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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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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오카군은 1915년 일본령 사할린에 설치된 행정 구역으로, 마오카정, 히로치촌, 란도마리촌, 하보마이촌, 시미즈촌의 1정 4촌으로 시작되었다. 조몬 시대부터 삿분 문화, 아이누 문화 등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던 지역으로, 에도 시대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1942년 노다군을 합병하여 2정 4촌이 되었으나, 1945년 소련군의 사할린 침공으로 일본의 통치권이 소멸되었고, 1949년 사할린청 폐지와 함께 마오카군도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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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카군
개요
국가대일본 제국
지방홋카이도
지청가라후토청 마오카 지청
군 정보
이름마오카군 (真岡郡)

2. 지리

1915년 (다이쇼 4년) 행정 구역으로 발족했을 당시 군역은 마오카정, 히로치촌, 란도마리촌, 하보마이촌, 시미즈촌의 1정 4촌으로 구성되었다.

3. 역사

마오카군 지역은 선사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했으며, 아이누 문화를 거쳐 에도 시대 이후 점차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러일 전쟁 이후 일본 제국의 영토가 되어 사할린 청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다. 자세한 역사는 아래 문단에서 다룬다.

3. 1. 일본 이전의 역사

(내용 없음)

3. 1. 1. 선사 시대

마오카 군 지역 내 유적에서는 조몬 토기가 출토되었다. 특히 마오카마치 오아자 마오카 아자 마오카에 위치한 마오카 유적에서는 조몬 시대 후기의 센바쿠 조상식 토기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현지 제작 토기가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마오카마치 남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1. 2. 고대

가라후토 남부에서는 속 죠몬 문화에 속하는 아니와 문화(엔부치식)가 고분 시대 전기까지 번성했다.

이후 가라후토에서 일어난 스즈야 문화가 4세기 말까지 이어졌으며, 5세기 무렵부터는 오호츠크 문화가 번성했다. 오호츠크 문화는 『일본서기』나 『속일본기』에 등장하는 숙신(미시하세)으로 여겨지며, 아스카 시대에는 속 죠몬 문화인의 요청을 받아 진군한 아베노 히라후와 교전한 기록이 있다. 이후 삿분 문화가 진출하면서 오호츠크인은 가라후토 남부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 중기(10세기)까지 삿분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마오카 군 지역에도 진출했다. 이 시기 무사 계급이 등장하면서 화살깃이나 갑옷 등의 재료로 수요가 늘어난 흰꼬리수리 깃털이나 바다표범 가죽 등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물품들은 왜인 사회나 혼슈 지역과의 중요한 교역품이 되었다. 오우 지방의 호족이었던 아베 씨나 오슈 후지와라 씨 등은 북쪽 지역 산물의 유통에 관여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동시에 왜인 사회로부터 일본의 물품들도 유입되면서, 삿분 문화에서 아이누 문화로 전환되는 과정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속 죠몬 문화나 삿분 문화를 이끌었던 사람들은 선사 시대 죠몬 문화를 향유했던 죠몬인의 후손으로, 아이누 민족의 조상에 해당한다.

3. 1. 3. 중세

가마쿠라 시대 이후, 에조관령 안토 씨는 '포수의 우두머리'로서 동쪽 이민족 정벌을 실행하는 형태로 홋카이도 일본해 연안과 오호츠크해 북해안 및 사할린 남부에 거주하던 에조(아이누)를 통괄했다. 이는 『스와 명신 그림말』에 기록되어 있다.[2] 중세의 안토 씨는 도사미나토를 거점으로 삼아, 오슈 후지와라 씨의 활동을 계승하여 일본해 북부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회선 식목』). 또한, 안토 씨는 육지의 호족이면서 동시에 안도 수군이라 불리는 무장 선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에조 사회에서 소란이 일어나면 이를 진압하기 위해 안토 씨는 쓰가루에서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3] 무로마치 시대오에이 연간(1394년~1428년)에 이르러 안토 씨는 "북해의 이적 동란"을 평정하고, 스스로를 '''일본 장군'''이라고 칭했다.

무로마치 시대가 되면서 안도 수군은 간토 어면선(関東御免船)으로서 활동했다. 이들은 일본산 물품을 에조 사회에 공급하고, 북방 지역의 산물을 대량으로 사들여 일본 전역에 유통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사왕래』)[4][5][6][7]。 한편, 에조 역시 생활 필수품 등을 얻기 위해 자신들의 지역 산물을 가지고 도사미나토나 후대의 와진치에 해당하는 도당(渡党)의 영역까지 찾아왔다 (성하 거래 참조). 15세기가 되자, 안토 씨의 대관이었던 다케다 노부히로(마쓰마에 씨의 조상)를 방문하여 에조의 지도자들이 예를 갖추고 복속하게 되었다 (『후쿠야마 비부』)[8]。 이후 다케다 노부히로는 대륙으로 향하는 교역로를 장악하게 되었다.

