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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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쿠가와 이에사토는 1863년 도쿠가와 요시요리의 아들로 태어나, 1868년 도쿠가와 종가의 16대 당주가 되었다. 슨푸 번주와 시즈오카 지번사를 거쳐, 폐번치현 이후에는 영국 유학을 다녀왔다. 1890년 귀족원 의원이 되었으며, 1903년부터 1933년까지 귀족원 의장을 역임하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여했다. 그는 일본 적십자사 총재, 일미 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사회 활동에도 기여했으며, 1940년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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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사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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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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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공작, 종1위 |
출생 이름 | 도쿠가와 가메노스케 |
출생일 | 1863년 8월 24일 |
출생지 | 에도, 도쿠가와 막부 |
사망일 | 1940년 6월 5일 |
사망지 | 센다가야, 도쿄시, 일본 제국 |
배우자 | 고노에 히로코 (1867–1944) |
자녀 | 도쿠가와 이에마사, 도쿠가와 야스코, 도쿠가와 료코, 도쿠가와 도시코 |
친척 | 동생: 도쿠가와 다쓰타카 (귀족원 의원) 동생: 도쿠가와 요리미치 (귀족원 의원) 사위: 다카쓰카사 노부스케 (귀족원 의원) 사위: 마쓰다이라 야스마사 (귀족원 의원) |
경력 | |
직책 | 귀족원 의장 시즈오카 번 번지사 |
재임 기간 | 1903년 12월 4일 – 1933년 6월 9일 (귀족원 의장) |
이전 | 고노에 아쓰마로 공작 (귀족원 의장) |
이후 |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 (귀족원 의장) |
귀족원 의원 | 1890년 2월 - 1940년 6월 5일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 무소속 → ) 화요회 |
학력 | |
출신 학교 | 이튼 칼리지 |
가문 | |
가문 | 도쿠가와 씨 (다야스 도쿠가와 가 → 도쿠가와 종가) |
기타 정보 | |
존칭 | 종1위, 공작 |
훈장 | 대훈위 국화대수장 |
묘소 | 도쿄도다이토구우에노의 간에이지 |
2. 생애
도쿠가와 이에사토는 1863년 에도 성에서 타야스 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4] 유년 시절 이름은 가메노스케였다. 아버지는 쇼군 후견직을 맡고 있었으며, 이에사토는 13대, 14대 쇼군의 재종형제였다.
1865년, 형의 사망으로 타야스 가문을 상속받았다. 1866년 쇼군 이에모치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이에사토가 종가 상속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어린 나이 때문에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15대 쇼군이 되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요시노부를 대신하여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받고 슨푸 번주가 되었다.[4] 슨푸 번은 시즈오카 번으로 개칭되었고, 이에사토는 지번사가 되었다. 슨푸에서 시즈오카 학문소에서 공부하고 검술 훈련을 받았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도쿄로 이주했고,[4] 1877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5] 이튼 칼리지 등에서 공부하며 서구 문물을 접했다. 1882년 귀국하여 고노에 다다후사의 장녀와 결혼하고,[5] 1884년 공작 작위를 받았다.
1890년 제국 의회가 개설되면서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5] 1903년부터 1933년까지 귀족원 의장을 역임했다. 귀족원 의장 재임 중 총리 후보로 추천받았으나 사퇴했다.[5]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에 일본 전권 대사로 파견되었다.[6]
1920년대에는 전국수평사의 사작(辞爵) 운동에 직면했다. 전국수평사는 도쿠가와 가문에게 작위 반납을 요구했으나, 이에사토는 이를 거부했다.
