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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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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트비아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하여, 발트족의 정착, 바이킹의 활동, 리보니아 십자군, 한자 동맹 가입 등 중세 시대를 거쳤다. 근세 시대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고,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8세기에는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고, 농노 해방과 민족 각성을 겪었으며, 1905년 혁명,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1918년 독립을 선언했으나, 독립 전쟁과 소련 점령, 나치 독일의 점령을 겪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재편입되었으나, 1990년 독립을 회복했다. 이후 유럽 연합과 NATO에 가입하며 서방 세계에 편입되었고, 유로화를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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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의 역사
개요
라트비아 국장
라트비아 국장
고대 라트비아
문화쿤다 문화
나르바 문화
코드웨어 문화
교역로호박길
민족발트 핀족 (리보니아인, 벤드족)
발트족
라트갈리아인
쿠로니아인
셀로니아인
제미갈리아인
중세
국가예르시카 공국
코크네세 공국
탈라바
사건리보니아 십자군
기사단리보니아 검의 형제단
리보니아 기사단
종교리가 대주교구
영토테라 마리아나
민족발트 독일인
근세
전쟁리보니아 전쟁
국가리보니아 왕국
공국리보니아 공국
행정 구역인플란티 보이보데샤
국가스웨덴령 리보니아
전쟁폴란드-스웨덴 전쟁 (1600–1629)
사건제2차 북방 전쟁
전쟁대북방 전쟁
공국쿨란트-제미갈레 공국
식민 활동쿨란트 식민지
민족 부흥
행정 구역리보니아 현
쿨란트 현
비텝스크 현
운동제1차 라트비아 민족 각성
사상신사조
현대 라트비아
군사라트비아 소총병
점령독일 점령
국가 구상발트 연합 공국
국가라트비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전쟁독립 전쟁
사건1934년 라트비아 쿠데타
점령1940년 소련 점령
점령나치 점령
사건라트비아 홀로코스트
점령1944년 소련 재점령
국가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운동라트비아 인민 전선
혁명노래 혁명
법률독립 회복
경제 위기2008년 라트비아 금융 위기
이민2013년에 22,6000명의 라트비아 거주민이 이민을 선택했다.

2. 선사 시대

현재 라트비아 영토에서 빙하기는 14,000~12,000년 전에 끝났다. 최초의 인간 정착민은 11,000~12,000년 전 구석기 시대에 이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발트해 빙하호를 따라 순록 무리를 따라 강과 해안을 따라 캠프를 치는 사냥꾼이었다. 발트해의 지질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당시 해안선은 더 내륙까지 뻗어 있었다. 살라스필스 근처에서 발견된 가장 초기의 도구는 약 12,000년 전의 후기 구석기 시대로, 스비데르 문화에 속한다.[3]

중석기 시대 (기원전 9000–5400년) 동안 수렵 채집인의 영구적인 정착지가 건설되었다. 그들은 사냥과 어업을 하였으며, 강과 호수 근처에 캠프를 세웠다; 루바나 호 근처에서 25개의 정착지가 발견되었다. 쿤다 문화에서 온 이 사람들은 부싯돌, 사슴 뿔, 뼈 및 나무로 무기와 도구를 만들었다.[3]

인도유럽어족라트비아인(발트어족)이 현재 라트비아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0세기경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리보니아인(우랄어족)이 대거 북시베리아에서 발트해에 면한 리가만 부근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리보니아인의 거주지라는 의미로 리보니아로 불렸다.

3세기 초에는 발트 지역과 핀란드에 사는 사람들이 고트족의 지배를 받았다고 여겨진다. 이 고트족의 왕국은 4세기에 침입해 온 훈족에 의해 멸망했다. 게다가 슬라브족도 동쪽에서 침입해 왔기 때문에, 드니프로강 부근에 있던 라트비아인과 리투아니아인은 발트 지역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8세기 말 이후, 맞은편의 스웨덴, 고틀란드 섬에서 온 해적, 상인 등이 한 무리가 되어 발트해 연안으로 왔다. 이 무리는 약탈과 교역 등을 목적으로 북유럽에서 동쪽으로 향한 스웨덴 바이킹(바략)으로 생각된다. 리보니아 지역의 통상로는 쿠를란트 지역이며, 다우가바강을 경유하여 흑해로 다수가 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무렵에는 발트해 연안 지역에서 바이킹 시대 이전에도 스칸디나비아계 사람들의 교역을 위한 원정이 이루어졌다고 고고학적으로 생각된다. 리보니아 연안에 가까운 글로비나에서 7세기 - 8세기의 스웨덴계 및 고틀란드계 사람들의 정주지 흔적이 발굴되었고, 교역상 · 군사상의 거점이었다고 생각된다.

발트족은 현대에는 사어가 된 서발트어군(고프로이센어를 포함)을 사용했던 서발트인과 현재의 리투아니아어라트비아어의 기원인 동발트어군을 사용하는 동발트인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후에 라트비아의 라트갈레라고 불리는 지역에는 동발트인의 일파인 라트갈리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이 "라트비아"의 국명의 유래가 되었다.

끈 무늬 토기 문화가 라트비아를 포함하는 지역


에스토니아의 빗살무늬 토기 예시, 기원전 4000–2000년


신석기 시대의 뼈 도구


7~8세기의 발트 부족(보라색)

2. 1. 구석기 및 중석기 시대

2. 2. 신석기 시대

초기 신석기 시대(기원전 5400–4100년)는 도기 제작, 축산 및 농업의 시작으로 특징지어진다.[4]

중기 신석기 시대(기원전 4100–2900년) 동안 이 지역에는 나르바 문화(Narva culture)가 발전했다. 이 시대의 주민들은 리보니아인의 조상인 핀족이었다.[4]

후기 신석기 시대(기원전 2900–1800년) 초에 현재의 라트비아에는 발트족에 속하는 끈무늬 토기 문화(Corded Ware culture)의 사람들이 정착했다. 그들은 라트비아인의 조상이었으며, 이들은 기원전 3천 년기부터 라트비아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했다.[4]

2. 3. 청동기 및 철기 시대

라트비아에는 구리나 주석이 없었기 때문에,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확보한 청동은 다양한 장식품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3] 초기 철기 시대(기원전 500년 – 기원전 1세기)에 철제 도구의 도입은 농업을 크게 개선하여 주요 경제 활동으로 만들었다.

중기 철기 시대(400–800 AD)부터 지역 주민들은 뚜렷한 민족적, 지역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발트족은 쿠로니아인, 셈갈리아인, 라트갈리아인, 셀로니아인이 되었고, 핀족은 리보니아인, 에스토니아인, 벤드인이 되었으며, 지역 추장이 등장했다.

Āraiši 호반 거주지는 후기 철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기 철기 시대(800–1200 AD) 동안 삼포식 농법이 도입되었고, 호밀 재배가 시작되었으며, 물레와 더 나은 금속 가공 기술의 도입으로 지역 장인 정신의 품질이 향상되었다.[5] 이 시대의 아랍, 서유럽 및 앵글로색슨 동전이 발견되었다. 토지를 통제하고 안전을 제공하는 나무 요새 네트워크가 건설되었다.[5]

3. 고대 부족 사회 (기원후 1세기~12세기)

고대 라트비아는 바랑기아인에서 그리스인으로 가는 무역로가 다우가바 강을 통해 키예프 루스와 비잔틴 제국으로 이어지는 무역의 요충지였다. 고대 발트족은 이 무역에 활발히 참여했다. 라트비아 해안은 호박 산지로 유명하여 '호박의 땅(Dzintarzeme)'으로 불렸다.

1200년경의 발트 부족


10세기에는 쿠로니아인, 라트갈리아인, 셀로니아인, 셈갈리아인((kurši, latgaļi, sēļi, zemgaļilv), 리보니아인 등 여러 부족 추장국들이 초기 왕국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부족은 라트갈리아인이었으며, 이들의 주요 공국인 예르시카 공국은 류리크 왕조 출신의 동방 정교회 공작이 통치했다. 리보니아 연대기에 언급된 예르시카의 마지막 통치자는 비스발디스 왕이었다.

예르시카 통치 하에 있던 영토 추정


쿠로니아인들은 발트 해 서쪽 해안에서 "발트 바이킹"으로 알려질 정도로 해상 침략을 일삼았다. 셀로니아인과 셈갈리아인은 번성하는 농부로 알려졌으며, 리보니아인들은 어부이자 상인이었다.

기원전 20세기인도유럽어족라트비아인(발트어족)이 현재 라트비아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1세기경에는 리보니아인(우랄어족)이 리가 만 부근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3세기 초에는 고트족의 지배를 받았으나, 4세기훈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8세기 말 이후, 스웨덴 바이킹(바략)이 다우가바 강을 경유하여 흑해로 향하는 등 교역과 약탈을 목적으로 발트해 연안에 진출했다.

12세기 후반, 독일의 침략 이전 라트비아에는 약 13만 5천 명의 발트족과 2만 명의 리보니아인이 거주했다.

4. 중세 시대 (12세기 말~16세기)

12세기 말, 서유럽 상인들은 다우가바 강을 따라 키예프 루스로 무역을 하면서 라트비아를 방문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들과 함께 발트족과 핀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독일인 선교사들도 있었다.

1180년대 초, 성 메인하르트는 다우가바 리보니아인들 사이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리보니아인들은 새로운 믿음과 관습, 특히 세례 의식에 반대했다. 1195년, 교황 첼레스티노 3세는 이교도를 무력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리보니아 십자군을 선포했다. 하노버의 베르톨트가 메인하르트의 뒤를 이었지만, 1198년 현재의 리가 근처에서 리보니아인들에게 살해되었다.

