 감사합니다"라고 웃으며 고마워했다.
  • TV에 등장할 때는 기모노 차림이 많았지만, 야구 해설 등을 할 때는 정장 등의 양복을 착용했다. 다이토건탁 광고에는 양복(클래식 타입의 골프웨어)을 입고 출연했다. 난카이 루키 시즌에는 가네보 화장품 포스터에 모델로 기용된 적이 있다.
  • 싫어하는 음식은 없었고, 초콜릿 계통의 음식, 특히 에클레르코코아를 좋아했다. 반려 동물을 좋아해서 고양이를 키웠다.
  • 은퇴 후에도 마운드에서 노바운드로 포수를 겨냥하여 투구할 수 있었다.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팀인 군마 다이아몬드 페가수스 시구식에서 군마현 지사 오사와 마사아키와 함께 '더블 오사와'로서 시구식을 치렀는데, 오사와 지사가 노바운드였던 것에 대해 자신은 원바운드를 하자 《선데이 모닝》에서 오사와 지사에게 '훌륭하다'(あっぱれ일본어)를, 자신에게 '떽'(喝일본어)이라고 꾸짖었다.
  • 도쿄 6대학 야구 시구식에서도 노바운드로 포수 위치까지 던졌다. 그러나 《선데이 모닝》에서 하리모토 이사오에게 '시구식인데 기모노로 나올 일은 없지 않느냐'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떽'을 날렸다.
  • 메이저 리그를 싫어했지만, 함께 출연한 하리모토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았다(선데이 모닝에서). 닛폰햄이 홋카이도로 연고지를 이전한 후에는 홋카이도의 TV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자주 출연했고, 삿포로 돔에서의 닛폰햄 주최 이벤트에도 자주 참석했다.
  • 야구 외의 스포츠에도 통했는데, 특히 축구의 나카무라 슌스케, 테니스의 마리아 샤라포바의 팬이었다. 경정 지식은 야구계 1인자로 '야구계의 대표적인 경정통'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끔 경정장 등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 1994년 9월 29일, 홈구장인 도쿄 돔에서의 최종전이 끝난 뒤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마친 직후 무릎을 꿇은 것에 대해 "우리는 관중들에게 돈을 받고 경기를 하고 있었지만 올해는 팬들을 즐겁게 하는 경기를 제대로 보여주진 못했다. 나는 감독으로서 팬들에게 죄송하다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부모님께 한 번도 숙인 적이 없는 머리지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팬들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를 전했다.[137]

5. 기타


  • 릿쿄 대학의 대선배인 니시모토 유키오에게는 공손했는데, 이는 단순히 니시모토가 선배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니시모토가 와카야마현에서 최고 수준의 학교로 유명했던 구제 와카야마 중학교 출신으로 야구 실력뿐만 아니라 학력으로 릿쿄 대학에 입학한 것에 비해, 오사와는 야구 실력이나 학력과는 관계없이 특기생으로 입학하여 야구부 추천으로 입학했기 때문이다.

  • 노무라 가쓰야와는 현역 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오사와 쪽이 연상인데다가 대졸자였기 때문인지 자신보다 난카이에 먼저 입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무라에게 경칭을 전혀 쓰지 않았다. 은퇴 후에도 “쓰루오카 감독님이 사임한 이후로 난카이는 감독의 그릇이 아닌 사람이 감독을 맡았다” 등 노무라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79] 특히 쓰루오카의 장례식에 노무라가 참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했다. 하지만 노무라는 ‘인간 오사와 게이지’에 대해서 “나는 오사와의 겉모습만 보고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내용을 알면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130]라고 말하면서 인간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사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 오사와는 현역 시절인 1963년에 노무라가 당시 시즌 최다 홈런을 기록했을 때 아웃 코스로 완전히 낮은 공을 백스크린으로 날려버리는 타격 기술을 극찬하여 “그때만큼 노무라와 함께 뛸 수 있었다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라고 서술했다.[80] 또한 노무라는 야쿠르트 감독 시절에 닛폰햄에서 스미 미쓰오를 영입했는데 그때 당시 닛폰햄 구단 상무였던 오사와에게 직접 연락해서 트레이드를 요청했다고 한다. 노무라의 저서에 의하면 난카이 시절 오사와의 태도가 팀 동료들부터 분노를 사는 경우가 많아 뒤에서는 ‘오사와를 때리는 모임’이 결성됐다고 한다. 온후한 성격인 스기우라 다다시조차 ‘나는 저 오사와라는 인간을 갈겨주고 싶다’며 노무라가 필사적으로 말렸다고 했다. 다만 그러한 태도가 감독으로서의 능력에 잘 활용되고 있었음을 높이 평가했다.