1933년, 우익 단체의 압력과 건강 문제 등으로 귀족원 의장직을 사임했다.[26]
이후 일본 적십자사 사장, 도쿄 올림픽 조직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7] 1940년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종1위 대훈위 국화대수장이 추증되었다.[28]
2. 1. 탄생과 가문 상속
1863년(분큐 3년) 7월 11일, 에도성의 타야스 저택에서 타야스 가 제5대 당주 도쿠가와 요시요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4] 유아명은 '''가메노스케'''였다. 요시요리는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쇼군 후견직을 맡았으며, 막부 요직에 있었다. 어머니는 타카이 타케코였다. 이에사토는 이에모치 및 제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재종형제에 해당한다.1865년(겐지 2년) 2월 5일, 친형 스미치요가 요절하여 타야스 가문을 상속했다. 1866년 (게이오 2년) 쇼군 이에모치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이에모치의 측근 및 오오쿠의 덴쇼인과 오토시요리 타키야마 등은 이에모치의 유언에 따라 도쿠가와 종가와 혈통이 가까운 가메노스케의 종가 상속을 원했다. 그러나 불과 4세의 유아로는 국정 다난의 시기에 국정을 운영하기 어렵다는 이유와 세이칸인노미야 및 웅번 다이묘 등의 반대로 히토쓰바시 가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제15대 쇼군에 취임했다.
2. 2. 슨푸 번주, 지번사 시절
1868년 윤4월 29일, 대정봉환, 왕정복고, 에도 개성을 거쳐 신정부로부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대신하여 도쿠가와 종가 상속을 허가받았다. 당시 만 나이로 6세였다.[4] 일족의 전 쓰야마 번주 마쓰다이라 나리아키라 등이 후견역을 맡았다.5월 18일에 가메노스케(亀之助)에서 '''이에사토'''로 개명했다. 5월 24일에는 슨푸 번주로 70만 석을 받았다. 그 영지는 당초 스루가 국 일원과 도토미 국・무쓰 국의 일부였지만, 9월 4일에 무쓰 국을 대신하여 미카와 국의 일부로 변경되었다.
8월 9일 중로 오쿠보 이치오, 오메츠케 가토 히로조 등 약 100명을 거느린 행렬을 이끌고 에도를 출발하여 도쿠가와 가문과 관련된 땅인 스루가 후추(현: 시즈오카시아오이구)로 향했다. 6세의 이에사토를 수행한 오코쇼가시라(御小姓頭取) 이타미 데쓰야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카메노스케 전하의 행렬을 바라보는 군중, 그것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도야바(問屋場, 역참)는 어느 곳이나 인부들이 넘칠 정도로 나와 있었다. 임금 따위의 불평을 말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것이 마지막 봉공이라고 말하고 싶은 모습이었다. 도중에 만나는 여러 다이묘들도 다양했는데, 일행의 장칼를 멈추고 문을 여는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붉은 머리를 쓰고 비단 조각을 붙인 병사가 일행과 스쳐 지나가면서 길가의 나무에 있는 새를 쏘는 총소리의 무시무시함.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 카메노스케 전하였다.}}[14]
연로 여중인 하쓰이는 가마에서 고고(五人囃子) 인형 같은 오캇파 머리가 나와서 "저것은 무엇, 이것은 무엇"이라고 길가의 풍경을 신기하게 물었고, 이에 대해 좌우에서 여러 사람이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고 전해진다.[15]
에도에 있던 하타모토나 고케닌 등 구 막신은, 무기, 탄약이나 돈을 챙겨 도망간 반정부 세력을 제외하고 크게 3가지 길이 있었다.
선택지 | 설명 | 해당자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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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 종사하여 조신으로 전향 | 5,000호 정도 | |
이에사토를 따라 슨푸로 이주하여 슨푸(시즈오카) 번사가 되는 길 | 12,000호 정도 | |
번에 휴가를 요청하고 농공상에 종사 | 번에 휴가를 요청한 자 중에는 생활의 어려움이나 당초 계획대로 되지 않아 나중에 번에 귀참한 자도 있다. | 3,600호 정도 |
500석 이상의 고록 하타모토의 대부분이 조신으로 전향한 반면, 끗발 없는 구 막신에게 슨푸 이주가 많았다. 70만 석의 슨푸 번에서 이 정도 규모의 가신단을 녹봉제로 거느리는 것은 곤란했기 때문에, 녹봉제는 폐지하고, 앞으로는 역직자에게는 역봉, 불근자에게는 부치미(扶持米)를 지급하는 것을 번사들에게 통지했다. 대부분을 차지하는 불근 번사(불근이지만 "근번조"라는 명칭으로 조직되었다)에게는 농공업 등의 직업에 종사하는 것을 허가했다. 그 때문에 부치미가 적은 불근 번사는 농공업 종사, 부업 등을 통해 생계를 꾸렸다.