익스킬레 교회, 1185년 성 메인하르트가 라트비아에 지은 최초의 석조 건물


베르톨트의 후계자인 리가의 알베르트 주교는 약 30년 동안 지역 통치자들을 정복하고 독일 지배를 확립했다. 헨리의 리보니아 연대기는 알베르트의 통치에 대한 기록이다. 1201년, 알베르트는 권력 기반으로 리가를 건설했다. 리가는 점차 발트해 남부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1202년, 지역 주민들을 복속시키기 위해 검의 형제 기사단이 설립되었다. 1207년까지 리보니아인들이 정복되었고, 1214년까지 대부분의 라트갈리아인들이 정복되었다. 1207년, 테라 마리아나(이후 리보니아 연합)가 설립되었다. 테라 마리아나는 현재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 있는 교회와 기사단에 속한 다양한 영토로 구성되었으며, 로마 교황의 직접적인 권한 하에 있었다. 1228년에 리보니아 연합이 설립되었다.

1236년, 사울레 전투에서 검의 형제 기사단이 전멸하자, 튜튼 기사단에 리보니아 기사단으로 편입되었다. 1260년, 두르베 전투는 프로이센과 쿨란트에 있는 그들의 영토 사이의 넓은 육교에 대한 튜튼족의 희망을 파괴했다.

13세기 말까지 쿠로니아인과 세미갈리아인이 정복되었다 (1290년에 대부분의 세미갈리아인들은 독일이 정복한 지역을 떠나 리투아니아로 이주). 이로써 고대 라트비아인들의 개별 부족 왕국 발전은 종식되었다.

1260년경 중세 리보니아

4. 1. 리보니아 십자군 (1184년~1290년)

12세기 말, 서유럽 상인들은 다우가바 강을 따라 키예프 루스로 무역을 하면서 라트비아를 방문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들과 함께 발트족과 핀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독일인 선교사들도 있었다.

1180년대 초, 성 메인하르트는 다우가바 리보니아인들 사이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리보니아인들은 새로운 믿음과 관습, 특히 세례 의식에 반대했다. 1195년, 교황 첼레스티노 3세는 이교도를 무력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리보니아 십자군을 선포했다. 하노버의 베르톨트가 메인하르트의 뒤를 이었지만, 1198년 현재의 리가 근처에서 리보니아인들에게 살해되었다.

베르톨트의 후계자인 리가의 알베르트 주교는 약 30년 동안 지역 통치자들을 정복하고 독일 지배를 확립했다. 헨리의 리보니아 연대기는 알베르트의 통치에 대한 기록이다. 1201년, 알베르트는 권력 기반으로 리가를 건설했다. 리가는 점차 발트해 남부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1202년, 지역 주민들을 복속시키기 위해 검의 형제 기사단이 설립되었다. 1207년까지 리보니아인들이 정복되었고, 1214년까지 대부분의 라트갈리아인들이 정복되었다. 1207년, 테라 마리아나(이후 리보니아 연합)가 설립되었다. 테라 마리아나는 현재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 있는 교회와 기사단에 속한 다양한 영토로 구성되었으며, 로마 교황의 직접적인 권한 하에 있었다. 1228년에 리보니아 연합이 설립되었다.

1236년, 사울레 전투에서 검의 형제 기사단이 전멸하자, 튜튼 기사단에 리보니아 기사단으로 편입되었다. 1260년, 두르베 전투는 프로이센과 쿨란트에 있는 그들의 영토 사이의 넓은 육교에 대한 튜튼족의 희망을 파괴했다.

13세기 말까지 쿠로니아인과 세미갈리아인이 정복되었다 (1290년에 대부분의 세미갈리아인들은 독일이 정복한 지역을 떠나 리투아니아로 이주). 이로써 고대 라트비아인들의 개별 부족 왕국 발전은 종식되었다.

4. 2. 한자 동맹 가입 (1282년)

1282년, 리가체시스, 림바지, 콕네세, 발미에라는 한자 동맹에 가입했다. 리가는 서유럽과 동유럽을 잇는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서유럽과의 긴밀한 문화적 교류를 맺게 되었다.

분류:한자 동맹

분류:1282년 설립

분류:13세기 라트비아

4. 3. 리보니아 내전 (1297년~1330년)

4. 4. 농노제 강화 (14세기~16세기)

4. 5. 종교 개혁 (16세기)

5. 근세 시대 (16세기~18세기)

1557년 9월, 리보니아 연맹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은 안보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 차르국의 이반 뇌제는 이를 리보니아의 러시아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리보니아 침공을 시작, 여기에 리보니아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20년에 걸친 이 전쟁에서 리보니아 연맹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침략자들을 격퇴했다. 그 기간인 1561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은 해산하고 세속 국가인 리보니아 공국/Duchy of Livonia영어이 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구성국인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가맹했다.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의 마지막 총장 고트하르트 케틀러는, 리보니아 공국의 남부 일대에 성립한 하위 국가인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의 공작이 되었다.

리보니아 전쟁 이후, 리보니아 연맹은 해체되고,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은 1561년 세속 국가인 리보니아 공국으로 재편되었다. 이 공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속주가 되었고, 고트하르트 케틀러는 리보니아 공국의 남부 지역에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을 세우고 초대 공작이 되었다.[52] 1569년까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속주였던 리보니아 공국은 루블린 연합 이후 폴란드 왕국 왕관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공동 통치 하에 놓였다.[52] 얀 히에로니모비치 호드키에비치는 시굴다 중세 성에 본부를 두고 공국의 초대 총독(1566–1578)을 역임했다. 1598년 리보니아 공국은 벤덴 보이보드십, 도르파트 보이보드십, 파르나와 보이보드십으로 분할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리보니아 전역은 제2차 북방 전쟁 동안 스웨덴에 점령되었다.


폴란드-스웨덴 전쟁 (1626-1629) 중, 스웨덴 제국은 리보니아 공국의 더 큰 부분을 점령했고, 알트마르크 휴전에서 스웨덴 영토로 인정받았다. 알렉산데르 코르빈 고셰프스키가 1621년부터 1628년까지 릭스나, 크시슈보르크, 디나부르크 등에서 전투를 벌여, 스웨덴의 리보니아 전역 정복을 저지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벤덴 보이보드십의 남동부 지역을 유지했고, 다우가프필스를 수도로 하여 인플란티 보이보드십으로 개명했다.[53] 인플란티 보이보드십은 반종교개혁의 결과로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고, 귀족들은 폴란드화되었다.[53]

폴란드령 리보니아와 함께 스웨덴령 발트해 영토


폴란드-스웨덴 전쟁 (1600-1629) 중, 리가와 리보니아 공국의 대부분은 1621년 스웨덴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스웨덴 통치 기간 동안, 이 지역은 "스웨덴의 빵 바구니"로 알려졌으며, 리가는 당시 스웨덴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리보니아는 스웨덴의 ''Dominium maris baltici''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58] 스웨덴의 칼 11세는 획일화 정책을 통해 농노제를 폐지하고 농민에게 교육과 경력 기회를 제공했지만, 귀족들은 영지를 왕에게 양도해야 했다. 이러한 개혁은 이후 리보니아를 정복한 러시아의 표트르 1세에 의해 되돌려졌다.[59]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1632년 타르투 대학교를 설립했고, 요한 에른스트 글뤼크는 1685년 라트비아어로 성경 전체를 번역했다. 라트비아 역사에서 이 시기는 "좋은 스웨덴 시대"로 칭송받는다.

1740년의 쿠를란트-젬갈렌 공국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은 고트하르트 케틀러를 초대 공작으로 하여 세워졌다. 케틀러 사후, 그의 아들들인 프리드리히 케틀러와 빌헬름 케틀러가 공국을 분할 통치했다. 빌헬름은 귀족과의 갈등으로 1616년 공작 자리에서 물러났고, 프리드리히가 단독 공작이 되었다. 야콥 케틀러 통치 하에 공국은 번영의 절정에 달했다.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금속 가공과 조선업이 발전했고,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과 무역 관계를 맺었다. 벤츠필스와 리예파야에 주요 항구를 둔 상선대를 설립하고, 쿤타 킨테 섬과 토바고 섬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마지막 공작인 페테르 폰 비론은 러시아의 영향 아래 통치했으며, 1795년 폴란드 분할 과정에서 러시아에 권리를 넘겼다.

계몽주의 사상은 현지 발트 독일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중 두 명이 라트비아 민족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고트하르트 프리드리히 슈텐더는 최초의 라트비아어-독일어 및 독일어-라트비아어 사전을 저술했다. 그는 또한 최초의 백과사전 "세계와 자연의 높은 지혜의 책"(1774)과 최초의 삽화가 있는 라트비아 알파벳 교재 (1787)를 저술했다. 가를리브 메르켈은 1796년에 자신의 저서 "라트비아인"을 출판하여, 라트비아인들이 독일인 주인들의 잔혹함으로 인해 강요받았던 농노제의 끔찍한 상황을 폭로했다.

5. 1. 리보니아 전쟁 (1558년~1583년)

1560년에서 1585년 사이 리보니아의 분할


리보니아 전쟁은 리보니아 연맹을 멸망시켰다. 1557년 9월, 리보니아 연방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상호 방어 및 공격 동맹인 포즈볼 조약을 체결했다. 모스크바의 차르 이반 뇌제는 이를 도발로 간주하고 1558년 1월, 리보니아를 침공하여 리보니아 전쟁을 일으켰다. 1560년 8월 2일, 이반 뇌제의 군대는 에르기메 전투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의 마지막 생존자와 리가 대주교를 섬멸했다.

1561년, 약화된 리보니아 기사단은 빌뉴스 조약에 의해 해산되었다. 기사단 영토는 리보니아 공국(리투아니아의 봉신)과 쿠를란트-젬갈렌 공국(폴란드의 봉신)으로 세속화되었다.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인 고트하르트 케틀러는 쿠를란트의 첫 번째 공작이 되었고 루터교로 개종했다.

