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야마성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도야마성은 일본 도야마현에 위치한 평지성으로, 무로마치 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센고쿠 시대에는 삿사 나리마사가 대규모 개축을 통해 수성에 유리하게 만들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파괴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마에다 가문이 도야마번을 설치하고 성을 수리하여 13대 동안 거성으로 사용했다. 1870년 폐성되어 해체되었으나,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도야마시 향토박물관이 모의 천수각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키 렌타로 작곡의 '황성의 달'의 배경이 되는 등 관광 명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도야마성 | |
---|---|
지도 | |
기본 정보 | |
![]() | |
본래 이름 | 도야마성 (富山城) |
다른 이름 | 아즈미 성 (安住城) 우키 성 (浮城) |
유형 | 평지 성 |
위치 | 도야마현 도야마시 |
좌표 | 36°41′35.83″N 137°12′39.18″E |
역사 | |
축성 | 1543년 |
축성자 | 진보 나가모토 |
주요 인물 | 진보 나가즈미 사사 나리마사 마에다 도시나가 마에다 도시쓰구 |
폐성 | 1871년 |
현재 상태 | 재건 |
과거 소유자 | 진보 씨 이이다 씨, 고지마 씨 등 (우에스기 씨) 사사 씨 쓰다 씨 마에다 씨 |
구조 | |
천수 | 불명. 1954년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복합 연결식 망루형 3중 4층 천수 및 2중 2층 소천수 재건 |
잔존 요소 | 석벽, 해자 |
문화재 정보 | |
문화재 지정 | 미지정. 도야마 시 향토 박물관은 등록 유형 문화재 |
일반 정보 | |
개방 여부 | 개방 |
2. 역사
1582년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삿사 나리마사가 도야마 성주로 부임하여 대규모 개축을 하였다. 진즈강 물줄기를 성으로 끌어들여 수성에 유리하게 하였고, 이로 인해 성이 물에 떠 있는 듯하여 《우키조》(浮城)라는 별명이 붙었다. 당시 진즈강은 도야마 부근에서 동쪽으로 크게 굽이쳤고, 그 남쪽 강변에 도야마성이 있었다. 진즈강 정비 후 옛 수로는 마쓰카와강이라 불리고 있으며, 현재 마쓰카와강은 도야마성 북쪽에 있다.
혼노지의 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삿사 나리마사는 대립하였고, 1585년 음력 8월 히데요시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도야마성을 포위 공격하여 나리마사를 굴복시켰다. 이때 도야마성은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후 히데요시는 엣추국을 마에다 가문에 주었고, 마에다 도시나가는 성을 대폭 수리하여 은거처로 삼았다. 그러나 1609년 건물의 주요부가 모두 소실되어 다카오카성을 축성하고 거처를 옮겼다.
1639년 가가번 2대 번주 마에다 도시쓰네는 차남 도시쓰구에게 10만 석을 주어 도야마번을 성립시켰다. 도시쓰구는 1661년부터 폐성되었던 도야마성을 수복하여 도야마 마에다 가문 13대의 거성이 되었다. 수복 후 도야마성에는 천수각이 없었지만, 혼마루에 3채의 2층 망루를 건립하고 주요 성문은 와타리 망루 형식으로 지었다. 에도 시대 고지도에 천수각이 없어 건립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10만 석급 다이묘에 걸맞은 대규모 성이었다.
1870년 (메이지 3년) 폐성되어 성은 해체되고 성 주위 해자는 대부분 매워졌다. 1954년 (쇼와 29년) 태평양 전쟁 후 처음으로 모의 천수가 건립되었다. 모의 천수는 시바타성과 같은 3개 샤치로 꾸며진 3층 4계 건물로, 내부는 도야마 시 향토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모의 천수는 2004년 (헤이세 16년) 국가 등록유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2007년 (헤이세 19년) 10대 번주 마에다 도시야스의 은거처였던 지토세 어전의 문이 민가에서 성터 공원 안으로 다시 옮겨졌다.
2. 1. 중세
1543년 니카와군[78]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엣추 슈고다이 진보 나카모토가 그의 가신 미즈코시 가쓰시게에게 명하여 축성했다고 하지만, 근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무로마치 시대 전기의 유구가 발견되어 실제로는 더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도야마 지역은 엣추 국의 거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히다국과 호쿠리쿠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엣추 마쓰쿠라성의 시나 가문, 에치고국의 우에스기 가문, 가가국의 일향종 등 여러 세력들이 쟁탈전을 벌여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1600년 이전에 작성된 《도야마노키》(富山之記)에서는 진보 가문 시기 도야마성과 성하 마을의 발전 모습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무로마치 시대의 엣추 슈고는 산칸료의 하타케야마 씨였으나 엣추에는 부임하지 않고, 동부를 시이나 씨, 서부를 진보 씨에게 슈고다이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다.
