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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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언은 전한 경제의 후손으로, 후한 말의 정치가이자 군벌이다. 그는 태상 직위에 오른 후 정치적 위험을 피해 익주 자사가 되었고, 현지에서 세력을 키워 독립을 도모했다. 장로를 통해 한중을 장악하고 호족 세력을 숙청하며 기반을 다졌으나, 중앙 정부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 비판을 받았다. 유언은 아들들을 장안에 보냈으나, 이각과 곽사의 난으로 인해 아들들을 잃고 익주로 돌아와 사망했다. 그의 아들 유장이 익주를 물려받았으나, 유비에게 패하여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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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유언 |
로마자 표기 | Yu Yeon |
본관 | 형주강하군 경릉현 |
이칭 | 자(字)는 군랑(君郞) |
작위 | 양성후 |
직업 | 정치인, 군벌 |
관직 | |
주요 경력 | 낙양현령 기주자사 남양태수 종정 태상 익주목 겸 감군사자 |
임기 시작 | 188년 |
임기 종료 | 194년 |
군주 | 영제 소제 변 헌제 |
후임 | 유장 |
생애 | |
출생 | 생년 미상 |
출생지 | 형주강하군 경릉현 |
사망 | 194년 |
사망지 | 성도 |
사인 | 등창 |
가족 관계 | |
자녀 | 유범 유탄 유모 유장 |
친척 | 황완(외사촌) |
2. 생애
전한 시대 노공왕(魯共王)이었던 유우의 후손이다. 유능한 관리로 빠르게 승진하여 황제의 의례를 담당하는 태상까지 올랐으나, 스승 주념(祝恬)이 죽자 160년 7월 관례에 따라 관직에서 물러났다.
영제 치세 동안 중앙 조정의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자, 유언은 이를 피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교지군 태수를 희망했으나, 측근 동부의 조언을 받아들여 188년 익주 자사로 부임했다.[6]
익주에 도착한 유언은 마상(馬相)과 조지(趙祗)가 황건적의 난을 명분으로 일으킨 반란에 직면했으나, 지역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이를 진압했다. 이후 중앙 정부로부터의 독립을 모색하며, 장로와 장수(張脩)를 보내 한중군 태수 소고(蘇固)를 제거하고 한중을 장악하게 하여 익주와 중앙 정부 사이의 완충 지대를 만들었다. 또한 익주 내 기반 강화를 위해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지역 호족 십여 명을 처형했으나, 이에 반발한 가룡 등의 호족 연합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유언은 이 반란을 진압했으며, 이후 강족의 침입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194년 동탁 사후 장안을 장악한 이각과 곽사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한수, 마등과 연합하고 장안에 있던 아들들(유범, 유탄, 유장)의 호응을 얻어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아들 유범과 유탄이 이각군에게 살해당했고, 막내아들 유장만이 탈출하여 유언에게 돌아왔다.
같은 해 여름, 거처하던 면죽에 낙뢰로 큰 화재가 발생하여 성도로 중심지를 옮겨야 했다. 두 아들의 죽음과 화재로 인한 충격이 겹쳐 등에 병을 얻었고, 결국 그해 말 사망했다. 그의 사후 익주는 막내아들 유장이 계승했다.
2. 1. 황실 종친으로서
유언은 전한 경제의 아들인 노공왕(魯恭王) 유여의 후손으로, 그의 선조는 후한 장제 시대 원화 연간(84년~87년)에 중원에서 강하군 경릉현으로 이주하였다.[10][21]젊은 나이에 주나 군의 관리로 일했으며, 한 황실의 종친이라는 신분 덕분에 중랑(中郞) 또는 낭중(郎中)으로 임명되기도 했다.[21] 그러나 160년(연희 3년)[22], 학문 스승이었던 축염[23](축공[11])이 세상을 떠나자 관직을 그만두고 상을 치렀다. 이후 영천군의 양성산(陽城山)에 머물며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사람들을 가르쳐 명성을 얻었다.
