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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사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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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류사오치는 1898년 후난성에서 태어나 중국 공산당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모스크바 동방 노동자 공산주의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노동 운동에 참여했으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과 정치국 위원을 역임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는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국가주석을 지내며 당 조직과 경제 정책 분야에서 활동했다. 1959년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시장경제 정책을 도입하고 마오쩌둥을 비판했으나, 문화대혁명 시기에 실각하여 1969년 사망했다. 덩샤오핑 집권 이후 복권되었으며,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혁명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여러 저술을 남겼으며, 6번의 결혼을 통해 여러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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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사오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0년대 공식 사진
본명류사오치 (刘少奇)
로마자 표기Liu Shaoqi
출생일1898년 11월 24일
출생지청나라 후난성 닝샹 시
사망일1969년 11월 12일
사망지중화인민공화국 허난성 카이펑 시
배우자허바오전 (1923년 결혼, 1934년 사별)
셰페이 (1935년 결혼, 1940년 이혼)
왕첸 (1942년 결혼, 1943년 이혼)
왕광메이 (1948년 결혼, 1969년 사별)
자녀9명 (류윈빈, 류위안 포함)
소속 정당중국 공산당 (1921년–1968년)
주요 경력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임기 시작: 1959년 4월 27일
임기 종료: 1968년 10월 31일
총리: 저우언라이
부주석: 둥비우, 쑹칭링
주석: 마오쩌둥(중국 공산당 주석)
전임: 마오쩌둥
후임: 둥비우, 쑹칭링 (대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임기 시작: 1954년 9월 27일
임기 종료: 1959년 4월 27일
전임: (직책 신설)
후임: 주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임기 시작: 1956년 9월 28일
임기 종료: 1966년 8월 1일
주석: 마오쩌둥
전임: (직책 신설)
후임: 린뱌오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선거구: 베이징 시 전국
임기 시작: 1954년 9월 15일
임기 종료: 1968년 10월 21일
기타 경력
중국공산당 당무위원해당사항 없음
중국공산당 명예고문위원해당사항 없음
중국공산당 제명 처분1968년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임기 시작: 1949년 10월 1일
임기 종료: 1954년 9월 27일
주석: 마오쩌둥(당 주석 겸 정부 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임기 시작: 1959년 4월 27일
임기 종료: 1969년 11월 12일
전임: 마오쩌둥
후임: 마오쩌둥

2. 생애와 경력

류사오치는 청나라 말기 후난성의 비교적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나 근대 교육을 받았다.[1][3] 젊은 시절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하고 소련에서 유학하며 192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1] 귀국 후 노동 운동을 지도하며 두각을 나타냈고,[1] 1927년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제1차 국공합작 결렬 후에는 중국 국민당 통치 지역에서 지하 활동을 전개했다.

장정에 참여하여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지지하며 그의 당내 지도력 확립에 기여했고,[7] 이후 항일 전쟁 시기에는 화북 지역 당 조직을 이끌며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8] 1941년 신사군 재건에 힘썼고,[9] 당원의 기강 확립을 위한 저서 『論共產黨員的修養중국어』을 집필했다. 1943년 당 중앙서기처 서기로 임명되어 권력 핵심에 진입했으며, 1945년 제7차 당 대회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당의 지도 이념으로 공식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마오쩌둥에 이은 당내 서열 2위로 부상했다.[9]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등 주요 직책을 맡았고,[9] 1956년 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수석이 되었다.[9] 1959년 대약진 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에 취임했다. 이후 덩샤오핑과 함께 대약진 운동의 폐해를 수습하고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등 실용적인 조정 정책을 추진했다.[14]

그러나 이러한 실용주의 노선과 대약진 운동 실패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마오쩌둥과의 심각한 갈등을 초래했다.[2][37] 1962년 7천인 대회에서 대기근의 원인이 인재(人災)임을 지적한 발언은 마오쩌둥의 불신을 샀다.[2] 결국 1966년 마오쩌둥이 발동한 문화 대혁명의 주요 목표가 되어 '자본주의 길을 걷는 실권파'(주자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었다.[21] 마오쩌둥의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지시 이후[38][39] 공개적인 비판과 박해가 이어졌고, 1968년 날조된 죄목으로 당에서 영구 제명되고 모든 직무를 박탈당했다.[41] 이후 카이펑으로 이송되어 감금된 상태에서 열악한 처우 속에 병세가 악화되어 1969년 사망했다.[27][28][23]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후, 덩샤오핑의 주도로 1980년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되고 복권되었다. 그는 중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지도자이자 문화 대혁명의 비극을 상징하는 인물로 재평가받고 있다.

