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역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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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역 사건은 일본과 한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을 의미하며, 특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건들이 포함된다. 일본에서는 고토쿠 사건, 도라노몬 사건, 박열 사건, 사쿠라다몬 사건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 사건은 메이지 천황 암살 시도, 황태자 저격 미수, 아나키스트들의 대역죄 혐의, 이봉창의 수류탄 투척 사건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건들은 관련자들의 사형, 사회주의 운동의 위축, 정부의 탄압, 그리고 문학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는 등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발생한 이봉창 의거 등이 대역 사건으로 간주되며, 이들 사건은 한국의 독립 운동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대역 사건은 문학 작품의 소재로도 활용되어, 다양한 예술 작품을 통해 재해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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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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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의 대역 사건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시도를 대역죄로 규정하고 엄벌에 처했다. 구 형법과 현행 형법 모두 대역죄에 대해 사형을 법정형으로 규정했다.[3] 대역죄를 포함한 황실 관련 범죄 및 내란죄는 대심원(현재의 최고재판소)에서 1심이자 최종심으로 처리했다.[4]
일본에서 발생한 주요 대역 사건은 다음과 같다:
- 1910년 고토쿠 사건: 사회주의자 고토쿠 슈스이 등이 메이지 천황 암살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처형된 사건이다. 검찰의 날조 의혹이 제기되었다.
- 1923년 도라노몬 사건: 난바 다이스케가 쇼와 천황을 저격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 1925년 박열 사건: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가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사건이다.
- 1932년 사쿠라다몬 사건: 조선 독립운동가 이봉창이 쇼와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다.
이 중 '대역 사건'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1910년의 고토쿠 사건을 가리킨다.[5] 도라노몬 사건과 사쿠라다몬 사건은 현행범으로 체포되었지만, 고토쿠 사건과 박열 사건은 미수범 체포였다. 특히 박열 사건은 테러 계획의 구체성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과 피고인 양측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대역죄가 적용되어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2. 1. 고토쿠 사건 (1910년)
사카이 도시히코, 가타야마 센 등은 '헤이민 신문' 등을 통해 노동자 중심의 정치를 주장했다.[5] 1910년 5월 25일, 나가노현의 사회주의자 미야시타 다이키치 등 4명이 메이지 천황 암살 계획 혐의로 체포되었다(신슈 아케노 폭렬탄 사건). 이를 구실로 고토쿠 슈스이를 비롯한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다.[5]전후에는 정부의 조작 부분을 비판하는 시각이 대부분이며, 재심 청구 운동도 있었으나, 1967년 최고재판소는 면소 판결을 내렸다.[5] 이 사건은 마쓰무로 오사무 검사총장, 히라누마 기이치로 대심원 차석검사 등에 의해 날조되었다.[6]
1911년 1월 18일 사형 24명, 유기형 2명의 판결이 내려졌고,[6] 1월 24일부터 1월 25일에 걸쳐 12명이 사형 집행되었다.[6] 이 사건으로 인해 사회주의 운동은 크게 위축되었으며, 이를 '겨울 시대'라고 부른다.[5]
이 사건은 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쳐 이시카와 다쿠보쿠, 기노시타 모쿠타로, 나가이 가후 등의 작품에 반영되었다.[9] 또한 남북조 정통론 논쟁을 유발하기도 했다.[9]
2. 2. 도라노몬 사건 (1923년)
1923년 12월 27일, 난바 다이스케가 도라노몬에서 제48제국 의회 개원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 중이던 섭정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훗날의 쇼와 천황)의 차량을 향해 지팡이 모양의 총을 발사하여 저격한 암살 미수 사건이다.[1] 황태자는 다치지 않았지만, 옆에 앉아 있던 시종장이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1] 난바는 1924년 11월 13일 대심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11월 15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1] 이 사건으로 제2차 야마모토 내각은 총사퇴하였고, 경시총감 유아사 구라헤이, 경시청 경무부장 쇼리키 마쓰타로 등이 징계 면관되었다.[1] 난바의 출신지인 야마구치현의 지사는 2개월간 감봉 처분을 받았다.[1] 중의원 의원이자 경신구락부 소속이었던 다이스케의 아버지 난바 사쿠노신 또한 즉시 의원직을 사임하고, 구마게군 스오 촌(현 히카리시)의 자택에서 칩거하다가 단식으로 굶어 죽었다.[1]2. 3. 박열 사건 (1925년)
1923년 9월 1일 관동 대지진 발생 직후, 계엄령 아래 조선인들이 학살당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보호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아나키스트 박열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가 체포되었다. 1924년 2월 15일, 이들은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1925년 5월 2일에는 박열이, 5월 4일에는 가네코 후미코가 각각 대역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받았다.1926년 3월 25일 사형 판결이 내려졌으나, 4월 5일 은사로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특사장을 형무소장 앞에서 찢어버리는 강렬한 저항을 보였다. 같은 해 7월 22일, 가네코 후미코는 도치기 여자 형무소에서 간수의 눈을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형사 사건을 넘어,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었다. 같은 해 7월, 기타 잇키가 내각 전복을 노리고 취조 중 박열의 무릎에 가네코 후미코가 앉아 포옹하는 사진을 정계에 유포하면서, 옥중 대우 문제가 수개월 동안 정치 쟁점화되었다.