  • 히로세 노리미치는 저서에서 "오사와 씨와는 사이좋게 지냈다. 젊은 시절부터 전형적인 두목 기질이었다. 후년에 텔레비전에서 '갈!'이라든가 '훌륭해'라든가 했는데, 그 분위기는 당시부터 풍겨져 나왔다. 함께 술을 마시러 가면 후배인 나에게는 절대로 계산을 치르게 하지 않았다. 내가 급여가 더 높아진 후에도 오사와 씨에게 100% 얻어먹었다. 프로의 규칙이라고 생각해서, 나도 후배에게 술집 계산을 치르게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떤 의미로는 프로 야구 선수의 프라이드랄까, 자부심 넘치는 삶을 가르쳐 준 선배라고 생각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81]

  • 2004년 프로 야구 재편 문제 당시, 《선데이 모닝》에서 방영된 스포츠 작가 타마키 마사유키의 VTR 코멘트에 "야구(현장)를 모르는 놈이 뭘 말하는 거야"라며 격앙된 적이 있다. 오사와는 "타마키, 나와라"라고도 했지만, 그 후 프로그램에 타마키를 부르지도 않고 흐지부지되었다.[82]

  • 1978년에 난카이에서 니혼햄으로 이적한 카시와바라 준이치는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말고, 지금부터 힘내라. 기대하고 있다"라며 받아들여졌다. 과연 두목이라고 칭해질 만큼 너그러움을 가진 사람이었다. 헛된 생각을 하지 않고 야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고 생각한다. 베테랑 클래스의 사람이 많은 팀이었고, 젊은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도 나에게는 플러스가 되었다"[83]라고 말했다.

  • TV에 등장할 때는 기모노 차림으로 나온 적은 많았지만 야구 해설 등을 할 때는 정장 등의 양복을 착용했다. 또 다이토건탁 광고에는 양복(클래식 타입의 골프웨어)을 입고 출연한 바 있다. 난카이 시절에는 가네보 화장품 포스터에 모델로 기용된 적이 있다.

  • 은퇴 후에도 마운드에서 노바운드로 포수를 겨냥하여 투구할 수 있었다.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팀인 군마 다이아몬드 페가수스의 시구식에서 군마현 지사 오사와 마사아키와 함께 ‘더블 오사와’로서 시구식을 치렀지만, 오사와 지사가 노바운드였던 것에 비해 자신은 원바운드를 했다. 이에 대해 게이지는 《선데이 모닝》에서 오사와 지사에게 ‘훌륭하다’(あっぱれ일본어)를 스스로에게 ‘떽’(喝일본어)이라고 꾸짖었다.

  • 도쿄 6대학 야구 시구식에서도 보기 좋게 노바운드로 포수의 위치까지 던졌다. 그러나 《선데이 모닝》에서 하리모토 이사오에게 ‘시구식인데 기모노로 나올 일은 없지 않느냐’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떽’을 날렸다.

  • 메이저 리그를 싫어했지만 함께 출연한 하리모토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았다(선데이 모닝에서). 닛폰햄이 홋카이도로 연고지를 이전한 이후에는 홋카이도의 TV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자주 출연했고 삿포로 돔에서의 닛폰햄 주최 이벤트에도 자주 참석했다.

