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인 바이에른 여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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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 인 바이에른 여공작은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와 바이에른 공주 루도비카의 딸로,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비였다. 1859년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태자 프란체스코 2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으나, 주세페 가리발디의 침공으로 남편과 함께 가에타 요새에서 저항했다. 요새 함락 후 망명 생활을 하며 왕정 복고를 시도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에서 활동했다. 1925년 뮌헨에서 사망했으며, 생전에 '전사 여왕'으로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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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인 바이에른 여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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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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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양시칠리아의 왕비 |
재위 기간 | 1859년 5월 22일 – 1861년 3월 20일 |
출생일 | 1841년 10월 4일 |
출생지 | 포센호펜 성, 포센호펜, 바이에른 왕국 |
사망일 | 1925년 1월 19일 |
사망지 | 뮌헨, 바이에른 자유주, 바이마르 공화국 |
매장지 | 바실리카 디 산타 키아라 |
결혼 및 자녀 | |
배우자 | 프란체스코 2세 (1859년 결혼, 1894년 사망) |
자녀 |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피아 공주 마틸데 마리 소피 앙리에트 엘리자베트 루이즈 드 라베이세 (사생아) |
가문 | |
왕가 | 비텔스바흐 가문 |
아버지 |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 |
어머니 | 바이에른 공주 루도비카 |
2. 생애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와 바이에른 공주 루도비카의 딸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의 황후 엘리자베트가 그녀의 언니이다.
1859년 2월 3일,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위 계승자였던 프란체스코 2세와 결혼하였고, 같은 해 시아버지 페르디난도 2세가 서거하면서 양시칠리아의 마지막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왕비가 된 시기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거세지던 격동기였다.
1860년 9월,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군대가 수도 나폴리를 점령하자 국왕 부부는 가에타 요새로 피신해야 했다. 이듬해 초까지 이어진 가에타 공방전에서 마리아 소피아는 직접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부상자를 돌보는 등 용감하게 저항하여 '싸우는 왕비'라는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1861년 요새가 함락되면서 왕국은 멸망했고, 부부는 로마로 망명하여 왕국 부활을 꾀했다. 1870년 로마마저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자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1894년 남편 프란체스코 2세가 사망한 뒤에도 마리아 소피아는 파리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양시칠리아 왕정 복고를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1900년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1세 암살 사건 배후라는 소문에 휘말리기도 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리아 소피아는 1925년 뮌헨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마리 조피는 1841년 10월 4일, 바이에른 왕국 푀킹에 위치한 포센호펜 성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독일어 이름은 '''마리 조피 아말리에 인 바이에른'''(Marie Sophie Amalie in Bayern|마리 조피 아말리에 인 바이에른de)이다. 아버지는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이고 어머니는 바이에른 공주 루도비카로, 비텔스바흐 가문의 방계인 바이에른 공작 가문 출신이다. 마리 조피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10명의 자녀 중 여섯째였으며, 그중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8명의 자녀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언니로는 헬레네와 훗날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가 되는 엘리자베트가 있다. 여동생 중에는 마틸데가 있는데, 그녀는 나중에 양시칠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 프란체스코 2세의 이복동생인 트라니 백작 루이지와 결혼했다.
마리 조피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름에는 포센호펜 성에서 지냈고, 겨울에는 뮌헨에 있는 헤르초크-막스-팔레에서 생활했다.
1857년 겨울, 16세가 된 마리 조피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프란체스코 2세와 약혼했다. 이 결혼은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당시 양시칠리아 국왕 페르디난도 2세는 강력한 절대주의 국가인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마리 조피의 형부)와의 동맹 강화를 원했으며, 왕국은 이미 혁명 세력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혼 준비 과정에서 마리 조피는 아직 초경을 시작하지 않아 월경을 유도하기 위한 치료를 받기도 했다. 또한 미래의 왕비로서 이탈리아어를 배워야 했다.
2. 2. 양시칠리아 왕비 시절
1859년 2월 3일, 마리아 소피아는 당시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위 계승자였던 칼라브리아 공작 프란체스코와 정략결혼을 했다. 이 결혼은 그녀의 언니인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를 통해 오스트리아 제국과 양시칠리아 왕국 사이의 정치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 결혼 당시 마리아 소피아는 아직 초경도 치르지 않은 어린 나이였다. 결혼 전 빈에서 언니 엘리자베트를 만난 뒤, 오스트리아 제국의 항구 도시 트리에스테에서 양시칠리아 왕국이 보낸 요트에 오르며 작별했다.같은 해 1859년, 시아버지인 페르디난도 2세가 사망하자 남편 프란체스코가 프란체스코 2세로 즉위하였고, 마리아 소피아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왕비가 된 시기는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 세력과 피에몬테 군대에 의해 왕국이 곧 멸망할 위기에 처한 때였다.
