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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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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는 1580년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1645년 사망한 스페인의 시인, 소설가, 정치가이다. 그는 카스티야 귀족 가문 출신으로, 예수회 학교와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케베도는 콘셉티스모 양식을 따르는 방대한 시를 남겼으며, 피카레스크 소설 《부스콘의 일생》을 저술했다. 정치 활동에도 참여하여 오수나 공작을 보좌했으며, 펠리페 4세의 총신을 비판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17세기 스페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그의 작품은 풍자와 유머, 철학적 깊이를 담고 있으며, 현대 문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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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프란시스코 고메스 데 케베도 이 산티바녜스 비예가스
원어 이름Francisco Gómez de Quevedo y Santibáñez Villegas
출생일1580년 9월 14일
출생지마드리드, 스페인
사망일1645년 9월 8일
사망지비야누에바 데 로스 인판테스 (시우다드 레알 현), 스페인
직업시인 및 정치인
언어스페인어
모교알칼라 대학교
활동 시기스페인 황금시대
문학 사조콘셉티스모
장르시와 소설
서명
작위산티아고 기사
로마자 표기

2. 생애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는 17세기 스페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1580년 마드리드(Madrid)에서 태어나 1645년 시우다드레알 주 빌라누에바 데 로스 인판테스에서 사망했다.

케베도는 칸타브리아(Cantabria) 지방의 이달고[2] 가문 출신으로, 그의 부모는 모두 궁정에서 일했다. 그는 예수회 학교와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á de Henares) 대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다양한 학문에 능통한 인문주의자로 성장했다. 그는 내반족(club foot)과 근시(myopia)라는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으며, 항상 집게 안경(pince-nez)을 착용했다.[3]

오수나 공작 페드로 텔레스-히론의 비서로 이탈리아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외교 분쟁에 연루되기도 했다. 1618년 산티아고 군사 수도회 기사 작위를 받았다.[5] 1620년 오수나 공작이 실각하면서 후안 아바드 탑으로 유배되었으나, 1621년 펠리페 4세 즉위 후 궁정에 복귀하여 왕실 비서로 일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1639년 체포되어 레온의 산 마르코스 수도원에 4년간 감금되었다.[8] 1643년 석방된 후 은퇴하여 빌라누에바 데 로스 인판테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스페인 종교 재판소에 자신의 작품을 고발하는 등 저작권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또한 무질서한 생활 방식으로 알려져 매춘부들이 드나드는 주점을 자주 찾았고, 루이스 데 곤고라는 그를 술꾼으로 조롱하기도 했다.

2. 1. 출생과 가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는 1580년 9월 14일 마드리드(Madrid)에서 태어났다.[1] 그의 가족은 칸타브리아(Cantabria) 북부 산악 지역에 위치한 베호리스(Vejorís) 마을 출신의 이달고[2] 가문이었다. 케베도의 아버지 프란시스코 고메스 데 케베도(Francisco Gómez de Quevedo)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딸이자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아내인 스페인의 마리아(Maria of Spain)의 비서였고, 어머니 마드리드 출신 마리아 데 산티바녜스(María de Santibáñez)는 왕비의 시녀(lady-in-waiting)였다. 케베도는 왕실에서 고위 관리들과 귀족들에 둘러싸여 성장했다.

2. 2. 학창 시절과 초기 활동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 있는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동상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á de Henares)에 있는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동상


케베도는 1580년 9월 14일 마드리드(Madrid)에서 태어났다.[1] 그의 가족은 칸타브리아(Cantabria) 북부 산악 지역에 위치한 베호리스(Vejorís) 마을 출신의 ''이달고''[2] 가문이었다.

