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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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요국은 고대 일본 규슈 지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국가 또는 지역 명칭이다. 《고사기》에 등장하는 인물 '도요히와케'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분고 국 풍토기》에 게이코 천황이 "하늘의 상서로운 물건, 땅의 풍요로운 풀이다"라고 칭하며 이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구석기 시대부터 야요이 시대, 고분 시대를 거치며 취락의 이동과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3세기에는 야마타이국과의 연관성이 주목받기도 한다. 7세기 말에는 부젠국과 분고국으로 분할되었으며, 오늘날 오이타현의 별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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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젠국은 규슈 북부에 위치했던 옛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후쿠오카현과 오이타현 일부 지역이며, 고분시대에는 豊国造와 宇佐国造가 다스렸고, 에도 시대에는 고쿠라번의 지배를 받았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후쿠오카현과 오이타현에 편입되었다. - 오이타현의 역사 - 분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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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국은 7세기 후반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에 설치된 행정 구역으로, 여러 군으로 구성되어 에치고국에 병합되기도 하고 독립하기도 하였으며, 막부 시대에는 수호가 파견되는 등 다양한 시설과 관직이 존재했다.
도요국 | |
---|---|
개요 | |
유형 | 옛 일본의 지방 |
위치 | 규슈 |
별칭 | 호슈 (豊州, Hōshū) |
역사 | |
성립 시기 | 7세기 후반 |
구성 | 부젠국 분고국 |
같이 보기 | |
관련 항목 | 도요국 (豊国) 도요타군 (豊田郡) 도요정 (豊町) 도요다시 (豊田市) 도요타 자동차 (トヨタ自動車) |
2. 유래
도요국이라는 이름은 고지키(古事記)의 국생신화(国生み神話)에서 쓰쿠시 섬(규슈)의 네 얼굴 중 하나로 언급되며, 이때는 도요히와케(豊日別)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고지키』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도요국(豊国)은 『고지키』의 국생신화에서 쓰쿠시 섬을 구성하는 네 개의 면 중 하나로 언급되며, 당시 이름은 도요히와케(豊日別)였다고 전해진다.
> 다음으로 태어난 것은 쓰쿠시 섬이다. 이 섬 역시 몸 하나에 면이 넷이 있다. 면마다 이름이 있다. 그러므로 쓰쿠시 국은 시라히와케라 한다. '''도요국'''은 '''도요히와케'''라고 한다. 히 국은 다케히무카히토요쿠시히네와케라 한다. 구마소 국은 다케히와케라 한다.
『일본서기』나 『선대구사본기』「천황본기」에서는 게이코 천황의 황자인 도요쿠니와케노미코가 휴가 국조의 시조라고 기록한다. 『분고 국 풍토기』(豊後国風土記)에는 도요국의 국명 유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 게이코 천황의 명에 따라 이 지역을 다스리던 우나데가 나카쓰 군을 방문하자 백조가 날아와 먼저 떡이 되고, 이어서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천 개의 고구마 풀(토란)이 무성하게 자라자 우나데가 이 토란을 천황에게 바쳤고, 천황은 "하늘의 상서로운 물건, 땅의 풍요로운 풀이다"라고 기뻐하며 이 땅을 "도요국"이라고 이름 지었다.
3. 역사
다음으로 태어난 것은 쓰쿠시 섬이다. 이 섬 역시 몸 하나에 면이 넷이 있다. 면마다 이름이 있다. 그러므로 쓰쿠시 국은 시라히와케라 한다. '''도요국'''은 '''도요히와케'''라고 한다. 히 국은 다케히무카히토요쿠시히네와케라 한다. 구마소 국은 다케히와케라 한다.
『일본서기』나 『선대구사본기』「천황본기」에는 게이코 천황의 아들인 도요쿠니와케노미코가 휴가 국조의 시조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분고 국 풍토기』에는 도요국의 이름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게이코 천황의 명으로 이 지역을 다스리던 우나데가 나카쓰 군을 방문했을 때, 백조 한 마리가 날아와 떡으로 변했다. 이어서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수천 그루의 토란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우나데가 이 토란을 천황에게 바치자, 천황은 "하늘의 상서로운 징조이자 땅의 풍요로운 풀이다"라며 기뻐하고 이 땅을 "도요국"이라 이름 지었다.