2. 2. 센고쿠 시대 (전국 시대)
1543년(덴분 12년)경 니카와군[78]으로 진출하려던 엣추 슈고다이 진보 나가모토가 가신 미즈코시 가쓰시게에게 명하여 도야마성을 축성했다고 전해진다.[6] 그러나 최근 발굴 조사를 통해 무로마치 시대 전기의 유구가 발견되어, 실제 축성 시기는 더 오래전으로 추정된다.게이초 연간 이전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도야마의 기록』에는 진보 씨 시대의 도야마성과 성하 마을의 발전 모습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중세 도야마성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진보 나가모리는 1560년(에이로쿠 3년) 시이나 씨를 지원하던 우에스기 겐신의 공격으로 도야마성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10] 마스야마성으로 피신하여 저항했지만, 1562년(에이로쿠 5년) 우에스기 씨에게 항복했다.
1568년(에이로쿠 11년), 진보 나가모리의 아들 진보 나가스미는 우에스기 씨와 결별하고 엣추에서 쫓겨났다.[11] 1569년(에이로쿠 12년), 시이나 야스타네·엣추 잇코잇키 연합군이 우에스기 씨 주력이 철수한 후 도야마성을 공격했다.
1578년(덴쇼 6년), 우에스기 겐신의 급사를 계기로 진보 나가즈미는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아 쓰키오카노 전투에서 우에스기 씨 세력에 승리하고 다이쇼 성과 도야마성에 다시 입성했다.
1582년(덴쇼 10년) 3월, 진보 나가스미는 우에스기 씨에 가담한 고지마 모토치카 등의 기습으로 도야마성에서 실각하고[12], 삿사 나리마사가 그 뒤를 이어 도야마 성주가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삿사 나리마사를 엣추에 봉한 시기는 덴쇼 9년이라는 설도 있다. 엣추 잇코 잇키와 오다 씨가 도야마성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던 우에스기 씨에서는 덴쇼 연간의 한 시기에 도야마성을 "안조"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부정적이다.[13][14]
2. 3.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82년(덴쇼 10년) 3월, 진보 나가스미는 우에스기 씨에 붙은 고지마 모토치카, 가라토 친히로 등에게 '''도야마성'''을 기습받아 성 안에 유폐되어 실각하고[12], 그 자리를 이어 도야마 성주가 된 것이 삿사 나리마사이다.오다 노부나가가 삿사 나리마사를 엣추에 봉한 시기에 대해서는, 전년 2월의 우에스기 씨에 의한 고이데 성 포위 공격에 대한 구원 공로를 치하하여 덴쇼 9년에 이미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다.
삿사 나리마사는 도야마성을 거점으로 하여 대규모로 개수했다. 혼노지의 변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와 적대하게 된 나리마사는 1585년(덴쇼 13년) 8월, 히데요시가 직접 이끄는 7만 대군에게 포위되어 항복했다 (도야마 전투). 나리마사 항복 후 히데요시는 윤 8월 1일에 직접 도야마성에 들어가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회담을 신청했지만, 가게카쓰가 응하지 않아, 같은 해 5일에 도야마성을 파각하고 엣추를 철수했다.[15] 같은 해, 은상으로 엣추 3군을 얻은 마에다가(前田家)는 마에다 도시나가를 모리야마성에 입성시켰다.
1595년(분로쿠 4년)에는 도시나가에게 엣추의 남은 신카와군도 가증되었다.[16] 그 후, 마에다 도시이에로부터 가독과 가가의 영지를 물려받은 도시나가는 오야마성(가나자와성)에 입성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붙어 가가 번의 태수가 된 마에다 도시나가는 도야마성을 재건, 대개수를 하여 가나자와성에서 이주하여 은거성으로 삼았다. 은거성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광대한 도야마성의 공사는 게이초 10년 말까지 걸린 것으로 추측된다.[17] 1609년(게이초 14년) 3월 18일에 건물의 주요 부분을 모두 소실했기 때문에[18], 다카오카성을 축조하여 이주하고, 도야마성에는 가신 쓰다 요시타다가 성대로 들어갔다.
2. 4. 에도 시대
1639년(간에이 16년) 6월 20일, 가가번 3대 번주 마에다 도시쓰네는 차남 도시쓰구에게 10만 석[18]을 주어 분가시키면서 도야마번이 성립되었다. 이듬해인 1640년 (간에이 17년), 도시쓰구는 당시 가가번 영내에 있던 도야마성을 임시 거처로 하여 에추 지방에 들어갔다.당초 거성으로 네이군 햐쿠즈카에 새로운 성을 축성할 계획이었으나, 번의 재정 문제로 1659년 (만지 2년)에 가가번과의 영지 교환을 통해 도야마성 주변의 토지를 자령으로 삼고 도야마성을 거성으로 삼았다.
1661년 (만지 4년), 막부의 허가를 얻어 도야마성을 본격적으로 수리하고, 조카마치(성하 마을)를 정비하였다. 이후 도야마 마에다가 13대에 걸쳐 거성으로 삼아 메이지 유신을 맞이할 때까지의 기초가 되었다. 수복 후의 도야마성에는 천수각은 없었지만, 혼마루에 3채의 2층 망루를 건립하였고, 주요 성문은 와타리 망루 형식으로 지어졌다. 에도 시대의 고지도에 천수각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천수각은 건립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되지만, 10만 석급의 다이묘에 걸맞은 대규모의 성이었다.