  • 야구 외의 스포츠에도 통했는데 특히 축구의 나카무라 슌스케, 테니스의 마리아 샤라포바의 팬이었다. 경정 관련 지식은 야구계 1인자로 ‘야구계의 대표적인 경정통’으로도 알려져 있다. 가끔 경정장 등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있었다.

  • 1994년 9월 29일, 홈구장인 도쿄 돔에서의 최종전이 끝난 뒤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마친 직후 무릎을 꿇은 것에 대해 “우리는 관중들에게 돈을 받고 경기를 하고 있었지만 올해는 팬들을 즐겁게 하는 경기를 제대로 보여주진 못했다. 나는 감독으로서 팬들에게 죄송하다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부모님께 한 번도 숙인 적이 없는 머리지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팬들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를 전했다.[137]

5. 1. 에피소드


  • '오야붕'(親分일본어)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선글라스를 낀 관록 있는 외모와 두목같은 성격, 그리고 친근한 말투 때문이었다. 호텔에서 사람들이 '오야붕, 오야붕'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호텔 관계자가 야쿠자 두목으로 착각하고 전전긍긍했다는 일화는 본인이 강연에서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프로 야구계에서 '오야붕'이라는 별명은 현역 시절 감독이었던 쓰루오카 가즈토가 먼저 사용했지만, 오사와는 자신의 저서에서 쓰루오카에게는 '상'(さん일본어)을 붙여 '쓰루오카 오야붕'이라고 쓰지 않았다고 밝혔다.[130] 현역 시절 별명은 앳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포포짱'(ポッポちゃん일본어)이었는데, 이는 난카이의 하와이 캠프 때 O자형 다리를 가진 비둘기가 뒤뚱거리는 모습을 보고 선수 중 누군가가 '오사와랑 꼭 닮았다'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130]

  • 에나쓰 유타카를 닛폰햄에 영입할 당시, 혼자 히로시마 도요 카프 구단주 마쓰다 고헤이의 자택으로 찾아가 마쓰다와 동석한 고바 다케시 앞에서 술을 마시며 열변을 토해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히로시마는 다른 구단의 조건을 듣고 결론을 내려고 했지만, 오사와의 열정에 마쓰다가 '제가 졌습니다. 결정합시다'라고 말하며 그 자리에서 협상이 이뤄졌다고 한다.[131] 에나쓰는 닛폰햄 입단 당시 오사와에 대해 “마치 도로 공사 현장 감독 같은 분위기로 선수를 두들겨 패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에나쓰는 오사와의 두목같은 기질을 마음에 들어했고, 이후 오사와가 사망할 때까지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오사와 역시 에나쓰를 ‘우리의 승리 패턴은 에나쓰가 나오게 되는 시합’이라고 칭하며 신뢰를 보였고, 에나쓰가 소속된 3년 동안 닛폰햄은 리그 최강팀으로 성장했다.

  • 감독 통산 성적은 1547경기 725승 99무 723패, 승률 5할 1리이다. 오사와는 “승리하면서 감독 생활을 끝낼 수 있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다. 명장이라니 분에 겨운 소리이지만 저금 2(승패마진 +2)인가. 딱 좋게 끝낼 수 있었다”라며 자신의 감독 성적을 회고했다.

  • 통산 퇴장 횟수는 7회[132]로, 터피 로즈(14회), 마티 브라운(12회), 가네다 마사이치, 오치아이 히로미쓰(8회)에 이어 역대 5위를 기록했다.[133] 감독 시절 퇴장 횟수 7회는 2009년 8월 27일 브라운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프로 야구 최다 기록이었다. 《선데이 모닝》에서 퇴장 관련 이슈가 나오면 ‘폭력 반대’를 외치거나 통산 퇴장 횟수 순위가 적힌 플립 차트가 제시되는 등 매번 웃음을 자아냈다. 퇴장 기록이 경신되었을 때는 관련 주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 시마다 마코토는 “그라운드에서 결과를 남기면 아무리 술을 마시고 몇 시에 돌아오든 불평을 늘어놓지 않는다. 선수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134]라고 말했다.

