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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둘푸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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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둘푸스 1세는 923년부터 936년까지 서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재위했다. 그는 부르고뉴 공작 리샤르와 오세르 백작의 딸 아델라이드의 아들로, 로베르 1세의 사위가 되어 왕위를 계승했다. 라둘푸스는 바이킹과 마자르족의 침입에 대응하고, 로렌 지역을 둘러싸고 동프랑크 왕국과 대립했다. 그는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와 권력 다툼을 벌였으며, 936년 사망 후 카롤링거 왕가의 루이 4세가 왕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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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둘푸스 1세
기본 정보
라울
칭호서프랑크 국왕
재위 기간923년 7월 13일 – 936년 1월 14/15일
대관식923년 7월 13일, 소와송의 생 메다르 수도원
선대 국왕로베르 1세
후대 국왕루이 4세
배우자엠마 드 프랑스
왕가비비니드 가문
아버지정의공 리샤르
어머니아델라이드 도세르
출생일기원후 890년경
사망일936년 1월 14일/15일 (45-46세)
사망 장소오세르
이름
프랑스어Rodolphe
프랑스어 (다른 표기)Raoul

2. 이름

현대 라틴어 문서에서 그의 이름은 보통 "Rodulfus"로 표기된다. 이는 게르만어 어원인 "hruod"(명성, 영광)와 "wulf"(늑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Rodulf와 Rudolf는 이 이름의 변형이며, 프랑스어 형태는 "Rodolphe"이다.

한편, 이 왕은 현대 프랑스어에서는 일반적으로 "Raoul"로 알려져 있다. 이는 게르만어 "rad"(상담)와 "wulf"에서 유래된 "Radulfus"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영어 이름 랄프(Ralph)의 어원이기도 하다. 비록 "Rodulfus"와 "Radulfus"는 다른 어원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대 사람들은 때때로 두 이름을 혼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왕 본인은 개인 인장에서 항상 "Rodulfus"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권에서는 그를 랄프(Raoul에서 유래) 또는 Radulf라고 부르기도 한다.

3. 생애

데니에 루돌프


라둘푸스 1세는 890년경 부르고뉴 공작 리처드 정의공과 오세르의 아델라이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921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부르고뉴 공작위를 계승했으며, 같은 해 서프랑크의 유력 귀족 로베르 1세의 딸 엠마와 결혼했다.

922년 장인 로베르 1세가 샤를 3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듬해 수아송 전투에서 전사했다. 로베르 1세의 아들 위그 대공이 왕위 계승을 거부하자, 귀족들은 라울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라울은 923년 7월 13일 수아송의 생 메다르 수도원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즉위했으며, 부르고뉴 공작령은 동생 위그 르 누아르에게 넘겨주었다.

그의 치세는 바이킹과 마자르족의 침입에 맞서 싸우고, 로타링기아 영유권을 두고 동프랑크 왕국의 하인리히 1세와 대립하는 등 대외적인 어려움 속에서 시작되었다. 925년 결국 로타링기아는 동프랑크 왕국에 넘어갔다. 내부적으로는 폐위된 샤를 3세를 포로로 잡고 있던 처남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왕권을 유지해야 했다. 헤르베르트 2세는 샤를 3세를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나, 929년 샤를 3세가 사망하면서 그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라울은 아키텐 등 남부 지역의 충성을 확보하고 노르망디 공작 장검공 기욤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왕국의 영향력을 넓히려 노력했다.[1] 또한 헤르베르트 2세의 세력을 견제하며 제후들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다.[4] 13년간의 통치 끝에 라울은 936년 1월 14일 또는 15일 오세르에서 아들 없이 사망했다. 그의 사후, 위그 대공의 주도로 잉글랜드에 망명 중이던 샤를 3세의 아들 루이 4세가 왕위를 계승했다.[4]

3. 1. 가계와 초기 활동

라울


라둘푸스 1세는 890년경 부르고뉴 공작 리처드 정의공과 오세르의 아델라이드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아델라이드는 웰프가 출신으로, 욱소르의 콘라트 2세의 딸이다. 친할아버지는 고르즈의 비빈(Bivin of Gorze)이며, 백부로는 프로방스의 보소가 있고, 고모 리첼다는 서프랑크의 대머리왕 카를 2세의 후처였다.

