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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스카 마사카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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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치스카 마사카쓰는 오와리국을 중심으로 활동한 토호 세력으로, 기소강 수운업을 통해 이익을 얻었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측실인 이코마 기쓰노의 추천으로 노부나가를 섬기게 되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으로서 스노마타 성 축성, 주고쿠 공략, 혼노지의 변 이후 교토 회군 등에서 활약했다. 1585년 아와국을 아들에게 양도하고 오와리에 머물렀으며, 1586년에 사망했다. 그의 묘소는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에 있으며,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작품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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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스카 마사카쓰
인물 정보
이름하치스카 마사카쓰 (蜂須賀正勝)
별명고로쿠
출생1526년
사망1586년 7월 8일
출생지아마, 아이치현
사망지알 수 없음
본명알 수 없음
배우자알 수 없음
자녀알 수 없음
친척하치스카 마사토시 (아버지), 하치스카 이에마사 (아들), 구로다 나가마사 (사위)
가문 정보
씨족하치스카 씨
아버지하치스카 마사토시
어머니모 씨
형제자매하치스카 마사카쓰, 또주로, 마사노부, 묵 (오다 기치시로 실), 마사모토, 여 (가지우라 마사노리 실)
정실다이쇼인 (益田持正 또는 미와 요시타카의 딸)
측실하쿠운인 (도리이 엣추노카미의 딸)
자녀나라히메 (나카야마 나오치카 실, 후에 가지마 나가마사 실), 이에마사, 이토히메 (구로다 나가마사 실, 후에 이혼)
양자도우가쿠 슌젠
관직 정보
직위하치스카 씨 당주
임기 시작1553년
임기 종료1586년
이전하치스카 마사토시
이후하치스카 이에마사
관위
관위증 종3위, 종4위하 수리대부
군사 정보
소속사이토 씨, 오다 씨, 도요토미 씨
지휘알 수 없음
주요 전투나가라가와 전투, 이나바야마 성 공방전, 아네가와 전투, 미키 성 공방전, 돗토리 성 공방전, 다카마쓰 성 공방전, 시코쿠 정벌
기타 정보
묘소만넨산 하치스카 가 묘소, 고겐지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 고야산 오쿠노인・아와 도쿠시마 하치스카 가 묘소 (와카야마현), 렌게지 (아이치현 아마시)

2. 생애

하치스카 마사카쓰는 오와리국 가이토군 하치스카향을 거점으로 기소강에서 수운업을 하며 이익을 얻던 토호 세력이었다. 이코마 씨와는 친척 관계였다. 하시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등용된 것은 노부나가의 측실 이코마 기쓰노의 추천 덕분이었다고 하며, 이는 《직전가잡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과 인맥을 바탕으로 오와리의 오다 씨와 미노사이토 도산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다. 스노마타 성 축성을 도왔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히데요시의 측근이 된 후에는 주로 정무를 담당했다.

히데요시의 주고쿠 정벌을 보좌했고, 혼노지의 변 이후 교토 회군 과정에서 모리 데루모토와의 교섭을 맡았다. 1585년 히데요시가 아와 1국을 주었지만, 아들 하치스카 이에마사에게 양도하고 오와리에 남았다. 이는 고향을 떠나기 싫었거나 히데요시 곁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케나카 한베에, 구로다 간베에 등이 히데요시의 보좌역이었지만, 마사카쓰는 대체로 그들의 의견을 따랐다. 1586년 사망했다. 묘소는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 비잔정, 시모스케토정의 고겐지와 아이치현 가이토군 미와정 렌겐지에 있다.

하치스카 마사카쓰 생탄지(하치스카 성터)에 있는 "하치스카 마사카쓰 공 비"(아이치현 아마시 하치스카 렌게지 앞)

2. 1. 출신과 초기 이력

하치스카 마사카쓰는 1526년, 하치스카 마사토시의 장남으로 하치스카 성에서 태어났다. 하치스카 씨는 오와리국 가이토군 하치스카 향을 중심으로 한 토호 세력으로, 기소강에서 수운업으로 이익을 얻었다고 여겨진다. 이코마 씨와는 친척 관계였다.[2]

하시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를 섬긴 것은 노부나가의 측실 이코마 기쓰노의 추천 덕분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직전가잡록》에 기록되어 있다. 하치스카 마사카쓰는 이러한 지리적 요인과 인맥으로 오와리의 오다 씨와 미노사이토 도산 사이를 오가며 이익을 취했고,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재했다.

