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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하라 히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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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키하라 히로미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1982년부터 2001년까지 활동했다. 오부 고등학교 시절 '아이치 삼우까마귀'로 불리며 강속구 투수로 명성을 떨쳤고, 1981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위로 입단했다. 1983년 신인왕을 수상했으며, 1994년에는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고 일본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며, 2023년 현재 TBS 텔레비전과 스포츠 닛폰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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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하라 히로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마키하라 히로미
원어 이름槇原 寛己 (마키하라 히로미)
출생일1963년 8월 11일
출생지아이치현 한다시
신장187cm
체중94kg
포지션투수
투구/타석우투/우타
선수 경력
고등학교아이치현립 오부 고등학교
프로 입단 연도1981년
드래프트 순위1순위
소속 구단요미우리 자이언츠 (1982년 ~ 2001년)
첫 출장1983년 4월 16일
마지막 경기2001년 9월 30일 (引退試合, 은퇴 경기)
통계 (NPB)
승-패159승 128패
평균자책점3.19
완봉승35
투구 이닝2,485이닝
탈삼진2,111개
세이브56
수상 경력
신인왕1983년
올스타 선정6회 (1988년, 1989년, 1991년, 1992년, 1994년, 1999년)
기타퍼펙트 게임 달성 (1994년 5월 18일)
기타 정보
별명마키 ()
마키상 ()
미스터 퍼펙트 ()
유튜브 채널미스터 퍼펙트 마키하라 유튜브 채널
유튜브 활동 기간2021년 2월 25일 - 현재
유튜브 구독자 수약 20.8만 명 (2024년 1월 2일 기준)
관련 회사오피스 컨설팅 주식회사
사진
MBS 라디오 '카메야마 츠토무의 스포츠 먼데이!' 공개 녹음 현장에서 (2018년 12월 22일 한신 경마장)
MBS 라디오 '카메야마 츠토무의 스포츠 먼데이!' 공개 녹음 현장에서 (2018년 12월 22일 한신 경마장)

2. 선수 경력

198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마키하라는 1년차에는 2군에서 몸을 만드는 데 집중하여 1군 등판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150km/h가 넘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로 구단의 기대를 받았고, 가을에 열린 한신과의 오픈전에서 좋은 투구를 보여주며 자신감을 얻었다.[3]

1983년 봄, 괌 캠프에서 1군 멤버로 선발된 마키하라는 후지타 모토시 감독에게서 크게 휘어지는 커브를 배워 속구를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4] 같은 해, 마키하라는 동기생 요시무라 사다아키, 1살 위인 코마다 노리히로와 함께 등번호에 따라 '''50번 트리오'''라고 불리며 젊은 유망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마키하라는 개막 1군 엔트리에 포함되어 4월 16일 한신과의 경기(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1군 첫 등판 및 첫 선발 등판을 했다. 이 경기에서 연장 10회까지 5안타 9탈삼진 1-0 완봉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5] 4월 24일 야쿠르트전에서도 선발 등판하여 프로 데뷔 후 2경기 연속 완투승을 기록했다.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한 마키하라는 12승 9패 1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고, 기자단 투표에서 압도적인 213표를 얻어 신인왕을 차지했다.[6]

같은 해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 3차전과 6차전에 선발 등판했다.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3차전에서는 6회초 테리 위트필드에게 3점 홈런을 맞으며 5⅓이닝 4실점을 기록했고, 세이부 구장에서 열린 6차전에서는 1회에 선취점을 얻었지만 중반에 역전을 허용하며 6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두 경기 모두 승패는 기록되지 않았다.

1984년 마키하라는 155km/h를 기록하며 당시 일본 최고 속도 기록을 세웠다. 비록 이듬해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한 곽태원이 156km/h를 기록하며 갱신되었지만, 마키하라의 155km/h는 종속 표시였기 때문에 "일본인 최초로 160km/h를 기록하는 것은 마키하라일 것이다"라는 기대를 받았다.[7] 같은 해 미일 야구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디 머레이에게 초대형 장외 홈런을 맞기도 했다.

1985년 4월 17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랜디 바스, 가케후 마사유키, 오카다 아키노부에게 3연속 백스크린 홈런(백스크린 3연발)을 허용했다.[8] 그러나 2개월 후인 6월 28일 같은 경기에서 팀의 구단 기록인 1경기 8홈런, 자신의 현역 시절 유일한 홈런이자 구단 통산 5000호 홈런을 기록하며[9] 1실점 완투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7월 14일 한신전에서 랜디 바스의 타구에 오른쪽 정강이를 맞고 넘어져 왼쪽 고관절 골절상을 입으며[10][11] 시즌을 마감했다.

1986년 개막 직후 2군에서 5경기에 등판하여 33이닝 동안 36탈삼진 6실점을 기록하고,[12] 세이부전 완봉승을 거두는 등 부상 후유증이 없음을 증명하며 5월 4일 1군에 복귀했다. 5월 11일 히로시마전에서 300일 만에 1군 복귀 등판했지만 3⅔이닝 6실점으로 강판당했다.[13] 그러나 8월에 4승 1패 3완봉, 평균자책점 0.63을 기록하며 월간 MVP를 수상하는 등[14] 팀의 주축 투수로 활약하며 히로시마와의 우승 경쟁을 이끌었다. 하지만 10월 7일 야쿠르트전에서 마크 브로하드에게 역전 홈런을 맞으며[15][16] 팀은 2위로 밀려났고, 결국 히로시마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마키하라는 은퇴 후 이 경기를 "가장 분했던 경기"로 꼽았다.