외가로는 외할아버지 욱소르의 콘라트 2세가 트란스제인과 부르고뉴의 공작이자 욱소르 백작이었으며, 외증조부는 욱소르의 콘라트 1세이다. 외고조부인 구엘프 1세는 루트비히 경건왕의 후처 바이에른의 유디트와 독일인 루트비히의 왕비 바이에른의 엠므의 아버지이기도 하다.[6] 따라서 카를 2세, 카를만, 청년 루트비히, 뚱보왕 카를 3세 등은 라울의 외할아버지 욱소르의 콘라트 2세와 사촌 관계가 된다. 또한 외할머니는 투르의 위그의 딸인 투르의 아델라이드이다.

921년 아버지 리처드 정의공이 사망하자, 라울은 부르고뉴 공작 지위를 비롯하여 오세르 백작, 오텡 백작, 아발론 백작 등의 작위를 계승했다. 또한 오세르 생 제르맹 수도원과 상스 생트 콜롱브 수도원의 평신도 수도원장 자리도 물려받았다. 같은 해, 그는 서프랑크의 유력 귀족인 파리 백작 로베르 1세의 딸이자 위그 대공의 누나인 엠마와 결혼했다. 라울과 엠마 사이에는 아들 루이가 있었으나 요절했다.[2] 921년부터 뫼우 백작을 겸임했으나, 이 자리는 936년 부르고뉴 출신의 위그에게 양도했다.

당시 서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샤를 3세는 로렌 영유권 문제로 귀족들의 반감을 샀고, 결국 922년 폐위되었다. 라울은 장인 로베르 1세와 함께 이 반란에 참여했으며, 로베르 1세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로베르 1세는 이듬해인 923년 6월 15일, 폐위된 샤를 3세 측과의 수아송 전투에서 전사했다.

로베르 1세의 아들인 위그 대공이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었으나, 그가 왕위 계승을 거부하면서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은 로베르 1세의 사위인 라울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귀족들은 독일 혈통이 아니라는 점 등을 고려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라울은 923년 7월 13일, 수아송의 생 메다르 수도원에서 상스 대주교 발테르에 의해 대관식을 치르고 서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했다.[3] 왕위에 오른 후,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부르고뉴 공작 지위를 동생인 위그 르 누아르에게 넘겨주었다.

3. 2. 서프랑크의 국왕 즉위

라둘푸스 1세


당시 서프랑크의 왕 샤를 3세는 로타링기아 영유 문제에 집착하여 국내 귀족 및 성직자들의 반감을 샀고, 결국 922년 폐위되었다. 샤를 3세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로베르 1세는 923년 6월 수아송 전투에서 샤를 3세의 군대와 싸우다 전사했다. 로베르 1세의 아들인 위그 대공이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었으나, 그가 왕위 계승을 거부하자 로베르 1세의 사위였던 라울이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었다.[3]

923년 7월 13일, 라울은 상스 대주교 발터의 집전 하에 수아송의 생메다드 수도원에서 서프랑크 왕국의 왕관을 수여받고 즉위했다. 왕위에 오른 라울은 자신의 동생인 위그 르 누아르에게 부르고뉴 공작위를 물려주었다. 한편, 폐위되었으나 여전히 왕위를 주장하던 샤를 3세는 라울의 동서인 베르망두아의 헤르베르트 2세의 계략에 넘어가 페론 성에 감금되는 신세가 되었다.[4]

그러나 프랑스 남부의 귀족들은 라울의 왕위 계승 소식을 접하지 못했거나 인정하지 않았고, 샤를 3세의 복위를 요구하며 라울의 즉위에 이의를 제기했다. 특히 아키텐 공작 기욤 2세는 자신이 메로빙거 왕조 및 카롤링거 왕조(외할머니가 카를 마르텔의 딸 알다)의 혈통임을 내세우며 라울에게 반기를 들고 왕위를 요구했다. 혼란한 상황 속에서 마자르족 또한 국경을 넘어 상파뉴 일대까지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즉위 직후 라울은 로타링기아를 병합하려던 동프랑크 왕국의 왕 하인리히 1세와 대립하여 군사적 충돌을 겪었으나, 곧 평화 협상을 맺었다. 하지만 925년 하인리히 1세는 다시 서프랑크 군을 공격하여 로타링기아를 동프랑크 왕국의 영토로 완전히 편입시켰다.[5]

