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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프랑스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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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프랑스 관계는 식민지 시대부터 시작되어 동맹과 갈등을 반복하며 변화해 왔다. 뉴프랑스의 프랑스 식민지 시대는 프랑스와 인디언 전쟁으로 종결되었고, 미국 독립 혁명 시기 프랑스는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며 미국의 독립을 도왔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지만, 19세기에는 루이지애나 매입, 몬로 독트린 등을 통해 간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았다. 20세기 초 두 나라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으로 참전했으며, 냉전 시대에는 NATO를 통해 군사적 협력을 강화했다. 탈냉전 시대 이후에는 걸프 전쟁, 9.11 테러, 이라크 전쟁 등에서 협력과 갈등을 반복했으며, 최근에는 AUKUS 동맹, 기후 변화, 무역 문제 등을 놓고 이견을 보이기도 했다. 21세기 현재에도 경제, 안보,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상호 협력과 갈등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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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프랑스 관계
지도 정보
기본 정보
국가프랑스
미국
관계 명칭프랑스-미국 관계
대사관프랑스 대사관, 워싱턴 D.C.
미국 대사관, 파리
주미 프랑스 대사로랑 빌리
주프랑스 미국 대사데니스 바우어
역사
역사적 관계미국 독립 전쟁에서 프랑스의 지원
프랑스 혁명에 대한 미국의 지지
초기 관계미국 건국 초기에 강력한 동맹 관계 형성
양국은 서로를 "가장 오래된 동맹국"으로 지칭
금본위제 문제금본위제와 은본위제 문제로 갈등 발생
정치
외교 관계양국은 긴밀한 외교 관계 유지
협력 분야안보
경제
문화
과학
현안일부 무역 분쟁 및 외교적 이견 존재
경제
경제 협력양국 간 강력한 경제 파트너십
무역상당한 규모의 양국 간 무역 존재
투자활발한 상호 투자 활동
군사
군사 동맹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회원국
안보 협력테러 대응 및 국제 안보 분야 협력
군사 훈련정기적인 합동 군사 훈련 실시
문화
문화 교류다양한 문화 교류 프로그램 운영
프랑스 문화 영향미국 문화에 대한 프랑스 문화의 상당한 영향력
미국 문화 영향프랑스 문화에 대한 미국 문화의 영향력 증가
기타
면적약 2,144,000 제곱킬로미터
기타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찰스 쿠슈너를 주프랑스 미국 대사로 지명 시도
프랑스와의 협력 강화 강조

2. 식민지 시대

미국 독립 선언을 기념하여 프랑스 국민이 미국 국민에게 선물한 자유의 여신상


뉴프랑스/Nouvelle-France프랑스어는 1534년 탐험을 시작으로 프랑스 왕국이 식민지화한 지역으로, 1763년 파리 조약에 따라 영국과 스페인에 할양되면서 끝을 맺었다.[2][3]

뉴프랑스의 광대한 영토는 1712년 최전성기에 각자의 행정부를 가진 5개의 식민지로 구성되었다. 가장 발전된 식민지인 캐나다는 퀘벡, 트로아리비에르, 몬트리올의 지역으로 나뉘었고, 그 외에 허드슨 만, 북동부의 아카디아, 뉴펀들랜드 섬의 플라상스, 그리고 루이지애나가 있었다.[4][5] 뉴프랑스는 뉴펀들랜드에서 캐나다 대평원까지, 허드슨 만에서 멕시코만까지 확장되었으며, 모든 북아메리카의 대호를 포함하였다.

높은 출산율과 풍부한 식량 공급으로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다. 1754년 뉴프랑스의 인구는 아카디아인 1만 명, 캐나디앵 5만 5천 명이었고, 상 루이지애나와 하 루이지애나 지역에는 약 4천 명의 프랑스 정착민이 거주하여 총 6만 9천 명에 달했다.[6]

영국은 1755년부터 1764년까지 대혼란에서 아카디아인들을 추방했다. 그들의 후손들은 현재 캐나다와 미국, 특히 메인주와 루이지애나주에 흩어져 살고 있다.

2. 1. 뉴프랑스

2. 2. 프랑스와 인디언 전쟁

1688년 이후 영국(개신교)과 프랑스(가톨릭) 사이의 왕조, 종교, 당파 간의 갈등은 유럽에서 네 차례의 전쟁을 촉발했고, 이는 북아메리카로 번져 나갔다.[7][8] 이 전쟁들은 북미 대륙에서 벌어진 "프랑스와 인디언 전쟁"으로, 킹 윌리엄 전쟁(1689년~1697년), 앤 여왕 전쟁(1702년~1713년), 조지 왕 전쟁(1744년~1748년), 그리고 7년 전쟁(1756년~1763년)으로 구성된다. 프랑스는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뉴잉글랜드의 마을들을 공격하게 했다. 결국 대영제국이 승리하여 1763년 프랑스를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완전히 몰아냈다.[7][8]

1763년 파리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뉴프랑스의 거의 대부분을 영국과 스페인에 할양했다. 영국은 캐나다, 아카디아, 그리고 미시시피 강 동쪽에 위치한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의 일부 지역을 차지했지만, 일 드 오를레앙은 제외되었다. 스페인은 미시시피 강 서쪽의 모든 프랑스 영유권을 얻었다.[9] 1800년, 스페인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강요된 산일데폰소 제3조약에 따라 루이지애나의 일부를 프랑스에 반환했다. 나폴레옹은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을 통해 이 지역 전체를 미국에 매각했고, 이로써 프랑스의 북미 대륙 식민지 시대는 영구적으로 종식되었다.[9] 뉴프랑스는 미국과 캐나다에 흡수되었다. 미국에서는 뉴프랑스의 유산으로 수많은 지명(미국 내 프랑스어 유래 지명 목록)과 프랑스어 사용 지역(미국 내 프랑스어)이 남아있다.[9]

3. 미국 독립 혁명

1763년 프랑스가 축출된 지 10년 만에 영국의 식민지들이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루이스 데 운사가 이 아메사가의 지휘 아래 프랑스는 독립 운동에 비밀리에 군대와 군수품을 제공했다.[10]

제2차 대륙 의회가 1776년 7월 독립을 선언한 후, 파리에 있는 대표들은 대륙군을 위해 장교들을 모집했는데, 특히 라파예트 후작이 소장으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프랑스에 대한 불신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표들은 공식적인 동맹을 추구했다. 함대를 준비하고 1777년 10월 사라토가 전투에서 미국의 승리를 목격한 후, 프랑스는 1778년 2월 6일 상업 조약과 동맹 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의 독립이 확보될 때까지 영국과 싸울 것을 약속했다.[11][12]

미국 독립 전쟁 중인 1777년 라파예트 후작이 조지 워싱턴을 방문하는 모습.


군사 동맹은 순조롭게 시작되지 않았다. 1778년 프랑스 해군 제독 데스탱은 함대를 이끌고 북미로 항해하여 미국 장군 존 설리반과 함께 뉴포트, 로드아일랜드주에 있는 영국 전초 기지를 점령하려는 합동 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데스탱은 영국 함대와 맞서기 위해 작전을 포기하고 설리반과 라파예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수리하기 위해 보스턴으로 항해했다. 해군 지원이 없자 계획은 무산되었고, 설리반 휘하의 미국군은 스스로 전투적인 후퇴를 해야 했다. 미국의 분노는 널리 퍼졌고, 프랑스 왕립 해군의 여러 선원들이 반프랑스 폭동에서 사망했다. 사바나, 조지아에서의 재난적인 포위 공격 중 데스탱의 행동은 프랑스-미국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13]

1781년 프랑스 해군이 영국 해군을 물리친 체서피크 해전 모습


콘월리스 경의 항복 프랑스군(왼쪽)과 미국군(오른쪽)에게 항복하는 영국군을 묘사한 그림.


1780년 콩트 드 로샹보가 도착하면서 동맹 관계는 개선되었고, 그는 워싱턴 장군과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체서피크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의 활약으로 1781년 10월 요크타운 포위전에서 결정적인 프랑스-미국 연합군의 승리를 거두었고, 북미에서의 주요 전투는 사실상 종식되었다.