3. 1. 4. 근세

에도 시대가 되면서 마오카 군 지역은 서 에조치에 속하게 되었다. 게이초 8년(1603년) 사할린은 소야에 설치된 관청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조쿄 2년(1685년)에는 소야 장소에 포함되었으며, 소야에서는 '''옴샤''' 등이 시행되었다. 겐로쿠 13년(1700년), 마쓰마에 번이 막부에 제출한 '''[https://ja.wikisource.org/wiki/%E6%9D%BE%E5%89%8D%E5%B3%B6%E9%83%B7%E5%B8%B3 마쓰마에 섬 향장]'''에는 '마오카'라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호레키 2년(1752년)경에는 시라누시(혼토군 고진 촌 시라누시)에서 교역이 시작되었고, 여러 곳에 어장이 개설되었다.

적 에조 풍설고의 영향을 받은 타누마 오키츠구가 권력을 잡았던 시기인 텐메이 5년(1785년)에는 사할린에 대한 검분이 이루어졌다. 이때 이와하라 야로쿠와 오이시 잇페이 등이 타란토마리(광지 촌 다란박)까지 북상하여 답사했다.[9]

간세이 2년(1790년)에는 사할린 장소(북 에조치 장소)가 개설되었다. 장소 운영을 맡은 청부인은 아베야 무라야마 가였다. 마오카 군역 주변에서는 톤나이(혼토)에 교역 거점이자 번의 출장 기관 역할을 하는 운상옥이 설치되었다. 이곳에서도 '''옴샤'''와 같은 정책이 시행되었으며, 마오카(마오카 정)와 타란토마리(광지 촌)의 유력자 중에서 총을명(역 에조)이 임명되었다. 당시 지방 행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장소 청부 제도 성립 후의 행정 및 에도 시대의 일본 인구 통계 항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장소 청부인은 간세이 8년(1796년)부터 오사카 상인 코야마야 곤베에와 번사 이타가키 토요시로가 공동으로 맡았고, 다음 해인 9년(1797년)부터는 이타가키 토요시로가 단독으로 운영했다. 간세이 12년(1800년)에는 마쓰마에 번이 사할린 장소를 직접 경영하기 시작했다. 직영 시대에는 번사 타카하시 쇼시로와 메야 야스지로가 관리를 담당했고, 효고 출신 상인 시바야 쵸타유가 물품 납품을 맡았다.

3. 2. 일본 통치 시대

마오카 군 지역은 1905년 러일 전쟁 이후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일본 제국의 영토가 된 남사할린의 일부이다. 일본은 이 지역에 군정을 실시하다가 1907년 사할린 청을 설치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했다. 1915년에는 칙령에 따라 공식적인 행정 구역으로서 '''마오카 군'''이 발족되었으며, 초기에는 마오카정, 히로치촌, 란도마리촌, 하보마이촌, 시미즈촌의 1정 4촌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일본 통치 기간 동안 마오카 군은 여러 차례 행정 구역 개편을 겪었으며, 1918년 공통법 시행으로 법적으로 내지에 포함되었고, 1943년에는 관련 법령 폐지로 완전히 내지로 편입되었다. 1942년에는 노다 군을 흡수하여 행정 구역이 확장되기도 했다.

1945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소련군이 일소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사할린에 침공하면서 마오카 군 역시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다. 일본의 패전 이후 1949년 사할린 청이 법적으로 폐지되면서 마오카 군도 공식적으로 소멸하였다. 일본 통치 시대의 구체적인 행정 변화와 사건들은 아래 하위 문단에서 상세히 다룬다.

3. 2. 1. 개요

1915년 (다이쇼 4년) 6월 26일, "사할린의 군, 읍, 면 편제에 관한 건"(다이쇼 4년 칙령 제101호) 시행에 따라 행정 구역으로서 '''마오카 군'''이 발족했다. 발족 당시 군역은 마오카정, 히로치촌, 란도마리촌, 하보마이촌, 시미즈촌의 1정 4촌으로 구성되었으며, 마오카 지청의 관할이었다.