2. 1. 생애 초반

1898년 청나라 후난성 닝샹 현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마오쩌둥의 고향인 사오산과 약 20km 떨어진 곳으로, 비교적 부유한 농가 출신이었다.[1] 그의 조상의 고향은 장시성 지수이현이다.[2] (일설에는 청나라 허난성 카이펑에서 태어나 유아기를 보냈다고도 한다.)

근대 교육을 받았으며,[3] 닝샹 주성 중학교를 다녔고, 1913년 창사의 거성중학교(주셩중학)를 졸업했다. 1920년 후난성에서 런비스와 함께 사회주의 청년단(후의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했다. 같은 해 소련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열린 강좌에 참석했고, 이후 소련으로 건너가 1921년 모스크바에 있는 코민테른 산하의 동방 노동자 공산주의 대학교에서 공부했다.[1]

1921년 새로 결성된 중국 공산당(CCP)에 가입했다.[1] 1922년 코민테른이 주최한 극동 민족 대회에 참가한 뒤 중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중화 전국 노동 조합 서기 자격으로 장시성 안위안 탄광과 양쯔강 유역의 철도 노동자 파업을 리리싼 등과 함께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1] 이후 주로 노동 운동 분야에서 활약했다.

1927년 류사오치


1927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제1차 국공합작이 붕괴되고 중국 국민당의 공산당 탄압이 시작되자, 중국 국민당 지배 지역(백구)을 중심으로 지하 활동을 전개하며 후베이성과 상하이의 당 조직을 이끌었다. 1932년에는 푸젠성 당서기에 임명되었다. 류사오치는 주로 도시에서의 노동 운동과 지하 활동을 통해 혁명에 기여했는데, 이는 농촌에서 유격전을 통해 혁명 활동을 전개한 마오쩌둥과는 대조적인 방식이었다.

2. 2. 혁명 활동

1920년 후난성에서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후의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하며 혁명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에는 소비에트 연방으로 건너가 모스크바의 동방 노동자 공산대학에서 수학하며 같은 해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2년 코민테른이 주최한 극동 민족 대회에 참가한 후 귀국하여, 리리싼 등과 함께 장시성 안위안 탄광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노동 운동 분야에서 활동했다.

1925년 광저우에 본부를 둔 중화전국총공회 집행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이후 2년간 후베이와 상하이에서 여러 정치 운동과 파업을 지도했다. 특히 5.30 운동 이후 상하이에서 리리산과 함께 공산주의 활동을 조직했으며, 우한을 거쳐 광저우로 돌아와 16개월간 지속된 광저우-홍콩 파업 조직에 기여했다.[4] 1927년에는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당 노동부의 책임자가 되었다.[5] 제1차 국공 합작이 결렬된 후에는 중국 국민당 통치 지역(백구)을 중심으로 지하 활동을 전개했다.

1929년 상하이의 당 본부로 돌아와 만주 당 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어 펑톈 등지에서 활동했다.[6] 1930년1931년에는 제6기 중앙위원회 제3차 및 제4차 전체회의에 참석했으며, 1931년 또는 1932년 중국 소비에트 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2년 후반 상하이를 떠나 장시 소비에트로 이동했고,[7] 푸젠성 당 서기를 맡았다.

1934년 10월부터 시작된 장정에 참가했으며, 이듬해 열린 쭌이 회의에서는 마오쩌둥을 지지하여 그의 당내 지도력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정 이후 산시성에 자리 잡은 뒤, 1935년 12·9 운동 발생에 따라 당 중앙으로부터 베이징과 톈진을 중심으로 한 화북 지역의 지하 활동을 재조직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1936년 화베이(북중국) 당 서기가 되어 펑전, 안쯔원, 보이보, 커칭스, 류란타오, 야오이린 등과 함께 항일 운동을 이끌었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키는 공작 활동을 지휘했다는 평가도 있으며, 같은 해 옌안의 공산주의 근거지로 이동했다.[8] 1939년에는 중원국을, 1941년에는 화중국을 책임졌다.

1941년 완난 사변으로 큰 타격을 입은 신사군의 정치 위원으로 임명되어 군 재건과 화중 지역 근거지 확장에 힘썼다.[9] 이 시기에 당원의 규율과 자세를 강조한 저서 『공산당원의 수양을 논함』(論共產黨員的修養중국어)을 집필했는데, 이 책은 당내에서 널리 읽혔다.

