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도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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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도도노는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어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았다. 히데요시 사후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서 도요토미 가문을 이끌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대립하다가 오사카 전투에서 패하여 자결했다. 생전에는 차차, 기쿠코 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며, 요도노 가타, 니노 마루도노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대에는 요도 도노, 요도 기미 등으로 불리지만, 요도 기미라는 호칭은 악녀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이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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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도도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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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요도도노 |
일본어 이름 | 淀殿(よどどの) |
다른 이름 | 淀君(요도기미), 아사이 차차(浅井 茶々), 아사이 기쿠코(浅井 菊子) |
출생 이름 | 차차 (茶々) |
출생일 | 1569년 |
사망일 | 1615년 6월 4일 |
사망 장소 | 오사카성 |
국적 | 일본 |
묘지 | 요겐인 (교토부교토시히가시야마구), 다이유지 (오사카부오사카시기타구) |
가족 | |
아버지 | 아자이 나가마사 |
어머니 | 오이치 |
계부 | 시바타 가쓰이에 |
자매 | 오하쓰, 오에요 |
형제 | 아사이 만푸쿠마루, 아사이 만주마루, 아사이 기하치로 |
숙부 | 오다 노부나가 |
숙모 | 교고쿠 마리아 |
양어머니 | 네네 |
양형제 | 오노 하루나가 |
배우자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자녀 | 도요토미 쓰루마쓰, 도요토미 히데요리, 양자: 완코 |
가문 | |
소속 | 도요토미 씨 |
전투 | |
주요 전투 | 오사카 전투 |
2. 생애
요도도노는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 아자이 나가마사와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생으로는 하쓰(교고쿠 다카쓰구 정실)와 고(도쿠가와 히데타다 정실)가 있다. 아버지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와 대립하여 패사했고, 어머니 오이치는 재혼 상대였던 시바타 가쓰이에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하여 자결했다. 이후 세 자매는 히데요시의 보호를 받았고, 요도도노는 그의 측실이 되었다.[2]
1588년 요도도노는 임신했고, 아들이 없었던 히데요시는 매우 기뻐하며 1589년 3월에 요도성을 개축하여 요도도노에게 하사했다. 요도도노는 히데요시와의 사이에서 쓰루마쓰(요절)와 히데요리를 낳았다.[3] 히데요시의 정실인 네네는 아이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요도도노는 네네의 많은 특권을 물려받았다.
1594년 가족은 후시미성으로 이사했지만, 1598년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도요토미 가문은 큰 위기를 맞았다. 요도도노는 아들 히데요리와 함께 오사카성으로 거처를 옮겨 도요토미 가문의 재건을 도모하며,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서 정치에 개입하여 오사카 성의 실질적인 수장이 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은 중립을 지켰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면서 도요토미 가문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1603년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열자, 요도도노는 이에 저항하며 히데요리를 오사카 성에 머무르게 했다.
1614년 호코지 종명 사건을 계기로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오사카 겨울 전투와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은 패배했고, 1615년 요도도노는 아들 히데요리와 함께 오사카 성에서 자결하였다.[4]
2. 1. 유년기
1569년경 아버지 아자이 나가마사의 영지인 오미국 오다니 성에서 태어났다. 1573년 아버지 나가마사가 외숙부인 오다 노부나가에게 공격받아 성을 잃을 때, 어머니 오이치와 동생 하쓰, 에요와 함께 후지카케 나가카쓰에게 구출되어 목숨을 건졌다.[2] 이때 아버지 나가마사와 조부 히사마사는 자결하였고, 가문의 후계자인 동생 만푸쿠마루는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후 또 다른 외숙부인 오다 노부카네에게 거두어져 기요스성에서 유년기를 보냈다.1582년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암살당한 뒤, 같은 해 어머니 오이치가 오다 가문의 가신 시바타 가쓰이에와 재혼하면서 가쓰이에의 거성인 에치젠국 기타노쇼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3]
그러나 이듬해인 1583년 양부 가쓰이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싸움인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패하여 자결하였고, 오이치 또한 남편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히데요시의 보호로 살아남은 차차를 비롯한 세 자매는 이후 오다 나가마스에게 거두어져 아즈치성에 머물렀다. 이때 아자이 나가마사의 누나이자 친고모인 교고쿠 마리아와의 혈연 관계를 빌어 교고쿠 다쓰코의 후견을 받았다.
차차의 유모로는 오노 하루나가의 어머니인 대장경국, 우미즈도노의 차녀이자 외숙모인 쿄바 쿄쿠, 마에다 토시이에의 동생인 사와키 요시유키의 처인 대국이 있었다.
