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리펜 계획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슐리펜 계획은 1905년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구상한, 독일이 프랑스와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전략이다. 이 계획은 러시아의 동원 속도가 느리다는 점을 활용, 프랑스를 먼저 신속하게 격파한 후 러시아를 상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독일군 대부분을 서부에 집결시키고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통과하는 북쪽 공세를 통해 프랑스를 포위, 6주 안에 항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수정된 슐리펜 계획은 벨기에의 저항, 러시아의 빠른 동원, 독일군의 보급 문제 등으로 인해 실패했다. 슐리펜 계획은 군사적 효율성만을 추구하고 정치적, 외교적 고려를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현대에도 슐리펜 계획의 존재 여부와 그 내용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독일-러시아 관계 - 재보장 조약
재보장 조약은 1887년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에 체결된 비밀 조약으로, 삼황동맹 해체 후 독일이 러시아와 맺은 일시적인 협약이며, 독일이 조약 갱신을 거부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독일-러시아 관계 - 노르트스트림
노르트스트림은 러시아에서 독일로 연결되는 발트해 해저 천연가스 파이프라인망으로, 건설 과정에서 정치적 논란과 제재를 겪었으며,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가동 중단 및 파이프라인 손괴로 복구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 벨기에가 참가한 군사 작전 - 2011년 리비아 군사 개입
2011년 리비아 군사 개입은 카다피 정권의 시위대 탄압에 대한 국제적 우려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시작된 다국적 군사 작전으로, 민간인 보호 명분 아래 비행금지구역 설정 및 무기 금수 조치가 이루어졌으나, 개입의 정당성 논란과 리비아 내전 심화 등 후폭풍을 야기했다. - 벨기에가 참가한 군사 작전 - 통합임무부대
통합임무부대(UNITAF)는 소말리아 내전으로 인한 인도적 위기 해결을 위해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에 따라 결성된 다국적 군사 조직으로, 인도주의적 구호 물자 수송 및 무장 세력 간 갈등 억제를 수행했으나, 정치적 상황과 부족 간 갈등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한계를 드러내 유엔 소말리아 II차 작전으로 임무가 전환되었다. - 7월 위기 - 백지수표
백지수표는 발행인이 금액을 기입하지 않고 서명한 수표로, 권한 없는 금액 기입은 변경으로 간주되며, 비유적으로는 구체적인 계획 없는 회사나 무제한의 지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 7월 위기 - 독일의 벨기에 침공
독일의 벨기에 침공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이 슐리펜 계획에 따라 프랑스 침공을 위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한 사건이며, 벨기에의 저항과 전쟁 범죄로 인해 영국의 참전을 유발하고 서부 전선의 교착 상태를 초래했다.
슐리펜 계획 - [전쟁]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계획 명칭 | 슐리펜 계획 |
계획 주도자 | 알프레트 폰 슐리펜 |
계획 수정자 | 헬무트 폰 몰트케 (소) |
계획 시기 | 1905년-1906년, 1906년-1914년 |
목표 | 논쟁의 여지 있음 |
실행일 | 1914년 8월 7일 |
실행자 | 몰트케 |
결과 | 여파 참고 |
사상자 | 약 305,000명 |
군사 작전 | |
작전 목표 | 프랑스에 대한 공세 전략 |
배경 | |
계획 배경 | 19세기 말, 20세기 초 독일 제국이 프랑스와 러시아에 동시에 대항해야 하는 상황에서, 슐리펜이 단기결전 목표로 고안한 계획 |
전쟁 가정 |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과 동시에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 |
핵심 전술 | 프랑스군을 기습하여 단기간에 격파하고, 러시아군이 동원되기 전에 서부전선을 정리하는 것 |
작전 목표 상세 | 프랑스군 주력을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우회하여 포위 섬멸 |
우회 경로 | 독일 우익의 주력이 벨기에를 통과하여 파리 서쪽으로 진격 |
좌익 배치 | 독일 좌익은 알자스-로렌에서 방어적인 역할 담당 |
수정 및 실행 | |
몰트케의 수정 | 슐리펜 사후 헬무트 폰 몰트케 (소)가 계획을 수정 |
수정 내용 | 우익 부대의 병력 감축 및 좌익 부대 강화 |
실행 시기 | 1914년 8월 7일 |
실행 결과 | 계획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실패 |
전투와 전개 | |
국경 전투 | 1914년 국경 전투 (프랑스 및 벨기에와의 전투) |
주요 전투 | 뮐루즈 할렌 로렌 디낭 아르덴 로시뇰 샤를루아 몽스 트루에 드 샤름 그랑 쿠로네 |
여파 | |
계획 실패 | 독일군의 계획은 실패로 끝남 |
서부 전선 | 제1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이 참호전으로 변하게 되는 계기 |
전략적 중요성 | 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투들을 촉발시킨 중요한 전략 |
분석 및 비판 | |
계획 비판 | 슐리펜 계획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비판 독일군의 보급 및 통신 문제, 프랑스군의 저항 등 계획상의 결함 지적 몰트케의 수정이 작전의 실패 원인 중 하나로 지적 |
계획의 유산 | 독일 군사 작전의 주요 사례로 역사에 기록됨 |
추가 정보 | |
관련 문서 | 제1차 세계 대전 알프레트 폰 슐리펜 헬무트 폰 몰트케 (소) 서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 |
관련 연구 | "슐리펜 계획: 신화에 대한 비판" |
관련 용어 | Auftragstaktik (임무형 전술) |
2. 배경
19세기 말, 유럽 열강들은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추진하며 긴장이 고조되었다. 특히,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독일 제국은 프랑스를 고립시키고자 했으나, 1890년 비스마르크 실각 후 독일-러시아 재보장 조약이 연장되지 않았다. 1894년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체결되면서,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 양면에서 전쟁을 치러야 할 가능성에 직면했다.