1858년 4월 9일 (안세이 5년 2월 26일), 히에쓰 지진이 발생하여 도야마성도 피해를 입었다. 혼마루와 니노마루, 산노마루가 손상되었고, 이시가키가 무너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19]
2. 5. 메이지 시대 이후
1870년(메이지 3년) 폐성되어 성은 해체되었고, 성 주위의 해자도 대부분 매워졌다.[20] 1871년 폐번치현에 의해 폐성되었고, 이듬해인 1872년 8월에 신카와현에서 옛 성내에 있는 건물과 입목 등의 불하 통지가 나왔기 때문에[21] 건축물은 불하되었다. 혼마루 어전은 현청사(1899년 8월 12일 소실[22])로, 니노마루 2층 망루 어문은 초등학교(1883년 해체)로 현지에서 그대로 이용되었다. 다른 대부분은 지토세 어전을 포함하여 그때 해체되었다(지토세 어전의 부지는 도야마성에 흩어져 있던 유곽이 이전되어 현재의 사쿠라기정의 기초가 되었다.[23]). 성 주변을 돌던 수로도 혼마루와 서노마루의 남쪽 부분을 제외하고 1962년까지 순차적으로 매립되었다.[24]1954년(쇼와 29년) 태평양 전쟁 후 처음으로 모의 천수가 건립되었다. 모의 천수는 시바타성과 같은 3개의 샤치로 꾸며져 있고, 3층 4계 건물로 지어졌다. 모의 천수 내부는 도야마 시 향토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모의 천수는 2004년(헤이세이 16년) 국가 등록유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2007년(헤이세이 19년) 10대 번주 마에다 도시야스의 은거처로 사용되었던 지토세 어전의 문이 민가로부터 성터 공원 안에 재이축되었다.
2017년에 속 일본 100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3]
2024년(레이와 6년) 1월 1일에 발생한 노토반도 지진의 영향으로, 성터 공원 내 서쪽 해자에 면한 석축 일부가 엇갈리는 등의 피해가 발생했다.[57]
3. 구조
엣추국 마에다씨의 거성이었던 도야마성은 진즈강(현재의 마쓰카와)의 흐름을 방어에 이용하여 물에 뜬 것처럼 보여 "부성"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난공불락으로 불렸다.[3] 당시 진즈강은 도야마성 부근에서 동쪽으로 크게 굽이쳐 흘렀으며, 그 남쪽 강가에 도야마성이 축성되었다. 현재는 혼마루와 니시노마루 일부가 남아 도야마성터 공원이 되었다.
사사 나리마사는 도야마성을 거점으로 대규모 개수를 했다. 혼노지의 변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와 적대하게 된 나리마사는 1585년 8월, 히데요시가 이끄는 7만 대군에 포위되어 항복했다(도야마 전투).[15] 이후 도시나가가 모리야마성에 입성했다. 1595년에는 도시나가에게 엣추의 남은 신카와군도 추가되어, 아오야마 요시쓰구가 우에스기가의 엣추 중(도이 씨, 가키자키 씨, 후나미 씨 등)으로부터 군내의 여러 성을 접수했다.[16] 그 후, 도시이에로부터 가독과 가가 영지를 물려받은 도시나가는 오야마성(가나자와성)에 입성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가가번의 태수가 된 도시나가는 도야마성을 재건하고 대규모 개수를 하여 가나자와성에서 이주하여 은거성으로 삼았다. 1609년 3월 18일 건물의 주요 부분이 모두 소실되어,[18] 다카오카성을 축조하여 이주하고, 도야마성에는 가신 쓰다 요시타다가 성주 대리로 들어갔다.
도야마성은 천연 요새인 진통강을 북쪽 방어선으로 삼은 사다리꼴 평지성이었으며, 사방이 해자와 하천으로 2중으로 둘러싸인 10만 석급 다이묘로서는 대규모 구조였다(에도 시대 이후). 주라쿠 제를 본보기로 한 마에다 토시나가의 최고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58]
3. 1. 주요 시설
도야마성은 속 일본 100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3] 진통강을 북쪽 방어선으로 삼은 사다리꼴 평지성이었으며, 사방이 해자와 하천으로 2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10만 석급 다이묘로서는 대규모였으며(에도시대 이후), 주라쿠 제를 본보기로 한 마에다 토시나가의 최고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58]'''부성'''이라는 별명은 진통강의 강면에 떠 있는 듯한 모습에서 유래했다. 성의 배치는 거의 방형의 혼마루 남쪽에 니노마루, 동서에 데마루를 두고, 혼마루를 이 3개의 구루마로 둘러쌌다. 다시 그 바깥을 산노마루로 오목하게 둘러싸는 형태였다. 단, 혼마루의 가라메테를 지키는 히가시데마루는 산노마루에 포함되지 않고 독립되어 있었다. 진통강 둑을 따라 성 밖으로 직접 통하는 등, 반격의 기점이 되는 대형 우마다시 성격을 가졌지만 방어에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그 동쪽에 산노마루 동북단에 접하는 형태로 소구루마가 설치되었고, 막말에 센토세 어전(후술)이 세워졌다.