2. 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덴쇼 16년(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다. 히데요시가 어머니 오이치를 사모했기 때문에 세 자매 중 오이치를 가장 닮은 요도도노를 선택했다는 설도 있다.[2]이듬해인 덴쇼 17년(1589년) 아들 쓰루마쓰(도요토미 쓰루마쓰)를 출산하였다. 히데요시는 아들의 탄생에 기뻐하며 야마시로국 요도성(淀城)을 하사했고, 이때부터 요도도노는 '''요도노 가타'''(淀の方)로 불렸다. 쓰루마쓰는 덴쇼 19년(1591년) 사망하였으나, 1593년 차남 히데요리가 태어나 후계자 문제가 해결되었다.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 자신의 유모였던 오쿠라쿄노 쓰보네, 오네바노 쓰보네 등을 중용하여 도요토미 가문 내에서 실권을 쥐었다. 또한 고야산 지묘인(持明院)에 양친의 초상을 모시고 아버지인 아자이 나가마사를 비롯한 아자이 일족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요겐인(養源院)을 건립하였다.[3]
히데요시의 동생인 도요토미 히데나가는 1589년 3월 요도성을 개축하였고, 이후 히데요시는 이 성을 요도도노에게 하사하였다. 히데요시의 정실인 네네(고다이인)는 아이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요도도노는 네네의 많은 특권을 물려받았다. 요도도노는 히데요시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 쓰루마쓰는 1591년에 사망했고, 둘째 아들 히데요리는 1593년에 태어나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지정되었다. 히데요리를 낳은 후, 요도도노는 히데요리의 보호라는 중요한 직책을 오쿠라쿄노 쓰보네와 오네바노 쓰보네에게 맡겼다.[3]
1594년 가족은 후시미성으로 이사했지만, 1598년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도요토미 가문은 많은 영향력과 중요성을 잃었다. 요도도노는 아버지 아자이 나가마사와 어머니 오이치를 기리는 사찰인 요겐인(養源院)을 창건하였고, 고야산 등의 사찰 복원에도 기여하였다. 요도도노는 아들 히데요리와 함께 오사카성으로 거처를 옮겨 도요토미 가문의 재건을 도모하였다. 그녀는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서 정치에 개입하여 오사카 성의 실질적인 수장이 되었다.
2. 3. 도요토미 가문의 수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히데요시의 후계자가 되면서 요도도노는 히데요리의 어머니이자 실질적인 도요토미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히데요리는 가신들을 통솔할 능력이 부족했고, 측근 장수들과 행정 참모들 사이의 갈등이 심각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갈등을 이용하여 측근 장수들을 지원하며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다.[4]1600년, 이시다 미쓰나리가 오타니 요시쓰구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퍼졌다. 이에 요도도노는 마스다 나가모리, 나가쓰카 마사이에, 마에다 겐이 등 세 명의 봉행과 함께 이에야스에게 편지를 보내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교토로 서둘러 올 것을 요청했다.[5]
이후 모리 데루모토가 이시다파(서군) 총사령관으로 오사카성에 입성하고 세 명의 봉행도 이에 동참했지만, 요도도노는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경계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그녀는 이시다 측이 원했던 히데요리의 승인 문서 발부나 히데요리의 출진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시다파의 움직임을 인지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6]
이에야스는 요도도노 등이 보낸 편지를 증거로 다른 봉건 영주들에게 이시다와 오타니의 행동이 반란임을 확신시켰다. 세 명의 봉행은 나중에 이에야스를 비난하는 문서에 서명했지만, 요도도노의 이전 편지를 철회하는 문서가 없었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위해"라는 명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7]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동군)이 승리한 후, 이에야스는 오노 하루나가를 오사카성으로 보내 요도도노와 히데요리가 서군과 관련이 없다는 자신의 믿음을 전했다. 요도도노는 이에 감사를 표했다. 모리 데루모토가 오사카성에서 철수한 후, 이에야스는 성에 입성했다. 요도도노가 이에야스를 접대하고 술잔을 올리자, 그녀는 그 잔을 히데요리에게 전달하라고 고집했고, 이에야스는 공개적으로 히데요리의 대리 아버지임을 선언했다.[8]
요도도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2,000명이 넘는 도요토미 가신들이 전투에 참여했고 도쿠가와-도요토미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의 전리품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영토를 분배했고, 도요토미 가문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요도도노는 에도에 군사 정부를 건설하기 시작한 이에야스와 대립하여, 히데요리가 봉신의 자세를 보이고 수도 교토로 가라는 그의 요구를 거부했다.[9]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 장군으로 임명되자 요도도노는 적극적으로 도쿠가와 막부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히데요리는 여전히 오사카 성을 유지하고 이에야스의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센히메와 결혼했지만, 두 통치자가 공존할 여지는 없었다. 히데요리는 오사카 성을 확보하고 히데요시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그의 옛 가신들은 에도 막부를 지지했고, 히데요리의 입지는 매우 약해졌다.