1943년 옌안으로 돌아와 당 중앙서기처 서기(현재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해당)에 취임하며 권력 핵심에 진입했고, 정풍 운동에도 참여했다.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열린 제7차 당 대회에서는 "당 규약의 개정에 관한 보고"를 통해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공식 문서에 포함시켰다. 이 대회에서 그는 마오쩌둥에 이어 당내 서열 2위인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 서기(5인 비서 중 한 명)로 선출되었다.[9] 또한 모든 당원에게 "모든 것은 대중을 위해; 대중에 대한 완전한 책임; 대중의 자기 해방에 대한 믿음; 대중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라는 네 가지 '대중적 요점'을 명확히 했다.[10] 이 대회 이후 만주와 중국 북부의 모든 공산군을 지휘하는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9]

제2차 세계 대전중일 전쟁 종전 후, 마오쩌둥이 충칭에서 장제스와 회담하는 동안 옌안에서 당 주석 대리 역할을 수행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전인 1949년 7월에는 당 중앙 대표단을 이끌고 비밀리에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며 중소 양당 관계 정상화와 신중국 건설 방침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 1939

2. 3. 정치 활동

중국 국민당과의 국공 내전을 거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류사오치는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인민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등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1956년 제8차 당대회 이후에는 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수석 자리에 오르며 마오쩌둥에 이어 당내 서열 2위의 입지를 굳혔다.

1958년부터 시작된 마오쩌둥 주도의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심각한 경제난과 기근을 초래하자, 1959년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에 취임했다. 마오쩌둥은 당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은 유지했으나, 국정 운영의 최고 책임자가 되면서 류사오치의 정치적 비중은 더욱 커졌다. 그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목격하고, 1962년 7천인 대회에서 대기근의 원인이 "천재가 3할, 인재가 7할"이라며 당 중앙의 책임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이후 덩샤오핑과 함께 시장주의 요소를 도입한 경제 조정 정책을 추진하여 경제 회복에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실용주의 노선과 대약진 운동 실패에 대한 비판은 마오쩌둥과의 심각한 갈등을 야기했다.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의 정책을 '자본주의 노선' 또는 '우익적 기회주의'로 비판하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대약진 운동 실패로 권력 기반이 약화되었던 마오쩌둥은 1966년 문화 대혁명을 발동하여 권력 탈환을 시도했고, 류사오치는 덩샤오핑과 함께 '자본주의 길을 걷는 실권파'(주자파)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주요 타도 대상이 되었다.

1966년 8월 제8기 11중전회에서 마오쩌둥은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는 사실상 류사오치를 겨냥한 것이었다.[38][39] 이 회의에서 류사오치는 당 부주석 직에서 해임되고 당내 서열도 8위로 강등되었다. 이후 공개적인 비판과 대자보 공격이 이어졌고, 10월 중앙 공작 회의에서 행한 자기 비판은 오히려 추가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40]

1967년부터 류사오치에 대한 공격은 더욱 격화되어 '중국의 흐루쇼프'로 매도되었고, 부인 왕광메이와 함께 대중 앞에서 모욕적인 조리돌림을 당하는 등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41] 자택에 감금되고 외부와의 연락이 차단되었으며, 홍위병에게 폭행당하기도 했다.[41] 마오쩌둥 파는 과거 류사오치의 행적을 왜곡하여 '스파이', '배신자'라는 죄목을 날조했고, 이를 근거로 1968년 10월 제8기 확대 12중전회에서 류사오치를 당에서 영구 제명하고 모든 직무를 박탈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류사오치는 완전히 실각하게 되었다.

2. 3. 1. 부주석 취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류사오치는 중앙인민정부 부주석과 인민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았다. 1954년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NPC)에서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자, 그는 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1959년 제2차 NPC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1956년 9월, 제8차 중국 공산당 당대회에서 정치 보고를 담당했으며, 이어진 제8기 1중전회에서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및 중앙위원회 부주석의 수석으로 선출되었다.[9] 이로써 그는 1966년 실각할 때까지 제1 중국 공산당 부주석의 지위를 유지했다.[9]

류사오치의 주요 업무는 당 조직 및 이론 문제에 집중되었다.[11] 그는 당 규정을 작성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칙에 따라 당 조직의 발전을 감독했다.[12] 정통적인 소련식 공산주의자로서 국가 계획 경제와 중공업 발전을 선호했으며,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신념은 그의 저서를 통해 잘 드러난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어떻게 훌륭한 공산주의자가 될 것인가』(1939년), 『당에 관하여』(1945년), 『국제주의와 민족주의』(1952년) 등이 있다.

