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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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일제는 후한 말기의 인물로, 유학자이자 관료였다. 마융의 친척으로 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간의대부로 조정에 들어가 희평석경 편찬에 참여했다. 동탁이 집권했을 때 태위로 임명되었으며, 왕윤이 채옹을 처형하려 하자 이를 반대했다. 이후 이각과 곽사가 정권을 잡자 태부와 녹상서사가 되었고, 원술에게 좌장군 직위와 작위를 수여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원술에게 모욕을 당하고 부절을 빼앗긴 후 분노하여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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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융은 후한 시대의 '통유'라 불린 학자이자 관료로, 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폭넓은 지식, 그리고 노식과 정현을 비롯한 제자 양성을 통해 후대 유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다수의 경전에 주석을 남겼다.
마일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마일제 |
원어 이름 | 馬日磾 |
출생 | 140년 |
출생지 | 우부풍 무릉현 |
사망 | 194년 |
사망지 | 수춘 |
사망 원인 | 분사(憤死) |
자(字) | 옹숙(翁叔) |
친척 | 마융(대부 혹은 아저씨) |
관직 | |
경력 | |
임관 | 간의대부 |
주요 활동 | 희평석경, 관동 위무 |
주요 활동 시기 | |
사성교위 임명 시기 | 191년 |
태위 임명 시기 | 191년 ~ 192년 |
태부 겸 녹상서사 임명 시기 | 192년 ~ 194년 |
기타 | |
적수 | 원술 |
2. 생애
마일제는 우부풍군 마릉현(현재 산시성 싱핑시 북동쪽) 출신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저명한 유학자이자 관료였던 마융의 친척으로, 젊은 시절 마융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간의대부로 관직에 진출하여 노식, 채옹, 양표 등과 함께 황실 도서관에 소장된 사서오경과 ''동관한기''의 공식 사본을 교정, 편집, 주석하는 작업에 참여했으며, 이후 광록대부로 승진하였다.
188년 사성교위에서 태위가 되었으나 이듬해 면직되었다. 191년 태상에서 다시 태위로 복귀했다. 192년, 동탁이 여포와 왕윤에 의해 암살된 후, 채옹이 동탁의 죽음에 슬픔을 표하자 왕윤은 그를 처형하려 했다. 마일제는 다른 관리들과 함께 채옹을 변호했지만, 왕윤은 이를 거절하고 채옹을 처형했다. 마일제는 왕윤의 처사에 실망하여 그가 권력을 오래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192년 말, 이각과 곽사가 이끄는 동탁의 추종자들이 왕윤을 살해하고 헌제를 허수아비로 삼아 중앙 정부를 장악하면서 마일제의 예측은 현실이 되었다. 이각과 곽사는 마일제를 태부와 녹상서사로 임명했다.
그 후 마일제는 조정의 대표로서 지역 관료들을 방문하는 임무를 맡았고, 원술에게 좌장군 직위와 양책후 작위를 수여하기 위해 수춘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원술은 마일제를 무례하게 대하고 부절을 빼앗아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데 사용했다. 이에 수치심을 느낀 마일제는 수춘을 떠나려 했지만, 원술은 그를 억류하고 자신의 고문으로 삼으려 했다. 결국 마일제는 좌절감과 굴욕감으로 인해 피를 토하며 194년 수춘에서 사망했다.
2. 1. 학문적 배경과 초기 관직
젊어서부터 마융의 학문을 널리 전하였고 재주와 학식이 있었다. 옛 성현들의 경서가 전래된 지 몹시 오래되어 잘못된 글자들이 많아졌으므로, 후학들이 그릇된 내용을 접할까 걱정한 오관중랑장(五官―) 당계전(堂谿典), 광록대부(光祿大夫) 양사(楊賜), 간의대부(諫議―) 마일제, 의랑(議郞) 채옹·장순(張馴)·한열(韓說), 태사령(太史令) 선양(單颺) 등이 175년(희평 4년) 육경(六經)의 글자를 바로잡을 것을 영제에게 청해 그 허락을 받고 태학 문 밖에 석경(희평석경)을 세웠다.[4] 채옹, 양표, 한열, 노식 등과 동관(東觀)에 있으면서 《한기》도 손보았다.[5]마일제는 마융의 친척으로, 젊은 시절 마융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간의대부로 정부에 들어갔고, 노식, 채옹, 양표 등과 함께 황실 도서관에 소장된 사서오경과 《한기》의 공식 사본을 교정하고 편집하고 주석을 달았다. 이후 광록대부로 전임되었다.