1987년 등번호를 54번에서 17번으로 변경하고 10승 6패를 기록하며 신인왕을 차지했던 1983년 이후 4년 만에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하며[17]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세이부와의 일본 시리즈 4차전에서는 3안타 11탈삼진 완봉승으로 시리즈 첫 승리를 기록했다.[18] 팀은 2승 4패로 패했지만 마키하라는 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1988년 처음으로 200이닝(208⅓이닝)을 돌파했고, 리그 최다 탈삼진(187개)을 기록했다.

1989년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전반기까지 12승 3패 4세이브, 평균자책점 1.75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그러나 7월 29일 히로시마전에서 오른쪽 무릎 내측 반월판 손상으로 강판당하며[19] 남은 시즌을 치료에 전념해야 했다.[20] 팀은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재활을 거쳐 긴테츠와의 일본 시리즈에 출전했다.[21] 10월 24일 3차전에 등판하며 약 3개월 만에 실전에 복귀했다.[22]

1990년 부상 여파로 4월에 2승을 거두었지만 이후 부진하며 5월 말 2군으로 내려갔다. 여름에 복귀하여 부활했지만, 10월 10일 히로시마전에서 패전 투수가 되며 9승에 그쳤고,[23] 4년 만에 규정 투구 이닝을 채우지 못했다. 세이부와의 일본 시리즈 1차전 선발로 등판했지만, 1회에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에게 3점 홈런을 맞으며 패전의 빌미를 제공했다.[24] 세이부는 4연승으로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데스트라데의 홈런은 "시리즈의 흐름을 결정한 홈런"으로 평가받았다.[25]

1991년 처음으로 개막전 선발 투수로 나섰지만 승패를 기록하지 못했다. 7월 19일 주니치전에서는 8-0으로 앞선 상황에서 구원 투수들의 난조와 나카무라 다케시에게 만루 홈런과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8점 차 역전패를 당했다.[26] 같은 해 올스타전 1차전에서 홈 유니폼을 세탁하고 원정 유니폼을 가져오는 실수를 저질렀다. 2차전 등판 예정이 없어 티셔츠 차림으로 벤치에 있었지만, 경기가 연장전에 돌입하면서 후지타 모토시 감독은 마키하라를 등판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NPB 올스타전은 연장전 없이 9회 종료로 변경되었다.

1992년 2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로 나서 완투승을 거두는 등 전반기에만 10승을 기록하며 3년 만에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했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2승 8패로 부진하며 개인 최다 타이인 12승을 거두었지만 13패를 기록하며 2년 연속 패전이 승리보다 많았다.[29]

1993년 사이토 마사키, 구와타 마스미가 부진한 가운데 개인 최고 성적인 13승, 평균자책점 2.28을 기록하며 팀 최다승을 거두고 FA 권리를 얻었다. 시즌 후 여러 구단의 제안을 받았지만, 요미우리 구단의 미온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FA를 선언했다. 그러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직접 마키하라의 자택을 방문하여 설득했고, 요미우리에 잔류하기로 결정했다. 나가시마 감독은 마키하라의 등번호와 같은 17송이의 장미 꽃다발을 가져갔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20송이였다고 한다.[30]

1994년 5월 18일 후쿠오카 돔에서 열린 히로시마와의 경기에서 '''헤이세이 시대 유일의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인조 잔디 구장 및 돔 구장 최초의 퍼펙트 게임이었으며, TV로 전국에 생중계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이기도 했다. 마키하라는 은퇴 후 "미스터 퍼펙트"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퇴 기자 회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퍼펙트 게임"이라고 밝혔다. 오쿠보 히로모토와 함께 출연한 방송에서는 퍼펙트 게임 달성 전날 외출 금지 위반으로 1개월 외출 금지 징계를 받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더욱 분발했다고 밝혔다.[31] 같은 해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 2차전과 우승 결정 6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2승 무패, 평균자책점 0.50을 기록,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1995년 오프 시즌에 라식 수술을 받은 마키하라는 첫 번째 수술 후 왼쪽 눈에 통증을 느끼고 물체가 이중으로 보이는 증상을 겪었다. 다음 시즌 직전 새로운 콘택트 렌즈를 준비하고 시즌 후 재수술을 받았다.[32]

1996년 6월 19일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와의 경기에서 오토 시게토, 야마자키 다케시, 오토요 야스아키에게 3연속 홈런을 허용했다. 7월에는 가슴 통증으로 입원하여 기흉 진단을 받았다. 마키하라는 구단 트레이너가 전기 침을 너무 깊이 찔러 발생한 사고임을 알면서도 트레이너를 보호하기 위해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구단 측은 마키하라의 명예를 위해 사실을 공개하고 해당 트레이너에게 감봉 등의 처분을 내렸으며, 마키하라에게는 공상을 인정했다.

1997년 팀이 부진한 가운데 팀 최다 타이인 12승을 거두었지만, 개인 최다 피홈런을 기록했다.