이에사토가 슨푸에 도착한 것은 10월 5일이었지만, 11월에는 구 에도성의 도쿄성(황거)으로 돌아와 메이지 천황을 알현했다. 하코다테고료카쿠에 틀어박힌 에노모토 다케아키 일당의 토벌을 명받았지만, 슨푸로 이주한 지 얼마 안 된 가신들에게 하코다테 원정은 어려웠기 때문에, 후견역인 마쓰다이라 나리아키라가 이에사토의 출병 면제를 청원하는 서류를 제출했고, 타야스 가문의 당주로 돌아와 있던 아버지 요리토모와 잇키 가문 당주 도쿠가와 시게에가 연명으로 이에사토를 대신하여 출진할 것을 청원하여 허락받아, 이에사토의 출진은 면제되었다.
11월 18일, 종4위 하사콘에곤쇼쇼에 서임, 같은 날 다시 종3위 사콘에곤츄조로 승진. 12월 5일에 다시 에도를 출발하여 슨푸로 향했다.
1869년(메이지 2년) 4월 6일에 다시 도쿄에 도착하여 13일에 구 사카키바라 가문 저택을 번저로 받았다. 14일에 도쿄를 출발하여 슨푸로 돌아갔다. 이 유수 중인 6월에 슨푸는 시즈오카로 개칭. 또한 판적봉환에 따라 1869년(메이지 2년) 6월, 시즈오카 번 지번사에 취임하고, 동시에 화족에 추가되었다.
시즈오카에 있는 이에사토의 주거는 처음에는 전 성대(元城代) 저택이었지만, 1869년 7월에 아사마 신사 앞의 신관 신고 헤이부 저택("미야가사키 고주거(御住居)"라고 불렸다)으로 옮겨갔고, 전 성대 저택은 번청이 되었다. 슨푸성 내의 고용담소에는 매월 10일 정도 출근하여, 무슨 서류인지도 모른 채 서류에 도장을 찍는 공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그 공무일 이외에는 번교인 시즈오카 학문소에서의 학문이나, 오노파 잇토류의 아사리 요시아키, 신가타도류의 나카조 가게요 등의 지도에 의한 검술 훈련에 힘썼다. 가끔 유람도 가서, 시미즈 항까지 가서 미호노 마츠바라의 하고로모노 마쓰를 감상하거나, 어부의 그물질을 구경하기도 했다.
당시 이에사토를 오쿠즈메・가신으로 섬겼던 서양화가 가와무라 기요오는 이에사토는 매우 얌전한 아이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밤에는 남자 가신들만 대기하는 방에서 잤지만, 울거나 하는 일도 없이, 가와무라와 "손님 놀이"를 하며 놀았다고 한다. 번 중신들의 상담 결과, 구래 쇼군 가문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던 육식도 건강을 위해 내기로 결정되어, 이에사토는 쇠고기 경단을 넣은 맑은 국 등을 먹게 되었다.
1869년 7월에 정부가 전국의 번에 대해 번정과 지번사 개인의 가정을 분리하여 공사의 구분을 두도록 명령한 직원령을 공포함에 따라, 이에사토의 "미야가사키 고주거"와 요시노부의 "고야초 고주거"에 근무하고 있던 번사들은 개인적인 사용인으로서 가정에 전념하게 되었고,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9월 6일에 오소바요닌은 가령, 오코쇼가시라・오요닌나미・오쿠즈메가시라는 가부, 오코쇼는 1등 가신, 오쿠즈메는 2등 가신으로 개명되었다. 번 재정과 번주 개인의 가계도 제도상으로는 분리되었지만, 실제로는 시즈오카 번의 회계방이 양쪽을 일원 관리했으므로, 결국 2년 후의 폐번치현까지 제대로 된 분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2. 3. 폐번치현 이후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으로 시즈오카 번 지사직에서 면직되어 도쿄로 이주했다.[4] 1877년 (메이지 10년) 6월 13일 요코하마항에서 프랑스의 증기선을 타고 영국 유학을 떠났다.[5] 가와다 히로시, 다케무라 킨고, 오쿠보 사부로, 야마모토 야사부로 등이 동행했다. 8월 14일 런던에 도착, 8월 28일에는 스코틀랜드・에든버러로 이동하여 개인 교습을 받았다. 이후 이튼 칼리지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학생들의 모의 의회에 큰 감명을 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진학은 오해로 보이며, 실제로는 런던 교외의 시드넘 칼리지에서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영어로 일본에 편지를 보내는 등 영어에 능숙했으며, 지방 의회를 방청하거나 런던 거리를 걷기도 했다.1878년 (메이지 11년) 8월부터 9월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프랑스에서는 파리 만국 박람회를 견학하고, 미토 도쿠가와 가의 도쿠가와 아키타케에게 파리 안내를 받았다. 마키노 노부아키와도 친분을 쌓았다.
