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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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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 외무장관들이 모여 개최한 회의이다. 이 회의에서는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핀란드와의 평화 조약 준비, 극동 위원회 및 대일 이사회 설치, 원자력 통제 위원회 설치 등이 논의되었으며, 특히 한반도 문제와 관련하여 최대 5년간의 신탁 통치를 결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이 왜곡되어 전달되면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한반도 분단의 한 요인이 되었다. 회의 결과는 미소공동위원회 활동의 실패와 한국 전쟁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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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회의 개요
이름모스크바 회의
다른 이름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장소모스크바, 소련
날짜1945년 12월 16일 – 26일
참가국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어니스트 베빈
제임스 F. 번스
이전 회의포츠담 회담
주요 논점전후 아시아 계획

2. 회의 배경 및 주요 내용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연합국은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합의된 일본 패망 후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구체화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문제들과 관련한 여러 현안을 다루기 위해 열렸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모스크바에 모여 회의를 진행했고, 12월 27일에 회의 결과를 담은 선언을 발표했다.[17][18] 이 선언에는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핀란드와의 평화 조약 준비, 일본 점령 통치를 위한 극동위원회 및 연합국 이사회 설치, 한반도 신탁통치 및 임시정부 수립 문제, 중국,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전후 처리 문제, 원자력 에너지 통제를 위한 UN 산하 위원회 설립 등 7가지 주요 의제가 포함되었다.

이 회의는 자유 프랑스중화민국을 배제하고 제임스 F. 번스가 제안하여 소련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2] 회의 결과,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친소련 정부가 인정되고, 소련이 전후 일본에서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원자력의 국제적 통제와 한국 신탁 통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한반도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군과 소련군의 대립으로 인해 미소 공동 위원회 설치가 우려되었으며,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이 소식은 왜곡된 형태로 한국에 전해져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한반도 분단의 한 요인이 되었다.

2. 1. 회의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말, 연합군은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카이로 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에서 일본 패망 후 한국을 적절한 시기까지 신탁통치하는 것에 합의했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16]

이 회의에는 미국의 제임스 번즈, 영국의 어니스트 베빈,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참석하여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진행되었으며, 12월 27일에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문제들과 관련한 선언을 발표하였다.[17][18]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는 소련에 유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자유 프랑스중화민국을 초대하지 않고, 영국과 먼저 상의 없이 제임스 F. 번스가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는 소련이 이전에 원했던 목표, 즉 프랑스와 중국이 유럽의 소축국에 관한 평화 협정에서 배제되는 것과 일치했으며, 영국과 미국 사이에 갈등을 야기했다. 또한, 이 회의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친소련 정부를 인정하고, 소련에 전후 일본에서의 역할을 부여했으며, 원자력의 국제적 통제를 확립하고, 한국의 신탁 통치에 대한 합의를 달성하여 소련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2]

2. 2. 주요 의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연합국은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서명된 공식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7가지 주요 의제가 포함되었다.[18]

#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핀란드와의 평화 조약 준비 (파리 조약 참고)

# 일본 점령 통치를 위한 극동위원회 및 연합국 이사회 설치

# 한반도 신탁통치 및 임시정부 수립 문제

# 중국,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전후 처리 문제

# 원자력 에너지 통제를 위한 UN 산하 위원회 설립

이 회의는 자유 프랑스중화민국을 배제하고 제임스 F. 번스가 제안하여 소련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2] 특히, 한반도 문제는 미국군과 소련군의 대립으로 인해 미소 공동 위원회 설치가 우려되었으며,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이 소식은 왜곡된 형태로 한국에 전해져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한반도 분단의 한 요인이 되었다.[1]

2. 3. 합의 내용 (한반도 문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연합군은 카이로 회담에서 일본 패망 후 한국에 대해 적당한 시기까지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16]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했고,[16] 미국의 제임스 번즈, 영국의 어니스트 베빈,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참석하여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회의를 진행한 후 12월 27일에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문제들과 관련한 선언을 발표했다.[17][18]

이 회의에서 합의된 '미ㆍ영ㆍ소 3국 외무장관 회의 보고서'[19] 중 "조선(III.Korea)"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네 개 항으로 구성되었다.

#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며, 일본 통치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 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돕기 위해 남조선 미군 사령부와 북조선 소련군 사령부 대표로 구성된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위원회는 제안서 준비 과정에서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며, 작성된 건의서는 미·영·소·중 정부의 검토를 거쳐 최종 결정된다.

