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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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덴슈니는 오사카 전투 이후 센히메의 양녀가 되어 도케이지에서 삭발하고 19세 쿄잔니의 제자가 된 인물이다. 덴슈니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딸로, 7세에 오사카 전투에서 생포되었으나 센히메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덴슈니는 도케이지의 주지로서 절의 법도를 지키고 여성들을 위한 피난처 역할을 강화했으며, 아이즈 번 가토 가문의 개역 사건에서 센히메를 통해 막부와 강한 유대 관계를 보여주었다. 덴슈니는 37세에 사망했으며, 도케이지에는 덴슈니와 도요토미 가문, 센히메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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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슈니 | |
---|---|
인물 정보 | |
씨명 | 덴슈 호타이니 |
휘 이름 | 덴슈니 |
로마자 표기 | Tenshu Hōtai-ni |
출생명 | (기록 없음) |
출생 연도 | 게이초 14년 (1609년) |
출생지 | (기록 없음) |
사망 연도 | 쇼호 2년 2월 7일 (1645년 3월 4일) |
사망지 | (기록 없음) |
사인 | (기록 없음) |
묘지 | 도케이지 (가나가와현가마쿠라시) |
기념비 | (기록 없음) |
거주지 | (기록 없음) |
이명 | 나아히메 (일설), 야스히메 (일설) |
활동 거점 | (기록 없음) |
직함 | (기록 없음) |
종교 | |
종교 | 불교 |
종파 | 임제종 |
가족 관계 | |
배우자 | (기록 없음) |
자녀 | (기록 없음) |
아버지 | 도요토미 히데요리 |
친모 | 나리타 스케나오의 딸 |
양모 | 센히메 |
친척 | (기록 없음) |
추가 정보 | |
보충 | (기록 없음) |
2. 생애
덴슈니는 오사카 전투(1615년) 직후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주변 기록인 『슨푸기』[1]에는 1615년 5월 12일, "히데요리 어가(7세) ... 히데요리의 아들이 있다는 소문이 ... "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덴슈니와 같은 나이에 오빠였던 구니마쓰는 체포되어 로쿠조가와라에서 참수되었지만, 덴슈니는 센히메의 양녀가 되어 절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졌다.[2]
도케이사 유래서에는 "오사카의 난 이후, 텐주인 님(센히메)의 양녀가 되시어 ... 당산에 들어가 삭발"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며,[5] 오사카 전투 야마구치 큐안 도화[6] 등의 기록을 보면, 덴슈니는 함락 후 센히메의 양녀가 된 것으로 보인다.
1616년 10월 18일, 영국 상관장 리처드 콕스는 마쓰가오카를 삭발한 여성의 비구니 사찰로 소개하며, "히데요리 님의 어린 딸이 이 승원에서 비구니가 되어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라고 기록했다. 덴슈니는 8세에 薙染|치센일본어(불문에 들어가다, 출가하다일본어)하여 瓊山尼|케이잔니일본어의 제자가 되었다. 출가 후 이름은 덴슈 호타이이다.
도케이지는 가쿠잔니가 세운 절로, 남북조 시대에는 고다이고 천황의 황녀 요도니가 주지를 맡았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가마쿠라 니고산 제2위였다. 대대로 간토 구보, 고가 구보, 고유미 구보의 딸들이 주지를 맡았던 격식 있는 비구니 사찰이었기에 덴슈니가 입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덴슈니는 도케이지에 입산한 후 19세 교잔니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나, 탑명에 따르면 엔가쿠지(円覚寺) 오바이인(黄梅院)의 코한 슈신(古帆周信)에게 참선했다. 타쿠앙 소호에게 참선하려 했던 사실이 그의 서장에 의해 밝혀졌다.