1611년, 히데요리는 마침내 오사카를 떠나 니조 성에서 이에야스와 두 시간 동안 만났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단순히 "무능한" 소년이라는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그의 행동에 놀랐다. 이러한 믿음은 1599년 이에야스가 임명한 히데요리의 개인 보호자인 가타기리 가쓰모토에 의해 퍼져 나갔는데, 그는 상속인에 대한 어떠한 공격도 막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11]
1614년, 도요토미 씨는 오사카 성을 재건했다. 동시에 씨족의 수장은 교토의 호코쿠지 재건을 후원했다. 사찰 개보수에는 "국가가 평화롭고 번영하길"(国家安康, ''kokka ankō'') 및 "군신이 풍요롭고 즐겁기를"(君臣豊楽, ''kunshin hōraku'')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거대한 청동 종을 주조하는 작업이 포함되었다. 막부는 "''kokka ankō''"(国家安康)를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깨뜨리는 금기로 해석하고, "''kunshin hōraku''"(君臣豊楽)를 "도요토미(豊臣)의 세력이 다시 일어설 것이다"로 해석하여 막부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했다. 도요토미 씨가 오사카에서 막부의 적들과 랑인들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도쿠가와 씨와 도요토미 씨 사이의 긴장은 고조되었다. 이에야스는 1605년 쇼군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호코쿠지 사건 이후, 요도도노는 오쿠라쿄노쓰보네, 아에바 부인과 가타기리 가쓰모토를 스루가로 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게 했다. 이 만남에서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유도하는 음모를 꾸몄다. 한편으로 이에야스는 오쿠라쿄 부인에게 겸손하게 관대한 제안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에야스는 온건파를 대표하고 도요토미 가문을 구해달라고 이에야스에게 따로 요청했던 가타기리 가쓰모토에게는 가혹한 요구를 했다.
가타기리 가쓰모토가 중재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야스는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완벽한 구실을 찾았다. 그해 9월, 오사카에 많은 낭인들이 히데요리의 초청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이 에도에 전해지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가쓰모토는 적대 행위를 피하기 위해 요도도노를 에도로 인질로 보내는 것을 제안했지만, 요도도노는 단호히 거절했거나, 혹은 결국 수락했지만 히데요리가 허락하지 않았다. 가쓰모토가 도요토미 씨를 배반하려 한다고 의심한 요도도노는 결국 그를 오다 우라쿠사이와 반역 혐의를 받는 다른 여러 하인들과 함께 오사카성에서 추방했다. 추방된 그들은 도쿠가와 씨에 봉사하게 되었고, 막부와의 합의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것이 오사카의 겨울 전투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2. 4. 오사카 전투와 최후
게이초 5년(1600년) 부교(奉行) 이시다 미쓰나리가 다이로(大老)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키면서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였다. 이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은 표면적으로 관여하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를 유지하였으나 상당수의 직할령을 상실하였다. 이후 에도에 노골적으로 무가 정권(武家政権)을 수립하기 시작한 이에야스와 대립하였으나 게이초 20년(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완패하면서 아들 히데요리, 가신 오노 하루나가 등과 함께 자결하였다.[4]1598년 히데요시 사후, 히데요리가 히데요시의 후계자가 되고 요도도노는 그의 어머니이자 실질적인 수장이 되었다. 아직 어린 히데요리는 가신들을 통솔할 수 없었고, 측근 장수들과 행정 참모들 사이의 갈등은 심각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양측의 갈등을 부추기며 측근 장수들을 지원했다.[4]
1600년, 이시다 미쓰나리가 오타니 요시쓰구와 함께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퍼졌다. 이에 요도도노와 마스다 나가모리, 나가쓰카 다다시, 마에다 겐사쿠 등 세 명의 봉행은 이에야스에게 급히 편지를 보내 위기를 진압하기 위해 교토로 서둘러 오도록 요청했다.[5]
이후 모리 데루모토가 이시다파(서군) 총사령관으로 오사카 성에 입성하고 세 명의 봉행도 이 결정에 동참하자, 요도도노는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경계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그녀는 이시다 측이 바랐던 히데요리의 승인 문서 발부나 히데요리의 파병과 같은 행동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시다파의 움직임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6]