그의 명성 덕분에 현량방정(賢良方正)으로 추천되어 사도부(司徒府)에 초빙되었다. 이후 낙양 현령을 시작으로, 기주 자사, 남양군 태수, 종정(宗正)을 거쳐 태상(太常)의 자리에 올랐다. 태상은 황제의 제사를 관장하는 구경(九卿) 중 으뜸에 해당하는 중요한 관직이었다.
2. 2. 익주목 부임과 독자 세력 구축
188년(중평 5년),[24] 후한 말기의 혼란 속에서 영제의 조정은 부패했고 지방 통제력은 약화되었다. 유언은 이러한 상황의 원인을 자사의 권위 부족과 부적합한 인물 등용으로 진단하고, 영제에게 청렴한 중신을 주목으로 임명하여 지방을 안정시킬 것을 건의했다. 그는 "뇌물로 관직을 산 자들이 백성을 착취하여 민심 이반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청렴한 인물을 지방관으로 파견하여 안무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본래 유언은 혼란스러운 중앙 정계를 벗어나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교지로 가기를 원했으나, 시중 동부가 "익주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조언하자 마음을 바꾸어 익주행을 희망했다.[6] 마침 익주에서는 전임 자사 극검(郤儉)[25]의 실정으로 황건적을 자칭한 마상(馬相)과 조지(趙祗)의 반란이 일어나 광한군, 촉군, 건위군, 파군 일대가 큰 혼란을 겪은 직후였고, 병주나 양주 등 다른 지역에서도 자사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유언의 건의는 설득력을 얻었다. 결국 유언의 건의는 받아들여져 감군사자(監軍使者) 겸 익주목으로 임명되었고, 양성후(陽城侯)에 봉해졌다. 이와 함께 태복 황완은 예주목으로, 종정 유우는 유주목으로 임명되면서 주목의 위상이 강화되었다.
유언이 익주로 부임할 당시, 마상 등의 반란은 익주종사 가룡이 천여 명의 병력으로 관민을 규합하여 겨우 진압한 상태였다(마상의 난). 그러나 반란의 여파로 길이 막혀 유언은 바로 익주로 들어가지 못하고 형주 동쪽 경계에 머물러야 했다. 이에 가룡이 관리와 병사를 보내 유언을 맞이했고,[12] 유언은 가룡을 교위로 삼고 반란의 중심지였던 광한군 면죽현(綿竹縣)을 임시 거점으로 삼았다. 유언은 관대한 정책으로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남양과 삼보 등지에서 전란을 피해 익주로 흘러 들어온 유민 수만 가구를 받아들여 '동주병(東州兵)' 또는 '동주사(東州士)'라 불리는 강력한 친위 군단을 조직했다.[26] 또한 오두미도의 지도자 장로의 어머니가 젊고 아름다우며 귀도(鬼道)에 능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장로 모자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장로를 독의사마(督義司馬)에 임명했다. 유언은 장로와 별부사마 장수(張脩)에게 병력을 주어 한중을 공격하게 했다. 장로는 먼저 장수를 살해하고 그의 군대를 흡수한 뒤, 한중태수 소고(蘇固)를 죽이고 한중을 장악했다. 이후 야곡(斜谷)을 차단하여 익주와 중앙 정부의 통로를 막았다. 유언은 조정에 "미적(米賊, 장로 세력) 때문에 길이 막혀 연락할 수 없다"고 보고하며 중앙 정부로부터의 독립성을 확보했다.