떠돌이 시절 히데요시와 야하기강의 다리에서 만났다는 일화가 유명하지만, 당시 야하기 강에는 다리가 없었고 나룻배가 사용되었기에, 이는 후세의 창작이거나 잘못 전해진 것이다. 에도 시대 중기인 겐로쿠 연간(1688년~1704년)에 야하기 강에 다리가 놓였고, 덴쇼 연간(1573년~1593년)에는 나룻배로 건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스노마타 성 축성을 도왔고, 히데요시의 측근이 되어 함께 행동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스노마타 성 축성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후에 오다 노부나가가 미노를 공략할 때 길 안내를 맡았다. 히데요시 밑에서는 전투보다 정무에서 실무를 보는 일이 많았다. 히데요시의 주고쿠 정벌을 보좌했고, 혼노지의 변 이후 교토로 돌아올 때 모리 데루모토와의 교섭을 맡았다.

덴쇼 13년(1585년) 히데요시가 아와 1국을 주었지만, 아들 하치스카 이에마사에게 양도하고 오와리에 남았다. 이는 고향을 떠나기 싫었거나 히데요시 곁에 있고 싶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히데요시의 보좌역에는 다케나카 한베에, 구로다 간베에가 있었지만, 마사카쓰는 그들의 의견을 묵묵히 따랐다고 한다. 1586년에 사망했다.

묘소는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 비잔정, 시모스케토정의 고겐지에 있으며, 아이치현 가이토군 미와정 렌겐지에도 있다.

2. 2. 히데요시와의 만남

하시바 히데요시와의 만남에 대해서는, 낭인 시절의 히데요시와 야하기 강의 다리(야하기 다리)에서 만났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우키요에 등에도 그려질 정도로 유명하지만, 와타나베 세이유가 후작 하치스카 가문의 의뢰로 『하치스카 고로쿠 마사카츠』를 집필했을 때, 무로마치 시대의 어떤 기행문에도 야하기 강에는 다리가 없고 나룻배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2] 그 후, 야하기 강에 다리가 놓인 것은 에도 시대 중기인 겐로쿠 연간(1688년-1704년)이며, 덴쇼 연간(1573년-1593년)에는 나룻배로 건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쿠와타 타다치카는 "야하기 다리 위에서 도적 두목 하치스카 고로쿠와 만나는 이야기는 『회본 태합기』의 지어낸 이야기"라고 했고, 오와다는 더 구체적으로 (다리에서의 만남은) 간세이 9년(1797년)에 간행되기 시작한 이 작품에서 유래한 이야기이며, 그 저자인 "타케우치 카쿠사이의 창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강담이나 『태합기』, 『회본 태합기』, 『진서 태합기』에서는 하치스카 고로쿠가 야도의 두목이었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스노마타 일야성을 위해 모인 야습 강도의 노무사 집단의 우두머리 중 한 명이라는 것은, 간에이 3년(1626년) 이후에 간행된 코세 호안의 『태합기』가 히데요시의 생애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만든 이야기이며, 하치스카 가문의 후손들은 오랫동안 그 부정적인 이미지에 시달려 왔다.

2. 3. 히데요시의 가신 시대

하치스카 마사카쓰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기 시작할 때부터 그를 보좌한 인물이다. 히데요시가 노부나가를 섬기게 된 것은 노부나가의 측실 이코마 기쓰노의 추천 덕분이었다고 전해진다.[1]

1566년 (에이로쿠 9년), 히데요시가 스노마타 성을 축성할 때, 마사카쓰는 동생과 함께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다만, 스노마타 성의 축성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1] 이 공으로 노부나가는 마사카쓰에게 50여 촌과 500관을 포상으로 주었다.[1] 히데요시가 성의 수호장으로 임명된 후에도 마사카쓰는 요력(与力)으로서 히데요시를 따랐으며, 사이토 측을 조략하는 안내역으로 활동했다.

