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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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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셀 모스는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로, 1872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에밀 뒤르켐의 영향을 받아 사회학을 연구했으며, 프랑스 고등연구실습학교에서 언어학, 인도학 등을 공부했다. 그는 사회주의에 매료되어 정치 활동에도 참여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통역관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모스는 뒤르켐의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연구 기관을 설립하고, 파리 대학교에 민족학 연구소를 설립하여 인류학 발전에 기여했다. 주요 저서로는 『선물』, 『희생의 본질과 기능에 관한 에세이』, 『마법의 일반 이론 개요』 등이 있으며, 선물 이론과 신체 기법, 마법 이론 등을 통해 인류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볼셰비키즘을 비판하며, 사회주의적 조직 형성에 교조주의 일소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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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모스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마르셀 모스
원어 이름Marcel Mauss
출생일1872년 5월 10일
출생지프랑스 로렌 지역 보주현 에피날
사망일1950년 2월 10일
사망지프랑스 파리
국적프랑스
서명서명 드 마르셀 모스.svg
학문 분야
학문 분야사회학
인류학
연구 기관고등사회과학연구원 (EHESS)
모교고등연구실천원
주요 업적증여론
영향을 준 인물에밀 뒤르켐
기타
프랑스어 발음/maʁsɛl mɔs/
주요 저서증여론

2. 생애

1872년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마르셀 모스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모스는 삼촌인 에밀 뒤르켐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기 때문에 그의 사상 또한 상당한 정도로 물려받았다. 1893년 보르도 대학교에서 철학 학위를 받고 바로 파리에 정착해 이곳에서 프레이저(J. Frager)와 타일러(E. Tylor)의 책들을 통해서 인류학에 입문했다. 1901년 고등 연구원(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에서 민족학 방법을 강조하며 ‘원시 민족들의 종교역사’를 강의하면서 주어진 자료들을 평가하고 분석해 이론화하는 민족학적 방법론을 정립했다.[7] 모스는 여러 외국어에 능통하여 프랑스 인류학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사회주의적 열정, 이국적인 사회에 대한 관심, 예술적 감성이 풍부하여 언제나 새로운 사고에 개방적이었다.

1904년에는 L’Humanité프랑스어지의 창간에 참여하고 편집을 담당했으며, 1920년부터는 Le Populaire프랑스어지에 정치적 기고문을 싣기도 했다. 1925년 민족학 연구소(Institut d’Ethnologie)를 설립하고,[5] 1931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사회학 분과장으로 선출되었다. 파리 대학교에 민족학 연구소를 설립해 인류학을 독자적인 학문으로 이끄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는 민족학적 방법을 엄밀하게 발전시키고, 표상과 실천, 관념과 행위 등의 개념을 구분하고 이를 구체적인 민족지학적 자료들과 연계해서 설명하고자 했다.

모스는 에밀 뒤르켐의 조카였으며, 뒤르켐은 모스의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9] 뒤르켐은 모스에게 학업과 개인 생활에 대한 지도를 제공했으며, 모스는 뒤르켐의 연구에 협력하여 『자살』의 통계표 편집을 돕기도 했다.[9][17] 모스는 1895년부터 1902년까지 『연감 사회학(L’Année Sociologique)』의 편집과 발간을 도왔으며, 뒤르켐은 모스의 역할을 학술지의 형성과 이론적 변혁에 있어 "핵심"으로 여겼다.[8] [22]

2. 1. 가족 및 교육

마르셀 모스는 에피날(Épinal), (Vosges)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3] 아버지는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자수 가게 주인이었다. 남동생과는 달리 모스는 가업을 잇지 않고 보주주의 사회주의 및 협동조합 운동에 참여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모스 가족과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 가족은 가까워졌고, 이때부터 모스는 자신의 교육에 대해 걱정하며 배우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종교 교육을 받고 바르미츠바를 했지만, 18세가 되면서 종교 실천을 중단했다.[3]

모스는 외삼촌인 에밀 뒤르켐이 강의하던 보르도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890년대에 언어학, 인도학, 산스크리트어, 히브리어, 종교사와 '미개인'에 대한 연구를 프랑스 고등연구실습학교(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프랑스어)에서 시작했다.[4] 1893년 ''집합교수자격시험''(agrégation)에 합격했으며, 해양생물학자이자 모리스 블로흐(Maurice Bloch)의 어머니인 클로드트(née 라파엘) 블로흐의 사촌이기도 하다. 대학 졸업 후 일반적인 리세(lycée) 교사의 길을 걷는 대신, 파리로 이주하여 비교종교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했다.