케베도의 아버지 프란시스코 고메스 데 케베도(Francisco Gómez de Quevedo)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딸이자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아내인 스페인의 마리아(Maria of Spain)의 비서였고, 어머니 마드리드 출신 마리아 데 산티바녜스(María de Santibáñez)는 왕비의 시녀(lady-in-waiting)였다. 케베도는 왕실에서 고위 관리들과 귀족들에 둘러싸여 성장했다. 지적으로 재능이 있었지만, 내반족(club foot)과 근시(myopia)라는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항상 집게 안경(pince-nez)을 착용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의 복수형인 ''quevedos''는 스페인어로 "집게 안경"을 뜻하게 되었다.[3]

여섯 살 때 고아가 된 그는 마드리드에 있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왕립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 후 1596년부터 1600년까지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á de Henares) 대학교에 다녔다. 그는 철학, 고전어, 아랍어, 히브리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독학으로 공부했다. 케베도는 1616년에서 1626년 사이에 세바스티안 프란시스코 데 메드라노(Sebastian Francisco de Medrano) 회장이 설립한 메드라노 아카데미(마드리드 시 아카데미)에 다녔다.

1601년, 케베도는 왕의 장관인 레르마 공작(Duke of Lerma)에 의해 궁정이 옮겨진 발라돌리드(Valladolid)로 이사했다. 그는 신학을 공부했는데, 이는 평생의 관심사가 되었고, 후에 무신론에 반대하는 논문인 ''프로비덴시아 데 디오스(Providencia de Dios)''(''하느님의 섭리'')를 저술했다.

이 무렵 그는 시인이자 산문 작가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의 시 중 일부는 페드로 에스피노사(Pedro Espinosa)가 편집한 1605년 세대별 문집인 ''플로레스 데 포에타스 일루스트레스(Flores de Poetas Ilustres)''(''저명한 시인들의 꽃'')에 수록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피카레스코 소설(picaresque novel)인 ''부스콘의 일생(Vida del Buscón)''의 첫 번째 초고(궁정의 재치 있는 글쓰기 연습으로 쓰여진 것으로 보임)와 몇몇 풍자적인 팸플릿을 저술했는데, 이로 인해 동료 학생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나중에는 어린 시절의 장난으로 부인했다.

이 무렵 그는 인문주의자 유스투스 립시우스(Justus Lipsius)와 서신 교환을 시작했는데, 케베도는 유럽을 황폐화시킨 전쟁들을 비난했다. 1606년 궁정은 마드리드로 돌아왔고, 케베도는 1611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때까지 그는 유명하고 성공한 문필가가 되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극작가인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와 로페 데 베가(Lope de Vega)와 친구가 되었다.

2. 3. 오수나 공작과의 관계와 정치 활동

그 무렵 케베도는 당대의 거물급 정치가이자 장군이었던 오수나 공작 페드로 텔레스-히론과 매우 가까워졌다. 1613년 오수나 공작의 비서로 이탈리아에 동행하여 니스, 베네치아를 거쳐 마드리드로 돌아오는 여러 임무를 수행했다.[5] 마드리드에서 그는 오수나 공작에게 나폴리 왕국의 총독직을 얻기 위해 온갖 궁정 음모에 개입했고, 1616년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 그 후 그는 공작의 수행원으로 이탈리아로 돌아가 총독령의 재정 정리를 맡았고, 경쟁 관계에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한 여러 첩보 임무를 맡았지만, 현재는 그가 직접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는 그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1618년 산티아고 군사 수도회 기사 작위를 받았다.[5]

케베도는 귀족들과 교류가 두터웠으며, 그중에서도 3대 오수나 공작 페드로 테예스-히론과의 교분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오수나 공작은 나폴리 왕국 부왕까지 역임한 인물이지만, 재임 중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한 적대 정책을 채택하여 케베도를 특사로 베네치아 공화국에 파견하는 등 중용했다.

또한 펠리페 4세의 총신이었던 올리바레스 백작 가스파르 데 구즈만을 비판하는 시를 펠리페 4세의 냅킨에 적는 과격한 행동으로도 알려져 있다.