이에야스는 요도도노 등이 보낸 편지를 증거로 삼아 다른 봉건 영주들에게 이시다와 오타니의 행동이 반란임을 확신시켰다. 나중에 세 명의 봉행은 이에야스를 비난하는 "내부 협의 서약"에 서명했지만, 요도도노의 이전 편지를 철회하는 문서가 없었던 것도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위해"라는 명분을 유지하는 데 일조했다.[7]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동군)이 승리한 후, 이에야스는 오노 하루나가를 오사카 성으로 보내 요도도노와 히데요리가 서군과 관련이 없다는 자신의 믿음을 전했다. 요도도노는 이에 감사를 표했다. 모리 데루모토가 오사카 성에서 철수한 후, 이에야스는 성에 입성했다. 요도도노가 이에야스를 접대하고 술잔을 올리자, 그녀는 그 잔을 히데요리에게 전달하라고 고집했다. 이에야스는 공개적으로 히데요리의 대리 아버지임을 선언했다.[8]
요도도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2,000명이 넘는 도요토미 가신들이 전투에 참여했고 도쿠가와-도요토미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의 전리품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영토를 분배했고, 도요토미 가문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그녀는 에도에 군사 정부를 건설하기 시작한 이에야스와 대립하여, 히데요리가 봉신의 자세를 보이고 수도 교토로 가라는 그의 요구를 거부했다.[9]
1601년, 요도도노의 "우울증"은 심해졌고, 그녀는 가슴 통증, 식욕 부진, 두통을 앓았다. 겐사쿠 마쿠나오세(玄策マクナオセ)가 "겐사쿠도 산포야쿠로쿠(玄策堂算法薬録)"에 기록된 대로 그녀를 위해 약을 처방했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 장군으로 임명되자 요도도노는 적극적으로 도쿠가와 막부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히데요리는 여전히 오사카 성을 유지하고 이에야스의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인 센히메와 결혼했지만, 두 통치자가 공존할 여지는 없었다. 히데요리는 오사카 성을 확보하고 히데요시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그의 옛 가신들은 에도 막부를 지지했고, 히데요리의 입지는 매우 약해졌다.
1605년 5월 8일, 이에야스는 고다이인(네네)의 중재를 통해 히데요리에게 도쿠가와 씨에 대한 충성을 보이기 위해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요도도노는 도요토미 씨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 속에서 영토 감소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지만, 회합을 거절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화해와 조화를 모색하며 여섯 번째 아들인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오사카로 보냈다.[10]
1611년, 히데요리는 마침내 오사카를 떠나 니조 성에서 이에야스와 두 시간 동안 만났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단순히 "무능한" 소년이라는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그의 행동에 놀랐다. 이러한 믿음은 1599년 이에야스가 임명한 히데요리의 개인 보호자인 가타기리 가쓰모토에 의해 퍼져 나갔는데, 그는 상속인에 대한 어떠한 공격도 막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11]
1614년, 도요토미 씨는 오사카 성을 재건했다. 동시에 씨족의 수장은 교토의 호코쿠지 재건을 후원했다. 사찰 개보수에는 "국가가 평화롭고 번영하길"(国家安康 ''kokka ankō'') 및 "군신이 풍요롭고 즐겁기를"(君臣豊楽 ''kunshin hōraku'')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거대한 청동 종을 주조하는 작업이 포함되었다. 막부는 "''kokka ankō''"(国家安康)를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깨뜨리는 금기로 해석하고, "''kunshin hōraku''"(君臣豊楽)를 "도요토미(豊臣)의 세력이 다시 일어설 것이다"로 해석하여 막부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했다. 도요토미 씨가 오사카에서 막부의 적들과 낭인들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도쿠가와 씨와 도요토미 씨 사이의 긴장은 고조되었다. 이에야스는 1605년 쇼군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호코쿠지 사건 이후, 요도도노는 오쿠라쿄노쓰보네, 아에바 부인과 가타기리 가쓰모토를 스루가로 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게 했다. 이 만남에서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유도하는 음모를 꾸몄다. 한편으로 이에야스는 오쿠라쿄 부인에게 겸손하게 관대한 제안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에야스는 온건파를 대표하고 도요토미 가문을 구해달라고 이에야스에게 따로 요청했던 가타기리 가츠모토에게는 가혹한 요구를 했다.