이에 독일 참모총장 슐리펜은 양면 전쟁에 대비한 전략을 구상했다. 슐리펜은 러시아의 미비한 통신망과 철도 사정으로 인해 총동원령 이후 실제 공세까지 6주가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이 기간 동안 프랑스를 먼저 격파한 후 러시아를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한스 델브뤼크는 독일 참모본부가 잘못된 작전 계획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이 1870년대와 1880년대 몰트케의 계획대로 서쪽에서 방어하고 동쪽에서 공격했어야 한다고 보았다. 델브뤼크는 벨기에 중립을 침해할 필요가 없었고, 서부에서 결정적 승리는 불가능했기에 협상을 통한 평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3] 이러한 델브뤼크와 슐리펜 "학파" 사이의 논쟁은 1920년대와 1930년대까지 계속되었다.[3]
2. 1. 카비네츠크리제(Kabinettskrige)
1815년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유럽의 공격성은 외부로 돌아섰고, 대륙 내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쟁들은 Kabinettskriege|카비네츠크리제de, 즉 왕조 통치자들에게 충성하는 전문 군대가 결정하는 지역 분쟁이었다. 군사 전략가들은 나폴레옹 이후의 상황 특징에 맞는 계획을 세우면서 적응해 왔다. 19세기 후반, 군사 사상은 여전히 독일 통일 전쟁(1864~1871)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이 전쟁은 짧았고 엄청난 섬멸전으로 결정되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1832)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정치적 결과를 가져온 승리로 정의했다.Niederwerfungsstrategie|니더워펑스 전략de(굴복 전략, 후에 Vernichtungsstrategie|베르니히퉁스 전략de(섬멸 전략)이라고 불림) 즉, 결정적 승리를 추구하는 정책은 나폴레옹에 의해 뒤집힌 느리고 신중한 전쟁 접근 방식을 대체했다. 독일 전략가들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년 6월 14일~8월 23일)에서 오스트리아군과 1870년 프랑스 제국군의 패배를 결정적 승리 전략이 여전히 성공할 수 있다는 증거로 판단했다.
2. 2. 프로이센-프랑스 전쟁(Franco-Prussian War)
헬무트 폰 몰트케 장로 원수가 이끈 북독일 연방의 군대는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정 군대에 대해 신속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870년 9월 4일, 세당 전투 이후 공화파 쿠데타가 발생하여 국가방위정부가 수립되었고, guerre à outrance|총력전프랑스어을 선포하였다. 1870년 9월부터 1871년 5월까지 프랑스군은 몰트케 1세에게 새롭게 편성된 군대들로 맞섰다. 프랑스는 다리, 철도, 전신 및 기타 인프라를 파괴했고, 식량, 가축 및 기타 물자는 독일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후방으로 이동되었다. 1870년 11월 2일, levée en masse|총동원프랑스어가 공포되었고, 1871년 2월까지 공화파 군대는 950,200명으로 증가했다. 경험 부족, 훈련 부족, 장교와 포병 부족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군대의 규모는 몰트케로 하여금 파리를 포위하는 동시에 후방의 프랑스 수비대를 고립시키고 francs-tireurs|프랑-타이어프랑스어(비정규군)의 공격으로부터 통신선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병력을 전환하게 만들었다.2. 3. 국민전쟁(''Volkskrieg'')
헬무트 폰 몰트케 1세가 이끈 북독일 연방의 군대는 프랑스 제2제정의 군대를 격파했지만,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독일군은 프랑스 국민들의 저항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 제2제국 군대가 격파된 이후, 프랑스에서는 공화파의 쿠데타가 발생하여 국민방위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들은 guerre à outrance프랑스어(총력전)을 선포하였다.[1]
독일군은 우세한 훈련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파리를 점령하고 평화 조건을 결정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타이어러(비정규군)의 공격으로 인해 11만 명의 병력이 철도와 다리를 지키는 데 투입되어야 했고, 이는 프로이센군의 인력 자원에 큰 부담을 주었다.[1]
콜마르 폰 데어 골츠는 프랑스의 사례를 참고하여, 독일도 예비군 및 란트베어(Landwehr) 장교 훈련 개선, Etappendienstde(보급 시스템) 효율성 증대, 징병제 도입 등을 통해 국민군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 그는 모든 건강한 남성을 징집하고 복무 기간을 2년으로 단축하는 것을 옹호했으며, 이는 대중군이 급진적이고 민주적인 인민군의 출현을 막고 위로부터 통제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3] 골츠는 1883년에 출판된 『무장한 국민』(Das Volk in Waffen)을 포함한 여러 저술에서 이 주제를 계속 다루었으며, 1902년부터 1907년까지 군단장으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3]
2. 4. 소모전략(Ermattungsstrategie)
한스 델브뤼크는 독일 총참모부가 올바른 전쟁 계획을 제대로 따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잘못된 전쟁 계획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1870년대와 1880년대에 몰트케가 세운 계획에 따라 독일군이 서쪽에서 방어하고 동쪽에서 공격했어야 했다고 보았다. 델브뤼크는 벨기에의 중립을 깰 필요가 없었고, 서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며 시도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협상을 통한 평화가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전쟁 전의 전략가들과 전 총참모부의 공식 및 반관반관식 역사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은 독일의 가장 강력한 적국인 프랑스와 영국에 대항해서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했다. 델브뤼크와 슐리펜 사이의 논쟁은 1920년대와 1930년대까지 계속되었다.[3]델브뤼크는 프리드리히 2세가 7년 전쟁 (1754/56~1763) 동안 소모전략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18세기 군대가 규모가 작고 전문적인 병사들과 징집병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병사들은 대체하기 어려웠고, 징집병들은 군대가 자급자족하거나 험준한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거나 패배한 적을 추격하려고 할 경우, 후기 연합 전쟁 군대의 방식처럼 도망칠 것이었다. 왕조 군대는 보급을 위해 군수품 창고에 의존했기 때문에 섬멸 전략을 수행할 수 없었다. 델브뤼크는 1890년대 이후로 발전해 온 유럽 동맹 시스템, 보어 전쟁 (1899년 10월 11일~1902년 5월 31일)과 러일 전쟁 (1904년 2월 8일~1905년 9월 5일)을 분석하고, 경쟁 세력들이 속전속결 전쟁을 치르기에는 너무 균형이 잘 맞춰져 있다고 결론지었다. 군대 규모의 증가는 신속한 승리를 어렵게 만들었고, 영국의 개입은 결정적이지 않은 지상전의 고난에 해상 봉쇄를 더할 것이었다. 독일은 7년 전쟁에 대해 델브뤽이 형성했던 견해와 유사한 소모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다. 1890년대까지의 전략 논쟁은 두 몰트케와 같은 군인들도 유럽 전쟁에서의 속전속결 승리의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공개적인 담론으로 들어섰다. 독일군은 이러한 반대 의견 때문에 전쟁에 대한 자체적 가정을 검토해야 했고, 일부 작가들은 델브뤼크의 입장에 더 가까워졌다. 이 논쟁은 1914년 개전 이후 독일 제국군에 섬멸전략에 대한 상당히 친숙한 대안을 제공했다.
3. 슐리펜 계획의 발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독일은 프랑스를 고립시키려 했으나, 1890년 비스마르크 실각 후 독일-러시아 재보장 조약은 연장되지 않았다. 1894년 프랑스와 러시아는 러시아-프랑스 동맹을 체결하여,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 양쪽에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커졌다.