당초 천수대를 석축으로 쌓은 천수, 야구라 3기, 야구라문 3문을 갖출 예정으로 막부의 허가를 받았지만, 이후 에도시대 고지도에는 천수가 없고, 발굴 조사에서도 혼마루 남동쪽 모퉁이에 천수 토대 확장 공사는 확인되지만 석축 공사 흔적은 없어 천수는 세워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기의 야구라에 대해서는 사료가 없어, 몇 기가 세워졌고 어떤 것이었는지 등은 전혀 알 수 없다. 야구라문은 예정된 3문(혼마루 오테·혼마루 가라메테·니노마루) 중 니노마루 2층 야구라 어문만 실제로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현존하는 2층 야구라 어문의 사진을 보면, 문에 접속하여 종가의 가나자와성처럼 당파풍을 설치한 해삼벽 성벽이 둘러져 있어 위엄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49년(가에이 2년) 10대 번주 토시야스의 은거소로 히가시데마루 바깥쪽(동쪽)에 센토세 어전이 세워졌다. "어전"이지만 주위에 해자를 설치한 독립 구루마였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동서 약 680m, 남북 약 610m 규모였지만, 현재 성터 공원으로 남아 있는 것은 혼마루와 니시노마루(사이의 해자는 메워짐), 그것들의 남쪽 해자와 니노마루의 일부뿐(동서 약 295m, 남북 약 240m)으로, 면적은 약 6분의 1이다. 원래 도야마성은 주요 문 주변만 석축이고 대부분 토루였지만, 쇼와·헤이세이 시대에 모의 천수 동쪽에 석축이 새로 만들어져 옛 모습과는 상당히 달라졌다.
=== 센토세 어전(千歳御殿)과 센토세 정원(千歳の庭園) ===
1849년(가에이 2년) 도야마 번 10대 번주 마에다 토시야스(前田利保)가 건축한 대명 저택과 정원이다.[59] 도야마성 동쪽 출마루 동쪽(현 사쿠라기정)에 있었다. 원래 이 지역에는 1831년(덴포 2년) 대화재로 소실된 마에다 토시야스의 거처인 '나카노고야시키(中之御屋敷)'가 있었고, 1848년(가에이 원년)부터 재건을 시작하여 이주하면서 센토세 어전으로 이름을 바꿨다.[60]
센토세 어전은 사방이 해자로 둘러싸인 남북으로 긴 복잡한 2층 건물로, 도야마성 안에서 가장 호화롭고 다른 성에서는 볼 수 없는 다이묘 어전이었다. 남서쪽 모퉁이에는 현재 도야마성터 공원 동쪽으로 이전된 정문인 센토세 문(千歳御門)이 있었다. 건물 내부에는 식대 현관, 어광간, 어서원, 표어간, 어휴게소, 안면소, 노 무대, 노 무대 정면에는 실내 전체에 금을 사용한 어람소의 간(순금의 간) 등이 있었다.[61]
북쪽, 동쪽, 남쪽에는 센토세 정원이 있었다. 북쪽 해자 위에는 츠리덴, 그 북쪽에는 다실 '고토샤(오동나무의 어다실)', 어료소, 동쪽은 해자 동쪽에 2열로 늘어선 벚나무 가로수, 약초원, 어우리이나리 신사, 소라산(축산), 샘물(연못), 남쪽에는 록수 덴만구와 매화원 등이 있었다. 어우리이나리 신사 제례에는 문호를 열어 많은 주민들로 붐볐다.[61][62]
그러나 건축 6년 후인 1855년 (안세이 2년) 2월 대화재로 센토세 문 외에는 거의 소실되었고, 잠시 후 재건되었지만 간소했고 노 무대도 만들어지지 않았다.[60]
이후 마지막 번주인 제13대 번주 마에다 토시미치(前田利同)까지 거처로 사용되었지만, 막말에는 동쪽 해자가 매립되어 좁은 수로가 되었다. 1871년 (메이지 4년)에는 토시미치가 가족과 함께 도쿄로 이주하여 주인을 잃었고,[63][64] 1872년 (메이지 5년)에는 센토세 어전이 헐렸다. 동쪽 해자의 벚나무 가로수 등 많은 벚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사쿠라기정으로 명명되었고, 도야마 시내에 산재한 유곽을 이곳에 모으면서 환락가로 발전했다.[65]
==== 쓰리도노 ====
진통강(현 마츠카와) 사이의 작은 언덕에 위치하며, 1층과 2층을 45도 틀어서 지었다. 원래는 단층 건물로 진통강을 내려다보는 건물이었으나, 후에 툇마루가 있는 2층을 증축한 것으로 여겨진다. 툇마루가 다테야마 연봉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동남동쪽으로 증축되었다고 전해지는, 독특한 건물이다.[66]
4. 남아있는 구조물
1849년에 지어져 지토세 어전의 정문으로 쓰였던 지토세 문이 2007년 민가로부터 성터 공원 안으로 재이축되었다. 도야마성에 남아 있는 유일한 건조물이다.[3]
- 천세어문
- * 총 떡갈나무 구조. 1849년(가에이 2년), 천세어전의 정문으로 건립된 도야마성 유일의 현존 건축 유구. 창건 당시의 것이 아닌, 1855년(안세이 2년)의 대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었다는 설도 있다. 문 형식은 3칸 약의문(三間薬医門)이라고 불리는 격식 높은 성문 건축으로, 지간 6m, 량간 1.9m, 지붕은 절처마 지붕에 붉은 기와의 본 기와로 덮여 있다. 메이지 시대 초기에 문이 해체되었을 때, 도야마시 요네다의 호농에게 불하되어 이전되었으나 소유자가 도야마시에 기증. 2006년부터 2008년에 걸쳐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2012년 4월에는 상시 개문을 시작했다. 현존하는 동 형식의 문은 도쿄대의 아카몬 (구 가가야시키 어수전문) 뿐이며, 2008년 10월 29일에 도야마시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헤이세이의 석축
- * 천세어문 옆(남쪽)에 2008년에 완성된 석축. 폭 11m, 높이 7m, 깊이 12m로, 도야마성의 석축에 사용된 하야쓰키강의 화강암을 사용하고 있다.