2. 4. 궁정 복귀와 말년

1620년 오수나 공작의 실각으로 케베도는 후원자와 보호자를 잃고, 어머니가 그를 위해 매입한 영지인 시우다드 레알의 후안 아바드 탑으로 유배되었다.[1] 그러나 그의 가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고, 케베도는 마을 시의회와 끝없는 법적 분쟁에 휘말렸는데, 이 분쟁은 그의 사후에야 해결되었다.

케베도는 이 은퇴 생활 중에 "고요한 이 황야의 평화 속에 은둔하여…" 또는 "호라이 탑은…"과 같은 뛰어난 시들을 썼다. 그는 궁정인으로서의 좌절된 야망을 세네카의 스토아 철학에서 위안을 찾았고, 그의 연구와 주석은 그를 스페인 신스토아주의의 주요 대표자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1621년 펠리페 4세의 즉위는 케베도의 유배 생활의 종식을 의미했고, 그는 새로운 장관인 올리바레스 백작 공작의 영향 아래 궁정과 정치로 복귀했다. 케베도는 젊은 국왕과 함께 안달루시아와 아라곤으로 여행을 떠났고, 그 여정의 여러 사건들을 흥미로운 편지에 기록했다.

이때 그는 이익을 추구하는 서적 판매업자들이 그의 동의 없이 출판한 자신의 작품을 스페인 종교 재판소에 고발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서적 판매업자들을 위협하고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기 위한 조치였으며, 그의 생전에는 이루어지지 못한 그의 작품의 최종판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무질서한 생활 방식으로 알려졌다. 그는 골초였고, 매춘부들이 드나드는 주점을 자주 찾았으며, '레데스마'로만 알려진 한 여성과 동거했다. 루이스 데 곤고라는 그를 술꾼으로 조롱하며 풍자시에서 "돈 프란시스코 데 케베보"(Don Francisco de Quebebo, 그의 이름을 이용한 말장난으로 "술고래 돈 프란시스코"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라고 불렀다.

이러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의 궁정 생활은 계속되었는데, 아마도 국왕도 비슷하게 방탕한 평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1632년 그는 국왕의 비서가 되어 정치 생활의 정점에 도달했다.

그의 친구인 메디나첼리 공작 안토니오 데 라 세르다는 케베도에게 자녀가 있는 과부인 도냐 에스페란자 데 아라곤과 강제로 결혼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1634년에 이루어진 이 결혼은 겨우 3개월 만에 끝났다. 케베도는 이 시기에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

1634년 그는 "요람과 무덤"(La cuna y la sepultura)과 프란시스 드 살의 "경건한 삶으로의 소개"(La introducción a la vida devota)를 번역하여 출판했다. 1633년에서 1635년 사이에 그는 "어떤 운명의 치료법"(De los remedios de cualquier fortuna), "에피크테토스", "무장한 미덕"(Virtud Militante), "네 명의 유령"(Los cuatro fantasmas), "하느님의 정치"(Política de Dios)의 두 번째 부분, "리슐리외 추기경의 머리 방문 및 해부"(Visita y anatomía de la cabeza del cardenal Richelieu), "루이 13세에게 보내는 편지"(Carta a Luis XIII)와 같은 작품들을 완성했다.

1635년 발렌시아에는 그를 중상모략하기 위한 수많은 명예훼손 중 가장 중요한 것인 "오류의 스승이자 뻔뻔함의 박사, 광대짓에 면허를 받은 자, 더러움의 학사, 악덕의 교수이자 인간들 사이의 원초적 악마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의 저술에 맞서 세워진 정당한 복수의 법정"(El tribunal de la justa venganza, erigido contra los escritos de Francisco de Quevedo, maestro de errores, doctor en desvergüenzas, licenciado en bufonerías, bachiller en suciedades, catedrático de vicios y protodiablo entre los hombres)이 나타났다.