가타기리 가쓰모토가 중재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야스는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완벽한 구실을 찾았다. 그해 9월, 오사카에 많은 낭인(浪人)들이 히데요리의 초청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이 에도에 전해지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가쓰모토는 적대 행위를 피하기 위해 요도도노를 에도로 인질로 보내는 것을 제안했지만, 요도도노는 단호히 거절했거나, 혹은 결국 수락했지만 히데요리가 허락하지 않았다. 가쓰모토가 도요토미 씨를 배반하려 한다고 의심한 요도도노는 결국 그를 오다 우라쿠사이와 반역 혐의를 받는 다른 여러 하인들과 함께 오사카 성에서 추방했다. 추방된 그들은 도쿠가와 씨에 봉사하게 되었고, 막부와의 합의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것이 오사카의 겨울 전투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히데요시 사후 히데요리로부터 권력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제 히데요리를 일본 통일의 걸림돌로 여겼다. 1614년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을 포위 공격했다. 요도도노는 아들과 함께 성을 방어하며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도쿠가와군이 그녀의 방을 폭격하여 시녀 두 명을 죽이자, 요도도노는 무장한 여인들과 함께 저택에서 나왔다. 이후 그녀는 무사들에게 강화 협상을 제안했다. 그녀는 아챠부인을 만났는데, 혼다 마사즈미와 오하쓰(요도도노의 여동생)가 함께 있었다. 양측은 강화 조약에 합의했다.
그러나 1615년 이에야스는 휴전을 깨고 다시 오사카 성을 공격했다. 결국 요도도노와 그녀의 아들 히데요리는 오사카 성의 화염 속에서 자결하여 도요토미 가문의 역사는 끝을 맺었다.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상세히 기록한 목격자 진술이나 기록은 없으며,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도요토미 가문 몰락 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수많은 전설과 추측이 생겨났다.[12] 일부 전설에서는 요도도노와 히데요리가 탈출하여 살아남았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탈출 경로에 대한 추측은 다양하며, 일부는 그녀가 사쓰마 국의 시마즈 가문에게 피신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그녀가 우에노 국 우쓰노미야까지 도망쳤을 것이라고 추측한다.[13]
오대로·오봉행의 붕괴로 단독의 실력자가 된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상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창입지를 여러 장수들에게 분배하여 도요토미 가문은 지배지를 줄이게 되었다.
1601년(게이초 6년) 3월 23일,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을 나와 후시미로 이동하고, 여러 다이묘들에게도 오사카에서 후시미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정치의 중심지는 후시미로 옮겨지고,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오사카에 남게 되었다. 6월에는 요도도노가 “기울”(기분이 가라앉음)로 인해, 식욕부진, 현기증, 두통에 시달려 곡직세 겐삭으로부터 약을 처방받았다(『겐삭도삼배제록』).[17]
1603년(게이초 8년), 히데요리는 내대신에 승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임 내대신이었던 이에야스는 우대신에 승임할 뿐만 아니라, 정이대장군에 임관함으로써 에도 막부라는 새로운 정체를 수립하였다. 5월 1일 요도도노는 다시 곡직세 겐삭의 진찰을 받고, 기울, 가슴 통증, 섭식 장애, 두통으로 인해 약을 처방받았다. 7월 28일, 요도도노의 여동생 에와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센히메가 히데요리의 아내로서 오사카 성에 들어왔다.
1604년(게이초 9년) 3월, 히데요리의 가로 중 한 명이었던 코이데 히데마사가 사망하였다. 그 전후부터 도요토미 가문의 정치, 특히 이에야스와의 외교는 또 다른 가로인 가타기리 카츠모토에 의해 일임되었고, 요도도노는 자신에게는 믿을 만한 부모나 상의할 사람이 없으므로, 어린 히데요리와 함께 카츠모토를 의지하고 있다고 편지에 적었다. 6월 3일에는 요도도노가 양자로서 양육하고 있던 칸시를 구죠 유키이에에게 시집보냈다.