2. 2. 학문적 경력

1893년 보르도 대학교에서 철학 학위를 받고 파리에 정착해 프레이저(J. Frager)와 타일러(E. Tylor)의 책들을 통해서 인류학에 입문했다. 1901년 고등 연구원(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에서 민족학 방법을 강조하며 ‘원시 민족들의 종교역사’를 강의하면서 주어진 자료들을 평가하고 분석해 이론화하는 민족학적 방법론을 정립했다.[7] 모스는 여러 외국어에 능통하여 프랑스 인류학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사회주의적 열정, 이국적인 사회에 대한 관심, 예술적 감성이 풍부하여 언제나 새로운 사고에 개방적이었다.

1896년 첫 출판은 사회학 문헌에 여러 획기적인 업적을 남길 풍부한 경력의 시작이었다. L'Année sociologique프랑스어 그룹의 많은 구성원들처럼 모스는 사회주의, 특히 장 조레스가 주창한 사회주의에 매료되었다. 그는 특히 드라이푸스 사건과 관련된 반유대주의적 정치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세기말 무렵에는 조르주 소렐과 공동으로 Le Populaire프랑스어, L'Humanité프랑스어, Le Mouvement socialiste프랑스어와 같은 좌익 신문의 편집에 참여했다.

1901년부터 민족지학에 더욱 의존하기 시작했고, 그의 연구는 형식 인류학과 관련된 특징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1925년 민족학 연구소(Institut d’Ethnologie)를 설립하고,[5] 1931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사회학 분과장으로 선출되었다. 파리 대학교에 민족학 연구소를 설립해 인류학을 독자적인 학문으로 이끄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는 민족학적 방법을 엄밀하게 발전시키고, 표상과 실천, 관념과 행위 등의 개념을 구분하고 이를 구체적인 민족지학적 자료들과 연계해서 설명하고자 했다.

뒤르켐의 추종자였던 모스는 Institut Français de Sociologie프랑스어 (1924)와 Institut d'Ethnologie프랑스어 (1926)와 같은 연구 기관을 설립하여 뒤르켐의 유산을 보존했다. 이 기관들은 젊은 학자들에 의한 현지 조사 기반 인류학의 발전을 자극했다. 그가 영향을 준 학생들로는 조지 드베뢰, 잔느 퀴지니에, 알프레드 메트로, 마르셀 그리아울, 조르주 뒤메질, 드니즈 폴름, 미셸 르리, 제르메느 디테를렌, 루이 뒤몽, 앙드레-조르주 오드리쿠르, 자크 수스텔, 제르메느 띠용 등이 있다.[5]

2. 3.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모스는 1914년부터 1919년까지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군에서 통역관으로 복무했다.[5] 군 복무는 모스에게 학문 생활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주었지만, 많은 친구와 동료들이 전쟁에서 사망하고 그의 삼촌 뒤르켐이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사망하면서 전쟁의 파괴와 폭력에 직면하기도 했다. 모스는 "정치에 관하여"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지만 미완성으로 남았고, 1920년대 초에는 볼셰비키의 강압적인 폭력 사용과 시장경제의 파괴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정치에 대한 그의 열정을 강조했다.[6]

3. 이론적 관점

마르셀 모스는 보르도에서 삼촌 에밀 뒤르켐의 지도 아래 연구하면서, 『연감 사회학』에 발표된 『원시 분류』를 함께 작업했다. 이들은 이 연구에서 다양한 문화가 취하는 인간 사고의 여러 경로, 특히 공간과 시간이 사회적 패턴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프랑스식 지식사회학을 만들고자 했다.[26] 모스는 뒤르켐 학파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했으며, 삼촌보다 정치에 더 관심을 가져 집단주의자, 프랑스 노동자당,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일원이었다.

