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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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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존욱은 사타족 출신으로, 오대 십국 시대 후당의 초대 황제이다. 그는 당나라 말기 군벌이었던 이극용의 아들로, 908년 이극용의 사망 이후 진왕의 지위를 계승하여 후량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923년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후당으로 정했으며, 같은 해 후량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 부흥을 시도하며 무장들의 반발을 샀고, 926년 반란으로 인해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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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욱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고궁명화선췌』에서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이존욱(李存勖)
(정보 없음)
소자아자(亞子)
묘호장종(莊宗)
시호광성신민효황제(光聖神閔孝皇帝)
출생일885년 12월 2일
사망일926년 5월 15일
매장지옹릉(雍陵; 현재의 허난성 신안현)
정치
왕조전진(908–923)
후당(923–926)
연호동광(同光)
재위 기간923년 5월 13일 – 926년 5월 15일
즉위일동광 원년 음력 4월 25일 (923년 5월 13일)
폐위일동광 4년 음력 4월 1일 (926년 5월 15일)
선대 군주(없음)
후대 군주이사원
묘호장종(莊宗)
가계
이(李)
(정보 없음)
부황이극용
모후정간황후 조씨
황후신민경황후 유씨
진왕 (晋王)
재위 기간908년 2월 23일 – 923년 5월 13일
선대 군주이극용
기타 정보
출생지잉저우 잉현 (현재의 산시성 잉현)
사망 장소뤄양

2. 생애

이극용이 908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이존욱이 진왕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당시 후량주전충이극용의 오랜 숙적이었는데, 이존욱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후량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후량 내부에서는 주전충의 실정이 거듭되고 후계자 문제로 내분이 발생하는 등 혼란이 가중되어 이존욱에게 영토를 점차 빼앗겼다. 이존욱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연왕을 칭하던 유인공 세력을 먼저 공격하여 병합하였다.

923년, 세력을 키운 이존욱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당(大唐)이라 하여 나라를 세웠다. 이는 역사에서 후당으로 불린다. 같은 해 윤 4월 말, 이사원이 이끄는 5,000명의 기병이 후량을 기습 공격했다. 후량은 왕언장을 총사령관, 단의(段凝)를 부사령관으로 삼아 10만 정병으로 맞섰으나, 양류(楊劉)에서의 격전 끝에 이존욱이 이끄는 후당군에게 대패하였고 왕언장은 중도현(中都縣)에서 참수되었다. 923년 11월 19일, 후당군이 후량의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면서 후량은 멸망하였다.

이극용당나라로부터 이(李)씨 성을 하사받은 것을 근거로, 이존욱은 자신이 당나라의 정통 후계자임을 내세워 후당을 건국했다. 후량을 멸망시킨 후, 기왕(冀王)을 자칭하던 이무정 세력과 사천 지역을 지배하던 전촉을 차례로 멸망시키며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러나 이존욱은 당나라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생각에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고, 주전충이 폐지했던 환관 감찰 제도를 군대에 부활시키는 등 무장 세력의 불만을 사는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불만이 쌓여 926년 무장들이 이사원(훗날 명종)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사원의 군대가 수도 낙양으로 진격하자, 이존욱은 자신의 금군(근위병)에게 살해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2. 1. 출생과 성장

돌궐계 사타족 출신으로, 사타족의 수장이자 후기 당나라의 주요 군벌이었던 이극용의 장남이다. 885년 당 소종 황제 치세에 진양(현 산시성 태원)에서 이극용의 첩이었던 조태부인 소생으로 태어났다.[1]

895년, 아버지 이극용이 왕행유, 이모진, 한건 등 세 군벌을 토벌하는 원정에 나섰을 때, 이존욱은 당 소종 황제에게 조공 사절로 파견되었다. 당시 세 군벌은 수도 장안을 점거하고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상 위조도와 이희를 살해한 상태였다. 당 소종은 어린 이존욱의 모습을 보고 그를 어루만지며 "그대는 국가의 기둥이 될 것이다. 황실에 충성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7] 이극용이 세 군벌을 평정한 후, 이존욱은 사공 작위를 받았고, 서주(隰州), 분주(汾州), 진주(晉州, 모두 현 산시성 린펀)의 자사를 차례로 제수받았으나 실제로 부임하지는 않은 명예직이었다. 그는 음악에 조예가 깊어 종종 아버지 앞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며, 춘추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도 갖추었다. 성장하면서 승마활쏘기에도 능숙해졌다.[1]