1918년 (다이쇼 7년) 시행된 공통법 제1조 2항에 따라 사할린이 법적으로 내지에 포함되어[27], 이후 국내법 적용의 대상이 되었다. 1922년 (다이쇼 11년) 4월 1일에는 "사할린의 지방 제도에 관한 법률"과 "사할린 정촌제"가 시행되었다.

1923년 (다이쇼 12년) 4월 1일, 하보마이 촌이 란도마리 촌에 합병되어 1정 3촌이 되었다. 1929년 (쇼와 4년) 7월 1일, 사할린 정촌제 시행으로 '''마오카정'''(1급 정), '''히로치 촌''', '''란도마리 촌''', '''시미즈 촌'''(2급 촌)이 발족했다.

1942년 (쇼와 17년) 11월, 노다 군을 합병하여 '''노다정'''(1급 정)과 '''고토로 촌'''(2급 촌)이 마오카 군 소속이 되어 2정 4촌으로 확대되었다. 1943년 (쇼와 18년) 4월 1일, 관련 법령 폐지로 내지에 편입되었고, 같은 해 6월 1일에는 사할린 정촌제가 폐지되고 정촌제가 시행되었다.

1945년 (쇼와 20년) 8월 22일, 일소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사할린에 침공한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후 1949년 (쇼와 24년) 6월 1일, 국가 행정 조직법 시행으로 사할린청이 법적으로 폐지되면서 마오카 군도 소멸하였다.

3. 2. 2. 연혁


  • 1905년 (메이지 38년)
  • * 7월 - 러일 전쟁사할린 전투에서 일본군 제13사단이 사할린 섬을 점령했다. 7월 31일, 사할린 주둔 러시아군이 항복했다.
  • * 8월 1일 - 군정이 실시되어, 남사할린에 4개의 군정서가 개설되었다. 남사할린 서안에는 마오카 부근에 제4가군정구의 마우카 군정구서가 설치되었다.
  • * 8월 상순 - 루타카 강 유역 방면에서 도망친 러시아군 잔당이 노다 한 방면으로 이동했다.
  • * 8월 17일 - 일본군 부대가 잔적 소탕을 위해 마오카에 상륙하여 노다 한 방면으로 진군했다. 현지 아이누족이 일본군에 협력하여 수색을 도왔다.
  • * 8월 28일 - 내무성 산하 사할린 민정서 코르사코프(오도마리정) 지소의 관할이 되었다.
  • * 9월 1일 - 러일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다.
  • * 9월 4일 - 사할린 민정서 마우카 지소의 관할이 되었다.
  • * 9월 5일 - 포츠머스 조약 체결로 일본 영토가 되었다.
  • 1907년 (메이지 40년) 3월 14일 - 내무성 산하 조직 사할린 청이 발족하고, 마우카 지청의 관할이 되었다.
  • 1908년 (메이지 41년) 4월 - 관할 지청이 마오카 지청으로 개칭되었다.
  • 1909년 (메이지 42년)
  • * 10월 - 마오카 지청 마오카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 * 사할린 청령으로 "부락 총대 규정"이 제정되어, 주요 취락에 촌장에 해당하는 총대를 두어 행정 사무를 담당하게 했다.
  • 1913년 (다이쇼 2년) 2월 - 마오카 출장소가 폐지되었다.
  • 1915년 (다이쇼 4년) 6월 26일 - 「사할린의 군, 읍, 면 편제에 관한 건」(다이쇼 4년 칙령 제101호)의 시행으로 행정 구역으로서 '''마오카 군'''이 발족했다. 발족 당시에는 마오카정, 히로치 촌, 람도마리 촌, 하하마이 촌, 시미즈 촌의 1정 4촌으로 구성되었으며, 마오카 지청이 관할했다.
  • 1918년 (다이쇼 7년) - 공통법 (다이쇼 7년 법률 제39호, 4월 17일 시행) 제1조 2항에 따라 사할린이 내지에 포함되어[27], 이후 기본적으로 일본 국내법이 적용되었다.
  • 1922년 (다이쇼 11년) 4월 1일 - 「사할린의 지방 제도에 관한 법률」(다이쇼 10년 4월 8일 법률 제47호)과 그 시행 세칙인 「사할린 정촌제」(다이쇼 11년 1월 23일 칙령 제8호)가 동시에 시행되면서 "부락 총대 규정"이 폐지되었다.
  • 1923년 (다이쇼 12년) 4월 1일 - 하하마이 촌이 람도마리 촌에 합병되어 1정 3촌이 되었다.
  • 1929년 (쇼와 4년) 7월 1일 - 사할린 정촌제 시행에 따라 '''마오카정'''(1급 정), '''히로치 촌''', '''람도마리 촌''', '''시미즈 촌''' (2급 촌)이 발족했다.
  • 1942년 (쇼와 17년) 11월 - 노다 군을 합병하여, '''노다정'''(1급 정)과 '''고토로 촌'''(2급 촌)이 마오카 군의 관할로 편입되어 2정 4촌이 되었다.
  • 1943년 (쇼와 18년)
  • * 4월 1일 - 「사할린에 시행하는 법률의 특례에 관한 건」(다이쇼 9년 칙령 제124호)이 폐지되어, 사할린이 내지로 편입되었다.
  • * 6월 1일 - 사할린 정촌제가 폐지되고, 사할린에서 정촌제가 시행되었다. 2급 촌은 지정 촌이 되었다.
  • 1945년 (쇼와 20년) 8월 22일 - 일소 중립 조약을 파기한 소련군의 사할린 침공 이후,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점령되었다.
  • 1949년 (쇼와 24년) 6월 1일 - 국가 행정 조직법 시행으로 사할린 청이 법적으로 폐지됨에 따라 같은 날 마오카 군도 소멸하였다.