  • 1976년 6월 17일 한큐전에서 당시 한큐 투수였던 다케무라 가즈요시가 빈볼을 던지자, 1루 코치 박스에 있던 오사와는 마운드로 달려가 ‘너,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던지면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분노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다케무라가 다시 빈볼을 던지자 분을 참지 못한 오사와는 다케무라를 구타하여 퇴장당했다. 다케무라를 구타하는 순간은 보도 사진에도 찍혔다.[135] 이 일로 퍼시픽 리그 연맹으로부터 10일 간의 출전 정지와 벌금 100000JPY의 징계를 받았지만, 출전 정지 기간에는 대리 감독을 복수의 코치로 시켜 코치의 지휘 능력을 벤치에서 확인했다. 1983년 6월 28일 긴테쓰전에서는 9회말 수비방해를 둘러싸고 누심에게 거칠게 항의하다가 경기 종료 후 퇴장 명령을 받았다.[136]

  • 오리온스 감독 시절, 난카이 에이스 에모토 다케노리가 오리온스 선두 타자에게 몸에 맞는 공을 던지자 격분한 오사와는 “야 인마, 우리 팀한테 느닷없이 던지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이 멍청한 자식아!”라고 호통쳤다. 에모토는 “선두 타자에게 일부러 공을 던질 바보가 어디 있어, 이 한심한 인간아!”라고 맞받아쳐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날 뻔했지만, 포수 겸 감독 노무라 가쓰야가 중재하여 상황이 종료됐다. 에모토와 오사와는 이후 친분을 유지했고, 에모토가 설화 사건으로 은퇴했을 때 오사와는 “안타깝다. 에모토, 좀 더 야구를 했어야 했다”라며 선수 생활을 계속하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 스포츠 프로그램에서 페넌트레이스 개막 전 12개 구단 감독들이 팀 준비 태세를 이야기하는 기획에서,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 모리 마사아키가 “이야~ 우리 팀은 빗대어 말하자면 아직 벚꽃이 30% 정도 피었을 뿐이다”라고 발언하자, 오사와는 “왜 너는 진심으로 말을 못하냐!”라고 일갈했다. 1993년에는 오사와의 발언에 대해 세이부 코치가 말꼬리를 잡는 듯한 발언을 하자, 오사와는 “세이부의 코치는 아기 너구리에 우미보즈, 모리는 기후의 저금통이다(모리는 기후현 기후시 출신이며, 특유의 깐깐한 성격에 돈을 아끼는 것으로 유명했다)”라고 비유했다. 하지만 오사와는 모리와 친분이 있었고, 일부러 그런 발언을 했다고 한다. 세이부와의 우승 경쟁에서 패해 2위로 끝난 1993년, 오사와는 일본 시리즈를 앞두고 세이부 훈련장에 나타나 “야~ 1승이라도 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모리에게 “퍼시픽 리그 대표로 일본 시리즈에 나가는 거니까 그런 인색한 말을 하지 말고 꼭 우승하라고. 힘내라”며 따뜻한 말을 건넸고, 모리는 “역시 오사와답다. 감사합니다”라고 웃으며 고마워했다.

  • TV에 등장할 때는 기모노 차림으로 나온 적이 많았지만, 야구 해설 등을 할 때는 정장 등의 양복을 착용했다. 다이토건탁 광고에는 양복(클래식 타입 골프웨어)을 입고 출연했다. 난카이 루키 시즌에는 가네보 화장품 포스터 모델로 기용되기도 했다.

  • 은퇴 후에도 마운드에서 노바운드로 포수에게 투구할 수 있었다.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팀인 군마 다이아몬드 페가수스 시구식에서 군마현 지사 오사와 마사아키와 함께 ‘더블 오사와’ 시구식을 치렀는데, 오사와 지사가 노바운드 투구를 한 반면 자신은 원바운드 투구를 했다. 이에 게이지는 《선데이 모닝》에서 오사와 지사에게 ‘훌륭하다’(あっぱれ일본어)를, 자신에게 ‘떽’(喝일본어)이라고 말했다.