신생 미국은 군사, 재정 및 외교적 지원을 위해 프랑스 가톨릭에 의존했고, 이로 인해 반가톨릭 정서가 상당히 감소했다.[14] 역사가 프랜시스 코지아노는 국왕이 교황을 대체하여 공통의 적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신생 국가에 남기로 선택한 왕당파 사이에서 반가톨릭 정서는 여전히 강했지만, 1780년대까지 미국 전역, 특히 역사적으로 가톨릭에 대한 적대감으로 알려진 뉴잉글랜드에서 가톨릭에 대한 법적 관용이 확립되었다. 코지아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전쟁과 위기 속에서 뉴잉글랜드인들은 영국에 대한 충성심뿐만 아니라 그들의 깊이 뿌리 박힌 편견 중 하나도 포기했다."[15]

3. 1. 프랑스의 지원

1763년 프랑스가 축출된 지 10년 만에 영국의 식민지들이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루이스 데 운사가 이 아메사가의 지휘 아래 프랑스는 독립 운동에 비밀리에 군대와 군수품을 제공했다.[10]

제2차 대륙 의회가 1776년 7월 독립을 선언한 후, 파리에 있는 대표들은 대륙군을 위해 장교들을 모집했는데, 특히 라파예트 후작이 소장으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프랑스에 대한 불신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표들은 공식적인 동맹을 추구했다. 함대를 준비하고 1777년 10월 사라토가 전투에서 미국의 승리를 목격한 후, 프랑스는 1778년 2월 6일 상업 조약과 동맹 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의 독립이 확보될 때까지 영국과 싸울 것을 약속했다.[11][12]

군사 동맹은 순조롭게 시작되지 않았다. 1778년 프랑스 해군 제독 데스탱은 함대를 이끌고 북미로 항해하여 미국 장군 존 설리반과 함께 뉴포트, 로드아일랜드주에 있는 영국 전초 기지를 점령하려는 합동 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데스탱은 영국 함대와 맞서기 위해 작전을 포기하고 설리반과 라파예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수리하기 위해 보스턴으로 항해했다. 해군 지원이 없자 계획은 무산되었고, 설리반 휘하의 미국군은 스스로 전투적인 후퇴를 해야 했다. 미국의 분노는 널리 퍼졌고, 프랑스 왕립 해군의 여러 선원들이 반프랑스 폭동에서 사망했다. 사바나, 조지아에서의 재난적인 포위 공격 중 데스탱의 행동은 프랑스-미국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13]

1780년 콩트 드 로샹보가 도착하면서 동맹 관계는 개선되었고, 그는 워싱턴 장군과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체서피크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의 활약으로 1781년 10월 요크타운 포위전에서 결정적인 프랑스-미국 연합군의 승리를 거두었고, 북미에서의 주요 전투는 사실상 종식되었다.

신생 미국은 군사, 재정 및 외교적 지원을 위해 프랑스 가톨릭에 의존했고, 이로 인해 반가톨릭 정서가 상당히 감소했다.[14] 역사가 프랜시스 코지아노는 국왕이 교황을 대체하여 공통의 적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신생 국가에 남기로 선택한 왕당파 사이에서 반가톨릭 정서는 여전히 강했지만, 1780년대까지 미국 전역, 특히 역사적으로 가톨릭에 대한 적대감으로 알려진 뉴잉글랜드에서 가톨릭에 대한 법적 관용이 확립되었다. 코지아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전쟁과 위기 속에서 뉴잉글랜드인들은 영국에 대한 충성심뿐만 아니라 그들의 깊이 뿌리 박힌 편견 중 하나도 포기했다."[15]

3. 2. 평화 협상

1782년 파리에서 미국과 영국 사이에 진행된 평화 협상에서 프랑스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16] 프랑스 외무장관 베르젠느 백작(Charles Gravier, comte de Vergennes)은 미국 의회가 프랑스의 조언을 따르도록 전략적으로 조종했다.[16] 그러나 미국 대표단인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특히 존 제이는 프랑스가 강력한 미국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영국과 직접 협상하는 것이 더 나은 조건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16]

1782년 9월, 베르젠느가 미국의 이익에 강하게 반대하는 해결책을 제안하면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찾아왔다.[16] 프랑스는 전쟁으로 지쳐 있었고,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평화를 원했다.[16] 스페인은 영국으로부터 지브롤터를 점령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6] 베르젠느는 스페인이 지브롤터 대신 받아들일 거래를 제안했는데, 이 거래에 따르면 미국은 독립을 얻지만 애팔래치아 산맥 동쪽 지역으로 제한되고, 영국은 오하이오 강 북쪽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16] 남부 지역에는 스페인의 통제하에 있는 독립적인 인디언 국가가 설립되어 미국이 스페인이 통제하는 미시시피 강이나 뉴올리언스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완충국가가 될 것이었다.[16]

이에 제이는 즉시 영국에 프랑스와 스페인을 배제하고 직접 협상할 의향이 있다고 통보했다.[16] 영국 총리 셸번 경(William Petty, 2nd Earl of Shelburne)은 미국을 프랑스로부터 분리하고 새로운 국가와 가치 있는 경제적 파트너십을 맺을 기회를 보고 이에 동의했다.[16] 서부 지역에 대해 협상된 조건은 다음과 같다. 미국은 미시시피 강 동쪽, 플로리다 남쪽, 캐나다 남쪽의 모든 땅을 획득하고, 북쪽 경계는 오늘날과 거의 동일하게 남았다.[17] 또한 미국은 캐나다 연안에서 어업권을 부여받았고, 영국 상인과 충성파가 재산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허용하기로 합의했다.[17] 이 조약은 미국에 매우 유리했으며, 의도적으로 영국의 관점에 유익하도록 만들어졌다.[17] 셸번 총리는 영국과 급속히 성장하는 미국 간의 매우 수익성 있는 양방향 무역을 예측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18][19][20] 프랑스와의 무역은 훨씬 더 작은 규모로 남았다.[18][19][20]

4. 프랑스 혁명과 미국

프랑스 혁명으로 부르봉 왕정이 무너지자, 초기 미국은 절대 세습 군주제가 입헌 공화제로 대체된 프랑스의 변화를 지지했다.[21] 그러나 프랑스의 상황이 악화되고 혁명 정부가 더욱 권위주의적이고 잔혹해짐에 따라 미국의 동정심은 줄어들었다.[21] 테러 시대와 같은 사건들은 미국이 프랑스에 대해 가졌던 호의를 감소시켰다.[21] 1789년 프랑스를 떠난 토마스 제퍼슨과 달리 구베르누어 모리스 (1752-1816)는 프랑스 혁명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봤다.[21]

1793년, 혁명 정부가 국왕을 처형한 후 프랑스가 영국과 그 동맹국들에 의해 여러 방면에서 침략당하면서 위기가 발생했다.[22] 미국의 젊은 연방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고, 일부는 미국이 1778년 동맹에 따라 여전히 프랑스 편에서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알렉산더 해밀턴과 제퍼슨의 조언에 따라) 새로운 프랑스 정부를 인정했지만, 1793년 중립 선언에서 표명된 바와 같이 영국과의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하지 않았다.[22] 의회는 이에 동의했고, 1년 후 중립법을 통과시켜 미국 시민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고 미국 영토를 갈등 당사자 어느 쪽도 작전 기지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워싱턴의 정책을 배신으로 간주했다.[22]

프랑스는 영국과 미국 간의 제이 조약(1794년 11월)을 적대적 행위로 간주했다. 이 조약은 프랑스가 영국과 전쟁 중일 때 10년간의 무역을 열었다.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존 애덤스는 1797년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을 만나기 위한 특별 사절단을 파리로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대표단은 프랑스 정부와의 협상을 위해 뇌물을 지불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애덤스는 "XYZ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을 폭로했는데, 이는 유럽의 여러 법원에서 뇌물 수수가 드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의 분노를 크게 불러일으켰다.[25]

1800년 조약 체결 장면. 준전쟁을 종식시키고 프랑스-미국 동맹을 끝맺었습니다.


