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벨기에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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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벨기에 침공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한 사건이다. 1830년 런던 회의와 1839년 런던 조약으로 벨기에의 중립이 보장되었으나, 독일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프랑스 침공을 위해 벨기에를 통과하려 했다. 벨기에의 저항과 주요 전투(리에주 전투, 할렌 전투, 나뮈르 공방전 등)로 독일군의 진격이 지연되었고, 이로 인해 영국이 참전하게 되었다. 독일은 벨기에 점령 기간 동안 민간인 학살(벨기에 강간) 등 전쟁 범죄를 저질렀으며, 1914년 11월까지 벨기에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 침공은 서부 전선의 교착 상태를 초래하고, 전쟁의 장기화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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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벨기에 침공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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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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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독일의 벨기에 침공 |
일부 | 제1차 세계 대전의 서부 전선 |
날짜 | 1914년 8월 4일 – 1914년 10월 31일 (0년 2개월 27일) |
장소 | 벨기에 및 룩셈부르크 |
결과 | 독일의 승리 |
영토 | 벨기에 대부분 지역의 독일 점령 벨기에 총독부 수립 룩셈부르크 점령 (1918년까지)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지원: |
교전국 2 | 지원: |
지휘관 | |
독일 제국 | 빌헬름 2세 카를 폰 뷜로 알렉산더 폰 클루크 막스 폰 하우젠 |
벨기에/연합군 | 알베르 1세 앙토닌 드 셀리에 드 모랑빌 샤를 라느레자크 존 프렌치, 이프르 백작 1세 |
병력 규모 | |
독일 | 75만 명 |
연합군 | 벨기에: 22만 명 프랑스: 29만 9천 명 영국: 24만 7천4백 명 총합: 76만 6천4백 명 |
피해 규모 | |
독일 | 2만 명 |
연합군 | 3만 명 |
민간인 사망자 | 벨기에의 강간으로 6천 명 사망 |
2. 전쟁의 배경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유럽은 열강 간의 치열한 경쟁과 군사적 긴장 고조로 불안정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특히 독일 제국의 급격한 부상과 프랑스와의 뿌리 깊은 적대 관계는 유럽 대륙의 군비 경쟁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각국은 자국의 안보와 영향력 확대를 위해 복잡한 동맹 관계를 맺고 군사력 증강에 힘썼으며, 이는 잠재적인 대규모 충돌의 위험을 높였다.
벨기에는 1830년 런던 회의와 1839년 런던 조약을 통해 유럽 주요 열강들로부터 독립과 영세 중립을 보장받았다. 이는 벨기에의 안보를 위한 중요한 외교적 장치였으나, 벨기에의 지정학적 위치는 독일과 프랑스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놓여 있어 항상 잠재적인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특히 20세기 초, 독일의 군사 계획이 벨기에 영토 통과를 점차 구체화하면서 벨기에의 중립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벨기에는 중립을 지키기 위해 외교적 노력과 함께 독자적인 군비 증강을 추진했지만, 열강들의 거대한 군사력 앞에서는 한계가 명확했다.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 양면에서 전쟁을 치러야 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서부 전선에서 빠르게 승리를 거두기 위한 슐리펜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의 핵심은 중립국인 벨기에를 신속하게 통과하여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북쪽에서 우회하고 파리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는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 국제 조약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침략 계획이었으나, 독일 군부는 이를 군사적 필요성이라는 명분 아래 강행하고자 했다. 프랑스 역시 독일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하여 17호 작전을 준비했지만, 독일군의 주된 공격 방향을 예측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럽은 급격히 전쟁의 위기로 빠져들었다. 7월 위기로 불리는 한 달여의 기간 동안 각국의 외교적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 최후통첩과 선전포고를 시작으로 열강들의 연쇄적인 총동원령과 선전포고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독일은 슐리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8월 2일 벨기에에 자국 군대의 통과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벨기에 정부가 이를 단호히 거부하자, 독일은 8월 4일 벨기에 국경을 넘어 침공을 개시했다. 독일의 명백한 국제법 위반 행위는 영국이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결정하는 중요한 명분이 되었으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유럽 전역의 전쟁으로 확전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 1. 벨기에의 중립과 안보 불안
벨기에의 중립은 1830년 런던 회의를 통해 유럽 열강들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1839년 런던 조약으로 벨기에 혁명 이후 네덜란드 연합 왕국으로부터 독립과 중립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초기 벨기에의 전략 분석은 전쟁 발발 시 독일이 프랑스-독일 국경을 넘어 프랑스를 공격하고, 벨기에 국경에서 프랑스군을 포위하는 1870년의 방식을 반복할 것으로 예상했다. 1914년 이전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벨기에의 독립을 보장했지만, 1906년과 1911년 영국 무관이 앤트워프 상륙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벨기에는 영국이 자국의 중립을 순수한 목적보다는 영국의 외교적, 군사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길 수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특히 아가디르 위기 (1911년)는 벨기에 정부에게 유럽 전쟁의 발발 가능성과 독일의 벨기에 침공 위험을 명확히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11년 9월, 벨기에 정부는 회의를 통해 영국과 프랑스 정부와의 공모 혐의를 피하면서도 독일의 침공에 독자적으로 저항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때까지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잠재적인 적대국으로 간주되었다. 1913년과 1914년에는 독일이 베를린 주재 벨기에 무관에게 독일군의 벨기에 통과 가능성을 문의하기도 했다. 벨기에는 침공 시 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지만, 특정 국가와 동맹을 맺거나 자국의 독립 유지 이상의 목표를 설정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중립 정책은 벨기에 정부가 군사적 독립 전략을 추구하도록 이끌었다. 1909년에 시작되어 1926년 완료를 목표로 한 재무장 계획은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수적 우위를 줄여 침공을 억제하기 위해 3개 군단을 보유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09년 징병제가 도입되었으나 복무 기간은 15개월로 짧았다. 아가디르 위기 이후 정부는 군비 증강을 지속했지만, 육군 규모가 인구 대비 비율로 고정된 것은 1913년이었다. 연간 징집 인원은 13,300명에서 33,000명으로 증가하여 180,000명의 야전군을 위한 훈련된 병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고령 예비군은 주둔군으로 활용하여 1926년까지 약 340,000명을 동원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그러나 새로운 계획의 시행은 기존 체계를 혼란스럽게 했고, 1914년에는 아직 완전히 정착되지 못한 상태였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으로 위기가 고조되자, 벨기에는 연대를 분할하고 8개 기수의 예비군을 동원하여 야전군 117,000명과 200,000명의 요새 병력을 확보했다. 벨기에의 방어 계획은 특정 국경에 군대를 집중하기보다는 내선 작전의 이점을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앤트워프의 국가 요새를 중심으로 야전군을 국경에서 약 60km 떨어진 국가 중앙에 집결시켜 침공을 지연시키면서 기동전을 펼칠 준비를 하고, 국경 방어는 리에주 요새와 나뮈르 요새 지역에 맡기기로 했다.