마사카쓰는 히데요시 휘하에서 주로 정무와 실무를 담당했다. 히데요시의 주고쿠 공략을 보좌했으며, 혼노지의 변 이후 교토로 회군할 때 모리 데루모토와의 교섭을 담당하기도 했다. 1585년(덴쇼 13년), 히데요시는 아와 1국을 마사카쓰에게 주었으나, 마사카쓰는 이를 아들 하치스카 이에마사에게 양도하고 자신은 오와리에 남았다. 이는 마사카쓰가 고향을 떠나기 싫어했거나, 히데요시 곁에 머물기를 원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히데요시의 보좌역으로는 다케나카 한베에와 구로다 간베에가 있었는데, 마사카쓰는 보통 그들의 의견을 묵묵히 따랐다고 한다.

1569년 (에이로쿠 12년), 히데요시의 대리인으로서 교토 경비를 담당하던 중, 니조 어소에 화재가 발생하자 신속하게 진화하여 아시카가 요시아키로부터 오동나무 문장이 새겨진 하오리를 포상으로 받았다.[1] 이후 마사카쓰는 오동나무 문장을 사용했으나, 히데요시 역시 오동나무 문장(다이코키리)을 사용하게 되자 홑잎 벚나무 문장(다키가시와몬)으로 바꾸었다.[1]

1570년 (겐키 원년)부터 1582년까지 마사카쓰는 카네가사키 퇴각전, 아네가와 전투, 요코야마성 공략, 주고쿠 공격 등 히데요시가 참여한 주요 전투에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1576년 (덴쇼 4년) 덴노지 합전에서는 선봉을 맡아 "루오키시(누의 기시) 제일의 창"이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활약했으며, 노부나가로부터 직접 군의를 하사받기도 했다.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 히데요시는 주고쿠 대반환을 통해 군사를 교토로 돌렸다. 이때 마사카쓰는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모리 가문과의 협상을 담당하여 화의를 성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 이후 야마자키 합전에서 히데요시 본대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이나다 우에모토와 함께 전공을 세웠다.[1]

야마자키 전투 이후, 마사카쓰는 구로다 요시타카와 함께 모리 가문과의 중개 역할을 맡아 약 3년에 걸쳐 영토 경계를 확정하는 데 기여했다.[1]

2. 3. 1. 노부나가 휘하에서의 활약

하치스카 마사카쓰는 오와리국 가이토군 하치스카향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토호 세력으로, 기소강에서 수운업으로 이익을 얻었다.[1] 하시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게 된 것도 노부나가의 측실 이코마 기쓰노의 추천 덕분이었다고 한다.[1]

1566년 (에이로쿠 9년), 히데요시가 스노마타성을 축성할 때, 마사카쓰는 동생과 함께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1] 노부나가는 마사카쓰에게 50여 촌과 500관을 포상으로 주었다.[1]

1568년 (에이로쿠 11년), 오미 육각 공격에 참여하고, 노부나가를 따라 상경했다.[1]

1569년 (에이로쿠 12년), 히데요시의 대리인으로 교토 경비를 담당하던 중 니조 어소 화재를 진압하여 아시카가 요시아키로부터 오동나무 문장이 새겨진 하오리를 받았다.[1] 이후 오동나무 문장을 사용했으나, 히데요시도 오동나무 문장(다이코키리)을 사용하게 되자 홑잎 벚나무 문장(다키가시와몬)으로 바꾸었다.[1] 노부나가는 마사카쓰에게 오와리 카스가이 군 미츠야치 향에 5,000석을 포상으로 주었다.[1]

1570년 (겐키 원년), 에치젠 카네가사키 퇴각전에서 활약하고, 아네가와 전투, 요코야마성 공략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1] 요코야마 성주가 되었다.[1]