프랑스와의 긴장은 "준전쟁"이라 불리는 비공식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서인도 제도에서 양국 해군이 서로의 선박을 공격하는 2년간의 해상 교전을 포함했습니다. 미 해군의 예상치 못한 전투력과 프랑스의 지배 세력인 디렉토리의 약화와 18 브뤼메르 쿠데타에서의 최종 타도는 탈레랑으로 하여금 협상을 재개하게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애덤스 대통령은 자신의 당 내 반프랑스 강경파를 거부하고 프랑스에 평화를 제안하는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1800년 그는 윌리엄 반스 머리를 프랑스에 평화 협상을 위해 파견했고, 연방주의자들은 배신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 후 1800년 9월 30일에 체결된 1800년 조약(또는 "모르트퐁텐 조약"이라고도 함)에 구체화된 협상은 바다에서 중립국의 권리를 확인하고 1778년 프랑스와의 동맹을 폐기했습니다.[26] 이 조약은 미국의 2천만 달러에 달하는 "프랑스 약탈 청구"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결국 이러한 청구에 대한 지불을 했습니다. 1800년 조약은 미국이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에 대해 중립을 유지할 것임을 보장했고, 미국과의 "얽히는" 프랑스 동맹을 종식시켰습니다.[26] 사실 이 동맹은 1778년부터 1783년 사이에만 유효했습니다.[27][28]

제임스 배너(James Banner)에 따르면, 보수적인 미국인들은 종교에 대한 경멸과 단두대에 대한 열정을 보인 프랑스 혁명에 강하게 반발했다.[34] 제임스 몽고메리(James Monroe)는 1794년 파리에서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을 단두대에서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34] 제퍼슨파는 처음에는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지만, 1799년 나폴레옹이 집권한 후 제퍼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그것을 공화주의의 정반대로 규탄했다. 그 결과 1778년 동맹이 파괴되었고, 미국과 프랑스 사이의 우정도 사라졌다.[34][35]

5. 19세기

두 국가 간의 관계는 무역과 이민 모두 저조한 상태로 20년 동안 대체로 조용했다. 미국은 1823년 프랑스와 같은 유럽 열강이 신세계의 땅을 식민지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몬로 독트린"을 발표했다. 프랑스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의 패권이 무너지면서 상업적으로나 제국적으로 확장하는 데 강한 관심을 가졌다. 프랑스 고위 관리들 사이에서는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 독립한 국가들 중 일부가 부르봉 왕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바람이 있었지만, 실제 작전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랑스 관리들은 미국의 입장을 무시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라는 두 개의 반동적인 군주국은 미국의 공화주의에 강력히 반대했고 미국이 그들의 일에 전혀 개입하지 않기를 바랐다.[36]

1831년 미국과 프랑스 간의 조약은 나폴레옹 전쟁 중 프랑스의 압류에 대한 미국 선주들의 약탈 청구에 대해 프랑스가 2,500만 프랑을 지불하도록 규정했다. 프랑스는 유럽의 청구는 지불했지만 미국에는 지불을 거부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격분하여 1834년 미국 해군에 대비 태세를 취하도록 명령하고 의회에 법안을 요청했다. 잭슨의 정적들은 모든 법안을 막았다. 프랑스는 불쾌했지만 결국 사과를 대가로 돈을 지불하기로 투표했는데, 잭슨은 이를 거부했고 외교 관계는 1835년 12월 잭슨이 약간 더 우호적인 말을 할 때까지 단절되었다. 결국 영국의 중재를 통해 프랑스는 돈을 지불했고 우호적인 관계가 재개되었다.[37]

1835년 제임스 에이킨(James Akin)의 풍자 만화.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왕관이 떨어지려는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 1세에게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잭슨은 해왕 넵투누스의 조언을 받고 미국 군함의 지원을 받고 있다. 왼쪽에는 미국인을 비난하는 작은 개구리로 묘사된 프랑스 정치인들이 있다.


알렉시 드 토크빌 (1805-1859), 미국 문화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럽 학자.


미국과 프랑스 간의 문화 교류가 조촐하게 재개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미국의 민주주의』(1835)의 저자인 귀스타브 드 보몽과 알렉시 드 토크빌의 집중적인 연구 방문이었다. 이 책은 양국에서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오늘날까지도 미국의 자기 이해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해리엇 비처 스토, 랄프 왈도 에머슨과 같은 미국의 작가들은 감사하는 프랑스 독자들에게 어필했다. 프랑스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은 이상적인 미국 사회를 미래의 모델로 제시했다. 미국을 여행한 프랑스 여행객들은 프랑스에서 많은 영향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혁명에서 인기 있는 영웅으로 남아 1824년 승리적인 미국 순회 공연을 한 라파예트 후작의 이름으로 종종 환영받았다.[38] 많은 정치 망명자들이 뉴욕에서 피난처를 찾았다.[39]

1840년대에 영국과 프랑스는 텍사스 공화국의 지속적인 독립을 후원하고 미국이 캘리포니아를 얻으려는 움직임을 막는 것을 고려했다. 세력 균형 고려 사항으로 인해 영국은 미국의 힘을 제한하기 위해 서부 영토를 미국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기를 원했고, 결국 프랑스는 영국의 힘을 제한하기 위해 이러한 개입에 반대했는데, 이는 프랑스가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하고 이전에 미국 혁명을 지원했던 것과 같은 이유였다. 따라서 미국 대륙의 영토 성장의 대부분은 파리에서 문제 없이 받아들여졌다.[40]

5. 1. 나폴레옹 시대와 루이지애나 매입

미국 하원 의사당의 나폴레옹 1세 부조


스페인 제국은 광대한 루이지애나 영토 소유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었고, 1800년 나폴레옹에게 넘기기를 원했다.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를 아이티와 함께 신세계 제국의 기반으로 구상했고, 루이지애나는 서인도 제도의 노예 노동력에 식량을 공급하는 곡창지대가 될 것이었다. 제퍼슨 대통령은 약한 스페인은 용인할 수 있었지만 서쪽의 강력한 프랑스 제1제정은 용납할 수 없어, 프랑스가 미시시피 강을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쟁을 고려했다. 제퍼슨은 제임스 몽로를 프랑스에 파견하여 뉴올리언스 주변의 토지를 가능한 한 많이 매입하도록 했다.[29]

놀랍게도 나폴레옹은 전체 영토를 매각하는 데 동의했다. 억누를 수 없는 아이티 혁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보나파르트의 북미 계획은 무산되었다. 다가오는 전쟁에서 루이지애나가 영국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1803년 4월 미국에 1,500만 달러에 매각했다. 영국 은행가들이 이 거래에 자금을 지원했고, 미국 정부 채권을 받고 파리로 금을 운반했다. 전쟁 없이 미국의 면적이 두 배로 늘어났다.[29]

루이지애나 매입 직후인 1803년에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전쟁을 재개했다. 두 나라 모두 미국의 중립성에 도전하고 적국과의 미국의 무역을 방해하려 했다. 제퍼슨은 나폴레옹과 영국 모두를 불신했지만, 영국(군주제, 귀족과 강력한 해군 및 캐나다의 위치)을 미국의 이익에 대한 더욱 즉각적인 위협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그와 매디슨은 일반적으로 친프랑스적 입장을 취하고 금수 조치를 사용하여 영국 무역을 타격했다. 양측 모두 미국의 해상권을 침해했지만 영국이 훨씬 더 심하게 침해하여 공해상에서 미국의 배에서 수천 명의 미국 선원을 납치하여 영국 해군에 강제로 징집했다.[30] 제퍼슨은 1807년 모든 외국 무역, 수출 및 수입을 금지한 금수법에 서명했다. 영국을 타격하기 위해 고안되었지만 미국 상업에 훨씬 더 큰 피해를 입혔고, 제퍼슨이 퇴임하면서 1809년에 폐지되었다. 새로운 매디슨 행정부는 영국의 침략에 대해 더 직접적인 접근 방식을 선택했고 1812년에 영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1812년 전쟁 동안 미국과 프랑스 사이에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동맹이 재개되었다는 감각이나 군사 활동을 조율하기 위한 직접적인 노력은 전혀 없었다.[31]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미국은 텍사스에 대한 프랑스의 주장과 스페인의 인접한 식민 제국과의 국경 분쟁을 상속받았다. 이러한 문제는 1819년 애덤스-오니스 조약에 의해 해결되었고, 이는 미국의 플로리다 매입을 위한 길을 열었다.[32]

5. 2. 몬로 독트린과 프랑스

5. 3. 남북 전쟁과 프랑스

미국 남북 전쟁 당시 프랑스는 중립을 지켰지만, 나폴레옹 3세는 미합중국 연합국을 지지하여 미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연합국으로부터 새로운 동맹을 얻고, 면화 무역을 보호하며, 제2 멕시코 제국 지배에 대한 그의 큰 투자를 보호하기를 바랐다. 프랑스는 혼자서 행동하기에는 너무 약했고, 연합국을 지지했지만 궁극적으로 미국과의 전쟁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던 영국의 지원을 구했다.[41]