1882년 (메이지 15년), 덴쇼인이 고노에 다다후사의 장녀 야스코와의 혼인을 주선하고, 이에사토에게 귀국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진학을 희망했지만, 유학을 중단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5] 1884년 (메이지 17년), 화족령 제정으로 공작 작위를 받았다.
2. 4. 귀족원 의장
1890년 (메이지 23년) 제국 의회가 개설되면서 도쿠가와 이에사토는 귀족원 의원으로 취임했다.[5] 1903년에는 고노에 아쓰마로의 뒤를 이어 제4대 귀족원 의장이 되었다.[5] 이후 1933년까지 30년 이상 귀족원 의장직을 수행하며, 각 파벌 간의 조정과 의회 운영에 힘썼다.귀족원 의장 재임 중,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이 총사퇴한 후 원로 회의에서 후임 총리로 추천받았으나, 행정 경험 부족과 자신감 부족을 이유로 사퇴했다.[5] 그는 "다시 도쿠가와의 정권이 만들어지는 것은 시대에 역행한다"라고 말하며 사퇴했다고 한다.
이에사토는 귀족원 의장으로서 일본의 입헌 정치사를 되돌아보며 제국 의회가 "국운의 진전, 민복의 증진"에 기여했고, 그중에서도 귀족원은 "동일한 안건을 신중하게 심의하는 실적을 거두거나 혹은 중의원의 결의가 편향되려는 것을 교정하는 효력을 거두거나 혹은 타원을 견제하여 의회 선제의 폐해로부터 면하게" 해왔다고 평가했다. 이에사토에게 있어 이러한 효과가 "양원 제도의 묘미"였다.
이에사토가 의장을 맡았던 30년간은 계원 내각으로 시작하여, 헌정의 상도의 종언과 거의 일치한다. 그동안, 초연 내각, 중간 내각, 정당 내각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내각이 탄생했지만, 귀족원은 그것들과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협조해왔다. 의장인 이에사토는 그러한 메이지 입헌제의 진전에 대응하기 위해, 정치 과정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피하면서, 이토 히로부미가 『헌법 의해』에서 제시한 것처럼 귀족원이 내각과 중의원 사이의 "상하 조화의 기관"이 되도록 중재하고, 원활한 의회 운영이 이루어지도록 필요한 협의의 장을 주최하려고 계속 노력했다. 원내에서도 각 회파에 "공정"하며, 의장에서는 의원의 자치를 존중하고, 결정된 "원의"에 순종하는 의장이 되려고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정당 정치의 등장과 호헌 운동에 의한 귀족원 비판의 고조로 귀족원이 "상하 조화의 기관"이 되는 데 어려움이 생기자, 이에사토는 새로운 시대의 귀족원의 모습을 다시 질문하며, 귀족원은 국민의 신임에 기초하여 성립한 정당 내각을 지원하는 온건한 제2원으로 이행시키려는 모색을 시작했다. 그러나 헌정의 상도기에 일어난 것은 빈번한 정당의 부패 사건과 그에 따른 정당 정치 자체에 대한 불신의 증대였다. 만주 사변을 계기로 국민의 지지는 정당을 떠나 군으로 옮겨갔다. 이에사토가 의장을 퇴임한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이에사토는 귀족원은 중의원과 달리 체면을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의장에서 "노"라든가 "히야히야"와 같은 찬반의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을 매우 싫어했으며, 박수도 제지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귀족원 의원들의 성명, 경력, 성격까지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정치 평론가 우자키 구마키치는 1913년에 이에사토가 귀족원 의장으로서 의원들을 대하는 태도는 "정벌 대장군의 300명의 제후를 대하는 것과 같고, 몹시 위압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인물로서는 특별히 칭찬할 만한 것은 없지만, 의장으로서는 확실히 충실이라는 두 글자를 씌우기에 족하다"라고 평가하며, 특히 의장을 정리한다는 의장의 본분에 관해서는 "공사에 있어서는 공은 또한 일점의 정의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하여, 그 공평성을 "이상적인 의장의 태도"라고 평가했다. 또한 중의원 의원 오자키 유키오는, 중요한 의사가 있을 경우에는 중의원 방청석에 반드시 이에사토의 모습이 있었고, 근면함에 감탄했다고 말했다.