독일 참모총장 슐리펜은 이러한 양면 전쟁 상황에서 프랑스를 먼저 격파하고 러시아를 상대하는 전략을 구상했다. 그는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발령하고 공세를 시작하기까지 6주가 걸릴 것이라고 예상하고,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프랑스 북부를 우회, 포위하여 섬멸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작전은 1개월 반 안에 완료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1906년 알프레트 폰 슐리펜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에 취임한 소 몰트케는 슐리펜 계획을 수정했다. 몰트케는 알자스-로렌 방어를 위해 제6군과 제7군을 신설하여 병력을 늘렸다. 또한, 슐리펜 계획에서는 마스트리흐트를 통과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중립을 침해할 예정이었지만, 몰트케는 네덜란드의 중립은 유지하고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중립만 침해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몰트케는 슐리펜 계획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도, 당시의 정치적, 군사적 상황을 반영하여 계획을 수정했으며, 1906년부터 1914년까지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맞춰 여러 전쟁 계획을 검토했다.
3. 1. 몰트케 장군(Moltke)

헬무트 폰 몰트케 1세(1800–1891) 원수는 프랑스의 적대 행위와 알자스-로렌 회복 욕구를 가정하여, 1871년부터 1872년까지 전개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또 다른 신속한 승리를 기대했지만, 프랑스는 1872년에 징병제를 도입했다. 1873년까지 몰트케는 프랑스 군대가 너무 강력하여 신속하게 패배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고, 1875년에는 예방 전쟁을 고려했지만 쉬운 승리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제2기의 경과와 통일 전쟁의 사례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868년에, 러시아가 1874년에 징병제를 시작하도록 자극했다. 몰트케는 또 다른 전쟁에서 독일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또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연합군과 싸워야 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한 상대를 신속하게 패배시키더라도, 독일이 두 번째 적에 맞서 군대를 재배치하기 전에는 승리를 활용할 수 없었다. 1877년까지 몰트케는 불완전한 승리를 위한 조항을 포함한 전쟁 계획을 작성했는데, 외교관들이 평화를 협상했고, Status quo ante bellumla로의 복귀를 의미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1879년에는 전개 계획에 프랑스-러시아 동맹의 가능성과 프랑스 요새화 프로그램의 진전에 대한 비관론이 반영되었다.
국제적 발전과 Vernichtungsstrategiede(섬멸전략)에 대한 그의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몰트케는 전통적인 Bewegungskriegde(기동전)에 대한 헌신과 점점 더 큰 전투를 치르도록 훈련된 군대를 유지했다. 결정적인 승리가 더 이상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성공은 외교적 타협을 더 쉽게 만들 것이다. 경쟁 유럽 군대의 규모와 힘의 증가는 몰트케가 또 다른 전쟁을 고려하면서 비관론을 증가시켰고, 1890년 5월 14일 그는 ''라이히스타크''에서 Volkskriegde(민중전)의 시대가 돌아왔다고 연설했다. 리터(Ritter, 1969)에 따르면 1872년부터 1890년까지의 예비 계획은 국제적 발전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의 시도였으며, 개전 초기의 전술적 공세 이후 방어 전략을 채택하여 상대방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Vernichtungsstrategiede(섬멸전략)에서 Ermattungsstrategiede(소모전)로의 변화였다. 포스터(Foerster, 1987)는 몰트케가 전쟁 자체를 억제하고자 했고, 예방 전쟁에 대한 그의 주장이 줄어들면서 강력한 독일군의 유지로 평화가 유지될 것이라고 썼다. 2005년 폴리(Foley)는 포스터가 과장했고, 몰트케는 불완전하더라도 전쟁에서의 성공이 가능하다고 여전히 믿었으며, 그것은 평화 협상을 더 쉽게 만들 것이라고 썼다. 패배한 적이 협상하지 ''않을'' 가능성은 몰트케가 다루지 않은 문제였다.

3. 2. 슐리펜(Schlieffen)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독일은 프랑스의 고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1890년 비스마르크 실각 후 독일-러시아 재보장 조약은 연장되지 않았다. 1894년 프랑스와 러시아는 러시아-프랑스 동맹을 체결하여,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양면 전쟁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독일 참모총장 슐리펜은 양면 전쟁의 수단으로 프랑스를 먼저 격파하고 러시아를 상대하는 전략을 구상했다. 그는 러시아의 총동원령 발령 후 공세까지 6주가 걸릴 것이라 예측하고,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프랑스 북부를 우회, 포위하여 섬멸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작전은 1개월 반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3. 3. 몰트케 장군(Moltke)의 수정
소 몰트케는 1906년 알프레트 폰 슐리펜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에 취임하여 슐리펜 계획을 수정했다. 몰트케는 알자스-로렌 방어를 위해 제6군과 제7군을 신설하여 병력을 증강했다. 또한, 슐리펜 계획에서는 마스트리흐트를 통과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중립을 침해할 예정이었지만, 몰트케는 네덜란드의 중립은 유지하고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중립만 침해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몰트케는 슐리펜 계획의 기본 개념을 유지하면서도, 당시의 정치적, 군사적 상황을 고려하여 계획을 수정했으며, 1906년부터 1914년까지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따라 여러 전쟁 계획을 검토했다.4.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실행과 실패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은 소 몰트케가 수정한 슐리펜 계획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실제 전쟁은 슐리펜이나 몰트케가 예상하지 못한 여러 상황으로 인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 벨기에군의 저항: 벨기에는 중립국이었지만, 독일군의 침공에 맞서 예상보다 강하게 저항했다. 이들은 퇴각하면서 다리와 철도를 파괴하여 독일군의 보급에 차질을 빚게 했다.
- 러시아군의 빠른 공세: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군은 독일군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공세를 시작했다. 이로 인해 몰트케는 서부 전선의 병력 일부를 동부로 이동시켜야 했다.
- 독일군 우익의 피로: 슐리펜 계획의 핵심은 강력한 우익 부대가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 북부를 빠르게 포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동차가 없던 시절, 보병의 진격 속도는 한계가 있었고, 보급 문제까지 겹쳐 병사들은 심각한 피로를 느꼈다.
- 수적 우세 상실: 개전 초기에는 독일군 우익이 프랑스군 좌익보다 수적으로 우세했다. 그러나 전투가 진행되면서 영국군이 참전하고 프랑스군이 병력을 재배치하면서 이러한 우세는 사라졌다.
결국, 1914년 9월 6일부터 벌어진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진격은 저지되었고, 슐리펜 계획의 목표였던 프랑스군의 조기 섬멸은 실패로 돌아갔다.
