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라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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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목라근자는 《일본서기》에만 등장하는 백제의 장군으로, 근초고왕의 명을 받아 왜군과 함께 침미다례를 공격했다. 이도학은 목라근자를 마한 목지국 신지 가문 출신으로, 백제 남부 세력 평정에 기여한 인물로 보았다. 369년 왜와 함께 가야 7국을 평정하고 침미다례를 정벌했으며, 382년 가라국 분쟁을 겪었다. 아들로는 목만치가 있다. KBS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한정수가 목라근자 역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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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라근자 | |
---|---|
기본 정보 | |
이름 | 목라근자 |
한글 | 목라근자 |
한자 | 木羅斤資 |
가타카나 | 몽나군자 |
히라가나 | もくらこんし |
로마자 표기 (문화관광부 2000년식) | Mok Rageunja / Mongna Geunja |
로마자 표기 (매큔-라이샤워식) | Mok Rageunja / Mongna Geunja |
2. 출자
목라근자는 일본 측 사료인 《일본서기》에만 등장하며, 한국 측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24] 이도학은 목라근자가 고이왕 대에 백제 남부 핵심 세력으로 편입된, 과거 마한 연맹체의 맹주였던 목지국 신지(진왕) 가문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목라근자(木羅斤資)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4세기 백제의 장군이다. 근초고왕의 명으로 왜병과 함께 가야 지역 및 마한 평정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 학계에서는 목라근자를 백제의 장군으로 보면서도, 왜국이 백제에 파견한 왜인인지, 임나인 계통인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백제인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서기》에 백제의 장군으로 명시되어 있고, 백제와 왜를 오가며 '임나'의 일을 맡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특히, 천황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가 뚜렷한 《일본서기》에서, 중요한 공을 세운 인물을 굳이 백제인으로 잘못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25]
3. 생애
369년 백제가 고구려와 대치하던 중, 근초고왕은 남쪽의 후방을 안정시키고자 탁순국을 통해 왜국에 사신을 보냈다. 왜의 아라다노와케와 가가노와케가 왜병을 이끌고 탁순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을 지휘한 것이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였다. 《일본서기》는 목라근자를 백제의 장군이라고 설명한다.
이후 목라근자는 가야와 침미다례 정벌에 나서고, 가라국 분쟁을 해결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목씨(목라씨)에 대해 이도학은 고이왕 대 마한 연맹체의 맹주였던 의 신지 가문으로, 백제 남부의 핵심 세력으로 편입된 가문이라고 본다. 변진 12국도 진왕에 속했으며, 특히 변진의 핵심 세력이었던 · 구야국(금관가야)은 진왕과 밀접한 관계였다. 이러한 상황이 목라근자가 가야 평정 임무를 받게 된 기초가 되었다고 이도학은 주장했다.
일본 학계에서는 목라근자를 백제의 장군으로 보면서도, 왜국이 백제에 파견한 왜인인지, 임나인 계통인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백제인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야 평정"이라는 중요한 공을 세운 인물을 《일본서기》에서 굳이 백제인이라고 기록했을 가능성은 낮다는 반론도 있다.[26]
3. 1. 가야 및 침미다례 정벌
369년, 백제의 근초고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앞두고 후방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는 탁순국을 통해 왜국에 수교 의사를 밝혔다. 왜의 아라다노와케와 가가노와케가 왜병을 이끌고 탁순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을 지휘한 것이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였다.
목라근자가 이끈 백제군은 왜병과 함께 비자벌,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7국을 평정했다.[30] 서쪽으로 이동해 고해진(古奚津)에서 "남만" 침미다례를 정벌하고 백제에 귀속시켰다.[26]
이후 근초고왕과 태자 귀수가 군을 이끌고 와 합류했고,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4읍도 항복했다.[27] 백제 왕 부자와 아라다노와케, 목라근자 등은 의류촌에서 만났으며[28], 왜의 지쿠마노 나가히코는 근초고왕과 벽지산과 고사산에서 동맹을 맺었다.
3. 2. 가라국 분쟁
《일본서기》 신공 62년(382년) 기사에 따르면, 천황의 명으로 신라를 공격하러 간 사치히코가 신라의 유혹에 빠져 가라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5] 이로 인해 가라 국왕 일가는 백제로 망명했고, 가라 국왕의 여동생이 목라근자에게 호소하여 가라국을 재건했다.[5]
이 기사는 설화적인 내용이 많아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복원하기는 어렵지만, 백제가 주체가 되어 일어난 사건임을 보여준다.[5] 노중국은 사치히코가 가라국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는 기술에 대해, 사치히코 측, 즉 백제의 사씨 세력의 동향과 관련지어 조사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목라근자가 가야 지역의 조부통책권을 장악하게 된 것에 반발한 사씨 세력 간에 분쟁이 발생했고, 이 분쟁에서 사씨 세력이 일시적으로 승리했지만(가라국 멸망), 목라근자의 군대에 의해 가라국이 부흥되었고 사치히코도 석굴에 들어가 죽었다는 것은, 사씨 세력이 목씨 세력에게 밀려났음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목라근자와 목씨 세력은 가야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
4. 가계
부친 | (미상) |
---|---|
아들 | 목만치 (403~475) |
5. 등장 매체
2010년부터 2011년까지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배우 한정수가 목라근자 역을 연기했다.[1]
참조
[1]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2]
문서
「斤資」を漢音で「きんし」と読まず、呉音で「こんし」とするのは、呉音が主流だった『日本書紀』成立当時の読み癖によるものだが、当時の倭および朝鮮半島の言語の音韻を反映している可能性もあるためである。
[3]
문서
木を姓、羅斤資を名と見た場合。
[4]
문서
木羅を姓、斤資を名と見た場合。
[5]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6]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7]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8]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9]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10]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11]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12]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13]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14]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15]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16]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17]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18]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19]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20]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21]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22]
서적
日本書紀I
近藤書店
2003
[23]
서적
日本上代史の一硏究 - 日鮮交涉と日本書紀 -
近藤書店
1947
[24]
서적
가야정치사연구
학연문화사
1998
[25]
서적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창비
2002
[26]
문서
이도학은 이것을 비리(比利)·벽중(辟中)·포미(布彌)·지반(支半)·고사(古四)의 읍(邑)으로 떼어 읽고 있다.
[27]
문서
《일본서기》에는 주류수지(州流須祇)라 부르는 곳이라고 주를 붙이고 있다
[28]
문서
노중국은 사지비궤가 가라국을 쳐서 멸망시켰다는 기술에 대해 사지비궤 즉 백제 사씨 세력의 동향과 연관시켜 살펴보아야 하며, 함께 가야 7국을 평정하는데 일정한 공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목라근자가 가야 지역의 조부 통책권을 장악하게 된 것에 반발한 사씨 세력간에 벌어진 분쟁에서 사씨 세력은 일시 승리했지만(가라국 멸망) 목라근자의 군에 의해 가라국이 흥복되고 사지비궤도 석굴에 들어가 죽었다는 것은 사씨 세력이 목씨(목협씨) 세력에 밀려났음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목라근자, 목씨 세력은 가야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더욱 확실하게 장악하게 되었고 그 바탕 위에서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가야 지역에서 '전횡'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노중국, 같은 책, p.159).
[30]
웹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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