1571년 (겐키 2년), 미노우라성을 공격하는 아자이·잇코잇키 세력을 격퇴하고, 나가시마 잇코잇키와의 전투에 종군했지만 동생을 잃었다.[1]

1573년 (덴쇼 원년), 히데요시가 나가하마성주가 되자, 마사카쓰에게도 나가하마 영내에 식읍이 주어졌다.[1]

1576년 (덴쇼 4년), 덴노지 합전에서 선봉을 맡아 공을 세우고, 노부나가로부터 군의를 받았다.[1]

1577년부터 시작된 주고쿠 공격에는 아들 이에마사와 함께 종군했다.[1] 1579년 미키성 공격(미키의 말라 죽이기)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세력을 격퇴하고 군량을 탈취했다.[1] 1580년 조스이성을 공략하여 성주가 되었다.[1] 히데요시가 히메지성을 본거지로 개수하고, 마사카쓰에게 타츠노성 5만 3,000석을 주었다.[1]

같은 해, 히데요시는 마사카쓰의 딸과 구로다 나가마사의 혼약을 성립시켰다.[1]

1581년 돗토리성 공격(돗토리의 갈증으로 죽이기)에 종군하여 성을 포위하고, 여러 성을 항복시켰다.[1] 깃카와 모토하루의 침공에 맞서 히데요시에게 결전을 회피하도록 조언했다.[1]

같은 해 11월, 히데요시는 아와지 원정을 했다.[1] 마사카쓰는 이와야성을 인수했다.[1]

1582년 빗추 다카마쓰성의 전투 (다카마쓰의 물로 죽이기)에서 시미즈 무네하루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거부당했다.[1] 모리 세력은 화의를 요청했고, 마사카쓰는 스기하라 이에쓰구와 함께 서찰을 받았다.[1]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히데요시는 마사카쓰에게 정보 유출을 막도록 명령했다.[1] 히데요시는 마사카쓰와 구로다 요시타카에게 안코쿠지 에케이와 협의하게 하여 모리씨와 화의를 성립시키고 주고쿠 대반환을 시작했다.[1]

히메지성으로 귀환한 히데요시는 마사카쓰에게 가신들에게 금은미곡을 분배하도록 명령하고, 야마자키 합전에 참전했다.[1] 마사카쓰는 히데요시 본대에서 싸워 전공을 세웠다.[1]

전후, 마사카쓰와 구로다 요시타카는 모리씨와의 중개역을 맡아 약 3년에 걸쳐 경계를 확정했다.[1]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마사카쓰는 히데요시 본진에 대기했고, 오야마성 성병을 설득하여 항복시켰다.[1] 나가시마 성에서 농성하던 이치마스에게 파견되어 투항을 받아들였다.[1]

2. 3. 2. 주고쿠 원정

덴쇼 5년(1577년)부터 시작된 주고쿠 공격에는 히데요시의 부대 중 한 명이었던 아들 이에마사와 함께 종군했다. 덴쇼 7년(1579년) 하리마 미키성 공격(미키의 말라 죽이기)에서 벳쇼 나가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협격을 받은 히라타성에서 타니 모리요시가 전사하자, 이에 대한 반격으로 오무라 전투에서 고바야카와 세력을 격퇴하고 200개의 수급을 올리고 군량을 탈취하여 식량 수송을 저지했다. 덴쇼 8년(1580년) 4월 24일, 마사카쓰와 이에마사는 히로세성(조스이성)을 공략하여 성주 우노 시게키요를 죽였다(또는 포획). 이 공적으로 이에마사에게는 월모의 명마를, 마사카쓰에게는 조스이성을 주어 처음으로 성주가 되었다[3]. 그 후, 하리마를 평정하자 히데요시는 구로다 간베에 (요시타카)의 조언에 따라 히메지성을 본거지로 개수하고, 마사카쓰에게도 하리마 타츠노성 5만 3,000석을 주었다[3].