모스는 포틀래치, 물물교환 등의 교환 체계 분석을 통해 종교, 법, 도덕, 경제 등의 영역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전체적 사회적 사실”의 개념을 제시한 선물론(贈与論)을 저술하여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신체 기법”론은 오늘날에도 사회학적 신체론의 기본 문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마나 등의 개념을 통해 주술에 대해서도 논했다.

3. 1. 에밀 뒤르켐과의 관계

모스는 에밀 뒤르켐의 외조카로서, 보르도에서 뒤르켐의 지도 아래 철학을 공부했다. 1890년대에 모스는 언어학, 인도학, 산스크리트어, 히브리어 및 프랑스 고등연구실습학교에서 '종교사와 미개인'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4]

뒤르켐은 모스에게 학업과 개인 생활에 대한 지도를 제공하며, 편지를 통해 끊임없이 교류했다. 1893년부터 1894년까지 모스가 집합교수자격시험 준비를 시작했을 때, 뒤르켐은 시험 준비를 도왔다.[9] 뒤르켐은 모스에게 엄격하고 책임감 있는 스승이었으며, 학업 및 기타 교류에 대한 시기적절한 업데이트를 자주 요구했다. 그는 모스를 교육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14]

뒤르켐과 모스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였다. 뒤르켐은 『자살』 집필 시 모스에게 독일군, 영국과 웨일즈, 스페인의 자살 사례에 대한 기사에 주석을 달도록 요청했고, 모스는 『자살』의 통계 표 편집을 도왔다.[9][16][17]

모스는 1895년부터 1902년까지 『연감 사회학』의 편집과 발간을 도왔다.[15] 뒤르켐은 모스의 역할을 학술지의 형성과 이론적 변혁에 있어 "핵심"으로 여겼다.[8] [22] 모스는 종교 사회학 부분에서 일하도록 배정되었는데, 뒤르켐은 종교를 사회 사실의 기본 원리로 만들고자 했다.[8][22][23] 뒤르켐은 모스의 시간 엄수와 복잡성에 대해 질책하기도 했다.[25][23]

모스는 뒤르켐과 함께 『원시 분류』를 작업하며, 다양한 문화가 취하는 인간 사고의 여러 경로, 특히 공간과 시간이 사회적 패턴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지식사회학을 만들고자 했다.

모스는 자신을 뒤르켐주의자라고 불렀지만, 뒤르켐 학파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했다. 그는 삼촌보다 정치에 더 관심을 가졌고, 집단주의자, 프랑스 노동자당,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일원이었다.[26]

3. 2. 선물 이론

모스는 뒤르켐과의 초기 연구보다 더 유연하고 경험적 연구 적용에 적합하며 더욱 풍성한 분석틀을 제시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27] 그의 저서 『선물』에서 모스는 선물은 결코 진정으로 무료가 아니며, 오히려 인류 역사는 선물이 상호 교환을 가져온 예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했다. 선물 인류학에 대한 그의 탐구를 이끈 유명한 질문은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되돌려주게 만드는 힘은 주어진 물건에 어떤 힘이 있는가?"였다.[28] 그 답은 간단하다. 선물은 "전체적 수여"(전체적 사회 사실(fait social total) 참조)이며, "정신적 메커니즘"으로 가득 차 있어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의 명예에 관여한다. 여기서 "전체적 수여" 또는 "전체적 사회 사실"(fait social total)이라는 용어는 그의 제자 모리스 르낭드르가 뒤르켐의 '사회 사실' 이후에 만들었다. 이러한 거래는 모스에 따르면 거의 "마법적인" 방식으로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구분을 초월한다. 주는 사람은 단순히 물건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일부를 주는 것이기도 한데, 그 물건은 주는 사람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건은 그것을 교환하는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1990:31).