1998년 개막 후 부진했던 마키하라는 4월 중순 첫 등판을 했고, 5월 초 시즌 첫 승리이자 통산 150승을 달성했다. 5월 16일 야쿠르트와의 연장전에서 구원 투수를 모두 소진한 상황에서 등판하여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6년 만의 세이브를 기록했다. 이 경기를 계기로 컨디션을 회복한 마키하라는 다음 경기에서 시즌 첫 완봉승을 거두는 등 3연승(통산 4연승)을 기록했다. 이후 팀의 마무리 투수 부재 상황에서 직구, 포크, 슬라이더의 구위를 인정받아 6월 말부터 마무리 투수로 전향했다. 마무리 투수로서 2승 2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2.93(선발: 4승 2패, 평균자책점 4.71)을 기록했다. 27경기 중 23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했고, 세이브 실패로 인한 패전은 한 번뿐이었다. 7월 15일 요코하마전에서는 3점 차 리드를 지키기 위해 8회에 등판했지만 1실점 후 사에키 다카히로를 우익수 뜬공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크가 선언되어 동점 2점 홈런을 허용했고, 9회에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33]

1999년 6월 12일 한신전(한신 고시엔 구장) 12회말 1사 1, 3루 상황에서 신조 쓰요시고의 4구로 거르려 했지만, 신조가 고의 4구를 쳐내 끝내기 안타를 허용했다. 마키하라에게는 이것이 현역 마지막 고의 4구였다.[34] 처음으로 전 경기 구원 등판했지만, 시즌 후반 부진하며 마무리 투수 자리를 구와타 마스미에게 넘겨주었다.

2000년에도 마무리 투수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투구 내용이 좋지 않아 7월 15일 야쿠르트전에서 아웃 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하고 강판되었고, 다리 부상까지 입으며 팀은 역전패를 당했다. 시즌 후반 1군에 복귀한 마키하라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일본 시리즈 1차전에 동점 상황에서 등판했지만, 멜빈 니에베스에게 결승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되었다. 부상 후 일본 시리즈에 맞춰 무리하게 몸을 만들면서 어깨 부상을 입었고, 직구 구속이 130km/h대로 떨어졌다.

2001년 어깨 부상에서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은퇴를 결정했다. 은퇴 경기는 9월 30일 요코하마전이었으며,[35] 같은 해 은퇴를 결정한 사이토 마사키에게 마운드를 넘겼고, 두 사람의 공을 받은 포수는 같은 해 은퇴를 결정한 무라타 신이치였다.

2. 1. 프로 입단 전

오부 고등학교 재학 시절 동기인 쿠도 키미야스(아이치 공업대학 메이덴 고등학교→세이부 6위 지명), 하마다 카즈오(아이치 고등학교→주니치 2위 지명)와 함께 '''아이치 삼우까마귀'''라고 불리며[2] 강속구 투수로 유명했다. 1981년 제53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하여 당시 고시엔 최고 속도 기록인 147km/h를 기록했다.

2. 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82년 ~ 2001년)

198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마키하라는 1년차에는 2군에서 몸을 만드는 데 집중하여 1군 등판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150km/h가 넘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로 구단의 기대를 받았고, 가을에 열린 한신과의 오픈전에서 좋은 투구를 보여주며 자신감을 얻었다.[3]

1983년 봄, 괌 캠프에서 1군 멤버로 선발된 마키하라는 후지타 모토시 감독에게서 크게 휘어지는 커브를 배워 속구를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4] 같은 해, 마키하라는 동기생 요시무라 사다아키, 1살 위인 코마다 노리히로와 함께 등번호에 따라 '''50번 트리오'''라고 불리며 젊은 유망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마키하라는 개막 1군 엔트리에 포함되어 4월 16일 한신과의 경기(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1군 첫 등판 및 첫 선발 등판을 했다. 이 경기에서 연장 10회까지 5안타 9탈삼진 1-0 완봉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5] 4월 24일 야쿠르트전에서도 선발 등판하여 프로 데뷔 후 2경기 연속 완투승을 기록했다.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한 마키하라는 12승 9패 1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고, 기자단 투표에서 압도적인 213표를 얻어 신인왕을 차지했다.[6]

같은 해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 마키하라는 3차전과 6차전에 선발 등판했다.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3차전에서는 6회초 테리 위트필드에게 3점 홈런을 맞으며 5⅓이닝 4실점을 기록했고, 세이부 구장에서 열린 6차전에서는 1회에 선취점을 얻었지만 중반에 역전을 허용하며 6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두 경기 모두 승패는 기록되지 않았다.

1984년 마키하라는 155km/h를 기록하며 당시 일본 최고 속도 기록을 세웠다. 비록 이듬해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한 곽태원이 156km/h를 기록하며 갱신되었지만, 마키하라의 155km/h는 종속 표시였기 때문에 "일본인 최초로 160km/h를 기록하는 것은 마키하라일 것이다"라는 기대를 받았다.[7] 같은 해 미일 야구에서 마키하라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에디 머레이에게 초대형 장외 홈런을 맞기도 했다.

