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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로마 가톨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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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7개의 대교구와 20개의 교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독일 인구의 약 28.5%가 가톨릭 신자이다. 독일 가톨릭 교회는 역사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시대에 국교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종교 개혁과 문화 투쟁, 나치 정권의 탄압을 겪었다. 현대에는 세속화 심화, 신자 감소, 교회 재정 문제, 사회 변화에 대한 적응, 아동 성 학대 사건, 시노달 여정, 바티칸과의 갈등 등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다. 독일은 여러 명의 교황을 배출했으며, 가장 최근의 독일 출신 교황은 베네딕토 16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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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로마 가톨릭교회
기본 정보
쾰른 대성당
쾰른 대성당
일반 정보
공식 명칭독일 가톨릭 교회
독일어 명칭Katholische Kirche in Deutschland (독일 내 가톨릭 교회)
로마자 표기Katholische Kirche in Deutschland
조직
유형국가 교회
소속가톨릭 교회
전례로마
정치 체제주교제
운영독일 주교회의
지도자 직함교황
지도자프란치스코
독일 주교회의 의장게오르크 베칭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의장프란츠 라크너
본부본, 독일
사용 언어독일어, 라틴어
웹사이트독일 주교회의
통계
신자 수2390만 명 (2022년)
신자 비율28.5% (2022년)
역사
기타 정보
지역독일

2. 독일의 가톨릭 교구

독일의 로마 가톨릭 교회 대교구 및 관할 교구 현황


2012년 12월 31일 기준 독일 교구별 신자 비율


독일에는 현재 7개의 대교구와 20개의 교구가 있다. 각 교구별 상세 현황은 다음과 같다.

밤베르크 대교구뷔르츠부르크 교구
스피어 교구
아이히슈테트 교구
베를린 대교구드레스덴-메이센 교구
괴를리츠 교구
쾰른 대교구아헨 교구
에센 교구
림부르크 교구
뮌스터 교구
트리어 교구
프라이부르크 대교구마인츠 교구
로텐부르크-슈투트가르트 교구
함부르크 대교구힐데스하임 교구
오스나브뤼크 교구
뮌헨과 프라이징 대교구아우크스부르크 교구
파사우 교구
레겐스부르크 교구
파데르보른 대교구에르푸르트 교구
풀다 교구
마그데부르크 교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군 점령 지역은 격렬한 무신론 정부 아래 놓이게 되면서 많은 교구들이 독일 서부에 있는 교구와 단절되었다. 동독 지역은 역사적으로 개신교가 다수였고, 가톨릭 신자는 인구의 11%에 불과하여 개신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영향을 받았다. 동독에는 가톨릭 신자가 다수인 아이히스펠트 지역과 소르브인이 거주하는 남동부 지역이 있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거의 비슷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2008년 여론 조사에 따르면 가톨릭은 약 30.7%, 개신교는 약 31%이다. 가톨릭 신자는 바이에른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라인란트-팔츠주 등 남부에 많다.

2. 1. 독일의 대교구



독일에는 현재 7개의 대교구와 20개의 교구가 있다.

대교구관할 교구
밤베르크 대교구뷔르츠부르크 교구, 스피어 교구, 아이히슈테트 교구
베를린 대교구드레스덴-메이센 교구, 괴를리츠 교구
쾰른 대교구아헨 교구, 에센 교구, 림부르크 교구, 뮌스터 교구, 트리어 교구
프라이부르크 대교구마인츠 교구, 로텐부르크-슈투트가르트 교구
함부르크 대교구힐데스하임 교구, 오스나브뤼크 교구
뮌헨과 프라이징 대교구아우크스부르크 교구, 파사우 교구, 레겐스부르크 교구
파데르보른 대교구에르푸르트 교구, 풀다 교구, 마그데부르크 교구



2008년 12월 31일 독일 가톨릭 인구 통계조사에 따르면, 독일 동부 및 북부 지방에는 가톨릭 신자 수가 대체로 10% 미만으로 극히 적은 반면, 서부 및 남부 지방에서는 주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이다. 특히 파사우 교구의 경우, 전체 주민의 88%가 가톨릭 신자이다.