1958년 마오쩌둥의 주도로 시작된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심각한 경제 위기와 함께 2천만 명이 넘는 아사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마오쩌둥은 1959년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났고, 류사오치가 그 뒤를 이어 국가주석에 취임했다. 이로써 류사오치는 형식상 국가 최고 지도자가 되었지만, 마오쩌둥은 여전히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유지하며 당내 서열 1위의 실권을 행사했다. 같은 해 루산 회의에서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대약진 운동을 비판하는 의견서를 제출하자 마오쩌둥은 이를 강하게 비난하며 펑더화이를 해임했는데, 류사오치는 이 해임 결의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후 고향을 시찰하면서 대약진 운동이 초래한 참혹한 실상을 직접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2. 3. 2. 국가주석 취임과 정책

1958년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 운동이 실패하면서 경제 위기와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자(2천만 명 이상 사망 추정), 사태의 책임을 지고 마오쩌둥은 1959년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났다. 이에 따라 류사오치는 마오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여 표면상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마오쩌둥은 당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은 유지했고, 당내 서열도 마오가 1위, 류가 2위였으나, 국가 운영의 최고 책임자가 되면서 형식적으로는 마오를 넘어서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류사오치는 1958년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대약진 운동을 지지했으나, 운동의 참혹한 결과, 특히 광범위한 기근과 농촌의 피폐함을 목격하면서 점차 우려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1959년 루산 회의에서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대약진 운동을 비판하다 숙청되었을 때 류사오치는 해임 결의에 동의했지만, 이후 고향 시찰 등을 통해 현실을 파악하면서 입장을 바꾸었다. 같은 해 8월 루산 회의에서 그는 대약진 운동의 결과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며 교정 조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보다 온건한 경제 정책을 지지했다.[13]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수습하기 위해 류사오치는 덩샤오핑과 함께 경제 조정 정책을 주도했다. 이들의 정책은 마오쩌둥의 급진적인 노선보다 온건했으며, 시장경제 요소를 일부 도입하고 농업 생산력 회복과 경제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구체적으로는 시장의 역할 증대, 노동자에 대한 물질적 인센티브 강화, 투자율 하향 조정, 온건한 개발 속도 설정, 소비재 산업에 대한 자금 지원 확대 등을 통해 경제 회복을 꾀했다.[14] 이러한 정책은 당 기구와 국민들 사이에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위상을 높였다.

제3차 5개년 계획 준비 과정에서 류사오치는 과거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신중한 접근을 강조했다:[14]

"과거에 인프라 전선이 너무 길었습니다. 프로젝트가 너무 많았습니다. 요구 사항이 너무 높았고 서둘렀습니다. 설계가 잘못되었고 프로젝트가 서둘러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생산량 증가에만 주의를 기울였고 품질을 무시했습니다. 목표를 너무 높게 설정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학습 경험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1962년 7천인 대회에서는 대약진 운동으로 인한 대기근에 대해 "천재(天災)가 3할, 인재(人災)가 7할"이라고 발언하며 당 중앙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 대회에서 마오쩌둥 역시 "사회주의 경험 부족"을 언급하며 자기 비판을 하고 정무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시장주의 요소를 도입한 경제 조정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경제 회복에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실용주의적 정책은 마오쩌둥과의 이념적, 정책적 갈등을 심화시켰다. 마오쩌둥은 이를 "우익적 기회주의", "자본주의 노선"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으며, 류사오치는 "굶주린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고 있다.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응수하며 정책의 정당성을 주장했다고 전해진다.[37] 이미 당 중앙에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있던 류사오치의 영향력 확대는 마오쩌둥에게 큰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이는 훗날 문화 대혁명 시기 그가 '주자파'(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의 수괴로 지목되어 타도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 3. 3. 마오쩌둥과의 갈등

1958년 마오쩌둥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대약진운동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면서 경제 위기가 닥치고 2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사망하자, 마오쩌둥은 사태 확산을 우려하여 1959년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뒤를 이어 류사오치가 국가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올라 표면상 중국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마오쩌둥은 당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은 유지했고, 당내 서열도 마오가 1위, 류가 2위였지만, 국정 운영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면서 류사오치의 영향력은 커졌다. 류사오치는 특히 농촌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대약진운동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조정 정책을 추진하고 마오쩌둥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덩샤오핑, 화궈펑 등과 협력하여 경제 정책 수정을 모색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여전히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이로 인해 류사오치와 마오쩌둥 사이에는 잦은 마찰이 발생했다. 마오쩌둥은 류사오치를 권좌에서 밀어내기 위해 린뱌오 등을 동원하여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류사오치와 인디라 간디, 1954년


류사오치는 1961년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로 인정받았으나, 1962년 7천인 대회에서 대약진운동 실패의 원인을 두고 "천재(天災)가 3할, 인재(人災)가 7할"이라고 지적하며 당 중앙의 책임을 인정하자 마오쩌둥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2] 이 대회에서 마오쩌둥 역시 "사회주의 경험 부족"을 인정하며 자기 비판을 해야 했고, 이후 정무 일선에서 한발 물러났다. 류사오치의 실용적인 경제 개혁 노선과 대약진 운동 실패에 대한 비판은 마오쩌둥과의 이념적 갈등을 심화시켰다.[2] 류사오치는 덩샤오핑과 함께 시장 원리를 도입한 경제 조정 정책을 추진하여 피폐해진 경제 회복에 힘썼다. 이에 대해 마오쩌둥은 "우익적 기회주의 오류"라며 강하게 비판했고, 류사오치는 "굶주린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고 있다.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며 반박하기도 했다.[37] 류사오치가 당내 기반을 다지면서 마오쩌둥에게는 점차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1960년대 들어 마오쩌둥이 자신의 권력 기반을 회복하면서[15] 류사오치의 몰락은 예견된 수순이 되었다. 이는 단순한 정책 노선 차이를 넘어선 권력 투쟁의 성격을 띠었다.