1985년 4월 17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마키하라는 7회말 랜디 바스, 가케후 마사유키, 오카다 아키노부에게 3연속 백스크린 홈런(백스크린 3연발)을 허용했다.[8] 그러나 2개월 후인 6월 28일 같은 경기에서 마키하라는 팀의 구단 기록인 1경기 8홈런, 자신의 현역 시절 유일한 홈런이자 구단 통산 5000호 홈런을 기록하며[9] 1실점 완투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7월 14일 한신전에서 랜디 바스의 타구에 오른쪽 정강이를 맞고 넘어져 왼쪽 고관절 골절상을 입으며[10][11] 시즌을 마감했다.

1986년 마키하라는 개막 직후 2군에서 5경기에 등판하여 33이닝 동안 36탈삼진 6실점을 기록하고,[12] 세이부전 완봉승을 거두는 등 부상 후유증이 없음을 증명하며 5월 4일 1군에 복귀했다. 5월 11일 히로시마전에서 300일 만에 1군 복귀 등판했지만 3⅔이닝 6실점으로 강판당했다.[13] 그러나 8월에 4승 1패 3완봉, 평균자책점 0.63을 기록하며 월간 MVP를 수상하는 등[14] 팀의 주축 투수로 활약하며 히로시마와의 우승 경쟁을 이끌었다. 하지만 10월 7일 야쿠르트전에서 마크 브로하드에게 역전 홈런을 맞으며[15][16] 팀은 2위로 밀려났고, 결국 히로시마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마키하라는 은퇴 후 이 경기를 "가장 분했던 경기"로 꼽았다.

1987년 마키하라는 등번호를 54번에서 17번으로 변경하고 10승 6패를 기록하며 신인왕을 차지했던 1983년 이후 4년 만에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하며[17]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세이부와의 일본 시리즈 4차전에서는 3안타 11탈삼진 완봉승으로 시리즈 첫 승리를 기록했다.[18] 팀은 2승 4패로 패했지만 마키하라는 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1988년 마키하라는 처음으로 200이닝(208⅓이닝)을 돌파했고, 리그 최다 탈삼진(187개)을 기록했다.

1989년 마키하라는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전반기까지 12승 3패 4세이브, 평균자책점 1.75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그러나 7월 29일 히로시마전에서 오른쪽 무릎 내측 반월판 손상으로 강판당하며[19] 남은 시즌을 치료에 전념해야 했다.[20] 팀은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마키하라는 재활을 거쳐 긴테츠와의 일본 시리즈에 출전했다.[21] 10월 24일 3차전에 등판하며 약 3개월 만에 실전에 복귀했다.[22]

1990년 마키하라는 부상 여파로 4월에 2승을 거두었지만 이후 부진하며 5월 말 2군으로 내려갔다. 여름에 복귀하여 부활했지만, 10월 10일 히로시마전에서 패전 투수가 되며 9승에 그쳤고,[23] 4년 만에 규정 투구 이닝을 채우지 못했다. 세이부와의 일본 시리즈 1차전 선발로 등판했지만, 1회에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에게 3점 홈런을 맞으며 패전의 빌미를 제공했다.[24] 세이부는 4연승으로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데스트라데의 홈런은 "시리즈의 흐름을 결정한 홈런"으로 평가받았다.[25]

1991년 마키하라는 처음으로 개막전 선발 투수로 나섰지만 승패를 기록하지 못했다. 7월 19일 주니치전에서는 8-0으로 앞선 상황에서 구원 투수들의 난조와 나카무라 다케시에게 만루 홈런과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8점 차 역전패를 당했다.[26]

같은 해 올스타전 1차전에서 마키하라는 홈 유니폼을 세탁하고 원정 유니폼을 가져오는 실수를 저질렀다. 2차전 등판 예정이 없어 티셔츠 차림으로 벤치에 있었지만, 경기가 연장전에 돌입하면서 후지타 모토시 감독은 마키하라를 등판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NPB 올스타전은 연장전 없이 9회 종료로 변경되었다.

마키하라는 노무라 가쓰야 감독이 올스타전 다음 경기인 요미우리전을 대비해 니시무라 다케시를 등판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27][28] 노무라 감독은 전년도 야쿠르트가 5위를 기록했기 때문에 해당 올스타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1992년 마키하라는 2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로 나서 완투승을 거두는 등 전반기에만 10승을 기록하며 3년 만에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했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2승 8패로 부진하며 개인 최다 타이인 12승을 거두었지만 13패를 기록하며 2년 연속 패전이 승리보다 많았다.[29]

1993년 마키하라는 사이토 마사키, 구와타 마스미가 부진한 가운데 개인 최고 성적인 13승, 평균자책점 2.28을 기록하며 팀 최다승을 거두고 FA 권리를 얻었다. 시즌 후 마키하라는 여러 구단의 제안을 받았지만, 요미우리 구단의 미온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FA를 선언했다. 그러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직접 마키하라의 자택을 방문하여 설득했고, 마키하라는 요미우리에 잔류하기로 결정했다. 나가시마 감독은 마키하라의 등번호와 같은 17송이의 장미 꽃다발을 가져갔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20송이였다고 한다.[30]

