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동원령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동원령은 국가가 전쟁 등의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하는 조치를 의미한다. 역사를 거치며 동원 체제는 변화해왔으며, 근대 국가들은 징병제, 인구 증가,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군 규모를 확대했다. 1차 세계 대전은 각국의 총동원령 발동으로 인해 발발했으며,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이 인구 대비 가장 높은 비율의 병력을 동원했다. 냉전 시대에는 대규모 동원령이 없었지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각각 총동원령과 부분 동원령을 발령했다. 현재는 징병제를 폐지하는 국가가 늘었지만, 대한민국, 스위스, 북한 등은 여전히 징병제를 유지하며 안보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병역 - 사회복무요원
    사회복무요원은 현역 복무가 어려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징병검사 결과에 따라 사회복지, 보건,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1년 9개월 동안 근무하지만, 낮은 보수, 인권 침해 등의 문제로 비판받고 있다.
  • 병역 - 복원
    복원은 군인, 잠수 장비 등의 원래 상태로의 회귀를 의미하며, 유엔 평화유지활동, 잠수 작업,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본, 미국 복원군인원호법 제정 등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된다.
  • 전시 체제 - 원천징수
    원천징수란 소득을 지급하는 자가 소득자(납세의무자)를 대신하여 소득세를 징수하여 국세청에 납부하는 제도로, 소득세법에 따라 근로소득, 사업소득, 이자소득, 배당소득 등에 적용되며 세금 납부의 편의성을 높이고자 시행된다.
  • 전시 체제 - 민방위
    민방위는 전쟁, 자연재해 등으로부터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활동 및 체계로, 과거 핵전쟁 대비에서 현재는 다양한 재난에 대응하는 광범위한 임무를 수행하며 국가별 특성에 따라 운영 방식이 다르다.
  • 군사 제도 - 병역
    병역은 국가가 국민에게 부과하는 국방의 의무로, 군 복무를 포함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징병제, 모병제, 민병제 등의 제도를 통해 부과되고 국가별로 제도 운영 방식에 차이가 있으며, 미래 병역 제도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 군사 제도 - 예비역
    예비군은 전시 또는 비상 상황 시 국가 방위를 위해 동원되는 군사 예비 인력으로, 각 국가의 군사 제도 및 상황에 따라 구성과 운영 방식이 다르며, 평시에는 치안 유지나 재난 구호 활동 등에 투입되기도 한다.
동원령
개요
동원 개략도
동원 개략도
정의전쟁이나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군대와 물자를 집결하고 준비하는 과정
단계
1단계예비군 소집 및 훈련
2단계장비 및 물자 점검 및 정비
3단계수송 시스템 준비
4단계부대 배치 및 작전 준비
동원 유형
완전 동원국가의 모든 자원을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
부분 동원특정 부대 또는 산업 분야에만 적용되는 동원
일반 동원국가의 주요 자원을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
역사적 사례
제1차 세계 대전주요 강대국들은 전쟁 초기 대규모 동원 실시
제2차 세계 대전연합군과 추축군 모두 대규모 동원 실시
한국 전쟁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모두 동원 체제 가동
영향
긍정적 영향전쟁 억제력 강화
국가 안보 강화
경제 활성화 (특정 산업)
부정적 영향경제적 부담 증가
사회적 혼란 야기
개인의 자유 제한
현대적 동원
특징기술 발전으로 더욱 신속하고 효율적인 동원 가능
사이버 공간을 이용한 동원 및 방해 시도 증가
국제 협력의 중요성 증대
고려 사항경제적 지속 가능성
사회적 수용성
국제 관계
참고 문헌

2. 역사

로마 공화국은 비상시와 단기간에 총 로마 인구의 6%(기원전 81–83년)에서 최대 10%(기원전 210년대)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2] 여기에는 훈련이 부족한 민병대도 포함되었다.

미국 남부 연합은 미국 남북 전쟁(1861–1865) 당시 자유 인구의 약 11%를 동원한 것으로 추정된다.[2] 프로이센 왕국은 1760년과 1813년에 총 인구의 약 6–7%를 동원했고, 스웨덴 제국은 1709년에 7.7%를 동원했다.[2]

17세기의 군대는 평균 20,000명의 병력을 보유했으나,[3] 징병제와 같은 새로운 정책, 더 큰 인구, 더 큰 국가적 부의 증가로 인해 19세기 군대는 평균 100,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4]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은 근대 군대 동원의 문제점을 보여주었다. 나폴레옹 3세가 1859년에 130,000명의 병사를 군사 철도로 이탈리아로 수송하면서, 프로이센은 대규모 군대 동원의 미래를 깨닫기 시작했다.[5]

근대 국가는 징병령에 의해 성년에 달한 국민을 부분적으로 징병하고, 수년간 훈련을 실시하여 전시에 병졸로서 동원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징병 훈련 인구가 많을수록 국가의 잠재적 군사력이 높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유럽 대륙 제국은 앞다투어 징병 인구를 늘렸고,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시에는 독일과 프랑스 양국의 징병 인구가 성년 남자의 60%에 달했다.