나폴레옹 3세는 1863년 전쟁을 이용하여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안 1세를 멕시코 왕좌에 앉혔다. 워싱턴은 항의했고 새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42] 나폴레옹은 연합국의 승리가 프랑스의 멕시코 지배를 가능하게 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마티아스 로메로는 프랑스의 점령에 맞서 멕시코를 지원하는 데 대해 의회의 일부 지지를 얻었다.[43][44] 프랑스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는 연합국이 패배 직전일 때까지 멕시코 반군에 대한 지원을 신중하게 제한했다.[45]

1865년까지 미국의 외교적 압력과 멕시코 국경에 집결된 미군은 나폴레옹 3세로 하여금 프랑스 군대와 지원을 철수하도록 설득했다. 민주적인 멕시코 정부는 곧 복원되었고 막시밀리안은 처형되었다.[46]

1865년 4월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 이후 프랑스 시민들로부터 깊은 애도가 쏟아졌다. 링컨의 죽음에 대한 국민들의 애도를 표현하는 메달을 위한 전국적인 모금이 이루어졌다.[47]

연합국의 승리, 프랑스의 멕시코 철수, 러시아의 알래스카 매각은 미국이 서반구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했다.[48]

6. 20세기 초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나폴레옹 3세의 몰락은 프랑스-미국 관계 개선에 기여했다. 미국 여론은 독일의 승리를 지지했다. 독일군의 파리 포위 공방전 당시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 엘리후 B. 워시번이 이끄는 소규모 미국인들은 파리 시민들에게 많은 의료, 인도적 및 외교적 지원을 제공하여 미국에 큰 공로를 얻었다.[49][50] 이후 수년 동안 미국의 급속한 부, 산업 및 인구 증가로 인해 양국 관계의 역학 관계가 변화하면서 미국이 기존 강대국들을 능가하게 되었다. 무역은 저조했고, 프랑스는 미국 은행 및 보험 회사의 활동을 최소화했으며, 관세는 높았고, 상호 투자는 드물었다.[51]

유명 작가 마크 트웨인은 한때 유머러스하게 "프랑스에는 겨울도 여름도 도덕도 없다. 이러한 단점을 제외하고는 좋은 나라이다. 프랑스는 일반적으로 매춘부들이 통치해왔다"라고 썼다.[52]

이 기간 동안 양국 관계는 우호적인 상태를 유지했는데, 1884년 프랑스 국민이 미국에 선물한 자유의 여신상이 이를 상징한다.

파리에서의 자유의 여신상 건설


1870년부터 1918년까지 프랑스는 군주제 국가들로 이루어진 유럽에서 유일한 주요 공화국이었으며, 이는 미국에 대한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인들의 미국 이민은 많지 않았지만, 많은 프랑스인들은 미국을 기회의 땅이자 현대적인 사상의 원천으로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미국을 저속한 물질주의에 기반을 둔, 중요한 문화가 부족하고 지식인에 대한 불신을 자랑하는 나라로 보았다. 자칭 프랑스 지식인 중 미국을 존경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53]

1906년 독일이 모로코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에 도전했을 때 (탕헤르 사건 및 아가디르 사건 참조),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프랑스 편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경제적으로 막강해지고 영국과의 유대감을 강화함에 따라 프랑스는 점점 더 영국-미국 세력의 문화에 대한 위협을 우려했다.[54]

학생 교류는 특히 미국 학생들의 프랑스 유학이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프랑스는 많은 미국인이 대학원 교육을 위해 독일로 가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고, 더 많은 미국인을 유치하는 방법을 논의했다.[55] 1870년 이후 수백 명의 미국 여성이 프랑스와 스위스로 가서 의학 학위를 받았다. 최고의 미국 학교들은 그들에게 문을 닫았고, 미국에서 허용된 것보다 우월한 비용이 많이 드는 선택을 했다.[56]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 대학의 정규 등록이 급감하자 프랑스 정부는 등록 인원 부족을 메우기 위한 부분적인 조치와 더 중요하게는 미국 고등교육에서 독일의 영향력을 중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국 학생들을 유치하기로 결정했다. 1918년 말 전쟁이 끝난 후 느린 귀환을 기다리던 수천 명의 미군이 특별히 그들을 위해 마련된 대학 프로그램에 등록했다.[57]

6. 1.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의 여걸 잔 다르크를 묘사한 미국의 애국 포스터.


제7사단의 일부인 제64연대의 미군 병사들이 1918년 11월 11일 휴전 소식을 축하하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고, 1917년 4월 연합국 편에 참전할 때까지 거의 3년 동안 그 상태를 유지했다.[58] 워싱턴은 전쟁 전과 후 모두 프랑스의 전쟁 수행을 위해 미국산 식량, 석유, 화학 물질을 구입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대출 형식으로 제공했다.[58] 최초로 서부 전선에 도착한 미군 병사들은 (더 많은 병사를 수송하기 위해) 중장비를 가져오지 않았다.[58] 전투에서 그들은 SPAD XIII 전투기와 르노 FT 경전차와 같이 프랑스의 포병, 항공기, 전차를 사용했으며, 이들은 미국 원정군의 항공 및 기갑 부대에서 서부 전선에서 활약했다.[58] 1918년 미국은 존 퍼싱 장군의 지휘 아래 200만 명이 넘는 전투 병력을 파병했으며, 이들은 서부 전선의 자체 구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다.[58] 그들은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우위를 제공했고, 독일군은 막대한 손실을 메울 수 없었으며 1918년 9월 사실상 붕괴되었다.[58][59]

6. 2. 베르사유 조약과 국제 연맹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프랑스인들에게 전쟁 영웅으로 여겨졌으며, 그의 파리 도착은 널리 환영받았다.[60] 그러나 양국은 프랑스가 독일을 약화시키고 프랑스 땅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에 대한 배상을 독일로부터 받아내려는 정책을 두고 충돌했다.[60]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의 목표는 미래에 프랑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었고, 그의 방식은 독일과의 우정이 아니라 반환, 배상, 그리고 보장이었다.[60] 클레망소는 윌슨의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원칙이라고 생각한 것에 대해 거의 신뢰하지 않았으며, "하느님조차도 십계명으로 만족했지만, 윌슨은 14개(윌슨의 14개 조항)를 고집한다"고 말했다.[60]

윌슨 대통령은 클레망소,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와 함께 회의에서 주요 결정(Big Four)을 내렸다.[60] 윌슨은 새로운 국제 연맹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다른 두 사람도 동의했지만 새로운 국제 연맹의 가치에 대해서는 덜 확신했다.[60]

클레망소는 또한 프랑스의 주도하에 라인란트에 완충 국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61] 미국과 영국 대표들은 이러한 주장이 자결의 원칙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며 미래의 전쟁을 초래할 것이라고 보았고, 클레망소에게 타협안을 제시하여 이를 수용하게 했다.[61] 문제의 영토는 5년에서 15년 동안 연합군이 점령하고, 라인강 동쪽 50km 지역은 비무장화될 예정이었다.[61] 윌슨과 로이드 조지는 독일의 공격으로부터 프랑스를 보장하는 조약을 지지하기로 합의했다.[61] 워싱턴의 공화당 지도자들은 프랑스와의 안보 조약을 지지하려 했으나, 윌슨이 이를 베르사유 조약과 연계시키려 했기 때문에 상원 투표에 부쳐지지 않았고, 공화당은 윌슨이 허용하지 않은 특정 수정 없이는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61]

프랑스 역사가 장바티스트 뒤로셀은 클레망소를 윌슨보다 현명하고, 동정심이 많고 정의에 헌신적이지만 세계 평화와 질서는 독일의 위협을 영구적으로 억압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이해한 인물로 묘사한다.[62] 반대로 블루멘탈(Blumenthal, 1986)은 윌슨의 정책이 클레망소가 요구한 가혹한 조건보다 훨씬 건전했다고 주장하며,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는 독일이 세계 경제와 정치 공동체에 동등한 파트너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63][64]

6. 3. 전간기

워싱턴 D.C.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저. 1936년부터 1985년까지 프랑스 대사관으로 사용되었다.