4. 1. 국경 전투 (Battle of the Frontiers)

독일이 전쟁을 선포했을 때, 프랑스는 계획 17에 따라 5번의 공격을 실행했다. 독일군의 배치 계획인 아우프마르슈 2세는 독일군을 독일-벨기에 국경에 집중시켰다. 독일군은 프랑스-독일 국경의 요새 북쪽에 있는 프랑스군과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기 위해 벨기에로 진격했다. 계획 17은 알자스-로렌과 벨기에 남부에 대한 공세였다. 알자스-로렌에 대한 프랑스의 공격은 예상보다 더 큰 손실을 초래했는데, 프랑스 군사 이론에서 요구하는 포병-보병 협력은 "공세 정신"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충분했기 때문이다.[3] 벨기에 남부와 룩셈부르크에서 프랑스군의 공격은 정찰이나 포병 지원 없이 이루어졌고, 독일 북부군의 서쪽 기동을 막지 못한 채 큰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다.[3]
며칠 지나지 않아 프랑스군은 큰 패배를 당했고, 생존자들은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독일군은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거쳐 벨기에, 영국, 프랑스군을 추격했다. 북부에서 공격한 독일군은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30km 떨어진 지역에 도달했지만, 연합군을 함정에 빠뜨려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지는 못했다. 조프레는 프랑스 철도를 이용해 후퇴하는 군대를 이동시키고, 마른 강과 파리 요새 후방에 집결시켜 독일군이 추격할 수 있는 속도보다 더 빨랐다. 프랑스는 제1차 마른 전투에서 영국군의 도움을 받아 반격으로 흔들리는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냈다.[3]
4. 2. 계획의 문제점과 실패 요인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독일 제국의 외교 정책은 프랑스 제3공화국을 고립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으나, 1890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 실각 이후 러시아와의 핵심 외교 정책이었던 독일-러시아 재보장 조약이 연장되지 않았다. 1894년 프랑스와 러시아는 러시아-프랑스 동맹을 체결하여 독일이 프랑스와 러시아 양면에서 전쟁을 치러야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독일 참모총장 슐리펜은 양면 전쟁에 대비하여 프랑스를 먼저 공격하여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킨 후, 러시아를 공격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러시아의 미비한 통신망과 철도 사정으로 인해 총동원령 발령 후 공세까지 6주가 걸릴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슐리펜 계획"은 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 좌익을 희생하고, 강력한 서부 전선 우익으로 중립국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영국 해협 근처 아미앵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이후 시계 반대 방향으로 프랑스 북부를 제압하여 독일-프랑스 국경의 프랑스군 주력을 배후에서 포위하고 섬멸하는 것이었다. 작전 예상 소요 시간은 1개월 반이었다.
1906년 슐리펜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이 된 소 몰트케는 슐리펜 계획을 수정했다. 슐리펜 계획에서는 알자스-로렌 탈환을 목표로 할 프랑스군에 대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므로 유인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아, 군급 독일군 부대를 배치하지 않고 오스트리아군을 배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소 몰트케는 이를 변경하여 동 지역 방어를 위해 우익에서 병력을 삭감하여 제6군과 제7군을 신설했다. 또한, 원안에서는 서부 전선 우익의 공세 전면을 넓게 잡기 위해 마스트리흐트에서 네덜란드의 중립을 침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소 몰트케의 계획에서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중립은 침해하되, 네덜란드의 중립 침해는 피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 작전은 몰트케의 수정된 슐리펜 계획에 기반했지만, 실제 실행 과정에서 슐리펜이나 몰트케가 예상하지 못한 여러 상황이 발생하여, 결국 9월 6일부터 시작된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멈추고, 슐리펜 계획의 목표였던 6주 안에 프랑스 육군을 궤멸시키는 데 실패했다.
## 슐리펜 계획의 문제점
- 벨기에군의 예상 밖 저항: 계획에서는 벨기에의 중립을 침해하더라도 벨기에군의 저항은 형식적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벨기에군은 예상보다 강하게 저항했고, 퇴각하면서 다리와 철도를 파괴하여 독일군의 보급에 차질을 빚었다. 또한 앤트워프 근교에서 계속 저항하는 벨기에군 때문에 독일 제1군은 2개 군단을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군의 예상보다 빠른 공세: 계획에서는 러시아군이 공세에 나설 수 있는 것은 총동원령 이후 6주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러시아 제1군과 제2군이 총동원령(7월 31일) 이후 약 2주 반 만인 8월 17일에 동프로이센 침공을 시작했다. 8월 21일, 독일 제8군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프리트비츠가 동프로이센 전체 포기를 요청하자, 몰트케는 프리트비츠를 해임하고 서부 전선 우익(독일 제2군과 독일 제3군)에서 2개 군단을 빼내 동프로이센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 독일군 우익의 피로: 슐리펜 계획의 핵심은 강력한 우익이 벨기에를 넘어, 독일 제1군은 파리 서부, 제2군은 파리 동부를 통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회전 운동의 외곽에 해당하는 제1군의 진군은 하루에 약 40km 정도 필요했던 반면, 자동차화되지 않은 보병의 진격 속도는 최대 25km 정도여서 한계를 넘는 것이었다. 벨기에 영토 내 철도 파괴 등으로 인한 보급 문제도 피로를 가중시켰다.
- 수적 우세 상실: 개전 당시 프랑스군 최좌익은 제5군이었고, 이에 대응하는 독일군 우익은 제2군과 제3군으로, 독일 제1군에 대항하는 위치에 프랑스군은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프랑스군 측에는 5개 사단의 영국 원정군과 프랑스군 우익에서 차출된 병력으로 신설된 제6군이 제5군보다 좌익에 배치되었는데, 독일군은 중앙부 및 좌익에서도 공세 작전을 취했기 때문에 우익으로의 병력 보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마른 전투에서는 당초 독일군 우익이 가지고 있던 프랑스군 좌익에 대한 수적 우세가 사라졌다.
