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히드 해브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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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록히드 해브 블루는 레이더 탐지를 회피하기 위해 개발된 스텔스 기술 실험기이다. 베트남 전쟁과 욤 키푸르 전쟁에서 전투기의 지대공 미사일 및 대공포에 대한 취약성이 드러나면서, 1970년대 미국은 스텔스 기술 연구를 시작했다. 록히드 스컹크 웍스는 1977년 12월 1일 초도비행에 성공한 해브 블루를 개발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록히드 F-117 나이트호크 공격기가 개발되었다. 해브 블루는 다면체 형태를 기반으로 레이더 반사 단면적을 줄이는 설계를 적용했으며, 두 대의 시제기가 제작되어 시험 비행을 거쳤다. 1978년과 1979년에 두 대 모두 추락했지만, 해브 블루의 개발 경험은 F-117 개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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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히드 해브 블루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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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스텔스 시범기 |
제작사 | 록히드 스컹크 웍스 |
최초 비행 | 1977년 12월 1일 |
퇴역 | 알 수 없음 |
제작 대수 | 2대 |
상태 | 파괴됨 |
주요 사용자 | 록히드 |
추가 사용자 | 알 수 없음 |
개발 기반 | 알 수 없음 |
파생형 | 알 수 없음 |
개발 결과 | 록히드 F-117A 나이트호크 |
2. 역사
월남전에서 레이더 유도 지대공 미사일(SAM)과 대공포(AAA)는 미 공군에게 큰 위협이었다. 공격기들은 종종 근접항공지원(CAS), SEAD기들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4] S-75 지대공 미사일은 사거리 45 km, 고도 3-23 km였다. 미 공군기들은 고도 4-5 km에서 공습을 했으나, 최초로 S-75 지대공 미사일에 F-4 전투기가 격추되자, 고도 3 km 이하로 비행해야만 했다. 그러자 대공포의 공격을 받아 SEAD기들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에서 이스라엘 공군은 18일 동안 109대의 전투기를 잃는 등 지대공 미사일에 취약한 전투기의 문제가 다시 부각되었다.[4]
소련은 냉전 기간 동안 중거리 및 장거리 탐색 레이더를 네트워크화하고, 핵심 시설 주변에 SAM과 AAA를 배치하여 적기로부터 방어했다.[4]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의 경험으로, NATO군은 큰 위협을 느꼈고, NATO의 군용기 수는 2주일 만에 모두 격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4]
록히드 스컹크 웍스는 해브 블루를 개발하여 1977년 12월 1일 초도비행에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록히드 F-117 나이트호크 공격기를 개발했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스텔스기이다. F-117은 1981년 6월 18일 초도비행했고, 2008년 4월 22일 퇴역했으며, F-117의 스텔스 폭격 임무는 현재 F-35 전투기가 대신 맡고 있다. 처음에 5개 회사가 초대되었고, 그중 3개 회사가 초기에 참여를 철회했다. 나머지 두 회사에 록히드가 나중에 합류했다.
2. 1. 베트남 전쟁과 욤 키푸르 전쟁
1970년대, 바르샤바 조약기구군과의 군사적 대립 상황에서 NATO 항공기가 곧 막대한 손실을 입을 것이라는 점이 미국 계획자들에게 점점 더 분명해졌다. 이는 정교한 소련 방어망의 결과였으며, 이 방어망은 감시 레이더, 레이더 유도 지대공 미사일(SAM), 대공포(AAA)를 사용하여 적 항공기를 탐지하고 격추했다. 그 결과,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운용 가능한 스텔스 항공기를 설계하고 생산하기 위해 저피탐 항공기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1]2. 2. 냉전 시대 소련의 방공망
1970년대, 바르샤바 조약기구군과의 군사적 대립 상황에서 NATO 항공기가 곧 막대한 손실을 입을 것이라는 점이 미국 계획자들에게 점점 더 분명해졌다. 이는 정교한 소련 방어망, 즉 감시 레이더, 레이더 유도 지대공 미사일(SAM), 대공포(AAA)를 사용하여 적 항공기를 탐지하고 격추하는 방어 체계의 결과였다.[1] 그 결과,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운용 가능한 스텔스 항공기를 설계하고 생산하기 위해 저피탐 항공기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1]2. 3. 해브 블루 개발
월남전에서 레이더 유도 지대공 미사일(SAM)과 대공포(AAA)는 미국 공군에 큰 위협이었다. 공격기들은 종종 근접항공지원(CAS), SEAD기들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에서 이스라엘 공군은 18일 동안 109대의 전투기를 잃는 등 지대공 미사일에 취약한 전투기의 문제가 다시 부각되었다. 소련은 냉전 기간 동안 중거리 및 장거리 탐색 레이더를 네트워크화하고, 핵심 시설 주변에 SAM과 AAA를 배치하여 적기로부터 방어했다. NATO군은 욤 키푸르 전쟁의 경험으로 큰 위협을 느꼈고, NATO의 군용기 수는 2주일 만에 모두 격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4]1974년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5개의 항공기 제조업체에 항공기가 탐지 불가능한 임계값과 그러한 항공기를 설계 및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비밀리에 요청했다.[4] 페어차일드 항공기(Fairchild Aircraft)와 그루먼(Grumman)은 참여를 거부했고, 제너럴 다이내믹스(General Dynamics)는 전자전 사용을 주장하여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맥도넬 더글러스(McDonnell Douglas)와 노스롭(Northrop)은 각각 추가 연구를 위해 100000USD를 받았다.[5]
록히드 스컹크 웍스는 해브 블루를 개발하여 1977년 12월 1일 초도비행에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록히드 F-117 나이트호크 공격기를 개발했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스텔스기이다.