1994년 5월 18일 후쿠오카 돔에서 열린 히로시마와의 경기에서 마키하라는 '''헤이세이 시대 유일의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인조 잔디 구장 및 돔 구장 최초의 퍼펙트 게임이었으며, TV로 전국에 생중계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이기도 했다. 마키하라는 은퇴 후 "미스터 퍼펙트"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키하라는 은퇴 기자 회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퍼펙트 게임"이라고 밝혔다. 오쿠보 히로모토와 함께 출연한 방송에서는 퍼펙트 게임 달성 전날 외출 금지 위반으로 1개월 외출 금지 징계를 받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더욱 분발했다고 밝혔다.[31]

같은 해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 마키하라는 2차전과 우승 결정 6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2승 무패, 평균자책점 0.50을 기록,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1995년 오프 시즌에 라식 수술을 받은 마키하라는 첫 번째 수술 후 왼쪽 눈에 통증을 느끼고 물체가 이중으로 보이는 증상을 겪었다. 다음 시즌 직전 새로운 콘택트 렌즈를 준비하고 시즌 후 재수술을 받았다.[32]

1996년 6월 19일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와의 경기에서 마키하라는 오토 시게토, 야마자키 다케시, 오토요 야스아키에게 3연속 홈런을 허용했다. 7월에는 가슴 통증으로 입원하여 기흉 진단을 받았다. 마키하라는 구단 트레이너가 전기 침을 너무 깊이 찔러 발생한 사고임을 알면서도 트레이너를 보호하기 위해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구단 측은 마키하라의 명예를 위해 사실을 공개하고 해당 트레이너에게 감봉 등의 처분을 내렸으며, 마키하라에게는 공상을 인정했다.

1997년 마키하라는 팀이 부진한 가운데 팀 최다 타이인 12승을 거두었지만, 개인 최다 피홈런을 기록했다.

1998년 개막 후 부진했던 마키하라는 4월 중순 첫 등판을 했고, 5월 초 시즌 첫 승리이자 통산 150승을 달성했다. 5월 16일 야쿠르트와의 연장전에서 구원 투수를 모두 소진한 상황에서 등판하여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6년 만의 세이브를 기록했다. 이 경기를 계기로 컨디션을 회복한 마키하라는 다음 경기에서 시즌 첫 완봉승을 거두는 등 3연승(통산 4연승)을 기록했다. 이후 팀의 마무리 투수 부재 상황에서 직구, 포크, 슬라이더의 구위를 인정받아 6월 말부터 마무리 투수로 전향했다.

마무리 투수로서 마키하라는 2승 2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2.93(선발: 4승 2패, 평균자책점 4.71)을 기록했다. 27경기 중 23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했고, 세이브 실패로 인한 패전은 한 번뿐이었다. 7월 15일 요코하마전에서는 3점 차 리드를 지키기 위해 8회에 등판했지만 1실점 후 사에키 다카히로를 우익수 뜬공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크가 선언되어 동점 2점 홈런을 허용했고, 9회에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33]

전국 중계가 많은 팀의 특성상, 마키하라는 작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일부 언론에서 "안 되는 마신"(개 얼굴을 하고 있어 "개 마신"이라고도 불림)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는 당시 요코하마의 마무리 투수 사사키 가즈히로의 별명인 "하마의 마신"을 빗댄 표현이었다. 계약 갱신 기자 회견에서 마키하라는 다음 해에도 마무리 투수로 등판할 가능성이 높아 "200승은 포기하겠다"라고 발표했다.

1999년 6월 12일 한신전(한신 고시엔 구장) 12회말 1사 1, 3루 상황에서 마키하라는 신조 쓰요시고의 4구로 거르려 했지만, 신조가 고의 4구를 쳐내 끝내기 안타를 허용했다. 마키하라에게는 이것이 현역 마지막 고의 4구였다.[34] 마키하라는 처음으로 전 경기 구원 등판했지만, 시즌 후반 부진하며 마무리 투수 자리를 구와타 마스미에게 넘겨주었다.

2000년에도 마키하라는 마무리 투수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투구 내용이 좋지 않아 7월 15일 야쿠르트전에서 아웃 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하고 강판되었고, 다리 부상까지 입으며 팀은 역전패를 당했다. 시즌 후반 1군에 복귀한 마키하라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일본 시리즈 1차전에 동점 상황에서 등판했지만, 멜빈 니에베스에게 결승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되었다. 부상 후 일본 시리즈에 맞춰 무리하게 몸을 만들면서 어깨 부상을 입었고, 직구 구속이 130km/h대로 떨어졌다.

2001년 마키하라는 어깨 부상에서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은퇴를 결정했다. 은퇴 경기는 9월 30일 요코하마전이었으며,[35] 마키하라는 같은 해 은퇴를 결정한 사이토 마사키에게 마운드를 넘겼고, 두 사람의 공을 받은 포수는 같은 해 은퇴를 결정한 무라타 신이치였다.

2. 3. 기타 경력

은퇴 후 TBS TV 및 TBS 라디오에서 야구 해설위원, 스포츠 닛폰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3. 투구 스타일

2군에서 몸 만들기에 전념했던 프로 1년차에는 등판 기회가 없었지만, 150km/h를 넘는 강속구 투수로서 구단으로부터 기대를 받았다.[3] 프로 2년차인 1983년 봄 괌 캠프에서 1군에 선발된 후, 감독 후지타 모토시로부터 크게 휘어지는 커브를 배워 속구를 살릴 수 있게 되었다.[4]

프로 5년차인 1986년 후반부터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삼았고, 1992년경부터는 주자가 없어도 세트 포지션에서 던지는 투구 스타일로 변경했다. 150km/h를 넘는 직구는 잘 던지지 않게 된 반면, 사사구 허용률은 대폭 개선되었고, 포크볼, 드물게는 슬로 커브도 섞어가며 삼진을 잡는 투수로 활약했다.