벨기에의 군사 계획은 기본적으로 다른 열강이 침략자를 격퇴해 줄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했지만, 독일의 침략 가능성이 커지면서도 프랑스와 영국을 완전한 동맹으로 간주하거나 자국의 독립 수호 이상의 목표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영불 협상 (1904년) 이후 벨기에는 영국이 자국을 보호령처럼 여기기 시작했다고 인식하기도 했다. 1910년 벨기에 참모본부가 창설되었으나, 육군 참모총장 해리 융블루트 중장은 1912년 6월 30일에 퇴역했고, 후임인 안토닌 드 셀리에 드 모란빌 중장이 임명된 것은 1914년 5월이었다. 모란빌은 즉시 육군 집결 계획을 수립하고 7월 29일 철도 관계자들과 회의를 가졌다.
최종적으로 벨기에 군대는 안트베르펜 국가 요새 앞에서 국가 중앙에 집결하여 모든 국경 상황에 대비하고, 리에주 요새와 나뮈르 요새는 국경 방어를 담당하기로 했다. 동원령이 내려지면 국왕이 총사령관으로서 군대 집결지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새로운 재무장 계획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조직과 훈련이 부족한 벨기에 징집병들은 중앙 집결을 통해 침략자와의 교전을 최대한 지연시키려 했다. 요새는 방어에 필수적이었지만 국경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일각에서는 프랑스의 공세 이론에 맞춰 군대를 국경에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최종 계획은 야전군을 헤트 강 뒤에 집결시키고 2개 사단을 리에주와 나뮈르에 전진 배치하는 타협안으로 결정되었다.
결국 1914년 8월 4일, 독일은 런던 조약 제7조를 위반하고 벨기에를 침공했으며, 이는 영국 정부가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정당화하는 주요 명분(casus belli|카수스 벨리la)이 되었다.
2. 2. 독일의 슐리펜 계획과 프랑스의 방어 계획
독일의 군사 전략은 1891년부터 프랑스에 대한 공세를 우선하고 러시아에 대해서는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이러한 계획은 독일이 가진 수적 열세, 동원과 병력 집중의 속도 문제, 그리고 현대 무기의 파괴력 증가라는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 수립되었다. 특히 프랑스와 러시아가 국경 요새를 현대화함에 따라, 정면 공격은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소모할 뿐 제한적인 성공만 거둘 것으로 예상되었다. 1891년부터 1906년까지 독일 제국 독일 대참모본부(Oberste Heeresleitung|오버스테 헤레스라이퉁de, OHL)의 참모총장이었던 알프레트 폰 슐리펜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프랑스 국경 요새를 북쪽 측면에서 우회하는 공세 계획, 즉 슐리펜 계획을 고안했다. 이 계획의 핵심은 특정 지점에서 국지적인 수적 우위를 확보하여 신속하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이었다. 1898년에서 1899년 사이에 구체화된 이 계획은 독일군이 안트베르펜과 나뮈르 사이를 빠르게 통과하여 북쪽에서 파리를 직접 위협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906년 슐리펜의 뒤를 이은 헬무트 폰 몰트케는 프랑스가 독일의 예상대로만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슐리펜 계획을 일부 수정했다. 그는 중앙 공격이나 양쪽 측면에서의 포위 공격 같은 다양한 변형을 가능하게 하도록 배치 및 집중 계획을 조정했다. 이를 위해 서부 전선군(Westheer|베스트헤어de)으로 동원될 약 1,700,000명의 병력 중 일부를 프랑스 국경의 좌익(남부) 측면에 추가로 배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력 독일군은 여전히 벨기에를 통과하여 남쪽으로 진격해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프랑스군 좌측을 포위하여 뫼즈강, 엔강, 솜강, 우아즈강, 마른강, 센강 너머로 후퇴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이 기본 골격이었다. 이를 통해 프랑스군을 섬멸하거나, 북쪽에서의 기동을 통해 중앙 또는 로렌 지역에서의 승리를 위한 유리한 조건을 만들고자 했다.
이처럼 서부 전선에 대한 집중은 필연적으로 동부 전선에서의 병력 부족을 야기했다. 따라서 동부에서는 기본적으로 방어 전략을 채택하여, 제8군이 동프로이센을 방어하는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갈리치아에서 공세를 펼쳐 러시아군의 주력을 동프로이센에서 분산시키기를 기대했다. 프랑스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에야 서부 전선의 독일군 사단들을 동쪽으로 이동시켜 러시아군을 상대할 계획이었다.
한편, 프랑스는 17호 작전(Plan XVII)으로 알려진 방어 및 반격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계획에 따라 프랑스 평시 육군은 5개의 야전군을 편성하고, 각 군에는 예비 사단 그룹을, 그리고 양쪽 측면에도 별도의 예비 사단 그룹을 배치하여 총 약 2,000,000명의 병력을 동원할 예정이었다. 이들 군대는 독일 국경 맞은편의 에피날, 낭시, 베르됭-메지에르 주변에 집결하고, 예비군은 생메네울과 코메르시 주변에 배치될 계획이었다. 1871년 이후 꾸준히 건설된 철도망 덕분에 프랑스는 독일 국경까지 16개의 노선을 확보하여 13개 노선만 가진 독일보다 병력 이동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이를 바탕으로 독일의 구체적인 공격 의도가 드러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지휘부는 독일군이 로렌이나 벨기에를 통해 공격할 가능성을 모두 염두에 두었다. 독일군이 예비 병력을 동원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러시아 국경에도 상당한 병력을 배치해야 하므로 서부 전선에서는 뫼즈강과 삼브르강 남쪽의 벨기에 지역을 통해서만 제한적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특히 1905년 독일 참모본부의 지도 연습 정보를 입수한 프랑스 정보부는 독일군이 나뮈르보다 더 북쪽으로 진격하지 않을 것이며, 벨기에 요새 포위 계획은 벨기에군에 대한 방어적 조치일 뿐이라고 잘못 판단하는 결정적인 오류를 범했다.