1570년 6월 10일, 홀슈타인 공작 마그누스는 모스크바에서 리보니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마그누스는 이반 뇌제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리보니아 종속 왕국에 대한 헌장을 받았다. 이반 뇌제의 군대는 1563년에 폴로츠크를, 1575년에 페르누를 점령하는 등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1577년 이반 4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내부 분쟁을 틈타 리보니아를 침공, 리가레벨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영토를 점령했다. 1578년 리보니아의 마그누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주권을 승인했다.

1577년 모스크바 점령 최대 범위


1557년 9월, 리보니아 연맹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은 안보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 차르국의 이반 뇌제는 이를 리보니아의 러시아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리보니아 침공을 시작, 여기에 리보니아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20년에 걸친 이 전쟁에서 리보니아 연맹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침략자들을 격퇴했다. 그 기간인 1561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은 해산하고 세속 국가인 리보니아 공국/Duchy of Livonia영어이 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구성국인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가맹했다.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의 마지막 총장 고트하르트 케틀러는, 리보니아 공국의 남부 일대에 성립한 하위 국가인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의 공작이 되었다.

5. 2. 폴란드-리투아니아 및 스웨덴 통치 (1561년~1721/95년)

리보니아 전쟁 이후, 리보니아 연맹은 해체되고,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은 1561년 세속 국가인 리보니아 공국으로 재편되었다. 이 공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속주가 되었고, 고트하르트 케틀러는 리보니아 공국의 남부 지역에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을 세우고 초대 공작이 되었다.[52] 1569년까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속주였던 리보니아 공국은 루블린 연합 이후 폴란드 왕국 왕관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공동 통치 하에 놓였다.[52] 얀 히에로니모비치 호드키에비치는 시굴다 중세 성에 본부를 두고 공국의 초대 총독(1566–1578)을 역임했다. 1598년 리보니아 공국은 벤덴 보이보드십, 도르파트 보이보드십, 파르나와 보이보드십으로 분할되었다.

폴란드-스웨덴 전쟁 (1626-1629) 중, 스웨덴 제국은 리보니아 공국의 더 큰 부분을 점령했고, 알트마르크 휴전에서 스웨덴 영토로 인정받았다. 알렉산데르 코르빈 고셰프스키가 1621년부터 1628년까지 릭스나, 크시슈보르크, 디나부르크 등에서 전투를 벌여, 스웨덴의 리보니아 전역 정복을 저지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벤덴 보이보드십의 남동부 지역을 유지했고, 다우가프필스를 수도로 하여 인플란티 보이보드십으로 개명했다.[53] 인플란티 보이보드십은 반종교개혁의 결과로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고, 귀족들은 폴란드화되었다.[53]

폴란드-스웨덴 전쟁 (1600-1629) 중, 리가와 리보니아 공국의 대부분은 1621년 스웨덴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스웨덴 통치 기간 동안, 이 지역은 "스웨덴의 빵 바구니"로 알려졌으며, 리가는 당시 스웨덴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리보니아는 스웨덴의 ''Dominium maris baltici''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58] 스웨덴의 칼 11세는 획일화 정책을 통해 농노제를 폐지하고 농민에게 교육과 경력 기회를 제공했지만, 귀족들은 영지를 왕에게 양도해야 했다. 이러한 개혁은 이후 리보니아를 정복한 러시아의 표트르 1세에 의해 되돌려졌다.[59]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1632년 타르투 대학교를 설립했고, 요한 에른스트 글뤼크는 1685년 라트비아어로 성경 전체를 번역했다. 라트비아 역사에서 이 시기는 "좋은 스웨덴 시대"로 칭송받는다.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은 고트하르트 케틀러를 초대 공작으로 하여 세워졌다. 케틀러 사후, 그의 아들들인 프리드리히 케틀러와 빌헬름 케틀러가 공국을 분할 통치했다. 빌헬름은 귀족과의 갈등으로 1616년 공작 자리에서 물러났고, 프리드리히가 단독 공작이 되었다. 야콥 케틀러 통치 하에 공국은 번영의 절정에 달했다.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금속 가공과 조선업이 발전했고,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과 무역 관계를 맺었다. 벤츠필스와 리예파야에 주요 항구를 둔 상선대를 설립하고, 쿤타 킨테 섬과 토바고 섬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마지막 공작인 페테르 폰 비론은 러시아의 영향 아래 통치했으며, 1795년 폴란드 분할 과정에서 러시아에 권리를 넘겼다.

5. 3. 계몽주의 영향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은 현지 발트 독일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중 두 명이 라트비아 민족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고트하르트 프리드리히 슈텐더는 최초의 라트비아어-독일어 및 독일어-라트비아어 사전을 저술했다. 그는 또한 최초의 백과사전 "세계와 자연의 높은 지혜의 책"(1774)과 최초의 삽화가 있는 라트비아 알파벳 교재 (1787)를 저술했다. 가를리브 메르켈은 1796년에 자신의 저서 "라트비아인"을 출판하여, 라트비아인들이 독일인 주인들의 잔혹함으로 인해 강요받았던 농노제의 끔찍한 상황을 폭로했다.

6. 러시아 제국 통치 (1721/95년~1915/18년)

대북방 전쟁(1700년~1721년) 결과, 스웨덴은 니스타드 조약을 통해 스웨덴령 리보니아에 대한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이 조약은 독일 발트 귀족의 기존 특권과 자유를 보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정 시스템, 기존 관세 국경, 자치 지방 란트탁 및 시의회, 루터교 종교, 그리고 독일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특별한 지위는 표트르 대제부터 알렉산드르 2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러시아 황제에 의해 재확인되었다.[9] 1796년 설립된 리보니아 현은 독일 발트 귀족 특권 유지를 보장했다.

1783년 리가 및 레발 부지방 지도


다우가프필스 요새의 니콜라스 문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로 라트갈레를 획득했다. 라트갈리아인은 인플란티 보예보드십 획득으로 나머지 민족 라트비아인들과 문화적, 언어적으로 더욱 분리되었다. 이곳에 대규모 다우가프필스 요새가 건설되었다.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로 쿠를란트 현이 설립되었으며, 독일인들은 또 다른 세기 동안 그들의 특권과 자율성을 유지했다. 이로써 러시아 제국은 라트비아인들이 거주하는 모든 영토를 소유하게 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러시아 침공을 감행했고, 원수 루드비히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의 지휘 하에 프로이센 부대가 쿠를란트를 점령하고 리가에 접근했으며, 메소텐 전투가 벌어졌다. 리가의 러시아 총독 이반 에센은 공격을 예상하고, 침략자를 막기 위해 리가 교외의 나무 집들을 불태워 수천 명의 도시 주민들을 집 잃게 만들었다. 그러나 루드비히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는 리가를 공격하지 않았고, 12월 나폴레옹 군대는 퇴각했다.

== 농노 해방 (19세기) ==

1802년 10월 카우구리 반란 이후, 차르 정부는 1804년 2월 20일 리보니아 농민법을 공포하여 농민들의 생활 조건 개선을 시도했다.[10] 농민들은 더 이상 영주에게 묶이지 않고 토지에 묶여 토지와 함께만 판매될 수 있었다. 농장은 가족 내 상속이 가능해졌고, 부역의 양과 기간이 규제되었다. 그러나 1809년 귀족들의 반발로 농민과 부역에 대한 귀족들의 권한이 다시 강화되었다.[10]

1816년 에스토니아 현에서 프로이센 개혁 모델을 기반으로 한 농노 해방 법안이 제안되었다. 러시아 제국 차르 당국은 쿠르란트 란트타크에 유사한 제안을 제출하도록 명령했고, 이는 1817년 8월 25일에 수용되었다.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참석한 가운데 1818년 8월 30일 옐가바에서 해방이 공표되었으며, 1819년에 발효되었다.[65] 해방은 매년 선택된 수의 농민만 해방되었기 때문에 1832년까지 계속되었다. 농민은 개인의 자유를 얻었지만, 토지는 제공되지 않아 지주에게 임대해야 했다. 또한 지주의 허가 없이는 다른 현이나 도시로 이동할 수 없었다.

에스토니아와 쿠를란트에서 해방이 이루어진 후, 리보니아의 상황은 1819년 3월 26일의 법률에 의해 해결되었으며, 이는 쿠를란트의 해방 법률과 매우 유사했다. 이 법은 1820년 초에 공포되었으며 1832년까지 효력을 발휘했다.

라트갈레는 러시아 비테프스크 현의 일부였기 때문에, 1861년 농노 해방 개혁이 러시아 제국에서 선포된 1861년까지 농노제가 지속되었다.[10] 초기에 농민들은 토지를 유지했지만, 부역과 지대 지불을 계속해야 했다. 이는 1863년 3월 1일의 새 법률에 의해 종료되었다.[10]

1832년 이후 농민들은 자치구 내에서 정착의 자유를 얻었다. 1848년이 되어서야 쿠를란트의 농민들은 도시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전까지 도시에는 주로 독일인과 유대인들이 거주했다.

1849년 7월 9일에 발효되어 1850년 11월 20일에 시행된 임시 리보니아 농지법은 독일 귀족의 재산권을 유지하면서도 농민이 토지를 임대하거나 구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860년에 이 법은 영구화되었고, 1864년 법은 신용 조합의 설립을 허용하여 농부들의 자본 접근성을 향상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직전, 쿠를란트의 집의 약 99%와 리보니아의 90%가 구매되었다.[11]

1870~80년대에 토지를 구매할 수 없거나 원하지 않는 많은 농민들은 시베리아로 이주하여 토지를 무상으로 얻을 기회를 이용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무렵 약 20만 명의 라트비아 농부가 시베리아의 농업 식민지로 이주했다.