1639년, 그는 체포되었다. 그의 책들은 압수당했다. 당국은 케베도에게 옷을 입을 시간조차 거의 주지 않고 그 시인을 레온의 산 마르코스 수도원으로 데려갔다. 수도원에서 케베도는 독서에 전념했는데, 이는 그의 친구 아단 데 라 파라에게 쓴 ''Carta moral e instructiva''(''도덕적이고 교훈적인 편지'')에서 그가 시간대별로 감옥 생활을 묘사하면서 언급한 바와 같다("열 시부터 열한 시까지는 기도와 경건한 행위에 시간을 보내고, 열한 시부터 열두 시까지는 좋은 작가와 나쁜 작가의 책을 읽습니다. 비천할지라도 좋은 점이 없는 책은 없기 때문입니다…").[8]

1643년 감금에서 풀려났을 때 허약하고 심하게 아팠던 케베도는 왕실 법정에서 완전히 물러나 후안 아바드 탑에서 은퇴했다. 그는 1645년 9월 8일 시우다드레알 주 빌라누에바 데 로스 인판테스의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한 이야기는 그의 무덤이 며칠 후 케베도가 묻힌 금 박차를 갖고 싶어하는 한 귀족에 의해 약탈당했다고 전한다.

3. 문학 세계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는 17세기 스페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1580년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1645년 세상을 떠났다. 케베도는 예수회 학교와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교에서 폭넓은 교육을 받았으며, 오수나 공작의 재무 관리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정치적 음모와 모함 속에서 살았으며, 때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치기도 했다. 54세에는 에스페란사 데 멘도사와 결혼했으나 몇 달 만에 헤어졌다. 케베도가 살았던 시대는 스페인 제국의 좌절, 정치 불안, 사회 부패, 전염병, 기근 등으로 얼룩진 위기의 시대였다. 그는 이러한 시대의 어둠을 작품 속에 장엄하게, 때로는 애절하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담아냈다.

케베도는 후안 루이스 데 알라르콘, 후안 페레스 데 몬탈반, 루이스 파체코 데 나르바에스 등과 적대 관계에 있었다. 특히 루이스 데 곤고라를 신랄하게 풍자했는데, 그를 무가치한 사제, 동성애자, 도박꾼 등으로 비난했다. 소네트 『코에』(A una nariz, To a Nose)에서는 곤고라의 외모, 특히 그의 큰 코를 조롱했다.[7]

케베도는 엘 부스콘(1626)을 비롯하여 방대한 양의 시와 산문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풍자, 유머, 철학적 사색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당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다. 특히 『꿈』(Sueños y discursos)에서는 재단사, 여관 주인, 유대인, 의사 등 다양한 집단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20] 또한 『모든 사람의 시간과 현명한 운명』(1699)에서는 격렬한 반유대주의적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21]

3. 1. 콘셉티스모와 쿨테라니스모

케베도는 '콘셉티스모(conceptismo)'라는 문체의 추종자였는데, 이는 "간결하거나 경구적인 문체로 표현된 재치 있는 번뜩임"으로 정의된다.[9] 콘셉티스모는 빠른 리듬, 직접성, 단순한 어휘, 재치 있는 비유, 그리고 말장난이 특징이다. 이 문체에서는 매우 간결한 방식으로 다중적 의미가 전달되며, 정교한 어휘보다 개념적 복잡성이 강조된다. 콘셉티스모는 케베도와 발타사르 그라시안(Baltasar Gracián)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우아한 철학적 심오함뿐만 아니라 신랄한 풍자와 유머를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케베도는 공격적인 문체를 공격하기 위해 『라 쿨타 라티니파르라』(『라틴어를 구사하려는 열풍』)와 『아구하 데 나베가르 쿨토스』(『유려한 암초를 항해하기 위한 나침반』)를 썼다.[3]

라이덴의 벽시


스페인 바로크(Barroco) 문예의 유력한 흐름 중 하나인 콘셉티스모(conceptismo)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와 정반대의 흐름인 쿨테라니스모(culteranismo) 문인들과는 격렬하게 대립했다. 특히 쿨테라니스모의 지도자인 루이스 데 곤고라(Luis de Góngora)와의 대립은 매우 심했다고 전해진다.

