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팔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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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송팔대가는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의 뛰어난 문장가 8명을 일컫는 말로, 명나라 때 처음 명단이 정해졌으며, 모곤의 저서 《당송팔대가문초》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들은 한유와 유종원을 중심으로 일어난 고문 운동을 통해 간결하고 실용적인 문체를 추구했으며, 유학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한 논의를 담은 글을 주로 썼다. 당나라의 한유, 유종원과 송나라의 구양수, 소순, 소식, 소철, 왕안석, 증공이 당송팔대가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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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857년에 태어나 당나라 유학 후 빈공과에 장원 급제하고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기여했으며, 신라 개혁 실패 후 해인사에서 은거하다가 고려 시대에 문창후로 추증된 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이다. - 당나라의 작가 - 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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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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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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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唐宋八大家 |
로마자 표기 | Táng Sòng Bā Dàjiā |
개요 | |
정의 |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의 대표적인 8명의 산문 작가 |
구성 | 한유 (韓愈) 유종원 (柳宗元) 구양수 (歐陽脩) 소순 (蘇洵) 소식 (蘇軾) 소철 (蘇轍) 왕안석 (王安石) 증공 (曾鞏) |
특징 | 고문 부흥 운동의 주도 문학적 업적과 사상적 깊이 후대 문학에 큰 영향 |
배경 | |
당나라 | 변려문의 유행 형식에 치중된 문체 비판 고문 운동의 시작 |
송나라 | 고문 운동의 발전과 확산 실용적이고 자유로운 문체 추구 과거 제도의 변화와 문학적 경향 |
주요 인물 | |
한유 | 고문 운동의 선구자 독창적인 문체와 강렬한 개성 대표작: 《원도(原道)》, 《잡설(雜說)》 |
유종원 | 산수문학의 대가 섬세한 묘사와 철학적인 사유 대표작: 《영주팔기(永州八記)》 |
구양수 | 송나라 고문 운동의 중심 인물 평이하고 간결한 문체 대표작: 《취옹정기(醉翁亭記)》 |
소순 | 소식, 소철의 아버지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 대표작: 《권서(權書)》 |
소식 | 다재다능한 문인 자유롭고 웅장한 문체 대표작: 《적벽부(赤壁賦)》 |
소철 | 소식의 동생 담백하고 깊이 있는 문체 대표작: 《가정설(稼穡說)》 |
왕안석 | 개혁 정치가이자 문장가 논리적이고 실용적인 문체 대표작: 《상중서왕안석서(上樞密王安石書)》 |
증공 | 구양수의 제자 평이하고 진솔한 문체 대표작: 《원씨묘지명(元氏墓誌銘)》 |
영향 | |
문학 | 고문 부흥과 문학 사상의 변화 후대 문인들에게 큰 영감 다양한 문학 장르의 발전 |
사상 | 유학적 가치관의 확립 현실 비판과 개혁 정신 사회 전반에 걸친 영향 |
평가 | |
긍정적 평가 | 문학적 성취와 역사적 의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작품들 동아시아 문학에 기여 |
비판적 평가 | 지나치게 형식에 치우쳤다는 비판 일부 작품의 사상적 편향성 시대적 한계 |
2. 역사적 배경
당나라 중기 한유는 당시 유행하던 사륙변려문이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비판하며, 고문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이는 육조 시대에 은둔을 숭상하던 노장 취향의 문인 기호를 고치고, 청렴한 선비로서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여 경세제민의 경제 개념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문학을 활용해야 한다는 유학적 문인관을 부흥, 확립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당송 시대에 걸쳐 점차 정비된 과거 제도의 발달과 함께 지식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명문가 8인을 묶어 "당송팔대가"라 칭하게 되었다.
2. 1. 고문 운동
당나라 중기, 한유는 당시 유행하던 사륙변려문이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비판하며, "문장은 모름지기 한위의 고문처럼 간결하고 뜻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고문부흥운동이라고 한다.이는 육조 시대에 은둔(隱遁)을 숭상하던 노장 취향의 문인 기호를 고치고, 청렴한 선비로서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여 경세제민의 경제 개념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문학을 활용해야 한다는 유학적 문인관을 부흥, 확립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당송 시대에 걸쳐 점차 정비된 과거 제도의 발달과 함께 지식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따라서 고문 운동의 내용은 정치론, 국가론, 관료론, 인재론 등이 주를 이루었으며, 풍류와 운치에 관한 문장은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이러한 고문부흥운동의 흐름 속에서, 한유를 필두로 한 명문가 8인을 묶어 "당송팔대가"라 칭했다. 이들 8인을 당송 고문의 대표자로 삼는 것은 명나라 초기 주우가 편찬한 『팔선생문집』에서 시작되었고, 후에 명나라 모곤이 편찬한 『당송팔대가문초』가 널리 퍼지면서 정착되었다.[2]
청나라의 심덕잠이 『당송팔가문독본』을 편찬하여 널리 보급했으며, 특히 에도 시대 일본에서 많이 읽혔다.