1914년 대영 제국은 유럽 열강 중 유일하게 징병제를 실시하지 않은 국가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프랑스 제3공화국[24], 독일 제2제국, 러시아 제국 등은 의무 징집으로 수백만 명의 군대를 유지하며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었다. 이들 국가는 평시에 전쟁 동원 가능 자원 중 일부만 상비군으로 유지하고 나머지는 예비군으로 돌려 최소한의 비용으로 주기적인 기초군사훈련만 받게 하여 언제든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국제 관계에서 한 국가의 총동원 체제는 상대방에게 전쟁 의사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중요한 개전 이유[27]가 되었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각국의 총동원령이었다.

독일 병영 열차, 1914년 8월 뮌헨
'''Von München über Metz nach Paris'''(뮌헨발 파리행, 메츠 경유)


동원령은 전쟁 경험이 없는 군인들에게 일상탈출처럼 느껴졌다. 징집 동원된 독일군들은 총구에 꽃을 달고 행진했고, 무료 기차를 타고 전선으로 집결했다.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도 연합군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16년 8월 17일 루마니아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을 시작하며 연합군 측에 합류했다. 불가리아는 전체 인구의 1/4에 달하는 80만 명을 동원했는데, 이는 인구 대비 비율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높은 수치였다.

군수 물자 생산도 전쟁을 통해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러시아 제국은 동원령으로 국내 생산을 전시 체제로 전환하여 포탄 생산량이 전쟁 전보다 2,000% 증가했다. 1915년 11월에는 매달 150만 발 이상의 포탄을 생산했다.[29] 프랑스에서는 여성들을 대량 동원하여 군수 물자 공장을 가동, 1915년 매일 10만 개의 포탄을 생산했으며, 이는 매달 300만 발에 달하는 양이었다.[31]

1917년 4월 6일 미국이 참전했다. 미국은 징집으로 병력을 늘려 1918년 3월에는 31만 8천 명의 병력이 프랑스로 파견되었고, 종전 시까지 300만 명의 미군 병력이 유럽에 동원되었다.[32]

겨울 전쟁 직전 동원령으로 말과 짐이 징발되었다.


프랑스-폴란드 군사 동맹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8월 26일 예비 동원령을, 9월 1일 총동원령을 공표했다. 1939년 9월 16일 프랑스 육군은 독일 진격을 시작했다.[33]

폴란드영국-폴란드 군사 동맹으로 나치 독일과 긴장이 높아지면서 1939년 8월 24일 부분적 동원령을 발동했고, 일주일 후인 8월 30일 총동원령으로 전환했다. 9월 1일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캐나다1939년 8월 25일 부분 동원령을 발동하여 영국 본섬으로 병력을 파견했다. 9월 1일 독일의 프랑스 침공에 2개 사단을 동원하고 9월 10일 영국으로 1개 사단만 파견했다. 1940년 동원령 관련법을 정비한 캐나다는 태평양 전쟁에서 알루샨 열도 방위를 맡았다.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다른 어떤 국가보다 많은, 총 인구의 22%를 직접 군 복무를 위해 동원했다.[14] 붉은 군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최대 3,400만 명의 군인이 복무했으며,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군사력을 나타낸다.[15]

냉전 체제에서 대리전 양상을 띄면서, 미국소련 양강이나 그 동맹국들은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포클랜드 전쟁, 걸프 전쟁을 포함한 주요 분쟁에서도 총동원령을 시행한 적이 없었다.

2021년~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위기 사태 이후,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문제를 둘러싸고 2022년 2월 22일(현지시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월 24일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하여 우크라이나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동원령에 관한 법령에 서명했으며,[34] 2월 26일에는 국가비상사태와 함께 총동원령을 선포했다.[34]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22년 9월 21일, 군사 경험이 있는 예비군을 대상으로 부분 동원령을 발표했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부 장관에 따르면, 30만 명의 예비군이 동원될 것이라고 한다.[17]

2. 1. 로마 공화국

로마 공화국은 비상시와 단기간에 총 로마 인구의 6%(기원전 81–83년)에서 최대 10%(기원전 210년대)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2] 여기에는 훈련이 부족한 민병대도 포함되었다.