덴슈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글을 통해 "개산 이래의 절의 법을 단절시키지 않도록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인연 끊는 절(구코미데라)로서 절의 법은 "권현님 어명"이 되었다고 전해진다.[6] 덴슈니는 이 "권현님 어명"을 옹호하며 절의 법을 지켰다.[7]
아이즈 소동이라고도 불리는 가토 아키나리의 개역 사건은 덴슈니가 센히메를 통해 도쿠가와 막부와 강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덴슈니는 호리 스이노의 아내를 계제자로 삼고 법명을 주었으며, 아키나리는 덴슈니의 항의에 굴복하여 호리 스이노의 아내를 용서하고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덴슈니는 쇼호 2년(1645년) 2월 7일,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센히메는 장성하여 딸의 13주기에 도케이지에 조의금을 보냈다. 덴슈니의 묘는 절의 역대 주지 묘탑 중 가장 큰 무봉탑이다. 묘비명은 '''당산 제20세 덴슈 호타이 다이와쇼'''이다.
덴슈니 묘 곁에는 "다이게츠인 덴 메이교쿠 소칸 다이시"라고 새겨진 보협인탑이 있으며, "덴슈 화상 어국, 쇼호 2년 9월 23일"이라고 각명되어 있다. 이 묘는 덴슈니를 돌보던 사람으로 추정된다.
2. 1. 출생과 가계
덴슈니의 어머니와 출생 전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2] 나아히메일본어라고도 하지만, 사료상의 근거는 없다. 미이케 준세이는 저서에서 가명을 타이히메일본어라고 했지만, 이는 출가 후 이름인 "덴슈 호타이일본어"에서 도케이지를 가리키는 "法"을 피하고 "泰"자를 쓴 것으로, 가명임을 밝히고 있다.[3] 가와구치 소세이도 "출가 전 이름, 속명은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4]덴슈니가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오사카성 함락 직후이며, 그 이전 기록은 없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주변의 기록인 『슨푸기』[1] 겐나 원년(1615년) 5월 12일 조에는 "히데요리 어가(7세)가 교고쿠 와카사노카미를 따라 잡혀 바쳐졌고, 히데요리의 아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 급히 찾아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소문이 퍼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이토쿠인덴 고지쓰키』[6] 겐나 원년 5월 12일 조에는 "히데요리의 첩 나리타 씨(고헤에 스케나오의 딸)에게서 태어난 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7] 이 책은 19세기 전반에 편찬되어 동시대 사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또한 "교고쿠 와카사노카미가 히데요리의 딸 8세 아이를 잡아 바쳤다"라고 8세로 기록했지만, 『슨푸기』나 호소카와 타다오키 서장 등 동시대 사료에서는 7세로 되어 있어, 게이초 14년(1609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덴슈니와 같은 나이의 형인 구니마쓰는 5월 21일에 체포되어 23일에 로쿠조가와라에서 참수되었는데, 이는 『슨푸기』[8]와 『다이토쿠인덴 고지쓰키』[9]에 기록되어 있다. 덴슈니의 어머니와 구니마쓰의 어머니가 같은지는 불분명하다.
덴슈니는 센히메의 양녀가 되어 절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졌다. 『다이토쿠인덴 고지쓰키』 5월 12일 조에는 "북방(센히메)이 기르셨다"라고 하여, 오사카성 안에 있을 때부터 센히메의 양녀였던 것처럼 읽히지만, 도케이사 유래서에는 "오사카의 난 이후, 덴주인 님(센히메)의 양녀가 되시어, 겐나 원년에 곤겐 님(이에야스)의 뜻에 따라 당산에 들어가 삭발하시고, 19세 쿄잔 화상의 제자가 되셨다"[10]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사카 진 야마구치 큐안 도화"[11] 등에는 구니마쓰가 7세까지 유모에게 길러졌고, 8세 때 요도도노의 여동생 조코인이 강화 교섭을 위해 오사카성에 들어갈 때 나가모치에 넣어 성 안으로 옮겨졌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덴슈니도 그 전까지는 다른 집에서 길러졌고, 구니마쓰와 같은 시기에 오사카성에 들어간 후, 함락 후에 센히메의 양녀가 된 것으로 보인다.