3. 역사

카롤루스 대제아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문화적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되자 가톨릭 교회는 국교가 되었다. 초대 황제 오토 1세도 카롤루스 대제를 따라 아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고, 제국 붕괴까지 이 관습이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 사이에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졌다. 서임권 투쟁을 둘러싸고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사죄해야 했던 사건은 카노사의 굴욕으로 알려져 있다. 1122년 보름스 협약을 통해 서임권 논쟁은 일단락되었지만, 황제 루돌프 1세는 즉위를 교황에게 승인받지 못했다.

마르틴 루터종교 개혁에 직면하여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 확대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황제 카를 5세는 루터의 저서를 금지했지만,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루터파의 존재를 용인해야 했다. 17세기에는 30년 전쟁이 발발하여 교황청과 주변 국가들까지 휩쓸렸다.

독일 제국 시대까지 가톨릭 교회는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비스마르크 수상은 문화 투쟁을 일으켜 가톨릭의 힘을 억누르려 했다. 그는 의회에서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겠다"라고 연설하기도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개신교가 정치, 문화적으로 주도권을 잡았다.

1933년 제3 제국 성립 직후, 가톨릭 교회는 생존의 위기에 놓였다. 나치즘은 국가나 아돌프 히틀러를 최고위에 두는 사상으로, 가톨릭을 적극 옹호했던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이나 이탈리아파시즘과는 달리 가톨릭 교회와 정면으로 대립했다. 초기 나치즘에 반대했던 교회는 정권 장악 이후 생존을 위해 제국 협약을 체결하는 등 일정 부분 타협했으나, 교회 내부에서는 나치에 대한 철저한 저항과 타협을 주장하는 의견이 공존했다. 바티칸은 무신론을 내세우는 공산주의동방 정교회보다는 낫다는 이유로 나치즘을 옹호하는 경향도 있었다. 에리히 클라우제너처럼 나치에 반대하다 살해된 정치인, 예수회 신부 알프레트 델프와 같은 희생자도 있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홀로코스트를 막지도, 비판하지도 않았다는 점 때문에 후에 비판받았다.[19][20][21][22]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경제 성장이 시작되면서 서독에서는 종교를 멀리하는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혼과 인공 임신 중절을 용인하는 여론이 높아졌고, 교회세 폐지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 베를린클라우스 보베라이트 시장이 동성애자임을 공표하는 등, 독일 가톨릭 교회는 세속화의 물결에 휩싸이고 있다.

최근 독일에서는 성적 학대 사건이 보도되었고, 교황의 퇴위를 요구하는 시위도 발생하고 있다.

3. 1. 독일의 기독교화

켈트족게르만족의 기독교화는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던 독일 서부 지역에서 처음 일어났다. 기독교 선교는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더욱 쉬워졌고, 여러 방법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게르만족의 복음화는 대부분 강제적인 선교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로마 제국과 관계를 맺고 있던 부족들 사이에서 기독교가 널리 퍼졌다.[6]

5세기 로마의 독일 통치가 붕괴되면서 독일의 가톨릭-기독교화도 끝을 맺었다. 처음에는 쾰른트리어 같은 대도시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459년 프랑크족의 침략으로 이들 도시는 전멸되고 말았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프랑크족에 의해 죽거나 쫓겨났다. 새로 들어온 프랑크족은 자신들의 이교도 신앙을 다시 일으켰다. 잔존한 소수의 가톨릭 주민들은 프랑크족 군주들에게 맞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낼 힘이 없었다.[7]

그러나 496년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 1세가 세례를 받으면서 새로운 양상이 나타났다. 그는 아리우스파로 넘어간 독일 동부 사람들과는 달리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많은 프랑크족이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후 8세기 동안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등지에서 온 선교사들이 독일 지역에 가톨릭 신앙을 다시 들여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프랑크 제국 시대 동안, 독일에 파견된 이들 선교사들 가운데 가장 두각을 드러낸 이는 590년부터 프랑크 제국에서 활동한 성 골룸바노와 716년부터 활동한 성 보니파시오이다. 게르만 민족의 개종은 게르만 귀족들의 개종으로 먼저 시작되었으며, 이들 귀족들은 자신들이 믿게 된 새로운 신앙을 일반 백성들에게도 믿게 만들었다.