2. 2. 근대

미국 남부 연합은 미국 남북 전쟁(1861–1865) 당시 자유 인구의 약 11%를 동원한 것으로 추정된다.[2] 프로이센 왕국은 1760년과 1813년에 총 인구의 약 6–7%를 동원했고, 스웨덴 제국은 1709년에 7.7%를 동원했다.[2]

17세기의 군대는 평균 20,00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3] 이 정도 규모의 군대는 하루에 약 20톤의 식량, 숙소, 그리고 필요한 모든 탄약, 운송 수단(일반적으로 말 또는 노새), 도구, 의복 등을 필요로 했다.[3] 그러나 징병제와 같은 새로운 정책, 더 큰 인구, 그리고 더 큰 국가적 부의 증가로 인해 19세기 군대는 평균 100,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4]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은 근대 군대 동원에서의 모든 문제점을 보여주었다. 나폴레옹 3세가 1859년에 130,000명의 병사를 군사 철도로 이탈리아로 수송하면서, 프로이센은 대규모 군대 동원의 미래를 깨닫기 시작했다.[5] 프랑스군과 피에몬테 군대의 보급품을 운반하는 프랑스 수송대는 매우 느렸고, 이 수송대 안의 무기들은 엉성하게 정리되어 있었다.[6] 오스트리아 군대는 주로 슬라브족으로 구성되었지만, 다른 많은 민족도 포함하고 있었다.[7] 평시 오스트리아의 군사 훈련은 9개의 다른 언어를 사용했으며, 오스트리아 군인들이 모국어로만 명령을 받도록 익숙하게 만들었다.[7] 이는 대규모 군대의 출현과 함께 빠르게 발생한 의사소통 문제를 보여준다.

근대 국가는 징병령에 의해 성년에 달한 국민을 부분적으로 징병하고, 수년간 훈련을 실시하여 전시에 병졸로서 동원한다. 19세기 후반에는 징병 훈련 인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국가의 잠재적 군사력이 높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유럽 대륙 제국은 앞다투어 징병 인구를 늘렸고,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시에는 독일과 프랑스 양국의 징병 인구가 성년 남자의 60%에 달했다.

2. 3. 1차 세계 대전

1914년 대영 제국은 유럽 열강 중 유일하게 징병제를 실시하지 않은 국가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프랑스 제3공화국[24], 독일 제2제국, 러시아 제국 등은 의무 징집으로 수백만 명의 군대를 유지하며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었다. 이들 국가는 평시에 전쟁 동원 가능 자원 중 일부만 상비군으로 유지하고 나머지는 예비군으로 돌려 최소한의 비용으로 주기적인 기초군사훈련만 받게 하여 언제든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동원령은 평시 비용을 절감할 수 있지만, 수백만 명에 달하는 동원 자원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려면 정교한 법적, 행정적 준비가 뒷받침되어야 실제 동원 시 혼란과 실패를 막을 수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열강은 전시 비상 계획 등의 매뉴얼을 만들어 차질이 없도록 준비했다.[25][26]

국제 관계에서 한 국가의 총동원 체제는 상대방에게 전쟁 의사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중요한 개전 이유[27]가 되었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각국의 총동원령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사령부는 프랑스 침공 시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동원령 발동을 자제했다. 빌헬름 2세가 승인한 슐리펜 계획에는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이 협공할 경우에 대비한 동원령 발동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러시아의 도발 여부와 관계없이 실제 침공이 아닌 이상 슐리펜 계획 상으로는 한 번에 하나의 적과 싸우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제국의 스타브카 계획은 슐리펜 계획에 대응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이나 독일 제2제국을 주적으로 상정하고, 러시아의 안전을 위협하는 다른 열강들에 대비하도록 계획되었다. 1914년 6월 28일 니콜라이 2세오스트리아 제국선전포고를 해오자 부분 동원령을 실시하려 했다. 이는 아직 선전포고가 없었던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조언자들은 부분 동원령이 징집 대상 문제로 국내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며,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과의 전쟁은 시간 문제이므로 부분 동원령은 소용없다고 간언했다. 차르는 총동원령으로 마음을 굳혔으나, 그날 밤 사촌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급전을 보내 총동원령 자제를 당부했다. 러시아 지휘부는 독일이 아직 러시아 공격 계획이 없다는 신호를 받고 독일을 자극하지 않기로 하고 다시 부분 동원령을 결정하려 했다. 그러나 다음날 러시아 외무성 장관 세르게이 사조노프가 입궐하여 차르에게 직접 총동원령을 간언했고, 결국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이에 독일도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독일은 슐리펜 계획을 폐기하고 소(小) 몰트케 장군의 수정안[28]에 따라 총동원령을 발동했다. 러시아와 독일 모두 양면전 계획으로 전쟁 계획을 변경한 것이다. 독일은 8월 3일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이어 벨기에에 독일군 통과권을 인정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중립국인 벨기에에 대한 위협 행위에 대영 제국도 독일에 선전포고하였다. 이로써 영·불·러 삼국동맹이 결성되었고, 독일과 러시아의 총동원령에 이어 유럽 열강들의 연쇄적인 총동원령이 뒤따르면서 유럽 대륙은 세계 대전으로 말려들었다.