5. 관광
도야마성은 JR 서일본 도야마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어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좋다. 주변에는 도야마시 향토박물관(도야마성 천수각), 도야마시 사토 기념미술관 등 다양한 문화시설이 있다.
도야마성에서는 "닌자 합전-SHINOBI-"라는 행사가 열리는데, 마에다 가문, 우에스기 가문, 사사 가문 등 여러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사용하고, 닌자로 분장한 팀들이 대전을 벌인다.[77]
5. 1. 교통
- JR 서일본 도야마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이다.
- 도야마 지철 버스 《성터 공원 앞》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2분, 《소쿠루와》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4분 거리이다.
- 도야마 뮤지엄 버스 《향토박물관, 사토 기념미술관 앞》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2분 거리이다.
- 도야마 지방 철도 도야마 궤도선(도야마 도심선) 국제회의장 앞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도보 약 2분 거리이다.
- 도야마 지방 철도 버스 성터공원 앞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도보 약 2분, 소우가와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도보 약 4분 거리이다.
- 시내 순환 구룻토 BUS 남쪽 순환 루트 (매일 6편) 성터공원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도보 약 2분 거리이다. 이 버스는 도야마성터공원(도야마시 향토 박물관·사토 기념 미술관·마츠카와 강변 조각 공원)을 포함한 도야마시 시가지의 미술관, 박물관, 관광 시설을 순환한다.
- 도야마 공항에서 연락 버스로 약 20분 거리에 있으며, 성터공원 앞에서 하차한다.
5. 2. 주변 시설
- 도야마시 향토박물관 - 도야마성의 천수각
- 도야마시 사토 기념미술관


- 도야마 시 향토 박물관
- * 텔레비전 뉴스 등에서 도야마성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은 건물이다. 사적에 근거하지 않은 '모의 천수'의 외관이다.
- * 해자를 사이에 두고 가을에는 코스모스 꽃이 핀다. 모의 천수 앞에 "Amazing Toyama(어메이징 토야마)"의 흰색 프레임이 있어[72], 도야마성(박물관)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다.
- 사토 기념 미술관
- * 동양 고미술을 중심으로 수장하는 미술관이다. 혼마루(본환) 가라메테(뒤편)의 돌담을 이용하여 지어졌으며, 제관 양식의 건물에, 동쪽은 호쿠리쿠 지방에 많은 해삼벽 3층 야구라를 본뜬 외관을 갖는다.
- 혼마루 정
- * 메이지 시대에 기후현 다카야마시에 지어진 다실 '로쿠로쿠테이'를 사토 공업 3대 사장 사토 스케쿠로가 1948년에 취득한 후, 기증을 받은 도야마시에 의해 성터 공원 내에 이전되었고, 2016년 2월 26일에 증축동이 준공되어 '혼마루 정'으로 개칭[73], 같은 해 5월 20일에 개관 기념식이 거행되었다.[74]
두 박물관·미술관은 일체 운영되고 있다.
- 타키 렌타로 기념관, 마쓰카와 찻집
- 친수 광장
- 놀이 광장
- 증기 기관차 - 다카야마 본선에서 사용된 9600형 기관차 (1914년 (다이쇼 3년) 제작 9628)가, 국철에서 무상 대여 (후에 무상 양도)되어 사토 미술관의 마쓰카와 측 석벽 앞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노후화로 인해 2017년 (헤이세이 29년) 12월 12일에 철거되어, 2년간 수리되었다.[75] 수리 후 2021년 (레이와 3년) 10월 13일에, 도야마역 북쪽의 우시지마 공원으로 이전되어 전시가 재개되었다.[76]
- 다키 렌타로 수학의 땅(플라타너스 거리 서쪽)
- 오테 몰(오테마치 거리)
- * 도야마성 남쪽에서 길이 약 290m의 남북으로 뻗은 거리로, 원래는 도야마성 내의 현재는 없는 니노마루와 산노마루에서 오테몬을 연결하는 통로였으며, 에도 시대에는 오테몬이 현재의 도야마 시민 플라자 앞에 있었고, 소와가(소와가) 거리 상점가 서쪽 입구(유 타운 소와가) 부근에 마스카타가 존재했다.
6. 아라시로노쓰키(황성의 달)와의 관계
- 도이 반스이 작사, 다키 렌타로 작곡의 荒城の月일본어 착상에 기초가 된 성이다.[67]
- 도야마성은 작사가 반스이에게는 荒城の月일본어 시나리오 테마를 부여했고, 작곡가 렌타로에게는 작곡의 모티프로서 성장한 환경에 존재하여 친숙했던 성이다.