입단 초기부터 슬라이더를 던졌지만 제대로 휘지 않았고, 빠지면 가장 위험한 공이었기 때문에 경기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1986년, 스카우터 코마츠 토시히로가 시노즈카 토시오의 슬라이더를 칭찬하는 것을 듣고, 시노즈카에게 던지는 법을 배워[37] 보통보다 좁혀서, 스피드가 나오는 슬라이더를 구사하게 되었다.

신인 시절, 니시모토 사토시는 "역대 봤던 투수 중에, 확실히 마키가 공이 가장 빠르다. 데뷔 당시에는 에가와 씨보다 위라고 생각했다"고 평가했다. 하라 다쓰노리는 2001년 9월 30일 마키하라의 은퇴 세레모니에서 "마키하라 군, 1군의 마운드에서 처음 던졌을 때 150km의 직구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찬사를 보냈다.

한편, 고마쓰 다쓰오는 자신이 타석에 섰던 경험을 바탕으로 "마키하라는 스피드건은 빠르지만 에가와 씨에 비하면 별것 아니네"라고 평가했다.[36]

4. 주요 기록

연도소속 팀경기선발완투완봉무4구승리패전세이브홀드승률타자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고의4구사구탈삼진폭투보크실점자책점평균자책점WHIP
1983요미우리 자이언츠31259301291--.571764184.01651966261241183753.671.26
19842724520890--.471646145.21432072341146083764.701.48
19851413510470--.36440692.194104621573143414.001.52
19862215632960--.600453114.088829411251032292.291.03
198721215211060--.625582140.11321238411324056533.401.21
19882727114110130--.435843208.21701143871876063502.161.02
1989211714401244--.750592150.2113633421414134301.790.97
19901715601950--.643440102.110773203872048453.961.36
1991252511209120--.429781186.017620590101527376703.391.26
19922926122012131--.480858196.01922180451594088783.581.39
199328245301350--.722715173.214917531417512054442.281.16
199429267411280--.600762185.01691249671535262582.821.18
199526258211180--.579768190.21672244931454067612.881.11
19961818410660--.500519122.1113185331927057564.121.36
199725244111290--.571614150.21402336321152262583.461.17
19983691116418--.60033281.167122302770339363.981.11
19994500004323--.57117841.14041131554114132.831.23
2000210000019--.0008119.21516112030994.121.09
200110000000------10.100000100000.000.00
통산:19년46333411335915912856--.554103352485.022402437735761211175149708823.191.21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3]


; 첫 기록

; 기념비적인 기록

  • 통산 1000투구 이닝 : 1989년 6월 27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0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19]
  • 통산 1000탈삼진 : 1991년 6월 16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9차전(기타큐슈 시민 구장), 3회초에 미야자토 후토시로부터 (역대 82번째)[26]
  • 통산 1500투구 이닝 : 1992년 9월 1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1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역대 133번째)[29]
  • 통산 100승 : 1993년 7월 13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4차전(삿포로 시 마루야마 구장), 선발 등판으로 8이닝 무실점 (역대 107번째)[51]
  • 통산 1500탈삼진 : 1994년 5월 31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7차전(도쿄 돔), 5회초에 니무라 도루로부터 (역대 36번째)
  • 통산 2000투구 이닝 : 1995년 7월 31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8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역대 72번째)
  • 통산 2000탈삼진 : 1998년 6월 18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4차전(도쿄 돔), 1회초에 이노우에 가즈키로부터 (역대 15번째)
  • 통산 150승 : 1998년 5월 5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4차전(도쿄 돔), 선발 등판으로 7과 2/3이닝 3실점 (역대 42번째)


; 기타 기록

  • 퍼펙트 게임 : 1994년 5월 18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7차전(후쿠오카 돔) (역대 15번째)
  • 첫 홈런: 1985년 6월 28일, 대 한신 타이거스 13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7회 초에 구도 가즈히코로부터 (구단 통산 5,000호)[9]
  • 통산 보크 수: 14 (센트럴 리그 기록)
  • 올스타전 출장 : 6회(1988년, 1989년, 1991년, 1992년, 1994년, 1999년) (모두 감독 추천으로 선출)


마키하라 히로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19년간 선수 생활을 했으며, 통산 463경기에 등판하여 159승 128패 56세이브, 평균자책점 3.19를 기록했다. 특히 1988년에는 187개의 탈삼진으로 리그 1위를 기록했다.[3]

4. 1. 타이틀

타이틀횟수연도
탈삼진왕1회198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의 마키하라 히로미일본어는 프로 5년차인 1986년 후반부터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삼았고, 1992년경부터는 주자가 없어도 세트 포지션에서 던지는 투구 스타일로 변경했다.[37]