아일랜드-스코틀랜드-잉글랜드 선교사들의 독일 활동은 13세기에 막을 내렸다. 선교사들은 원주민 기독교인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독일 전체를 기독교화하는 데 성공하였다.[7]

3. 2. 신성 로마 제국

1500년 중부 유럽의 교회 영지 및 주교좌 소재지를 표시한 지도.


중세 시대에 가톨릭 교회는 신성 로마 제국국교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 중 상당 부분이 교회 영주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교황이 주재하는 대관식을 통해 임명받아야 했다.[1]

카롤루스 대제와 오토 1세는 아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고, 이 관습은 제국 붕괴까지 이어졌다.[2] 이 시기에는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 사이에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다.[2] 성직 서임권을 둘러싸고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사죄해야 했던 사건은 카노사의 굴욕으로 알려져 있다.[2] 1122년 보름스 협약을 통해 서임권 논쟁은 일단락되었지만,[2] 황제 루돌프 1세는 즉위를 교황에게 승인받지 못했다.[2]

3. 3. 종교 개혁

마르틴 루터는 교황이 세속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비난하며 종교 개혁을 촉발했다. 독일의 일부 봉건 귀족들과 자본가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민들에게 세금을 걷어 이탈리아로 보내면서 정작 본국 정부에는 세금을 내지 않는 관행에 불만을 품고 루터와 손을 잡았다. 루터의 두 왕국론은 교회 재산 몰수와 1525년 독일 농민 전쟁을 독일 귀족들이 군대를 동원해 진압한 것을 정당화했다. 이러한 루터의 사상은 일부 귀족들과 자본가들의 지지를 얻어 루터파 개종을 이끌었다.[1]

1555년 9월 25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슈말칼덴 동맹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체결하여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종교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이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지역으로 나뉘었고, '영주의 신앙이 영내(領內)를 지배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에 따라 영주와 도시의 신앙 선택권이 인정되었다. 영속민은 영주와 같은 신앙을 따르게 되었으나, 다른 신앙을 가진 영속민의 이동 자유는 보장되었다.[1]

그러나 제국 내 종교 간 적대감과 긴장은 여전히 남아 30년 전쟁(1618-1648)을 초래했다. 30년 전쟁은 독일 국토를 황폐화시키고, 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다. 원문에 따라 1,200만 명[1] 또는 800만 명[2]으로 기록할 수 있다.

종교 전쟁 이후 독일 남부는 가톨릭, 북부는 루터교를 받아들였다.[1]

3. 4.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인한 교회 영지의 세속화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프랑스 혁명프랑스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페인, 영국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 결과 1795년 바젤 조약에 의해 라인란트가 프랑스에 할양되었다.[11] 1803년에는 합병된 영토의 군주들을 보상하기 위해 제후령 병합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제국 내의 영토 주권이 크게 재분배되었다. 당시 독일의 상당 부분은 가톨릭 주교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는데(95,000 에 300만 명 이상의 주민), 제후령 병합으로 교회 국가들은 대부분 인접한 세속 제후국에 합병되었다.[11] 마인츠 대교구를 병합하여 주교구에서 승격된 레겐스부르크 대주교, 독일 기사단 영토, 성 요한 기사단 영토만이 정교 분리의 물결 속에서 신정 국가로 살아남았다.[11]

수도원수도원들은 토지를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생존 수단을 잃었다.[11] 역설적이게도 교회 토지와 재산의 손실로 인해 독일(구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포함)의 국가 또는 지역 교회는 로마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울트라몬타니즘).[11] 1850년대의 이러한 변화는 더욱 열성적인 성직자, 오래된 교육 단체의 부활, 마리아 형제단의 출현, 새로운 남녀 수도회의 출현, 대중 선교의 개최에 의해 뒷받침되었다.[11][12]