4. 3. 마른 전투(Battle of the Marne)
헬무트 폰 몰트케 소장은 1906년 1월 1일 슐리펜의 뒤를 이어 독일 참모총장이 되었다. 몰트케는 대규모 유럽 전쟁에서 독일의 승리 가능성에 의문을 가졌지만, 변화된 국제 정세에 따라 대규모 포위 기동이라는 기본 개념은 유지했다. 그는 1905~1906년의 "프랑스와의 전쟁" 각서에서 슐리펜이 구상한 공세 개념에 상당한 변화를 주었다. 제6군, 제7군, 제8군단은 알자스-로렌에 대한 프랑스의 침공에 대비하여 국경을 따라 집결해야 했다. 몰트케는 또한 우익(북쪽) 군대의 진격 방향을 변경하여 네덜란드를 우회하고, 수입 및 수출에 유용한 통로로 네덜란드를 유지하며 영국이 작전 기지로 사용하는 것을 막았다. 1908년 참모본부는 동원 11일째에 리에주 요새 지대(Fortified Position of Liège)와 그 철도 교차점을 기습(coup de main)으로 점령하는 계획을 세웠고, 이후 변경으로 허용 시간이 5일로 단축되었다.소 모르트케는 슐리펜의 뒤를 이어 1906년 참모총장에 취임하면서 슐리펜 계획에 상당한 수정을 가했다. 슐리펜 계획에서는 알자스-로렌의 옛 영토 탈환을 목표로 하는 프랑스군에 대해, 해당 지역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므로 유인이 유리하다는 점에서 군급 독일군 부대를 배치하지 않고 오스트리아군을 배치하여 방어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소 모르트케는 이를 변경하여 해당 지역 방어를 위해 우익에서 병력을 삭감, 제6군과 제7군을 신설했다. 또한, 원안에서는 서부 전선 우익의 공세 전면을 넓게 확보하기 위해 마스트리흐트를 통해 네덜란드의 중립을 침해할 예정이었지만, 소 모르트케의 계획에서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중립은 슐리펜 원안대로 침해하되, 네덜란드의 중립 침해는 피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 작전은 소 모르트케의 수정된 슐리펜 계획에 기반했지만, 실제 실행 과정에서 슐리펜이나 몰트케가 예상하지 못한 여러 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9월 6일부터 시작된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저지되었고, 슐리펜 계획의 목표였던 6주 안에 프랑스 육군을 궤멸시키는 데 실패했다.
독일이 선전포고를 하자 프랑스는 5개 공격으로 구성된 '17호 계획(Plan XVII)'을 실행했는데, 이는 나중에 서부 전선의 전투로 명명되었다. 독일의 배치 계획인 Aufmarschde II는 프로이센과 독일 해안 방어를 위해 20%를 제외한 독일군을 독일-벨기에 국경에 집중시켰다. 독일군은 벨기에로 진격하여 프랑스-독일 국경 요새 북쪽에서 프랑스군과 결정적인 전투를 벌일 계획이었다. '17호 계획'은 알자스-로렌과 벨기에 남부로의 공격이었다. 벨기에 남부와 룩셈부르크에서 프랑스군의 공격은 미미한 정찰이나 포병 지원 없이 진행되어 큰 피해를 보았고, 북부 독일군의 서쪽 기동을 막지 못했다.
며칠 만에 프랑스는 큰 패배를 당했고, 생존자들은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독일군은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통해 진격하여 벨기에, 영국, 프랑스군을 추격했다. 북쪽에서 공격하는 독일군은 파리 북동쪽 30km 지역에 도달했지만, 연합군을 포위하여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는 데는 실패했다. 독일군의 진격은 보급 부족으로 이어졌고, 프랑스는 마른 전투에서 흔들리는 독일군의 진격을 반격으로 물리쳤다.
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비판과 논쟁
슐리펜 계획은 군사적 효율성만을 추구하고 정치 및 외교적 측면을 경시했다는 비판과 함께, 지나치게 낙관적인 가정에 기반하여 현실적인 문제점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최근 연구에서는 슐리펜 계획의 실체와 그 영향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1990년대 독일 민주 공화국 해체 후 발견된 대참모 기록들은 제1차 세계 대전 공식 역사서인 《데어 벨트크리그》(Der Weltkrieg)가 "일반적으로 정확하고, 학문적으로 엄격하며, 군사 작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4] 2002년에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쓰여진 기록에서 1893년부터 1914년까지의 독일 전쟁 계획 요약이 발견되었다. 이 요약본은 마른 원정에 관한 《벨트크리그》 개정판을 위한 것이었으며, 전쟁 전 독일 총참모부 전쟁 계획과 다른 기록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독일 전쟁 계획의 개요를 처음으로 가능하게 했다.[4]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는 슐리펜 비망록이 일선 전쟁에서 프랑스를 공격하려는 계획의 "대략 초안"이며, 입력되지 않았고, 슐리펜의 가족과 함께 저장되었고, 존재하지 않는 부대의 사용을 구상했기 때문에 작전 계획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이 프랑스,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게 된다면 진정한 슐리펜 계획은 방어적인 반격을 위한 것이라고 썼다.[4]
동부 동원 계획 Ide은 프랑스-러시아 협상국과 독일 간의 전쟁을 위한 계획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을 지원하고, 영국 제국은 협상국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영국이 중립을 유지하는 경우에만 독일 편에 합류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독일군의 60%는 서부에, 40%는 동부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더 큰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시에 공격할 것이고, 독일은 적어도 전쟁 초기 작전/전역에서 "능동적 방어"를 수행할 것이었다. 독일군은 러시아 침공군에 집중하여 반격으로 격파하고, 프랑스군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방어를 수행할 것이었다. 러시아군을 국경 너머로 추격하는 대신, 동부에 있는 독일군의 50%(독일군의 약 20%에 해당)는 프랑스에 대한 반격을 위해 서부로 이동할 것이었다. 동부 동원 계획 Ide은 프랑스 침공군이 독일에서 너무 잘 자리 잡아 격퇴하기 어렵거나, 적어도 더 빨리 격파하지 못하면 독일군에게 더 큰 손실을 입힐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2차 배치 계획이 되었다. 또한 프랑스군이 러시아군보다 손실을 메울 능력이 떨어지고 더 많은 포로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프랑스에 대한 반격이 더 중요한 작전으로 여겨졌다.
로버트 폴리(Robert Foley)는 슐리펜과 몰트케가 베르니히퉁스 전략(Vernichtungsstrategie, 섬멸 전략)을 계획의 기초로 삼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썼다. 슐리펜은 짧은 전쟁에서만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1904년~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군의 예상치 못한 약화와 현대 전쟁 수행의 무능함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짧은 전쟁이 다시 가능해졌다고 보았다. 몰트케는 러시아 군사력이 1910년에 실질적으로 부흥하여 1922년까지 차르군을 이길 수 없게 만들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러시아 동원이 완료되기 전에 빠른 승리를 위해 서쪽을 바라봐야 했다.[4]
홈즈(Holmes)는 슐리펜이 그의 사고 실험과 아우프마르슈 1세 서부에서 48+1/2 군단(전선 병력 136만 명)이 프랑스와의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하거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영토를 차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병력이라는 것을 증명했다는 그의 분석에 주버를 지지했다. 홈즈는 몰트케가 34개 군단(97만 명의 최전방 부대)을 동원하여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하려 한 이유를 물었다.[4]
이처럼 슐리펜 계획은 군비 확장을 위한 구실로 이용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4] 슐리펜이 작성한 계획과 몰트케(소 몰트케)가 작성한 계획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현재 연구의 정설이다.[4]
5. 1. 정치적 측면 경시 비판
슐리펜 계획은 군사적 효율성만을 추구하고 정치적, 외교적 측면을 경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다른 수단을 사용한 정치의 연장이다"라고 언급했지만, 슐리펜 계획은 이와 정반대의 성격을 지녔다.[1]특히 중립국 벨기에 침공은 영국의 참전을 유발하고 국제적인 비난을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요구에 따라 강행되었다. 이는 슐리펜 계획이 정치적 측면을 종속시킨 가장 전형적인 예시이다.[1]
슐리펜 계획은 다음과 같은 전제 조건을 기반으로 수립되었으나, 실제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 프랑스군을 단기 결전(1개월 반)으로 항복시킨다.