3. 3. 통치와 업적



923년 로베르 1세가 수아송 전투에서 사망한 후, 그의 사위였던 라둘푸스는 위그 르 그랑의 양보로 서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선출되어 즉위했다.[3] 그의 통치는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 3세를 지지하는 세력과의 대립, 외부 세력의 침입, 그리고 강력한 제후들과의 관계 속에서 왕권을 유지하고 확장하려는 노력으로 점철되었다.

즉위 초 동프랑크 왕국의 하인리히 1세와 로타링기아를 두고 대립했으나 결국 925년 로타링기아는 동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다.[5] 또한 바이킹과 마자르족의 지속적인 침입에 맞서 왕국을 방어해야 했다. 라둘푸스는 위그 르 그랑 등 다른 제후들과 협력하여 이들 외부 세력에 대응했으며, 통치 말기에는 일시적인 안정을 가져왔다.

내부적으로는 강력한 제후, 특히 처남인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와의 관계가 복잡했다. 헤르베르트 2세는 폐위된 샤를 3세를 이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라울은 그와 대립하고 협력하는 과정을 통해 왕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샤를 3세가 929년 사망한 이후에는 헤르베르트 2세의 세력을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라둘푸스는 아키텐 지역 제후들의 충성을 확보하고, 933년에는 노르망디 공작 장검공 기욤으로부터 조공과 함께 채널 제도를 하사받는 등 왕국의 영향력을 남부와 서부로 확장하려 시도했다.[1] 그는 제후들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13년간 왕국을 통치했으나,[4] 936년 1월 오세르에서 아들 없이 사망했다. 그의 사후 위그 르 그랑의 주도로 잉글랜드에 망명 중이던 샤를 3세의 아들 루이 4세가 왕위를 계승했다.[4]

3. 3. 1. 대외 관계

라둘푸스 1세는 즉위 초부터 주변 세력과의 관계 정립에 힘썼다. 특히 동프랑크 왕국의 하인리히 1세와는 로타링기아의 영유권을 두고 대립했다. 처음에는 율리히에서 맺어진 조약을 바탕으로 군사적 충돌 없이 평화를 유지했으나, 925년 하인리히 1세는 다시 로타링기아를 공격하여 결국 동프랑크 왕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당시 라둘푸스는 이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만한 힘이 부족했다.[5]

왕국의 또 다른 위협은 바이킹(노르만족)의 지속적인 침략이었다. 924년 바이킹이 루아르 계곡을 약탈하고 위그 르 그랑을 위협했을 때 초기에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이킹이 왕실 영지인 멜룅까지 위협하자, 라둘푸스는 동생의 영지인 부르고뉴에서 군대를 모으고 위그 르 그랑을 설득하여 함께 맞섰다. 이후 에르베르 2세, 아르눌프 1세 등과 연합하여 외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포캉베르그 근처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왕 자신이 부상을 입고 퐁티외 백작이 전사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한편, 911년 샤를 3세에 의해 정착한 노르망디 공작령의 노르만족들도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933년에는 노르망디 공작 장검공 기욤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채널 제도를 하사하기도 했다.[1] 이후 아키텐의 에발루스와 함께 남부의 바이킹 세력을 소탕하는 원정을 벌이기도 했다.