이존욱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감하며 상황 판단이 빨랐다고 전해진다.[8] 902년경, 오랜 숙적인 주전충(선무군 절도사)에게 연이어 패배하며 낙담한 아버지 이극용에게, 공개적으로 좌절하는 모습은 군사와 백성들의 사기만 떨어뜨릴 뿐이니 조용히 힘을 기르며 주전충이 실책을 저지르기를 기다려 대응하는 것이 낫다고 조언했다. 또한 사타족 병사들의 약탈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으나, 이극용은 병사들의 규율을 잡으려다 군대가 흩어질 것을 우려하여 당시에는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8]

906년, 주전충이 또 다른 주요 군벌인 유인공(노룡군 절도사)을 공격하여 그의 아들 유수문(의창군 절도사)이 지키던 창주(滄州, 현 허베이성 창저우)를 포위했다. 과거 이극용에게 반기를 들었던 유인공이 도움을 요청하자, 이극용은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이존욱은 당시 주전충의 세력이 너무 강성하여 대부분의 군벌이 그에게 복속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진나라와 유인공의 연나라만이 몇 안 되는 저항 세력임을 지적했다. 그는 주전충의 팽창을 막고 아버지 이극용이 관용을 베푼다는 명분까지 얻을 수 있다며 유인공을 도와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존욱의 설득에 이극용은 동의했고, 유인공에게 군대를 보내는 대신 주전충의 영지인 소의절도사(昭義, 현 산시성 창즈)를 함께 공격하여 후방을 교란할 것을 제안했다. 유인공이 이를 받아들여 실행에 옮겼다. 이후 이극용이 소의의 수도인 노주(潞州)를 공격하자, 904년 당 소종 시해 사건으로 주전충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소의절도사 정회가 이극용에게 항복했다. 이로 인해 주전충은 유인공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9]

907년, 주전충당 애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후량을 건국하여 황제가 되었다. 주전충은 자신이 당나라를 계승한 정통 군주임을 내세웠으나, 이극용(진), 이모진(제), 양악(회남절도사, 현 장쑤성 양저우), 왕건(서천절도사, 현 쓰촨성 청두) 등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각자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했다. 주전충은 곧이어 장수 강회정을 보내 이극용이 소의절도사로 임명했던 이존욱의 양사촌 이사소가 지키는 노주를 포위하게 했다. 강회정은 노주성 주변에 참호를 깊게 파고 벽을 높이 쌓아 외부와의 통신을 차단했다. 이극용주덕위에게 구원군을 보내 맞서 싸우게 했으나, 일부 성과에도 불구하고 포위를 풀지는 못했다.

908년(개평 2년) 봄, 이극용은 병세가 위독해졌다. 그는 아들 이존욱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동생 이계녕, 환관 장승업, 양아들 이존장, 관료 오공(吳珙), 비서관 루지(盧質) 등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이극용은 이존욱에게 이사소를 구원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거듭 강조하며 숨을 거두었고, 이존욱이 진양에서 진왕의 자리를 계승했다.[4] 이극용은 임종 시 이존욱에게 세 개의 화살을 주며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화살로는 유주에서 연왕을 자칭한 유인공을, 두 번째 화살로는 거란태조 야율아보기를, 마지막 세 번째 화살로는 후량의 태조 주전충을 멸망시키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이존욱은 건화 3년(913년)에 유인공의 아들이자 권력을 찬탈한 유수광을 멸망시키고 유주 지역을 평정했다. 거란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이후 후량과의 항쟁에 주력하게 된다.