  • 도쿄 6대학 야구 시구식에서도 노바운드 투구를 선보였다. 그러나 《선데이 모닝》에서 하리모토 이사오가 ‘시구식인데 기모노로 나올 일은 없지 않느냐’라고 말하자 ‘떽’을 날렸다.

  • 메이저 리그를 싫어했지만, 함께 출연한 하리모토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았다(선데이 모닝에서). 닛폰햄이 홋카이도로 연고지를 이전한 후에는 홋카이도의 TV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자주 출연했고, 삿포로 돔에서 닛폰햄 주최 이벤트에도 자주 참석했다.

  • 야구 외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축구 나카무라 슌스케, 테니스 마리아 샤라포바의 팬이었다. 경정에 대한 지식은 야구계 1인자로 ‘야구계 대표 경정통’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가끔 경정장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 1994년 9월 29일, 홈구장 도쿄 돔 최종전에서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마친 직후 무릎을 꿇은 것에 대해 “우리는 관중들에게 돈을 받고 경기를 하고 있었지만 올해는 팬들을 즐겁게 하는 경기를 제대로 보여주진 못했다. 나는 감독으로서 팬들에게 죄송하다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부모님께 한 번도 숙인 적이 없는 머리지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137]

  • 릿쿄 대학 대선배 니시모토 유키오에게는 공손했는데, 이는 단순히 니시모토가 선배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니시모토가 와카야마현 최고 명문고 구제 와카야마 중학교 출신으로 야구 실력뿐 아니라 학력으로 릿쿄 대학에 입학한 반면, 오사와는 야구 실력이나 학력과 관계없이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 야구부 추천으로 입학했기 때문이다.

  • 노무라 가쓰야와는 현역 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오사와가 연상이고 대졸자였지만, 노무라가 난카이에 먼저 입단했음에도 노무라를 함부로 불렀다. 은퇴 후에도 “쓰루오카 감독님이 사임한 이후로 난카이는 감독의 그릇이 아닌 사람이 감독을 맡았다” 등 노무라를 비판했다.[79] 특히 쓰루오카 장례식에 노무라가 불참한 것에 대해 분노했다. 노무라는 ‘인간 오사와 게이지’에 대해 “나는 오사와의 겉모습만 보고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내용을 알면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66]라고 말하며, 인간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사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오사와는 1963년 노무라가 시즌 최다 홈런을 기록했을 때, 바깥쪽 낮은 공을 백스크린으로 날리는 타격 기술을 극찬하며 “그때만큼 노무라와 함께 뛸 수 있었다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라고 서술했다.[80] 또한 노무라는 야쿠르트 감독 시절 닛폰햄 구단 상무였던 오사와에게 직접 연락해서 스미 미쓰오 트레이드를 요청했다고 한다. 노무라 저서에 따르면, 난카이 시절 오사와 태도가 팀 동료들 분노를 사 ‘오사와를 때리는 모임’이 결성됐다고 한다. 온후한 스기우라 다다시조차 ‘나는 저 오사와라는 인간을 갈겨주고 싶다’며 노무라가 필사적으로 말렸다고 했다. 다만 그러한 태도가 감독으로서 능력에 잘 활용되고 있었음을 높이 평가했다.

  • 히로세 노리미치는 저서에서 "오사와 씨와는 사이좋게 지냈다. 젊은 시절부터 전형적인 두목 기질이었다. 후년에 텔레비전에서 '갈!'이라든가 '훌륭해'라든가 했는데, 그 분위기는 당시부터 풍겨져 나왔다. 함께 술을 마시러 가면 후배인 나에게는 절대로 계산을 치르게 하지 않았다. 내가 급여가 더 높아진 후에도 오사와 씨에게 100% 얻어먹었다. 프로의 규칙이라고 생각해서, 나도 후배에게 술집 계산을 치르게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떤 의미로는 프로 야구 선수의 프라이드랄까, 자부심 넘치는 삶을 가르쳐 준 선배라고 생각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81]