3. 2. 시

케베도는 ''콘셉티스모(conceptismo)''라는 문체를 추종했는데, 이는 "간결하거나 경구적인 문체로 표현된 재치 있는 번뜩임"으로 정의된다.[9] ''콘셉티스모''는 빠른 리듬, 직접성, 단순한 어휘, 재치 있는 비유, 그리고 말장난이 특징이다. 이러한 문체에서는 매우 간결한 방식으로 다중적 의미가 전달되며, 정교한 어휘보다 개념적 복잡성이 강조된다. ''콘셉티스모''는 케베도와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우아한 철학적 심오함뿐만 아니라 신랄한 풍자와 유머를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케베도의 소네트 ''¡Ah de la vida!''의 첫 번째 삼행시는 시에서 ''콘셉티스모''가 정점에 달한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로 여겨진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은 쉬지 않고 사라져 간다;''

:''나는 지나간 것, 될 것, 그리고 지친 현재이다.''

케베도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겼다.[10] 그의 시는 생전에 책으로 출판되지 않았는데, "인간에 대한 그의 풍자적인 시각, 때로는 날카롭고 잔혹하며 격렬하게 비판적인 성격으로 일그러진 시각을 보여준다."[11] 이러한 태도는 그가 살았던 "암흑의 17세기"[12]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그의 풍자적인 작품에도 불구하고, 케베도는 주로 연애시를 중시했던 진지한 시인이었다.[11]

그의 시는 그의 문학적 재능뿐만 아니라 그의 박식함도 보여준다(케베도는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아랍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공부했다).[13] 그의 소네트 중 하나인 "A Roma sepultada en sus ruinas"(1650)는 조아킴 뒤 벨레의 프랑스 시 "Nouveau venu qui cherches Rome en Rome"(1558년 《로마의 고대 유적》에서 발췌)를 각색한 것이다.[14] 그의 시적 작품은 풍자적이고 신화적인 주제부터 연애시와 철학적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케베도는 끊임없이 탐욕과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공격했다. 그의 "Cartas del Caballero de la Tenaza"는 악명 높은 구두쇠를 공격한다.[13] 그는 또한 약을 변질시키고 조제를 잘못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던 약제사들을 공격했다.[13]

그의 연애시에는 "Afectos varios de su corazón, fluctuando en las ondas de los cabellos de Lisi"(리시의 머리카락 물결 위에서 흔들리는 그의 마음의 여러 반응)와 같은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한 학자가 썼듯이, "케베도는 여성혐오자로 불릴 정도로 여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여성을 숭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13] 처음 네 줄은 다음과 같다.

:곱슬거리는 금빛 폭풍 속에서

:순수하고 눈부신 빛의 깊은 심연이 헤엄쳐야 한다

:아름다움에 목마른 나의 마음은

:네 풍성한 머리카락을 풀 때

세고비아에 있는 ''부스콘'' 기념판


그의 작품은 당시의 전형적인 신화적 주제를 사용했지만,[13] 예를 들어 그의 "다프네를 쫓는 아폴론"에서 볼 수 있듯이 풍자적인 요소도 사용했다.

:높은 곳에서 온 붉은 은장이여,

:그 밝은 빛 속에서 어리석은 자들이 이를 줍는구나:

:도망치고 말하지 않는 저 요정 다프네여,

:그녀를 얻고 싶다면 값을 지불하고 빛을 꺼라.[16]

케베도의 시에는 항해사가 신대륙을 발견한 배의 일부가 콜럼버스에게 헌정한 것으로 상상되는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한때 나는 제국을 가지고 있었네, 방랑자여,

:짠 바다의 물결 위에서;

:나는 바람에 움직였고 존경받았네,

:남쪽 땅으로 나는 길을 열었네.[17]

3. 3. 소설

케베도가 쓴 유일한 소설은 피카레스크 소설인 비다 델 부스콘(''Historia de la vida del Buscón, llamado Don Pablos, ejemplo de vagamundos y espejo de tacañoses'')으로 1626년에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은 영어권에서도 인기를 끌었는데, 존 데이비스가 1657년에 ''The Life and Adventures of Buscon the Witty Spaniard''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하였고, 1670년에 두 번째 판이 출판되었다.[18] 1683년과 1707년에도 새로운 번역본이 등장했다.[19]