18세기 대북방 전쟁폴란드 분할 등의 여파로 라트비아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세기에는 러시아보다 먼저 농노 해방을 실시하여(1819년) 자본주의 경제와 시민 사회 형성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18~19세기 라트비아 농민 부부의 작업 모습


== 민족 각성 (19세기) ==

1820년대 동유럽 전역으로 확대된 농업 위기의 영향으로 발트 지방에서도 농업 개혁 요구가 높아졌고,[64] 19세기에는 러시아보다 먼저 농노 해방(1819년)을 실시하여[65] 자본주의 경제와 시민 사회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라트비아인의 지식인민족주의자가 성장했다.[66]

1822년 라트비아어로 된 최초의 주간지인 ''Latviešu avīzes''가 발행되기 시작했고, 1832년에는 주간지 ''Tas Latviešu Ļaužu Draugs''가 발행되었다. 안시스 리벤탈스(Ansis Liventāls, 1803–77), 야니스 루겐스(Jānis Ruģēns, 1817–76) 등 라트비아어로 글을 쓰는 최초의 라트비아 작가들이 등장했다. 1839년에는 야니스 침제가 이끄는 초등학교 교사 양성 기관이 발미에라에 개설되었다.

크리샤니스 바론스(Krišjānis Barons), 1910


라트비아 송 페스티벌, 2008


19세기 중반, 제1차 라트비아 민족 각성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민족주의 경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185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젊은 라트비아인(라트비아어: ''jaunlatvieši'')"들이 주도한 이 운동은 통일된 라트비아 민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라트비아 민속(참고: 라트비아 다이나)과 고대 신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발트 독일인들과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알렉산드르 3세에 의해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시행된 러시아화 정책은[67] 발트 총독부의 독일 자치를 줄이려는 목적이었다. 행정, 법원, 교육에 러시아어를 도입하여 독일어의 우위를 줄이려 했으나, 동시에 학교에서 라트비아어 사용을 금지하여 라트비아 문화에 큰 타격을 입혔다.[68]

1880년대 후반, 도시화 및 산업화의 영향으로 "신조류"라고 불리는 광범위한 좌익 운동이 일어났다. 라이니스와 그의 매형인 페테리스 스투츠카가 이끌었던 이 운동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 1905년 혁명 ==

1905년 혁명 당시 라트비아에서는 대중의 불만이 폭발했다.[13] 1905년 1월 13일, 리가에서 러시아군 병력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73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하면서 혁명이 시작되었다.[13][14] 이는 10월의 대규모 파업과 12월의 무장 봉기로 이어졌다.[13]

라트비아인들은 러시아인보다는 발트 독일인에 의해 억압받는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 혁명은 차르 정부뿐만 아니라 발트 독일인 귀족에 대항하는 것이었다.[13] 라트비아 사회 민주 노동당 (LSDSP)이 주도한 이 혁명에는 좌익 사회 민주당원과 산업 노동자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농민과 라트비아 지식인도 참여했다.[13]

1905년 여름, 주요 혁명 사건들은 시골로 옮겨갔다. 라트비아 교구의 94%에서 470개의 새로운 교구 행정 기관이 선출되었고, 11월에는 리가에서 교구 대표자 회의가 열렸다.[14]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열렸으며, 발트 독일인 귀족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과 영지 건물 방화, 무기 압수 등이 발생했다. 총 449개의 독일 영주 저택이 불탔다.[14]

1905년 가을, 비제메쿠를란트의 시골 지역에서 독일 귀족과 라트비아 농민 사이에 무력 충돌이 시작되었다. 쿠를란트에서 농민들은 여러 마을을 점령하거나 포위하여 혁명 평의회를 설립했고, 비제메에서 전투원들은 루이예나-파르누 철도 노선을 통제했다. 1905년 라트비아에서 총 1,000건의 무력 충돌이 기록되었다.[14]

1905년 8월에 쿠를란트에, 11월 말에 비제메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2월 중순, 코사크 기병대와 발트 독일인으로 구성된 특별 징벌 원정대가 파견되어 혁명을 진압했다.[14] 그들은 재판이나 수사 없이 2,000명 이상을 처형하고 300채의 주택과 공공 건물을 불태웠으며, 처형된 사람들은 혁명가라기보다는 독일 귀족에게 불경한 태도를 보인 지역 교사나 농민 활동가인 경우가 많았다. 427명이 군사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으며, 2,652명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고, 5,000명 이상이 서유럽이나 미국으로 망명했다.[14]

1906년에 혁명 운동은 점차 잦아들었지만, 일부 지역 시위와 숲 속 게릴라의 활동은 1907년까지 계속되었다.[14] 망명자 중에는 10년도 안 되어 라트비아의 미래를 놓고 서로 싸우게 될 좌익과 우익 활동가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미래의 총리 카를리스 울마니스, 국민 시인 야니스 라이니스, 초기 체카 지도자 야코프 페테르스(Jēkabs Peterss)가 있었다.[13]

6. 1. 농노 해방 (19세기)

1802년 10월 카우구리 반란 이후, 차르 정부는 1804년 2월 20일 리보니아 농민법을 공포하여 농민들의 생활 조건 개선을 시도했다.[10] 농민들은 더 이상 영주에게 묶이지 않고 토지에 묶여 토지와 함께만 판매될 수 있었다. 농장은 가족 내 상속이 가능해졌고, 부역의 양과 기간이 규제되었다. 그러나 1809년 귀족들의 반발로 농민과 부역에 대한 귀족들의 권한이 다시 강화되었다.[10]

1816년 에스토니아 현에서 프로이센 개혁 모델을 기반으로 한 농노 해방 법안이 제안되었다. 러시아 제국 차르 당국은 쿠르란트 란트타크에 유사한 제안을 제출하도록 명령했고, 이는 1817년 8월 25일에 수용되었다.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참석한 가운데 1818년 8월 30일 옐가바에서 해방이 공표되었으며, 1819년에 발효되었다.[65] 해방은 매년 선택된 수의 농민만 해방되었기 때문에 1832년까지 계속되었다. 농민은 개인의 자유를 얻었지만, 토지는 제공되지 않아 지주에게 임대해야 했다. 또한 지주의 허가 없이는 다른 현이나 도시로 이동할 수 없었다.

에스토니아와 쿠를란트에서 해방이 이루어진 후, 리보니아의 상황은 1819년 3월 26일의 법률에 의해 해결되었으며, 이는 쿠를란트의 해방 법률과 매우 유사했다. 이 법은 1820년 초에 공포되었으며 1832년까지 효력을 발휘했다.

라트갈레는 러시아 비테프스크 현의 일부였기 때문에, 1861년 농노 해방 개혁이 러시아 제국에서 선포된 1861년까지 농노제가 지속되었다.[10] 초기에 농민들은 토지를 유지했지만, 부역과 지대 지불을 계속해야 했다. 이는 1863년 3월 1일의 새 법률에 의해 종료되었다.[10]

1832년 이후 농민들은 자치구 내에서 정착의 자유를 얻었다. 1848년이 되어서야 쿠를란트의 농민들은 도시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전까지 도시에는 주로 독일인과 유대인들이 거주했다.

1849년 7월 9일에 발효되어 1850년 11월 20일에 시행된 임시 리보니아 농지법은 독일 귀족의 재산권을 유지하면서도 농민이 토지를 임대하거나 구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860년에 이 법은 영구화되었고, 1864년 법은 신용 조합의 설립을 허용하여 농부들의 자본 접근성을 향상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직전, 쿠를란트의 집의 약 99%와 리보니아의 90%가 구매되었다.[11]

1870~80년대에 토지를 구매할 수 없거나 원하지 않는 많은 농민들은 시베리아로 이주하여 토지를 무상으로 얻을 기회를 이용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무렵 약 20만 명의 라트비아 농부가 시베리아의 농업 식민지로 이주했다.

18세기 대북방 전쟁폴란드 분할 등의 여파로 라트비아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세기에는 러시아보다 먼저 농노 해방을 실시하여(1819년) 자본주의 경제와 시민 사회 형성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6. 2. 민족 각성 (19세기)

1820년대 동유럽 전역으로 확대된 농업 위기의 영향으로 발트 지방에서도 농업 개혁 요구가 높아졌고,[64] 19세기에는 러시아보다 먼저 농노 해방(1819년)을 실시하여[65] 자본주의 경제와 시민 사회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라트비아인의 지식인민족주의자가 성장했다.[66]

1822년 라트비아어로 된 최초의 주간지인 ''Latviešu avīzes''가 발행되기 시작했고, 1832년에는 주간지 ''Tas Latviešu Ļaužu Draugs''가 발행되었다. 안시스 리벤탈스(Ansis Liventāls, 1803–77), 야니스 루겐스(Jānis Ruģēns, 1817–76) 등 라트비아어로 글을 쓰는 최초의 라트비아 작가들이 등장했다. 1839년에는 야니스 침제가 이끄는 초등학교 교사 양성 기관이 발미에라에 개설되었다.