마자르족의 침입 역시 중요한 문제였다. 924년경 처음 침입했을 때 라울은 이들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프로방스 지역을 위협하던 마자르족 문제에 대해 루이 3세와 논의하고 해결을 촉구했다. 930년 마자르족이 랭스 인근까지 침입했으나 교전 없이 물러갔고, 935년에는 부르고뉴를 침략한 마자르족에 맞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전투 없이 후퇴시켰다. 라둘푸스가 사망할 무렵 서프랑크 왕국은 바이킹과 마자르족의 위협으로부터 일시적인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3. 3. 2. 베르망두아 백작과의 갈등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는 자신이 포로로 잡고 있던 서프랑크의 전 국왕 샤를 3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외조카 사위이자 동서인 라울에게 여러 이권을 요구하는 협상 수단으로 삼았다. 라울은 비록 죄수복 차림의 포로였지만 샤를 3세를 만나자 칼을 바치며 군주로 예우했다. 그러나 군주를 납치하고 감금하여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헤르베르트 2세에게 염증을 느낀 라울은 점차 그를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926년 레온 백작 로저 1세가 사망하자, 헤르베르트 2세는 자신의 아들 외드에게 백작직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지만 라울은 이를 거절했다. 헤르베르트 2세는 감금된 샤를 3세를 위협하며 레온을 요구했고, 레온 시내를 점령하기까지 했지만 라울은 927년까지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헤르베르트 2세는 927년 라울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생 캉탱에 요새를 건설했다. 929년에는 페로네에도 요새를 세우자 라울은 그를 더욱 경계했다. 헤르베르트 2세는 928년 아미앵에 성곽을 수축하며 세력을 키우려 했으나, 라울은 931년 아미앵을 압수했다.

헤르베르트 2세는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의 힘을 빌려 라울 왕에게 다시 레온을 요구하여 929년에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928년에는 라울로부터 (Laon) 지역을 양도받아야 했다. 앞서 925년에는 샤를 3세를 이용하여 아들 위그를 랭스 대주교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

그러나 929년 샤를 3세가 페론의 감옥에서 사망하면서 헤르베르트 2세는 라울을 압박할 가장 중요한 수단을 잃었다. 이는 라울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었다. 라울은 여러 귀족의 도움을 얻어 공세에 나섰다. 931년, 라울은 아미앵을 압수한 데 이어 랭스로 진군하여 헤르베르트 2세의 아들 위그 대신 아르탈드를 새로운 대주교로 임명했다.

이후 라울은 위그 르 그랑과 힘을 합쳐 헤르베르트 2세의 요새들을 불태우고 그를 샤토티에리로 몰아붙였는데, 이곳은 헤르베르트가 933년부터 934년까지 샤를 3세를 처음 감금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 끝에 두 사람은 935년 마침내 화해했다.

3. 3. 3. 국내 정책



라울의 첫 번째 행동은 즉위 초 동 프랑크 왕국의 국왕 헨리 1세를 상대로 군대를 이끄는 것이었다. 로타링기아를 합병하려 시도했으나, 헨리 1세와의 군사적 충돌 후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925년, 헨리 1세는 로렌의 길베르트 공작을 공격하여 로타링기아를 영구적으로 점령했는데, 라울은 저항할 입장이 아니었다.[5]

924년에는 바이킹루아르 계곡부르고뉴 등 서 프랑크 왕국을 다시 침략했다. 라울은 위그 르 그랑, 에르베르 2세 등과 연합하여 이들을 격퇴하려 노력했다. 이후 샤를 3세가 911년 정착시킨 노르만족이 노르망디 공작령을 기반으로 약탈을 자행하자, 라울은 플랑드르의 아르눌프 1세, 에르베르 2세 등과 함께 외를 점령했으나, 포캉베르그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

또한 동쪽에서는 마자르족의 위협이 있었다. 930년 마자르족이 랭스 인근을 침략했으나 라울이 군대를 동원하기 전에 물러갔다. 935년에는 마자르족이 부르고뉴를 침략하자 라울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맞섰고, 마자르족은 전투 없이 후퇴했다. 라울의 통치 기간 동안 서 프랑크 왕국은 바이킹과 마자르족의 위협으로부터 일시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강력한 제후인 에르베르 2세와의 관계가 중요했다. 에르베르 2세는 자신이 포로로 잡고 있던 폐위된 왕 샤를 3세를 이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는 925년 아들 위그를 랭스 대주교 자리에, 927년 다른 아들 오도를 라옹 백작 자리에 앉히려 시도했다. 라울의 불만으로 인해 에르베르 2세는 샤를을 루앙 백작인 장검공 기욤에게 조공을 바치게 한 다음, 교황 요한 10세에 대한 샤를의 주장을 펴기 위해 랭스로 데려갔다. 928년 에르베르 2세가 라옹을 차지했지만, 929년 샤를 3세가 페론에서 사망하면서 에르베르 2세는 라울을 견제할 중요한 수단을 잃었다.[4]