- 러시아는 철도 등의 교통 기반 시설이 열악할 뿐만 아니라, 총동원(대독 공세 준비) 완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러시아는 이미 철도망 정비를 완료하여 독일 측 예상보다 빠른 '''17일 후'''인 8월 17일에 동프로이센 침공을 개시했다.[2] 이러한 러시아의 조기 침공은 마른 전투 패배와 서부 전선의 교착 상태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로, 슐리펜 계획의 전제 조건 자체가 파탄 났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독일은 자국의 정치적 중립과 영토, 주권을 침해받는 벨기에의 군사적 저항을 예상하지 못하여 리에주 전투에서 발이 묶이는 등 예상치 못한 시간과 물자를 낭비하고 전력 분산을 강요받는 상황에 직면했다.
5. 2. 군사적 문제점 비판
슐리펜 계획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가정에 기반하여 현실적인 문제점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 특히, 보급 문제와 적군의 저항 강도, 동원 속도 등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2]크레펠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마른 강에 도달했을 때 이미 독일군이 지쳐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슐리펜의 원래 계획대로 작전을 진행했더라도 센 강 이전에 독일군이 멈출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1]
슐리펜 계획은 "프랑스군을 단기 결전(당초 예정은 1개월 반)으로 항복시킨다"는 것과 "러시아는 철도 등의 교통 기반 시설이 미비할 뿐만 아니라, 총동원(대독 공세 준비) 완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에는 러시아의 철도망 정비가 진행되어, 러시아는 7월 31일에 총동원을 시작하고[2] '''17일 후'''인 8월 17일에 동프로이센 침공을 개시했다. 이는 독일 측 예상보다 빠른 것이었고, 서부 전선에서 병력을 빼내야 했기 때문에 같은 해 9월 마른 전투 패배와 서부 전선의 교착 상태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슐리펜의 원안대로 작전이 수행되고 보급에 문제가 없었더라도, 슐리펜 계획은 러시아와 프랑스의 동원 속도 차이가 일정 수준 이하로 좁혀진 시점에서 실행을 위한 전제 조건 자체가 무너진 셈이었다.
또한, 독일은 벨기에의 군사적 저항을 예상하지 못했다. 리에주 요새 공략에서 이틀간 발이 묶이는 등 예상치 못한 시간과 물자를 낭비하고 전력 분산을 강요받는 상황도 발생했다.
5. 3. 현대의 연구와 논쟁
최근 연구에서는 슐리펜 계획의 실체와 그 영향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1990년대 독일 민주 공화국 해체 후 발견된 대참모 기록들은 제1차 세계 대전 공식 역사서인 《데어 벨트크리그》(Der Weltkrieg)가 "일반적으로 정확하고, 학문적으로 엄격하며, 군사 작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4]2002년에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쓰여진 기록에서 1893년부터 1914년까지의 독일 전쟁 계획 요약이 발견되었다. 이 요약본은 마른 원정에 관한 《벨트크리그》 개정판을 위한 것이었으며, 전쟁 전 독일 총참모부 전쟁 계획과 다른 기록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독일 전쟁 계획의 개요를 처음으로 가능하게 했다.[4]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는 슐리펜 비망록이 일선 전쟁에서 프랑스를 공격하려는 계획의 "대략 초안"이며, 입력되지 않았고, 슐리펜의 가족과 함께 저장되었고, 존재하지 않는 부대의 사용을 구상했기 때문에 작전 계획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이 프랑스,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게 된다면 진정한 슐리펜 계획은 방어적인 반격을 위한 것이라고 썼다.[4]
로버트 폴리(Robert Foley)는 슐리펜과 몰트케가 베르니히퉁스 전략(Vernichtungsstrategie, 섬멸 전략)을 계획의 기초로 삼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썼다. 슐리펜은 짧은 전쟁에서만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1904년~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군의 예상치 못한 약화와 현대 전쟁 수행의 무능함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짧은 전쟁이 다시 가능해졌다고 보았다. 몰트케는 러시아 군사력이 1910년에 실질적으로 부흥하여 1922년까지 차르군을 이길 수 없게 만들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러시아 동원이 완료되기 전에 빠른 승리를 위해 서쪽을 바라봐야 했다.[4]
홈즈(Holmes)는 슐리펜이 그의 사고 실험과 아우프마르슈 1세 서부에서 48+1/2 군단 (전선 병력 136만 명)이 프랑스와의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하거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영토를 차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병력이라는 것을 증명했다는 그의 분석에 주버를 지지했다. 홈즈는 몰트케가 34개 군단(97만 명의 최전방 부대)을 동원하여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하려 한 이유를 물었다.[4]
이처럼 슐리펜 계획은 군비 확장을 위한 구실로 이용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4] 슐리펜이 작성한 계획과 몰트케(소 몰트케)가 작성한 계획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현재 연구의 정설이다.[4]
6. 슐리펜 계획과 한국의 관점
몰트케(소)는 1914년 슐리펜 계획을 실행하면서 슐리펜 비망록에 명시된 48+1-2 군단보다 적은 34개 군단으로 벨기에와 프랑스를 공격했다. 슐리펜은 독일군이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수적으로 열세일 것이라고 예상했다.[1]
몰트케가 1914년 5월 "작전 개시로부터 6주 안에"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싶다고 말한 것에서 전후 6주간의 시간표가 유래되었다. 그러나 슐리펜은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6주는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그는 독일군이 반격으로 프랑스군을 물리칠 계획을 세웠고, 러시아군 동원 전에 프랑스군을 격파할 시간은 3주밖에 없다고 보았다.[1]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조약에 따라 독일을 공격해야 했지만, 독일군이 벨기에 주권을 침해한 후에야 벨기에로 진격할 수 있었다. 조프레는 독일군이 먼저 벨기에를 침공하지 않았다면 벨기에 영토를 피할 수 있는 공세 계획을 고안해야 했다. 슐리펜은 독일 요새 구역이 기습적인 반격을 위한 도약점이라고 강조했고, 1914년 프랑스군은 파리 요새에서 독일군을 기습 공격했다.[1]
6. 1. 한국 진보 진영의 비판적 시각
슐리펜 계획은 주변국의 주권과 중립을 무시하고, 오로지 군사적 효율성만을 추구한 제국주의적 침략 계획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진보 진영에서는 슐리펜 계획이 정치, 외교적 고려를 무시하고 군사적 측면만을 강조하여,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장기적인 전쟁과 국제적 갈등을 초래했다고 본다. 또한, 벨기에와 같은 중립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민간인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점을 들어 전쟁 범죄로 간주하기도 한다.