북한을 방문하는 류사오치(1963년)


한편, 1964년 마오쩌둥은 미국이나 소련의 침략 위협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중국 내륙에 기초 산업과 국방 산업을 집중 육성하는 제3전선 건설 계획을 제안했다. 류사오치를 비롯한 일부 고위 관료들은 대약진운동의 실패 경험 때문에 또 다른 급진적인 산업화 정책 추진을 꺼려 처음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추가 조사와 계획 수립을 제안했다.[14] 이들은 지역 개발과 소비 증진을 통한 점진적인 발전을 선호했다.[14] 그러나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류사오치 등도 입장을 바꿔 제3전선 건설을 지지하게 되었다.[14] 이 시기 중국은 소련과의 노선 대립도 심화되어, 류사오치는 인도네시아 등 주변 비동맹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여러 차례 순방에 나서기도 했다.

1966년 6월 류사오치, 문화 대혁명 첫 해


1966년, 마오쩌둥은 문화 대혁명을 발동하여 실추된 권력을 되찾고자 했다. 표면적으로는 당과 정부 내 부패와 관료주의 문제를 해결하고 공산주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며, 류사오치 본인이 문화대혁명의 공식 시작을 알린 확대 정치국 회의를 주재하기도 했다.[17] 그러나 문화대혁명은 시작 직후부터 마오쩌둥이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17] 마오쩌둥은 학교와 대학을 폐쇄하고 젊은 홍위병들을 동원하여 구시대 유물 파괴, 교사, 당 간부, 심지어 부모에 대한 공격을 사주했다.[18] 마오쩌둥 개인 숭배는 극에 달해, 식사 전에 마오쩌둥에게 기도를 올리는 마을까지 생겨났다.[19] 마오쩌둥은 자신을 신격화하고 반대 세력으로 의심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으며, 홍위병들에게 당과 국가 기관 파괴를 지시했다.[2]

문화대혁명이 선포되자 마오쩌둥의 지시에 주저했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포함한 대부분의 고위 간부들은 즉시 직위에서 해임되고 가족과 함께 대중 앞에서 비판과 모욕을 당했다.[18] 류사오치는 덩샤오핑과 함께 '자본주의 길을 걷는 자'(주자파)의 대표 인물로 낙인찍혔다.[21] 그는 '중국 부르주아 본부의 사령관', '당 내 최대 자본주의 길을 걷는 자', '혁명의 반역자'로 매도되었으며,[22] 1966년 7월 린뱌오에 의해 당 부주석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같은 해 8월 열린 제8기 11중전회에서 마오쩌둥은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글을 통해 실권파 타도를 지시했고,[38] 비록 이름이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참석자들은 '사령부'가 류사오치를 의미함을 알았다.[39] 이 회의에서 류사오치는 정치국 상무위원직은 유지했으나 당 부주석 직에서 해임되었고 당내 서열이 2위에서 8위로 강등되었다. 10월 중앙 공작 회의에서 지명 비판을 받은 류사오치는 자기 비판을 했지만,[40] 이 자기 비판서는 오히려 추가 비판의 빌미가 되었고 회의에서 승인되지도 않았다. 연말에는 베이징 시내에 류사오치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1967년에 들어서자 류사오치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그는 '주자파 최고 지도자'로 몰려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류사오치는 1월 마오쩌둥을 만나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농사를 짓고 싶다는 뜻을 전했으나, 마오쩌둥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같은 달, 중난하이의 자택은 문혁파(조반파)에게 점거당하고 전화선이 끊겨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었다.[41] 어느 날 홍위병들이 자택에 난입해 폭행을 가하자, 류사오치는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을 손에 들고 "나는 이 헌법에 명시된 국가 주석이다. 당신들은 국가를 모독하고 있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41]

1967년 4월 1일, 중앙 문화 혁명 소조의 치번위는 공산당 이론지 『홍기』에 발표한 평론에서 류사오치를 '중국의 흐루쇼프'에 빗대어 맹비난했다. 이후 류사오치에 대한 공격은 극에 달해, 부인 왕광메이와 함께 대중 앞에서 수차례 모욕적인 조리돌림을 당했다.[41] 7월 18일에는 자택이 습격당하고 밖으로 끌려나와 2시간 넘게 폭행과 비판을 당했으며, 이후 부인과 격리되어 사실상 감금 상태에 놓였다.[41] 9월에는 부인 왕광메이가 체포되고 자녀들도 집에서 쫓겨났다.