전간기 동안 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920년대부터 미국의 지식인, 화가, 작가, 관광객들은 프랑스 미술, 문학, 패션, 와인, 요리에 대한 관심으로 프랑스를 방문했다.[65] 워싱턴이 파리가 전쟁 차관을 상환할 것을 요구하고, 베를린이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프랑스 북부 지역의 피해 복구 비용을 지불하려 하지 않아 긴장이 고조되었다. 결국 미국 은행이 독일에 대출을 제공하여 독일이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하고, 프랑스가 다시 미국 전쟁 차관을 상환하는 도스 계획이라는 합의에 도달했으나, 이 시스템은 대공황으로 붕괴되었다.[66]

조세핀 베이커와 같은 많은 미국 예술가들이 프랑스에서 인기를 얻었다. 파리는 특히 미국의 재즈 음악과 흑인 예술가들에게 매우 개방적이었는데, 당시 미국 상당 부분과 달리 프랑스에는 인종차별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67] 윌리엄 포크너, F.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수많은 작가들이 프랑스 생활 경험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잃어버린 세대로 알려진 이들의 파리 생활은 헤밍웨이의 회고록 ''이동하는 축제''에 기록되어 있다.[67]

그러나 1920년대에는 반미주의가 대두되었는데, 많은 프랑스 전통주의자들이 할리우드의 힘에 놀라 미국이 근대성을 대표하며 전통적인 프랑스 가치관, 관습, 대중 문학을 위협한다고 경고했다.[68] 미국의 영향에 대한 우려는 반세기 후인 1992년 미국이 40억 달러를 투자하여 디즈니랜드 파리 테마파크를 개장했을 때 더욱 커졌다. 루브르 박물관보다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했고, 곧 상징적인 미국 만화 캐릭터 미키 마우스가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아스테릭스보다 더 친숙해졌다는 말이 나왔다.[69][70]

뉴욕의 J. 월터 톰슨 회사는 전간기 최고의 미국 광고 대행사였다. 이 회사는 유럽에 지사를 설립했고, 1927년 파리에도 지사를 설립했다. 이 지사들 대부분은 영국과 독일처럼 곧 지역 최고 대행사가 되었지만, JWT 파리 지사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 부진했다. 그 원인으로는 프랑스인과 미국인 사이의 문화적 충돌과 잠재적 고객들 사이의 미묘한 반미주의가 있었다. 또한 프랑스 시장은 모든 외국 기업의 진출을 막기 위해 엄격하게 규제되고 보호되었고, 파리의 미국 광고인들은 자신들의 오만함과 무감각함을 잘 감추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71]

1928년 양국은 켈로그-브리앙 조약의 주요 후원국이었다. 대부분의 주요 국가들이 지지한 이 조약은 전쟁의 사용을 포기하고,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촉진하며, 공격을 막기 위해 집단적 힘을 사용할 것을 촉구했다. 이 조약의 조항은 유엔 헌장과 다른 조약에 통합되었고, 보다 적극적인 미국의 정책으로 가는 발판이 되었다.[72]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인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외교적 교류는 최소화되었다.[73]

7.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 미국은 나치의 위협에 맞서 프랑스가 공군을 무장하도록 지원했다. 전쟁의 갑작스러운 발발은 프랑스가 독일이 더 크고 더 발전된 공군을 보유하고 있음을 깨닫게 만들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오랫동안 프랑스에 관심이 많았고 프랑스 상원의원이자 아모리 드 라 그랑주 남작과 개인적인 친구였다. 1937년 말, 그는 루즈벨트에게 프랑스의 약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루즈벨트는 흔쾌히 승낙하여 전쟁부가 비밀리에 가장 현대적인 미국 항공기와 기타 장비를 프랑스에 판매하도록 강요했다.[74][75] 미군은 최신 설계의 판매에 반대했고 미국 공장은 생산을 늘리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1940년 프랑스가 항복하기 전에 200대 미만의 미군 전투기만 인도될 수 있었다.[76] 파리는 자체 항공기 생산을 급격히 확장했지만 너무 적고 너무 늦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이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하자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이듬해 봄까지 별다른 행동이 없었습니다. 독일의 기습 작전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압도하고 벨기에에 갇힌 프랑스와 영국군을 포위했다. 프랑스는 독일의 항복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했고 곧 괴뢰국이자 권위주의 정권으로 변모하여 페탱의 통치를 받았으며, 그의 비공식적인 자리는 비시에 있었다.[77]

쉬르느 미국 묘지 기념관


==== 프랑스 패전과 비시 정부 ====

미국과 비시 프랑스 및 드 골 사이의 관계는 주저하고 일관성이 없었다. 루스벨트는 드 골을 싫어했고, 드 골이 "견습 독재자"라는 윌리엄 D. 리히의 견해에 동의했다.[78]

전쟁 후 미국 정부는 하버드대 교수 윌리엄 랭거에게 비시에 대해 처음에는 매우 호의적이었던 이 정책을 정당화하도록 요청했는데, 이 책은 "우리의 비시 도박"(1947)이라는 제목이었고, 이 정책을 거의 완전히 미화했다.[79]

랭거는 워싱턴이 1940년 봄 프랑스의 갑작스러운 붕괴에 충격을 받았고, 독일이 거대한 프랑스 함대를 장악하고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를 이용할까 두려워했다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 루스벨트 행정부는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FDR은 그의 측근인 윌리엄 D. 리히 제독을 대사로 임명했고, 프랑스와의 관계 단절로 인해 영국을 대표하기도 했던 대사관[80]은 파리에서 비시로 이전했고, 곧 앙바사되르 호텔[81][82]로, 그리고 옆집인 "빌라 이카"로 이동했다.[83] 비시 정권은 공식적으로 중립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추축국에 종속되었다. 미국은 1942년 말 독일이 비시가 이전에 자율적으로 통치했던 지역을 직접 통제한 후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84]

랭거의 책은 그 후 1950년 그의 변호사가 페탱의 재판 재심을 요청하는 새로운 증거로 사용되었다(이 사건은 결국 기각되었다).[79] 한 평론가에 따르면 이 책은 "우리의 비시 실수"라고 불렸어야 했다.[85]

1944년 노르망디의 미군


1944년 오를레앙의 미 육군 의무병


당대의 역사가에 따르면, 미국 대중이 자국 정부의 비시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고, 비시의 본색을 알아차렸으며, 심지어 드 골의 자유 프랑스 운동을 지지했다는 여러 가지 명백한 징후가 있었다.[86] 1944년 7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드 골은 대중으로부터 매우 따뜻한 환영을 받았지만, 동시에 루스벨트는 알제리에서 드 골 주변에 형성된 임시 정부가 프랑스 해방 후 정당과 노동조합을 실제로 대표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느렸다.

==== 자유 프랑스와 미국의 지원 ====

미국은 1942년 말까지 비시 프랑스와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했으며, 드골의 망명 정부와는 공식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87][88] 루스벨트와 드골 사이의 관계는 긴장 상태였으며, 1941년 12월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생피에르 미클롱 섬을 점령하자 미국 국무장관은 강하게 항의했다.[79]

1942년 11월 연합군의 토치 작전 이후, 아이젠하워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을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인정하여 자유 프랑스군에게 타격을 주었다.[89] 다를랑은 협력자인 반역자로 여겨졌으나, 루스벨트는 이를 "일시적인 방편"이라고 옹호했다.[91]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아이젠하워는 드골에게 파리를 프랑스군이 공식적으로 해방할 수 있도록 약속했다.[92] 필립 르클레르 소장이 이끄는 프랑스 제2기갑사단이 파리 해방 임무를 맡았고,[94]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파리 중심부 해방을 위해 싸웠다. 아이젠하워는 드골과 해방된 파리에 처음 진입하는 연합군이 프랑스군이 되도록 합의했다.[93][94][95]

미국 정부는 1944년 7월 해방된 프랑스에서 프랑스 임시정부를 사실상의 권력으로 인정했고,[96] 1944년 10월 23일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를 완전히 인정했다.[97][98] 연합군은 점령지 연합군 군정부(AMGOT)를 설립했지만, 드골은 해방된 지역에 주지사를 임명하여 AMGOT는 프랑스에서 관할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한편, 조지 S. 패튼 장군이 이끄는 미국 제3군은 프랑스 북부를 거쳐 로렌을 해방하면서 독일군을 몰아냈다. 루스벨트는 아시아에서의 유럽 식민주의 종식을 위해 프랑스 인도차이나를 신탁통치 하에 두려고 했으나, 윈스턴 처칠은 드골과 협력하여 이를 저지했다. 결국 중국의 불안정한 상황으로 인해 이 계획은 폐기되었다.[99]

7. 1. 프랑스 패전과 비시 정부

미국과 비시 프랑스 및 샤를 드 골 사이의 관계는 주저하고 일관성이 없었다. 루스벨트는 드 골을 싫어했고, 드 골이 "견습 독재자"라는 윌리엄 D. 리히의 견해에 동의했다.[78]