  • 2004년 프로 야구 재편 문제 당시, 《선데이 모닝》에서 방영된 스포츠 작가 타마키 마사유키의 VTR 코멘트에 "야구(현장)를 모르는 놈이 뭘 말하는 거야"라며 격앙된 적이 있다. 오사와는 "타마키, 나와라"라고도 했지만, 그 후 프로그램에 타마키를 부르지도 않고 흐지부지되었다.[82]

  • 1978년에 난카이에서 니혼햄으로 이적한 카시와바라 준이치는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말고, 지금부터 힘내라. 기대하고 있다"라며 받아들여졌다. 과연 두목이라고 칭해질 만큼 너그러움을 가진 사람이었다. 헛된 생각을 하지 않고 야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고 생각한다. 베테랑 클래스의 사람이 많은 팀이었고, 젊은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도 나에게는 플러스가 되었다"[83]라고 말했다.

5. 2. 가족 관계

오사와 게이지일본어의 친형은 전 프로 야구 선수 오사와 기요시, 오사와 기미오이다. 외손녀는 배우 오사와 아카네이며 남편은 희극 배우 게키단 히토리이다.[128]

아카네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부재중 전화 메시지를 외손녀의 방에 침입한 수상한 사람의 목소리로 착각했다. 부재중 전화에는 게이지의 화난 목소리가 녹음돼 있어서 아카네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128] 2010년 9월 8일에 아카네는 게이지의 증손녀가 되는 딸을 출산했다.[129]

아들 야스히토는 2017년 5월 6일 《출몰! 맛거리 천국》(TV 도쿄)에서 초밥집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5. 3. 상세 정보

오사와 게이지는 1932년 3월 14일 가나가와현 가타세에서 태어나[103] 맏형 기요시, 둘째 형 기미오의 영향으로 야구를 시작했다.[103] 야구 외에도 스모, 육상 등 다른 스포츠에도 뛰어났다.[103]

  • '''선글라스'''를 쓴 외모, 두목과 같은 성격과 말투로 ‘'''오야붕'''’(親分일본어)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호텔에서 주변 사람들이 ‘오야붕, 오야붕’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호텔 관계자가 야쿠자 두목으로 잘못 알고 전전긍긍했다는 일화가 있다. 프로 야구계에서 ‘오야붕’이라는 별명은 현역 시절 감독인 쓰루오카 가즈토가 먼저 사용했지만, 오사와는 저서에서 쓰루오카에게는 ‘상’(さん일본어)을 붙여 ‘쓰루오카 오야붕’이라고 쓰지 않았다. 현역 시절 별명은 ‘포포짱’(ポッポちゃん일본어)이었는데, 난카이의 하와이 캠프 때 O자형 다리를 가진 비둘기가 걷는 것을 보고 선수 중 누군가가 ‘오사와랑 꼭 닮았구나’라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130]

  • 에나쓰 유타카를 닛폰햄에 영입할 때 히로시마 도요 카프 구단주 마쓰다 고헤이의 자택으로 찾아가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히로시마는 다른 구단의 조건을 듣고 결론을 내려고 했지만, 오사와의 열의에 마쓰다가 ‘제가 졌습니다. 결정합시다’라고 하며 협상이 이뤄졌다.[131] 에나쓰는 닛폰햄 입단 당시 오사와에 대해 “마치 도로 공사 현장 감독 같은 분위기로 선수를 두들겨 패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에나쓰는 오사와의 두목같은 기질을 맘에 들어했고, 오사와가 살아있을 때까지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오사와도 에나쓰를 ‘우리의 승리 패턴은 에나쓰가 나오게 되는 시합’이라고 말하며 신뢰를 보였다.

  • 감독 통산 성적은 1547경기 725승 99무 723패, 승률 5할 1리이다. “승리하면서 감독 생활을 끝낼 수 있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다. 저금 2(승패마진 +2)인가. 딱 좋게 끝낼 수 있었다”라고 자신의 감독 성적을 평가했다.