마오쩌둥 파는 류사오치가 과거 국민당과의 투쟁 중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사실과 항일 전쟁 시기 당원 석방을 지휘했던 일(61인 반역자 집단 사건) 등을 근거로 '스파이', '배신자'라는 죄목을 날조했다. 이를 바탕으로 1968년 10월 열린 제8기 확대 12중전회에서는 류사오치를 '당 내에 숨어든 내통자, 배신자, 노동 귀족'으로 규정하고 당에서 영구 제명하며 당 안팎의 모든 직무를 박탈하는 처분이 결의되었다. 이로써 류사오치는 완전히 실각하고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다.

2. 4. 숙청과 사망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권력 회복을 노리던 마오쩌둥과 그를 따르던 홍위병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주자파(친자본주의적 인물)의 우두머리", "반혁명분자"로 몰려 비판받았고, 1966년 8월 제8기 11중전회에서 마오쩌둥은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글을 통해 실권파 타도를 지시했다.[38] 비록 직접 지목되지는 않았지만, 참석자들은 이 '사령부'가 류사오치를 의미한다고 여겼다.[39] 이 회의에서 류사오치는 당 부주석 직에서 해임되고 당 내 서열도 2위에서 8위로 낮아졌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류사오치는 자신이 타도 대상임을 인지하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 중앙 공작 회의에서 지목 비판을 받자 자기 비판서를 제출했다.[40] 마오쩌둥은 사전에 이 비판서를 보고 "잘 썼다"고 평가했지만, 이 평가는 숨겨졌고[40] 회의에서는 승인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유출되어 추가 비판의 빌미가 되었다. 1966년 말에는 베이징 시내에 류사오치를 지목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다.

1967년 들어 공개적인 비판이 거세지며 '실권파의 최고 지도자'로 낙인찍혔다. 1월, 쇠약해진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을 만나 모든 직무에서 사임하고 농사를 짓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마오쩌둥은 명확한 답을 피하며 쉬면서 헤겔 등의 책을 읽으라고 권유했다.[53] 그러나 직후 류사오치가 박해받는다는 보고를 받고도 묵살했으며, 다만 병세가 악화되자 "정치적으로 선을 긋더라도, 생활 수준을 낮춰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여 자신이 박해와 무관한 듯 보이려 했다. 같은 달 중난하이의 자택 집무실에 조반파(문혁파)가 난입했으며, 전화선이 절단되어 외부와의 연락이 끊겼다.[41] 홍위병이 자택에 난입해 폭행을 가했을 때, 류사오치는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을 들고 "나는 이 헌법에 쓰여 있는 국가 주석이다. 당신들은 지금, 국가를 모독하고 있다"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41]

4월 1일, 중앙 문화 혁명 소조의 치번위가 『홍기』에 발표하고 『인민일보』에 게재된 평론에서 류사오치는 '중국의 흐루쇼프'로 비유되며 공격이 격화되었다. 이후 부인 왕광메이와 함께 대중 앞에서 여러 차례 조리돌림을 당하는 비판 대회에 끌려 나갔다.[41] 7월 18일에는 중난하이 자택이 습격당하고, 치번위가 주최한 비판 대회에서 2시간 넘게 폭행과 비난을 받았다. 이후 부인과 격리되어 사실상 유폐 상태가 되었다. 9월에는 부인이 체포되고 자녀들도 쫓겨나 혼자 남겨졌다.

문화 대혁명 기간 중 열린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굴욕을 당하는 류사오치


과거 국민당과의 투쟁 중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사실과 항일 전쟁 시기 당원 석방 지휘(61인 반역자 집단 사건) 등이 스파이 행위라는 죄목으로 날조되었다. 이를 근거로 1968년 10월 제8기 확대 12중전회에서 류사오치는 '당 내에 숨어 있던 적의 회유자, 배신자, 노동 귀족'으로 규정되어 당에서 영구 제명되고 당 안팎의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는 처분을 받았다. (당시 12중전회는 중앙위원 및 후보위원 다수가 문화대혁명으로 참석 권리를 박탈당해 정족수 미달 위기에 처하자, 후보 10명을 위원으로 보선하여 개최되었다.) 이로써 류사오치는 완전히 실각했다. 이후 베이징에서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가 카이펑으로 강제 이송되었다.