독일군이 벨기에 동남부를 거쳐 메지에르로 공격하거나, 로렌을 통해 베르됭, 낭시, 생디에로 공격할 가능성을 예상한 프랑스의 계획 17은 이전 계획 16에서 발전된 것으로, 독일의 벨기에 북부 침공 가능성에 대한 대비를 일부 강화했다. 제1, 제2, 제3군은 알자스-로렌 맞은편의 에피날과 베르됭 사이에, 제5군은 몽메디에서 스당과 메지에르까지 배치되었다. 제4군은 베르됭 서쪽에 대기하며, 벨기에를 통한 독일 침공군의 남쪽 측면이나 로렌을 통한 공격군의 북쪽 측면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영국 원정군(BEF)과의 연합 작전에 대한 공식적인 규정은 없었지만, 양국 참모부 간의 공동 협약이 존재했으며, 제2차 모로코 위기 당시 논의를 바탕으로 프랑스는 6개 영국 사단이 모뵈주 주변에서 작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2. 3. 전쟁 발발과 독일의 벨기에 침공

벨기에의 중립은 유럽 열강에 의해 1830년 런던 회의에서 확립되었고, 1839년 런던 조약을 통해 벨기에 혁명 이후 네덜란드 연합 왕국으로부터 벨기에의 독립과 중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1911년까지 벨기에는 전쟁 발발 시 독일이 프랑스-독일 국경을 넘어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벨기에 국경에서 프랑스군을 포위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독일의 전략과 유사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벨기에의 독립을 보장했지만, 1906년과 1911년 영국 무관이 앤트워프 상륙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벨기에는 영국이 벨기에 중립을 자국의 외교적, 군사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길 수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1911년 아가디르 위기는 벨기에 정부에게 유럽 전쟁 발발과 독일의 벨기에 침공 가능성을 더욱 확신하게 만들었다.
1911년 9월, 벨기에 정부는 회의를 통해 독일의 침공에 대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영국과 프랑스와의 공모 혐의를 피하기 위해 독자적인 방어 태세를 유지하고자 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역시 잠재적인 적대국으로 간주되었다. 1913년과 1914년, 독일은 베를린 주재 벨기에 무관에게 독일군의 벨기에 영토 통과 가능성을 문의했다. 벨기에는 침공 시 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특정 국가와 동맹을 맺거나 자국의 독립 유지 이상의 목표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중립 정책은 벨기에가 군사적 독립 전략을 채택하도록 이끌었고, 이는 1909년에 시작되어 1926년 완료 예정이었던 군비 재정비 계획의 기반이 되었다. 이 계획은 3개 군단을 창설하여 프랑스군에 대한 독일군의 수적 우위를 줄임으로써 독일의 침공을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09년 징병제가 도입되었으나 복무 기간은 15개월로 단축되었다. 아가디르 위기 이후 군비 증강은 계속되었지만, 1913년에 이르러서야 인구 대비 육군 규모가 고정되었다. 연간 13,300명이던 신병 징집 규모는 33,000명으로 증가하여 야전군 병력 180,000명을 위한 훈련된 인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고령 예비군은 주둔군으로 복무하며, 1926년까지 약 340,000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군비 계획의 시행은 기존 계획을 방해했고, 1914년에는 아직 완전히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한 위기 상황에서 연대들이 분할되고 8개 징집 기수가 군에 통합되어 야전군 117,000명과 요새 주둔군 200,000명을 확보했다. 벨기에군은 특정 위협에 대비해 국경에 군대를 집중시키는 대신, 내선 전략에 기반한 방어 계획을 세웠다. 방어의 핵심은 앤트워프의 국가 요새였고, 야전군은 국경에서 60km 떨어진 국가 중앙에 집결하여 침공 지연을 위한 기동전을 준비하는 한편, 국경 방어는 리에주와 나뮈르의 요새 지대에 의존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암살당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했다. 7월 5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대해 조치를 취할 경우 "독일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백지 수표). 7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다음 날인 7월 24일, 영국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 경은 전쟁 방지를 위한 회담을 제안했고, 벨기에 정부는 "결과에 상관없이" 중립을 수호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7월 25일, 세르비아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렸고, 7월 2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세르비아에 대한 부분 동원령을 발령했다. 7월 27일, 프랑스와 이탈리아 정부는 영국의 회담 제안을 수락했지만, 다음 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고 독일 정부는 영국의 회담 제안을 거부했다. 7월 29일, 러시아 정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부분 동원령을 내렸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 간의 적대 행위가 시작되었다. 독일 정부는 영국의 중립을 확보하기 위한 제안을 했으나, 영국 해군성은 함대에 '경고 전보'를 보냈고 육군성은 '예방 기간'을 명령했다. 7월 30일, 영국 정부는 영국의 중립에 대한 독일의 제안을 거부했고, 다음 날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7월 31일에서 8월 1일로 넘어가는 자정, 독일 정부는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낮 동안 '전쟁 위험 상태'(Kriegsgefahr|크릭스게파르de)를 선포했다. 오스만 제국 정부는 동원령을 내렸고 런던 증권 거래소는 폐쇄되었다. 8월 1일, 영국 정부는 해군 동원령을 내렸고, 독일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리고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폴란드 국경에서 적대 행위가 시작되었고, 프랑스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다음 날인 8월 2일, 독일 정부는 벨기에 영토 통과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벨기에에 보냈고, 독일군은 룩셈부르크 국경을 넘었다. 프랑스 국경에서도 군사 작전이 시작되었으며, 독일 순양함 아우크스부르크는 러시아의 리바우 항구를 폭격했다. 영국 정부는 프랑스 해안에 대한 해군 보호를 보장했다. 8월 3일, 벨기에 정부는 독일의 최후통첩을 거부했고, 영국 정부는 독일군이 침공할 경우 벨기에에 군사 지원을 약속했다. 독일은 프랑스에 선전포고했고, 영국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렸으며, 이탈리아는 중립을 선언했다. 8월 4일, 영국 정부는 독일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중앙 유럽 표준시 기준 8월 4일에서 5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벨기에는 독일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고, 독일은 벨기에에 선전포고했다. 독일군은 벨기에 국경을 넘어 리에주를 공격하며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했다. 독일의 벨기에 침공은 1839년 런던 조약 제7조를 명백히 위반한 행위였으며, 이는 영국 정부가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의 주요 명분(casus belli|카수스 벨리la)으로 제시한 이유였다.