동원령은 전쟁 경험이 없는 군인들에게 일상탈출처럼 느껴졌다. 징집 동원된 독일군들은 총구에 꽃을 달고 행진했고, 무료 기차를 타고 전선으로 집결했다. 독일은 1만 1천 량이 넘는 기차로 라인강을 넘었고, 프랑스는 7천 량 정도를 동원했다. 민간의 말도 징집 대상이었다. 영국은 16만 5천 마리를 기마대로 긴급 편성했고, 오스트리아는 75만 마리, 독일은 71만 5천 마리, 러시아는 백만 마리를 동원했다.[25][29]

영연방 국가[30]인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공 국민들은 영국 본토인들과 마찬가지로 징집 대상이었다. 그러나 영연방 내에서의 동원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모든 영연방 국가는 기존 군 편성이 아닌 새로운 전시 편성을 위해 거의 창군 수준의 재정비가 필요했다. 캐나다의 경우, 방위청 장관 샘 휴즈 경은 캐나다 파견군을 위해 퀘벡주 CEF 발카티에 기지 소속 징집관들의 옷을 맞추는 문제만으로도 총 226통의 전보를 주고받아야 했다. 파견군 편성은 과거 주 방위군과는 차원이 달랐고, 당시 캐나다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징집 과정에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고대 스코틀랜드에서 하이랜더 청년들을 소집하는 수준이라는 핀잔까지 받을 정도였다. 1920년 오터 위원회는 재정과 행정력 문제로 과거 방식이나 새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캐나다는 새 방식을 채택하되 샘 휴즈의 방식보다 산업화된 방식의 행정적, 법적 정비를 하기로 결정했다.

영국의 지휘 아래 모인 '식민지 백성'들은 영연방이라는 제한된 자치권 아래에서도 영국군의 일부로 편성되기를 거부하고, 독립적인 군 지휘 체계로서 연방군을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1918년 5월 호주 연대가 영국인 지휘관 윌리엄 버드우드를 자국 지휘관 존 모나쉬로 교체하면서 완전한 독립 체계를 수립한 것을 시작으로 다른 영연방 국가들도 이를 따랐다. 이들은 '식민지 군단'으로서 영국과 독일 양측 모두에게 영국 군대와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도 연합군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연합군 중 가장 약체였지만, 이탈리아는 참전 후 130개 이상의 대대를 증강시켰고, 정규군 수는 참전 전 100만 명에서 참전 후 150만 명으로 증가했다.[29] 야포 수도 1,788문에서 2,068문으로 늘었다.[29] 1916년 8월 17일 루마니아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을 시작하며 연합군 측에 합류, 23개 사단을 동원했다. 그러나 루마니아는 독일,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연합군에 곧 항복했다. 불가리아는 전체 인구의 1/4에 달하는 80만 명을 동원했는데, 이는 인구 대비 비율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높은 수치였다.

군수 물자 생산도 전쟁을 통해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러시아 제국은 동원령으로 국내 생산을 전시 체제로 전환하여 포탄 생산량이 전쟁 전보다 2,000% 증가하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1915년 11월에는 매달 150만 발 이상의 포탄을 생산했다.[29] 프랑스에서는 여성들을 대량 동원하여 군수 물자 공장을 가동, 1915년 매일 10만 개의 포탄을 생산했으며, 이는 매달 300만 발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었다.[31]

양측은 동원령으로 대규모 병력을 확보했다. 영국 국방장관 호레이쇼 키치너 백작은 수십만 명의 군대가 필요하다고 국민에게 호소했고, 이는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 순식간에 30개 사단이 증강되었다. 지원자가 몰려들어 1916년까지 영국은 별도의 징병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들의 동원령도 이어졌다.

1917년 4월 6일 미국이 참전했다. 참전 당시 미국은 107,641명을 동원하여 참전국 중 17위에 불과했지만, 미국 해군의 동원 규모는 상당하여 5척의 드레드노트가 연합 해군에 공여되었다. 미국은 징집으로 병력을 늘려 1918년 3월에는 31만 8천 명의 병력이 프랑스로 파견되었고, 종전 시까지 300만 명의 미군 병력이 유럽에 동원되었다.[32]

2. 4. 2차 세계 대전



프랑스-폴란드 군사 동맹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8월 26일 예비 동원령을, 9월 1일 총동원령을 공표했다. 동원령 실시 3일 후, 대규모 반격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고, 1939년 9월 16일 프랑스 육군은 독일 진격을 시작했다.[33]

폴란드영국-폴란드 군사 동맹으로 나치 독일과 긴장이 높아지면서 1939년 8월 24일 부분적 동원령을 발동했고, 일주일 후인 8월 30일 총동원령으로 전환했다. 9월 1일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그러나 영불 연합은 동원령 발동을 주저했고, 폴란드는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점령되었다. 프랑스는 자르 공세라는 소규모 공격을 했을 뿐이었다.[33]