# 조선인의 정치, 경제,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발전, 독립 국가 수립을 지원하고 협력(신탁통치)하는 방안을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 및 조선 민주주의 단체와 함께 미소공동위원회가 마련한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한의 4개국 신탁통치[20] 협약 작성을 위해 미·영·소·중 정부와 조선 임시 정부의 협의 후 제출된다.

# 남북한 관련 긴급 문제와 행정·경제 문제의 조화를 위해 2주 이내에 미·소 사령부 대표 회의를 소집한다.[21]

이 결정은 임시정부 수립을 우선 과제로 제시하면서도 미국의 신탁통치 제안을 일부 수용한 절충안이었다. 복잡한 절차를 통해 미국은 자국의 정책 기조를 유지하려 했다.[22][23]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는 소련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유 프랑스중화민국을 배제하고 영국과의 사전 협의 없이 제임스 F. 번스가 회의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는 소련이 바라던 대로 프랑스와 중국을 유럽 소축국 관련 평화 협정에서 제외하고, 영국과 미국 사이에 균열을 야기했다. 또한, 회의 결과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친소련 정부가 인정되고, 소련이 전후 일본에서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원자력의 국제적 통제와 한국 신탁 통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2] 당시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조지 F. 케넌은 회의 과정을 직접 보면서, 번스 국무장관이 국내 정치적 효과를 위해 실제적인 문제들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1947년 런던 이코노미스트는 모스크바 회의가 "승자들이 합의된 정책을 마련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전후 시대의 단계를 종식시켰다"고 평가했다.[3]

1945년 12월, 신탁통치 반대 시위.


1945년 12월 25일, 회담 최종 결정 발표에 앞서 UPI는 번즈 국무장관이 소련의 신탁통치 주장에 반대하여 즉각적인 독립을 촉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보도했다.[5] 국내 언론은 12월 27일에 이 기사를 인용했고, 12월 28일에 공식적으로 한국에 회담 결과가 발표되었다.

한국에 관한 결정 중 세 번째 단락은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의 공동 관리하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한국 독립 전 최장 5년의 4개국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6] 한국의 좌우 정치 세력은 모두 이 신탁통치 계획에 반대하며, 이는 한국을 강대국의 속국으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주장했다.

12월 27일부터 시작된 신탁통치 반대 시위는 12월 28일에 더욱 격화되었다. 우익에서는 김구가 시위를 이끌었고, 12월 29일에는 경교장에서 신탁통치 반대 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여기에는 조선공산당박헌영을 포함한 76명의 좌익 지도자들도 참여했다. 시위와 유인물 배포, 언론 논쟁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1946년 1월 3일, 조선공산당은 갑자기 입장을 바꿔 회담 결과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는 대중에게 큰 반발을 샀다. 이러한 입장 변화는 12월 30일 소련의 안드레이 알렉세예비치 로마넨코 장군이 평양에 도착한 것과 시기적으로 일치하여 소련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추측을 낳았다.[7] 좌익이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서 이탈하면서 좌우익 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8]

1월 23일, 신탁통치 계획에 대한 불안은 다소 진정되었고, 우익 정치 단체들은 군정 반대와 비협조를 주장하는 폭력 행위를 중단했다.[9]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과 1947년에 걸쳐 소집되었으나, 소련의 방해로 인해 점차 난항을 겪었다. 소련은 북한 지역에 군사력을 증강했고, 1948년 유엔 감시 선거가 북한에서 실시되는 것을 막았다. 모스크바 회담이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실패하면서 결국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10]

3. 모스크바 3상 회의와 신탁통치 논란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는 소련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된다. 이 회의는 프랑스중화민국을 배제하고 영국과의 사전 협의 없이 제임스 F. 번스 미국 국무장관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소련이 원했던 대로 유럽의 추축국에 대한 평화 협정에서 프랑스와 중국을 제외시키고, 영국과 미국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2] 또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친소련 정부를 인정하고, 전후 일본에서 소련의 역할을 보장했으며, 원자력의 국제적 통제와 한국의 신탁 통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2]

당시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외교관 조지 F. 케넌은 회의 과정을 지켜보며 번스 국무장관에 대해 "그는 국내 정치적 효과를 위해 합의를 원한다. 러시아인들은 이것을 알고, 이러한 피상적인 성공을 위해 그가 실제적인 것들에 대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것을 볼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1945년 12월 25일, 회담 최종 결정 발표에 앞서 UPI는 "번즈 국무장관은 러시아의 신탁통치 주장에 반대하여 즉각적인 독립을 촉구하라는 지시를 받고 러시아로 갔다"고 보도했고,[5] 국내 언론은 12월 27일에 이 기사를 인용했다. 12월 28일, 한국에 회담 결과가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한국에 관한 내용은 4개 단락으로 구성되었는데, 세 번째 단락에서는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의 공동 관리 하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한국이 독립을 달성하기 전에 최대 5년의 4개국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는 결정이 포함되었다.[6] 그러나 이 신탁통치 계획은 한국을 4대 강국의 속국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반발을 불러일으켜, 한국의 좌우 정치 세력 모두 반대했다.