3. 벨기에 전역의 주요 전투
1914년 8월 독일의 벨기에 침공 이후, 벨기에 영토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서부 전선의 향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여러 주요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들은 벨기에군의 예상 밖의 완강한 저항과 연합군의 개입, 그리고 독일군의 초기 공세와 그에 따른 전선 변화를 보여준다.
독일의 침공은 리에주 전투(8월 5일~16일)로 시작되었다. 리에주 요새의 벨기에 수비대는 독일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11일간의 저항으로 독일의 프랑스 침공 계획을 지연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후 할렌 전투(8월 12일)에서는 벨기에 기병대가 독일 기병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며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나뮈르 공방전(8월 20일~24일)에서 중포를 동원하여 나뮈르 요새를 함락시켰다.
같은 시기 남쪽에서는 국경 전투의 일환으로 샤를루아 전투(8월 21일~23일)와 몽스 전투(8월 23일)가 벌어졌다. 샤를루아에서 프랑스 제5군은 독일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했고, 몽스에서는 영국 원정군(BEF)이 독일 제1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프랑스군의 후퇴로 인해 함께 철수해야 했다.
독일군의 진격이 계속되면서 앤트워프 공방전(9월 28일~10월 10일)이 벌어졌다. 벨기에의 '국가 요새'였던 앤트워프는 결국 함락되었지만, 벨기에 야전군 주력은 영국 해군 사단의 일부와 함께 서쪽 해안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양측은 상대의 북쪽 측면을 포위하기 위해 병력을 이동시키는 이른바 '바다로의 경주'(9월 17일~10월 19일)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의 조우전이 발생했으나 결정적인 승패 없이 북해 해안까지 전선이 형성되었다.
앤트워프에서 철수한 벨기에군은 이세르 강 방어선에 합류하여 이세르 전투(10월 16일~11월 2일)에 참여했다. 벨기에군은 수적 열세와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저항했으며, 특히 뇌포르트의 수문을 개방하여 저지대를 침수시키는 결정으로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마지막으로 제1차 이프르 전투(10월 19일~11월 22일)는 '바다로의 경주'의 종착점이자 서부 전선 참호전의 시작을 알리는 격전이었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 연합군은 이프르 돌출부에서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냈으나,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 이후 서부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3. 1. 리에주 전투 (1914년 8월 5일 ~ 16일)

리에주 전투는 독일의 벨기에 침공 과정에서 벌어진 주요 교전이자 제1차 세계 대전의 첫 번째 전투였다. 1914년 8월 5일에 시작되어 마지막 요새가 항복한 8월 16일까지 이어졌다. 독일의 침공은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리에주 요새의 저항은 독일의 프랑스 침공 계획을 4~5일 정도 지연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독일군이 동부 벨기에에서 필요로 했던 철도는 포위 공격 초기에 사용 불가능하게 되었다. 8월 17일 아침이 되어서야 독일 제1, 제2, 제3군은 프랑스 국경을 향한 진격을 재개할 수 있었으나, 독일군 주력은 8월 20일에 이르러서야 나뮈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벨기에 야전군은 8월 18~20일 사이에 게테 강(Grote Gete)에서 안트베르펜으로 후퇴했고, 브뤼셀은 8월 20일에 저항 없이 함락되었다. 리에주 포위 공격은 독일이 예상했던 2일보다 훨씬 긴 11일 동안 지속되었다.
벨기에 동부에서의 저항은 독일의 작전 계획을 지연시켰으며,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이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에 있던 프랑스-영국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반면, 볼프강 푀르스터(Wolfgang Förster)는 독일군이 동원 개시 22일째인 8월 23일까지 티옹빌-스당-몽스 선에 도달하는 배치 시간표를 예정보다 일찍 달성했다고 주장했다. 벨기에의 군사 간행물인 Bulletin Belge des Sciences Militairesfra에서는 4일의 지연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존 버컨(John Buchan)은 리에주 전투의 의미를 "도덕적 승리"로 평가하며, "국가와 의무에 대한 신념이 여전히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그리고 화려해 보이는 독일 제국 역시 약점을 가지고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고 기술했다. 2007년 로버트 폴리(Robert T. Foley)는 리에주에서의 벨기에군 저항이 격렬했지만, 독일군 우익(right wing)이 통과하는 데는 충분히 무력화되었으며, 독일군이 2주 만에 동원을 완료하고 8월 20일까지 프랑스 침공 준비를 마쳤다는 점에서 리에주 전투는 독일에게 '작은 난관'에 불과했다고 분석했다.
3. 2. 할렌 전투 (1914년 8월 12일)

할렌 전투는 1914년 8월 12일, 게오르그 폰 데어 마르비츠가 이끄는 독일군과 레옹 드 비테 장군이 이끄는 벨기에군 사이에서 기병 및 하차한 부대, 기타 부대에 의해 벌어졌다. 벨기에 기병 사단은 하셀트와 디스트를 향한 독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드 비테 장군의 지휘 아래 할렌의 게테강 다리를 지키라는 임무를 받았다. 벨기에 참모진은 저녁 회의에서 독일군의 수적 우위를 상쇄하고자 드 비테에게 병력을 말에서 내리게 하여 싸우도록 지시했다. 벨기에 본부는 통신 도청을 통해 독일군이 대규모로 드 비테 부대를 향해 진격 중임을 파악하고, 기병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제4 보병 여단을 파견했다.
전투는 오전 8시경, 헤르크데스타트에서 진격해 온 독일 정찰대가 벨기에군의 소화기 사격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약 200명의 벨기에 병사들이 할렌의 오래된 양조장에 진지를 구축하려 했으나, 독일군이 야포를 동원하자 건물에서 철수해야 했다.