캐나다1939년 8월 25일 부분 동원령을 발동하여 영국 본섬으로 병력을 파견했다. 9월 1일 독일의 프랑스 침공에 2개 사단을 동원하고 9월 10일 영국으로 1개 사단만 파견했다. 캐나다 자치정부는 영국으로부터 외교권, 군사권을 포함한 전면적인 자치권을 위임받았지만, 정식 선전포고는 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지원했다. 프랑스 공방전이 시작된 1940년 5월이 되어서야 전쟁이 본격화됨을 깨닫고 3개 사단을 추가 동원해 대서양 건너로 보냈다.[33] 1940년 동원령 관련법을 정비한 캐나다는 태평양 전쟁에서 알루샨 열도 방위를 맡았다.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다른 어떤 국가보다 많은, 총 인구의 22%를 직접 군 복무를 위해 동원했다.[14]

붉은 군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최대 3,400만 명의 군인이 복무했으며,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군사력을 나타낸다.[15]

2. 5. 냉전

냉전 체제에서 대리전 양상을 띄면서, 미국소련 양강이나 그 동맹국들은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포클랜드 전쟁, 걸프 전쟁을 포함한 주요 분쟁에서도 총동원령을 시행한 적이 없었으며, 의미 있는 규모의 국가 동원도 없었다.

2. 6. 제2차 냉전

2021년~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위기 사태 이후,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문제를 둘러싸고 2022년 2월 22일(현지시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월 24일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하여 우크라이나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동원령에 관한 법령에 서명했으며,[34] 2월 26일에는 국가비상사태와 함께 총동원령을 선포했다.[34]

징집병과 예비군은 "국가 방위, 전투 및 동원 태세 유지"를 위해 90일 동안 소집되었으며, 18세에서 60세 사이의 남성은 출국이 금지되었다.[16]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22년 9월 21일, 군사 경험이 있는 예비군을 대상으로 부분 동원령을 발표했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부 장관에 따르면, 30만 명의 예비군이 동원될 것이라고 한다.[17]

3. 경제적 총동원

국가 비상사태를 맞아 국가 경제 구조를 전시 체제로 전환하는 것을 경제적 총동원이라고 한다.[35]

대한민국데프콘 1호가 발령되면 경제적 총동원령이 내려진 상태가 되고, 전국의 모든 민간공장에서 군수물자를 생산하게 된다. 경제 동원은 국가 비상사태에 사용하기 위해 자원을 준비하고자 국가 경제 조직의 변화를 수행하는 것이다.[18]

이는 총력전을 지원하기 위해 자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도록 국가 경제의 기능을 재조직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각 국가의 가용 자원과 생산 능력에 따라 경제 동원의 정도와 강도가 결정되었다.[19] 따라서 전쟁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경제 자원을 효과적으로 동원하는 것은 국가적 규모의 우수한 조정과 생산 능력이 필요한 복잡한 과정이다.[19] 일부 학자들은 전쟁을 목적으로 사회와 그 자원을 대규모로 동원하는 것이 국가 건설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20] 허브스트(Herbst)는 외부 침략자에 대응해야 하는 요구가 구조적 변화를 강요하고 공통의 국가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동기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21]

4. 징병제 국가

징병제를 시행하는 국가들은 평시에는 일부 병력만 상비군으로 유지하고, 나머지는 예비군으로 편성하여 유사시 동원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이러한 총동원 체제는 국가 안보에 필수적이지만, 대규모 병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정교한 법적, 행정적 준비가 필요하다.[25][26]

19세기 후반, 철도의 발달은 동원 개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전에는 육상 수송의 느린 속도로 인해 동원령이 예비군에게 전달되고 지휘 하에 들어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철도 발달로 병력의 국내 이동이 신속해졌다. 프로이센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보불 전쟁에서 철도를 활용하여 군사적 우위를 점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대영 제국은 유럽 열강 중 유일하게 징병제를 실시하지 않았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징병제를 도입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프랑스 제3공화국, 독일 제2제국, 러시아 제국은 의무 징집으로 수백만 명의 군대를 유지했다.[24]

미국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징병제를 실시하지 않았으나, 1917년 참전 이후 징병제를 도입하여 대규모 병력을 유럽 전선에 파견했다.

4. 1. 원인

징병 국가의 군사 시스템은 평시에는 일부 병력만 상비군으로 유지하고, 나머지는 예비군으로 편성하여 유사시 동원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이러한 총동원 체제는 국가 안보에 필수적이지만, 대규모 병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정교한 법적, 행정적 준비가 필요하다. 특히, 철도의 발달은 대규모 병력과 물자를 신속하게 이동시켜 총동원 체제의 효율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는 군사 작전의 속도와 규모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25][26]