같은 해, 히데요시는 마사카쓰의 딸(후의 호쥬인)과 구로다 요시타카의 장남 마쓰치요(쇼주마루, 후의 구로다 나가마사)의 혼약을 성립시켜 중신들의 결속을 다졌다.

덴쇼 9년(1581년) 이즈모 돗토리성 공격(돗토리의 갈증으로 죽이기)에도 종군하여 성을 포위하는 공격대에 들어갔다. 깃카와 쓰네이에는 당초 종종 군사를 내어 도발해 왔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가토 기요마사와 마사카쓰가 곁길로 강습했지만 매복에 걸려 격퇴되었다. 5개월간 계속된 농성 기간 중, 마사카쓰는 요시오카성, 오사키성, 카노성의 항복을 권유하여 항복시켰다[3]. 깃카와 모토하루호키국으로 침공하여 난조 모토쓰구의 하구이시성과 오가모 모토키요의 이와쿠라성을 공격하여 쓰네이에의 설욕을 하려고 우마야마에 배수의 진을 쳤을 때, 히데요시는 마사카쓰와 아라키 시게카타를 파견하여 하구이시성으로 가는 양도를 확보하게 했지만, 마사카쓰는 사병과 싸우는 불리함을 설파했고 결국 히데요시는 군을 물리고 결전을 회피하여 양성에는 응전하지 않고 견고한 수비를 하도록 지시했다[3].

같은 해 11월,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허가를 얻어 아와지 원정을 했다. 셋쓰국아마가사키의 이케다 노스케가 이와야성을 포위했기 때문에 유라성(유라코성)의 아타케 기요야스는 히데요시 진영의 마사카쓰와 이키 타다쓰구 (당시는 이케다 쓰네오키 가신)에게 투항을 신청하여 히데요시 및 노부나가에게 전해져 허가되었으므로 아와지 세력은 항복하여 여러 성이 개성했다. 마사카쓰는 명대(名代)로 이와야성을 인수했지만, 이 성은 이케다령이 되었고 하시바령이 된 스모토성센고쿠 히데히사에게 주어졌다.

덴쇼 10년(1582년) 3월, 마사카쓰와 구로다 요시타카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수군 장수였던 노미 무네카쓰, 모토노부를 조략했지만 실패했다[3]. 4월부터 빗추 다카마쓰성의 전투 (다카마쓰의 물로 죽이기)가 시작되지만, 이때도 두 사람은 시미즈 무네하루 진중으로 사자로서 방문하여 항복을 권유하려 했지만 거부되었다[3].

그러나 장기 포위·수공에 곤경에 처한 모리 세력은 최종적으로 시미즈 무네하루, 게쓰세이, 난바 무네타다, 스에치카 노부카의 할복과 개성으로 화의를 도모하게 되어, 6월 3일, 그 외 성병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히데요시에게 간청하기 위한 서찰이 마사카쓰와 스기하라 이에쓰구에게 도착했다[3]. 히데요시가 이를 허락하고 다음 날 4명이 할복했다. 그런데 이틀 전 혼노지의 변으로 이미 노부나가는 비명횡사했고, 통설에서는 3일 밤 히데요시는 이 사실을 알고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마사카쓰에게 전령의 사자를 감금하도록 명령하고, 이어서 각 방면에서 오는 전령은 진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도중에 맞이하여 돌려보내고 기밀 유지를 엄명했다[3]. 히데요시는 마사카쓰와 요시타카에게 안코쿠지 에케이와 협의하게 하여 모리씨와 맹서를 주고받아 화의를 성립시키자 5일에는 진을 철수하고 주고쿠 대반환이 시작되었다.

히메지성으로 귀환한 히데요시는 마사카쓰에게 명령하여 모든 금은미곡을 가신 각각의 지행에 따라 분배한 다음 야마자키 합전에 임했다. 합전에서 마사카쓰는 히데요시 본대의 일원으로서 싸워 이나다 우에모토와 함께 전공을 세웠다.