1931년에 고노에 후미마로가 귀족원 부의장에 취임했을 때의 신문 보도에 의하면, 나이 든 후의 이에사토는 용변으로 자리를 비우는 빈도가 늘어났기 때문에 부의장은 언제라도 대신할 수 있도록 대기해야 했고,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한다.
2. 5. 워싱턴 회의 전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에사토는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에 일본 전권 대사로 파견되었다.[6] 그는 미국이 제안한 해군력 10:10:6 배분안을 지지했는데, 이는 영국과 일본 내 극우 및 보수 세력의 강한 반발을 샀다.[6]
2. 6. 전국수평사의 사작(辞爵) 운동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에는 노동 운동, 농민 운동과 더불어 부락 차별 해방 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1922년 결성된 전국수평사는 이러한 움직임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전국수평사는 역대 도쿠가와 쇼군의 잘못된 정치로 인해 황실과 백성들 사이에 차별이 생겨 부락 차별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1925년 전국수평사 제3회 대회에서는 도쿠가와 가문에게 작위를 반납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3월부터 4월 사이, 규슈 전국수평사 위원장 마쓰모토 지이치로가 도쿠가와 이에사토의 저택을 방문했지만, 이에사토는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마쓰모토는 가신에게 결의안을 전달하고 답변을 요구했지만, 아무런 답변도 받지 못했다.
7월 9일, 마쓰모토와 그의 동료 2명은 권총과 단도를 소지하고 이에사토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마쓰모토 등은 암살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하며 재판을 대심원까지 끌고 갔지만, 결국 1926년 3월에 징역 4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이에사토는 7월 25일 전국수평사 대표들과 처음 만나 "자신이 공작 작위를 받은 것은 천황 폐하의 뜻이므로, 함부로 작위를 반납하는 것은 천황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며 작위 반납을 거부했다.
9월 20일 새벽, 도쿠가와 공작 저택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본채 건물이 거의 다 타버렸다. 처음에는 누전이 원인으로 추정되었지만, 다음 해에 마쓰모토의 신세를 졌던 청년이 방화범으로 체포되어 징역 1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도쿠가와 사건).
2. 7. 귀족원 의장 퇴임
1931년(쇼와 6년), 도쿠가와 이에사토가 귀족원 의장에 재임되었을 때, 원내에서는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26]1933년 5월 8일, 우익 단체 대화회의 나카무라 고타 등이 도쿠가와 저택을 방문하여 "권고서"를 제출하고 이에사토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이 "권고서"의 내용은 불분명하지만, 이후 관계자들의 대응으로 보아 이에사토의 의장직 진퇴에 영향을 미치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쿠가와 가문에서는 경시청에 대화회 단속과 이에사토 보호를 요청했다.[26]
이에사토는 구체제 타파와 천황 친정 국가의 수립을 노리는 민간 우익 및 황도파 청년 장교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들의 이데올로그인 기타 잇키의 『일본 개조 법안 대강』에는 화족 및 귀족원의 폐지가 명시되어 있었고, 이에사토는 그 정점에 위치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워싱턴 체제 구축에 기여한 친영미파였기 때문에 "군측의 간신"의 대표 격으로 인식되었다.[26]
5월 31일, 대화회 회장 이와타 후미오(기타 잇키의 부하)가 도쿠가와 저택을 방문했다. 이와타는 대화회가 "권고서"를 제출한 것을 사죄하고 그 반환을 요구하는 한편, 이 문제에 경시청이 개입한다면 "오히려 사단을 복잡하게 하거나 사실을 폭로하는 우려가 있다"라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대응한 도쿠가와 공작가의 가령(家令) 나리타 가쓰로(成田勝郎)는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라고만 답했다.[26] 이와타는 전화로 『도쿄 매일 신문』에 관련 기사 준비가 되어 있으며, 도쿠가와 가문에서 "긴급 대책을 강구해 주시기를 바란다"라고 알려왔다.[26] 도쿠가와 가문에서는 대화회의 협박에는 일절 응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경시청으로서는 대화회가 "부당한 범위"에 이르렀을 경우에만 처음으로 단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가문의 의향에 충분히 따를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대화회가 "폭로 전술"을 취하기 전에 이에사토는 신속히 사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26]