3. 5. 프로이센과 문화 투쟁

열렬한 프로테스탄트였던 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가톨릭교도들이 독일 제국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며,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성을 선포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13] 그는 세속 국가를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가톨릭교회를 제어할 필요가 있다고 보아, 1871년 7월 문화투쟁을 벌였다. 문화투쟁은 가톨릭교회를 국가의 통제하에 놓기 위해 국가가 성직자 임명에 관여하고, 성직자들이 강론 중에 정치적 견해를 발표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반교회적 정책들을 포함했다. 1872년 12월에는 아예 교황청과의 외교 관계를 끊어 버렸다.[13]

1870년대 초 프로이센 주와 제국에서 제정된 법률은 가톨릭 신자를 차별했다. 이러한 법률에 교회는 저항했고, 그 결과 언론과 의회에서 격렬한 공개 토론이 벌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문화 투쟁"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13] 바티칸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고, 가톨릭 반대를 진압하기 위한 추가 법률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는 가톨릭 신자들의 더 많은 지지와 교회의 더 많은 저항만을 초래했다.[13] 문화 투쟁 기간 동안, 법을 거부한 4명의 주교와 185명의 사제가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으며, 훨씬 더 많은 수의 사제가 벌금을 내거나 망명했다.[13]

교황 비오 9세가 1878년에 사망한 후, 비스마르크는 더욱 화해적인 교황 레오 13세와 협상을 시작했고, 레오 13세는 1887년 5월 23일에 문화 투쟁의 종식을 선포했다.[14][15][16][17][18]

3. 6. 나치 독일

아돌프 히틀러1933년 7월 단종법을 공포하여 가톨릭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가톨릭 청년연맹을 해산시켰고, 수년 동안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를 체포했다.[49] 교황 비오 11세는 회칙 《Mit brennender Sorge(깊은 고뇌 속에서)》를 통해 나치즘의 인종차별과 폭력을 비판했다.[49]

1933년 제3 제국 성립 직후, 가톨릭 교회는 생존의 위기에 놓였다. 나치즘은 국가나 아돌프 히틀러를 최고위에 두는 사상으로, 가톨릭을 적극 옹호했던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이나 이탈리아파시즘과는 달리 가톨릭 교회와 정면으로 대립했다. 초기 나치즘에 반대했던 교회는 정권 장악 이후 생존을 위해 제국 협약을 체결하는 등 일정 부분 타협했으나, 교회 내부에서는 나치에 대한 철저한 저항과 타협을 주장하는 의견이 공존했다. 바티칸은 무신론을 내세우는 공산주의동방 정교회보다는 낫다는 이유로 나치즘을 옹호하는 경향도 있었다. 에리히 클라우제너처럼 나치에 반대하다 살해된 정치인, 예수회 신부 알프레트 델프와 같은 희생자도 있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홀로코스트를 막지도, 비판하지도 않았다는 점 때문에 후에 비판받았다.[19][20][21][22]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소련군 점령 지역인 동독의 가톨릭 신자들은 무신론 군사정권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4. 현대 독일 가톨릭 교회의 과제

오늘날 독일의 가톨릭교회는 여러 과제에 직면해 있다. 우선, 신자 수가 감소하고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주일 미사 참례율이 떨어지고 있다. 1990년 22%였던 주일 미사 참례율은 2009년 13%로 감소했다.[28][29] 뮌헨 대교구와 같이 전통적으로 가톨릭 인구가 많았던 지역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27]

교회 재정 문제도 심각하다. 독일 정부는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를 지원하며 교회세를 징수하는데, 등록된 모든 신자는 소득의 8~9%를 교회세로 내야 한다.[24] 이 세금 덕분에 독일 가톨릭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교회 중 하나가 되었지만,[30] 최근에는 교회세를 피하려는 젊은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33]