19세기 중반, 제1차 라트비아 민족 각성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민족주의 경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185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젊은 라트비아인(라트비아어: ''jaunlatvieši'')"들이 주도한 이 운동은 통일된 라트비아 민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라트비아 민속(참고: 라트비아 다이나)과 고대 신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발트 독일인들과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알렉산드르 3세에 의해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시행된 러시아화 정책은[67] 발트 총독부의 독일 자치를 줄이려는 목적이었다. 행정, 법원, 교육에 러시아어를 도입하여 독일어의 우위를 줄이려 했으나, 동시에 학교에서 라트비아어 사용을 금지하여 라트비아 문화에 큰 타격을 입혔다.[68]

1880년대 후반, 도시화 및 산업화의 영향으로 "신조류"라고 불리는 광범위한 좌익 운동이 일어났다. 라이니스와 그의 매형인 페테리스 스투츠카가 이끌었던 이 운동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6. 3. 1905년 혁명

1905년 혁명 당시 라트비아에서는 대중의 불만이 폭발했다.[13] 1905년 1월 13일, 리가에서 러시아군 병력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73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하면서 혁명이 시작되었다.[13][14] 이는 10월의 대규모 파업과 12월의 무장 봉기로 이어졌다.[13]

라트비아인들은 러시아인보다는 발트 독일인에 의해 억압받는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 혁명은 차르 정부뿐만 아니라 발트 독일인 귀족에 대항하는 것이었다.[13] 라트비아 사회 민주 노동당 (LSDSP)이 주도한 이 혁명에는 좌익 사회 민주당원과 산업 노동자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농민과 라트비아 지식인도 참여했다.[13]

1905년 여름, 주요 혁명 사건들은 시골로 옮겨갔다. 라트비아 교구의 94%에서 470개의 새로운 교구 행정 기관이 선출되었고, 11월에는 리가에서 교구 대표자 회의가 열렸다.[14]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열렸으며, 발트 독일인 귀족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과 영지 건물 방화, 무기 압수 등이 발생했다. 총 449개의 독일 영주 저택이 불탔다.[14]

1905년 가을, 비제메쿠를란트의 시골 지역에서 독일 귀족과 라트비아 농민 사이에 무력 충돌이 시작되었다. 쿠를란트에서 농민들은 여러 마을을 점령하거나 포위하여 혁명 평의회를 설립했고, 비제메에서 전투원들은 루이예나-파르누 철도 노선을 통제했다. 1905년 라트비아에서 총 1,000건의 무력 충돌이 기록되었다.[14]

1905년 8월에 쿠를란트에, 11월 말에 비제메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2월 중순, 코사크 기병대와 발트 독일인으로 구성된 특별 징벌 원정대가 파견되어 혁명을 진압했다.[14] 그들은 재판이나 수사 없이 2,000명 이상을 처형하고 300채의 주택과 공공 건물을 불태웠으며, 처형된 사람들은 혁명가라기보다는 독일 귀족에게 불경한 태도를 보인 지역 교사나 농민 활동가인 경우가 많았다. 427명이 군사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으며, 2,652명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고, 5,000명 이상이 서유럽이나 미국으로 망명했다.[14]

1906년에 혁명 운동은 점차 잦아들었지만, 일부 지역 시위와 숲 속 게릴라의 활동은 1907년까지 계속되었다.[14] 망명자 중에는 10년도 안 되어 라트비아의 미래를 놓고 서로 싸우게 될 좌익과 우익 활동가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미래의 총리 카를리스 울마니스, 국민 시인 야니스 라이니스, 초기 체카 지도자 야코프 페테르스(Jēkabs Peterss)가 있었다.[13]

7.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1918년)

1914년 8월 1일,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독일과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던 쿠르란트 현은 즉시 전쟁에 휘말렸다.[15] 8월 2일 독일 군함 SMS 아우크스부르크와 SMS 마그데부르크가 항구 도시 리예파야를 포격하여 경미한 피해를 입혔고, 8월 19일에는 독일 해군이 우자바 등대를 점령하려 했으나 격퇴되었고, 이후 독일 포병대에 의해 파괴되었다.[15] 10월에는 발트해 영국 잠수함대 소속 영국 잠수함 HMS E1과 HMS E9이 리예파야에 도착했다.[15] 11월 17일 독일 해군은 다시 리예파야와 카로스타의 군사 시설을 포격하여 약 100채의 건물을 손상시켰다.[15]

많은 라트비아인들이 독일 국경에 주둔한 러시아 부대에서 복무했으며, 동프로이센 침공에 참여하여 제1차 마주리 호수 전투, 제2차 마주리 호수 전투와 아우구스토프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15] 1915년 5월까지 전쟁은 라트비아 대부분 지역에 도달했고, 5월 7일, 독일군은 리예파야와 쿨디가를 점령했다.[15]

의용 소총수, 1915년


6월 29일, 러시아 최고 사령부는 쿠르란트의 모든 주민에게 대피하라고 명령했고, 약 50만 명의 난민이 동쪽으로 피난을 떠났다.[15] 1915년 8월, 라트비아 난민 지원 중앙 위원회가 페트로그라드에 설립되어 난민들을 지원했다.[15] 1915년 7월, 카를리스 스칼베가 작성한 국가 두마 의원들의 공개 선언문은 자원 라트비아 사격병 부대의 창설을 촉구했고, 8월에 라트비아 대대 창설이 시작되었다.[15]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사격병들은 러시아군 소속으로 다우가바 강을 따라 방어선에서 독일군에 맞서 싸웠으며, 특히 ''나베스 살라''(죽음의 섬) 교두보에서 전투를 벌였다.[15]

조국을 위한 어려운 시기, 아들들아, 아들들아, 도와주세요! 1916년 애국 엽서.


1915년 대공세 이후 전선은 다우가바 강을 따라 안정되었으나, 1917년 초 러시아군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1917년 2월 혁명이 러시아에서 발생했고, 여름에는 러시아군이 붕괴되었다. 이때 사격병들은 압도적으로 볼셰비키에게 충성을 돌렸다.[13] 이어진 유글라 전투에서 독일군이 승리하여 1917년 9월 3일 리가에 입성했다.

1917년 11월, 공산주의 볼셰비키가 러시아에서 권력을 잡았다.[13] 볼셰비키 정부는 전쟁을 끝내려 노력했고, 1918년 3월에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체결되어 쿠르란트와 리플란드 주가 독일에게 넘어갔다.[13] 독일은 1918년 11월 11일까지 지속된 점령 체제를 신속하게 수립했다. 이 기간 동안 독일은 프로이센 왕관과의 영구적인 연합으로 발트 연합 공국을 만들려고 시도했다.[13]

1920년의 조사에 따르면 교구의 56.7%가 전쟁 피해를 입었다. 인구는 255만 명에서 159만 명으로 감소했다. 라트비아 민족의 수는 1914년 수준에 다시는 도달하지 못했다. 87,700채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경작지의 27%가 황폐화되었다. 많은 산업 시설이 러시아로 대피했으며 영원히 손실되었다. 항구는 침몰한 선박으로 인해 손상되었고, 다리가 폭파되었으며 철도가 손상되었다. 25,000개의 농장이 파괴되었고, 70,000마리의 말과 170,000마리의 소가 손실되었다.[16]

8. 독립 (1918년~1940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전개는 라트비아인과 라트비아 영토를 직접적으로 관련시키면서 라트비아 국가 수립이라는 아이디어를 촉진했다.[17] 1915년 여름, 독일 제국 육군은 쿠르제메와 젬갈레를 정복했고, 이로 인해 이 두 지역에서 라트비아인들이 대거 이주했다. 지역 정치인들은 난민 구호 및 라트비아 난민의 문화 생활을 조직하는 경험을 쌓았다. 공격하는 독일군과 무능한 러시아 사이에 끼인 라트비아 사격대(''latviešu strēlnieki'')는 이 전쟁 동안 러시아 측에서 싸웠고, 차르 군 지휘관들의 반복적인 실패 이후 점점 더 과격해졌다.[17] 1917-1923년의 러시아 내전 동안, 상당수의 라트비아인 (붉은 사격대로 알려짐)은 볼셰비키를 위해 싸웠다. 한편, 독일 제국과 현지 발트 독일인들은 고대 리보니아와 에스토니아 땅을 독일 국가에 합병할 계획을 세웠다.[17]

1917년 12월 2일 자치 선언이 발표된 발카 시청. 현재는 에스토니아의 발가에 위치해 있다.


러시아 제국의 2월 혁명 이후, 대부분의 라트비아인들은 자국의 더 나은 상황을 러시아 국가 내에서 연방 국가로 기대하지 않았다. "자유 러시아의 자유 라트비아"는 당시의 구호였다.[17] 1917년 3월 12일부터 13일까지 발미에라에서 비제메 토지 회의가 열렸고, 비제메 임시 토지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라트갈레인이 거주하는 비테프스크 현의 군들은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야 이루어진 다른 라트비아 지방과의 통일을 요구했다. (라트갈레 라트비아인과 발트 라트비아인의 통일).[17]

1917년 10월, 중도주의 정치인들은 페트로그라드에서 회합을 갖고 모든 라트비아 정당, 난민 지원 단체 및 군인 위원회의 연합 협의회를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1917년 11월 29일, 라트비아 임시 국민 위원회가 발카에서 설립되었다. 1917년 12월 2일, 라트비아 거주 지역의 자치를 선포하고 스스로를 라트비아인의 유일한 대표 기관으로 선언했다. 위원회는 헌법 제정 의회 소집, 정치적 자치 창설 및 모든 라트비아 민족 거주 지역 통합이라는 세 가지 주요 목표를 발표했다.[17]

볼데마르스 자무엘스의 의장 아래 국민 위원회는 미래 외무부 장관인 지그프리드 안나 메이예로비츠가 이끄는 대표단을 연합국에 파견하여 독립 라트비아에 대한 지지를 얻고자 했다.[17]

1918년 1월 5일, 민주적으로 선출된 러시아 제헌 의회 (이후 볼셰비키에 의해 해산됨)의 유일한 회의에서 1915년 라트비아 사격대 부대 창설을 주도한 라트비아 국회의원 야니스 골드마니스는 라트비아가 러시아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선언했다.[17]

1918년 1월 30일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두 번째 회의에서 라트비아 국민 위원회는 라트비아가 쿠르제메(젬갈레 포함), 비드제메 및 라트갈레의 라트비아 지역을 통합하는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공화국이어야 한다고 선언했다.[17]