12월 27일부터 시작된 신탁통치 반대 시위는 12월 28일에 더욱 격화되었고, 우익에서는 김구가 이 시위를 주도했다. 12월 29일에는 경교장에서 신탁통치 반대 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여기에는 조선공산당박헌영을 비롯한 76명의 좌익 지도자들도 참여했다.[7] 그러나 1946년 1월 3일, 공산당은 입장을 바꿔 회담 결과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는 대중에게 좋지 않은 반응을 얻었다. 이러한 변화는 12월 30일 소련의 안드레이 알렉세예비치 로마넨코 장군이 평양에 도착한 것과 맞물려, 소련의 지시 때문이라는 추측을 낳았다.[7] 좌익이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서 이탈하면서 좌익과 우익 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8]

1월 23일까지 신탁통치 계획에 대한 불안은 다소 진정되었고, 우익 정치 단체들은 군정 반대와 비협조를 주장하는 폭력 행위를 중단했다.[9]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과 1947년 동안 소집되었지만, 소련의 방해로 인해 점차 어려움을 겪었다. 소련은 북한이 될 지역에 군사력을 증강했고, 1948년 유엔 감시 선거가 북한에서 열리는 것을 막았다. 결국 모스크바 회담이 한국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실패하면서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10]

대한민국에서는 신탁통치 반대 승리 시위를 매년 12월 28일에 기념하고 있다.[8]

3. 1. 신탁통치안의 내용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에서 조선에 관한 결정 중 세 번째 문단은 '신탁통치안'으로 불린다. 이 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9]

내용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여 조선의 산업, 교통, 농업 발전과 조선 인민의 민족문화 발전에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돕고,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 적절한 방안을 마련한다. 이 위원회의 건의는 미국, 영국, 소련, 중화민국 4개국 정부에 제출되어 검토를 받는다.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와 조선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 미소공동위원회가 조선 인민의 정치, 경제,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발전, 독립 국가 수립을 돕고 협력(신탁통치)하는 방안을 마련한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간의 4개국 신탁통치[20] 협약을 작성하기 위해 미·영·소·중 정부와 조선 임시 정부가 협의 후 공동으로 검토한다.



이는 임시정부 수립을 우선 과제로 제시하면서도 미국의 신탁통치 제안을 일부 수용한 절충안이었다. 이 결정은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 미소공동위원회와 조선 정당·사회단체 협의 후 임시정부 수립 권고안 제출 → 4대국 심의 → 임시정부 수립 → 임시정부의 미소공동위원회 협력하에 신탁통치 협정 작성 참여 → 4대국의 신탁통치 협정 공동심의’라는 복잡한 단계를 거치도록 되어 있었다.[22][23]

3. 2. 국내외 반응과 오보 사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는 한반도에 즉시 알려졌으나, 좌익과 우익 간의 극심한 분열을 초래했다.

1945년 12월 25일, UPI 통신은 "번즈 국무장관이 러시아의 신탁통치안에 반대되는 즉시 독립안을 주장하라는 훈령을 받고 러시아로 갔다"고 보도했고[24],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들은 12월 27일 자로 이를 인용하여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냈다. 이는 1946년 1월 24일 소련 타스통신의 발표를 통해 오보로 밝혀졌다.[24]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신문 기사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신문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합의되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1945년 12월 28일부터 초기에는 좌우파 모두 강력하게 반탁 의사를 표명했다. 12월 30일 결성된 임시정부 주도의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에는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도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고[25], 다음 날인 31일에는 상무위원으로 선정되었다.[26] 강원용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박헌영을 비롯한 다수의 좌파 인사가 이 위원회에 참여했다.[27]

1946년 1월 1일, 하지 장군은 박헌영을 만났을 때 그의 강경한 반탁 입장을 확인했으나, 1월 3일 다시 만났을 때는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어 있었다.[28] 1월 2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합의사항을 지지(찬탁)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책임비서 박헌영이 주도했을 것으로 보인다.[29][30]

1945년 연말까지 반탁을 표명하던 여러 좌파 단체들도 1946년 1월 2일을 기점으로 일제히 찬탁으로 전환했는데[31], 미군정은 이러한 변화에 소련의 의사가 작용했을 것으로 파악했다.[28] 김일성, 김두봉 등 북한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1월 2일에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도 좌파의 입장 변화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32] 이 성명에는 조선민주당 대표 조만식은 참여하지 않았으며, 조만식이 반탁 의사를 굽히지 않자 소련은 1월 5일 그를 고려호텔에 연금했다.