3. 설계 및 개발
베트남 전쟁과 욤 키푸르 전쟁을 거치면서 지대공 미사일과 대공포는 항공기에 큰 위협이 되었고, 레이더 유도 미사일을 피하기 위한 항공기 개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4] 1974년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여러 항공기 제조업체에 레이더 탐지가 사실상 불가능한 항공기 설계 및 제조 가능성을 비밀리에 문의했다.[4] 맥도넬 더글러스와 노스롭이 연구에 참여했고, 록히드는 뒤늦게 DARPA의 제안을 받아 프로그램에 참여했다.[5][6]
초기 설계자 리처드 C. 셔러는 낮은 레이더 반사 단면적(RCS) 설계를 위해 데니스 오버홀저에게 자문했고, 오버홀저는 평평한 표면으로 레이더 에너지를 반사시키는 다면체 형태의 항공기를 제안했다.[7][8] 데니스 오버홀저는 수학자 빌 슈로더와 함께 RCS를 예측하는 "ECHO 1"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ECHO 1은 회절로 인한 가장자리 계산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소련 엔지니어 표트르 우피므체프의 연구 결과를 통합했다.[8][9]
ECHO 1을 통해 20가지 설계 중 다면 델타익 설계가 최적임을 확인했다.[11]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형태에 회의적이었고, "희망 없는 다이아몬드"(Hopeless Diamond)라는 별명을 붙였다.[12]
1975년 5월, 스컹크 웍스는 "진척 보고서 2호, 고 스텔스 개념 연구"라는 내부 보고서를 통해 "리틀 하비"라는 개념 연구를 발표했다. 벤 리치는 다면 각도 설계를 옹호하여 켈리 존슨과의 논쟁에서 승리했다.[13] 발사 나무로 만든 24인치 모델, ⅓ 크기의 나무 모형 2개 등 여러 모델이 제작되어 내부 구조, 접근 문 배치, RCS 계산 검증, 풍동 테스트 등에 활용되었다.[14][11][15] 이후 캘리포니아주 팔름데일 근처 모하비 사막의 그레이 버트 레인지 레이더 테스트 시설에서 RCS를 정밀 테스트한 결과, ECHO 1의 예측이 정확함을 확인했다.[11]
1975년 여름,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록히드, 노스롭, 맥도넬 더글러스에 "실험 생존성 시험대(Experimental Survivable Testbed, XST)"라는 이름으로 항공기 개발을 비공식적으로 제안했다.[12][16] 1976년 3월, 록히드 모형이 시험장에 옮겨져 테스트를 받았고, 다음 달 록히드가 승자로 발표되었다.[20]
스컹크 웍스는 "해브 블루(Have Blue)"의 일환으로 두 대의 유인 시험기를 설계, 제작 및 비행 시험해야 했다. 벤 리치는 이 시험기를 제작하기 위해 록히드 경영진으로부터 1040만달러를 모금해야 했고, 이는 6월까지 확보되었다.[23]
표면적으로는 나중에 제작된 F-117과 유사하지만, "해브 블루" 시제기는 F-117의 4분의 1 정도 무게인 더 작은 항공기였으며, 날개 후퇴각 72.5°와 안쪽으로 기울어진 수직 꼬리(역 V자형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25][26] 항공기의 총 중량은 약 4173.05kg–약 5669.90kg로 노스롭 F-5 전투기의 착륙 장치를 사용할 수 있었다.[28] 항공기의 동력 장치는 T-2C 버키에 사용되었던 2950lbf 제너럴 일렉트릭 J85-GE-4A 엔진 두 대였다.[30][29] 스텔스가 무엇보다 우선시되었기 때문에 항공기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했다. 그 결과, 정상적인 비행 특성을 부여하기 위해 4중 중복 플라이 바이 와이어(FBW) 비행 제어 시스템이 항공기에 통합되었다. 이 비행 제어 시스템은 F-16에서 차용되었다.[30]
3. 1. 초기 설계