사회 변화에 대한 적응도 과제이다. 독일 가톨릭 신자의 70%는 동성 결혼을 지지하고, 80%는 결혼하지 않은 커플의 동거를 수용하며, 85%는 사제에게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31] 이처럼 현대 사회의 변화에 대한 신자들의 인식과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최근에는 성직자에 의한 아동 성 학대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교회의 신뢰도가 크게 하락했다.[33]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교회를 떠나는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2022년에는 522,821명이 교회를 떠났다.[34]

4. 1. 테바르츠-판 엘스트 주교 스캔들

프란츠-페터 테바르츠-판 엘스트 주교의 재정 비리 의혹은 2013년 말 독일 전역에서 가톨릭 교회 탈퇴 및 항의 물결을 일으켰으며, 이는 '테바르츠 효과'로 불린다.[35] 림부르크의 테바르츠-판 엘스트 주교는 교회 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검소함을 설교하면서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여 "Protzbischof"("과시 주교" 또는 "사치 주교")라는 별명을 얻으며 대중의 분노를 샀다.[35]

테바르츠-판 엘스트 주교는 인도로 가는 인도적 지원 임무를 위해 7000EUR 상당의 일등석 항공편을 이용했다.[35] 테바르츠 주교와 그의 부교구장 프란츠 카스퍼는 루프트한자의 고급 상용 고객 프로그램 자격을 갖추었다. 또한 테바르츠 주교는 3100만유로가 소요되는 주교 관저인 성 니콜라스 교구 센터를 건설하도록 했다.[36] 이 건물은 사우나, 와인 저장고,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된 인테리어에 대한 소문을 막기 위해 림부르크 건설 당국에 비밀로 유지되었으나, 나중에 메카의 카바와 색상 및 입방체 모양이 유사하여 "림부르크의 카바"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러한 과도한 지출은 교구가 기본적인 간접비 및 교회 시설 유지, 탁아 서비스와 같은 서비스에 대한 자금이 부족한 상황에서 발생했다.[35]

"테바르츠 효과"는 개신교 신자와 가톨릭 신자 모두에게 환멸을 안겨주었다. 독일 개신교회쾰른에서 80%의 결석률 증가와 228명의 탈퇴를 겪었다.[37] 2013년 10월에는 1,250명의 바이에른 주민이 교회를 떠났는데, 이는 9월의 602명에서 두 배 이상 증가한 수치이다. 브레멘, 오스나브뤼크, 파더보른, 파사우, 레겐스부르크 등 독일 전역의 도시들에서 가톨릭 신자 사임이 3배 증가했다고 보고했다.[37]

5. 독일 출신 교황

교황 레오 9세는 독일 출신 교황 중 한 명이었다.


독일 출신 교황은 총 7명이다. 최초의 독일 출신 교황은 교황 그레고리오 5세(996–999)로 재위한 카린티아의 브루노이다. 11세기에는 성인으로 시성된 교황 레오 9세를 포함하여 5명의 독일 출신 교황이 있었다. 가장 최근의 독일 출신 교황은 베네딕토 16세(요제프 추기경 라칭거)로, 2005년부터 2013년 퇴위할 때까지 재위하였다.