1월 3일로 예고되었던 좌익들의 반탁 집회는 당일 지도부에 의해 찬탁 집회로 바뀌어 진행되어 큰 혼란이 빚어졌다.[33][34]

이 시기 우익 진영, 특히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 세력은 반탁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다.[35] 좌익은 처음에는 소극적이었으나, 소련 측의 요구로 모스크바 회의 내용 전문이 공개된 후 회의 결과를 수용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이 과정에서 좌익 계열은 임시정부 건설 원칙을, 우익 계열은 신탁통치 반대를 강조하며 대립했다.

3. 3. 좌우익의 입장 변화와 갈등 심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는 한반도에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분열을 초래했다.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은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오보를 냈다.[24] 그러나 1946년 1월 24일, 소련 타스 통신은 모스크바 3상 회담에서 신탁 통치안을 처음 제안한 국가가 미국임을 밝혔다.

1945년 12월 28일, 신탁 통치 합의 소식이 알려지자 좌우익 모두 반탁 의사를 표명했다. 임시정부는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했고, 박헌영도 중앙위원 및 상무위원으로 참여했다.[25][26][27]

그러나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은 모스크바 3상 회의 합의를 지지(찬탁)하기로 결정했다.[29][30] 박헌영은 1월 1일 하지 장군에게 반탁 입장을 밝혔으나, 1월 3일에는 찬탁으로 입장을 바꿨다고 한다.[28] 좌파 단체들도 1월 2일을 기점으로 찬탁으로 전환했는데,[31] 미군정은 소련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파악했다.[28] 김일성, 김두봉 등 북한 정당·사회단체 대표들도 1월 2일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32] 조만식은 반탁 의사를 굽히지 않아 1월 5일 소련에 의해 연금되었다.

1월 3일, 좌익들의 반탁 집회는 찬탁 집회로 바뀌어 혼란이 발생했다.[33][34]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 세력은 반탁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35] 좌익은 임시정부 건설 원칙을, 우익은 신탁 통치 반대를 강조하며 대립했다.

4. 회의의 결과 및 영향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는 소련에 유리하게 평가되었다. 이 회의는 제임스 F. 번스가 자유 프랑스중화민국을 초대하지 않고, 영국과 사전 협의 없이 제안했는데, 이는 소련이 원했던 목표와 일치했다.[2] 회의 결과,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친소련 정부가 인정받고, 소련은 전후 일본에서 역할을 부여받았으며, 원자력의 국제적 통제와 조선의 신탁 통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2] 당시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의 조지 F. 케넌은 이러한 합의가 미국의 국내 정치적 효과를 위한 것이며, 소련이 이를 이용하여 실질적인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1947년 런던 이코노미스트는 모스크바 회의가 "승자들이 합의된 정책을 마련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전후 시대의 단계를 종식시켰다"고 평가했다.[3]

회의에서는 각 지역의 전후 처리, 특히 극동에서의 점령 정책과 평화 확립 등이 논의되었다. 12월 17일 발표된 성명에는 다음 내용이 포함되었다.[2]

내용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핀란드와의 평화 조약 준비
일본에 극동 위원회 및 대일 이사회 설치
조선미소공동위원회 설치 및 단일 자유 국가 성립 권고
중국,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영토적 처우
원자력 통제 위원회를 유엔에 설립



특히 조선에 대해서는 미국, 소련, 영국, 중국 4개국에 의한 최장 5년간의 신탁 통치가 결정되었다.[2] 그러나 이 사실은 왜곡된 형태로 조선에 전달되어, 민족주의자를 중심으로 심각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한반도 분단의 한 요인이 되었다.[2]

4. 1. 미소공동위원회 활동과 결렬

미국소련에 의해 가 설치되어, 조선에서의 단일 자유 국가 성립을 권고하는 것이 결정되었다.[2] 그러나, 지역 내에서 이미 미국군과 소련군이 대립하고 있어 공동 위원회 자체의 성립이 우려되었다.[2]

공동위원회는 1946년과 1947년 동안 소집되었지만, 주로 소련에 의해 점차적으로 방해받았다.[10] 소련은 북한이 될 지역에 군사력을 증강했고, 1948년 유엔 감시 선거가 북한에서 열리는 것을 막았다.[1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표적 소련파 정상진은 "북한은 해방 후 20년 역사를 위조했다"며 "일본군을 내몬 뒤 소련 정부에서 북한 정권 수립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해방 후 원산항(港)에 귀국하는 김일성을 맞으러 간 것도 접니다. 소련은 고려인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어요. 1945년부터 1965년까지 북한에서 발표된 모든 연설문은 다 소련에서 작성됐어요."라고 폭로했다.[38]