베트남 전쟁과 욤 키푸르 전쟁을 거치면서 지대공 미사일과 대공포는 항공기에 큰 위협이 되었고, 레이더 유도 미사일을 피하기 위한 항공기 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4] 1974년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여러 항공기 제조업체에 레이더 탐지가 사실상 불가능한 항공기 설계 및 제조 가능성을 비밀리에 문의했다.[4] 맥도넬 더글러스와 노스롭이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고, 록히드는 뒤늦게 DARPA의 제안을 받아 프로그램에 참여했다.[5][6]초기 설계자 리처드 C. 셔러(Richard C. Scherrer)는 낮은 레이더 반사 단면적(RCS) 설계를 위해 데니스 오버홀저(Denys Overholser)에게 자문했고, 오버홀저는 평평한 표면으로 레이더 에너지를 반사시키는 다면체 형태의 항공기를 제안했다.[7][8] 데니스 오버홀저는 수학자 빌 슈로더와 함께 RCS를 예측하는 "ECHO 1"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8] ECHO 1은 회절로 인한 가장자리 계산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소련 엔지니어 표트르 우피므체프(Pyotr Ufimtsev)의 연구 결과를 통합했다.[8][9] 1962년 표트르 우피므체프는 '회절의 물리 이론에서 가장자리 파동의 방법'이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이 연구는 미국 공군 시스템 사령부의 외국 기술 부서에서 번역했다.[10]
ECHO 1을 통해 20가지의 설계 중 다면 델타익 설계가 최적임을 확인했다.[11]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형태에 회의적이었고, "희망 없는 다이아몬드"(Hopeless Diamond)라는 별명을 붙였다.[12] 켈리 존슨은 D-21 무인기가 ''해브 블루''보다 RCS가 낮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1]
1975년 5월, 스컹크 웍스는 "진척 보고서 2호, 고 스텔스 개념 연구"라는 내부 보고서를 통해 "리틀 하비"라는 개념 연구를 발표했다. 벤 리치는 다면 각도 설계를 옹호하여 켈리 존슨과의 논쟁에서 승리했다.[13]
발사 나무로 만든 24인치 모델, ⅓ 크기의 나무 모형 2개 등 여러 모델이 제작되어 내부 구조, 접근 문 배치, RCS 계산 검증, 풍동 테스트 등에 활용되었다.[14][11][15] 이후 캘리포니아주 팔름데일 근처 모하비 사막의 그레이 버트 레인지 레이더 테스트 시설에서 RCS를 정밀 테스트한 결과, ECHO 1의 예측이 정확함을 확인했고, 켈리 존슨은 벤 리치에게 25센트를 줘야 했다.[11]
3. 2. 실험 및 테스트
1975년 5월, 스컹크 웍스는 "진척 보고서 2호, 고 스텔스 개념 연구"라는 내부 보고서를 통해 "리틀 하비"라는 개념 연구를 발표했다. 여기에는 켈리 존슨이 제안한 부드럽게 혼합된 형태의 항공기 그림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벤 리치는 다면 각도 설계를 지지하여 결국 그의 의견이 채택되었다.설계 과정에서 여러 개의 나무 모델이 제작되었다. 내부 구조와 접근 문의 배치를 보여주기 위해 발사 나무로 24인치 길이의 모델이 만들어졌다. 초기 테스트를 위해 ⅓ 크기의 나무 모형 2개가 제작되었는데, 하나는 금속 호일로 코팅하여 ECHO 1의 레이더 반사 단면적(RCS) 계산을 검증하는 데 사용되었고, 다른 하나는 풍동 테스트에 사용되었다.[11][15]
이후 모델은 캘리포니아주(California) 팔름데일(Palmdale) 근처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의 그레이 버트 레인지(Grey Butte Range) 레이더 테스트 시설로 옮겨져 항공기의 RCS를 보다 정확하게 테스트했다. 최종적으로 항공기의 RCS 수준은 ECHO 1의 예측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11]
3. 3. XST (Experimental Survivable Testbed) 프로그램