3. 1. 구석기・신석기 시대
오이타현 오노군의 오노강 유역에 있는 우에다하라히가시 유적(분고오노시)에서는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편평 타제 석부(돌괭이)가 많이 출토되었으며, 벼농사와 관련된 돌칼은 출토되지 않아, 당시에는 논농사가 아닌 밭농사를 중심으로 생활했을 것으로 보인다.[3]
3. 2. 조몬・야요이 시대
조몬 시대 후기부터 야요이 시대 중기에 걸쳐 수혈 주거지와 토광(저장 구덩이)이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오노군의 진바코 유적 지역이 발달했다.[3]
3. 2. 1. 야마타이국과의 관계
3세기 중국 기록인 위지 왜인전에는 야마타이국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야마타이국에는 광물인 단이나 식물인 보케, 녹나무 등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무역의 요지였던 이토국(현재의 이토시)에는 대솔과 같은 경비 기관이 있었고, 야마타이국은 한반도의 대방군과 교역했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이러한 기록에 나타난 산물들은 옛 도요국(豊国, 풍국) 지역의 산물과 유사한 점이 있다. 구체적으로, 도요국 지역이었던 아미군(網羅郡)과 오이타군(大分郡)에는 진사 채굴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생'(丹生)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녹나무는 규슈 지역에 분포하는 나무이며, 구스군(球珠郡)에는 명자나무의 자생지가 존재한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고대 한반도와 교류가 활발했던 도요국 지역이 야마타이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가능성이 주목된다.
3. 3. 고분 시대
오노군과 히타군 지역의 유적 조사 결과, 야요이 시대 후반부터 고분 시대에 걸쳐 사람들의 거주지가 이동하고 수혈 주거의 형태가 사각형으로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고분 시대 후반에는 이러한 주거지에 부뚜막이 설치되기도 했다. 특히 히타시의 오자코 츠지바루 유적에서 발견된 환호 거관 유구는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의 것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호족의 거처로 평가받는다.
스이닌 천황 시대에는 타케야 아쿠라노미코토가 오이타 국조에 임명되었다고 하며, 『일본서기』나 『분고국 풍토기』에는 게이코 천황이 이 지역을 정벌했다는 전승도 남아 있다. 이후 세이무 천황 시대에는 우나노 아시니(宇那乃足尼)가 토요쿠니노미야츠코(豊国造), 우마사노미코토(馬佐命)가 구니마에노미야츠코(国前造), 토바노 아시니(鳥羽足尼)가 히타노미야츠코(日田造)에 각각 임명되었다고 전해진다.
5세기 유랴쿠 천황 시대에는 일본이 고구려와 신라를 침공하고,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는 사건들이 있었다. 이 시기에는 대륙의 선진 기술을 가진 도래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야하토리(漢織, 한나라 계통 직조 기술자)나 쿠레하토리(呉織, 오나라 계통 직조 기술자)와 같은 수공업자들이 초빙되었고, 진씨의 후예로 알려진 진민(秦民)에 의해 양잠업이 정비되는 등 도래인 기술자들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3. 3. 1. 주요 유적
군은 다이카 개신 이후의 행정 구역 명칭이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지역 이름으로 사용한다.3. 4. 율령제 이후
부젠국 | 분고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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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령제가 정비되면서 고대 일본의 지방 통치 체제가 변화하는 가운데, 규슈 지역 역시 재편 과정을 겪었다. 특히 6세기 이와이의 난, 7세기 백촌강 전투 패배와 진신의 난 등 국내외의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규슈 북동부 지역의 통치 구조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7세기 말, 몬무 천황 시대에 이르러 기존의 도요국 지역은 부젠국과 분고국으로 나뉘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백촌강 전투 이후 강화된 국방 및 지방 통제 정책의 일환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다만 고고학적 연구에서는 도요국 전체를 아우르는 단일 세력의 존재를 명확히 확인하기 어려우며, '도요국'이라는 명칭이 야마토 조정에 의해 지역 일부 또는 전체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거나, 혹은 부젠국과 분고국을 설정하면서 행정적으로 사용된 명칭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8세기에 들어서도 규슈 지역은 하야토의 반란과 같은 사건을 겪었으며, 조정은 다자이후를 거점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했다. 이 시기 우사하치만구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활동도 활발했으며, 구니사키 반도의 롯고만잔 개창 전설이나 카메토키 신사 조영 등 지역 고유의 문화적 기반이 다져졌다. 또한 겐메이 천황의 명으로 《부젠국 풍토기》, 《분고국 풍토기》가 편찬되고, 《일본 서기》가 완성되는 등 국가 차원의 역사 및 지리 기록 사업이 진행되었다.