2. 2. 진왕(晉王) 시대 (908년 ~ 923년)

이극용이 908년에 사망하자, 아들 이존욱이 진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당시 22세였던 이존욱은 아버지의 오랜 숙적이었던 후량주전충에 맞서야 했다. 초기에는 내부적으로 권력 기반이 불안정했다. 아버지 이극용의 동생이자 숙부인 이극녕(李克寧)은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많은 장수와 병사들은 젊은 이존욱을 따르지 않고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존욱은 두려움을 느껴 이극녕에게 군 지휘권을 넘기려 했으나, 이극녕은 자신이 이존욱을 지지함을 내세우며 거절했다. 이극녕과 환관 장승업(張承業)의 주장에 따라 이존욱은 공식적으로 진왕과 하동 절도사(河東節度使) 칭호를 받았다.[4]

그러나 이존욱의 양아들 중 다수는 그보다 나이가 많고 군사적 경험도 풍부하여 그를 존경하지 않았다. 李存顥|리춘하오중국어(이존호)와 같은 일부 양자들은 이극녕에게 직접 군권을 잡으라고 부추겼고, 이극녕의 아내 맹부인(孟夫人)까지 설득에 넘어가 이극녕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극녕은 점차 장승업 등과 정책적으로 대립하며 갈등을 빚었고, 이존욱의 승인 없이 장교 李存質|리춘지중국어(이존질)를 살해한 뒤 대동 절도사(大同節度使, 현재의 다퉁, 산시성) 자리를 요구하여 받아내기도 했다.[4]

이극녕을 중심으로 한 음모는 계속되었다. 이존호는 이존욱을 사로잡아 그의 어머니 조태후와 함께 후량에 넘기고 하동 지역을 차지할 계획을 세웠고, 이극녕도 이를 알고 있었다. 이극녕은 장교 史敬鎔|시징룽중국어(사경용)에게 접근하여 음모에 가담하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사경용은 이를 이존욱에게 밀고했다. 이존욱은 어머니 조태후, 장승업과 상의한 끝에 이극녕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장승업은 이존장(李存璋), 오공(吳珙), 이존경(李存敬), 주수인(朱守殷) 등과 함께 거사를 준비했다.[4] 908년 3월 25일,[2] 이존욱은 연회를 열어 고위 장교들을 초청한 뒤, 미리 매복시킨 군사들을 동원하여 이극녕과 이존호를 체포하고 처형했다. 이로써 내부의 가장 큰 위협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4]

내부 정리가 마무리될 무렵, 후량군은 진나라의 중요 거점인 락주(潞州, 현재의 산시성 창즈)를 포위하고 있었다. 주전충은 이극녕의 죽음으로 진나라 내부가 혼란스러울 것이라 예상하고 포위를 풀었으나, 이존욱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섰다. 이존욱의 군대와 주덕위(周德威)의 군대가 양쪽에서 협공하자 후량군은 크게 패하고 물러났으며, 락주의 포위는 풀렸다.[4]

이후 이존욱은 내정 개혁과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 송나라의 역사가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당시 이존욱의 통치를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4]

"그는 각 현과 군에 명하여 선하고 재능 있는 인재를 추천하게 하고, 탐욕스럽고 잔인한 관리들을 내쫓았다. 세금 부담을 줄이고, 약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위로하며, 불의하고 지나친 것들을 바로잡으니 나라 안이 잘 다스려졌다. 하동은 땅이 작아 군사 자원이 부족했으므로,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했다. 기병들에게는 행군 시 말을 아끼게 하고, 적을 보기 전에는 말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명령과 임무가 내려지면 모든 병사들은 정해진 대로 따르고, 범위를 넘어서거나 임무를 바꾸거나, 특정 장소에 머무르거나 위험을 피해서는 안 되었다. 병사들을 여러 부대로 나누어 공격할 때는 정해진 시간에 집결해야 했고, 약속된 시간보다 15분 이상 늦으면 처형되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그는 결국 태항산 동쪽 영토를 정복하고 황하 남쪽 땅을 차지할 수 있었으니, 그에게는 잘 훈련된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존욱은 비록 당나라 황제는 없었지만, 과거 소종 황제가 아버지 이극용에게 부여했던 권한을 활용하여 당나라 황제의 이름으로 제국의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환관 장승업을 깊이 신뢰하여 형님처럼 대우했다.[4]

이 시기 이존욱은 주변 세력과의 관계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유수문(劉守文)과 그의 동생 유수광(劉守光) 사이의 내전에 관여했으며,[10] 후량의 주요 장수였던 유지준이 기나라(岐)에 투항하자 이무정(李茂貞)의 기나라와 연합하여 후량을 공격하기도 했다.[10]