6. 2. 반면교사로서의 교훈
슐리펜 계획의 실패는 군사 전략을 수립할 때 정치, 외교, 경제 등 다양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또한 주변국의 안보 상황과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920년대 독일에서는 슐리펜 계획에 대한 여러 저술이 출판되었는데, 이들은 슐리펜 계획을 불변의 청사진으로 여기고 몰트케가 이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해 실패했다고 주장했다.[1]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여러 면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7. 여파
슐리펜 계획의 실패와 그 영향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존재하며, 이 계획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침공 작전에도 영향을 미쳤다.[3]
휴 스트라찬은 1914년에 군대가 단기전을 예상하고 진격했다는 것은 진부한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젊은 몰트케는 대규모 유럽 전쟁에 대해 현실적인 견해를 가졌지만, 늙은 몰트케는 유럽 동맹으로 인해 1866년과 1871년의 성공을 반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장기전을 예상했다는 점에서 옳았다.
1871년 이후, 후장식 무기, 속사포, 철조망과 야전 요새의 사용으로 화력이 증가하여 정면 돌격에 의한 신속한 진격은 어려워졌고, 결정적인 승리는 불가능했다. 슐리펜은 섬멸전략에 기반한 단기전을 주장했지만, 러일 전쟁 경험을 고려할 때 국제 무역과 국내 신용이 장기전을 감당할 수 없다고 가정했다.
젊은 몰트케는 증가하는 병력과 공간, 시간 감소에 대처하기 위해 지휘권 위임에 의존했으나, 임무전술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유연성을 희생하여 의사결정을 고정관념화했다.
데이비드 스타헬은 클라우제비츠의 절정점이 마른 전투 이전에 발생했으며, 파리 동쪽의 독일 우익 측면 군대가 가장 가까운 철도 기지에서 약 100km 떨어진 곳에서 작전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이로 인해 공급용 말은 영양 부족과 탈진 상태에서 일주일간 왕복 여행을 해야 했고, 우익 군대는 탄약이 부족했다.
홀거 헤르빅은 군대 배치 계획이 독일 제국 해군, 외무부, 총리, 오스트리아-헝가리 또는 프로이센, 바이에른 및 기타 독일 주의 군 사령부와 공유되지 않았다고 썼다. 대본영 외부의 누구도 배치 계획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준비할 수 없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독일의 외교 정책은 프랑스의 고립을 목표로 했지만, 비스마르크 실각 후 러시아와의 독일-러시아 재보장 조약은 연장되지 않았다. 1894년 프랑스와 러시아는 러시아-프랑스 동맹을 체결하여 독일이 프랑스와 러시아의 양면 전쟁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3]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프랑스 침공 작전은 슐리펜 계획을 계승하려 했다.[3] 그러나 작전 계획서를 소지한 장교의 비행기가 벨기에 영토에 불시착하는 사고(메헬렌 사건)로 작전 계획이 연합국 측에 유출되어 재검토가 불가피했다. 만슈타인의 작전 계획(만슈타인 플랜)은 주력군이 벨기에를 통해 영국 해협에 도달한다는 점에서는 슐리펜 계획을 계승했지만, 공세 전선이 벨기에 북부 평야 지대가 아닌, 남부 룩셈부르크에 걸친 아르덴 삼림 지대라는 점이 달랐다.[3]
7. 1. 분석
슐리펜 계획의 실패 원인과 그 영향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존재한다. 슐리펜 계획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침공 작전에도 영향을 미쳤다.휴 스트라찬(Hew Strachan)은 2001년에 많은 전문 군인들이 장기전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1914년에 군대가 단기전을 예상하고 진격했다는 것은 진부한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젊은 몰트케는 대규모 유럽 전쟁의 본질에 대해 현실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는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지식과 일치했다. 늙은 몰트케는 1890년 독일 제국 의회(Reichstag)에서 유럽 동맹으로 인해 1866년과 1871년의 성공을 반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7년 또는 30년에 걸친 전쟁을 예상했다는 점에서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1871년 이후, 후장식 무기(breech-loading weapon), 속사포(quick-firing gun), 철조망(barbed wire)과 야전 요새(field fortifications)의 사용을 통한 증가된 화력의 영향 회피 등 화력에 있어 혁명이 일어났다. 정면 돌격에 의한 신속한 진격의 전망은 희박했고, 전투는 결정적이지 않을 것이며 결정적인 승리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슐리펜은 섬멸전략(Vernichtungsstrategie)에 기반한 단기전을 주장했다. 러일 전쟁에서의 최근 군사 작전 경험을 고려하여 슐리펜은 국제 무역과 국내 신용이 장기전을 감당할 수 없다는 가정을 했다.