주는 사람과 선물 사이의 이러한 유대 때문에, 주는 행위는 받는 사람에게 상호 교환할 의무를 지닌 사회적 유대를 만든다. 상호 교환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예와 지위를 잃는 것을 의미하지만, 영적인 의미는 더 심각할 수 있다. 폴리네시아에서는 상호 교환하지 않으면 권위와 부의 영적 원천인 ''마나''를 잃게 된다. 골드만-이다의 요약을 인용하자면, "모스는 세 가지 의무를 구분했다. 즉,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첫 번째 단계인 주는 것, 받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사회적 유대를 거부하는 것이므로 받는 것, 그리고 자신의 관대함, 명예, 부를 보여주기 위해 상호 교환하는 것이다"(2018:341). 모스는 사회가 이데올로기에 눈이 멀어 경제를 고려할 때 수여 체계가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설명한다. 제도는 개인과 사회의 통합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자본주의는 개인의 욕구에 대한 지속 불가능한 영향에 의존한다. 모스는 돈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사회학적 방법에 도전하는 법적, 경제적, 종교적, 미적 사실인 전체적 사회 사실(faits sociaux totaux)에 초점을 맞출 필요성을 설명한다.[6]

선물 교환에 대한 모스의 개념화에서 중요한 개념은 그레고리(1982, 1997)가 "양도 불가능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상품 경제에서는 사유 재산 개념을 통해 물건과 사람 사이에 강력한 구분이 있다. 물건은 판매되며, 이는 소유권이 새로운 소유자에게 완전히 이전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건은 원래 소유자로부터 "소외"되었다. 그러나 선물 경제에서는 주어진 물건은 주는 사람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그것은 "판매되고 양도되기보다는 빌려주는 것"이다. 주는 사람의 정체성이 주어진 물건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선물에 받는 사람에게 상호 교환하도록 강요하는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선물은 양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반환되어야 한다. 주는 행위는 상환해야 할 선물-빚을 만든다. 이 때문에 선물의 예상되는 반환 개념은 두 개인 사이에 시간적 관계를 만든다. 다시 말해, 선물을 주는 것을 통해, 미래의 교환 시점까지 공간과 시간을 통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사회적 유대가 발전한다. 따라서 선물 교환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상호 의존성으로 이어진다. 모스에 따르면, 반환되지 않는 "무료" 선물은 사회적 유대를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모순이다. 사회적 응집력을 연대 개념을 통해 이해하려는 뒤르켐의 탐구를 따르면서, 모스의 주장은 선물 교환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유대를 통해 연대가 달성된다는 것이다. 모스는 선물 교환이 다른 사람들을 "의무에 묶어두기" 위해 사람들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론적으로는 그러한 선물은 자발적이지만, 실제로는 의무에 따라 주어지고 상환되기 때문"이다.[29]

3. 3. 마법 이론

모스와 위베르는 1902년에 『마법의 일반 이론(A General Theory of Magic)』(PDF는 외부 링크 참조)이라는 책을 썼다. 그들은 '원시' 사회에서의 마법과 그것이 우리의 생각과 사회적 행동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연구했다. 그들은 사회적 사실은 주관적이며 따라서 마법으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사회는 이를 받아들이는 데 개방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모스와 위베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법에는 관리자, 행위, 표상이 있다. 우리는 마법 행위를 수행하는 사람을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마법사'라고 부른다. '마법적 표상'은 마법적 행위에 상응하는 사상과 신념이다. 마법의 다른 요소들을 정의한 행위에 관해서는 우리는 그것을 '마법적 의례'라고 부를 것이다. 이 단계에서 이러한 활동과 혼동될 수 있는 다른 사회적 관행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31]
그들은 계속해서 사회적 사건만 마법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행위는 마법이 아니며, 전체 공동체가 일련의 행위의 효능을 믿지 않으면 사회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마법적일 수 없다.