1975년 여름,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록히드, 노스롭, 맥도넬 더글러스에 "실험 생존성 시험대(Experimental Survivable Testbed, XST)"라는 이름으로 항공기 개발을 비공식적으로 제안했다.[12][16] 맥도넬 더글러스는 항공기가 탐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임계값을 확인했지만, 그러한 항공기를 설계하고 생산할 수 없었다.[17] XST의 1단계는 록히드와 노스롭이 RCS를 테스트하기 위해 실물 크기 모델을 제작하고, 비행 가능한 기체를 제작하며, 설계를 풍동 시험하는 것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1단계 이후, 2단계에서는 두 대의 시제기를 제작하고 비행 시험을 수행할 단일 계약자가 선정될 예정이었다.[16] 노스롭과 록히드의 설계는 전반적으로 유사했지만, 노스롭의 제출작은 더 각지고 평평한 표면을 특징으로 했다. 노스롭은 ECHO 1과 유사한 "GENSCAT"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설계의 RCS를 계산했다.[17][18]1975년 11월 1일, 록히드와 노스롭은 각각 150만달러의 계약을 체결하여 XST 1단계를 진행했다.[19] 두 회사는 4개월 동안 실물 크기의 나무 모형을 제작해야 했으며, 이후 미 공군의 레이더 표적 산란 (RATSCAT) 시험 시설 (뉴멕시코주 화이트 샌즈)에서 평가를 받았다.[17] 레이더 반사 테스트를 위해 록히드는 18.7만달러를 들여 모델을 설치할 특수 제작된 기둥을 세웠다. 1976년 3월, 록히드 모형이 시험장에 옮겨져 테스트를 받았고, 다음 달 록히드가 승자로 발표되었다.[20] 이는 노스롭 XST의 측면 반구 RCS가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21] DARPA는 연구를 통해 축적된 진전을 깨닫고 노스롭 팀에게 함께 남아있을 것을 촉구했다. 이후 DARPA는 전장 감시 항공기-실험 (BSAX)을 시작했고, 이 프로젝트는 태킷 블루로 발전했으며, 궁극적으로 B-2 폭격기로 이어졌다.[22]
3. 4. 해브 블루 제작
스컹크 웍스는 "해브 블루(Have Blue)"의 일환으로 두 대의 유인 시험기를 설계, 제작 및 비행 시험해야 했다. 벤 리치는 이 시험기를 제작하기 위해 록히드 경영진으로부터 1040만달러를 모금해야 했고, 이는 6월까지 확보되었다.[23]
두 대의 "해브 블루(Have Blue)" 시험기 제작에는 C-5 프로그램에서 남은 도구가 사용되었다. HB1001의 최종 조립은 원래 1977년 8월에 완료될 예정이었고, 10월 중순까지 지상 시험을 거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77년 9월 1일, HB1001이 부분적으로 완성된 상태에서 록히드 기계공들이 4개월간 파업에 들어갔다. 관리자 그룹이 조립 작업을 맡아 6주 만에 완료했고, 10월 17일부터 지상 시험이 시작되었다.[24]
표면적으로는 나중에 제작된 F-117과 유사하지만, "해브 블루(Have Blue)" 시제기는 F-117의 4분의 1 정도 무게인 더 작은 항공기였으며, 날개 후퇴각 72.5°와 안쪽으로 기울어진 수직 꼬리(역 V자형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25][26] 록히드 연구소에서 개발한 레이다 흡수 재료 (RAM)가 항공기의 평평한 표면에 적용되었다. 앞 유리의 경우 금속 특성을 부여하기 위해 특수 코팅이 적용되었다.[27][28] 항공기의 총 중량은 약 4173.05kg–약 5669.90kg로 노스롭 F-5 전투기의 착륙 장치를 사용할 수 있었다.[28] 항공기의 동력 장치는 T-2C 버키에 사용되었던 2950lbf 제너럴 일렉트릭 J85-GE-4A 엔진 두 대였다.[30][29] 스텔스가 무엇보다 우선시되었기 때문에 항공기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했다. 그 결과, 정상적인 비행 특성을 부여하기 위해 4중 중복 플라이 바이 와이어 (FBW) 비행 제어 시스템이 항공기에 통합되었다. 이 비행 제어 시스템은 F-16에서 차용되었다.[30] 날개 위 엔진 흡입구는 낮은 RCS 그리드로 덮여 있었고, 더 많은 공기가 필요한 이륙 시 추가적인 기류를 허용하기 위해 상부 동체에 블로우인 도어가 설치되었다.[31]