전쟁 후 미국 정부는 하버드대 교수 윌리엄 랭거에게 비시에 대해 처음에는 매우 호의적이었던 이 정책을 정당화하도록 요청했는데, 이 책은 "우리의 비시 도박"(1947)이라는 제목이었고, 이 정책을 거의 완전히 미화했다.[79]

랭거는 워싱턴이 1940년 봄 프랑스의 갑작스러운 붕괴에 충격을 받았고, 독일이 거대한 프랑스 함대를 장악하고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를 이용할까 두려워했다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 루스벨트 행정부는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FDR은 그의 측근인 윌리엄 D. 리히 제독을 대사로 임명했고, 프랑스와의 관계 단절로 인해 영국을 대표하기도 했던 대사관[80]은 파리에서 비시로 이전했고, 곧 앙바사되르 호텔[81][82]로, 그리고 옆집인 "빌라 이카"로 이동했다.[83] 비시 정권은 공식적으로 중립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추축국에 종속되었다. 미국은 1942년 말 독일이 비시가 이전에 자율적으로 통치했던 지역을 직접 통제한 후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84]

랭거의 책은 그 후 1950년 그의 변호사가 페탱의 재판 재심을 요청하는 새로운 증거로 사용되었다(이 사건은 결국 기각되었다).[79] 한 평론가에 따르면 이 책은 "우리의 비시 실수"라고 불렸어야 했다.[85]

당대의 역사가에 따르면, 미국 대중이 자국 정부의 비시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고, 비시의 본색을 알아차렸으며, 심지어 드 골의 자유 프랑스 운동을 지지했다는 여러 가지 명백한 징후가 있었다.[86] 1944년 7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드 골은 대중으로부터 매우 따뜻한 환영을 받았지만, 동시에 루스벨트는 알제리에서 드 골 주변에 형성된 임시 정부가 프랑스 해방 후 정당과 노동조합을 실제로 대표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느렸다.

7. 2. 자유 프랑스와 미국의 지원

미국은 1942년 말까지 비시 프랑스(비시 프랑스)와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했으며, 샤를 드골(샤를 드골)의 망명 정부와는 공식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87][88] 루스벨트(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드골 사이의 관계는 긴장 상태였으며, 1941년 12월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자유 프랑스군)이 생피에르 미클롱(생피에르 미클롱) 섬을 점령하자 미국 국무장관은 강하게 항의했다.[79]

1942년 11월 연합군(연합군)의 토치 작전(토치 작전) 이후, 아이젠하워(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프랑수아 다를랑(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을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인정하여 자유 프랑스군에게 타격을 주었다.[89] 다를랑은 나치와 협력한(협력자) 반역자로 여겨졌으나, 루스벨트는 이를 "일시적인 방편"이라고 옹호했다.[91]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아이젠하워는 드골에게 파리를 프랑스군이 공식적으로 해방할 수 있도록 약속했다.[92] 필립 르클레르(필립 르클레르) 소장이 이끄는 프랑스 제2기갑사단이 파리 해방 임무를 맡았고,[94]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파리 중심부 해방을 위해 싸웠다. 아이젠하워는 드골과 해방된 파리에 처음 진입하는 연합군이 프랑스군이 되도록 합의했다.[93][94][95]

미국 정부는 1944년 7월 해방된 프랑스에서 프랑스 임시정부를 사실상의 권력으로 인정했고,[96] 1944년 10월 23일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를 완전히 인정했다.[97][98] 연합군은 점령지 연합군 군정부(AMGOT)를 설립했지만, 드골은 해방된 지역에 주지사(주지사)를 임명하여 AMGOT는 프랑스에서 관할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한편, 조지 S. 패튼(조지 S. 패튼) 장군이 이끄는 미국 제3군(미국 제3군)은 프랑스 북부를 거쳐 로렌을 해방하면서 독일군을 몰아냈다. 루스벨트는 아시아에서의 유럽 식민주의 종식을 위해 프랑스 인도차이나를 신탁통치 하에 두려고 했으나, 윈스턴 처칠은 드골과 협력하여 이를 저지했다. 결국 중국의 불안정한 상황으로 인해 이 계획은 폐기되었다.[99]

8. 냉전 시대

1949년 두 나라는 북대서양 조약을 통해 다시 공식적인 동맹국이 되었고, 이 조약은 NATO 군사 동맹을 수립했다. 미국은 프랑스가 아프리카동남아시아의 식민지 통치를 회복하려는 노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했지만, 프랑스 인도차이나에서의 공산주의 봉기에 맞서 싸우는 프랑스 정부를 지원했다.[106] 그러나 1954년, 미국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디엔비엔푸에서 포위된 프랑스군을 구하기 위한 공습 요청을 거절했다.[107][108]

프랑스는 프랑스 정치계에 상당한 공산주의 세력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냉전에서 미국의 주도권에 다소 주저하면서 동참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중앙 정부에서 배제되었다.[109]

중대한 위기는 1956년에 발생했는데, 프랑스, 영국, 이스라엘이 최근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 이집트를 공격했을 때였다. 아이젠하워는 그들에게 철군을 강요했다. 수에즈 위기는 그들의 감소된 국제적 위상을 드러내면서 영국과 프랑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이후 중동 정책을 미국의 정책에 맞추었고,[110] 프랑스는 신뢰할 수 없는 동맹국으로 여기는 국가들과 거리를 두고 자체적인 길을 모색했다.[111]

8. 1. NATO 창설과 프랑스의 역할

1949년 두 나라는 북대서양 조약을 통해 다시 공식적인 동맹국이 되었고, 이 조약은 NATO 군사 동맹을 수립했다. 미국은 프랑스가 아프리카동남아시아의 식민지 통치를 회복하려는 노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했지만, 프랑스 인도차이나에서의 공산주의 봉기에 맞서 싸우는 프랑스 정부를 지원했다.[106] 그러나 1954년, 미국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디엔비엔푸에서 포위된 프랑스군을 구하기 위한 공습 요청을 거절했다.[107][108]

프랑스는 프랑스 정치계에 상당한 공산주의 세력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냉전에서 미국의 주도권에 다소 주저하면서 동참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중앙 정부에서 배제되었다.[109]

중대한 위기는 1956년에 발생했는데, 프랑스, 영국, 이스라엘이 최근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 이집트를 공격했을 때였다. 아이젠하워는 그들에게 철군을 강요했다. 수에즈 위기는 그들의 감소된 국제적 위상을 드러내면서 영국과 프랑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이후 중동 정책을 미국의 정책에 맞추었고,[110] 프랑스는 신뢰할 수 없는 동맹국으로 여기는 국가들과 거리를 두고 자체적인 길을 모색했다.[111]

8. 2. 드골의 외교 정책

샤를 드골, 하인리히 뤼프케 그리고 린든 B. 존슨, 1967


1950년대 프랑스는 핵무기 개발에 있어 미국의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이젠하워는 이를 거부했다.[112] 1958년 이전, 그는 프랑스 제4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과 프랑스가 알제리 전쟁 등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을 우려했다.[112] 샤를 드골은 1958년부터 프랑스 제5공화국에 안정을 가져왔지만, 아이젠하워는 여전히 프랑스의 핵무기 보유를 돕는 것에 주저했다.[112] 드골은 자체 ''강력한 타격력(Force de frappe)''을 갖춤으로써 서구 무기의 영미 독점에 도전하고자 했고, 아이젠하워는 드골의 핵무기 개발 계획이 나토를 약화시킬 것을 우려했다.[112] 더욱이, 아이젠하워는 핵확산을 억제하고자 했다.[112]

샤를 드골은 또한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 문제,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통합 군사 구조에서 프랑스군 철수 및 본부 이전 등의 문제로 워싱턴과 갈등을 빚었다.[113] 드골의 외교 정책은 두 초강대국의 권력과 영향력을 제한하려는 시도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프랑스의 국제적 위신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113] 드골은 프랑스를 미국의 추종자에서 비동맹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많은 지지를 받는 선도적인 선진국으로 만들고자 했다.[113]

베트남 전쟁 수행에 대해서도 양국은 의견이 달랐는데, 프랑스는 미국의 승리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114] 프랑스의 알제리 독립 전쟁 경험은 장기적으로 민주주의 국가가 상당한 병력 없이, 그리고 고문과 같은 용납할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는 외국 인구에게 정부를 강제로 부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14][115]

9. 탈냉전 시대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과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81년