2. 2. 희평석경과 동관한기
젊어서부터 마융의 학문을 널리 전하였고 재주와 학식이 있었다. 옛 성현들의 경서가 전래된 지 몹시 오래되어 잘못된 글자들이 많아졌으므로 후학들이 그릇된 내용을 접할까 걱정한 오관중랑장(五官―) 당계전(堂谿典), 광록대부(光祿大夫) 양사(楊賜), 간의대부(諫議―) 마일제, 의랑(議郞) 채옹·장순(張馴)·한열(韓說), 태사령(太史令) 선양(單颺) 등이 175년(희평 4년) 육경(六經)의 글자를 바로잡을 것을 영제에게 청해 그 허락을 받고 태학 문 밖에 석경(石經)을 세웠다.[4] 채옹, 양표, 한열, 노식 등과 동관(東觀)에 있으면서 《한기》도 손보았다.[5]희평 4년 (175년)부터 육경의 문자를 바로잡는 작업에 참여했다. 그 성과로 개양문 밖에 세워진 석경 (희평석경)의 예기비에는 의랑 채옹과 함께 간의대부 마일제의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2. 3. 후한 말 정치 격변기의 활동
188년(중평 5년) 7월(음력) 사성교위에서 태위로 승진했다가 다음 해 4월 면직되었다.[6] 복귀해 태상을 거쳐 191년(초평 2년) 7월(음력) 다시 태위에 임명되었다.[7]192년 사도 왕윤이 국정을 농단하던 동탁을 주살하고, 이를 탄식한 채옹마저 죽이려 했다. 채옹은 한나라의 역사서를 완성할 수 있도록 이마에 글자를 새기고 발꿈치를 도려내는 형벌[黥首刖足]로 감형해달라고 빌었다. 마일제도 여러 사대부들과 함께 구명을 청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좋은 사람은 나라의 밑바탕이요 저작은 나라의 전범이거늘 왕윤은 밑바탕을 멸하고 저작을 폐하니 오래 가겠는가”라는 말을 주변에 남겼다.[4]
6월(음력) 과연 다시 정변이 일어나 왕윤은 이각 등에게 제거되었다.
2. 4. 왕윤 실각 이후
192년 사도 왕윤이 국정을 농단하던 동탁을 주살하고, 이를 슬퍼한 채옹마저 죽이려 했다. 채옹은 한나라의 역사서를 완성할 수 있도록 이마에 글자를 새기고 발꿈치를 도려내는 형벌[黥首刖足]로 감형해달라고 빌었다. 마일제도 여러 사대부들과 함께 구명을 청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일제는 주변에 “좋은 사람은 나라의 밑바탕이요, 저작은 나라의 전범이거늘 왕윤은 밑바탕을 멸하고 저작을 폐하니 오래 가겠는가”라는 말을 남겼다.[4]마일제는 왕윤에게 실망하여 그가 오래 권력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의 예측은 옳았다. 192년 말, 이각과 곽사가 이끄는 동탁의 추종자들은 왕윤으로부터 권력을 빼앗고 그를 살해한 후 헌제를 꼭두각시로 삼아 중앙 정부를 장악했다. 이각과 곽사는 마일제를 태부(太傅)와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임명했다.
2. 5. 원술과의 갈등과 죽음
194년(흥평 원년), 마일제는 원술에게 좌장군과 양책후(陽翟侯) 직위를 주었으나,[10] 원술은 오히려 마일제의 부절을 빼앗고 자신의 부하들을 징벽하라고 위협하였다.[11] 마일제는 '원술의 선대는 대대로 공을 지냈는데 지금은 선비를 천거한답시고 조정의 관리에게 겁을 주며 재촉하는가!'라고 항의했지만, 원술은 듣지 않고 오히려 마일제를 구류하였다.[11]마일제가 원술을 방문했을 때, 원술은 그를 무례하게 대하고 부절을 빼앗아 회수 지역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데 사용했다. 부절을 잃은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 마일제는 수춘을 떠나려 했지만, 원술이 그를 막고 자신의 고문으로 삼으려 했다. 좌절감과 굴욕감을 느낀 마일제는 피를 토하고 194년 수춘에서 사망했다.[11]
마일제는 이 일로 인해 공융과[12] 원소에게[13] 비판받았다. 건안 연간에 조정에서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르는 논의가 있었지만, 공융은 마일제가 상공의 지위에 있으면서 원술 따위에게 아첨했기 때문에 따르게 된 것이라고 반대하여 실현되지 않았다.
3. 평가
마일제에 대한 평가는 전해지지 않는다.
3. 1.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채옹을 변호하던 대목이 실려있다.4. 이름 표기
현대 중국에서 사용되는 표준중국어에서는 '일'의 병음은 'rì'이지만, 김일제와 마일제의 '일'은 'mì'이며, '멱'이나 '밀'과 같은 발음이 된다.
참조
[1]
서적
後漢書 蔡邕伝注洛陽記
[2]
문서
태부・[[대장군]]・[[삼공]] 등이, 내외의 고재유망자를 초빙하여, 자라의 부의 연속으로 하는 것. 후한의 인재 등용・추거 방법의 하나로, [[효렴]]・[[무재]]와 같은 일반적인 선거보다 높은 가치가 있어, 대상자는 고위에 누진하는 관습이었다. 『[[문헌통고]]』선거고십이는, 「[[향거리선]]을 이써 순서에 진무하는, 선거이다. 고재중명을 이써 밟아 오르는, 벽소이다」라고 한다.
[3]
서적
후한서 60권上 열전 제50上 마융
[4]
서적
후한서 60권下 열전 제50下 채옹
[5]
서적
후한서 64권 열전 제54 노식
[6]
서적
후한서 8권 본기 제8 효영제 유굉
[7]
서적
후한서 제9권
[8]
서적
삼국지 13권 위서 제13 화흠
[9]
서적
삼국지 46권 오서 제1 손책
[10]
서적
삼국지 6권 위서 제6 원술
[11]
서적
헌제춘추
[12]
서적
후한서 70권 열전 제60 공융
[13]
서적
후한서 74권上 열전 제64上 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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