한국어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제목역자출판사출판 연도비고
대악당 부스콘의 생애 (*La vida del Buscón, llamado Don Pabloses*)쿠와나 카즈히로슈에이샤1979년다른 판본 1975년
사기꾼 돈 파블로스의 생애 (*La vida del Buscón, llamado Don Pabloses*)타케무라 후미히코코쿠쇼칸코우카이1997년「라사릴료 데 토르메스의 생애」(La vida de Lazarillo de Tormes y de sus fortunas y adversidadeses) 〔우시지마 노부아키 역〕과 함께 수록
결혼타로와 청춘하나코의 인연맺기히가시야 에이진하쿠수샤1996년단편, 「웃음의 기사단 스페인 유머 문학 걸작선」에 수록
엉덩이의 눈의 행운과 불운히가시야 에이진하쿠수샤1996년단편, 「웃음의 기사단 스페인 유머 문학 걸작선」에 수록
지옥의 꿈요시다 아야코치쿠마쇼보1991년단편, 『시부사와 류히코 문학관 2 바로크의 상자〉에 수록, 쿠와나 카즈히로 편·해설


3. 4. 기타 작품

케베도는 신학 및 영성 수련 관련 서적 약 15권을 저술했다.[3] 여기에는 『요람과 무덤』(1612, ''La cuna y la sepultura'')과 『하느님의 섭리』(1641, ''La providencia de Dios'')가 포함된다.

그는 문학 비평 관련 저서로 『라 쿨타 라티니파르라』(『라틴어를 구사하려는 열풍』)와 『아구하 데 나베가르 쿨토스』(『유려한 암초를 항해하기 위한 나침반』)를 썼다. 두 작품 모두 공격적인 문체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3]

케베도의 풍자 작품에는 『꿈과 담론』(1627)으로도 알려진 『꿈』(Sueños y discursos, Los Sueños)이 있다. 케베도는 다섯 개의 "꿈의 환영"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많은 말장난을 사용했다. 첫 번째는 최후의 심판의 꿈으로, 케베도는 최후의 심판을 목격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지옥을 엿보는 것으로 끝맺는다. 두 번째 꿈은 악마에 씌인 경관으로, 한 경관이 악령에 사로잡히고 그 결과 악령은 경관이 자신보다 더 악하기 때문에 퇴마되기를 간청한다. 세 번째 꿈은 긴 지옥의 환영이다. 네 번째 꿈의 환영은 내면으로부터의 세계이다. 마지막 꿈은 죽음의 꿈으로, 케베도는 인간의 부정직한 방식의 예를 보여준다.[20]

『꿈』에서 다소 인간혐오적인 케베도는 재단사, 여관 주인, 연금술사, 점성술사, 여성, 제노바 사람들, 프로테스탄트, 경관, 회계사, 유대인, 의사, 치과의사, 약제사, 온갖 위선자 등 수많은 집단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그는 또한 풍자적인 어조로 많은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암시를 담은 『모든 사람의 시간과 현명한 운명』(La hora de todos y la Fortuna con seso, 1699)을 썼다. 그는 말장난과 환상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을 통해 언어 사용 능력을 보여준다. 이 책에 수록된 격렬한 반유대주의적 이야기인 『모노판토 섬』(La Isla de los Monopantos)은 기독교를 파괴하기 위한 비밀 유대인 음모를 묘사하고 있으며, 모노판토의 수장 프라가스 친콜로스(올리바레스 백작 공작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인물)의 도움을 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헤르만 괴트셰(Hermann Goedsche)의 소설 『비아리츠』(Biarritz)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지는데, 이 소설은 『시온 장로 의정서』의 인정되지 않은 출처 중 하나이다.[21] 격렬한 반유대주의자이자 "개종자"(conversos)를 반대했던 케베도는 그의 작품 『유대인에 대한 저주』(Execración contra los judíos)에서 포르투갈계 신기독교인들의 성격을 펠리페 4세에게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들은 쥐와 같습니다, 주여, 빛의 적이자 어둠의 친구, 부정하고 악취가 나며 지하에 사는 자들입니다."[22]