동시에 유언은 익주 내 기반을 다지기 위해 기존의 유력 호족 세력을 탄압했다. 파군태수 왕함(王咸),[26] 임공현장 이권(李權)[27] 등 십여 명의 호족 지도자들을 여러 구실로 숙청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했다. 191년(초평 2년), 유언의 이러한 강압적인 통치에 반발한 가룡과 건위태수 임기(任岐)가 무기를 들고 봉기했으나, 유언은 이들을 모두 진압하고 살해했다.[13] 이 과정에서 유언은 임기와 가룡을 평정한 공을 강족에게 제대로 분배하지 않아 강족의 분노를 샀고, 이는 이후 강족이 면죽 부근을 침공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2. 3. 장로와의 관계와 호족 세력 탄압
유언은 익주 자사로 부임한 후, 과거 황건적을 자칭한 세력의 난을 평정한 익주종사(―從事) 가룡을 교위(校尉)로 삼고[25] 광한군 면죽현(綿竹縣)을 거점으로 삼아 관대한 정책으로 민심을 얻으며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12] [13] 그는 남양과 삼보 지역에서 익주로 이주해 온 수만 가구의 유민들을 받아들여 '동주병(東州兵)' 또는 '동주사(東州士)'라 불리는 군단을 조직하고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삼았다.[26] (『삼국지』 촉지 「유이목전」 인용 『영웅기』)한편, 유언은 종교 지도자 장로와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주목했다. 장로의 어머니가 젊고 아름다우며 귀도(鬼道)를 행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그녀가 자신의 집에 자주 드나들도록 할 정도로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26] [13] 유언은 장로를 독의사마(督義司馬)에 임명하고,[26] 별부사마(別部司馬) 장수(張脩)와 함께 병력을 주어 한중군 태수 소고(蘇固)를 공격하게 했다. 장로는 먼저 장수를 살해하고 그의 군대를 흡수한 뒤,[26] 소고마저 죽이고 한중 지역을 장악했다.[26] [13] 이후 유언은 장로 세력이 야곡(斜谷)을 점거하여 길이 막혔다는 이유를 들어 중앙 정부와의 통로를 차단하고,[26] "미적(米賊) 때문에 길이 통하지 않는다"고 조정에 보고하며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권을 형성했다.[13]
익주 내에서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유언은 지역 호족 세력에 대한 탄압을 단행했다. 그는 파군태수[26] 왕함(王咸), 임공현장(臨邛縣長)[27] 이권(李權, 이복의 아버지) 등 십여 명의 유력 호족들을 숙청했다.[26] [13] 이러한 강압적인 조치에 반발하여 191년 (초평 2년), 과거 유언을 익주로 맞이했던 가룡과 건위태수 임기(任岐) 등이 무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13] 유언은 이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가룡과 임기의 목숨을 빼앗음으로써 익주 내에서의 자신의 권력을 더욱 확고히 했다.[13]
2. 4. 중앙 진출 시도와 좌절
유언의 아들들인 좌중랑장 유범, 치서어사(治書御史) 유탄(劉誕), 봉거도위(奉車都尉) 유장은 당시 후한의 수도였던 장안에 머물며 헌제를 섬기고 있었다.[14][15] 이후 헌제는 유언을 회유하기 위해 유장을 익주로 파견했으나, 유언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익주에 계속 머물게 하여 다시는 수도로 돌려보내지 않았다.[16]194년(흥평 원년), 우부풍 미현(郿縣)에 주둔하고 있던 정서장군(征西將軍) 마등은 유언 및 장안에 있던 그의 아들 유범과 비밀리에 손을 잡고, 동탁 사후 장안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각, 곽사, 번조 등을 몰아내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17] 유언 역시 이에 호응하여 교위(校尉) 손조(孫肇)에게[28] 촉 병사 5,000명을 주어 한수와 마등의 군대를 지원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었고, 마등의 군대는 장안 공격에 실패하고 양주로 퇴각해야 했다.[18] 유범은 괴리(槐里)로 달아났으나 이각 군대의 추격을 받아 살해되었고, 함께 있던 동생 유탄 역시 사로잡혀 처형당했다.[18] 당시 장안에 있던 세 아들 중 유장만이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여 익주로 돌아와 아버지 유언에게 합류할 수 있었다. 한편, 의랑(議郞) 방희는 이전부터 유언 가문과 교류가 있었기에, 유범과 유탄이 죽자 그들의 아들, 즉 유언의 손자들을 데리고 익주로 피신하여 유언에게 의탁했다.