3. 4. 신체 기법

모스는 앙리 위베르(Henri Hubert)와 1899년에 함께 쓴 책 『희생과 그 기능(Sacrifice and its Function)』에서 희생 제사가 신성화와 탈신성화 과정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모스와 위베르는 몸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속성, 태도, 습관에 대한 훈련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신체 기술은 생물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이므로, 신체 분석을 수행할 때 이러한 요소들을 동시에 파악해야 한다. 그들은 인격을 사고의 범주, 즉 법과 도덕의 특정한 구현의 관절로 정의했다. 모스와 위베르는 인격이 특정한 신체 기술과 속성의 행동과 행사를 통해 수행되는 인물(역할의 집합)에 의해 구성된다고 믿었다.[30]

모스의 “신체 기법(身体技法)”론은 오늘날에도 사회학적 신체론(身体論)의 기본 문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4.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

모스는 장 조레스의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자였지만,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폭력혁명을 부정하고, 국제주의계급투쟁 이론을 비판하며, 사회주의적 조직 형성에는 교조주의의 일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36]

모스는 논문 「볼셰비키즘의 사회학적 평가」(1924년)에서 러시아 혁명에 대해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논했다. 모스에 따르면, 러시아 혁명은 전쟁으로 인한 황폐와 체제 붕괴라는 최악의 조건에서 발생한 의도치 않은 것이었으며, 혁명이 탈환한 것은 붕괴된 사회였고, 탈환 또한 군대와 농민의 봉기로 이루어졌으며 질서가 없었다. 사회주의적 체제가 확립되려면 그 체제가 국민에 의해 바람직하게 여겨져야 하며, 탈환 또한 자각적이어야 하고, 대중에 의해 명확한 형태로 조직화되어야 한다. 소수에 의해 강요된 체제는 원래 바람직하게 여겨졌던 체제와 같은 가치를 가지지 않으며, 노동자나 병사가 만든 전제 체제가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전제 체제보다 더 사회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혁명의 잘못으로는, 혁명 정부의 대외채무 이행 거부와 외국인 재산 몰수가 있는데, 그 결과 경제봉쇄와 국제적 배척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국제공법이나 국제사법을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피해야 하며, 완전한 재산 몰수는 세계 동시 혁명의 경우에만 생각할 수 있으므로, 재산 몰수를 국경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또한, 볼셰비키즘에 의한 농촌 혁명은 농민들이 땅을 나누어 갖도록 한 것에 불과한 개인주의적 정책이었으며, 나중에 실시된 국가 관리주의적 농업 정책은 군대적인 성격을 가진 엄격한 징발과 징수였고, 농민들은 정책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농산물 감소와 비축의 산일로 러시아 기근이 발생했다.