1945년 12월 29일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 진주 후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개도를 방문조사한 뒤 만든 보고서에는 258 소총사단장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도 남겼다고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39][40]

모스크바 회담이 한국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실패하면서 결국 1950년 한국 전쟁으로 이어졌다.[10]

4. 2.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가 한국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회의 내용 중 한국 관련 부분은 4개 단락으로 구성되었는데, 세 번째 단락에는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의 공동위원회를 설립하고, 한국이 독립하기 전 최대 5년간 4개국 신탁통치를 시행한다는 결정이 포함되어 있었다.[6]

그러나 이 신탁통치 계획은 한국을 4대 강대국의 속국으로 만들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한국의 좌우 정치 세력 모두에게 반대에 부딪혔다. 12월 27일부터 시작된 신탁통치 반대 시위는 12월 28일에 더욱 격렬해졌고, 우익에서는 김구가 이 시위를 이끌었다. 12월 29일에는 경교장에서 신탁통치 반대 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여기에는 조선공산당박헌영을 비롯한 좌익 지도자들도 76명이나 참여했다. 며칠 동안 시위, 유인물 살포, 언론 논쟁이 이어졌다.[7]

1946년 1월 3일, 공산당은 갑자기 입장을 바꿔 회담 결과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변화는 대중에게 좋지 않은 반응을 얻었으며, 12월 30일 소련의 안드레이 알렉세예비치 로마넨코 장군이 평양에 도착한 것과 맞물려 소련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추측에 힘을 실었다.[7] 좌익이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서 이탈하면서 좌익과 우익 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8]

1946년 1월 23일까지 신탁통치 계획에 대한 불안은 다소 진정되었고, 우익 정치 단체들은 군정 반대와 비협조를 주장하는 폭력 행위를 중단했다.[9] 공동위원회는 1946년과 1947년 동안 소집되었지만, 소련의 방해로 인해 점차 어려움을 겪었다. 소련은 북한이 될 지역에 군사력을 증강했고, 1948년 유엔 감시 선거가 북한에서 열리는 것을 막았다. 결국 모스크바 회담이 한국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실패하면서,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10]

5. 평가 및 비판

모스크바 3상 회의는 강대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약소국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특히 조선의 경우, 미국군과 소련군이 이미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설치와 최장 5년간의 신탁 통치 결정은 한반도 분단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사실이 왜곡된 형태로 조선에 전달되면서, 민족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격렬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5. 1. 비판적 관점 (더불어민주당 관점)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은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위배되며, 한국인의 자주적인 독립 국가 수립 열망을 무시한 처사였다. 회의 과정에서 한국의 대표성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했고, 이는 민주주의적 절차에 어긋난다.[6]

소련은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을 지원했다. 소련파 정상진은 "1945년부터 1965년까지 북한에서 발표된 모든 연설문은 다 소련에서 작성됐다"고 폭로했다.[38] 1945년 12월 29일 소련군 보고서에 따르면, 소련군 장성은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39][40]

이처럼 소련은 북한에 친소 정권을 수립하여 한반도 분단을 획책하고, 1948년 유엔 감시 선거를 방해했다. 결국 모스크바 회담이 한국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실패하면서 한국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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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간행물 Reflections on the Moscow Conference https://www.jstor.or[...]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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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웹사이트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 2021-04-10
[7] 웹사이트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삼상회의 보도" https://www.donga.co[...] 2021-04-10
[8] 웹사이트 "[모스크바 3상회의 60주년]좌익 '찬탁돌변' 남북분단 불러" https://www.donga.co[...] 2021-04-10
[9] 웹사이트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46, The Far East, Volume VIII - Office of the Historian https://history.stat[...] 2021-04-10
[10] 웹사이트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 2021-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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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문서 영문 공식명칭은 INTERIM MEETING OF FOREIGN MINISTERS OF THE UNITED STATES, THE UNITED KINGDOM, AND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MOSCOW, DECEMBER 16-26, 1945-INTERIM MEETING OF FOREIGN MINISTERS OF THE UNITED STATES, THE UNITED KINGDOM, AND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MOSCOW, DECEMBER 16-26, 1945
[20] 문서 러시아어 본에는 '후견(tutelage)/신탁통치(trusteeship)'라는 의미의 'ОПЁкА'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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