1918년 3월 3일 소비에트 러시아는 동맹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쿠르제메와 비드제메를 포기했다(라트갈레는 제외). 국민 위원회는 라트비아 영토 분할과 쿠르제메의 독일 병합에 항의했다.[17]

1918년 11월 11일, 대영 제국은 라트비아 국민 위원회를 ''사실상'' 정부로 인정하며, 10월 23일 영국 외무부 장관 아서 밸푸어로부터 지그프리드 안나 메이예로비츠에게 전달된 이전의 구두 통신을 확인했다.[17]

이러한 외교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국민 위원회는 중요한 문제에 직면했다. 사회 민주당과 민주 블록이 합류를 거부한 것이다. 이는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진정한 국민적 합의를 창출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러한 분열은 1918년 11월 17일 라트비아 인민 위원회 (''Tautas padome'')가 창설되면서 끝을 맺었다.[18]

독일의 붕괴 이후인 11월 9일, 국민 평의회와 민주 블록은 통합 회담을 시작했다. 사회 민주당은 새로운 라트비아가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정당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사회 민주당은 국민 평의회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통합 기구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합 회담은 농민 연합 지도자 칼리스 울마니스와 미켈리스 발테르스가 이끌었고, 국민 평의회 지도자 볼데마르스 자무엘스, 아르베즈 베르그스, 아돌프스 클리베는 뒷전으로 밀려났다.[18]

1918년 11월 17일, 경쟁 관계에 있던 라트비아의 각 파벌들은 마침내 인민 평의회에서 통합되었고,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고 라트비아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18]

11월 18일, 소련 러시아는 러시아의 서부 지방을 되찾기 위한 서부 공세를 시작했고, 라트비아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18]

20세기에는 라트비아 독립의 기운이 높아졌고, 러시아 혁명에서 에스토니아인과 함께 볼셰비키와 싸웠으며, 더 나아가 발트 연합 공국의 창설을 목표로 한 발트 방위군과도 싸워 승리했다(). 이 승리는 발트 독일인에 대한 700년간의 피지배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했다[69]

8. 1. 독립 선언 (1918년 11월 18일)

제1차 세계 대전의 전개는 라트비아인과 라트비아 영토를 직접적으로 관련시키면서 라트비아 국가 수립이라는 아이디어를 촉진했다.[17] 1915년 여름, 독일 제국 육군은 쿠르제메와 젬갈레를 정복했고, 이로 인해 이 두 지역에서 라트비아인들이 대거 이주했다. 지역 정치인들은 난민 구호 및 라트비아 난민의 문화 생활을 조직하는 경험을 쌓았다. 공격하는 독일군과 무능한 러시아 사이에 끼인 라트비아 사격대는(''latviešu strēlnieki'') 이 전쟁 동안 러시아 측에서 싸웠고, 차르 군 지휘관들의 반복적인 실패 이후 점점 더 과격해졌다.[17] 1917-1923년의 러시아 내전 동안, 상당수의 라트비아인 (붉은 사격대로 알려짐)은 볼셰비키를 위해 싸웠다. 한편, 독일 제국과 현지 발트 독일인들은 고대 리보니아와 에스토니아 땅을 독일 국가에 합병할 계획을 세웠다.[17]

러시아 제국의 2월 혁명 이후, 대부분의 라트비아인들은 자국의 더 나은 상황을 러시아 국가 내에서 연방 국가로 기대하지 않았다. "자유 러시아의 자유 라트비아"는 당시의 구호였다.[17] 1917년 3월 12일부터 13일까지 발미에라에서 비제메 토지 회의가 열렸고, 비제메 임시 토지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라트갈레인이 거주하는 비테프스크 현의 군들은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야 이루어진 다른 라트비아 지방과의 통일을 요구했다. (라트갈레 라트비아인과 발트 라트비아인의 통일).[17]

1917년 10월, 중도주의 정치인들은 페트로그라드에서 회합을 갖고 모든 라트비아 정당, 난민 지원 단체 및 군인 위원회의 연합 협의회를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1917년 11월 29일, 라트비아 임시 국민 위원회가 발카에서 설립되었다. 1917년 12월 2일, 라트비아 거주 지역의 자치를 선포하고 스스로를 라트비아인의 유일한 대표 기관으로 선언했다. 위원회는 헌법 제정 의회 소집, 정치적 자치 창설 및 모든 라트비아 민족 거주 지역 통합이라는 세 가지 주요 목표를 발표했다.[17]

볼데마르스 자무엘스의 의장 아래 국민 위원회는 미래 외무부 장관인 지그프리드 안나 메이예로비츠가 이끄는 대표단을 연합국에 파견하여 독립 라트비아에 대한 지지를 얻고자 했다.[17]

1918년 1월 5일, 민주적으로 선출된 러시아 제헌 의회 (이후 볼셰비키에 의해 해산됨)의 유일한 회의에서 1915년 라트비아 사격대 부대 창설을 주도한 라트비아 국회의원 야니스 골드마니스는 라트비아가 러시아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선언했다.[17]

1918년 1월 30일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두 번째 회의에서 라트비아 국민 위원회는 라트비아가 쿠르제메(젬갈레 포함), 비드제메 및 라트갈레의 라트비아 지역을 통합하는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공화국이어야 한다고 선언했다.[17]

1918년 3월 3일 소비에트 러시아는 동맹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쿠르제메와 비드제메를 포기했다(라트갈레는 제외). 국민 위원회는 라트비아 영토 분할과 쿠르제메의 독일 병합에 항의했다.[17]

1918년 11월 11일, 대영 제국은 라트비아 국민 위원회를 ''사실상'' 정부로 인정하며, 10월 23일 영국 외무부 장관 아서 밸푸어로부터 지그프리드 안나 메이예로비츠에게 전달된 이전의 구두 통신을 확인했다.[17]

이러한 외교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국민 위원회는 중요한 문제에 직면했다. 사회 민주당과 민주 블록이 합류를 거부한 것이다. 이는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진정한 국민적 합의를 창출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러한 분열은 1918년 11월 17일 라트비아 인민 위원회 (''Tautas padome'')가 창설되면서 끝을 맺었다.[18]

독일의 붕괴 이후인 11월 9일, 국민 평의회와 민주 블록은 통합 회담을 시작했다. 사회 민주당은 새로운 라트비아가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정당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사회 민주당은 국민 평의회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통합 기구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합 회담은 농민 연합 지도자 칼리스 울마니스와 미켈리스 발테르스가 이끌었고, 국민 평의회 지도자 볼데마르스 자무엘스, 아르베즈 베르그스, 아돌프스 클리베는 뒷전으로 밀려났다.[18]

1918년 11월 17일, 경쟁 관계에 있던 라트비아의 각 파벌들은 마침내 인민 평의회에서 통합되었고,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고 라트비아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18]

11월 18일, 소련 러시아는 러시아의 서부 지방을 되찾기 위한 서부 공세를 시작했고, 라트비아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18]

20세기에는 라트비아 독립의 기운이 높아졌고, 러시아 혁명에서 에스토니아인과 함께 볼셰비키와 싸웠으며, 더 나아가 발트 연합 공국의 창설을 목표로 한 발트 방위군과도 싸워 승리했다(). 이 승리는 발트 독일인에 대한 700년간의 피지배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했다[69]

8. 2. 독립 전쟁 (1918년~1920년)

1918년 12월 1일, 소비에트 러시아가 라트비아를 침공했다.[19] 침공군의 상당수는 붉은 라트비아 사수대로 구성되어 침공이 용이했다. 소비에트군은 1919년 1월 3일 리가를 점령했고, 1월 13일 라트비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공식 선포되었다.[19] 페테리스 스투츠카는 국유화, 몰수, 계급의 적 처형으로 이루어진 급진적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혁명 재판소가 설립되어 독일 귀족, 목사, 부유한 상인, 곡물을 내놓기를 거부한 농민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 총 1,000명 정도가 처형되었다. 식량 공급 중단으로 인해 리가에서 8,590명이 굶어 죽었다.[19]

소련의 공세, 1918–1919


1919년 5월 1일 소비에트 리가 축하 행사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5 루블 지폐


1919년 3월 3일 독일과 라트비아군은 소비에트 라트비아에 대항하는 반격을 시작했다.[19] 4월 16일 발트 귀족은 리예파야에서 쿠데타를 조직했고, 안드리예프 니에드라의 괴뢰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두 달 동안만 지속되었다.[19] 1919년 5월 22일, 독일 자유군단이 리가를 탈환했고, 소비에트 동조자로 의심되는 모든 사람에 대한 백색 공포가 시작되었다.[19]

현지 반격, 1919–1920


1919년 6월, 발트 지역 방위군과 에스토니아 제3사단 간의 충돌이 시작되었다.[20] 제3사단은 6월 23일 벤덴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파했다. 슈트라즈두무이자에 휴전이 조인되었고, 그 조건에 따라 독일군은 라트비아를 떠나야 했다.[20] 대신 독일군은 서 러시아 의용군에 편입되었다.[20] 10월 5일 리가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여 다우가바 강 서쪽 강둑을 점령했고, 최전선은 리가를 반으로 갈랐다. 11월 11일 라트비아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그 달 말까지 서 러시아 의용군은 라트비아에서 몰아냈다. 리가 전투 동안 라트비아군은 영국 해군 포병의 지원을 받았다.