벨기에 공병대가 게테강 다리를 폭파하려 했지만, 다리는 부분적으로만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독일군은 약 1,000명의 병력을 할렌 중심부로 투입할 수 있었다. 벨기에의 주요 방어선은 할렌 서쪽에 위치했는데, 이 지형은 독일군이 내려다볼 수 있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렌을 비교적 쉽게 점령한 독일군은 자신감을 얻어 사브르와 창을 이용한 기병 돌격으로 벨기에 진지를 점령하려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날이 저물자 독일군은 할렌 동쪽의 주력 부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는 벨기에군에게 전술적 승리였지만, 전략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독일군은 이후 나뮈르, 리에주, 앤트워프의 요새 도시들을 포위했다. 이 도시들은 런던 조약에 따라 외국 군대가 개입할 때까지 침략자를 지연시키기 위한 벨기에 방어 체계의 핵심이었다. 독일군은 150명 사망, 600명 부상, 200~300명 포로 및 약 400마리의 말을 잃는 피해를 입었다. 벨기에군의 사상자는 160명 사망, 320명 부상이었다.
3. 3. 나뮈르 공방전 (1914년 8월 20일 ~ 24일)

나뮈르는 현대적인 요새 시설인 '나뮈르 요새'(position fortifiée de Namur|포지시옹 포르티피에 드 나뮈르프랑스어)로 둘러싸여 있었고, 벨기에 육군 제4사단이 방어를 맡고 있었다. 8월 20일 공방전이 시작되자, 독일군은 리에주 공방전 때와는 다른 전술을 사용했다. 리에주에서 공성 무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보병 공격에 앞서 요새에 대한 포격을 먼저 실시했다.
나뮈르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프랑스군은 샤를루아 전투에서 패배하여 소수의 병력만이 나뮈르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독일군의 포격으로 요새는 심하게 파괴되었다. 벨기에 제4사단 대부분은 남쪽으로 철수했고, 요새에 남은 벨기에군은 8월 24일 항복했다. 벨기에군의 저항은 독일군의 진격을 예상보다 며칠 지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고, 이는 벨기에와 프랑스가 병력을 동원할 시간을 버는 데 기여했다.
벨기에군은 이 전투에서 약 15,000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그중 약 10,000명이 제4사단 소속이었다. 제4사단은 8월 27일 프랑스의 르아브르로 이동했고, 이후 배를 타고 벨기에의 오스텐데로 옮겨가 안트베르펜의 야전군에 합류했다. 독일의 공식 전사(戰史) 기록인 Der Weltkrieg|데어 벨트크리크de에 따르면, 독일군은 벨기에군과 프랑스군 포로 6,700명과 야포 12문을 노획했으며, 독일군 사상자는 900명(이 중 약 300명은 전사)이었다고 한다.
3. 4. 샤를루아 전투와 몽스 전투 (1914년 8월 21일 ~ 23일)

샤를루아 전투는 1914년 8월 21일, 프랑스군과 독일군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국경 전투의 일부였다. 프랑스군은 삼브 강을 건너 공격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독일군이 먼저 공격을 시작하면서 프랑스 제5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후퇴로 인해 독일군은 프랑스군을 포위하여 섬멸하려던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 생캉탱 전투에서 또 다른 방어전을 치른 후, 프랑스군은 파리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까지 밀려났다.
영국군은 프랑스 제5군의 좌익에서 몽스-콩데 운하 방어선을 지키려 했고, 이 과정에서 독일 제1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일부 부대가 큰 손실을 입고, 우익의 프랑스 제5군이 샤를루아 동쪽에서 벌어진 전투의 여파로 후퇴하면서 영국군도 후퇴하게 되었다. 몬스 전투에서 양측 모두 전술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받는다. 영국군은 독일 제1군을 48시간 동안 막아냈고, 프랑스 제5군이 측면을 공격당하는 것을 막은 후 질서정연하게 후퇴했다. 독일에게는 이 전투가 전술적으로는 손실이 컸지만, 전략적으로는 몽스-콩데 운하를 건너 프랑스로 진격을 시작할 수 있게 한 성공이었다.
3. 5. 앤트워프 공방전 (1914년 9월 28일 ~ 10월 10일)

앤트워프 요새 도시에서 독일군은 벨기에 요새 병력, 벨기에 야전군, 영국 해군 사단으로 구성된 수비대를 포위했다. 이 도시는 국가 요새로 알려진 요새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9월 28일부터 독일군은 도시의 남쪽과 동쪽에서 중포 및 초대형 포병을 동원하여 벨기에 요새에 대한 포격을 시작했다. 벨기에 수비대는 외부의 구원 없이는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했다. 10월 3일 영국 해군 사단이 도착하여 지원했지만, 독일군은 결국 요새의 외곽 방어선을 돌파했다.
독일군의 진격으로 벨기에군이 점령되지 않은 벨기에의 나머지 지역과 연락을 유지하던 통로(도시 서쪽에서 네덜란드 국경을 따라 해안까지 이어지는 길)가 점점 좁혀졌다. 결국 벨기에 야전군은 이 통로를 통해 해안 쪽으로 서서히 철수하기 시작했다.
10월 9일, 남은 수비대는 항복했고 독일군은 도시를 점령했다. 일부 영국군과 벨기에 군대는 북쪽 네덜란드로 탈출하여 전쟁 기간 동안 억류되었다. 독일군은 앤트워프에서 많은 양의 탄약과 2,500문의 대포를 거의 손상 없이 확보했다. 살아남은 벨기에 야전군 병력 약 80,000명은 대부분 영국 해군 사단과 함께 서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은 사망 57명, 부상 138명, 억류 1,479명 및 포로 936명의 사상자를 냈다.
앤트워프를 구출하려는 연합군의 작전은 실패했지만, 이 공방전은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이후 이프르와 해안 지역에서의 작전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오스텐드와 제브뤼허는 별다른 저항 없이 독일군에게 점령되었다. 앤트워프에서 철수한 병력은 이세르 강 방어선에 합류하여 이세르 전투에 참전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군이 연합군의 북쪽 측면을 돌파하려던 마지막 시도를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
3. 6. 바다로의 경주 (1914년 9월 17일 ~ 10월 19일)

바다로의 경주는 국경 전투 (8월 7일 – 9월 13일) 이후, 독일군이 프랑스로 진격했으나 마른 전투 (9월 5일–12일)에서 저지되고 엔 전투 (9월 13일 – 9월 28일)가 이어진 뒤, 대략 1914년 9월 17일부터 10월 19일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작전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프랑스-영국군과 독일군이 북쪽으로 바다를 향해 진격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피카르디, 아르투아 및 플랑드르를 통해 상대 군대의 북쪽 측면을 포위하려는 상호 간의 시도를 설명한다. 양측은 상대방의 측면 기동을 막기 위해 프랑스-독일 국경에서 서쪽 측면으로 병력을 이동시킨 후, 상대방의 측면 기동에 대응했다. 9월 말 피카르디 전투와 알베르 전투에서 프랑스 제2군과 독일 제6군은 우아즈 강에서 솜 강까지 교전을 벌였지만, 어느 쪽도 상대방의 북쪽 측면을 포위할 수 없었다.