리무쟁에서 바이킹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후 라울은 아키텐의 충성을 받았고, 933년에 그에게 노르망디 해안의 섬들, 현재 채널 제도로 불리는 곳을 하사한 장검공 기욤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1]

929년 라울은 아키텐의 에발루스 공작의 권력을 줄이려 시도했다. 그는 그로부터 베리에 대한 접근을 철회했고, 932년 툴루즈 백작인 레이몽 퐁, 루에르그 백작인 에르멩골 형제에게 고티아 공작의 칭호를 수여했다. 그는 또한 오베르뉴 백작령을 레이몽에게 이전했다. 더욱이 샤루의 영주가 통제하던 변경백령의 영토는 독립적인 백작령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나중에 라울은 에발루스와 함께 남부에서 마지막 바이킹 거점을 근절하기 위해 원정을 벌였다. 그런 다음 그는 에르베르 2세를 상대로 공격적으로 나섰고, 랭스로 진군하여 931년 위그를 랭스의 아르탈드로 교체했다. 그 후 위그 르 그랑과 합세하여 루돌프는 에르베르의 요새를 불태우고 그를 샤토-티에리에 몰아넣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933년부터 934년까지 샤를을 처음 감금했다. 두 사람은 935년에 화해했고, 라울은 병에 걸려 몇 달 후인 936년 1월 14일 또는 15일에 아들 없이 사망했다. 그의 사후 위그 르 그랑의 주도로 잉글랜드의 웨식스에 망명해 있던 카롤링거 왕조의 루이 (샤를 3세의 아들)를 다음 서프랑크 왕으로 맞이했다.[4] 라울의 13년 치세 동안 왕권은 서 프랑크 왕국 전역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국내 제후들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4]

3. 4. 죽음

만년에 라울은 피부병을 오래 앓았다.[10] 933년934년에 걸쳐 그는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 2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랭스로 진격하여, 에르베르 2세가 단순왕 샤를을 감금했던 요새를 불태웠다. 935년에는 마침내 에르베르 2세의 항복을 받아냈다. 같은 해 마자르족이 부르고뉴를 침략하자 라울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맞섰고, 마자르족은 전투 없이 물러났다. 이후 그의 죽음까지 약 1년간 서프랑크 왕국은 마자르족과 노르만족의 침입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라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에르베르 2세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샤토 티에리 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936년 1월, 라울은 갑자기 다른 병에 걸렸고, 1월 14일 또는 15일에 오세르에서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한때 카롤링거 왕조 지지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로베르 1세의 딸 엠마와의 사이에서 아들 루이가 있었으나 요절했고,[2][8][9] 딸 유디트가 있었으나[10] 그녀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라울에게는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에, 그의 의붓 동생인 위그 대공은 잉글랜드에 망명 중이던 카롤링거 가문의 루이 4세(샤를 3세의 아들)를 다음 서프랑크 왕으로 추대했다.[4]

4. 가족 관계

외가 쪽으로는 경건왕 루트비히의 후처 유디트 폰 바이에른, 독일인 루트비히의 처 바이에른의 엠므의 친정오라비인 오세르의 콘라트 1세의 외증손이 된다.

관계이름비고
할아버지비빈 고르즈
숙부보소 5세프로방스 지역에서 자립
아버지리샤르 정의공오툉 공작
어머니오세르의 아델라이드트란스유렌시스 부르군드의 공작 콘라트 2세의 딸, 오세르의 콘라트 1세의 손녀
부인서프랑크의 엠마935년 사망, 서프랑크의 로베르투스 1세의 딸
아들루이
유디트
장인서프랑크의 로베르투스 1세
장모베아트릭스 드 베르망두아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1세의 딸


참조

[1] 서적 Magni rotuli scaccarii Normanniæ sub regibus Angliæ 1840
[2] 서적 La Préhistoire des Capétiens (Nouvelle histoire généalogique de l'auguste maison de France, vol. 1) éd. Patrick van Kerrebrouck 1993
[3] 문서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간행물 Chronique de l'abbaye de Saint-Bénigne de Dijon (Chronicle St-Bénigne de Dijon) 1875
[1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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