전후, 마사카쓰와 구로다 요시타카는 모리씨와의 중개역도 맡았다. 혼노지의 변 직후 체결된 모리씨와 오다씨와의 화의에 5개국 할양이라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와 모리씨와의 관계 재구축은 난항을 겪었다. 두 사람은 안코쿠지 에케이, 하야시 나리나가 등과 절충을 거듭하여 (오다가의 내분에서의 중단 기간을 포함하여) 약 3년에 걸쳐 경계를 확정했다. 마사카쓰는 세 번 중국으로 내려가 이 중임을 완수했다[3].

2. 3. 3.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 과정

하시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를 섬길 수 있었던 것은 노부나가의 측실 이코마 기쓰노의 추천 덕분이었다고 한다. 이는 《직전가잡록》에 기재되어 있다.

1566년(에이로쿠 9년) 미노국에서 히데요시가 스노마타 성을 축성할 때 마에노 나가야스 등과 협력했고, 마사카츠는 동생 마타쥬로와 함께 참가했다. 히데요시가 성의 수호장으로 임명된 후에도 요력(与力)으로 따라붙어 사이토 측을 조략하는 안내역으로 활동, 노부나가로부터 50여 촌과 500관을 포상으로 받았다. 다만, 스노마타 성의 축성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히데요시 슬하에서는 전투보다 정무에서 실무를 보는 일이 많았다. 히데요시의 주고쿠 공략을 보좌했고, 혼노지의 변에 따른 교토 회군 때 모리 데루모토와의 교섭역을 맡았다. 1585년(덴쇼 13년) 히데요시가 아와 1국을 주지만, 아들 하치스카 이에마사에게 양도하고 오와리에 남았다. 이는 고향을 떠나기 싫어했거나 히데요시 곁에 있기를 원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히데요시의 보좌역에는 다케나카 한베에, 구로다 간베에가 있지만, 통상 그들의 입안을 묵묵히 따랐다고 한다.

1569년(에이로쿠 12년), 히데요시의 대리인으로 교토에 남아 경비를 담당했으며, 5월 니조 어소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진화하여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오동나무 문장이 새겨진 하오리를 포상으로 받았다. 이후 오동나무 문장을 의복에 사용했지만, 만년에 히데요시도 오동나무 문장(다이코키리)을 사용하는 것이 허가되자, 이를 꺼려(마사카츠 사망 후) 하치스카 가문에서는 홑잎 벚나무 문장(다키가시와몬)으로 바꾸었다.

1570년(겐키 원년), 에치젠텐토잔성・카네가사키성 공격, 카네가사키 퇴각에서 활약했다. 아네가와 전투, 오미요코야마성 공략에서 히데요시와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요코야마성이 히데요시에게 맡겨지자 마사카츠는 성주가 되었다.

1573년(텐쇼 원년), 아자이씨 멸망 후 히데요시가 오미 나가하마성 주(처음에는 오다니성이었으나 후에 이전)가 되자, 마사카츠는 히데요시의 직신으로서 나가하마 영내에도 식읍을 받았다.

1576년(텐쇼 4년) 덴노지 합전에 참가, 히데요시 세력의 선봉을 맡아 「루오키시(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이시마치 부근의 지명으로, 이시야마 전쟁 때에는 오다 측의 요새가 건설된 근처의 장소.) 제일의 창」이라는 공을 세웠다. 나카무라 시게토모와 함께 잇키 세력의 목을 다수 베어 히데요시로부터 감상과 100석의 가증을 받았고, 노부나가로부터 포상으로 정문의 군의를 직접 수여받는 영예를 얻었다.

2. 4. 만년과 죽음

1586년 마사카쓰는 병에 걸려 교토에서 요양했다. 회복하여 오사카로 돌아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5월 22일(7월 8일) 루안婁庵일본어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61세였다. 법명은 후쿠쥬인 덴 쇼사쿠 시품 료간 죠초 다이코지福成院殿正覚寺品了巌常超大居士일본어이다.[3]

유언에 따라 은거령으로 주어졌던 5,000석을 도요토미 가문에 반환했다.[3]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실(다이쇼인)을 위해 가와치河内일본어 닛키日置일본어에 1,000석을 주었다. 유해는 가세이에 의해 루안의 류운잔 안주사龍雲山安住院일본어에 매장되었다.