19세기 후반, 철도의 발달은 동원 개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전에는 육상 수송의 느린 속도로 인해 동원령이 예비군에게 전달되고, 이들이 지휘 하에 들어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적군의 침공이나 해상 수송을 통한 상륙 작전을 막기 어려웠다. 그러나 철도의 발달로 무장한 병사들의 국내 이동이 신속해져, 적의 침공에 동원된 사단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이센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보불 전쟁에서 철도를 활용하여 군사적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각국 모두 철도와 교통 수단이 발달하여 이러한 우위가 옅어졌고, 양측이 신속하게 병력을 서부 전선에 집중시켜 참호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대영 제국은 유럽 열강 중 유일하게 징병제를 실시하지 않았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징병제를 도입해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프랑스 제3공화국, 독일 제2제국, 러시아 제국은 의무 징집으로 수백만 명의 군대를 유지했다.[24] 이들 국가는 동원령을 통해 예비군을 소집하여 전쟁에 대비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각국의 총동원령이었다. 독일 사령부는 프랑스 침공 시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동원령을 발동하지 않으려 했으나, 슐리펜 계획에 따라 결국 동원령이 발동되었다. 러시아 역시 스타브카 계획에 따라 동원령을 발동했고, 이는 독일과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미국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징병제를 실시하지 않았으나, 1917년 참전 이후 징병제를 도입하여 대규모 병력을 유럽 전선에 파견했다.

4. 2. 총동원

1914년 당시 영국유럽 열강 중 유일하게 징병제를 실시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프랑스 제3공화국, 독일 제2제국, 러시아 제국 등은 의무 징집으로 수백만 명의 군대를 유지하며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었다.[24] 이들 국가는 평시에는 예비군으로 병력을 유지하며 동원령을 통해 전시 병력을 확보했다.[25][26]

총동원 체제는 상대방에게 전쟁 의사로 간주되어 개전 이유[27]가 되기도 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도 각국의 총동원령이었다. 독일 사령부는 프랑스 침공 시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동원령을 발동하지 않았지만, 빌헬름 2세가 승인한 슐리펜 계획에는 동원령 발동이 포함되어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스타브카 계획은 오스트리아 제국이나 독일 제2제국을 주적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1914년 6월 28일 니콜라이 2세는 부분 동원령을 실시하려 했으나, 조언자들은 부분 동원령이 혼란을 야기하고 독일과의 전쟁은 시간 문제이므로 총동원령이 필요하다고 간언했다. 차르는 총동원령으로 마음을 굳혔으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만류로 다시 부분 동원령을 결정하려 했다. 그러나 다음날 외무성 장관 세르게이 사조노프의 간언으로 최종적으로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이에 독일도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독일은 슐리펜 계획을 수정하여 총동원령을 발동했다. 러시아와 독일 모두 양면전 계획으로 전쟁 계획을 변경했다. 독일은 8월 3일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벨기에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중립국 벨기에에 대한 위협으로 대영 제국도 독일에 선전포고하여 삼국동맹이 결성되었다. 유럽 대륙은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징집된 독일군들은 총구에 꽃을 달고 행진했고, 공짜 기차로 전선에 모였다. 독일은 1만 1천 량이 넘는 기차로 라인강을 넘었고, 프랑스는 7천 량 정도였다. 영국은 16만 5천 마리, 오스트리아는 75만 마리, 독일은 71만 5천 마리, 러시아는 백만 마리 이상의 말을 동원했다.[25][29]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는 연합군으로 참전하여 130여 개 이상의 대대를 증강시켰다. 정규군 숫자는 백만에서 백오십만으로 늘었다.[29] 1916년 8월 17일 루마니아도 참전하여 23개 사단을 동원했으나, 연합군에 패배했다. 불가리아는 인구의 1/4에 달하는 80만을 동원했다.

러시아 제국은 포탄 생산량을 2천 퍼센트 증가시켰고,[29] 프랑스에서는 여성들을 동원해 1915년 매일 10만 개의 포탄을 생산했다.[31]

1917년 4월 6일 미국이 참전했다. 참전 당시 107,641명의 병력을 동원했으나, 미 해군의 동원 규모는 컸다. 미국은 징집으로 병력을 늘려 1918년 종전 시까지 3백만 명의 병력을 유럽에 동원했다.[32]

프랑스-폴란드 군사 동맹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8월 26일 예비 동원령, 9월 1일 총동원령을 공표했다. 폴란드1939년 8월 24일 부분 동원령, 8월 30일 총동원령을 발동했다. 9월 1일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했지만, 동원령 발동을 주저했다.

캐나다1939년 8월 25일 부분 동원령, 9월 1일 2개 사단을 동원하고 9월 10일 영국으로 1개 사단을 파견했다. 1940년 5월이 되어서야 3개 사단을 추가 동원했다.[33]

로마 공화국은 비상시 총 인구의 6%에서 최대 10%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2] 미국 남부 연합은 미국 남북 전쟁 (1861–1865) 당시 자유 인구의 약 11%를 동원했다.[2] 프로이센 왕국은 1760년과 1813년에 총 인구의 약 6–7%를 동원했다.[2] 스웨덴 제국은 1709년에 7.7%를 동원했다.[2]

17세기 군대는 평균 20,00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3] 19세기 군대는 평균 100,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4]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은 근대 군대 동원의 문제점을 보여주었다. 프로이센은 나폴레옹 3세가 1859년에 130,000명의 병사를 군사 철도로 이탈리아로 수송하면서 대규모 군대 동원의 미래를 깨달았다.[5]

전쟁 발발 시, 병사로 사용할 수 있는 한계 연령까지 일시에 동원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총동원이라고 한다. 국가 경제를 담당하는 노동력 부족으로 경제 파탄을 초래하고, 장기적으로 인구 균형이 무너진다.