- 도야마성은 반스이와 렌타로 모두 공통의 착상을 얻어 작사, 작곡이 연결된다는 점에서 유일하고 기적적이며, 신비로운 성이다. 반스이가 겐신을 숭배한 점과 도야마성을 다룰 필연성이 있었던 반면, 렌타로는 기묘하게도 어린 시절에 도야마성을 체험했고, 두 사람은 도야마성을 통해 공통의 소재로 영감을 받아 명작 荒城の月일본어이 탄생했다고 생각된다. (반스이와 렌타로는 사전에 면식이 없었고, 각자 작품을 제작했지만, 우연히 공통의 모티프를 얻었다.)
- 반스이는 도쿄 대학 대학원 법문관에 있었다. 작사 구상에 있어서, 같은 장소의 아카몬의 가가 마에다 번 저택 부지 내에 있었던 지번 번저의 거성, 도야마성을 소재 중 하나로 다루었다고 보이며, 이 사실은 1절 가사 및 2절 가사에 현저하게 드러나 있다.
- 1절 가사에서는 도쿠가와 가문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연관성을 밟아나가면서도, "천 대의 소나무 가지가 갈라져서, 옛날의 빛은 지금 어디에"라는 구절은 복선으로서 도쿠가와 가문과 마에다 가문(도야마 번주 마에다 도시토모)과의 연결까지도 포함한 구상을 하고 있다.
- 2절 가사는 겐신의 한시 "구월 십삼야 진중작"을 대조하여 취하고, "가을 진영의 서리의 색, 울고 가는 기러기의 수를 보여주네"는 엣추의 진에서의 와카 "베개에 가까운 첫 기러기 소리"도 연상시키며, 겐신과 진보 씨의 싸움이나 다테야마 산에서 "심는 칼"을 착상하고 있다.
- 반스이는 시를 짓기 위해 우에스기 겐신과 진보 씨의 발자취를 따라 도야마성 및 이시도야마성, 나나오성, 그리고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진보 씨, 호시나 가문(도쿠가와)이 들어간 아이즈 와카마쓰 성을 둘러보고 있다.[68]
- 한편, 렌타로는 도야마성 안에 있던 초등학교에 매일 다녔다. 반스이와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에 도야마성을 체험하고 보고 자랐으며, 초등학교 시절에 도야마시에 살았다.[69]
- 렌타로는 "가을에 도래하여 다음 해 봄까지 모습을 보이는 기러기 울음소리가 도야마성을 비추는 달밤에는 낭랑하게 특히 날카롭게 들려 지금도 귀에 남아 있습니다."라고 대담에서 답하고 있다.[70][71]
- 반스이와 렌타로는 1절 가사, 2절 가사에서 명백히 도야마성에서 공통의 체험을 하고 있으며, 작품 구상 시에는 공통의 영감을 얻었다고 생각된다. 이 효과는 그 뒤에 이어지는 3절 가사, 4절 가사에까지 파급되어 일본 가요의 대표적인 명작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 덧붙여, 荒城の月일본어은 여러 가지 모티프가 조합되어 완성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외 荒城の月일본어의 모델로는 반스이가 모티프로 삼았다고 명언한 후쿠시마현 쓰루가 성(아이즈 와카마쓰 성)과 반스이의 출신지인 미야기현 센다이시의 아오바 성, 이와테현 구노헤 성, 다키의 출신지인 오이타현 다케타시의 오카 성 등이 있으며, 이미 그 지역이 강하게 어필하여 관광화됨으로써 특히 유명해졌다. 쓰루가 성에서의 니이지마 야에의 구절은 반스이에게 荒城の月일본어 시나리오 테마를 부여한 것이다. 아오바 성과 구노헤 성은 반스이가 자란 환경에 존재하여 친숙했던 성이다. 오카 성은 렌타로가 자란 환경에 존재하여 친숙했던 성으로 작곡의 모티프로, 3절 가사, 4절 가사의 정경은 오카 성이라고 평가될 정도로 도야마성과 대를 이루고 있다.
- 또한, 반스이는 감명받은 쓰루가 성에서의 니이지마 야에의 구절과 함께 도야마성과 숭배했던 겐신의 십삼야 진중작의 구절은 대를 이루고 있어 荒城の月일본어 시나리오 테마를 얻고 있다. 양자를 잇는 명확한 접점으로 아이즈 번 가로인 진보 구라노스케 등의 존재와 발족 당시의 도쿄 대학이 있던 안나카 이타쿠라 번 에도 저택 터가 있다. 야에의 남편이자, 도지샤대를 설립한 니이지마 조는 이 에도 저택에서 자란 이타쿠라 번사의 아들이며, 동시에 이 에도 저택은 한때 이타쿠라 번주가 진보 씨를 양자로 맞아 계승했기 때문에 옛 진보 저택이기도 했다. 반스이는 쓰루가 성의 야에의 구절을 취함과 동시에 도야마성과 겐신의 십삼야 진중작을 상기시키는 관계성이 갖춰져 있었다.