이후 령제국에 중국풍의 별칭이 붙여지면서, 부젠국과 분고국 중 하나 또는 양쪽을 호슈(豊州)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두 국을 합쳐 부르는 니호(二豊) 또는 료호(両豊)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 오늘날 후쿠오카현 동부를 제외한 옛 도요국의 영역 대부분이 오이타현에 해당하기 때문에, "도요국"이나 "니호"는 여전히 오이타현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3. 4. 1. 6세기 규슈
규슈 북부의 지쿠시국에서는 527년(게이타이 21년),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한반도로 출병하던 오미노 게노와, 신라와 내통한 것으로 여겨지는 지쿠시 국조의 호족 지쿠시노 키미 이와이 사이에 '''이와이의 난'''이 발발했다. 이 난은 당시 일본과 한반도 국가 간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된다.또한, 531년에는 북위에서 온 상인 젠쇼가 레이센사를 창건하고 수험도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534년 북위가 분열하고, 제29대 긴메이 천황 시대에 임나와 가야가 멸망하는 등, 이 시기 규슈 지역은 선비나 신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3. 4. 2. 7세기
660년(사이메이 6년)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자, 야마토 정권은 백제 부흥을 목표로 한반도에 출병하였다. 그러나 '''백촌강 전투'''에서 일본·백제 유민 연합군은 당·신라 연합군에게 패배하였다. 이 패배로 인해 일본 내에서도 군비 재검토가 이루어졌으며, 규슈 북부의 다자이후 주변에 토성이 축조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다자이후는 히타와 히타 가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672년에는 '''진신의 난'''의 영향이 각지로 퍼졌다. 아스카의 호류지가 북위 양식으로 재건되는 등, 북위 문화의 영향이 강해진 시기이기도 하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규슈의 여러 국(国)들은 7세기 말 몬무 천황 무렵에 지쿠젠국·지쿠고국, 히젠국·히고국, 부젠국과 분고국 등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한편, 고고학적 관점에서는 도요국 전체를 통치하는 단일 세력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야마토 조정이 이 지역 일부에 있던 '도요국'이라는 명칭을 전체 지역을 가리키는 데 사용했거나, 혹은 부젠국과 분고국을 제정할 때 이 명칭을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3. 4. 3. 8세기
규슈 남부에서는 하야토의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조정군은 다자이후를 거점으로 진압을 위한 군대를 파견했다. 우사 신궁의 군대도 출병했는데, 이때 고모 신사의 마코모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우사하치만구의 장원이었던 구니사키 반도에는 요로 연간(717년~724년)에 승려 닌몬이 28개의 사찰인 "롯고만잔"을 열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또한 닌몬은 같은 시기 유후 향에 롯쇼 곤겐(오가씨의 아난 장)도 세웠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엔기시키에 기록되지 않은 신사로, 야마토 정권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구스군에서는 718년(요로 2년) 카메토키 고분 자리에 카메토키 신사가 세워졌다. 이곳은 기즈키 신사(초기 이즈모타이샤)의 스사노오노 미코토와 쿠시나다히메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경내에는 거석을 사용한 데미즈야와 초가집 지붕의 배전이 있으며, 입구 연못 중앙에는 섬이 조성되어 있다.
한편, 제43대 겐메이 천황의 명에 따라 편찬 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710년에는 풍토기로서 《이즈모 국풍토기》가, 712년에는 역사서로서 《고지키》가 나라에서 편찬되었다. 720년에는 각 군과 향의 특징 및 유래가 기록된 《부젠국 풍토기》와 《분고국 풍토기》가 편찬되었고, 제40대 덴무 천황의 명으로 토네리 친왕이 편찬한 《일본 서기》가 헌상되었다.
훗날 령제국에 중국풍의 별칭이 붙여지면서, 부젠국과 분고국 중 하나 또는 양쪽 모두를 가리켜 호슈(豊州)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도요국과 같은 지역, 즉 부젠국과 분고국 양쪽을 가리키는 말로 니호(二豊) 또는 료호(両豊)도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도 후쿠오카현 동부를 제외한 도요국의 거의 전역이 오이타현에 해당하기 때문에, "도요국"이나 "니호"가 오이타현의 별칭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4. 인물
참조
[1]
서적
The Geography of Japan
https://books.google[...]
1874
[2]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2005
[3]
문서
上田原東遺跡発掘調査速報
[4]
서적
日本書紀、豊後国風土記
[5]
간행물
辛島代豆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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