910년 말, 이존욱에게 후량에 맞설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주전충은 자신의 봉신인 조왕(趙王) 왕융과 의무절도사(義武節度使) 왕처직(王處直)을 의심하여 그들의 영토를 빼앗으려 했다. 주전충은 유수광의 위협을 막아준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북진시켜 왕융의 영토인 深州|선저우중국어(심주)와 冀州|지저우중국어(기주)를 점령하고 그곳의 수비대를 학살했다. 이에 놀란 왕융은 즉시 이존욱과 유수광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유수광은 거절했지만, 이존욱은 주덕위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고, 이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10] 911년 봄, 진(晉), 조(趙), 의무(義武) 연합군은 박향(柏鄉, 현재의 허베이성 싱타이)에서 후량의 주력군을 격파했다. 이 승리로 이존욱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고, 조나라와 의무는 사실상 진나라의 동맹국이 되었다. 이들은 후량에 맞서기 위해 당나라의 연호인 天佑|톈유중국어(천우)를 계속 사용했다.[10]

한편, 세력이 커진 유수광은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왕융과 왕처직에게 자신을 '상부'(尚父, 황제의 아버지)로 부르도록 강요했다. 이존욱은 유수광의 교만함을 이용하여 그를 고립시키려는 전략을 세웠다. 왕융, 왕처직 등과 함께 유수광에게 '상부' 칭호를 올리는 공동 청원을 올려 그의 자만심을 더욱 부추겼다.[11] 911년 가을, 유수광은 마침내 스스로 연나라의 황제를 선포했다. 이존욱은 주덕위를 보내 조, 의무 군대와 연합하여 연나라를 공격하게 했고, 자신도 직접 참전했다. 이 와중에 주전충은 912년 아들 주유규(朱友珪)에게 암살당하는 내부 혼란을 겪었다. 후량의 장군 주유건(朱友謙)은 주유규에게 반발하여 진나라에 투항했고, 이존욱은 그를 도와 주유규가 보낸 공격군을 격퇴하기도 했다.[11]

913년 여름, 주덕위는 연나라의 수도 유주(幽州, 현재의 베이징)를 포위했다. 유수광은 이존욱이 직접 오면 항복하겠다고 했으나, 이존욱이 도착했음에도 항복하지 않았다. 결국 유주는 함락되었고, 도망치던 유수광과 그의 가족은 체포되어 태원(太原)으로 압송된 후 처형되었다. 이존욱은 연나라 영토를 병합하고 주덕위를 노룡절도사(盧龍節度使)로 임명했다. 이 승리로 그의 위세는 더욱 높아졌고, 왕융과 왕처직은 그에게 '상서령'(尚書令)이라는 높은 벼슬을 제안했다. 이는 과거 당 태종이 가졌던 직위로, 신하로서는 감히 받기 어려운 영예였다. 이존욱은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결국 받아들이고, 임시 중앙 정부를 세워 마치 황제처럼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13]

그러나 진나라의 동맹 내부에서도 위기가 발생했다. 921년, 조나라의 왕융이 부하 장수와 환관의 반란으로 살해당하고, 그의 양자였던 장문리(원래 이름 왕덕명)가 권력을 잡았다.[12] 장문리는 이존욱에게 복종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이존욱은 왕융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장문리를 공격했다. 장문리는 충격으로 병사했고, 그의 아들 장처진(張處瑾)이 저항을 이어갔다.[12] 비슷한 시기, 의무절도사 왕처직 역시 진나라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여 비밀리에 거란과 손잡으려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그의 양자 왕도(王都)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처직을 감금하고 권력을 장악한 뒤 이존욱에게 복종했다. 이존욱은 왕도를 의무절도사 대리로 임명하여 의무 지역을 사실상 복속시켰다.[12]

이후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가 왕처직의 아들 왕유(王郁)의 꼬임에 넘어가 진나라를 침공했다. 이존욱은 조나라의 수도 진주(鎮州) 포위를 계속하면서도 직접 군대를 이끌고 거란군과 맞서 싸워 격파했다. 거란군이 물러나자 고립된 성덕(조나라) 반란군은 결국 진압되었다.[12] 이 과정에서 진나라는 사건당(史建瑭), 안금전(安金全), 이사조(李嗣昭), 이존진(李存進) 등 여러 명장들을 잃는 큰 손실을 입었다. 특히 이존심(李存審)과 이사원(李嗣源)은 후량군 대사원(戴思遠)의 공격을 막아내며 분전했다. 진주 함락 후 이존욱은 장처진 형제를 처형하고 성덕(조나라) 지역을 완전히 병합했다.[12]