  • 통산 퇴장 횟수는 7회[132]이며 터피 로즈(14회), 마티 브라운(12회), 가네다 마사이치, 오치아이 히로미쓰(8회)에 뒤를 이은 기록이다.[133] 감독으로서의 퇴장 횟수 7회는 2009년 8월 27일 브라운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프로 야구 최다 기록이었다. 《선데이 모닝》에서 퇴장 관련 이슈가 나오면 ‘폭력 반대’를 외치거나 통산 퇴장 횟수 순위가 적힌 플립 차트가 제시되는 등 매번 웃음을 자아냈다.

  • 시마다 마코토는 “그라운드에서 결과를 남기면 아무리 술을 마시고 몇 시에 돌아오든 불평을 늘어놓지 않는다. 선수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134]라고 말했다.

  • 1976년 6월 17일 한큐전에서 빈볼을 던진 다케무라 가즈요시를 구타하여 퇴장당했다.[135] 이 일로 퍼시픽 리그 연맹으로부터 10일 간의 출전 정지와 벌금 10만 엔의 징계가 내려졌다. 1983년 6월 28일 긴테쓰전에서 수비방해를 둘러싸고 누심에게 항의하다가 경기 종료 후 퇴장 명령을 받았다.[136]

  • 오리온스 감독 시절 난카이의 에모토 다케노리가 오리온스 선두 타자에게 몸에 맞은 공을 던진 것에 격분하여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날 뻔했다. 에모토와 오사와는 이후 친해져서 에모토가 은퇴했을 때 선수 생활을 계속하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 모리 마사아키가 “우리 팀은 벚꽃이 30% 정도 피었을 뿐이다”라고 발언했을 때, 오사와는 “왜 너는 진심으로 말을 못하냐!”라고 일갈했다. 오사와는 모리와 친분이 있었고, 일부러 그런 발언을 했다고 한다.

  • TV에 등장할 때는 기모노 차림으로 나온 적은 많았지만 야구 해설 등을 할 때는 정장 등의 양복을 착용했다. 다이토건탁 광고에는 양복(클래식 타입의 골프웨어)을 입고 출연했다. 난카이 루키 시즌에는 가네보 화장품 포스터에 모델로 기용된 적이 있다.

  • 은퇴 후에도 마운드에서 노바운드로 포수를 겨냥하여 투구할 수 있었다.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팀인 군마 다이아몬드 페가수스의 시구식에서 군마현 지사 오사와 마사아키와 함께 ‘더블 오사와’로서 시구식을 치렀다.

  • 메이저 리그를 싫어했지만, 함께 출연한 하리모토 이사오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닛폰햄이 홋카이도로 연고지를 이전한 이후에는 홋카이도의 TV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자주 출연했고, 삿포로 돔에서의 닛폰햄 주최 이벤트에도 자주 참석했다.

  • 야구 외의 스포츠에도 통했는데, 축구의 나카무라 슌스케, 테니스의 마리아 샤라포바의 팬이었다. 경정 관련 지식은 야구계 1인자로 ‘야구계의 대표적인 경정통’으로 알려져 있다.

  • 1994년 9월 29일, 도쿄 돔에서의 최종전이 끝난 뒤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마친 직후 무릎을 꿇은 것에 대해 “팬들에게 죄송하다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137]

  • 노무라 가쓰야와는 현역 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오사와 쪽이 연상인데다가 대졸자였기 때문인지 노무라에게 경칭을 전혀 쓰지 않았다. 은퇴 후에도 노무라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그러나 노무라는 ‘인간·오사와 게이지’에 대해서 “나는 오사와의 겉모습만 보고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내용을 알면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130]라고 말하면서 인간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사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 선수 통산 기록

연도소속경기타석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루타타점도루도루자희생번트희생플라이볼넷고의사구사구삼진병살타타율출루율장타율OPS
1956년난카이1454393864010011241273018121533411565.259.318.329.647
1957년10733529636739249822427230004010.247.314.331.645
1958년11632529028791031982775142812458.272.336.338.674
1959년10726024218596106723445111112312.244.278.277.565
1960년11027525121651014892525212001419.259.315.355.670
1961년1102091901831501391921411321303.163.220.205.425
1962년741931702042800501703132800264.247.278.294.572
1963년90123106132520130910501101140.236.314.283.597
1964년6483735140101690051400140.192.231.219.450
1965년도쿄65797131330222100003500121.183.228.310.538
통산 : 10년98823212075202501641017636191383257181645730152.241.297.307.603