4. 2. 수상

연도수상 내용
1983년신인왕
1986년월간 MVP (8월)
1987년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988년월간 MVP (5월)
1989년월간 MVP (5월)
1994년일본 시리즈 MVP


4. 3. 개인 기록

마키하라 히로미의 개인 통산 첫 기록, 주요 기록, 기타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첫 기록

; 기념비적인 기록

  • 통산 1000투구 이닝 : 1989년 6월 27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0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3]
  • 통산 1000탈삼진 : 1991년 6월 16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9차전(기타큐슈 시민 구장), 3회초에 미야자토 후토시로부터 ※역대 82번째[3]
  • 통산 1500투구 이닝 : 1992년 9월 1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1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역대 133번째[3]
  • 통산 100승 : 1993년 7월 13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4차전(삿포로 시 마루야마 구장), 선발 등판으로 8이닝 무실점 ※역대 107번째[3]
  • 통산 1500탈삼진 : 1994년 5월 31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7차전(도쿄 돔), 5회초에 니무라 도루로부터 ※역대 36번째[3]
  • 통산 2000투구 이닝 : 1995년 7월 31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8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역대 72번째[3]
  • 통산 2000탈삼진 : 1998년 6월 18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14차전(도쿄 돔), 1회초에 이노우에 가즈키로부터 ※역대 15번째[3]
  • 통산 150승 : 1998년 5월 5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4차전(도쿄 돔), 선발 등판으로 7과 2/3이닝 3실점 ※역대 42번째[3]


; 기타 기록

  • 퍼펙트 게임 : 1994년 5월 18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7차전(후쿠오카 돔) ※역대 15번째[3]
  • 첫 홈런: 1985년 6월 28일, 대 한신 타이거스 13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7회 초에 구도 가즈히코로부터 ※구단 통산 5,000호[51]
  • 통산 보크 수: 14 ※센트럴 리그 기록[3]
  • 올스타전 출장 : 6회() ※모두 감독 추천으로 선출[3]


통산 19년간의 투구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도소속 팀경기선발완투완봉무4구승리패전세이브홀드승률타자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고의4구사구탈삼진폭투보크실점자책점평균자책점WHIP
1983요미우리 자이언츠31259301291--.571764184.01651966261241183753.671.26
19842724520890--.471646145.21432072341146083764.701.48
19851413510470--.36440692.194104621573143414.001.52
19862215632960--.600453114.088829411251032292.291.03
198721215211060--.625582140.11321238411324056533.401.21
19882727114110130--.435843208.21701143871876063502.161.02
1989211714401244--.750592150.2113633421414134301.790.97
19901715601950--.643440102.110773203872048453.961.36
1991252511209120--.429781186.017620590101527376703.391.26
19922926122012131--.480858196.01922180451594088783.581.39
199328245301350--.722715173.214917531417512054442.281.16
199429267411280--.600762185.01691249671535262582.821.18
199526258211180--.579768190.21672244931454067612.881.11
19961818410660--.500519122.1113185331927057564.121.36
199725244111290--.571614150.21402336321152262583.461.17
19983691116418--.60033281.167122302770339363.981.11
19994500004323--.57117841.14041131554114132.831.23
2000210000019--.0008119.21516112030994.121.09
200110000000------10.100000100000.000.00
통산:19년46333411335915912856--.554103352485.022402437735761211175149708823.191.21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3]
  • 'NPB올스타' 템플릿 제거됨[3]

5. 평가 및 영향

마키하라 히로미는 데뷔 초부터 강속구 투수로 주목받았다. 1983년에는 신인왕을 수상했고, 1984년에는 당시 일본 최고 속도인 155km/h를 기록하며 '일본인 최초로 160km/h를 기록할 투수'라는 기대를 받았다.[7] 그러나 1985년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3연속 홈런을 맞고, 같은 해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하는 등 시련도 겪었다.[8][10][11]

1986년 부상에서 복귀한 후에도 꾸준히 활약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1987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우수 선수상을 받기도 했다.[18] 1988년에는 리그 최다 탈삼진을 기록하며 에이스 투수로 자리매김했다.[17]

하지만 1989년 다시 무릎 부상을 당하며 위기를 맞았다.[19][20] 1990년에는 부상 여파로 부진했지만, 이후 다시 재기에 성공하며 꾸준히 선발 로테이션을 지켰다.

마키하라는 약시로 인해 시력이 매우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콘택트 렌즈나 안경 착용을 꺼려 포수의 사인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투구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39][40]