1605년(게이초 10년) 4월, 이에야스가 우대신을 사임하고 히데요리가 그 뒤를 잇고, 히데타다가 히데요리의 뒤를 이어 내대신에 취임함과 동시에 쇼군의 지위에 올랐다. 어느 정도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당대기』에는 이에야스가 히데타다의 쇼군 임관 인사를 위해 히데요리의 상락을 요청했고, 그에 대해 요도도노가 만약 강요한다면 히데요리를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겠다고 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결과적으로 히데요리의 상락은 실현되지 않았고, 이에야스는 칠남인 마쓰다이라 타다테루를 오사카에 보냈고, 타다테루는 히데요리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듬해인 1615년(게이초 20년)의 재전(대판 여름의 진)에서 오사카 성은 함락되었다. 5월 8일, 야마자토 곡륜의 엿기름 창고에서 히데요리와 함께 자결하였다. 오노 하루나가는 요도도노와 히데요리를 구명하려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요도도노와 함께 자결한 시녀에는 대장경국, 향정국, 우경대부국, 궁내경국, 아고고국이 있었고, 창고를 빠져나와 살아남은 사람으로는 센히메와 그녀의 시녀인 형부경국, 마츠사카국(『오초보 이야기』에서 성 함락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위국이 있다.
가명초자의 『오사카 이야기』는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요도도노의 최후의 말과 히데요리가 자결한 칼을 요도도노가 줍고 오오노 하루나가가 개석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묘소는 교토 시히가시야마 구의 양원원, 오사카 시기타 구의 태융사이다. 법명은 '''대우원영엄대선정니''', '''대우원화안묘향''', '''대광원전영암'''으로 전해진다.
요도도노의 최후를 목격한 자의 증언이나 기록은 존재하지 않고, 시신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히데요리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탈출·생존설 등의 전설이 생겨나게 되었다. 낙향한 곳으로는 시마즈 씨를 의지하여 사쓰마 국으로 낙향했다는 설이나 우에노 국구마야바시까지 도망쳐 왔다는 설이 있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아자이 나가마사(1545-1573) | |
어머니 | 오이치(1547-1583) | |
양어머니 | 네네(?-1624) | |
남편 |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 | 히데요시는 요도도노의 양아버지이기도 하다. |
아들 | 도요토미 츠루마츠(1589-1591) | |
아들 | 도요토미 히데요리(1593-1615) | |
양딸 | 도요토미 사다코(1592-1658) | 오에요의 딸, 후에 구죠 유키이에와 결혼 |
요도도노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정실이자 며느리였던 센히메의 조카이기도 하다. 센히메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이다. 요도도노의 여동생 스겐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 도요토미 히데카쓰(豊臣秀勝)와 결혼했으나 임진왜란 중 남편을 잃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남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재혼하여 센히메를 낳았다.
요도도노의 가신이었던 오오노 하루나가는 요도도노와 젖형제 사이로, 두 사람이 내밀한 관계라는 소문이 당대부터 있었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히데요리가 히데요시의 친아들이 아니라 오오노 하루나가의 자식이라는 설도 있었다.
요도도노는 친정의 혈연을 중시하여, 가문이 멸망한 후 방랑하던 사촌 오다 노부카쓰를 오사카 성으로 불러들여 지내도록 했다. 또한 동생 오에요가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재혼하자, 오에요와 오에요의 전 남편인 하시바 히데카쓰(豊臣秀勝) 사이에서 태어난 조카 사다코(完子)를 거두어 친딸처럼 키웠다. 사다코는 이후 구게(公家)의 일원인 구죠 유키이에의 정실이 되었다.
요도도노는 여동생인 조쿄인, 스겐인과 어린 시절부터 매우 사이 좋은 자매 관계를 유지하였다. 어머니 오이치가 사망한 후, 두 동생에게 "너희들은 오미의 명문 아자이 가문의 딸들이다. 꼴사납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라고 훈계하였다고 한다.
4. 평가 및 기타
-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정실이자 요도도노의 며느리였던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센히메는 요도도노의 조카이기도 하다. 요도도노의 여동생 스겐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 도요토미 히데카쓰(豊臣秀勝)와 결혼했으나 임진왜란 중 남편을 잃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남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재혼하여 얻은 딸이 센히메이다.
- 요도도노 모자와 최후를 함께 한 것으로 알려진 가신 오오노 하루나가는 요도도노와 젖형제 사이로, 이미 당대부터 두 사람이 내밀한 관계를 가진 사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로 둘의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히데요리가 히데요시의 친자식이 아닌 오오노 하루나가의 자식이라는 설도 있었다.
- 친정의 혈연을 중시하여 가문의 멸문 이후 방랑하던 사촌 오다 노부카쓰(織田信雄)를 오사카 성으로 불러들여 지내도록 조치하였다. 또한 동생 에요가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재혼하자 에요와 에요의 전 남편인 하시바 히데카쓰(豊臣秀勝)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조카 사다코(完子)를 거두어 친딸처럼 키우기도 하였다. 이후 사다코는 구게(公家)의 일원인 구조 유키이에(九条幸家)의 정실이 되었다.