참조

[1] 간행물 Annuario Pontificio 2012
[2] 웹사이트 Kirchenstatistik 2022 2022-06-28
[3] 웹사이트 Church statistics PDF http://www.dbk.de/im[...] 2015-07-01
[4] 뉴스 Church tax cuts the German fold https://www.nytimes.[...] 1992-12-28
[5] 간행물 Annuario Pontificio 2008
[6] 서적 Geschichtliche Landeskunde des Saarlandes, Book 2: Von der fränkischen Landnahme bis zum Ausbruch der französischen Revolution Selbstverlag des Historischen Vereins für die Saargegend e. V. 1977
[7] 서적 Geschichtliche Landeskunde des Saarlandes, Book 2: Von der fränkischen Landnahme bis zum Ausbruch der französischen Revolution Selbstverlag des Historischen Vereins für die Saargegend e. V. 1977
[8] 문서 See Viga-Glum's Saga (Ch.26), Hakon the Good's Saga (Ch.16), Egil's Saga (Ch. 65), etc.
[9] 서적 Gesta Hammaburgensis Ecclesiae pontificium Book IV
[10] 간행물 Crisis and Catastrophe: The Global Crisis of the Seventeenth Century ReconsideredGeoffrey ParkerCrisis and Catastrophe 2008-10-01
[11] 서적 Marpingen: Apparitions of the Virgin Mary in Nineteenth-Century Germany Alfred Knopf 1994
[12] 서적 Popular Catholicism in Nineteenth-Century Germany Princeton 1984
[13] 서적 CONSTANTINE'S SWORD Houghton Mifflin Company 2001
[14] 서적 Iron Kingdom: The Rise and Downfall of Prussia, 1600–1947 https://archive.org/[...] Harvard University Press
[15] 서적 Liberty and the Catholic Church in 19th. century Europ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16] 서적 The Turn to Transcendence. The Role of Religion in the 21st. Century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2010
[17] 서적 An Economic History of 19th-century Europ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8] 서적 Fighting for the Soul of Germany: The Catholic Struggle for Inclusion after Unification Harvard U.P. 2012
[19] 서적 Hitler's Priests University of Northern Illinois Press 2008
[20] 서적 Resisting the Third Reich
[21] 서적 Cardinal von Faulhaber, 1917-1945 1975
[22] 문서 Faulhaber Archives
[23] 웹사이트 The German Churches and the Nazi State http://www.ushmm.org[...] 2017-04-18
[24] 뉴스 Luther's spiritual heirs face uncertain future 2007-03-20
[25] 뉴스 Katholikentag draws 20,000 2004-06-26
[26] 웹사이트 Protestant (EKD only) and Catholic statistics by Bundesland 2021) https://www.ekd.de/e[...] 2023-03-25
[27] 뉴스 Catholics a minority in Archdioses Munich: source Austrian Catholic Newservice http://www.kathpress[...]
[28] 웹사이트 Deutsche Bischofskonferenz: Home http://www.dbk.de/im[...] 2017-04-18
[29] 웹사이트 Key Performance Indicators of the Catholic Church 1990 -2009 http://www.dbk.de/fi[...] 2017-04-18
[30] 문서 See Willkommen zum Adveniat-Blog, Adveniat Media Portal, etc.
[31] 뉴스 Germany's quiet Catholic rebellion on gay blessings and women preachers https://www.bbc.com/[...] 2022-03-11
[32] 웹사이트 How Catholics around the world see same-sex marriage, homosexuality https://www.pewresea[...] 2022-03-11
[33] 웹사이트 Survey: One in three Catholics in Germany thinking of leaving Church https://www.catholic[...] 2022-03-11
[34] 웹사이트 German Exodus: Half a Million Catholics Abandon Church in Historic Departure https://www.ncregist[...] 2023-08-31
[35] 뉴스 'Living in lap of luxury:Bishop''s extravagant behavior triggers uproar' http://www.spiegel.d[...] 2013-12-06
[36] 뉴스 Tebartz-van Elst: Das kostet die Einrichtung im Limburger Bischofssitz http://www.spiegel.d[...] Der Spiegel 201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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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웹사이트 Vatican publishes cardinals' critiques of German 'synodal way' https://www.pillarca[...] 2022-11-24
[42] 웹사이트 As Church in Germany Allows for 'LGBT' Employees, Vatican Publishes Concerns over Synodal Way https://www.ncregist[...]
[43] 문서 Not in [[Koinonia|communion]] with the rest of the [[Catholic Church]]
[44] 문서 Part of the [[Union of Utrecht (Old Catholic)|Union of Utrecht]]
[45] 문서 Part of the [[Communion of Protestant Churches in Europe]]
[46] 문서 All of them [[Landeskirche]]
[47] 문서 Part of the [[United Evangelical Lutheran Church of Germany]] as well
[48] 문서 Part of the [[Reformed Alliance]]
[49] 서적 이야기 독일사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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