소비에트는 직업 집단을 폭력적으로 유린하고, 공포에 떨게 하고, 파괴했기 때문에 생산의 집합적 조직화를 달성하지 못했다. 또한, 주택이나 식료품 등의 소비에 관한 공산주의는 개인주의로의 퇴행, 또는 경제의 고풍스러운 형태의 승리를 가져올 뿐이었다. 시장의 파괴는 더욱 어리석은 일이었다. 가격의 자유로운 수요와 공급, 누구나 원하는 것을 구입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구입을 강요받지 않는 시장 시스템, 즉 시장의 자유는 경제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며, 시장의 조직화야말로 사회주의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사회주의에서는 미래 사회는 돈 없이 해낼 수 있다고 예견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락된, 명확성에 결여된 예견이었다. 러시아 공산주의의 실험은 돈으로 가치를 나타내는 신용 거래만이 신뢰되고 있었고, 금본위 화폐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을 증명했다. 경제는 순수한 합리성의 영역이 아니며, 공산주의 엘리트가 주술과 강제로 대중에게 강요하는 지성에 의해 세계가 갑자기 질서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공업과 상업의 자유화도 근대 경제에 불가결하지만, 소비에트의 국가 통제주의, 관료주의, 공업의 전제적 관리, 생산의 법제화 등의 「군사형 경제」는 현대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직업 집단이나 협동조합 등의 중간 집단을 존중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는 중요해지지만, 소비에트는 경제적, 윤리적 가치를 지닌 직업 집단을 파괴함으로써 실패했다. 공산주의가 자유로운 협동과 자발적인 제도를 모두 공격한 것은 잘못이었다. 결국 공산주의 러시아에서는 소유 형태를 다른 소유 형태에 덧붙이고, 국민의 권리를 개인적 소유의 기반에 두고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혁명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모든 소유 형태가 폐지된다고 하면서 단 하나의 소유 형태가 대체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며, 다른 소유 형태에도 권리를 부여하고 직업 집단이나 지역 집단이나 국민의 권리도 보장되어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폭력신조로 삼았다. 제3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은 혁명을 실현하고, 독재적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법을 적용하는 방법으로 폭력을 권장하고, 더 나아가 목표로 삼았다. 공산주의는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하고 폭력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볼셰비키에게 있어서 폭력의 행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이 무류임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그들은 폭력과 테러가 있는 것에만 공산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통치 방법은 공산주의라기보다는 러시아, 비잔틴, 고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볼셰비키의 폭력은 러시아 사회의 부패물을 제거하기도 했지만, 사회 기구의 주요 부분을 멸하고, 파괴된 잔해에 막대한 관념을 짓눌렀다. 볼셰비키에 의한 국민 전체에 대한 폭력이야말로 소비에트를 파멸로 이끌었다. 볼셰비키의 파벌주의는 자신들로부터 보아 온건파 사회주의자를 박해하고 학살했다. 본래 자신들의 협력자였던 자들을 스스로 포기했다. 볼셰비키는 노동 규율을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에게 강요했지만, 절대 복종해야 하는 명령과 그것을 실행시키기 위한 폭력에 의해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 거기에는 의욕의 상실과 불성실한 태도가 나타났다. 볼셰비키의 폭력은 국민을 위축시키고, 국가의 생산력과 창조력을 위축시켰다. 폭력은 노동과 적대하고 희망을 파괴하며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신뢰를 파괴한다. 러시아의 테러는 사회에서 개인과 개인을 잇는 유대를 가져오지도 않고,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자신만의 껍질에 갇히고 서로를 피하게 되었다. 사회주의에서는 노동자가 보통선거라는 무기를 손에 넣으면 권력을 탈취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고, 볼셰비키도 자신들이 정치 권력이나 법을 제정하면 새로운 사회가 건설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치 권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노동자가 제도를 이해하고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적 유물론은 사회적 사건의 일정한 계열에만 특권적인 중요성을 두지만, 이것은 궤변이며, 정치적 사건, 윤리적 사건, 경제적 사건 중 어느 것이 지배적인 사회는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고, 정치도 도덕도 경제도 사회적 기법의 요소이며, 모두 공생하는 기법의 요소이다.

5. 유산 및 영향

모스는 뒤르켐과의 초기 연구보다 더 유연하고 경험적 연구 적용에 적합하며 더욱 풍성한 분석틀을 제시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연구는 교환을 상징 체계, 신체 기법 및 인격의 범주로 본 주요 인류학적 연구와 사회과학 방법론의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27] 그의 저서 『선물』(The Gift)에서 모스는 선물은 결코 진정으로 무료가 아니며, 인류 역사는 선물이 상호 교환을 가져온 예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했다. 선물 인류학에 대한 그의 탐구를 이끈 유명한 질문은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되돌려주게 만드는 힘은 주어진 물건에 어떤 힘이 있는가?"였다.[28] 그 답은 간단하다. 선물은 "전체적 수여"(전체적 사회 사실(fait social total) 참조)이며, "정신적 메커니즘"으로 가득 차 있어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의 명예에 관여한다. "전체적 수여" 또는 "전체적 사회 사실"(fait social total)이라는 용어는 그의 제자 모리스 르낭드르가 뒤르켐의 '사회 사실' 이후에 만들었다. 이러한 거래는 모스에 따르면 거의 "마법적인" 방식으로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구분을 초월한다. 주는 사람은 단순히 물건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일부를 주는 것이기도 한데, 그 물건은 주는 사람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건은 그것을 교환하는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1990:31).