샤를 드골이 1969년 실각한 후 관계는 다소 개선되었다. 그러나 작은 긴장이 간헐적으로 재현되었다. 프랑스는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유럽 연합(European Union)을 미국의 힘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인식해 왔으며, 따라서 유로(Euro)가 세계 무역에서 미국 달러(United States dollar)의 우위를 위협하고,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대안으로 유럽 방위 구상(Common Security and Defence Policy)을 개발하는 등의 목표를 추구해왔다. 전반적으로 미국은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다른 주요 유럽 국가들과 훨씬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80년대 두 국가는 일부 국제 문제에 대해 협력했지만, 리비아 폭격 작전(Operation El Dorado Canyon, 1986 United States bombing of Libya)이나 독일 재통일(German reunification)의 바람직성과 같이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의견이 갈렸다. 레이건 행정부(Presidency of Ronald Reagan)는 시베리아-유럽 파이프라인(Urengoy–Pomary–Uzhhorod pipeline, Siberia-Europe pipeline) 건설을 통해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구매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각국 정부는 굴하지 않았고, 파이프라인은 결국 건설되었다.[116]

=== 걸프 전쟁과 협력 ===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절, 프랑스는 1991년 걸프 전쟁에 다게 작전(Operation Daguet)으로 주요 참전국으로 참가하며 지지를 표명했다.[117] 프랑스 국민의회는 전쟁 기간 동안 걸프 지역의 모든 프랑스군을 미국군 지휘 아래 두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117]

=== 9.11 테러와 테러와의 전쟁 ===

2001년 발생한 9·11 테러에 대해 프랑스의 모든 정치 세력은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의 행위를 강력하게 비난했다.[118]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냉랭한 관계로 알려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미국 정보당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위해 프랑스 정보기관에 지시했고,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합동 정보기관 센터인 얼라이언스 기지를 파리에 설립했다. 그러나 모든 정치 세력은 이슬람 급진 테러에 대한 전면전에 반대했다. 알제리 전쟁과 그로 인한 프랑스 내정의 참담한 영향, 그리고 더 먼 과거의 인도차이나/베트남 전쟁 실패에 대한 기억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더욱이 프랑스는 상당한 규모의 이슬람 인구를 가지고 있었고, 시라크 대통령은 이들을 소외시킬 여유가 없었다.[118] 그 결과 프랑스는 중동에서의 미국의 군사적 노력을 지지하지 않았다. 프랑스 소설가와 영화 제작자들의 수많은 작품이 9·11 테러를 전쟁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미국의 노력을 비판했다.[119]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자크 시라크 대통령 (2001년 제27차 G8 정상회담)


2003년 3월, 프랑스는 독일, 중국, 러시아와 함께 이라크 침공을 승인하는 유엔 결의안에 반대했다.[120] 전쟁 발발 전, 프랑스 외무장관 도미니크 드 빌팽(Dominique de Villepin)은 미국의 이라크 정책을 비판하는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반복되는 불화에도 불구하고, 양국 관계는 공식적으로는 유지되었다. 미국은 프랑스의 도움 없이 영국 및 다른 동맹국들과 긴밀히 협력했다.[121] 프랑스 제품 불매 운동에 대한 미국의 분노는 '프리덤 후라이(Freedom fries)'로 프렌치프라이의 이름을 바꾼 것 외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122][1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 불매 운동 시도, 그리고 미국 내 반프랑스 정서(Anti-French sentiment in the United States)는 유럽에서 적대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124]

미국 의회 구내식당의 메뉴. '프리덤 후라이'가 눈에 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직전 미국 여론이 프랑스에 대해 분노한 주된 이유는 프랑스가 군사 작전을 승인하는 데 유리한 유엔 결의안을 거부권으로 막을 것이라고 위협했고,[126][127][128] 이라크 개입을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사담 후세인과 알카에다의 연계 주장(Saddam Hussein and al-Qaeda link allegations)과 대량살상무기(Iraq and weapons of mass destruction)에 대한 주장을 정당한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당시 미국 여론에서 프랑스를 비협조적이고 무관심한 것으로 인식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인식은 매우 강력했으며, 프랑스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오랫동안 주요 동맹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다. 양국은 미국 주도 연합군의 다른 국가들과 함께 탈레반 제거 및 아프가니스탄 안정화에 전념했는데, 아프가니스탄은 서방 세계를 공격하려는 테러리스트들의 훈련장이자 안전한 피난처로 인식되었다.

이라크 전쟁이 진행되고 미국 내 반전 여론이 증가함에 따라 양국 관계는 개선되기 시작했고, 미국인들의 프랑스에 대한 시각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개선되었다. 2006년 6월,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의 글로벌 태도 프로젝트는 미국인의 52%가 프랑스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2005년 46%에서 증가한 수치이다.[129]

헤즈볼라의 레바논 부상, 이란의 핵 프로그램(Nuclear program of Iran), 그리고 교착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프로세스(Israeli–Palestinian peace process)와 같은 문제들 이후, 조지 부시는 2006년 9월 19일 뉴욕 회담에서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와 다른 세계 지도자들에게 극단주의에 맞서 "평화를 위해 일어서라"고 촉구했다.

유엔에서의 강력한 프랑스와 미국의 외교 협력은 레바논에서 시리아군(Syrian Armed Forces) 철수를 가져온 시더 혁명(Cedar Revolution)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와 미국은 2006년 이스라엘-레바논 분쟁(2006 Israel-Lebanon conflict)의 휴전을 가져오기 위한 유엔 결의안 1701호를 만들면서 (일부 긴장 속에서) 함께 협력했다.

=== 사르코지 정부 시기 관계 개선 ===

2010년 백악관에서 만난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와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


니콜라 사르코지가 2007년 프랑스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프랑스와 미국의 정치 관계는 더욱 우호적으로 변했다.[132][133][134][135] "미국형 사르코지"라고 불리기도 하는 사르코지는 자신이 "미국을 사랑하며" 자신의 별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136]

2007년 사르코지는 미국 의회에서 연설을 했는데, 이는 프랑스-미국 관계를 강력하게 확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방문 중에 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존 매케인 상원의원,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당시 대선 후보로 지명되기 전)을 만났다.[137] 2008 부쿠레슈티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캐나다,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발트 3국과 함께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 행동 계획 회원국 가입을 강력히 지지했지만, 사르코지는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와 함께 강력하게 반대했다.[138][139][140]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 중 버락 오바마와 존 매케인은 각각 후보 지명을 확보한 후 파리에서 사르코지와 만났다.[141] 2008년 이후 프랑스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 통합 사령부에 복귀했는데,[142] 이 결정은 미국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143]

2011년 두 국가는 리비아 군사 개입을 시작한 다국가 연합의 일원이었으며, 연합을 주도하고 모든 북대서양 조약 기구 공습의 35%를 수행했다. 그러나 사르코지의 리비아에 대한 관심은 더 많은 원유 생산량을 확보하고 프랑스 기업을 위한 석유 및 가스 산업의 일부를 확보하려는 욕구에 기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44] 버락 오바마는 자신의 회고록 『약속의 땅』(2020)에서 사르코지가 기만적이고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인물임을 증명했다고 썼다.[145]

=== 오바마 정부 시기 ===

2014년 2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2013년, 프랑스는 테러리스트들과 아자와드 반군의 임시 연합으로부터 말리를 해방시키기 위한 대규모 군사 작전인 세르발 작전을 개시했고, 미국은 프랑스에 물류 지원을 제공했다.[146]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시리아에 대한 군사 행동을 지지한다고 약속한 후, 미국의 존 케리 국무장관은 프랑스를 "우리의 가장 오래된 동맹국"이라고 언급했다.[147] 2014년 2월 10일, 올랑드 대통령은 거의 20년 만에 프랑스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을 국빈 방문했다.[148]

2014년 9월 19일, 프랑스는 이슬람 국가의 이라크 내 목표물을 폭격하는 데 있어 2014년 미국의 이라크 개입에 동참한다고 발표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합동참모본부 의장인 마틴 뎀프시는 올랑드 대통령의 작전 참여 결정을 칭찬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가장 오래되고 가까운 동맹국 중 하나인 프랑스는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우리의 노력에 있어 강력한 파트너이며, 프랑스와 미국의 군인들이 다시 한번 우리의 공동 안보와 공유 가치를 위해 함께 일하게 되어 기쁘다"라고 말했다.[149]