유폐된 류사오치는 극도로 쇠약해져 옷을 갈아입거나 이동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감시 군인들은 돕지 않았다. 병세가 위독해졌을 때 당 중앙의 지시로 치료가 이루어져 목숨을 건졌는데, 이는 류사오치를 살려서 당에서 제명하고 치욕을 안겨주려는 장칭의 의도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있다[54]. 류사오치의 마지막 의료 상황에 대해서는 상반된 기록이 존재한다. 한편에서는 난방도 되지 않는 가택에서 별다른 의료 처치를 받지 못하여 당뇨병, 폐렴 등 지병이 악화되었다고 전해진다. 다른 한편으로, 당시 주치의였던 구치화 박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담 의료진이 있었고 1968년 7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폐렴이 7번 발생했으며 총 40차례의 전문가 자문이 이루어지는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치료를 받았다고 주장한다.[27][28][23]

결국 1969년 11월 12일 오전 6시 45분, 카이펑의 감옥에서 가명으로 사망했다. 사인은 당뇨병 합병증으로 기록되었다.[27][28][23] 유해는 다음 날 화장되었고,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그의 사인을 "병사"라고 발표했다. 사망 전후 열린 제9차 당대회에서는 반역자이자 적의 첩자로 다시 한번 비난받았다. 저우언라이는 당의 공식 결정을 통해 류사오치를 "제국주의자, 현대 수정주의자, 국민당 반동 세력에 봉사하는 범죄적 반역자, 적의 첩자, 겉으로는 성실한 척하는 자"라고 규정했다.[25][26]

2. 5. 사후 복권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1980년 류사오치의 명예가 회복되었고 모든 당직도 복권되었다. 생전에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의 경쟁자로 여겨졌으며, 마오쩌둥식 사회주의 혁명을 방해한 인물로 비난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류사오치를 모두 존경했던 덩샤오핑의 주도로 1981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그의 무죄가 인정되었고, 사후 복권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재평가의 결과로, 1987년 발행된 중국 런민비 지폐에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와 함께 류사오치가 4인의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포함되어 그의 초상이 실리게 되었다.

3. 사상과 저술

류사오치는 중국 공산당의 중요한 이론가이자 조직가로서 활동했다. 그의 초기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한 정통적인 소련식 공산주의 노선을 따랐으며, 이는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와 중공업 발전을 강조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여러 저술을 통해 구체화되었다.[11][12]

그러나 대약진 운동의 실패가 가져온 참혹한 현실을 목격한 후, 그의 사상에는 변화가 나타났다. 그는 7천인 대회에서 정책 실패를 일부 인정하며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경제 회복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는 덩샤오핑과 함께 추진한 경제 조정 정책으로 이어졌으나, 마오쩌둥과의 이념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37]

3. 1. 주요 저술

류사오치의 업무는 주로 당 조직 및 이론 문제에 집중되었다.[11] 그는 당 규정을 작성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칙에 따라 당의 조직 발전을 감독했다.[12] 그는 정통적인 소련식 공산주의자로서 국가 계획과 중공업 발전을 선호했으며,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신념을 저술을 통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은 다음과 같다.

  • '''『어떻게 훌륭한 공산주의자가 될 것인가』''' (1939년)
  • '''『당에 관하여』''' (1945년)
  • '''『국제주의와 민족주의』''' (1952년)

3. 2. 사상적 특징

1958년부터 마오쩌둥의 지시로 시작된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중화인민공화국 경제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1959년 루산 회의에서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대약진 운동을 비판하자 마오쩌둥은 이를 강하게 비난하며 펑더화이를 해임했지만, 류사오치는 이 해임 결의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후 고향을 시찰하며 대약진 운동으로 인한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1962년 열린 7천인 대회(당 중앙 확대 업무 회의)에서 류사오치는 중화인민공화국 대기근의 원인에 대해 "천재(天災)가 3할, 인재(人災)가 7할"이라고 발언하며 당 중앙의 정책 실패 책임을 인정했다. 이는 대약진 운동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지적한 것으로, 이 대회에서 마오쩌둥 역시 "사회주의 경험 부족"을 인정하며 자기 비판을 해야 했고, 이후 정무 일선에서 한발 물러서게 되었다.