4. 정치 활동과 사상

케베도는 당대 거물급 정치가이자 장군이었던 오수나 공작 페드로 텔레스-히론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5] 1613년, 케베도는 오수나 공작의 비서로 이탈리아에 동행하여 니스, 베네치아를 거쳐 마드리드로 돌아오는 여러 임무를 수행했다.[5] 마드리드에서 그는 오수나 공작에게 나폴리 왕국총독직을 얻기 위해 온갖 궁정 음모에 개입했고, 1616년에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5] 그 후 그는 공작의 수행원으로 이탈리아로 돌아가 총독령의 재정 정리를 맡았고, 경쟁 관계에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한 여러 첩보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현재는 그가 직접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5] 그는 그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1618년 산티아고 군사 수도회 기사 작위를 받았다.[5]

그의 정치 관련 저술로는 『하느님의 정치와 그리스도의 통치』(La política de Dios, y gobierno de Cristo, 1617-1626)와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생애』(La vida de Marco Bruto, 1632-1644)가 있다.[3] 하비에르 마르티네스-피냐(Javier Martínez-Pinna)와 디에고 페냐(Diego Peña)에 따르면, "그의 저술에서 그는 항상 조국 수호에 대한 집착을 보였으며, 스페인의 세계적 패권이 필요하고 불가피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스페인의 쇠퇴기에 그에게 큰 해를 끼쳤다. 그는 또한 산 이시도로가 확립하고 케베도 자신이 국가를 강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사용한 스페인 찬양(laus Hispaniae)의 전통에 통합되었다. 그는 일련의 저술에서 스페인을 옹호하고 가장 저명한 동포들의 위대함을 칭찬하며, 프레이 루이스 데 레온, 호르헤 만리케,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와 같은 작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문학 분야에서의 스페인의 우월성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기술에서도 스페인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16세기 아랍인들과 다른 유럽 열강들과의 대결에서 카스티야 무기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라고 평가했다.[23]

케베도는 풍자적인 어조로 많은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암시를 담은 『모든 사람의 시간과 현명한 운명』(La hora de todos y la Fortuna con seso, 1699)을 썼다.[21] 그는 말장난과 환상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을 통해 언어 사용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 책에 수록된 격렬한 반유대주의적 이야기인 『모노판토 섬』(La Isla de los Monopantos)은 기독교를 파괴하기 위한 비밀 유대인 음모를 묘사하고 있으며, 모노판토의 수장 프라가스 친콜로스(올리바레스 백작 공작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인물)의 도움을 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21] 이 이야기는 헤르만 괴트셰(Hermann Goedsche)의 소설 『비아리츠』(Biarritz)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지는데, 이 소설은 『시온 장로 의정서』의 인정되지 않은 출처 중 하나이다.[21] 격렬한 반유대주의자이자 "개종자"(conversos)의 반대자였던 케베도는 그의 작품 『유대인에 대한 저주』(Execración contra los judíos)에서 포르투갈계 신기독교인들의 성격을 펠리페 4세 국왕에게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들은 쥐와 같습니다, 주여, 빛의 적이자 어둠의 친구, 부정하고 악취가 나며 지하에 사는 자들입니다."[22]

펠리페 4세의 총신이었던 올리바레스 백작 가스파르 데 구즈만을 비판하는 시를 펠리페 4세의 냅킨에 적는 과격한 행동으로도 알려져 있다.