6월에 들어서자 신문 지면에서도 이에사토의 의장 사임이 거론되었는데, 그 이유로는 건강 문제가 거론되었고, 6월 2일에 개최된 도쿠가와 가문의 가사 상담역회를 거쳐 비공식적으로 사이토 마코토 수상에게 사임 의사가 전달되었다고 한다.[26] 6월 9일, 이에사토는 의장을 사임했다. 표면상으로는 의장 재임 30년을 계기로 한 사임으로 되어 있어서 큰 소동으로 번지지 않았다.[26]
2. 8. 기타 활동
1913년(다이쇼 2년)에 은사 재단 자생회 회장, 1915년(다이쇼 4년)에 메이지 신궁 봉찬회 회장에 취임했다.[27] 1921년(다이쇼 10년)에는 대한 축구 협회(현재의 일본 축구 협회)의 명예 회장으로서 그 발족에 참여했다. 1929년 (쇼와 4년) 11월에는 제6대 일본 적십자사 사장에 취임했다.[7] 1933년 (쇼와 8년) 8월에는 이듬해 도쿄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제15회 적십자·적신월 국제대회(아시아 최초의 국제회의)에 대한 협력을 구하기 위해 구미로 떠나, 이듬해 4월 5일에 요코하마 항으로 귀국했다. 1936년 (쇼와 11년) 12월에는 1940년 도쿄 올림픽 유치 성공에 따라 도쿄시와 대한체육회(현재의 일본 스포츠 협회) 등을 중심으로 설립된 "제12회 올림픽 도쿄 대회 조직 위원회"의 위원장에 취임했다.[7]2. 9. 사망
薨去일본어 전인 1940년(쇼와 15년) 6월 5일 오전 0시 4분, 급성 폐렴으로 76세로 사망했다.[28] 다음 날인 6일 오전 10시 30분, 쇼와 천황은 칙사 및 시종 고데 히데쓰구(小出英経)를 도쿠가와 저택에 파견하여 조문하고, 종1위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추증했다.[28]장례는 11일 우에노 간에이지에서 거행되었다. 오전 10시 50분경 센다가야 저택을 떠난 영구차는 요쓰야 오오키도, 이치가야 미쓰케, 스이도바시, 마쓰스미초를 경유하여 간에이지에 들어갔다. 간에이지 근처에서는 에도 소방 기념회 회원 약 150명이 반텐을 입고 키야리로 전송했다. 장례는 오후 1시부터 거행되었으며, 상주는 장남 이에마사, 장례 위원은 해군 대장 이데 겐지가 맡았다. 요나이 미쓰마사 수상도 조문객으로 참석했다.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고별식이 거행되었다. 참례자는 3500명을 넘어 부근 일대에서 자동차 정체가 발생했다. 유해는 제2영묘 경내의 도쿠가와 가문 역대 묘지에 매장되었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도쿠가와 요시요리 |
어머니 | 다카이 다케코 |
양아버지 | 도쿠가와 이에모치 |
양어머니 | 가즈노미야 지카코 |
부인 | 고노에 히로코 (1867–1944) |
장남 | 도쿠가와 이에마사 |
장녀 | 도쿠가와 야스코 (다카쓰카사 노부스케와 결혼) |
차녀 | 도쿠가와 료코 (마쓰다이라 야스마사와 결혼) |
삼녀 | 도쿠가와 도시코 (마쓰다이라 나오쿠니와 결혼) |
4. 평가
도쿠가와 이에사토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귀족원 의장으로서 장기간 재임하며 정계 안정에 기여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는 1877년 영국 이튼 칼리지에서 유학하며 서구 문물을 접했으며,[5] 1890년 일본 귀족원이 창설되자 의원이 되었고, 1903년부터 1933년까지 귀족원 의장을 역임했다.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이 지멘스 사건으로 무너지자, 후임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다시 도쿠가와의 정권이 만들어지는 것은 시대에 역행한다"며 사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에 일본 대표단을 이끌었으며, 미국의 해군력 10:10:6 배분안에 대한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6] 은퇴 전에는 일본 적십자사 총재, 일미 협회 회장, 1940년 하계 올림픽 국가 조직 위원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도쿠가와 가문의 명성을 회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7] 그는 스스로를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가문을 파괴했고, 나는 그것을 재건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1930년 로터리 인터내셔널은 도쿠가와 이에사토의 국제적 호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실버(25주년) 기념 컨벤션 축하 행사의 기조 연설자로 선정했다.[1] 1934년에는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9][10][11]