이후 류사오치는 당 총서기 덩샤오핑과 함께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한 경제 조정 정책을 추진했다. 이들은 시장주의 요소를 일부 도입하여 대약진 운동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용주의적 접근은 마오쩌둥의 불만을 샀다. 마오쩌둥은 이들의 정책이 "교정하여 우익적인 기회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라며 강하게 비판했고, "무엇을 조급해하는가. 발밑이 무너지고 있는데. 어째서 지탱하려고 하지 않는가. 내가 죽으면 어쩔 셈인가!"라고 질책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류사오치는 "굶주린 인간끼리 서로 잡아먹고 있습니다.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라고 답하며 정책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고 그의 부인 왕광메이는 기록했다.[37] 이는 당시 류사오치가 당 중앙에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오쩌둥에게 골칫거리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 시기 중화인민공화국소련과의 이념 노선 대립이 결정적이 되었다. 류사오치는 인도네시아 등 주변 비동맹 국가들과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여러 차례 이들 국가를 방문하며 외교적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4. 가족 관계

류사오치와 부인 왕광메이, 1960년대


류사오치는 다섯 번 결혼했는데, 그중에는 허바오전(何宝珍중국어)과 왕광메이(王光美중국어)가 포함된다.[33] 그의 세 번째 부인인 셰페이(谢飞중국어)는 하이난성 원창 출신으로, 1934년 대장정에 참여한 몇 안 되는 여성 중 한 명이었다.[34]

1969년 류사오치 사망 당시 그의 부인이었던 왕광메이는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마오쩌둥에 의해 투옥되어 10년 이상 독방에서 혹독한 환경에 시달리는 고초를 겪었다.[35]

그의 아들 류윈빈(刘允斌|Liú Yǔnbīn중국어)은 저명한 물리학자였으나,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결국 1967년, 다가오는 기차 앞에서 선로에 누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류윈빈은 1978년 사후 복권되어 명예가 회복되었다.

5. 평가와 유산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정치인인 류사오치에 대한 평가는 복합적이다. 그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한 경제적 혼란 속에서 마오쩌둥을 대신하여 국가주석직을 맡아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하며 경제 회복에 힘썼다. 특히 덩샤오핑과 함께 추진한 경제 조정 정책은 당시 피폐해진 중국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는 훗날 덩샤오핑 시대 개혁개방 정책의 이론적, 실천적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유산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행보는 권력 구조 내에서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마오쩌둥과의 노선 갈등 및 권력 투쟁은 결국 문화대혁명이라는 비극적인 정치 운동 속에서 그가 숙청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자본주의 길을 걷는 당권파'의 수괴로 몰려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나,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 집권기에 공식적으로 복권되어 명예를 회복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류사오치를 문화대혁명의 대표적인 피해자이자 덩샤오핑개혁개방 노선에 영향을 미친 실용주의적 지도자로 재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경제 건설에 대한 기여와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은 긍정적으로 조명되는 반면, 마오쩌둥과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보인 모습이나 정치적 결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양한 해석과 비판이 존재한다.

5. 1. 부정적 평가

1958년부터 마오쩌둥의 지시로 실시된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중화인민공화국 대기근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자, 1959년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을 대신하여 국가주석에 취임했다. 당내 서열은 여전히 마오쩌둥이 1위였지만,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형식상 지위는 마오쩌둥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루산 회의에서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대약진 운동의 문제점을 용기 있게 비판했을 때,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이 이를 반혁명으로 몰아 펑더화이를 숙청하는 결정에 동의하는 정치적 한계를 보였다. 이는 권력 구조 속에서 그의 입지가 지닌 명확한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훗날 고향 시찰에서 대기근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62년 7천인 대회에서 류사오치는 대기근의 원인이 "천재(天災)가 3할, 인재(人災)가 7할"이라며 대약진 운동 실패의 책임을 사실상 마오쩌둥에게 돌리는 발언을 했다. 이로 인해 마오쩌둥은 마지못해 자기 비판을 하고 정무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류사오치는 당 총서기 덩샤오핑과 함께 시장주의 요소를 도입한 경제 조정 정책을 추진하여 대약진 운동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힘썼다. 그러나 이는 마오쩌둥의 심기를 건드렸다.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의 정책이 "우익적인 기회주의 오류"라며 강하게 비판했고, "내가 죽으면 어쩔 셈인가!"라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했다. 이에 류사오치는 "굶주린 인간끼리 서로 잡아먹고 있습니다.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라고 응수하며 물러서지 않았다고 그의 부인 왕광메이는 기록했다.[37] 이미 당내에 강력한 기반을 다지고 있던 류사오치의 이러한 행보는 마오쩌둥에게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문화대혁명 시기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6. 대중 문화


  • 8, 9시의 태양(Morning Sun): 2003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 2016년 2월, NHK의 해외 방송 채널에서 방영된 NHK 스페셜 "신・영상의 세기" 시리즈 중 류사오치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화면이 검게 변하고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등 중국 내에서 시청이 일시적으로 차단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류사오치 관련 내용에 대한 중국 당국의 민감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진다.[55]
  • 공산당원 류사오치 (共产党人刘少奇중국어): 2019년부터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에서 방영된 총 46부작 드라마이다. 배우 자오보(赵波중국어)가 류사오치 역을 맡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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