프랑스군과 독일군은 북쪽으로 추가적인 측면 기동을 위해 동쪽에서 병력을 이동했고, 영국 해외 원정군(BEF)은 10월 1일–2일 밤에 엔 전선에서 위장 이동을 했으며, 낮에는 움직임이 없어 악천후로 인해 항공기가 착륙하면서 독일군을 속였다. 10월 8일–9일, BEF는 독일 북쪽 측면 주변에서 플랑드르의 벨기에 및 연합군을 향한 공세를 시작하기 위해 아베빌 주변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서로를 포위하려는 프랑스와 독일의 노력은 10월 초 아라스 전투와 라 바세 전투, 아르망티에르 전투 및 메시네스 전투에서 좌절되었다. "경주"는 10월 19일경 벨기에 북해 해안에서 끝났는데, 이는 디스뮈드에서 북해까지의 마지막 개방된 지역이 안트베르펜 포위전 (9월 28일 – 10월 10일)에서 철수한 벨기에군에 의해 점령되었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라 바세에서 파스샹달까지의 전선을, 프랑스군은 파스샹달에서 디스뮈드까지, 벨기에군은 디스뮈드에서 뉴포르트까지 전선을 유지했다. 측면 기동 시도는 여러 차례의 조우전을 초래했지만, 어느 쪽도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3. 7. 이세르 전투 (1914년 10월 16일 ~ 11월 2일)

이세르 전투는 1914년 10월 벨기에의 이세르 강과 이페르리 운하를 따라 약 35km 길이의 전선에서 벌어졌다. 10월 15일경 약 50,000명의 벨기에군은 앤트워프에서의 철수를 완료하고, 뇌포르트와 프랑스 해병이 방어하던 디크스뮤데 사이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서부 전선에서 벌어진 기동전의 마지막 단계인 이른바 '바다로의 질주'가 종결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양측 모두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10월 초 독일 제10군과 영국 원정군(BEF)의 릴 방면 공격이 저지되자, 더 많은 프랑스군 부대가 북쪽으로 이동하여 빅토르 뒤르발 장군의 지휘 아래 Détachement d'Armée de Belgique|벨기에 육군 파견대fra를 구성했다. 한편, 독일군 총참모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앤트워프 함락 이후 가용했던 제3 예비군단과 더불어, 8월에 독일에서 급히 동원되어 훈련, 무장, 장비 및 지휘 체계가 미흡했던 4개의 신규 예비군단을 모아 새로운 제4군을 창설했다. 제4군은 생 오메르를 목표로 해안선을 따라 공세를 개시했으며, 이는 벨기에군을 이세르 강 너머로 몰아내기 위한 작전의 시작이었다.
10월 16일,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는 후퇴하는 병사를 사살하고 명령을 회피하는 장교를 군사 재판에 회부하라고 명령할 정도로 전선 상황은 매우 절박했다. 벨기에군은 극도로 지쳐 있었으며, 지표면에 물이 차올라 참호는 고작 약 0.30m에서 약 0.61m 깊이로 팔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야전 포병은 포탄 부족에 시달렸고, 포신의 마모도 심각한 상태였다. 10월 18일,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10월 22일까지 테르베르테에서 이세르 강을 도하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0월 23일 말에는 벨기에군이 강둑에서 밀려났으며, 다음 날 독일군은 폭 5km에 달하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프랑스 제42사단이 디크스뮤데에서 뇌포르트까지 해수면보다 1m에서 2m 높은 철도 제방으로 후퇴한 벨기에군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10월 26일, 벨기에군의 전황은 추가 후퇴를 검토해야 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알베르 1세 국왕은 후퇴를 거부하고, 10월 27일 뇌포르트의 수문을 개방하여 해안 저지대를 침수시키기 시작했다. 이 과감한 결정은 독일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0월 30일, 독일군이 람스카펠레의 제방을 돌파했으나, 10월 31일 야간에 감행된 벨기에-프랑스 연합군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11월 2일, 디크스뮤데가 결국 독일군에게 함락되었지만, 광범위한 침수 지역으로 인해 독일군의 추가적인 공세는 중단되었다.
3. 8. 제1차 이프르 전투 (1914년 10월 19일 ~ 11월 22일)

제1차 이프르 전투는 제1차 플랑드르 전투의 일부로, 1914년 10월 19일 독일 제6군과 독일 제4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맞서 영국 원정군(BEF)은 메닌과 룰레르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10월 21일, 독일 제4군 예비 군단의 공격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다. 10월 23일에서 24일 사이에는 독일군이 북쪽의 이세르에서는 제4군에 의해, 남쪽에서는 제6군에 의해 공세를 펼쳤다. 프랑스 신 제8군은 룰레르와 투루를 향해 공격하여 독일군을 영국군과 벨기에군 진지에서 떼어내는 데 기여했다. 독일 제4군과 제6군이 연합군을 묶어두는 동안, 독일은 새로운 공격을 계획했다. 6개 신규 사단과 250문 이상의 중포로 구성된 새로운 부대인 Armeegruppe von Fabeck|아르미그루페 폰 파베크de가 두 독일군의 경계 지역을 맡아 메신과 겔루벨트 사이의 북서쪽을 공격하기로 했다.
영국 제1군단은 메닌 도로를 따라 참호를 구축했으며, 남쪽에는 하차한 영국 기병대가 방어선을 형성했다. 독일군은 10월 29일 메닌 도로에서 일부 지역을 점령했고, 다음 날에는 잔드포르데와 홀레베케에서 영국 기병대를 이프르에서 3km 떨어진 지점까지 후퇴시켰다. 이세르 강 주변의 범람으로 이세르 전선에서 여유가 생긴 프랑스 대대가 세 개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원에 나섰다. 10월 31일, 겔루벨트에 대한 영국의 방어가 붕괴될 위기에 처했지만, 프랑스 한 대대가 반격을 가해 독일군을 교차로에서 몰아냈다. 메닌 도로 남쪽에서 독일군의 공격으로 작은 지역이 점령되었으나, 메신 능선은 영국 수비대에 의해 굳건히 지켜져 함락되지 않았다. 11월 1일까지 영국 원정군은 극심한 소모 상태에 이르렀다. 84개의 보병 대대 중 75개 대대가 정원의 1/3에도 못 미치는 300명 미만의 병력만 남게 되었다.