제1차 세계 대전러시아 제국이 동원을 걸자 독일 제국슐리펜 계획에 따라 총동원을 걸면서 개전했다. 제2차 세계 대전폴란드, 프랑스, 소련 등은 개전 후에 총동원을 걸었다.

5. 여성 동원

전시 상황에서 여성의 역할은 크게 변화해 왔다. 과거에는 주로 후방에서 물자 지원 등의 역할을 맡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고 총력전 양상을 띠면서 여성도 직접 전투에 참여하거나 군수 공장 등에서 일하는 등 동원의 대상이 되었다.

; 영국


  • 1917년: 지원 육군 부인 부대(Women’s Army Auxiliary Corps, WAAC)가 편성되었다.
  • 1918년: 왕립 부인 공군이 편제되었다.
  • 1938년: 영국군 예비역의 국방 의용군 및 부인군을 집합하여 보조 지방 의용군(Auxiliary Territorial Service, ATS)이 설립되었다.
  • 1939년: 부인 보조 공군(Women's Auxiliary Air Force, WAAF)이 조직되었다.
  • 1949년: 왕립 부인 육군(~1992년), 왕립 부인 공군(~1994년)이 편제되었다.


; 미국

  • 1942년: 부인 육군 부대(Women's Army Corps, WAC), 해군 부인 의용 부대(Women’s Accepted for Volunteer Emergency Service, WAVES)가 편성되었다.


; 소련

  • 제46근위 야간 폭격 항공 연대(여성 공군)가 활약했다.


; 중국

  • 1911년: 여자 북벌 감사대가 조직되었다.
  • 1926년: 우한(무한) 중앙군사정치학교에서 여생대가 조직되었다.[22]


; 일본

이러한 여성 동원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확대하고, 여성 참정권 획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6. 일본

청일 전쟁에서는 20-32세의 병역 연령층의 동원률이 5.7% (국외 동원률 4.1%)로 추산된다.

1925년에 우가키 가즈시게가 삭감한 17개 상비 사단을 1937년 중일 전쟁 개전부터 태평양 전쟁 개시까지 49개로 증가시켰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프랑스는 반 달도 안 되어 80개 사단을 동원하여 전선에 투입했다. 일본 제국은 1914년 시점에서 이미 독일과 프랑스의 인구를 넘어섰으며, 인적 자원 면에서 보면 사단 증강은 용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사단 증강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동원이 군사적 의미를 가지는 것은 평시의 징병 인구를 많이 유지하고 있는 경우이다. 이것은 수 년의 징병 인원 증강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훈련 인구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독일 등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았지만, 오히려 중일 전쟁이라는 전시 하에서도, 사단 증강을 위한 훈련보다는 사단의 장비 충실과 그 유지를 위한 재원 마련에 중점을 두어야 했던 것이 원인이다.

중일 전쟁 중에 시행된 국가 총동원법은 병력 동원을 위한 법안이라기보다는, 경제 동원으로서의 측면이 강하다. 해당 법 조항에는 "''칙령에 의해 신민을 징용하여 총동원 업무에 종사하게 한다''", "''총동원 물자의 확보를 위한 압류・수출입 관세 변경・법인 통폐합 및 설립・가격 임금 변경을 칙령에 의해 명령할 수 있다''", "''병역법은 징용에 우선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어, 동원의 군사적 의미와는 관계없는 법안임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 법안의 "총동원"은 동원의 군사 용어로부터 전용된 의미에 입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23]

또한, 구 일본군의 전시 동원을 강제 연행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어 논란이 있다 (강제 연행 참조).

7. 동원의 영향

동원령은 국가 경제와 사회에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우선, 평상시에 경제 활동에 참여하던 인력이 징병되면서 국가 경제에 큰 부담을 준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처럼 젊은 층의 대량 사상으로 인해 인구 분포에 큰 변화가 발생할 수 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와 양 대전 간 기간에 프랑스의 출생률은 크게 감소했고, 이는 군사력 약화로 이어졌다.[4]

17세기 군대는 평균 20,000명 규모였고, 이들은 하루에 약 20ton의 식량, 숙소, 탄약, 운송 수단(말 또는 노새), 도구, 의복 등을 필요로 했다.[3] 효율적인 운송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이 정도 규모의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생명을 위협할 수 있었다.[3] 병사들은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보급품을 직접 운반하거나, 식량을 조달해야 했다.[3] 그러나, 식량 조달은 군대가 농업 생산량이 많은 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었다.[3]