  • 감독 통산 기록

연도구단순위경기승리패전승률게임차팀 홈런팀 타율팀 방어율나이
1971년롯데2위13080464.6353.5193.2703.7739세
1972년5위13059683.46520.5148.2644.5440세
1976년닛폰햄5위130526711.4324위・5위107.2583.7244세
1977년5위130586111.4874위・4위113.2453.3645세
1978년3위130556312.4663위・4위131.2643.9846세
1979년3위13063607.5123위・4위131.2664.0947세
1980년3위130665311.5552위・2위167.2643.6148세
1981년1위13068548.5574위・1위126.2763.8149세
1982년2위130675211.5634위・1위127.2663.6350세
1983년3위13064597.52020.5153.2753.8251세
1984년6위130447313.37629.5144.2594.9852세
1993년2위13071527.5771.0106.2593.3761세
1994년6위13046795.36828.5101.2524.6262세
통산: 13년154772572399.501A클래스 8회, B클래스 4회


  • 선수 시절 등번호
  • * '''15'''(1956년~1964년)
  • * '''26'''(1965년)

  • 감독, 코치 시절 등번호
  • * '''40'''(1966년~1967년 도중)
  • * '''57'''(1967년 도중~1968년)
  • * '''52'''(1969년~1972년)
  • * '''86'''(1976년~1984년, 1993년~1994년) ※준영구결번

  • 개명
  • * 오사와 마사요시(, 1956년~1961년)
  • * 오사와 게이지(, 1962년~1984년, 1993년~1994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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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男くせえ 話になるが 衆浩センター 1985
[5] 서적 1985
[6] 뉴스 豪球対談 週刊ベースボール 1971-08-30
[7] 서적 1985
[8] 서적 1985
[9] 서적 1985
[10] 서적 1985
[11] 서적 1985
[12] 서적 プロ野球三国志
[13] 서적 1985
[14] 서적 1985
[15] 서적 1985
[16] 서적 男の華 スタジオシップ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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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서적 1996
[20] 서적 1996
[21] 서적 1996
[22] 서적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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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서적 大沢 1996
[52] 서적 大沢 1996
[53] 문서 上田は日本ハムの起業地である徳島県の出身であった経緯もあり、大社は個人としては好意的だったが、この時は他の幹部の意見を尊重して上田への要請を見送り、最終的に大沢に就任を要請した。大沢の後任としての上田の1995年の就任時には大社が直々に要請してオーナー人事に近い形で決定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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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서적 ファイターズ50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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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서적 チームで輝ける生き方: アシスト力を磨こう プレジデント社 2017-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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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간행물 豪球対談 週刊ベースボール 197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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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웹사이트 審判員 (野球)#球審に対する激しい抗議や、退場処分を辞さない行動は選手を奮起させるためワザと大げさに行っていたものだという。勇者のスタジアム・プロ野球好珍プレーで広瀬と共演した際、退場処分を受けた直後は相当激高していたが、ベンチに引き揚げた途端冷静になり「こんなもんで良いか?」と笑顔で問いかけてきた様子を広瀬から暴露され、「本音を言うなよ」と照れながら答え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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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문서 現在では危険球を2度投じた場合は投手の方が即時退場となるが、当時はまだこのルールが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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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문서 これを示すかのように、テレビ朝日系列で放送された1994年のオールスターゲーム第1戦(西武)では両軍ベンチにカメラが入っていたが、全パ側ベンチの中継では森と大沢が親しげに談笑する姿が目立っ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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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문서 南海はこれについて、野村だけを指しているのか、鶴岡以後の監督全てを指しているのかは不明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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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웹사이트 玉木のウェブ日記 http://www.tamaki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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