1913년까지 젊은 몰트케는 1870년보다 5배나 많은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650명의 참모를 두었는데, 이 군대는 두 배나 되는 철도 거리(약 90000km)를 이동해야 했다. 몰트케는 증가하는 병력과 공간, 그리고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시간 감소에 대처하기 위해 지휘권 위임에 의존했다. 임무전술(Auftragstaktik)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대응 유연성을 희생하여 의사결정을 고정 관념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009년, 데이비드 스타헬(David Stahel)은 클라우제비츠(Clausewitz)의 절정점(방어자의 힘이 공격자의 힘을 능가하는 이론적 분수령)이 마른 전투 이전에 발생했으며, 파리 동쪽의 독일 우익(서쪽) 측면 군대가 가장 가까운 철도 기지에서 약 100km 떨어진 곳에서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이로 인해 영양 부족과 탈진 상태의 공급용 말이 일주일간 왕복 여행을 해야 했고, 이는 우익 군대가 탄약이 심각하게 부족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2015년, 홀거 헤르빅(Holger Herwig)은 군대 배치 계획이 독일 제국 해군(Imperial German Navy), 외무부, 총리, 오스트리아-헝가리 또는 프로이센, 바이에른 및 기타 독일 주의 군 사령부와 공유되지 않았다고 썼다. 대본영 외부의 아무도 배치 계획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준비를 할 수 없었다. "이 계획을 알고 있던 장군들은 그것이 몇 주 안에 빠른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B 계획'은 없었습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독일의 외교 정책은 프랑스의 고립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1890년 비스마르크가 실각하면서 러시아와의 중추적인 외교 정책이었던 독일-러시아 재보장 조약은 연장되지 않았다. 더욱이 1894년 프랑스와 러시아는 러시아-프랑스 동맹을 체결하여 독일이 프랑스와 러시아의 양면 전쟁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3]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프랑스 침공 작전은 원칙적으로 슐리펜 계획이 계승될 예정이었다.[3] 그러나 작전 계획서를 소지한 장교의 비행기가 벨기에 영토에 불시착하는 사고(메헬렌 사건)로 작전 계획이 연합국 측에 유출되어 작전 재검토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검토 결과, 만슈타인의 작전 계획(만슈타인 플랜)이 채택되었다. 이 계획은 "주력군이 벨기에를 통해 공격하여 영국 해협에 도달한다"는 점에서는 슐리펜 계획을 계승한 것이었지만, 공세 전선이 벨기에 북부의 평야 지대가 아닌, 남부에서 룩셈부르크에 걸친 아르덴 삼림 지대라는 점이 달랐다.[3]
8. 참고 문헌
다음은 슐리펜 계획과 관련된 참고 문헌 목록이다.
- M. 반 크레펠트 (Martin van Creveld), 『전쟁의 보급: 발렌슈타인에서 패튼까지의 군수』(Supplying War: Logistics from Wallenstein to Patton),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Cambridge University Press), 케임브리지, 1980년(1977년 초판), 재판. ISBN 978-0-521-29793-6
- R. A. 도티 (Robert A. Doughty), 『피르로스의 승리: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프랑스 전략과 작전』(Pyrrhic victory: French Strategy and Operations in the Great War), 벨크냅 프레스(Belknap Press), 케임브리지(MA), 2005년. ISBN 978-0-674-01880-8
- J. E. 에드먼즈 (James Edward Edmonds), 『제1차 세계 대전 군사 작전: 프랑스와 벨기에, 1914년 - 몽, 센 강으로의 후퇴, 마른 전투와 에나 강, 8월-10월 1914년』(Military Operations France and Belgium, 1914: Mons, the Retreat to the Seine, the Marne and the Aisne August–October 1914), 제국 방위 위원회 역사부의 공식 문서에 기초한 제1차 세계 대전사(History of the Great War Based on Official Documents by Direction of the Historical Section of the Committee of Imperial Defence) 시리즈 제1권, 맥밀란(Macmillan), 런던, 1926년, 제2판. OCLC 58962523
- R. T. 폴리 (R. T. Foley), 『독일 전략과 베르됭으로 가는 길: 에리히 폰 팔켄하인과 마모전의 발전, 1870–1916』(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1870–1916), CUP, 케임브리지, 2007년(2005년 초판), 페이퍼백. ISBN 978-0-521-04436-3
- H. G. 엘러트(H. G. Ehlert), M. 에펜한스(Michael Epkenhans), G. P. 그로스(G. P. Gross) 편, D. T. 자베키(David T. Zabecki) 역, 『슐리펜 계획: 제1차 세계 대전을 위한 독일 전략에 대한 국제적 관점』(The Schlieffen Plan: International Perspectives on the German Strategy for World War I), 켄터키 대학교 출판부(University Press of Kentucky), 렉싱턴, 2014년. ISBN 978-0-8131-4746-8 (원저: Der Schlieffenplan: Analysen und Dokumente (2006) Schöningh, Paderborn.)
- M. O. 험프리스(M. O. Humphries), J. 메이커(J. Maker),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국경 전투와 마른 전투까지의 추격 제1부』(Der Weltkrieg: 1914 The Battle of the Frontiers and Pursuit to the Marne Part 1), 독일 서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독일 공식 역사 번역(Germany's Western Front: Translations from the German Official History of the Great War) 시리즈 제1권, 윌프리드 로리어 대학교 출판부(Wilfrid Laurier University Press), 워털루(캐나다), 2013년, 제2판 페이퍼백. ISBN 978-1-55458-373-7
- M. O. 험프리스(M. O. Humphries), J. 메이커(J. Maker), 『독일 서부 전선,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독일 공식 역사 번역』(Germany's Western Front, 1915: Translations from the German Official History of the Great War), 제2권, 윌프리드 로리어 대학교 출판부(Wilfrid Laurier University Press), 워털루(온타리오), 2010년, 초판. ISBN 978-1-55458-259-4
- H. 스트래찬(H. Strachan), 서문, 험프리스(Humphries) & 메이커(Maker), 2010년.
- 존 키건(John Keegan), 『제1차 세계 대전』(The First World War), 랜덤 하우스(Random House), 뉴욕, 1998년. ISBN 978-0-09-180178-6
- 게르하르트 리터(Gerhard Ritter), 『슐리펜 계획, 신화에 대한 비판』(The Schlieffen Plan, Critique of a Myth), O. 울프(O. Wolff), 런던, 1958년. 링크 (2015년 11월 1일 접근). ISBN 978-0-85496-113-9
- D. 스타헬(D. Stahel), 『바르바로사 작전과 동부 전선에서의 독일의 패배』(Operation Barbarossa and Germany's Defeat in the East),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Cambridge University Press), 케임브리지, 2010년(2009년 초판), 페이퍼백 재판. ISBN 978-0-521-17015-4
- H. 스트래찬(H. Strachan), 『제1차 세계 대전: 무장』(The First World War: To Arms), 제1권,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Oxford University Press), 옥스퍼드, 2003년(2001년 초판), 페이퍼백. ISBN 978-0-19-926191-8
- T. 주베르(T. Zuber), 『슐리펜 계획의 발명』(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Oxford University Press), 옥스퍼드, 2002년. ISBN 978-0-19-925016-5
- T. 주베르(T. Zuber), 『실제 독일 전쟁 계획 1904–14』(The Real German War Plan 1904–14), 더 히스토리 프레스(The History Press), 스트라우드, 2011년. ISBN 978-0-7524-5664-5
- 시미즈 타요시(清水多吉)・이시즈 토모유키(石津朋之) 편, 『클라우제비츠와 「전쟁론(戦争論)」』사이류샤(彩流社), 2008년.
참조
[1]
서적
補給戦―何が勝敗を決定するのか
中公文庫BIBLIO
2006-05
[2]
문서
宣戦布告
[3]
문서
作戦の規模およびその目標
[4]
간행물
『シュリーフェン計画』論争をめぐる問題点
https://www.nids.mod[...]
2006-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