주는 사람과 선물 사이의 이러한 유대 때문에, 주는 행위는 받는 사람에게 상호 교환할 의무를 지닌 사회적 유대를 만든다. 상호 교환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예와 지위를 잃는 것을 의미하지만, 영적인 의미는 더 심각할 수 있다. 폴리네시아에서는 상호 교환하지 않으면 권위와 부의 영적 원천인 ''마나''를 잃게 된다. 골드만-이다의 요약을 인용하자면, "모스는 세 가지 의무를 구분했다. 즉,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첫 번째 단계인 주는 것, 받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사회적 유대를 거부하는 것이므로 받는 것, 그리고 자신의 관대함, 명예, 부를 보여주기 위해 상호 교환하는 것이다"(2018:341). 모스는 사회가 이데올로기에 눈이 멀어 경제를 고려할 때 수여 체계가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설명한다. 제도는 개인과 사회의 통합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자본주의는 개인의 욕구에 대한 지속 불가능한 영향에 의존한다. 모스는 돈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사회학적 방법에 도전하는 법적, 경제적, 종교적, 미적 사실인 전체적 사회 사실(faits sociaux totaux)에 초점을 맞출 필요성을 설명한다.[6]

선물 교환에 대한 모스의 개념화에서 중요한 개념은 그레고리(1982, 1997)가 "양도 불가능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상품 경제에서는 사유 재산 개념을 통해 물건과 사람 사이에 강력한 구분이 있다. 물건은 판매되며, 이는 소유권이 새로운 소유자에게 완전히 이전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건은 원래 소유자로부터 "소외"되었다. 그러나 선물 경제에서는 주어진 물건은 주는 사람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그것은 "판매되고 양도되기보다는 빌려주는 것"이다. 주는 사람의 정체성이 주어진 물건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선물에 받는 사람에게 상호 교환하도록 강요하는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선물은 양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반환되어야 한다. 주는 행위는 상환해야 할 선물-빚을 만든다. 이 때문에 선물의 예상되는 반환 개념은 두 개인 사이에 시간적 관계를 만든다. 다시 말해, 선물을 주는 것을 통해, 미래의 교환 시점까지 공간과 시간을 통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사회적 유대가 발전한다. 따라서 선물 교환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상호 의존성으로 이어진다. 모스에 따르면, 반환되지 않는 "무료" 선물은 사회적 유대를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모순이다. 사회적 응집력을 연대 개념을 통해 이해하려는 뒤르켐의 탐구를 따르면서, 모스의 주장은 선물 교환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유대를 통해 연대가 달성된다는 것이다. 모스는 선물 교환이 다른 사람들을 "의무에 묶어두기" 위해 사람들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론적으로는 그러한 선물은 자발적이지만, 실제로는 의무에 따라 주어지고 상환되기 때문"이다.[29]

마르셀 모스는 그의 대표작인 『선물』(선물)을 비롯한 여러 저서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가장 뛰어난 업적들은 에밀 뒤르켐과 함께한 『원시 분류』, 앙리 위베르와 함께한 『마술의 일반 이론 개요』와 『희생의 본질과 기능에 관한 에세이』, 폴 포콩네와 함께한 『사회학』 등 『사회학 연보』의 구성원들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모스는 프랑스 인류학과 사회과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른 사회학자들처럼 많은 제자를 두지는 않았지만, 1세대 프랑스 인류학 학생들에게 민족지 방법론을 가르쳤다. 모스의 사상은 영국 문화권의 후기구조주의적 관점을 가진 인류학, 문화 연구, 문화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맥락화와 민족지적 접근 방식을 결합함으로써 후기구조주의 및 후푸코주의 지식인들에게 변화를 가져왔다.

모스는 에밀 뒤르켐의 사회학과 현대 프랑스 사회학자들 사이의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했다. 이러한 사회학자들에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피에르 부르디외, 마르셀 그라네, 루이 뒤몽 등이 있다. 『선물』에 대한 에세이는 인류학적 상호부조 연구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포틀래치 분석은 조르주 바타이유의 『저주받은 몫』에 영감을 주었고, 이후 시추아시오니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최초의 시추아시오니스트 저널의 이름은 『포틀래치』였다). 이 용어는 선물 경제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에 관심 있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어 왔지만, 후자의 용례는 때때로 모스의 원래 개념과 다르다. 루이스 하이드의 "상상력과 재산의 에로틱한 삶"에서 모스에 대한 혁신적인 비판을 참조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사회과학 내 반실용주의 운동과 데이비드 그레이버에게 영향을 미쳤다.[32]