5. 평가와 영향

스페인의 대표적인 작가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는 17세기 세계 문학사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콘세프티스모(conceptismo)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쿨테라니스모(culteranismo) 문인들과는 격렬하게 대립했다.[4] 특히 쿨테라니스모의 지도자인 루이스 데 곤고라와는 평생의 적이었으며,[4] 케베도는 곤고라를 신랄하게 풍자하며 그의 작품과 외모를 조롱했다.[6][7]

케베도는 후안 루이스 데 알라르콘, 후안 페레스 데 몬탈반, 루이스 파체코 데 나르바에스 등과도 적대적인 관계였다.[4] 그는 알라르콘의 외모를 놀리고, 몬탈반을 풍자하는 작품을 썼으며, 파체코와는 결투를 벌이기도 했다.[4]

케베도는 충동적인 성격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산 마르틴 교회에서 한 남자가 다른 여성의 뺨을 때리자, 그를 붙잡아 교회 밖으로 끌어내 결투를 벌여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5]

케베도는 아르투로 페레스-레베르테의 소설 『알라트리스테』, 에릭 플린트와 앤드류 데니스의 대체역사 소설 『1635: 대포법』, 그리고 소설 『돌연사』 등 여러 문학 작품에서 주요 등장인물로 다뤄지고 있다. 지아니나 브라스키의 소설 『요요 보잉!』에서는 케베도의 문학적 위상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참조

[1] 뉴스 Una carta de Quevedo permite fijar la fecha exacta de su nacimiento http://www.elpais.co[...] Ediciones El País S.L. 2014-10-16
[2] 문서 Contraction of ''hijos de algo'', meaning ''sons of someone or something'' who were a middle class of landed gentry just below the nobility
[3] 웹사이트 Francisco de Quevedo Biography and Analysis http://www.bookrags.[...]
[4] 웹사이트 Famous Duels and Duellists http://www.plumes.or[...] Ghost Sparrow Publications 2017-10-05
[5] 서적 Love and the Spanish Cassell
[6] 논문 La lengua poética de Góngora https://books.google[...] Consejo Superior de Investigaciones Científicas, Instituto Miguel de Cervantes
[7] 웹사이트 A un hombre de gran nariz http://sonnets.spani[...] Sweet Briar College 2008-01-07
[8] 서적 Obras de Don Francisco de Quevedo Villegas https://archive.org/[...] M. Rivadeneyra
[9] 서적 Dictionary of Spanish Literature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1956-01-01
[10] 웹사이트 Francisco de Quevedo y Villegas (1580-1645) https://www.poesi.as[...] 2018-10-10
[11] 서적 Introduction to Spanish Poetry Courier Dover
[12] 뉴스 Herrsche in Dir selbst 2004-02-09
[13] 웹사이트 Faltar pudo el mundo al gran Quevedo pero no a su defensa sus poesías http://www.lenguasde[...] 2018-10-10
[14] 논문 Du Bellay, Spenser, and Quevedo Search for Rome: A Teacher's Peregrination 1997
[15] 웹사이트 Afectos varios... http://sonnets.spani[...] 2007-08-21
[16] 웹사이트 A Apolo siguiendo a Dafne http://sonnets.spani[...] 2007-08-05
[17] 웹사이트 Túmulo Colón http://sonnets.spani[...] 2007-08-05
[18] 서적 The Life and Adventures of Buscon the Witty Spaniard. Put into English by a Person of Honour. To which is added, the Provident Knight. With a dedicatory letter signed: J. D. https://books.google[...]
[19] 서적 The New Cambridge Bibliography of English Literature: Volume 2, 1660-1800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1-07-02
[20] 웹사이트 Dreams and Discourses – Francisco de Quevedo http://www.complete-[...]
[21] 서적 Los Judíos en España
[22] 논문 El antisemitismo de Francisco de Quevedo: ¿obsesivo o residual? Apuntes crítico-bibliográficos en torno a la publicación de la ''Execración contra los judíos'' https://core.ac.uk/d[...]
[23] 논문 Francisco de Quevedo. Su obra más polémica.
[24] 백과사전 Quevedo, Francisco de https://link.springe[...]
[25] 백과사전 Francisco Gómez de Quevedo y Villegas Spanish writer https://www.brit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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