- 오사카 전투 당시 히데요리를 성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요도도노 본인만이 전장에 나타나 군사들을 독려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당대에 여성이 전장에 나타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으나, 총대장이 한 번도 전선에 나와 보지 않은 데 반해 그 모친만이 빈번하게 나타난 것은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사카 겨울, 여름 양 전투 내내 요도도노와의 의견 대립으로 도요토미 진영에서 출분한 사람들은 오다 일족 몇몇과 가타기리 가쓰모토(片桐且元) 등 소수로, 요도도노는 패색이 짙어지는 동안에도 마지막까지 오사카 성과 도요토미 군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요도도노의 사후, 기일마다 요도도노의 묘소에 시녀들이 모여 법요를 거행하였던 것이 그 시녀들의 자손에게도 죽 이어져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 여동생인 조쿄인, 스겐인과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사이 좋은 자매 관계를 유지하였다. 어머니 오이치의 사후, 두 동생에게 "너희들은 오미의 명문 아자이 가문의 딸들이다. 꼴사납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라고 훈계하였다고 한다.
- 요도도노의 어머니 오이치는 센고쿠 시대 최고의 미녀로 유명하였는데, 장녀인 요도도노 또한 오이치를 닮아 미인이었다고 한다. 특히 오이치와 같이 키가 커서 170cm 가량의 장신이었다고 전해지며, 아들 히데요리 또한 아버지 히데요시와 달리 요도도노를 닮아 체격이 당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반면 여동생 에요는 언니와 달리 몸집이 작았다.

- 제임스 클래블의 소설 『쇼군』에는 요도도노를 바탕으로 한 허구의 인물이 등장한다. '오치바 부인'으로 각색된 주인공은 도라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이 태합(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자가 아니라고 의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를 싫어한다. 그러나 그녀는 태합의 미망인 요도코(네네)를 존경하고 신뢰하며, 요도코는 일본을 통일하기 위해 그녀와 도라나가의 결혼을 촉구하고, 상속자인 야에몬(도요토미 히데요리)이 성년이 되면 안전하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한다. 제임스 클래블의 후속 소설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도라나가는 결국 오치바와 야에몬이 있는 성을 포위 공격하여 그들이 자살하게 만든다.
- 2011년 대하드라마 『고: 히메타치노 센고쿠』에서 차차 역은 일본 여배우 미야자와 리에가 연기했다.[14]
- 보드 게임에서는 에밀리아노 스치아라가 제작한 카드 게임 사무라이 소드의 확장판 「라이징 선」의 등장인물 중 하나로 등장한다.[15]
- 묘소는 교토시히가시야마구의 양원원, 오사카시기타구의 태융사이다. 법명은 '''대우원영엄대선정니''', '''대우원화안묘향''', '''대광원전영암'''으로 전해진다.
- 요도도노의 최후를 목격한 자의 증언이나 기록은 존재하지 않고, 시신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히데요리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탈출·생존설 등의 전설이 생겨나게 되었다. 낙향한 곳으로는 시마즈 씨를 의지하여 사쓰마국으로 낙향했다는 설이나 우에노국구마야바시까지 도망쳐 왔다는 설이 있다.
5. 요도도노가 등장한 작품
요도도노는 여러 작품에서 다양하게 묘사되었다.
제임스 클래블의 소설 쇼군에서는 요도도노를 바탕으로 한 허구의 인물인 '오치바 부인'이 등장한다. 오치바 부인은 도라나가를 싫어하지만, 요도코의 뜻에 따라 그와 정략결혼을 하고, 아들 야에몬을 위해 권력을 지키려 노력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에밀리아노 스치아라가 제작한 카드 게임 사무라이 소드의 확장판 「라이징 선」에서도 요도도노가 등장한다.[15]
5. 1. 드라마
- 임진왜란 (MBC, 1985년~1986년, 배우: 이혜숙)
- 불멸의 이순신 (KBS, 2004년~2005년, 배우: 김혜진)
- 징비록 (KBS, 2015년, 배우: 손가영)
- 임진왜란 1592 (KBS, 2016년, 배우: 한소연)
- 도쿠가와 이에야스 (NHK, 1983년, 배우: 나츠메 마사코)
- 독안룡 마사무네 (NHK, 1987년, 배우: 히구치 카나코)
- 히데요시 (NHK, 1996년, 배우: 마츠 다카코)
- 도시이에와 마쓰~가가 백만석 이야기~ (NHK, 2002년, 배우: 세토 아사카)
- 공명의 갈림길 (NHK, 2006년, 배우: 나가사쿠 히로미)
- 천지인 (NHK, 2009년, 배우: 후카다 쿄코)
- 고우~공주들의 전국~ (NHK, 2011년, 배우: 미야자와 리에)[14]
- 군사 칸베에 (NHK, 2014년, 배우: 니카이도 후미)
- 사나다마루 (NHK, 2016년, 배우: 다케우치 유코)
- 어떡할래 이에야스 (NHK, 2023년, 배우: 키타가와 케이코)
제임스 클래블의 소설 쇼군에는 요도도노를 바탕으로 한 허구의 인물인 '오치바 부인'이 등장한다. 오치바 부인은 도라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이 태합(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자가 아니라고 의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를 싫어한다. 그러나 그녀는 태합의 미망인 요도코(네네)를 존경하고 신뢰하며, 요도코는 일본을 통일하기 위해 그녀와 도라나가의 결혼을 촉구하고, 상속자인 야에몬(도요토미 히데요리)이 성년이 되면 안전하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한다. 제임스 클래블의 후속 소설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도라나가는 결국 오치바와 야에몬이 있는 성을 포위 공격하여 그들이 자살하게 만든다.