19세기에는 징병제, 인구 증가, 국가적 부의 증가로 군대 규모가 평균 100,000명으로 늘어났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600,000명의 군대를 이끌었고, 감자와 같은 풍부한 농산물을 공급받았다.[4] 그러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는 데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5]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은 근대 군대 동원의 문제점을 보여주었다. 나폴레옹 3세는 1859년에 130,000명의 병사를 군사 철도로 이탈리아로 수송했지만, 프랑스군과 피에몬테 군대의 보급품을 운반하는 수송대는 매우 느렸고, 무기들은 엉성하게 정리되어 있었다.[5][6] 오스트리아 군대 역시 보급 문제와 더불어 의사소통 문제를 겪었다. 오스트리아 군대는 주로 슬라브족으로 구성되었지만, 다른 많은 민족도 포함되어 있었다.[7] 평시 오스트리아 군사 훈련은 9개의 다른 언어를 사용했지만, 장교들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릴 때 독일어만 사용하도록 강요받았다.[7] 솔페리노 전투에서 한 오스트리아 장교는 자신의 부대가 "정지"라는 명령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고 언급했다.[7]

한편,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장기간의 동원으로 인해 남성이 담당하던 경제 영역을 메우기 위해 여성의 사회 진출이 이루어졌다. 전쟁 이후 각국은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8. 현재

냉전 종식과 군사 기술 발전으로 많은 국가들이 징병제를 폐지하고 직업 군인 중심 군대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스위스,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스라엘 등은 여전히 징병제를 유지한다. 이들 국가는 게릴라 전술 대응, 인접 국가와의 군사적 긴장, 스파이 및 테러 위협, 중립 유지를 위한 상징 등 다양한 이유로 징병제를 유지한다. 또한, 징병제가 수십 년 동안 지속되며 성인이 되는 통과의례로 인식되어 폐지 반대 여론도 존재한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우크라이나는 국가비상사태와 함께 총동원령을 선포했다.[34]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022년 2월 24일,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총동원령 법령에 서명했다. 징집병과 예비군은 "국가 방위, 전투 및 동원 태세 유지"를 위해 90일 동안 소집되었으며, 18세에서 60세 사이 남성은 출국이 금지되었다.[16]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22년 9월 21일, 군사 경험이 있는 예비군 대상 부분 동원령을 발표했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부 장관은 예비군 30만 명이 동원될 것이라고 밝혔다.[17]

참조

[1] 웹사이트 Mobilization in World War II https://permanent.ac[...]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2020-03-05
[2] 서적 People, Land, and Politics: Demographic Developments and the Transformation of Roman Italy 300 BC-AD 14 https://books.google[...] BRILL
[3] 학위논문 Technology and the Era of the Mass Army https://web.archive.[...] IMT Lucca, Stanford University, and New York University
[4] 기타 Die Starkeverhaltnisse in den bedeutesten Schlachten Vincennes, Archive de l'Armèe de Terre (AAT), 7N848, Gaston Bodart
[5] 서적 The Franco-Prussian War Granada
[6] 기타 Précis historique de la campagne d'Italie en 1859 Vincennes, AAT, MR 845, Anon.
[7] 간행물 Über die Truppensprachen unserer Armee Österreichische Militärische Zeitschrift (ÖMZ)
[8] 인용
[9] 웹사이트 Population of Germany http://www.tacitus.n[...] Tacitus.nu 2008-08-30
[10] 인용
[11] 인용
[12] 인용
[13] 인용
[14] 서적 Encyclopedia of World War II https://books.google[...] H W Fowler
[15] 인용
[16] 웹사이트 Ukraine president orders general mobilization – DW – 02/25/2022 https://www.dw.com/e[...]
[17] 뉴스 'This is not a bluff': Putin mobilises Russia's military and says he will respond to 'nuclear blackmail' if threatened https://www.abc.net.[...] 2022-09-21
[18] 웹사이트 Economic mobilization http://usmilitary.ab[...] 2006-05-13
[19] 서적 The Economics of World War II: Six great powers in international comparis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 학술저널 War and the State in Africa 1990-03
[21] 학술저널 War and the State in Africa
[22] 학술논문 近代中国における女性兵士の創出 武漢中央軍事政治学校女生隊
[23] 웹사이트 動員の予行演習…関特演 http://ww1-danro.com[...]
[24] 기타
[25] 서적 The First World War Alfred A. Knopf, Inc.
[26] 웹사이트 독일 역대 인구수 일람 http://www.tacitus.n[...]
[27] 기타
[28] 기타
[29] 기타
[30] 기타
[31] 기타
[32] 기타
[33] 기타
[34] URL https://www.bbc.com/[...]
[35] 웹사이트 Economic mobilization http://usmilitary.ab[...] 2006-05-1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