1920년 1월 3일, 라트비아와 폴란드 연합군은 라트갈레에서 소비에트 군을 공격하여 다우가브필스 전투에서 1월 5일까지 다우가브필스를 해방시켰다. 1월 말까지 라트비아의 민족 경계에 도달했고, 곧 소비에트와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1920년 8월 11일, 라트비아-소비에트 평화 조약에 따라 소비에트 러시아는 라트비아 민족과 라트비아 영토에 대한 권한을 포기했다.[21]

20세기에는 라트비아 독립의 기운이 높아졌고, 러시아 혁명에서 에스토니아인과 함께 볼셰비키와 싸웠으며, 더 나아가 발트 연합 공국의 창설을 목표로 한 발트 방위군과도 싸워 승리했다(). 이 승리는 발트 독일인에 대한 700년간의 피지배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했다[69]

8. 3. 의회 시대 (1920년~1934년)

1920년 1월, 라트갈레소련군으로부터 최종 해방된 후, 4월 17일부터 18일까지 라트비아 헌법 제정 의회 선거가 치러졌다.[28] 1920년 라트비아 인구는 255만 2천 명에서 159만 6천 명으로 거의 100만 명이나 감소했고, 50개의 정당 명단과 후보가 150석을 놓고 경쟁했다.[28] 유권자의 거의 85%가 선거에 참여했으며 16개 정당이 당선되었다.[28]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은 57석, 라트비아 농민 연합은 26석, 라트갈레 농민당은 17석을 얻었다.[28] 이러한 투표 패턴은 소규모 이익 집단을 대표하는 많은 수의 정당이 불안정한 연립 정부 구성을 요구하면서, 향후 모든 의회에 나타났다.[28]

1922년 2월 15일 라트비아 헌법이 통과되었고, 6월에는 새로운 선거법이 통과되어 의회, 즉 세이마 선출의 길이 열렸다. 의회 시대 동안 4번의 총선이 치러졌으며, 이를 통해 제1 세이마 (1922–25), 제2 세이마 (1925–28), 제3 세이마 (1928–31), 제4 세이마 (1931–34)가 선출되었다.[28] 라트비아 대통령은 3명이 선출되었는데, 재임 중 사망한 야니스 차크스테 (1922–27), 재선에 출마하지 않은 구스타브스 젬갈스 (1927–30), 그리고 1934년 라트비아 쿠데타를 받아들인 알베르츠 크비에시스 (1930–36)였다.[28]

사회민주노동자당은 가장 큰 정당으로서, 전간기 모든 세이마에서 세이마 의장직을 맡았다.[28] 제1 세이마는 프리드리흐스 바이즈마니스가 의장을 맡았고, 제2, 제3, 제4 세이마는 파울스 칼닌슈가 의장을 맡았다.[28] 사회민주당이 정부 참여를 거부하면서(단명 내각 두 차례 제외) 정부는 일반적으로 중도 우파 농민연합 또는 소규모 정당 연합이 이끌었는데, 세이마 의석이 여러 정당으로 나뉘어 각 정당이 의원 몇 명만 보유했기 때문이다.[28]

사회민주당은 파울스 칼닌슈, 안시스 루데비치스, 프리시스 멘데르스가 이끄는 주류 사회민주노동자당과 마르기에르스 스쿠예니에크스가 이끄는 분파 사회민주 소수당으로 분열되었다.[28] 주류 사회민주당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이상을 강력하게 유지하며 기존의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했다.[28] 이들은 국가 깃발을 사용하고 국가를 부르는 대신 적기를 사용하고 집회에서 "인터내셔널"을 불렀다.[28] 그들의 인기는 점점 떨어졌고, 제4 세이마에서는 21석만 차지했다.[28]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라트비아 공산당은 1928년 선거에서 좌익 노동조합으로 출마하여 5석을 얻었다(1930년 금지).[28] 1931년 선거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조합 노동자 및 농민 그룹으로 6석을 얻었지만, 1933년에 다시 금지되었다.[28]

라트비아 농민 연합은 14~17명의 국회의원을 보유한 두 번째로 큰 의회 파벌로, 보수 정당 중 가장 큰 정당이었다.[28] 농민 연합은 칼리스 울마니스, 지그프리드스 안나 메이에로비츠, 후고 셀민슈가 이끌었다.[28] 울마니스와 농민 연합의 인기 하락은 1934년 10월로 예정된 선거에서 그의 정치적 영향력과 권력의 추가 손실을 막으려 했던 울마니스가 주도한 1934년 5월 15일의 1934년 라트비아 쿠데타의 원인 중 하나였을 수 있다.[28]

구스타브스 젬갈스가 이끄는 민주중앙당은 주로 도시, 중산층 사무직 근로자와 공무원을 대표했다.[28] 아르베드스 베르그스가 이끄는 국민 연합은 민족주의적이며 반소련적인 중도 우파 정당으로 도시의 지지자들을 끌어모았다.[28]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은 반유대주의 페르콘크루스트 (1933년 설립)에 의해 대표되었으며, 구스타브스 셀민슈가 이끌었다.[28]

나머지 소규모 정당의 대부분은 민족적이거나, 소규모 토지 소유주, 주택 소유주, 심지어 철도 노동자와 같은 단일 쟁점 경제 그룹을 대표했다.[28] 소규모 정당은 일반적으로 더 큰 연합 (블록)을 형성한 다음 영향력을 사용하여 집권 연합에 참여했다.[28] 가장 영향력 있는 연합 중 하나는 라트갈레 정당 연합이었다.[28]

국내에서는 1922년부터 1934년까지 39개나 되는 정당이 난립하여 의회(세이마)를 구성하고 있었다.[70] 소수파이긴 하지만 러시아인이나 유대인, 발트 독일인의 정당이 뒤섞여 정권이 빈번하게 교체되었고, 의회에서의 입안도 수천 건에 달하는 등 국내 정치의 기반은 항상 불안정했다.[70]

8. 4. 울마니스 독재 (1934년~1940년)

1934년 5월 15일에서 16일 밤, 칼리스 울마니스 총리와 야니스 발로디스 국방장관은 무혈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70][71] 의회와 헌법은 정지되었고,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며, 모든 정당이 금지되고 언론 검열이 확립되었다.[70] 페르콘크루스트,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 발트 독일인 공동체의 친나치 활동가, 극우 및 좌파의 다른 지도자들이 구금되었다. 구스타브스 셀민슈와 같은 특정 극단주의 정치인들은 투옥되었다.

경제면에서도 울마니스 정권은 국가 통제와 계획 메커니즘을 강화했다. 1934년에는 상공회의소가 설립되었고, 1935년에는 농업회의소와 장인회의소, 1936년에는 노동회의소가 설립되었다. 국가는 파산 경매를 연기하고 더 낮은 금리로 부채를 재융자하여 파산한 농민을 도왔다. 1934년 5월 29일, 국가는 협동조합과 협회를 통제했고, 낙농 산업은 낙농 농민 중앙 연합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16]

1935년 4월 9일, 라트비아 국립 신용 은행이 설립되어 많은 국영 산업 독점 기업과 주식 회사를 설립하여 외국 자본의 역할을 축소했다. 외국, 발트 독일 및 유대인 소유 회사의 매수 및 청산이 일반화되었다. 많은 경쟁 회사 대신 대규모 국영 회사가 설립되었고, 1939년에는 국영 회사가 38개나 되었다. 새로운 JSC Vairogs는 포드-바이로스(Ford-Vairogs) 라이선스 하에 철도 차량과 포드-바이로스 자동차를 생산했다. VEF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미녹스(Minox) 카메라와 VEF JDA-10M, VEF I-12 등과 같은 실험용 항공기를 제작했다. 1936년에서 1939년 사이에 발트해에서 가장 큰 규모인 70,000kWh 용량의 케구스 수력 발전소(Ķegums Hydroelectric Power Station)가 스웨덴 회사에 의해 건설되었다.

서방 국가들이 금본위제를 포기한 후, 라트비아 라트는 1936년 9월 영국 파운드에 고정되었다. 이는 라트비아 수출을 더욱 강화한 평가 절하였다. 1939년까지 주로 농산물에 힘입은 수출 호황에 힘입어 라트비아는 발트 국가 중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었으며, 1인당 GDP는 핀란드나 오스트리아보다 높았다.[13]

그러나 대공황으로부터의 회복에는 거의 10년이 걸렸다. 국민 소득은 1933년 1인당 444라트에서 1938년 1인당 637라트로 증가하여 마침내 1929년 수준을 넘어섰다.[16]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후 라트비아는 완전한 중립을 선언했지만, 독일이 발트해를 봉쇄했기 때문에 영국 시장과 완전히 단절되었다. 1939년 9월 3일 긴축 정책이 도입되었다. 정치적으로 재앙적인 1939년 10월 5일 소련-라트비아 상호 원조 조약은 새로운 수출입 기회를 제공했다. 1939년 10월 18일, 소련과 새로운 무역 협정이 체결되었다. 라트비아는 식량을 수출하고 그 대가로 석유, 연료 및 화학 물질을 받았다. 1939년 12월 15일, 나치 독일과 새로운 무역 협정이 체결되었다.

라트비아 농민들은 전통적으로 폴란드에서 온 계절별 농장 노동자에게 의존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단절되었고, 1940년 봄에는 새로운 규정에 따라 국가 직원, 학생 및 학교 학생에 대한 강제 노동 서비스가 도입되었다.

9.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1940년 소련나치 독일 사이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 조약의 비밀 의정서에 의해 소련에 병합되어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했다. 이듬해 독일군이 침공해 왔지만, 라트비아인들은 이를 "해방군"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나치에 의해 리가 게토가 창설되어,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과 기아, 질병에 의한 절멸 정책의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게토의 인구는 급속히 감소해 갔고, 1943년에 자진 소멸했다. 게다가 나치에 협력하여 유대인을 박해하는 라트비아인들도 있었고, 그 후 1944년에 소련에 재정복되었을 때, 리가 유대인은 150명 뿐이었다.[35]

이 과정에서 발트해 연안국가의 발트 독일인들은 러시아인에 의해 제거되어 민족 구성이 일변했다(독일인 추방).