프랑스 제14군단은 프랑스 제10군으로부터 북쪽으로 이동했고, 프랑스 제9군단은 베셀레를 향해 남쪽으로 공격하여 영국군 양쪽 측면에 가해지던 압력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독일군의 공격은 11월 3일에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이때까지 Armeegruppe von Fabeck|아르미그루페 폰 파베크de는 17,250명의 사상자를 냈다. 프랑스군은 11월 6일 랑게마르크와 메신을 향해 이프르 돌출부를 넓히기 위한 공세를 계획했지만, 독일군은 11월 5일 같은 지역에서 다시 공격을 시작하여 11월 8일까지, 그리고 11월 10일부터 11일까지 공세를 이어갔다. 11월 10일의 주 공격은 제4군이 랑게마르크와 디크스뮈데 사이에서 감행했으며, 이 공격으로 프랑스-벨기에 수비대가 디크스뮈데를 상실했다. 다음 날 남쪽에서는 영국군이 메신과 폴리곤 숲 사이에서 전례 없는 포격을 받았고, 이후 프로이센 근위대가 메닌 도로를 따라 영국군 진지로 돌파를 시도했으나, 영국군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10월 중순부터 11월 초까지 독일 제4군은 52,000명, 제6군은 28,000명의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4. 독일의 벨기에 점령과 잔혹 행위
독일군은 과거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프랑-티뢰르에게 입었던 피해 경험과 벨기에의 중립국 지위에도 불구하고, 침공 과정에서 민간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의도적인 공포 정책, 즉 Schrecklichkeit|슈레클리히카이트de를 시행했다. 이는 1907년 헤이그 평화 회의에서 보장된 중립국 보호 조약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었다. 이 정책 하에 독일군은 벨기에 전역에서 민간인 학살, 방화, 약탈 등 광범위한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이러한 전쟁 범죄는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벨기에 강간'이라는 용어로 알려지며 독일 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벨기에 민간 무장 조직의 활동이 독일군의 과잉 대응을 유발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독일군의 행위는 조직적인 전쟁 범죄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잔혹 행위를 동반한 점령 과정 끝에 벨기에 대부분 지역은 독일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4. 1. 벨기에 강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70–1871) 당시 나폴레옹 3세의 제국군이 패배한 후, 프랑스 국민 방위 정부는 58,000명의 비정규 부대원인 프랑-티뢰르(프리 슈터)를 창설했다. 이들은 1,000명의 독일군을 사살했으며, 독일군은 이들 때문에 통신선 경비에 120,000명의 병력을 차출해야 했다.벨기에는 1907년 헤이그 평화 회의 제5조약에 따라 중립국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독일 역시 이 조약에 서명했다. 벨기에 정부는 자국 영토를 통한 교전국의 병력이나 물자 이동을 금지했으며, 제5조는 중립국이 이를 막도록 요구했고 제10조는 중립국의 저항이 적대 행위로 간주될 수 없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벨기에의 저항과 독일군이 프랑-티뢰르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독일군은 침공 기간 동안 벨기에 민간인에 대해 Schrecklichkeit|슈레클리히카이트de(공포)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는 민간인을 신속하게 공포에 질리게 하여 저항 의지를 꺾고, 군대의 진격을 방해받지 않으며 통신선 경비 병력을 최소화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정책의 결과로 대량 학살, 처형, 인질 억류, 마을 방화 등 잔혹 행위가 자행되었으며, 이는 벨기에 강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8월 4일 밤 에르베에서 총격전이 벌어진 후, 며칠 뒤 독일 기자는 500채의 집 중 단 19채만 남아있다고 썼다. 프랑-티뢰르 전쟁 혐의가 독일에 신속하게 전달된 것은 조작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켰는데, 신문들이 8월 5일부터 독일 병사에 대한 잔혹 행위를 보도했기 때문이다. 8월 8일, 독일-벨기에 국경으로 진군하는 군인들은 벨기에 민간인들이 약탈, 독일군 매복, 시체 훼손, 우물 독극물 살포 등의 끔찍한 세부 사항을 담은 신문을 구입했다.
지연을 피하고 통신선을 경비하기 위한 주둔군 차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독일군은 Schrecklichkeit|슈레클리히카이트de(공포)에 의존하여 민간인을 신속하게 공포에 떨게 하여 항복시켰다. 어떤 경우에는 최전선 부대가 격렬한 순간에 잔혹 행위를 저질렀고, 다른 범죄는 전투가 끝난 며칠 후에 냉혈하게 발생했다.
- 앙덴: 8월 20일, 나뮈르 근처의 앙덴 마을이 불탔다. 독일 선언문은 110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고 주장했으며, 벨기에 측은 211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 세이유: 50명이 사망했다.
- 타민: 384명의 민간인이 총에 맞아 죽었다.
- 비제: 네덜란드 민간인들은 8월 23일 밤, 국경 너머 비제에서 총격을 들었고, 다음 날 아침 4,000명의 난민이 국경을 넘어와 살인과 700명의 남성과 소년들이 독일로 강제 노역을 위해 납치된 사실을 묘사했다.
- 나뮈르: 모든 거리에서 10명의 인질이 잡혔고, 다른 곳에서는 모든 집에서 1명씩 잡혔다.
- 디낭: 8월 22일 프랑스군이 후퇴하여 다리를 폭파했다. 다리 복구를 방해하는 민간인들이 독일군에게 목격되었다고 제3군 사령관 막스 폰 하우젠 장군이 주장했다. 수백 명의 인질이 잡혀 그날 저녁 마을 광장에 줄지어 세워진 후 총에 맞아 612명의 남성, 여성, 어린이가 살해되었고, 이후 마을 중심부가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 혼과 크레이머는 670명의 민간인이 마을에서 살해되었다고 추산했다.