- 야에의 구절과 겐신의 십삼야 진중작의 구절이 대조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모티프로서 쓰루가 성과 도야마성의 위치는 표리일체의 구도를 취해 테마를 지탱한다. 도야마성은 오로지 뒷면에 나타나 전국 시대나 진보 씨의 출자에 의한 가마쿠라 등 아득히 먼 과거를 짊어지지만, 하나의 작품으로서 반스이와 렌타로를 예술적으로 묶어 명작에 이르는 荒城の月일본어의 요람을 짊어진 점은 유례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 덧붙여, 원래의 제목은 "고성월"이었다.
- 또한, 처음에는 도쿄 대학 법문관은 발족 당시에 안나카 이타쿠라 번 에도 저택(진보 씨 저택) 터에 세워져 있었고, 도쿄 음악학교의 전신인 음악 조사과는 발족 당시에 혼고의 마에다 번 저택 터에 세워져 있었다. 1885년경 도쿄 대학(법문관)은 혼고의 마에다 번 저택 터의 음악 조사과 터로 이전하고 1894년 (메이지 27년)부터 반스이가 배우고, 바뀌어 음악 조사과는 우에노로 이전하여 도쿄 음악학교로 개칭하고 같은 해부터 렌타로가 배운다. 이 사실은 우연히도 荒城の月일본어의 탄생에 있어서 미리 법문관도 도쿄 음악학교도 도야마성도 일종의 인연으로 맺고 있다. 도쿄 음악학교는 연고가 있는 법문관에 작사를 의뢰하고, 반스이에게는 작사에 도야마성을 다룰 필연성이 있으며, 어린 시절에 도야마성을 체험한 렌타로는 도쿄 음악학교의 연구생이 되었기 때문에 작곡을 담당하게 되었다. 도쿄 음악학교에 의한 작곡의 현상 응모에는 렌타로 등 다른 작곡가의 분투 노림이 있다. 비유하자면 이 인연은 마치 법문관도 도쿄 음악학교도 도야마성의 도쿄 출장소 분실과 같아서, 荒城の月일본어은 도야마성의 도쿄 출장소 분실에서 작사, 작곡된 예술 작품으로 비유할 수 있다. 도야마성과 荒城の月일본어은 명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참조
[1]
웹사이트
Toyama castle - SamuraiWiki
http://wiki.samurai-[...]
2009-12-21
[2]
웹사이트
Toyama Castle Profile
http://jcastle.info/[...]
2018-02-21
[3]
웹사이트
続日本100名城
http://jokaku.jp/jap[...]
日本城郭協会
2019-07-25
[4]
웹사이트
"とやま城郭カードが完成しました!"
https://www.city.ton[...]
砺波市公式HP
[5]
웹사이트
"とやま城郭カード一覧"
https://www.city.ton[...]
砺波市公式HP
[6]
문서
富山城の史料上の初見は[[1560年]]([[永禄]]3年)4月28日付の『長尾景虎書状』(福王寺文書)
[7]
뉴스
とやまお城探検隊11 中世富山城1 富山市 現在の城址公園に築く
北日本新聞
2021-04-19
[8]
서적
ポケット図鑑 日本の城
主婦の友社
1995
[9]
논문
富山城の起源
1935
[10]
문서
富山城の堀を、富山県教委埋蔵文化財センターが2003年度に発掘調査したところ、炎で焼けた木材、粘土、炭化穀類、土器などが発見(2017年秋の特別展「謙信 越中出馬」)、神保氏による放火は『新編会津風土記』より「神保在城号富山地自落」にも記載が見られる(富山市郷土博物館)。
[11]
문서
謙信により、神保越中守分が飯田与三左衛門に与えられている(「上杉家文書」)。
[12]
문서
子孫とされる神保忠昭は奉行・軍学者として米沢藩に仕えた。上杉家中名簿に椎名・須田・吉江らと共に越中衆の記載がみられる(『紹襲録』)。
[13]
서적
日本城郭大系 第7巻 新潟・富山・石川
新人物往来社
1988
[14]
서적
越中戦国紀行
北日本新聞社
1988
[15]
서적
秀吉越中出陣―「佐々攻め」と富山城―
2010
[16]
문서
[[蒲生騒動]](大老として利家と景勝が調停)の混乱時のため、前田家中に新川郡の加増と城受け取りを記した文献はあるが(「加賀藩文書」前田育徳会など)、秀吉もしくは豊臣家からの領知判物や朱印状がなく江戸期に問題にされる。
[17]
서적
富山城の縄張と城下町の構造
桂書房
2014
[18]
서적
ふるさと石川歴史館
北國新聞社発行
2002-06-10
[19]
간행물
復刻版越中安政大地震見聞録 立山大鳶崩れの記
2007
[20]
웹사이트
『富山城と私たちが暮らす街』(1) 明治時代のお話
https://www.city.toy[...]
富山市郷土博物館
2023-01-07
[21]
서적
富山市郷土博物館 常設展示図録 富山城ものがたり
富山市立郷土博物館発行
2005-11-03
[22]
서적
富山市郷土博物館 常設展示図録 富山城ものがたり
富山市立郷土博物館発行
2005-11-03
[23]
웹사이트
『富山城と私たちが暮らす街』③東出丸・千歳御殿の解体
https://www.city.toy[...]
富山市郷土博物館
2023-01-07
[24]
웹사이트
『富山城と私たちが暮らす街』(3) 戦後のお話
https://www.city.toy[...]