정치 평론가 우자키 구마키치는 1913년에 이에사토의 의장으로서의 태도가 "정벌 대장군의 300명의 제후를 대하는 것과 같고, 몹시 위압적"이지만, "의장으로서는 확실히 충실이라는 두 글자를 씌우기에 족하다"라고 평가했다. 특히 의사를 정리하는 의장의 본분에 관해서는 "공사에 있어서는 공은 또한 일점의 정의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하여, 그 공평성을 "이상적인 의장의 태도"라고 평가했다. 중의원 의원 오자키 유키오는 중요한 의사가 있을 경우에는 중의원 방청석에 반드시 이에사토의 모습이 있었다며 그의 근면함을 칭찬했다.[83] 귀족원 부의장은 이에사토가 용변으로 자리를 비울 때만 의장석에 앉았기 때문에 "소변 의장"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에사토는 귀족원 중심의 정치 운영을 고수했으며, 가토 다카아키 내각의 귀족원 개혁 시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원내 각 파의 간섭을 싫어하고 의장에게 특별 위원 지명권을 일임하는 관례를 옹호하는 등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다.
4. 1.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
도쿠가와 이에사토는 영국 유학을 통해 서구 문물을 접하고, 일본 귀족원 의장을 역임하며 일본 정치에 참여하는등 일본의 근대화와 국제 협력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을 지원하고,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석하는 등 국제 외교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6] 일본 적십자사 총재, 일미 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인도주의적 활동과 미국과의 우호 관계 증진에도 힘썼다.[7]그러나 이에사토의 정치적 성향은 보수적이었으며, 귀족원 중심의 정치 운영 방식을 고수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전국수평사의 사죄 요구를 거부한 사건은 그가 사회 변화와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된다. 또한, 워싱턴 회의에서 일본 해군 군축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국제 평화와 협력보다는 일본 제국주의적 팽창을 우선시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다.[6]
이에사토는 1940년 하계 올림픽 유치에 힘썼으나, 중일전쟁 발발로 인해 올림픽 개최가 무산되면서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5. 기타
- 바둑 애호가로, 아마추어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췄다고 알려져 있다. 1926년에는 기타 후미코 5단에게 두 집이라는 적은 핸디캡으로 대국하여 승리한 기보가 남아있다. 프로 기사 후쿠이 마사아키는 아마추어 전국 대회가 있다면 우승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라고 평가했다.[31]
- 스모를 좋아하여 국기관의 단골이었다고 한다. 1922년에는 영국의 에드워드 황태자가 방일했을 때 자택에 초대한 자리에서 료고쿠 국기관의 네 기둥을 운반하게 하고, 요코즈나인 오니시키와 도치기야마 등 십여 명의 씨름 선수를 불러 스모를 선보이기도 했다.[33]
1927년, 도쿄 오스모 시합을 관전하는 도쿠가와 이에사토(중앙) - 동성애 성향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화족회관의 급사를 닭강간[36]했고, 1917년경에는 이 추문의 입막음료로 당시 대졸 초임의 200배에 해당하는 1만 엔을 지불했다는 기록이 있다.
- 현손(玄孫)은 도쿠가와 이에히로이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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稲畑勝太郎外八名外国勲章記章受領及佩用ノ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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