같은 해, 두 아들을 잃은 슬픔에 더해 유언에게 또 다른 불행이 닥쳤다. 익주의 치소였던 면죽에 낙뢰로 인한 큰 화재가 발생하여 도시의 주요 시설과 유언의 거처가 불타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유언은 주의 중심지를 더 내륙인 성도로 옮겨야만 했다. 아들들의 비극적인 죽음과 재해로 인한 충격이 겹치면서 유언은 등에 악성 종기(혹은 창)가 발병했고, 결국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익주의 유력 호족이었던 조위 등의 추대로 평소 온화하고 어질다는 평판을 얻었던 넷째 아들 유장이 익주목의 지위를 계승했다.[19]
3. 평가
진수는 유언이 함부로 천자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을 혹평하고 있다.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첫 회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유주 태수로 등장한다.[9] 교위 추정의 의견에 따라 황건적에 맞설 의용군을 모집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때 탁군의 유비와 그의 의형제인 관우, 장비가 의용군에 자원한다. 유언은 유비를 만나 그가 의용군을 모으는 것을 돕는 것으로 묘사된다.[9]
그러나 진수가 편찬한 정사 《삼국지》에는 유언이 유주 태수(혹은 자사, 주목)를 지냈다는 기록은 없다. 소설 속 이러한 설정은 훗날 그의 아들 유장이 유비를 익주로 맞아들이고 먼 친척으로서 존대하는 이야기의 복선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5. 가계
유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설명 |
---|---|---|
선조 | 유우 | 경제의 다섯째 아들 |
어머니 | 황씨(黃氏) | 황완의 고모[29] |
아들 | 유범(劉範) | 좌중랑장 역임, 이각에게 살해됨 |
아들 | 유탄(劉誕) | 상서령 역임, 이각에게 살해됨 |
아들 | 유모(劉瑁) | 상도위 역임, 208년 말에서 214년 사이에 병사 |
아들 | 유장(劉璋) | 유언의 익주 자사 지위 계승, 유비에게 익주를 잃고 항복, 이후 손권에게 투항했으나 직후 사망 |
손자 | 유순 | - (상세 정보 부족) |
며느리 | 오부인(吳氏) | 유모의 아내, 남편 사후 유비와 재혼하여 목황후가 됨 |
며느리 | 방부인(龐氏) | 유범의 아내, 방희와 친척 |
며느리 | 비부인(費氏) | 유장의 아내, 비관의 여동생 |
며느리 | 최부인(崔氏) | 최염의 여동생 (누구의 아내인지 불명확) |
참조
[6]
간행물
An Outline of the Local Administrations of the Later Han Empire
http://sunzi.lib.hku[...]
[9]
서적
Three Kingdoms: A Historical Novel: No. 1
Foreign Languages Press
2007
[10]
서적
三国志きらめく群像
[11]
문서
『三国志』蜀志「劉二牧伝」の注
[12]
문서
『漢霊帝紀』
[13]
문서
『三国志』蜀志「劉二牧伝」が引く『英雄記』
[14]
문서
『三国志』蜀志「劉二牧伝」が引く『英雄記』
[15]
문서
『三国志』蜀志「穆皇后伝」
[16]
문서
『三国志』蜀志「劉二牧伝」が引く『典略』
[17]
문서
『三国志』蜀志「[[許靖]]伝」が引く『益州耆旧伝』
[18]
문서
『三国志』蜀志「劉二牧伝」が引く『英雄記』
[19]
문서
『英雄記』
[20]
문서
宗室
[21]
문서
《삼국지》 유언전은 중랑, 《후한서》 유언전은 낭중
[22]
문서
《후한서》7권 본기 제7 [[효환제]] 유지 연희 3년
[23]
문서
[[배송지]] 주석, 《삼국지》31권 촉서 제1 유언
[24]
문서
《[[자치통감]]》59권 한기 제51 영제 중평 5년
[25]
문서
《후한서》 영제기와 유언전에서는 치검(郗儉)이라 하였으나 《삼국지》 유언전과 《자치통감》을 따른다.
[26]
문서
[[상거]], 《[[화양국지]]》5권 [[공손술]]유이목지
[27]
문서
《익부기구잡기》(益部耆舊雜記)
[28]
문서
[[왕찬]], 《[[영웅기]]》
[29]
문서
《삼국지》42권 촉서 제12 [[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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