지상 시험 시작 후 1개월 반 동안, 두 대의 시험기 중 첫 번째인 HB1001은 첫 비행을 위한 준비 시험을 거쳤다. 11월 초, 두 대의 세미 트레일러가 82번 건물 외부에 나란히 주차되었고, 위장망을 덮어 실외 엔진 가동 중에 시험기를 덮었다. 엔진 시험 중 지역 주민이 소음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지만, "해브 블루(Have Blue)"는 비밀을 유지했다.[24] HB1001은 철 코트 페인트를 받았고, 11월 12–13일 주말 동안, 앨런 브라운이 고안한 위장 배색을 적용받았다. 세 가지 색상과 각각 세 가지 톤으로 구성된 이 배색은 디자인의 특징적인 패싯을 알아보는 일반 관찰자를 속이기 위해 사용되었다.[24] 항공기는 분해되어 C-5에 적재되었고, 1977년 11월 16일 버뱅크 공항에서 네바다주 그룸 호수에 있는 51구역으로 비행했다. 착륙 후 항공기는 재조립된 후 첫 비행 전에 또 다른 일련의 시험을 거쳤다.[32]
4. 운용 역사
HB1001은 1977년 12월 1일 록히드 테스트 파일럿 빌 파크의 조종으로 첫 비행을 실시했다. 이후 빌 파크는 4번의 비행을 더 했으며, T-38 추적기는 켄 다이슨 소령(후에 중령)이 조종했다.[34] 1978년 1월 17일 다이슨은 HB1001로 첫 비행을 했으며, 빌 파크가 추적기를 조종했다. 이 두 사람은 ''해브 블루''의 유일한 테스트 파일럿이 되어 시험기와 추적기를 번갈아 가며 조종했다.[34]
1978년 5월 4일, HB1001의 36번째 비행 시험 중 착륙 장치가 반쯤 들어간 상태로 고정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빌 파크는 연료가 떨어지자 탈출해야 했고, 항공기는 그룸 호수 시설 근처에서 파괴되었다.[35] 빌 파크는 뇌진탕을 겪어 더 이상 비행 테스트를 할 수 없게 되었다.[36]
HB1002는 1978년 7월 20일, 다이슨이 조종하여 첫 비행을 했다.[37] 1979년 7월 11일, HB1002는 52번째 비행 중 유압유 누출로 인한 엔진 화재가 발생하여 손실되었다. 유압 압력 손실로 인해 심각한 피치 진동이 발생했고, 조종사는 안전하게 탈출했으나 기체는 파괴되었다.[38]
두 기체의 잔해는 넬리스 공군 기지 단지 어딘가에 비밀리에 묻혔다.[38] 추락 사고에도 불구하고 ''해브 블루''는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40]
4. 1. HB1001
HB1001은 1977년 12월 1일 록히드 테스트 파일럿 빌 파크의 조종으로 첫 비행을 실시했다. 이후 빌 파크는 4번의 비행을 더 했는데, 모두 T-38 추적기 조종은 켄 다이슨 소령(후에 중령)이 맡았다.[34] F-15 이글 조종사였던 다이슨은 1976년에 이미 미국 공군 관계자로부터 이 프로젝트에 대한 제안을 받았다.[23] 1978년 1월 17일 다이슨은 HB1001로 첫 비행을 했으며, 빌 파크가 추적기를 조종했다. 이 두 사람은 ''해브 블루''의 유일한 테스트 파일럿이 되어 시험기와 추적기를 번갈아 가며 조종했다.[34] 비행 시험 결과는 엔지니어들이 FBW(Fly-By-Wire, 전기식 비행 제어)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동시에, 공기역학 엔지니어들의 항공기 거동에 대한 이전 예측을 검증했다.[34]1978년 5월 4일, HB1001의 36번째 비행 시험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항공기가 지면에 닿는 순간 기수가 위로 들렸고, 조종사 빌 파크는 착륙을 포기하고 두 번째 시도를 해야 했다. 그러나 충격이 너무 강해서 착륙 장치가 반쯤 들어간 상태로 고정되었다. 착륙 장치를 내리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빌 파크는 다시 상승하여 연료가 떨어지자 탈출해야 했다. 항공기는 그룸 호수 시설 근처에서 충돌로 파괴되었다.[35] 빌 파크는 생존했지만 뇌진탕을 겪어 더 이상 비행 테스트를 할 수 없게 되었다.