1945년 10월 27일, 패전 후 출옥한 박열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전향하여, 조선총련의 전신인 재일본조선인연합회(조련)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1946년 10월 한국민단의 전신인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을 결성하여 1949년 2월까지 초대 단장을 역임했다.
2. 4. 사쿠라다몬 사건 (1932년)
1932년 1월 8일, 조선 독립 운동 활동가 이봉창이 사쿠라다몬 밖에서 육군 시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쇼와 천황의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져 근위병 한 명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이다. '''이봉창 사건''' 또는 사쿠라다몬 불경 사건이라고도 불리며, 일본 정부는 '''이봉창 불경 사건'''이라고 불렀다.[1] 당시 수상 이누카이 쓰요시는 사표를 제출했지만 만류되었다.[1] 9월 30일, 이봉창은 대심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아 1932년 10월 10일에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1] 1946년에 재일 한국·조선인이 유골을 발굴하여, 고국인 조선에서 국민장이 거행되었으며, "의사"로서 백정기, 윤봉길 등과 함께 서울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1]3. 한국의 대역 사건 (4대 사건)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발생한 의거들을 대역 사건으로 간주한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고토쿠 사건, 도라노몬 사건, 박열 사건, 사쿠라다몬 사건이 있다.
3. 1. 고토쿠 사건 (1910년)
고토쿠 사건은 1910년 일본 제국에서 사회주의자 및 무정부주의자 등이 메이지 천황 암살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검거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고토쿠 슈스이를 비롯한 많은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이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11] 이 사건은 도라노몬 사건, 박열 사건, 사쿠라다몬 사건과 함께 일본 제국 내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대역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3. 2. 도라노몬 사건 (1923년)
도라노몬 사건3. 3. 박열 사건 (1925년)
박열 사건은 1923년 일본에서 일어난 암살 미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고토쿠 사건, 도라노몬 사건, 사쿠라다몬 사건과 함께 일본 제국의 주요 대역사건으로 꼽힌다.3. 4. 사쿠라다몬 사건 (1932년, 이봉창 의거)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가 도쿄 사쿠라다몬(경시청) 밖에서 쇼와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실패한 사건이다.[14] 이 사건은 한국에서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으로 평가받는다.[14]4. 대역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
세토우치 하루미의 소설 『머나먼 목소리』는 간노 스가의 전기 소설이다.[12] 신초 문고에서 출판되었다. 『여백의 봄』은 가네코 후미코의 전기 소설이며, 주오코론 신사에서 출판되었다.[12]
후쿠다 요시유키의 『마녀 전설』은 산이치 서방에서 1969년에 출판되었다.
가마다 사토시의 『잔몽』은 사카모토 세이마의 생애를 다룬 소설로, 고단샤 문고에서 2015년에 출판되었다.
다니구치 지로가 작화를 맡은 코믹스 『"도련님" 시대 제4부 메이지 유성우』는 후타바 문고에서 출판되었다.
히라이데 오사무의 『계획』이 있다.
키기 야스코의 『해가 떠오를 때』는 치쿠마 서방에서 1984년에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주인공 중 한 명인 프랑스 법학자 이소베 시로의 생애를 기록한 것이다. 이소베 시로는 메이지 13년(1880년) '형사 변호 제도'를 실현하고 평생 인권 옹호와 무고한 죄인을 만들지 않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메이지 43년(1910년), 대역 사건으로 48명의 사회주의자가 체포되었을 때 변호단장으로서 검찰과 싸웠으며, 변호 측에서 사건 경위를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2013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100년의 메아리 ~ 대역 사건은 살아있다』가 있다.[12]
쓰지하라 토오루의 『용서받지 못한 자』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마이니치 신문에 연재되었고, 2009년 마이니치 신문사에서 출판되었다. 2012년에는 슈에이샤 문고에서 상, 하권으로 출판되었다. 이 소설은 대역 사건으로 처형된 신구시의 의사 오이시 세이노스케를 모델로, 모리미야시의 의사 '마키 다카미쓰'로 그렸다. 이야기는 대역 사건 전야에 끝난다.[13][14] 마이니치 예술상을 수상했다.
참조
[1]
서적
ことばのハンドブック 第2版
NHK放送文化研究所
2005
[2]
웹사이트
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
https://kotobank.jp/[...]
[3]
웹사이트
百科事典マイペディア
https://kotobank.jp/[...]
[4]
웹사이트
大審院
https://kotobank.jp/[...]
[5]
서적
小説 大逆事件
https://books.bunshu[...]
文藝春秋
2001-01
[6]
서적
思想検事
岩波新書
2000
[7]
서적
思想검사
[8]
서적
寒村茶話
朝日選書
1979
[9]
간행물
[10]
방송
シリーズJAPAN 第二回 天皇と憲法
NHKスペシャル
2009-05-03
[11]
간행물
国文学
学燈社
2005-12
[12]
뉴스
大逆事件の真実を映画に
http://www.chugoku-n[...]
中国新聞社
2013-04-12
[13]
뉴스
私は一介の町医者に過ぎん。
2013-10-19
[14]
웹사이트
インタビュー『許されざる者』辻原登さん
http://www1.e-ho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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