참조

[1] 서적
[2] 웹사이트 函館市史 通説編1 通説編第1巻 第3編 古代・中世・近世 第1章 安東氏及び蠣崎氏 第2節 安東氏の支配 https://adeac.jp/hak[...]
[3] 서적 道南十二館の謎
[4] 서적 エゾの歴史
[5] 서적 道南十二館の謎
[6] 웹사이트 函館市史 通説編1 通説編第1巻 第3編 古代・中世・近世 第1章 安東氏及び蠣崎氏 第3節 中世期の商品流通 https://adeac.jp/hak[...]
[7] 웹사이트 五所川原市の地域経済循環分析 https://www.chisou.g[...]
[8] 웹사이트 松前町「松前の文化財」 - 松前家伝 銅雀台瓦硯 http://www.town.mats[...]
[9] 웹사이트 稚内史 第一章 天明の蝦夷地調査 https://www.city.wak[...]
[10] 웹사이트 稚内史 第二章 ロシアの乱暴と山崎半蔵の宗谷警備 https://www.city.wak[...]
[11] 문서 文化四(千八一七)年ロシアの択捉島襲撃を巡る諸問題 川上淳
[12] 학술논문 フヴォストフ文書考 https://hdl.handle.n[...] 1964
[13] 웹사이트 稚内史 第五章 樺太詰松田伝十郎の山丹交易改革 https://www.city.wak[...]
[14] 학술논문 北蝦夷地紀行の食文化考 北夷談について https://doi.org/10.2[...] 1995
[15] 학술논문 近世期~明治初期、北海道・樺太・千島の海で操業した紀州漁民・商人 https://nfu.repo.nii[...] 日本福祉大学知多半島総合研究所 2015-10
[16] 웹사이트 西エゾ地場所の漁業 https://www.ff-ainu.[...]
[17] 문서 北海道の歴史と文化」(北海道史研究協議会編)史料紹介 樺太南部を中心とした栖原家家譜(秋田俊一)
[18] 문서 目賀田帯万が[[安政]]3年4年(1856・57)頃のカラフト沿岸を写生した「延叙歴検真図」の再写図
[19] 학술논문 「日露和親条約」がカラフト島を両国の 雑居地としたとする説は正しいか? http://id.nii.ac.jp/[...] 東北学院大学東北文化研究所 2013
[20] 학술논문 旧樺太時代の神社について : 併せて北方領土の神社について https://kanagawa-u.r[...] 神奈川大学日本常民文化研究所 非文字資料研究センター 2015-03
[21] 웹사이트 平成18年度 秋田県公文書館企画展 秋田藩の海防警備 https://www.pref.aki[...]
[22] 학술논문 「日露和親条約」調印後の幕府の北方地域政策について https://tohoku-gakui[...] 東北学院大学学術研究会 2014-03
[23] 학술논문 明治初年の樺太 : 日露雑居をめぐる諸問題 https://hdl.handle.n[...] 北海道大学スラブ研究センター 1993
[24] 웹사이트 第十七回資料紹介展 徳島県人の北海道移住 徳島県立文書館 https://library.toku[...]
[25] 웹사이트 「近世蝦夷地の地名」 https://www.ff-ainu.[...]
[26] 학술논문 橋立出身 忠谷・田端家の函館に於ける商業活動 https://sitereports.[...] 市立函館博物館
[27] 간행물 法律第39号 https://dl.ndl.go.jp[...] 官報 19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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