참조

[1] 웹사이트 会社概要 https://office-consu[...] 2024-03-25
[2] 서적 "'85プロ野球 12球団全選手百科名鑑" 日本スポーツ出版社 1985-03-31
[3] 뉴스 晴れの開幕"1軍キップ" 躍り出た50番トリオ 読売新聞 1983-04-08
[4] 뉴스 SBO 掛布も脱帽 "第4の投手"へ期待十分 読売新聞 1983-04-17
[5] 뉴스 槙原熱投、完封デビュー 10回を5安打9奪三振 読売新聞 1983-04-17
[6] 뉴스 MVPは原(セ・リーグ)と東尾(パ・リーグ) 新人王に槙原(巨人)と二村(日ハム) 読売新聞 1983-11-10
[7] 간행물 『永久保存版・日本プロ野球名投手100人』槙原寛己の項目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89
[8] 웹사이트 元阪神・バース氏「僕らのおかげで君は有名に」バックスクリーン3連発を浴びせた槙原氏をいじる https://www.daily.co[...] 株式会社デイリースポーツ 2023-03-30
[9] 뉴스 巨人・槙原が球団通算5000本塁打 読売新聞 1985-06-29
[10] 뉴스 巨人・槙原が左股関節負傷 読売新聞 1985-07-15
[11] 뉴스 槙原が股関節骨折で入院 読売新聞 1985-07-18
[12] 뉴스 槙原10か月ぶりに一軍昇格 読売新聞 1986-05-04
[13] 뉴스 槙原4回KO 300日ぶり先発飾れず 日刊スポーツ 1986-05-11
[14] 뉴스 セ、槙原とクロマティ 月間MVP パは石毛が3度目 読売新聞 1986-09-07
[15] 서적 『パーフェクトとKOのあいだ - ここ一番の投球心理』 光文社
[16] 뉴스 巨人痛恨の1敗、首位滑る 読売新聞 1986-10-07
[17] 뉴스 YGリポート 一味違った槙原 偵察隊も『オヤ?』 読売新聞 1987-10-17
[18] 뉴스 槙原快投!西武止める 奪11三振、3安打完封 読売新聞 1987-10-30
[19] 뉴스 巨人・槙原寛己投手(二五)が右ひざ痛で退場 読売新聞 1989-07-30
[20] 뉴스 槙原、今季は絶望 半月板損傷で近く手術 読売新聞 1989-08-01
[21] 뉴스 日本シリーズ出場有資格選手 読売新聞 1989-10-20
[22] 뉴스 『先発したい』槙原 読売新聞 1989-10-25
[23] 뉴스 槙原10勝届かず 巨人、公式戦を終了 広島2位確保 読売新聞 1990-10-11
[24] 뉴스 SBO 槙原ー中尾 不用意な棒ダマ 読売新聞 1990-10-19
[25] 뉴스 流れは一球で決まった 読売新聞 1990-10-25
[26] 뉴스 SOB 両チームの今季を象徴 槙原8回ついに沈む 読売新聞 1991-07-20
[27] 웹사이트 槙原寛己氏 オールスターの恥ずかしい思い出「Tシャツで登板…」ノムさんと藤田元司監督のやりとりも暴露 https://www.sponichi[...] 株式会社デイリースポーツ 2024-07-21
[28] Youtube https://www.youtube.[...]
[29] 서적 ベースボール・レコード・ブック1993
[30] 블로그 スポニチFLASH photo & blog スポニチBlog 槙原寛己のベースボール見聞録|上原、今年はその身をチームに捧げてよ! http://blog.sponichi[...]
[31] 뉴스 ジャイアンツ広場 動画 YOMIURI ONLINE(読売新聞) https://web.archive.[...]
[32] 간행물 『[[주간플레이보이]]』2009/06/15호 集英社 2009-06-15
[33] 서적 著書 パーフェクトとKOのあいだ
[34] 뉴스 新庄のサヨナラ敬遠打は「絶対にベースを踏んでいた」と槙原 https://www.news-pos[...] 2015-08-23
[35] 웹사이트 槙原寛己 Gの“50番トリオ”から“先発三本柱”へ/プロ野球1980年代の名選手 {{!}} 野球コラム https://column.sp.ba[...] 2019-03-27
[36] Youtube 第二話 小松辰雄さんが絶対勝てないと思ったピッチャー https://www.youtube.[...] 2021-04-12
[37] 간행물 G党ワクワク対談 槙原寛己VS堀内恒夫 150キロは捨てた。それよりチームの勝利! 週刊ベースボール 1986-09-15
[38] 웹사이트 “G魂”注入!?元巨人選手 東海大臨時コーチに https://www.sponichi[...]
[39] 웹사이트 元巨人・槙原氏が告白 “プロ生活20年間ずっと・・・・・・” http://snn.getnew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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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서적 勝負の方程式 小学館 1994-06-01
[42] 서적 全力投球:我が選んだ道に悔いはなし 宝島社 2001
[43] 서적 クセ者:元木大介自伝 双葉社 2006-03
[44] 방송 山本昌との対談「すべらない話」 2008-12-15
[45] 웹사이트 槙原寛己氏 「墓場まで持っていくつもりだった」衝撃告白 血染め熱投の裏で起きていた「前夜の大事件」 https://www.sponichi[...] 2023-07-29
[46] 웹사이트 元巨人軍夫婦 引退後の人生SP https://web.archive.[...]
[47] 웹사이트 槙原寛己氏、完全試合の佐々木朗希に大あっぱれ「まだまだやる可能性は十分…だから怖い」 https://www.nikkansp[...] 2022-04-17
[48] 웹사이트 佐々木朗希の完全試合に28年前達成の槙原寛己さんは脱帽「大アッパレ…今回見て参ったと。拍手を送ることしかない」 https://www.chunichi[...] 2022-04-17
[49] 웹사이트 槙原 寛己(読売ジャイアンツ) {{!}} 個人年度別成績 https://npb.jp/bi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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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웹사이트 5000号は槙原寛己/巨人の記念本塁打一覧 https://www.nikkansp[...] 2017-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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