1860년 9월, 주세페 가리발디의 군대가 수도 나폴리로 진격해오자 프란체스코 2세는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카푸아에서 저항을 조직하려 했으나, 볼투르노 전투에서 패배하여 카푸아마저 가리발디 군에게 함락되자, 국왕 부부는 나폴리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해안 요새인 가에타로 피신했다.

1860년 말부터 1861년 초까지 이어진 가에타 공방전 동안,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이끄는 군대는 요새를 포위하고 포격을 가했다.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마리아 소피아는 직접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부상자들을 돌보며 자신의 음식까지 나누어 주는 등 용감하게 저항 활동에 참여했다. 그녀는 심지어 요새 성벽 위에서 포격을 가하는 적군을 향해 대포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라고 도발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 덕분에 마리아 소피아는 강인한 "전사 여왕"이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이 공방전은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저항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마리아 소피아의 영웅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1861년 2월 13일, 가에타 요새는 결국 함락되었다. 이로써 양시칠리아 왕국은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프란체스코 2세와 마리아 소피아는 왕위를 잃고 로마로 망명하게 되었다.
2. 3. 망명 생활
가에타 공방전 이후 1861년 2월 13일 요새가 함락되면서 양시칠리아 왕국은 소멸되었고, 프란체스코 2세와 마리아 소피는 로마로 망명했다. 로마에서 프란체스코 2세는 망명 정부를 세웠고, 이는 몇 년간 유럽 대부분 국가로부터 양시칠리아 왕국의 합법적인 정부로 외교적 인정을 받았다.망명 생활 중 마리아 소피아는 개인적인 어려움도 겪었다. 남편 프란체스코 2세의 포경증으로 인해 결혼 생활은 오랫동안 원만하지 못했다. 로마 망명 중 그녀는 사생아를 임신했다.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 건강 문제를 이유로 포센호펜의 부모님 댁을 방문했고, 가족 회의를 거쳐 울술린회 수녀원에 들어가 1862년 11월 24일 딸을 낳았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교황 경비대의 벨기에 장교인 아르망 드 라바이스(Armand de Lavaÿsse프랑스어) 백작으로 확인되었다. '데이지'라는 애칭으로 불린 이 딸은 즉시 드 지네스트 백작 부부에게 입양되어 Château de Garrevaques|샤토 드 가르바크프랑스어에서 자랐으며, 마리아 소피아는 딸이 1886년 사망할 때까지 연락을 유지하고 파리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라바이스 백작은 1867년 딸을 인지했고 1868년 사망했다.
1년 후, 마리아 소피아는 남편에게 불륜 사실을 고백했고, 이후 부부 관계는 개선되었다. 프란체스코 2세는 결혼 생활이 가능하도록 수술을 받았다. 1869년 12월 24일 마리아 소피아는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 피아를 낳았다. 이 아이는 마리아 소피아의 언니인 엘리자베트 황후의 생일에 태어나 그녀가 대모가 되었다. 그러나 딸은 3개월 만인 1870년 3월 28일에 사망했고, 부부는 더 이상 자녀를 갖지 못했다.
1870년 로마가 이탈리아 왕국 군대에 점령되면서 교황령이 소멸하자, 부부는 다시 망명길에 올라 바이에른으로 갔다.
1894년 남편 프란체스코 2세가 사망한 후, 마리아 소피아는 뮌헨을 거쳐 파리로 이주했다. 파리에서 그녀는 비공식적인 망명 부르봉 궁정을 주재하며 양시칠리아 왕국의 복고를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
1900년 움베르토 1세 국왕 암살 사건에 그녀가 무정부주의자들과 연계하여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에서 활동했으며, 이탈리아의 패배와 왕정 복고를 기대하며 사보타주 및 간첩 행위에 관여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생전에 마리아 소피아는 가에타 공방전에서의 용맹함으로 '싸우는 왕비'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가브리엘레 다눈치오는 그녀를 '엄격한 작은 바이에른 독수리'라고 불렀고, 마르셀 프루스트는 '가에타 성벽 위의 군인 여왕'으로 묘사했다. 그녀는 1925년 뮌헨에서 사망했으며, 1984년 유해는 남편, 딸과 함께 나폴리의 산타 키아라 성당에 안치되었다.
2. 4. 사망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도 그녀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에서 활동하였다. 마리아 소피아는 1925년 뮌헨에서 죽었다.3. 자녀
생후 3개월 만에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