세계 2차 대전 발발 직전, 소비에트 연방과 독일 나치는 ‘Molotov-Ribbentrop Pact’라는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는 발트 국가는 소비에트 지배하에 놓고, 폴란드는 독일의 영향권에 놓는 동유럽 지역에 대한 비밀조약이 포함되어 있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전쟁이 발발했고, 이를 통해 소비에트 연방은 발트 국가들을 침략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전투에서 라트비아는 독일 나치 소속이었지만, 독일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저항했다. 다시 독립하기 위한 라트비아인의 정신은 꺾이지 않았다. 점령당한 상태에서도 라트비아 의회를 설립하고, 라트비아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팸플릿을 만들고, “Brīvā Latvija” 라는 독립신문을 출판하는 등 라트비아인은 독립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9. 1. 소련 점령 (1940년)

1939년 8월 23일 소련나치 독일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하여 발트 국가의 소련 병합을 준비했다.[31] 이 조약의 비밀 의정서에 따라 발트 3국은 소련의 세력권으로 분할되었다.[31]

1939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따르면 "''발트 3국(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독일과 소련의 "세력권"으로 분할되었다. (독일 사본)


침공 위협 속에서 라트비아는 소련과 소련-라트비아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여 최대 25,000명의 소련군 주둔을 허용했다.[31]

1939년 10월 30일, 라트비아는 나치 독일의 제안에 따라 소련 점령 이후 이 지역에 거주해온 대부분의 독일계 민족을 "송환"하기 위한 협정을 체결했다.

7개월 후,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발트 3국이 소련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했다.[32] 1940년 6월 16일, 소련은 정부 교체와 무제한의 소련군 투입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고,[33] 6월 17일 라트비아를 점령했다. 7월 14일부터 15일까지 조작된 선거가 치러졌고, 그 결과는 모스크바에서 투표 마감 12시간 전에 발표되었다.[33] 새로 선출된 "인민 회의"는 라트비아를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선언하고 7월 21일 소련에 가입을 신청했다. 1940년 8월 5일, 라트비아는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편입되었다.[33]

라트비아 외교부는 공화국이 소련의 통제하에 있는 동안 망명 상태에서 계속 활동했다.

1941년 봄, 소련 중앙 정부는 점령된 발트 3국에서 반소련 세력의 대규모 추방을 계획했다. 이반 세로프 장군은 세로프 지침에 서명하여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에서 반소련 세력의 추방 절차와 관련"된 내용을 지시했다.[34] 1941년 6월 13일 밤부터 14일 밤까지 라트비아 주민 15,424명이 시베리아의 수용소와 소련의 강제 정착지로 추방되었다.[34]

9. 2. 나치 독일 점령 (1941년~1944년)

1941년,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의 비밀 의정서에 따라 소련에 병합되었던 라트비아를 점령했다.[35] 독일군이 리가 게토를 창설하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과 기아, 질병에 의한 절멸 정책의 고통을 겪었고, 게토의 인구는 급속히 감소하여 1943년에 자진 소멸했다.[35] 나치 독일의 라트비아 점령 직후, 유대인과 집시 인구를 제거하는 과정이 시작되었으며, 많은 학살이 룸불라에서 발생했다.[35][36] 학살은 아인자츠그루펜 A, 베르마흐트와 해병대뿐만 아니라, 악명 높은 아라이스 코만도와 라트비아 SD 구성원 등 라트비아 협력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35][36] 1941년 말까지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살해되거나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으며, 홀로코스트로 라트비아에서 약 85,000명이 사망했다.[35]

많은 라트비아인들이 독일 점령에 저항했다. 저항 운동은 라트비아 중앙 위원회 아래의 친독립파와 모스크바의 라트비아 파르티잔 운동 본부 아래의 친소련파로 나뉘었다. 아르투르스 스프로기스가 라트비아 사령관이었다. 1943년과 1944년에 바펜-SS의 두 개 사단이 라트비아 징집병과 지원병으로 구성되어 붉은 군대에 대항하는 독일을 도왔다.

10. 소련 시대 (1944년~1990년)

세계 2차 대전의 종말은 라트비아가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는 결과를 낳았다.[13] 1944년, 소련군의 진격으로 독일군과 소련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리가는 1944년 10월 13일 소련 붉은 군대에 의해 재점령되었다.[13] 쿠를란트 포켓은 1945년 5월 9일까지 저항했다. 전쟁 과정에서 두 점령군은 라트비아인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국가의 "생존 자원"의 손실을 증가시켰다.[13] 1944년, 라트비아 영토의 일부가 다시 소련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고, 라트비아 민족주의 파르티잔은 소련에 맞서 싸웠다.[13] 160,000명의 라트비아인들이 소련군을 피해 독일과 스웨덴으로 도망쳤다.[13]

라트비아 SSR의 국기


전쟁 직후, 나치에 협조하거나 저항 운동에 참여하거나 지원한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지방에서는 공유화가 강요되었고, 도시에서는 모든 사람이 공동 주택에서 거주해야 했다. 음악, 미디어, 소설을 비롯한 모든 출판물이 검열당했다. 하지만 독립운동은 지속되었고, 독립운동가의 규모는 약 2만명이었고 그들은 주로 라트비아 숲속에 거주하며 소비에트 군대에 의해 제거되기 전까지 소비에트 법에 저항하며 독립을 위해 싸웠는다. 일반 시민들도 문화를 통해 라트비아의 정체성을 지키는 방식으로 저항운동을 했다.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고 니키타 흐루쇼프가 권력을 승계하면서 흐루쇼프 해빙으로 알려진 시기가 시작되었지만, 에두아르즈 베르클라브스가 이끄는 민족 공산주의자들이 라트비아 공화국의 자치권을 획득하고 라트비아어의 지위를 보호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1959년 흐루쇼프가 라트비아를 방문한 후, 민족 공산주의자들은 직위에서 쫓겨났고 베르클라브스는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라트비아는 잘 발달된 기반 시설과 교육받은 전문가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스크바에서는 소련의 가장 진보된 제조 공장 중 일부를 라트비아에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옐가바의 주요 기계 공장 RAF, 리가의 전기 기술 공장, 다우가프필스, 발미에라, 올라이네의 화학 공장, 그리고 식품 및 석유 가공 공장이 건설되었다.[37] 그러나 새로 건설된 공장을 운영할 인력이 충분하지 않아 다른 소련 공화국에서 더 많은 이민자들이 이주했고, 이는 민족 라트비아인의 비율을 눈에 띄게 감소시켰다.

상징적인 RAF 미니버스


1989년까지 민족 라트비아인은 인구의 약 52%(1,387,757명)를 차지했는데, 이는 전쟁 전 77%(1,467,035명)에 비해 감소한 수치이다.

11. 독립 회복 (1990년~현재)

1980년대 중반,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공산주의 정권에서 자유화가 시작되었다. 라트비아에서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라트비아 인민 전선, 라트비아 민족 독립 운동, 라트비아 공화국 시민 회의 등 국가 독립 회복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정치 단체가 결성되었다. 1988년 10월 8일에는 라트비아 국립 독립운동단체 인민전선(the Popular Front)가 결성되었다. 1989년 8월 23일,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50주년을 맞아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 에스토니아인들은 탈린에서 리가, 빌뉴스까지 600km에 이르는 인간 띠인 발트의 길을 통해 발트 3국의 독립에 대한 단결된 염원을 보여주었다.

1991년 7월, 소련군이 라트비아 의회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리가의 바리케이드


1990년 5월 4일, 라트비아 SSR 최고 회의는 소련 내 자치에서 완전한 독립으로 전환하는 기간을 설정하는 라트비아 공화국의 독립 회복 선언을 채택했다. 그러나 1991년 1월, 친공산주의 세력은 무력으로 소비에트 권력을 회복하려 시도했고, 라트비아 시위대는 소련군이 전략적 요충지를 재점령하는 것을 막았다.(1991년 1월 라트비아 사건) 8월 쿠데타 실패 후, 라트비아 의회는 8월 21일 전환 기간 종료에 투표하여 전쟁 전 독립을 회복했다. 소련은 1991년 9월 6일 라트비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라트비아의 독립 운동은 ‘노래 혁명’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 회복 직후, 라트비아는 국제 연합 회원국이 되었고, 1992년에는 국제 통화 기금에 가입했다. 1994년 NATO의 ''평화를 위한 파트너십''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유럽 연합과의 자유 무역 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유럽 평의회 회원국이자 유럽 연합과 NATO 가입 후보가 되었으며, 세계 무역 기구에 가입했다.

조지 W. 부시,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 아르놀드 루이텔, 발다스 아담쿠스 (2005년 5월 7일, 리가)


1999년 말 헬싱키에서 열린 유럽 연합 정상회의에서 라트비아는 유럽 연합 가입 협상 초대를 받았다. 2004년 4월 2일 NATO에, 5월 1일에는 유럽 연합(EU)에 가입했다. 2003년 9월 국민 투표에서 약 67%가 EU 가입에 찬성했다. 2003년 4월 16일 솅겐 협정에 서명했고, 2007년 12월 21일부터 시행했다. 2014년 1월 1일, 유로존에 가입하여 유로를 통화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2011년부터 3년 연속 EU에서 가장 빠른 경제 성장 속도를 보였으며 OECD에도 가입했다. 2013년 11월에는 리가의 쇼핑센터 지붕 붕괴로 54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2023년 5월, 의회는 에드가르스 린케비치스를 라트비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발트해 연안 국가 최초의 공개적인 성소수자 국가 원수가 되었다. 한편, 국내 다수를 차지하는 러시아계 주민과의 잠재적인 대립은 러시아와의 외교 문제로 이어져 라트비아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12.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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