- 루벤 (뢰번): 제1군은 8월 19일 루벤을 통과했고, 제9예비군단이 뒤따랐다. 8월 25일, 안트베르펜에서 벨기에군의 기습 공격으로 독일군 전초 기지가 격퇴되었고, 전선 후방에 혼란이 발생했다. 말 한 마리가 밤에 루벤에 들어와 소동을 일으켰고, 독일 초병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브뤼셀 군정 총독 폰 루트비츠 장군은 보복을 명령했다. 독일군의 방화와 총격은 5일 동안 계속되었고, 그동안 248명의 주민이 살해되었고, 살아남은 10,000명의 주민이 추방되었으며, 2,000채가 넘는 건물이 불탔다. 루벤 가톨릭 대학교에서는 300,000권의 중세 서적과 필사본이 소장된 역사적인 도서관이 파괴되었다. 대량의 전략 물자, 식량, 현대 산업 장비가 약탈되어 독일로 이전되었다.
8월 5일부터 10월 21일까지 독일군은 벨기에 동부와 중부 전역에서 집을 불태우고 민간인을 살해했다. 아르쇼트 (156명 사망), 메헬렌, 덴데르몬데, 그리고 리에주 주의 베르노에서 서플랜더스 주 에선까지 범죄가 발생했다.
2007년, 테렌스 주버는 슈미츠와 니울랜드(1924), 혼과 크레이머(2001) 및 주커먼(2004)의 독일의 잔혹 행위에 대한 글을 ''변명''이라고 불렀다. 그는 8월 5일에 벨기에 정부가 100,000명의 민간인을 "비활성 Garde Civique|가르드 시비크프랑스어"로 무장시켰으며, 이들은 46,000명의 현역 Garde Civique|가르드 시비크프랑스어 구성원에 합류했다고 썼다. 주버는 비활성 구성원들은 훈련을 받지 않았고, 제복을 입지 않았으며, 현역 구성원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록이 없으므로 Garde Civique|가르드 시비크프랑스어가 훈련을 받았고, 장교와 지휘 체계가 있었다는 증거가 없으며, 기껏해야 게릴라 부대였다고 썼다. 주버는 8월 18일에 벨기에 정부가 Garde Civique|가르드 시비크프랑스어를 해산했지만, 혼과 크레이머는 146,000정의 총기 처리를 설명하지 못했고, 전 Garde Civique|가르드 시비크프랑스어 구성원이 독일 군인에게 총을 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고 썼다. 주버는 민간인이 벨르퐁텐에서 독일 장교를 살해했다는 민간 전승을 인용했으며, 독일인들이 프랑-티뢰르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벨기에 민간인을 사살했고, "프랑-티뢰르프랑스어 공격"이 발생했으며, 둘 다 전쟁 범죄라고 썼다. 주버는 또한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역이나 프랑스 내륙에는 프랑-티뢰르 공격이 발생하지 않아 독일의 보복이 없었다고 썼다.
4. 2. 독일의 점령 정책

1914년 11월까지 프랑스와 독일의 공세 전략은 실패했고, 벨기에 대부분은 독일의 점령 하에 놓였으며 연합군의 봉쇄를 받았다. 독일 벨기에 총독부(Kaiserliches Deutsches Generalgouvernement Belgiende)는 1914년 8월 26일 야전 원수 콜마어 자유 남작 폰 데어 골츠를 군정 장관으로 임명하여 설립되었다. 골츠는 1914년 11월 27일 모리츠 폰 비싱 장군으로 교체되었다.
비싱이 임명된 직후 독일 최고사령부(OHL)는 벨기에를 세 구역으로 나누었다. 가장 큰 구역은 브뤼셀과 그 배후지를 포함하는 일반 총독부였다. 두 번째 구역은 제4군 관할 하에 있었으며 겐트와 앤트워프를 포함했다. 세 번째 구역은 Kaiserliche Marinede(독일 해군) 관할 하에 벨기에 해안을 포함했다. 독일 점령 당국은 소수의 독일 장교와 관리들의 감독 하에, 전쟁 전 벨기에 행정 시스템을 통해 벨기에를 통치했다.
5. 전쟁의 결과와 영향
1914년 11월에 이르러 프랑스와 독일 양측의 공세 전략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벨기에 영토 대부분은 독일군의 점령 하에 놓였고, 연합군의 해상 봉쇄를 받게 되었다. 독일은 점령한 벨기에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1914년 8월 26일 벨기에 총독부( Kaiserliches Deutsches Generalgouvernement Belgiende )를 설립하고, 야전 원수 콜마어 자유 남작 폰 데어 골츠를 초대 군정 장관으로 임명했다. 골츠는 이후 1914년 11월 27일 모리츠 폰 비싱 장군으로 교체되었다. 비싱이 임명된 직후, 독일 최고사령부(OHL)는 벨기에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했다. 가장 넓은 구역은 브뤼셀과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하는 일반 총독부였고, 두 번째 구역은 제4군 관할 하에 겐트와 앤트워프를 포함했다. 세 번째 구역은 Kaiserliche Marinede(독일 해군)의 관할 아래 벨기에 해안 지역을 포함했다. 독일 점령 당국은 소수의 독일 장교와 관리들의 감독 아래 기존 벨기에 행정 시스템을 이용하여 통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독일군은 벨기에를 발판 삼아 프랑스 북부를 침공했으나, 이는 샤를루아와 몽스에서 프랑스-영국 연합군의 패배로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른 강 전투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저지되면서 급격한 후퇴를 야기했다. 이후 양측은 서로의 북쪽 측면을 포위하려 시도하며 주력 부대를 다시 북쪽으로 이동시켰다(바다로의 경주). 이 과정에서 독일군 주력 부대의 일부는 벨기에, 영국, 프랑스군을 상대로 포위 공격과 소규모 교전을 벌였다. 앤트워프 포위 공격은 서부 전선에서의 작전이 재개되면서 끝났고, 이후 이세르 강과 이프르에서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결정적인 승패는 가리지 못했다. 독일군 총참모장 팔켄하인은 10월 공세 실패 후에도 이프르와 켐멜 언덕 점령을 목표로 제한적인 성공이라도 거두려 했지만, 이마저도 제4군과 제6군의 능력 부족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결국 11월 10일, 팔켄하인은 카이저에게 서부 전선에서는 더 이상 큰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고했다. 독일군은 지쳐 있었고 중포 포탄도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Westheerde(서부군)은 점령지에 참호를 파고 방어 태세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일부 병력은 상황이 악화되던 동부 전선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는 길고 지루한 참호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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