하지만 명장 이사조의 죽음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그의 아들 이계도(李繼韜)는 이존욱의 명령을 어기고 아버지의 관을 노주(潞州)로 옮긴 뒤, 자의(昭義) 절도사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존욱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절도사 이름을 안의(安義)로 바꾸고 이계도를 절도사 대리로 임명했지만,[12] 이계도는 결국 후량에 투항했다. 후량 황제 주진은 이를 크게 기뻐하며 절도사 이름을 광의(匡義)로 바꾸고 이계도를 정식 절도사로 임명했다. 이 사건은 이존욱이 황제를 칭하기 직전,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음을 보여주었다.[5]

2. 3. 후당(後唐) 황제 시대 (923년 ~ 926년)

923년 봄, 이존욱은 위주(魏州중국어)에서 당(唐)황제를 자칭하며 후당을 건국했다. 이는 당나라로부터 아버지 이극용이 이(李)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점을 내세워 당의 정통 계승자임을 주장한 것이다. 역사에서는 이를 후당이라고 부른다. 그는 위주를 흥당부(興唐중국어)로 개명하고 임시 수도로 삼았다.[5] 당시 요나라의 빈번한 침입과 노주(潞州, 안의)의 이계도가 후량에 투항하는 등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다.[5]

그러나 후량의 장교 노순미(盧順密중국어)가 투항하여 후량의 후방인 천평군(天平軍, 현 산둥성 태안) 운주(鄆州중국어)의 방비가 허술하다는 정보를 제공했다. 이존욱은 이를 기회로 삼아 이사원에게 기습을 명했고, 이사원은 운주를 성공적으로 점령했다.[5] 이에 충격받은 후량 황제 주진은 총사령관을 왕언장으로 교체했으나, 측근들의 모함으로 곧 단녕으로 다시 바꿨다.[5] 단녕은 후당에 대한 대규모 반격을 계획했지만, 투항한 장수 강언소에 의해 계획이 누설되었다.[5] 이존욱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운주로 가서 이사원과 합류한 뒤, 중도(中都, 현 산둥성 제녕)에서 후량군 주력인 왕언장과 장한걸(張漢傑중국어)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들을 사로잡았다.[5] 곧바로 무방비 상태가 된 후량의 수도 대량으로 진격하자, 황하 북쪽에 발이 묶인 단녕의 구원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절망한 주진은 부하 황보린(皇甫麟중국어)에게 자신을 죽이라 명하고 자결함으로써 후량923년 11월 19일에 멸망했다.[5] 이존욱은 대량에 입성하여 후량의 모든 영토를 차지하고 수도를 뤄양으로 옮겼다.[5] 그는 오(吳)전촉에도 승리를 알렸으며,[5]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계도는 처형했다.[5]

924년, 산시성 지역에서 기(齊)나라 왕을 칭하던 이무정이 후당의 강성함에 위협을 느끼고 스스로 신하가 되기를 청하자, 이존욱은 이를 받아들이고 그를 진왕(秦王)으로 봉했다. 이무정이 같은 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이계엄이 풍상절도사 자리를 잇도록 허락했지만 왕의 칭호는 주지 않아 사실상 기나라는 후당에 흡수되었다.[5][15][16] 925년에는 쓰촨성전촉을 정복하기로 결정하고, 아들 이계지를 명목상 총사령관으로, 곽숭도를 실질적인 지휘관으로 삼아 공격을 개시했다.[15] 후당군의 연이은 승리에 전촉 황제 왕종연은 당황했고, 결국 전촉의 장군 왕종비가 왕연을 사로잡아 후당에 항복하면서 전촉은 멸망했다.[18] 이로써 후당은 화북과 사천을 아우르는 오대십국 시대 최대 판도를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존욱은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었던 반면, 통치에는 미숙함을 드러냈다.[15][17] 그는 총애하는 유황후와 함께 사치하며 재물을 모으는 데 집중하여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15][17] 또한 스스로 연극을 좋아하여 배우와 환관들을 지나치게 신임하고 중용하면서, 오랜 전장에서 생사를 함께 했던 무장들을 소외시켰다.[15][17] 심지어 배우 세 명을 지주(知州)로 임명하는 등 공신들에 대한 보상이 편파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15][17] 과거 주전충이 폐지했던 군대 내 환관 감찰 제도를 부활시킨 것도 무장들의 큰 불만을 샀다. 이러한 실정은 오(吳)의 사신 노빈(盧蘋중국어), 형남절도사 고계흥, 남한의 사신 하사(何詞중국어) 등 외부에서도 감지될 정도였다.[5][15]