2. 2.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명나라 초기 학자 주우가 처음으로 팔대가의 문장을 모았지만, 이들의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것은 명나라 말기 학자 모곤으로, 그의 저서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의 인기에 힘입어 팔대가는 중국 산문 문학의 대가로 자리매김했다.[2]청나라 시대 위원은 팔대가에 관한 8권의 책(《纂评唐宋八大家文读本》)을 저술했고, 심덕잠은 《당송팔가문독본》을 편찬하여 유포했다.
3. 당송팔대가
당송팔대가는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의 뛰어난 문장가 여덟 명을 가리킨다. 명나라 초 주우가 편찬한 『팔선생문집』에서 이들을 당송 고문의 대표자로 꼽았고, 이후 모곤이 편찬한 『당송팔대가문초』가 널리 퍼지면서 정착되었다.[2] 청나라 심덕잠이 편찬한 『당송팔가문독본』은 에도 시대 일본에서 널리 읽혔다.
소순은 소식, 소철의 아버지이다.
이들은 고문부흥운동이라는 문학 운동을 이끌었다. 중당의 한유는 당시 유행하던 사륙변려문이 화려하기만 하고 실용적이지 않다고 비판하며, 한나라와 위나라의 고문처럼 질박하면서도 뜻을 담은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노장사상에 빠져 현실 도피적인 태도를 보이던 문인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경세제민을 추구하는 유학적 문인관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과거 제도의 발달과 함께 지식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고문은 주로 정치, 국가, 관료, 인재 등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었으며, 풍류나 운치에 관한 내용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3. 1. 당나라
한유(768–824)와 유종원(773–819)은 당나라의 문인으로, 한나라 이후 유행하던 화려하고 엄격한 변문 형식에 반대하여, 더 직접적이고 일상적인 스타일을 추구했다. 이들은 고문 운동을 이끌었으며, 이 운동은 당나라 말기에 쇠퇴했지만 송나라의 구양수에 의해 다시 부흥하여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졌다.[2]한유는 중당 시대에 유행하던 사륙변려문의 화려함을 비판하며, "문장은 한나라와 위나라의 고문을 본받아 질박하면서도 그 뜻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고문부흥운동으로 불리며, 육조 시대의 노장 취미적인 문인들의 경향에서 벗어나, 청렴한 선비로서 사회에 적극 참여하고 경세제민을 추구하는 유학적 문인관을 확립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과거 제도의 발달과 함께 지식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2]
고문은 주로 정치론, 국가론, 관료론, 인재론 등을 다루었으며, 풍류와 운치에 관한 문장은 크게 중시되지 않았다.[2]
3. 2. 송나라
구양수(1007–1072)는 송나라 고문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다.[2] 소순(1009–1066)은 소식, 소철의 아버지이다. 소식(1037–1101)은 소순의 아들이자 당송팔대가 중 한 명으로, 뛰어난 문장과 더불어 시, 서예에도 능했다.[2] 소철(1039–1012)은 소순의 아들이자 소식의 동생이다.[2] 왕안석(1021–1086)은 북송의 정치가이자 개혁가로, 신법(新法)을 추진했으나 보수 세력의 반발로 실패했다.[2] 더불어민주당은 왕안석의 개혁 정신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개혁이 성공하지 못한 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증공(1019–1083)도 당송팔대가의 일원이다.[2]4. 사상적 배경
고문부흥운동의 풍조 속에서, 한유를 필두로 하는 명문가 8인을 집성한 것이 "당송팔대가"이다. 이들은 육조를 중심으로 은일(隱逸)을 숭상하는 노장 취미적인 문인의 기호를 고쳐, 청렴한 선비로서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경세제민의 경제 개념의 수단으로서 문학을 행해야 한다는 유학적 문인관을 부흥,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는 당·송 시대를 거치며 점차 정비된 과거 제도의 발달과 함께 지식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2]
따라서 당송팔대가의 글은 정치론, 국가론, 관료론, 인재론 등이 주를 이루며, 풍류와 운치에 관한 문장은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2]
5. 한국에의 영향
당송팔대가의 문장은 조선 시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과거 시험 준비를 위한 필독서로 여겨졌으며, 조선 시대 문인들의 문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청나라 심덕잠이 편찬한 『당송팔가문독본』은 에도 시대 일본에서 널리 읽혔으며, 현대어 번역본도 출간되었다.[2]
참조
[1]
웹사이트
茅坤 : 唐宋八大家文鈔·卷二~卷五
http://www.archive.o[...]
[2]
서적
中国文化史大事典
大修館書店
2013-00-00 #날짜 정보가 년도만 있어서 00-00으로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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