富山市郷土博物館
2023-01-07
[25]
서적
北陸の名城を歩く 富山編
吉川弘文館
2022-09-01
[26]
서적
富山市史 第1巻
富山市役所発行
1960-03-30
[27]
서적
富山市史 第1巻
富山市役所発行
1960-03-30
[28]
서적
富山市史 第1巻
富山市役所発行
1960-03-30
[29]
서적
特別展 富山城の歴史展
富山市教育委員会発行
1994-07-16
[30]
서적
富山市史 第二巻
1960-04-15
[31]
서적
富山市史 第二編
1960-04
[32]
서적
富山市史 第二巻
1960-04-15
[33]
서적
新聞に見る20世紀の富山 第1巻
北日本新聞社発行
2000-05-20
[34]
웹사이트
『富山城と私たちが暮らす街』(2) 昭和初期のお話
https://www.city.toy[...]
富山市郷土博物館
2023-01-07
[35]
서적
富山市史 第二巻
富山市役所発行
1960-04-15
[36]
간행물
特別展 富山城の歴史展
富山市教育委員会
1994-07-16
[37]
서적
富山市史 第二編
[38]
서적
富山市史 第二編
[39]
서적
富山市史 第二編
[40]
서적
富山市史 第二編
[41]
뉴스
5.爆撃目標は住宅密集地
http://webun.jp/item[...]
北日本新聞社
2014-08-12
[42]
간행물
創立40周年記念 目で見る昭和史
北陸銀行
1983-12-07
[43]
서적
富山市史 第三巻
富山市役所
1960-04-15
[44]
서적
富山市史 第三巻
富山市役所
1960-04-15
[45]
서적
富山市史 通史<下巻>
富山市
1987-01-10
[46]
문서
富山市郷土博物館
[47]
서적
富山市史 第三巻
富山市役所
1960-04-15
[48]
간행물
富山城と私たちが暮らす街 ~どのような糸でつなが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
富山市郷土博物館
2005-09-01
[49]
서적
富山市史 第五巻
富山市役所
1980-03-10
[50]
서적
富山市史 編年史
富山市
2015-03-20
[51]
서적
富山市史 編年史〈上巻〉
富山市
2015-03-20
[52]
서적
富山市史 編年史<上巻>
富山市
2015-03-20
[53]
서적
富山市史 編年史<上巻>
富山市
2015-03-20
[54]
웹사이트
富山市郷土博物館(富山城)
https://toyama-bunka[...]
2023-01-29
[55]
서적
富山市史 続年史〈上巻〉
富山市
2015-03-20
[56]
뉴스
浜松城や忍城など選定=「続100名城」-日本城郭協会
時事通信
2017-04-06
[57]
뉴스
城址公園石垣にずれ 富山 護岸や石碑被害多数
北日本新聞
2024-03-06
[58]
뉴스
珠姫の「金沢は"城下町"じゃ」 147 富山城 聚楽第型、堅固な守り 利長の「最高傑作」より。
北國新聞
2009-07-19
[59]
간행물
130年ぶりに堂々の帰城! 千歳御門移築記念 特別展 再現 千歳御殿
富山市郷土博物館
2007-10-27
[60]
간행물
130年ぶりに堂々の帰城! 千歳御門移築記念 特別展 再現 千歳御殿
富山市郷土博物館
2007-10-27
[61]
간행물
130年ぶりに堂々の帰城! 千歳御門移築記念 特別展 再現 千歳御殿
富山市郷土博物館
2007-10-27
[62]
간행물
130年ぶりに堂々の帰城! 千歳御門移築記念 特別展 再現 千歳御殿
富山市郷土博物館
2007-10-27
[63]
간행물
130年ぶりに堂々の帰城! 千歳御門移築記念 特別展 再現 千歳御殿
富山市郷土博物館
2007-10-27
[64]
간행물
130年ぶりに堂々の帰城! 千歳御門移築記念 特別展 再現 千歳御殿
富山市郷土博物館
2007-10-27
[65]
간행물
130年ぶりに堂々の帰城! 千歳御門移築記念 特別展 再現 千歳御殿
富山市郷土博物館
2007-10-27
[66]
간행물
130年ぶりに堂々の帰城! 千歳御門移築記念 特別展 再現 千歳御殿
富山市郷土博物館
2007-10-27
[67]
서적
日本百科全書
小学館
[68]
문서
会津若松城
[69]
문서
瀧吉弘(廉太郎の父)履歴書
[70]
서적
荒城の月
恒文社
1987
[71]
뉴스
北日本新聞
1989-01-11
[72]
문서
[73]
뉴스
富山城址公園 「本丸亭」完成祝う 茶室「碌々亭」に増築棟
北日本新聞
2016-02-27
[74]
뉴스
文化活動の拠点に 富山市本丸亭 関係者ら完成祝う
北日本新聞
2016-05-21
[75]
뉴스
富山城址公園のSL撤去 2年かけ修繕 市 展示場所を検討
北日本新聞
2017-12-13
[76]
웹사이트
鉄道投稿情報局 9628号蒸気機関車(保存車)が富山駅北に移設され展示
https://rail.hobidas[...]
2021-10-14
[77]
문서
[78]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