전촉 정복 이후, 이존욱과 유황후는 공이 큰 곽숭도가 촉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의심했다. 이존욱은 망설였으나, 유황후는 독단적으로 이계지에게 곽숭도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계지는 이를 실행했다. 이후 이존욱은 곽숭도를 비난하는 조서를 내리고 그의 아들들까지 처형했다.[18] 얼마 지나지 않아 환관과 배우들이 이계린 장군이 곽숭도와 공모했다고 모함하자, 이존욱은 이계린과 그의 가족마저 처형했다.[18]

잇따른 공신 숙청은 후당 군 전체에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마침 당시 후당 중심부에는 극심한 기근이 발생했는데, 유황후가 구휼 자금 방출을 거부하면서 병사들의 가족들까지 굶어 죽는 사태가 벌어져 황제와 황후에 대한 원망은 극에 달했다.[18] 결국 926년 각지에서 반란이 터져 나왔다. 촉 지역에서는 전촉 정벌에 참여했던 장수 강연효(康延孝)가 반란을 일으켰고(곧 진압됨), 옛 수도였던 예도(鄴都, 흥당부)에서는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18] 예도 반란 진압에 어려움을 겪자 이존욱은 이사원을 파견했지만, 오히려 이사원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사원을 반란군에 가담하도록 강요했다.[18] 이사원은 남하하여 변주(汴州)를 점령했고, 이 소식을 들은 이존욱은 낙담하여 뤄양으로 돌아갔다.[18] 낙양으로 돌아온 직후, 장교 곽종겸(郭從謙중국어)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존욱은 직접 반란군과 싸우려 했으나 전투 중 화살에 맞았고, 그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했다.[18] 얼마 후 이사원이 낙양에 도착하여 처음에는 섭정을 칭하다가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후당 명종).[3] 유황후는 도주했으나 추격당해 자결을 명받았고, 이계지 역시 군사들에게 버려져 자살했다.[3] 이존욱의 어린 아들들은 맹지상에게 몸을 의탁했다.[19]

3. 가족 관계


  • '''조부''' : 헌조(獻祖) 문경황제(文景皇帝) 이국창(李國昌)
  • '''조모''' : 문경황후(文景皇后) 진씨(秦氏)
  • '''부친''' : 태조(太祖) 무황제(武皇帝) 이극용(李克用) (856년 ~ 908년)
  • '''모친''' : 정간황후(貞簡皇后) 조씨(曹氏)
  • '''형제'''
  • 영왕 이존패
  • 옹왕 이존미
  • 설왕 이존례
  • 신왕 이존악
  • 목왕 이존의
  • 통왕 이존확
  • 아왕 이존기
  • 이존구

  • '''배우자'''

구분봉호시호성씨(이름)별칭생몰년도비고
황후황후(皇后)신민경황후(神閔敬皇后)유씨(劉氏)
(유옥랑/劉玉娘)
위국부인(魏國夫人)? ~ 926년
정실(원래)숙비(淑妃)한씨(韓氏)위국부인(衛國夫人)? ~ 947년장종의 원래 정실. 황후로 추존되지 않음.
후궁덕비(德妃)이씨(伊氏)연국부인(燕國夫人)? ~ 947년
후궁소의(昭儀)후씨(侯氏)견국부인(汧国夫人)후에 천부인(汧夫人)
후궁소용(昭容)하씨(夏氏)괵국부인(虢國夫人)후에 국부인(國夫人), 이찬화의 아내
후궁소원(昭媛)백씨(白氏)기국부인(沂國夫人)후에 의부인(沂夫人)
후궁출사(出使)등씨(鄧氏)서부인(西夫人)
후궁어정(御正)장씨(張氏)양부인(梁夫人)
후궁시진(侍眞)주씨(周氏)송부인(宋夫人)
후궁시진(侍真)오씨(吳氏)연령부인(延齡夫人)
후궁의재(懿才)왕씨(王氏)태원부인(太原夫人)
후궁함일(咸一)한씨(韓氏)창려부인(昌黎夫人)
후궁요방(瑤芳)장씨(張氏)청하부인(清河夫人)
후궁의덕(懿德)왕씨(王氏)낭야부인(瑯琊夫人)
후궁선일(宣一)마씨(馬氏)부풍부인(扶風夫人)
후궁시정(誓正)곽씨(郭氏)
기타시씨(柴氏)곽위의 황후가 됨
기타곽씨(郭氏)후량 황제 주우정의 비
기타이씨(李氏)맹지상의 측실이 됨