2. 2. 오사카 전투와 출가
덴슈니는 오사카 전투(오사카성 함락)(1615년) 직후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주변 기록인 『슨푸기』[1] 겐나 원년(1615년) 5월 12일 조에는 "히데요리 어가(7세) ... 히데요리의 아들이 있다는 소문이 ... "라는 기록이 있다. 『다이토쿠인덴 고지쓰키』[2]에는 "히데요리의 첩 나리타 씨 ... 의 배에서 낳은 아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19세기 전반에 편찬된 것이라 동시대 사료는 아니다. 덴슈니와 같은 나이의 오빠 구니마쓰는 체포되어 참수되었지만, 덴슈니는 센히메의 양녀가 되어 절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졌다.『다이토쿠인덴 고지쓰키』에는 센히메가 오사카성 안에서부터 길렀다는 기록이 있지만, 도케이사의 유래서에는 "오사카의 난 이후, 텐주인 님(센히메)의 양녀가 되시어 ... 당산에 들어가 삭발"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5] 오사카 전투 야마구치 큐안 도화[6] 등에는 함락 후 센히메의 양녀가 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있다.
겐나 2년(1616년) 10월 18일, 영국 상관장 리처드 콕스는 마쓰가오카를 삭발한 여성의 비구니 사찰로 소개하며, "히데요리 님의 어린 딸이 이 승원에서 비구니가 되어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라고 기록했다.
도케이지 유래서에 따르면 덴슈니는 8세에 薙染|치센일본어(불문에 들어가다, 출가하다일본어)하여 瓊山尼|케이잔니일본어의 제자가 되었다. 영패(위패) 뒤에는 "도요토미 히데요리 공의 딸, 도쇼 다이신군의 명에 따라 당산에 들어가 삭발한 지 8세"라고 적혀 있다. 출가 후 이름은 덴슈 호타이이다.
도케이지는 호조 도키무네 부인 가쿠잔니가 세운 절로, 남북조 시대에는 고다이고 천황의 황녀 요도니가 주지를 맡았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가마쿠라 니고산 제2위였다. 대대로 간토 구보, 고가 구보, 고유미 구보의 딸들이 주지를 맡았던 격식 있는 비구니 사찰이었기에 덴슈니가 입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덴슈니의 스승인 케이잔니의 여동생 겟케이인은 히데요시의 측실이었고,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의 딸 후리히메를 섬겼다. 이노우에 젠테이는 덴슈니의 도케이지 입사에 대해 "아마 겟케이인 근처의 책략이라고 추측된다"고 한다.
2. 3. 도케이지 주지 시절
덴슈니는 도케이지에 입산한 후 19세 교잔니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나, 탑명에 따르면 엔가쿠지(円覚寺) 오바이인(黄梅院)의 코한 슈신(古帆周信)에게 참선했다. 코한 슈신은 중국 임제종 양기파 환주 중봉 선사[7]에서 시작되는 환주파(幻住派)이다.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 도케이지 주지는 덴슈니를 제외하고는 모두 간토 공방 가문이었으며, 덴슈니의 스승이었던 19세 교잔니도 아시카가 씨 출신이었다. 그 관계에서 덴슈니도 오바이인의 코한 슈신에게 참선했을 것으로 보인다.또한 타쿠앙 소호에게 참선하려 했던 사실이 타쿠앙의 서장에 의해 밝혀졌다. 도쿠가와 이에미츠에 의해 창건된 도카이지(東海寺)의 주지가 된 타쿠앙에게 참선하려 한 것은 코한 슈신이 입적한 1642년(간에이 18년) 2월 1일 이후로 추정된다.[5]
덴슈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글을 통해 "개산 이래의 절의 법을 단절시키지 않도록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인연 끊는 절(구코미데라)로서 절의 법은 "권현님 어명"이 되었다고 전해진다.[6] 덴슈니는 이 "권현님 어명"의 경위를 언급하며 절의 법을 옹호하는 최대의 무기로 삼았으며,[7] 실제로 도케이지의 절의 법에 막부의 후원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인연을 끊는 절의 법은 부부의 이혼뿐만 아니라, 중세 이래의 아지르(무연)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2. 4. 아이즈 번 가토 가문 개역 사건