에밀리아노 스치아라가 제작한 카드 게임 사무라이 소드의 확장판 「라이징 선」에서 요도도노는 등장인물 중 하나로 등장한다.[15]
5. 2. 영화
제임스 클래블의 소설 『쇼군』에는 요도도노를 바탕으로 한 허구의 인물이 등장한다. 2011년 대하드라마 『고: 히메타치노 센고쿠』에서 차차 역은 일본 여배우 미야자와 리에가 연기했다.[14] 보드 게임 사무라이 소드의 확장판 「라이징 선」에서는 에밀리아노 스치아라가 제작한 카드 게임의 등장인물 중 하나로 등장한다.[15]
6. 호칭 논란
요도도노의 이름은 '''차차'''(茶々, 또는 오차お茶) 또는 '''기쿠코'''(菊子)였다. 생전에는 차차라는 이름을 썼으며, 기쿠코는 조정에서 내려준 공식적인 이름으로 문서에만 사용되었고, 요도도노 본인이 직접 사용한 이름은 아니다.[29] 요도도노는 생전에 머물렀던 거처의 명칭에 따라 요도노 가타(淀の方), 요도노 우에사마(淀之上様), 요도노 뇨보(淀の女房) 혹은 니노 마루도노(二の丸殿), 니시노 마루도노(西の丸殿) 등으로 불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다이코인(大広院,大康院)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29]
현대에 통용되는 '''요도 도노'''(淀殿)나 '''요도 기미'''(淀君)라는 호칭은 요도도노 생전에는 쓰이지 않았고, 에도 시대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29]
'''요도기미'''(淀君)라는 호칭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메이지 시대 쓰보우치 쇼요(坪内逍遥)의 희곡 『기리히토하(桐一葉)』 상연 이후이다. 오와다 테쓰오(小和田哲男), 다나카 타카코(田中貴子) 등의 주장에 따르면, '요도(淀)'라는 이름에 대한 경칭으로 굳이 '기미(君)'를 쓴 것은 당시 유녀, 매춘부 등을 표현할 때 「유군(遊君)」, 「쓰지 기미(辻君)」와 같이 '기미(君)'라는 글자를 자주 사용한 것에서 착안하여 요도 도노에게 악녀, 음부의 이미지를 씌우기 위한 작가의 의도적인 표현이었다는 설도 있다.[29] 그러나 '기미(君)' 자체는 경칭의 뜻 외에 특별히 안 좋은 의미를 가진 단어는 아니며, 에도 막부 말기에 편찬된 「도쿠가와 바쿠후 가보(徳川幕府家譜)」에 따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계실인 아사히 히메(朝日姫),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계실 스겐인(崇源院)을 부를 때에도 각각 「아사히 기미(朝日君)」, 「오에요 기미(於江与君)」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으므로 '기미(君)'가 반드시 요도 도노를 폄하할 의도로 사용된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29]
한편 1960년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의 소설 『요도 도노의 일기(淀どの日記)』 이후 요도 도노의 호칭으로는 '''요도 도노'''(淀殿)가 일반화되었으며, '요도 기미'는 1987년 NHK 대하드라마 『독안룡 마사무네(独眼竜政宗)』 이후 방송계에서도 일절 쓰이지 않는 표현이 되었다가 2006년 공명의 갈림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다시 쓰이게 되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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