  • '''자녀'''
  • * 아들

순서봉호이름생몰년도생모별칭비고
1남?미상불명
2남?미상불명
3남위왕(魏王)이계급(李繼岌)909년? ~ 926년신민경황후 유씨흥성태자(興聖太子)
4남수왕(守王)이계동(李繼潼)? ~ 926년?불명926년 행방불명
5남광왕(光王)이계숭(李繼嵩)? ~ 926년?불명926년 행방불명
6남진왕(眞王)이계첨(李繼嶦)? ~ 926년?불명926년 행방불명
7남천왕(川王)이계요(李繼嶢)? ~ 926년?불명926년 행방불명


  • * 딸

순서봉호이름생몰년도생모부마비고
1녀의녕공주(義寧公主)미상? ~ 953년불명송정호(宋廷浩)북송 효장황후의 할머니


4. 연호

원년2년3년4년


5. 평가

이존욱은 아버지 이극용을 뛰어넘는 명장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쇠락하던 후량의 내분을 틈타 영토를 점령하고 마침내 923년 후량을 멸망시켰다. 같은 해 뤄양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국호를 (후당)이라 정하고, 924년에는 산시성의 이무정을 복속시키고 925년에는 쓰촨성전촉을 멸망시키는 등 군사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통해 후당은 화북과 사천을 아우르는 오대십국 시대 최대 판도를 실현했다.

그러나 뛰어난 무장으로서의 능력과 달리 정치가로서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내정에 무관심하여 측근인 공겸에게 모든 것을 맡겼는데, 이로 인해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와 악정이 행해졌다. 또한, 당 현종처럼 연극에 심취하여 스스로를 '이천하(李天下)'라 칭하며 연극을 즐겼고, 당나라 문화를 동경하여 수도를 뤄양으로 옮기고 환관을 중용하는 등 만당(晩唐)의 폐단을 답습했다. 특히 군인의 감찰 역할까지 환관에게 맡기면서 군부의 큰 불만을 샀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이러한 실정은 결국 파국을 불렀다. 유능한 무장이었던 추밀사 곽숭도가 환관의 참소와 황후 유씨의 개입으로 926년 억울하게 처형당했고, 이계린 역시 공겸의 참소로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충신들의 숙청은 큰 파장을 일으켜 각지에서 반란이 잇따랐다.

반란이 확산되자 장종은 이극용의 양자였던 이사원에게 진압을 명했으나, 오히려 이사원은 군인들에게 차기 황제로 추대되었다. 수도 뤄양은 보급로가 끊겨 고립되었고, 결국 장종은 흥교문의 변이라 불리는 금군의 반란으로 살해당했다. 그의 유해는 훗날 이사원에 의해 옹릉에 매장되었다.

6. 기타

이존욱의 시 4수가 송나라의 책인 《존전집》(尊前集, Collection of Respecting the Old)에 보존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2]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3] 서적 Zizhi Tongjian
[4] 서적 Zizhi Tongjian
[5] 서적 Zizhi Tongjian
[6] 서적 Cihai
[7] 서적 Zizhi Tongjian
[8] 서적 Zizhi Tongjian
[9] 서적 Zizhi Tongjian
[10] 서적 Zizhi Tongjian
[11] 서적 Zizhi Tongjian
[12] 서적 Zizhi Tongjian
[13] 서적 Zizhi Tongjian
[14] 서적 Zizhi Tongjian
[15] 서적 Zizhi Tongjian
[16] 서적 Timeline of Chinese History
[17] 서적 Outlines of the History of the Chinese
[18] 서적 Zizhi Tongjian
[19] 서적 Qing Yi 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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