6. 주요 저서

마르셀 모스, 『사회학과 인류학』(Sociologie et anthropologie), 1936년, 파리: PUF 재수록.Sociologie et anthropologie (선집), 1950년『사회학과 인류학 I・II』 유지 겐・이토 마사시・야마구치 도시오 역, 고분도, 1973년'Manuel dethnographie'', 1967년『민족지학 교본』, 2009년 (N. J. 앨런 번역, 버건 북스)Essai sur les variations saisonnières des sociétés Eskimo, 1979년『에스키모 사회 그 계절적 변이에 관한 사회형태학적 연구』 미야모토 타쿠야 역, 미라이샤, 1981년 (신장판 2010년)


참조

[1] 백과사전 anthropology and ethnology https://books.google[...] Routledge 1998
[2] 논문 ‚La filiation est directe‘ – L’influence de Marcel Mauss sur l’œuvre de Claude Lévi-Strauss http://trivium.revue[...] 2014
[3] 서적 Marcel Mauss: A Biography https://books.google[...] Arthème Fayard 1994
[4] 서적 Social Thought: From Enlightenment to the Present
[5] 서적 Fifty Key Sociologists: The Formative Theorists
[6] 서적 Marcel Mauss: In Pursuit of the Whole Anthropology, Goldsmiths University of London 2007
[7] 서적 Dictionary of Cultural Theorists Chris
[8] 서적 Lettres à Marcel Mauss PUF 1998
[9] 서적 Marcel Mauss: a biography Princeton Univ. Press 2006
[10] 웹사이트 David Emile Durkheim in the Paris, France, Births, Marriages, and Deaths, 1555-1929 https://www.ancestry[...] Ancestry.com Operations, Inc 2021
[11] 서적 Lettre Au Directeur 1907
[12] 서적 Letter from Émile Durkheim to Marcel Maus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893-12-10
[13] 서적 Letter from Émile Durkheim to Marcel Maus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894-06-18
[14] 서적 Letter from Émile Durkheim to Marcel Mauss Princeton Univ. Press 1899
[15] 학술지 L'œuvre de Mauss par lui-même https://www.jstor.or[...] 1979
[16] 서적 Letter from Émile Durkheim to Marcel Maus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896
[17] 서적 Letter from Émile Durkheim to Marcel Maus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896
[18] 서적 Letter from Émile Durkheim to Marcel Maus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894
[19] 서적 Letter from Émile Durkheim to Marcel Maus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894-05-15
[20] 서적 Letter from Émile Durkheim to Marcel Maus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896
[21] 서적 Emile Durkheim: his life and work ; a historical and critical study Stanford Univ. Pr 1990
[22] 서적 Letter from Émile Durkheim to Marcel Maus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897-06
[23] 서적 Letter from Émile Durkheim to Marcel Maus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897-06
[24] 서적 Letter from Émile Durkheim to Marcel Maus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897-05
[25] 서적 Letter from Émile Durkheim to Marcel Maus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897-06-19
[26] 서적 Marcel Mauss: A Biography Arthème Fayard 1994
[27] 서적 Dictionary of Cultural Theorists
[28] 서적 The Gift: The Form and Reason for Exchanges in Archaic Societies https://libcom.org/f[...] Routledge
[29] 웹사이트 D. Walczak. 2015. The process of exchange, solidarity and sustainable development in building a community of responsibility. Mediterranean Journal of Social Sciences, 6 (1S1), p. 506. http://mcser-org.erv[...] 2015-02-08
[30] 서적 Dictionary of Cultural Theorists
[31] 서적 Social Thought from the Enlightenment to the Present
[32] 서적 Toward an Anthropological Theory of Value Palgrave Macmillan
[33] 학술지 Marcel Mauss's "The Gift" Revisited https://www.jstor.or[...] 1970
[34] 서적 For-Giving: A Feminist Criticism of ExchangeP Plain View Press (first edition); Anomaly Press (4th printing, 2002)
[35] 서적 The Gift in the Heart of Language: The Maternal Source of Meaning Mimesis International
[36] 논문 マルセル・モースの社会主義 : 共同社会をめざす市民の「力」 https://www.bgu.ac.j[...] 東京 : 文京学院大学総合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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