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 한풍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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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주 한풍루는 전라북도 무주군 공설운동장 옆에 위치한 누각으로, 조선 초기부터 존재해 왔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재건되었다. 15세기 문신들의 시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통해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일제강점기에는 영동군으로 옮겨져 금호루로 불리다가 1971년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중층 건물로, 이익공 양식 등 조선 후기 관아누정의 특징을 보여준다. 16~17세기 중수 당시의 목재가 확인되어 복원의 진정성을 확보했으며, 무주 군민들의 노력으로 훼철 위기에서 벗어나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역사, 건축, 학술적 가치가 높아 현대에도 그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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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 한풍루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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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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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무주한풍루 |
한자 표기 | 茂朱寒風樓 |
유형 | 유형문화재 |
지정 번호 | 19 |
지정일 | 1973년 6월 23일 |
주소 |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주읍 당산리 1193-2 |
문화재청 ID | 21,00190000,35 |
참고 | 무주 공설운동장 |
2. 역사
무주 공설운동장 옆에 자리한 누각으로, 과거 이름난 시인들이 찾아와 풍류를 즐기던 유서 깊은 곳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세기 조선 전기 문헌 기록을 통해 조선 초기부터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중 소실되었다가 1599년에 다시 지어졌으며,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불교 포교 시설로 사용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전되어 이름이 바뀌는 등 여러 수난을 겪었다. 1971년 무주군민들의 노력으로 현재 위치에 복원되었으며,[7] 이 과정에는 일제강점기의 훼손 위기 속에서 건물을 되찾으려 한 군민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8]
한풍루는 이처럼 임진왜란 전후의 중건, 일제강점기의 시련과 복원 등 여러 역사적 부침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으며, 이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8]
2. 1. 조선 시대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세기 조선 전기의 문신 성임과 유순 등이 한풍루를 보고 쓴 시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기록을 통해 조선 초기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이름난 시인들이 찾아와 풍류를 즐기던 장소였다고 전해진다.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소실되었으나, 선조 32년(1599년)에 다시 지어졌다.
2. 2.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에 한풍루는 본래의 용도와 달리 불교 포교의 근거지로 사용되었다. 이후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의 강변으로 옮겨졌으며, 이름마저 '금호루'로 바뀌었다. 이는 일제에 의해 문화재가 훼철될 위기에 놓였던 상황을 보여준다.[8]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무주군민들은 한풍루를 원래의 모습과 자리로 되찾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는 많은 애환이 담겨 있다.[8]2. 3. 광복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불교 포교 거점으로 사용되거나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강변으로 이전되어 '금호루'로 이름이 바뀌는 등 수난을 겪었다.[7] 1971년, 무주군민들의 노력으로 현재 위치인 무주 공설운동장 옆으로 다시 옮겨져 복원되었는데,[7] 이는 일제강점기에 훼손될 위기에 놓였던 건물을 되찾으려는 무주 군민들의 애환이 담긴 결과이다.[8]3. 건축
조선 후기 관아 누정의 격식을 따라 지어진 중층 누각이다.[7]
3. 1. 구조
정면 3칸, 옆면 2칸의 중층 누각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익공[2] 양식을 사용하는 등 조선 후기 관아 누정의 격식을 충실히 따랐다. 누각 아래층(누하층)에 평주를 설치하고, 아래층 기둥(누하주)과 위층 기둥(누상주)[3]의 비례와 흘림[4] 기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대들보인 항아리보[5]를 다듬은 방식(치목)과 추녀에 강다리[6]를 설치한 점 등은 구조적 안정감과 아름다움을 함께 고려한 한풍루만의 독특한 건축 요소로 평가받는다.[7]3. 2. 목재 연륜 연대 분석
목재 연륜 연대 분석 결과, 16~17세기에 이루어진 중수 당시의 기둥과 창방 등 주요 목부재가 현재까지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한풍루가 진정성 있게 복원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또한, 이러한 분석 결과는 임진왜란 전후의 중수와 복설 과정, 일제강점기에 건물이 훼철될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원래 모습과 자리로 되찾으려 했던 무주군민의 노력이 담긴 역사를 뒷받침한다. 한풍루는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중층 관영 누각으로서 17세기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어 역사적, 건축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는다.[8]4. 학술적 가치
무주 한풍루는 역사적, 건축적, 학술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다.[8]
우선 역사적으로 볼 때,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건물을 선조 32년(1599년)에 중건하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하는 과정을 거쳤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본래의 용도를 잃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져 철거될 위기에 처했으나, 이를 극복하고 원래의 모습과 자리를 되찾으려는 무주군민들의 노력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8]
건축적으로는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조선시대 중층 관영 누각 건물로서, 17세기의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8] 정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이익공[2] 양식을 사용하여 조선 후기 관아 누정의 격식을 충실히 따랐다. 세부적으로는 누각 아래층에 평주(독립 기둥)를 세운 점, 누각 아래층 기둥(누하주)과 위층 기둥(누상주)[3]의 비례와 흘림[4] 기법, 대들보를 받치는 항아리 모양의 부재(항아리보)[5]를 다듬은 방식, 추녀 끝을 받치는 짧은 기둥(강다리)[6]을 설치한 점 등에서 구조적 안정성과 미적 가치를 함께 고려한 한풍루만의 독특한 건축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7]
학술적으로는 목재의 나이테를 분석하는 연륜 연대 분석을 통해,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중수될 당시 사용되었던 기둥과 창방 등 주요 목재 부재가 현재까지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건물이 상당 부분 원형을 유지하며 진정성 있게 복원되었음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8]
5. 현대적 의의
무주 한풍루는 목재 연륜 연대 분석 결과 16~17세기 중수 당시의 주요 목부재가 확인되어, 임진왜란 전후의 중수와 복원이 진정성 있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훼철될 위기에 놓였던 건물을 원래의 모습과 자리로 되찾으려는 무주군민의 노력과 애환이 담겨 있어 지역 사회에 깊은 의미를 지닌다.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중층 관영 누각으로서 17세기의 건축 양식과 시대적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어 역사적, 건축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평가받는다.[8]
참조
[1]
웹인용
무주 한풍루」,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보물’ 지정 예고
https://www.cha.go.k[...]
2021-04-20
[2]
문서
익공이란 기둥 위에서 전면으로 조각한 부재를 내민 부재(쇠서)를 놓아 꾸민 건축양식을 말한다.
[3]
문서
누하주와 누상주는 각각 누각에서 마루 밑과 위에 세우는 기둥을 말한다.
[4]
문서
흘림이란 기둥의 굵기를 밑동에서 꼭대기까지 조금씩 달라지게 하는 일을 말한다.
[5]
문서
항아리보란 보의 단면형상은 둥글고 아래는 소로폭으로 좁혀진 보로 마치 항아리와 닮은 형태를 말한다.
[6]
문서
강다리란 추녀의 처짐을 막기 위해 추녀의 위쪽 뿌리부분에 중도리 밑까지 구멍을 뚫어 꽂는 괴목과 같은 단단한 나무를 말한다.
[7]
웹인용
무주 한풍루」,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보물’ 지정 예고
https://www.cha.go.k[...]
2021-04-20
[8]
웹인용
무주 한풍루」,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보물’ 지정 예고
https://www.cha.go.k[...]
2021-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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