[36] 추적기에 탑승했던 다이슨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착륙 직전에 항공기가 위로 들렸습니다... 땅에 매우 세게 부딪힌 것 같았습니다... 그 [파크]는 재상승하면서 랜딩 기어를 올렸고, 접근하면서 펼치려고 했을 때 메인 기어 중 하나와 노즈 기어만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계속 연료가 소모되었고... 저는 그에게 탈출을 위해 약 3048.00m까지 상승하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상승하기 시작했지만, 연료 부족으로 엔진이 플레임아웃되기 시작했고, 그래서 탈출했습니다."[36]
4. 2. HB1002
HB1002는 HB1001 추락 이후 거의 완성된 상태로, HB1001에서 얻은 교훈을 통합하여 후방 동체가 재건되었다.[33] HB1002는 회색 페인트 코팅을 했고, HB1001 기수에 있던 비행 시험 계측 붐이 없었으며, RCS 반사율 시험을 위해 스텔스가 아닌 스핀 회복 낙하산이 제거되고 레이더 흡수 재료로 덮였다는 점이 프로토타입과 달랐다.[35] 1978년 7월 20일, 다이슨이 조종하여 첫 비행을 했고, 그는 이 기체를 조종한 유일한 조종사가 되었다.[37]1979년 7월 11일, HB1002는 52번째 비행 중 유압유 누출로 인한 엔진 화재가 발생하여 손실되었다. 유압 압력 손실로 인해 심각한 피치 진동이 발생했고, 조종사는 안전하게 탈출했으나 기체는 파괴되었다.[38] 이후 엔진 배기 클램프가 풀려 뜨거운 배기가 오른쪽 엔진 구획으로 이동하면서 열이 축적되어 유압 라인이 고장난 것으로 밝혀졌다.[39] 두 기체의 잔해는 넬리스 공군 기지 단지 어딘가에 비밀리에 묻혔다.[38] 추락 사고에도 불구하고 ''해브 블루''는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40]
5. 시니어 트렌드 (F-117 나이트호크)
월남전과 욤 키푸르 전쟁에서 레이더 유도 지대공 미사일과 대공포에 의한 전투기 손실은 미국 공군과 NATO군에 큰 위협이었다. 이에 록히드 스컹크 웍스는 해브 블루를 개발했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 최초의 스텔스 공격기인 F-117 나이트호크를 개발했다. F-117은 1981년 6월 18일에 초도비행했고, 2008년 4월 22일에 퇴역했다.
1977년 10월, 미 공군은 '시니어 트렌드'라는 암호명으로 록히드와 계약을 체결하고, '해브 블루' 프로그램에서 개발된 혁신적인 기술을 활용하고자 했다.[38] 전술항공사령부는 5대의 실물 크기 개발 항공기와 20대의 생산 항공기를 주문했다.[38]
'해브 블루' 시제기를 기반으로 한 '시니어 트렌드' 항공기(F-117)는 날개, 전방 동체, 수직 안정판 등에서 이전 모델과 차이를 보였다.[38] 특히, 각각 약 907.18kg의 레이저 유도 폭탄 1발 또는 B61 전술 핵무기를 수용할 수 있는 2개의 무장창을 갖추었다.[38]
최초의 FSD 항공기는 초기 제작 문제와 연료 누출 문제로 첫 비행이 지연되었으나, 1981년 6월 18일에 해롤드 파리(Harold Farley)의 지휘하에 첫 비행에 성공했다.[38] 첫 번째 생산형 F-117A는 1982년에 인도되었고, 1983년 10월에 작전 능력을 달성했으며, 1990년에 마지막 F-117A가 인도되었다.[42][43]
6. 제원
항목 | 내용 |
---|---|
승무원 | 1명 |
길이 | 약 14.33m 약 7.62cm |
날개폭 | 약 6.71m 약 15.24cm |
높이 | 약 2.13m 약 15.24cm |
날개 면적 | 약 35.86m2 |
자체 중량 | 약 4059.65kg |
최대 이륙 중량 | 약 5669.90kg |
엔진 | 제너럴 일렉트릭 J85-GE-4A 터보제트 엔진 2기 |
엔진 추력 | 각각 2950lbf |
최대 속도 | 521kts |
날개 하중 | 32lb/sqft |
추력/중량 비 | 0.46–0.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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