아이즈 소동이라고도 불리는 가토 아키나리의 개역 사건은 덴슈니가 센히메를 통해 도쿠가와 막부와 강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사건은 간에이 20년 (1643년) 5월 2일 다이유인덴 고실기[8]에 기록되어 있지만, 막부의 공식 기록(일기)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쇼토쿠 6년 (1716년)에 간행된 무장 감상기[10]와 분카 5년 (1808년)에 편찬된 『마쓰오카 도케이 사 고』에 덴슈니와 사건의 관계가 기록되어 있다.『무장 감상기』에는 가토 아키나리가 가신 호리 스이노의 아내를 잡아오려 하자, 도케이 사의 주지였던 덴슈니가 "요리토모 이래로 이 절에 오는 자는 어떤 죄인도 내보낸 적이 없다"며 격노하여 덴쥬인전(센히메)에게 호소했고, 결국 아키나리가 굴복하여 아이즈 40여만 석을 바치고 칩거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1]
『마쓰오카 도케이 사 고』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요리토모 이래"가 "옛날부터"로 수정되었을 뿐, 『무장 감상기』의 내용과 거의 같다. 『무장 감상기』는 일화집이므로 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가마쿠라의 여승 사찰이 가토 아키나리의 인도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호리 스이노의 아내는 실제로 도케이 사의 덴슈니에게 목숨을 구원받았으며, 아키나리가 굴복하여 아이즈 가토 가문이 개역되기 전에 친정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덴슈니는 호리 스이노의 아내를 계제자로 삼고 법명을 주었으며, 아키나리는 덴슈니의 항의에 굴복하여 호리 스이노의 아내를 용서하고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결론적으로, 호리 스이노의 아내는 도케이 사로 피신했고, 덴슈니는 의붓어머니 센히메를 통해 막부에 호소하여 그녀의 구명을 실현했다.
2. 5. 사망과 묘소
덴슈니는 쇼호 2년(1645년) 2월 7일, 아이즈 가토 가문이 개역(改易)된 지 2년 후에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센히메는 장성하여 딸의 13주기에 도케이지에 조의금을 보냈다. 덴슈니의 묘는 절의 역대 주지 묘탑 중 가장 큰 무봉탑이다. (오른쪽 사진 중앙의 둥근 것) 묘비명은 '''당산 제20세 덴슈 호타이 다이와쇼'''이다.덴슈니 묘 곁에는 "다이게츠인 덴 메이교쿠 소칸 다이시"라고 새겨진 보협인탑이 있으며, "덴슈 화상 어국, 쇼호 2년 9월 23일"이라고 각명되어 있다. 덴슈니가 사망하고 약 반년 후이다. 이 묘는 "덴슈 화상 어국"이라고 각명되어 있으므로 덴슈니를 돌보던 사람으로 추정된다. 묘의 격식이 있는 보협인탑이고 "어국"이라고 쓰여 있으며, 계명이 "원"이 아닌 "원전"인 것으로 보아 단순한 수행자가 아니라 상당한 신분의 높은 사람, 게다가 비구니가 아닌 일반 재가 여성임은 확실하다. 도케이지의 주지 이노우에 쇼도는 이 인물을 도케이지에 상당한 공적이 있던 인물, 혹은 덴슈니가 상당한 은의를 느꼈던 공로자, 또는 덴슈니를 교육하고 마음의 의지처이자 버팀목이 되어준 인물로 추측하고 있다. 다만, 절에는 이 인물에 대한 문헌이나 전승이 전혀 없고 묘만 남아 있다고 한다. 역대 주지 묘탑 구역에 재가(출가하지 않은 사람)의 보협인탑이 있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3. 덴슈니와 관련된 유물
덴슈니와 관련된 유물은 크게 도요토미 가문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과 센히메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로 나눌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딸인 덴슈니와 관련된 유물 중에는 도요토미 가문의 기리 문양이 새겨진 칠기가 남아있지만, 기리몬은 에도 시대에 널리 사용된 문양이라 덴슈니의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1] 도케이지에는 간에이 19년(1642년)에 덴슈 화상이 아버지 히데오리의 명복을 빌기 위해 주조했다는 명문이 있는 운판이 남아있다. 운판은 선종 사찰에서 사용하는 도구로, 가마쿠라 시대에 일본에 전래되었다. 도케이지의 운판은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가마쿠라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1] 도케이지 과거장에는 겐나 원년(1615년) 5월 23일에 만세인덴 운산지청대동자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날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아들 구니마쓰가 처형된 날이다.[1]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부인 스겐인이 건립한 도케이지(동경사)에는 센히메와 관련된 유물이 남아있으며, 이를 통해 덴슈니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동경사에 전해지는 棟板에는 묵서명이 있는데, '덴쥬인'(센히메의 생전 호칭)과 '법태'(덴슈니)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포함한 이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1] 센히메가 덴슈니에게 비파, 죽순, 꽃 등을 보낸 것에 대한 센히메 시녀의 답장 등 십여 통의 편지가 남아있어, 두 사람 간의 교류를 보여준다.[3]