안주사는 원래 미노국美濃国일본어 아쓰미군 쿄섬京島일본어의 옛 절로, 병란으로 황폐해졌기 때문에 마사카쓰가 오사카로 옮겨 출가한 이시카와 이세노카미石川伊勢守일본어를 개산조사로 하여 부흥시킨 것이다. 이 절은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 때 소실되었고, 전쟁 후 오사카 성의 확장 공사 때문에 같은 장소에 재건할 수 없었기에 가세이에 의해 시텐노지 옆으로 이동되어 코쿠온지興 গুরুতর寺일본어가 되었고, 마사카쓰의 묘도 개장되었다.[3] 하지만 코쿠온지도 메이지 시대가 되어 폐사되었고, 묘지는 텐즈이지의 관리가 되었다. 마사카쓰의 분묘는 다이쇼 14년(1925년)에 도쿠시마현 유지에 의해 수리되었다. 그 후 쇼와 46년(1971년)에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마유야마 정의 만넨산으로 이장되어 개장되었다.

가세이는 아와阿波일본어 도쿠시마에도 에가시잔 후쿠쥬지를 짓게 했지만, 후에 다이오잔 고겐지로 개칭되었다. 이 때문에 마사카쓰의 묘소는 현재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의 만넨산에 있으며, 위패소는 시모스케닌 정의 고겐지로 되어 있다. 이 외에 가세이는 나가군 오하라 촌大原村일본어에 깃요잔 게이코쿠지를 짓고 사령 20석을 주어 마사카쓰의 명복을 빌게했다. 또한, 고야산 오쿠노인에도 아와 도쿠시마 하치스카 가문 묘소가 있으며, 역대 번주의 묘가 있다. 출신지인 아이치현愛知県일본어 아마시 하치스카의 이케스즈야마 렌게지에도 가세이와의 합장 묘비가 후년에 만들어졌다.

3. 가계

항목내용
아버지하치스카 마사토시 (1553년 사망)
어머니야스이 시게유키의 딸
부인마츠, 이후 다이쇼인 (1611년 사망)
하쿠닌
자녀


  • 아버지: 하치스카 마사토시
  • 어머니: 모씨 (오하시 사다히로의 딸 또는 야스이 시게유키의 딸・야스이 고젠)
  • 형제자매
  • * 마타주로
  • * 마사노부
  • * 슴 (오다 키시치로의 아내)
  • * 마사모토
  • * 딸 (가지우라 마사노리의 아내)
  • 정실: 다이쇼인 (마스다 모치마사 또는 미와 요시타카의 딸)
  • * 장녀: 나라 (나카야마 나오치카의 정실・가시마 나가마사의 정실)
  • * 장남: 하치스카 이에마사 (도쿠시마번의 조상)
  • 측실: 하쿠운인 (토리 엣추노카미의 딸)
  • * 차녀: 이토 (구로다 나가마사의 정실)
  • 양자: 토가쿠 슌젠 (별명은 하치스카 나가히사)
  • 그 외의 자손
  • * 탤런트 샤쿠 유미코는 샤쿠 성으로 바꾼 마사카츠의 자손임을 자칭[4]

4. 등장 작품

분야작품명 및 배역
소설
만화야마사키 주조 원작, 쿠보타 센타로 / 소노다 미츠요시 작화의 『오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고로쿠』(구 제목: 『전국 원숭이 조련사』)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2023년 도호・KADOKAWA 『목』 (배역: 니시나 타카시)


참조

[1] 서적 『官報』號外「授爵,叙任及辞令」1928年11月10日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官報
[2] 서적 繪本太閤記. 初編 "{{NDLDC|10303870/12[...] 松延堂
[3] 간행물
[4] 웹사이트 売れるからには理由がある? 意外な先祖を持つ有名人 https://npn.co.jp/ar[...] 内外タイムス 2011-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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