3. 1. 도요토미 가문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딸인 덴슈니와 관련된 유물 중에는 도요토미 가문의 기리 문양이 새겨진 칠기가 남아있다. 그러나 기리몬은 에도 시대에 널리 사용된 문양이라 덴슈니의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1]
도케이지에는 간에이 19년(1642년)에 덴슈 화상이 아버지 히데오리의 명복을 빌기 위해 주조했다는 명문이 있는 운판이 남아있다. 운판은 선종 사찰에서 사용하는 도구로, 가마쿠라 시대에 일본에 전래되었다. 도케이지의 운판은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가마쿠라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1]
도케이지의 과거장에는 겐나 원년(1615년) 5월 23일에 만세인덴 운산지청대동자라는 기록이 있다. 이 날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아들 구니마쓰가 처형된 날이다.[1]
이 유물들은 덴슈니와 도요토미 가문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1]
3. 2. 센히메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부인 스겐인이 건립한 도케이지(동경사)에는 센히메와 관련된 유물이 남아있으며, 이를 통해 덴슈니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동경사에 전해지는 棟板에는 묵서명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1]
- 표면 오른쪽: 대단나 정이대장군 태정대신 종일위 원조신 히데타다 공 어부인 덴쥬인 어건립언
- 표면 왼쪽: 유지 간에이 11년 10월 길일 주지 관동 공방가 좌병위독 원뢰준 息女 법청 화상 : 제자 우대신 종이위 풍신 조정 히데요리 공 息女 법태 장주 어기진
- 이면: 당 대수 유모 춘일국 어집지언
여기서 '덴쥬인'은 센히메의 생전 호칭이며, '법태'는 덴슈니를 가리킨다. '당 대수'는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유모'는 가스가노 쓰보네를 의미한다.
동경사의 절례서에는 도쿠가와 다다나가의 저택 일부가 동경사에 기증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다다나가는 요도도노의 여동생 스겐인의 아들로, 센히메와 마찬가지로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아들이다. 다다나가는 간에이 10년(1633년)에 할복했고, 이듬해 그의 저택이 동경사에 기증되었다.
묵서명에 '주지 · 법청 화상', '제자 · 법태 장주'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덴슈니는 아직 정식 주지가 되지 못하고 '장주'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주는 선종 사원에서 주지를 보좌하는 직책 중 하나였다.[2]
센히메가 덴슈니에게 비파, 죽순, 꽃 등을 보낸 것에 대한 센히메 시녀의 답장 등 십여 통의 편지가 남아있어, 두 사람 간의 교류를 보여준다.[3]
참조
[1]
서적
史料雑纂2 収録。元和元年5月12日条はp.303
[2]
서적
徳川実紀2 p.41
[3]
서적
史料雑纂2。「駿府記」元和元年5月21日条および23日条 p.303
[4]
서적
徳川実紀2 収録。元和元年5月21日条はp.42、5月31日条はp.43
[5]
서적
鎌倉市史・寺社編 p.346
[6]
서적
續々群書類從 収録
[7]
논문
中世における幻住派の形成とその意義
http://repo.komazawa[...]
[8]
서적
徳川実紀3pp.312-313
[9]
서적
古今武家盛衰記 巻第十六 「四十万石 加藤式部少輔明成」 pp.311-318
[10]
서적
武将感状記 巻之十
[11]
서적
武将感状記 pp.51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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