=== 트럼프 정부 시기 갈등 ===

2017년 7월 1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초청으로 프랑스를 방문하여 대테러 및 시리아 내전 등 여러 현안을 논의했으나, 무역, 이민, 기후변화 등 의견이 크게 엇갈리는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150] 2018년 4월, 마크롱 대통령은 미국 의회 연설에서 기후변화 억제를 위해 미국이 파리 기후 협정에 재가입할 것을 희망한다고 언급했다.[151]

2018년 말, 트럼프 대통령은 마크롱 대통령의 민족주의, 관세, 프랑스의 제2차 세계 대전 패배, 유럽군 계획, 그리고 프랑스 대통령의 지지율을 조롱했다.[152] 12월, 마크롱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시리아 미군 철수 결정에 대해 "동맹은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153][154]

2019년 4월, 퇴임하는 제라르 아로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는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 "동맹도, 친구도 없"고 "대화 상대가 없다"고 언급하며, 미국과의 협력에 대해서는 "유치한 대립"을 피하고 싶다고 말했다.[155][156][157] 2019년 11월, 마크롱 대통령은 NATO의 뇌사 상태를 언급하며 유럽에 대한 미국의 공약에 의문을 제기했다.[158]

2019년 3월, 미국-중국 무역 전쟁이 심화되던 시기에 마크롱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15건의 대규모 무역 및 사업 협정(총 400억 유로)에 서명했다.[159] 주요 내용은 에어버스로부터 300억 유로 규모의 항공기 구매였다.[160]

2019년 7월, 트럼프 대통령은 프랑스의 디지털세에 대한 보복 조치로 프랑스산 와인에 대한 관세 부과를 위협했다.[161] 이에 대해 프랑스 재무장관은 디지털세 계획을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고,[161] 프랑스 농업장관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162] 도널드 투스크 유럽연합 이사회 의장은 유럽연합이 프랑스를 지지하며 미국에 대한 보복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말했다.[163] 2019년 12월, 미국 정부는 프랑스의 디지털세가 미국 기술 기업에 해롭다는 결론을 내리고 프랑스산 수입품 24억 달러에 대해 최대 100%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밝혔다.[164]

2018년 4월, 워싱턴 D.C.에서 만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


2022년 지중해에서 미 해군 항공모함 해리 S. 트루먼(USS Harry S. Truman, CVN-75)에 착륙하는 프랑스 해군 다쏘 라팔(Dassault Rafale) 라팔 F3-R 전투기. 미국과 프랑스는 모두 NATO 회원국이며 군사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 바이든 정부 시기 관계 회복 노력 ===

2021년 9월, 프랑스는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간의 AUKUS 방위 기술 동맹 체결에 반발하여 미국 주재 프랑스 대사 필립 에티엔을 소환했다.[165][166][167] 이 새로운 안보 협정으로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에 핵잠수함을 제공하고, 오스트레일리아는 프랑스산 재래식 잠수함 구매 계약을 취소했다.[165][166][167] 프랑스 정부는 이를 "등 뒤에 칼을 꽂은 짓"이라고 비난했다.[165][166][167] 9월 22일, 조 바이든 대통령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양국 관계 개선을 약속했고,[168] 에티엔 대사는 9월 30일 미국으로 복귀했다.[169]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왼쪽)과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오른쪽)이 2022년 12월 워싱턴 D.C.에서 회담을 갖고 있다.


2022년 초, 프랑스는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처벌에 있어 미국 및 NATO와 긴밀히 협력했다. 2022년 12월 마크롱 대통령의 미국 방문 기간 중, 그와 바이든 대통령은 양국 간의 협력을 재확인하고 우크라이나 전쟁과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했다.[170]

2023년 4월,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 국가들이 대만 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중국과의 대립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여, 일부 미국 공화당 의원들의 분노를 사 미국-프랑스 관계 재평가를 촉구하게 만들었다.[171][172]

2023년 11월, 미국 내 프랑스 무역업자 및 투자자를 위한 E-1 비자 및 E-2 비자의 유효기간이 2년에서 4년으로 연장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173]

9. 1. 걸프 전쟁과 협력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절, 프랑스는 1991년 걸프 전쟁에 다게 작전(Operation Daguet)으로 주요 참전국으로 참가하며 지지를 표명했다.[117] 프랑스 국민의회는 전쟁 기간 동안 걸프 지역의 모든 프랑스군을 미국군 지휘 아래 두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117]

9. 2. 9.11 테러와 테러와의 전쟁

2001년 발생한 9·11 테러에 대해 프랑스의 모든 정치 세력은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의 행위를 강력하게 비난했다.[118]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냉랭한 관계로 알려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미국 정보당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위해 프랑스 정보기관에 지시했고,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합동 정보기관 센터인 얼라이언스 기지를 파리에 설립했다. 그러나 모든 정치 세력은 이슬람 급진 테러에 대한 전면전에 반대했다. 알제리 전쟁과 그로 인한 프랑스 내정의 참담한 영향, 그리고 더 먼 과거의 인도차이나/베트남 전쟁 실패에 대한 기억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더욱이 프랑스는 상당한 규모의 이슬람 인구를 가지고 있었고, 시라크 대통령은 이들을 소외시킬 여유가 없었다.[118] 그 결과 프랑스는 중동에서의 미국의 군사적 노력을 지지하지 않았다. 프랑스 소설가와 영화 제작자들의 수많은 작품이 9·11 테러를 전쟁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미국의 노력을 비판했다.[119]

2003년 3월, 프랑스는 독일, 중국, 러시아와 함께 이라크 침공을 승인하는 유엔 결의안에 반대했다.[120] 전쟁 발발 전, 프랑스 외무장관 도미니크 드 빌팽(Dominique de Villepin)은 미국의 이라크 정책을 비판하는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반복되는 불화에도 불구하고, 양국 관계는 공식적으로는 유지되었다. 미국은 프랑스의 도움 없이 영국 및 다른 동맹국들과 긴밀히 협력했다.[121] 프랑스 제품 불매 운동에 대한 미국의 분노는 '프리덤 후라이'(Freedom fries)로 프렌치프라이의 이름을 바꾼 것 외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122][1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 불매 운동 시도, 그리고 미국 내 반프랑스 정서(Anti-French sentiment in the United States)는 유럽에서 적대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124]

2003년 이라크 침공 직전 미국 여론이 프랑스에 대해 분노한 주된 이유는 프랑스가 군사 작전을 승인하는 데 유리한 유엔 결의안을 거부권으로 막을 것이라고 위협했고,[126][127][128] 이라크 개입을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사담 후세인과 알카에다의 연계 주장(Saddam Hussein and al-Qaeda link allegations)과 대량살상무기(Iraq and weapons of mass destruction)에 대한 주장을 정당한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당시 미국 여론에서 프랑스를 비협조적이고 무관심한 것으로 인식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인식은 매우 강력했으며, 프랑스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오랫동안 주요 동맹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다. 양국은 미국 주도 연합군의 다른 국가들과 함께 탈레반 제거 및 아프가니스탄 안정화에 전념했는데, 아프가니스탄은 서방 세계를 공격하려는 테러리스트들의 훈련장이자 안전한 피난처로 인식되었다.

이라크 전쟁이 진행되고 미국 내 반전 여론이 증가함에 따라 양국 관계는 개선되기 시작했고, 미국인들의 프랑스에 대한 시각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개선되었다. 2006년 6월,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의 글로벌 태도 프로젝트는 미국인의 52%가 프랑스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2005년 46%에서 증가한 수치이다.[129]

헤즈볼라의 레바논 부상, 이란의 핵 프로그램(Nuclear program of Iran), 그리고 교착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프로세스(Israeli–Palestinian peace process)와 같은 문제들 이후, 조지 부시는 2006년 9월 19일 뉴욕 회담에서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와 다른 세계 지도자들에게 극단주의에 맞서 "평화를 위해 일어서라"고 촉구했다.

유엔에서의 강력한 프랑스와 미국의 외교 협력은 레바논에서 시리아군(Syrian Armed Forces) 철수를 가져온 시더 혁명(Cedar Revolution)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와 미국은 2006년 이스라엘-레바논 분쟁(2006 Israel-Lebanon conflict)의 휴전을 가져오기 위한 유엔 결의안 1701호를 만들면서 (일부 긴장 속에서) 함께 협력했다.

9. 3. 사르코지 정부 시기 관계 개선



니콜라 사르코지가 2007년 프랑스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프랑스와 미국의 정치 관계는 더욱 우호적으로 변했다.[132][133][134][135] "미국형 사르코지"라고 불리기도 하는 사르코지는 자신이 "미국을 사랑하며" 자신의 별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136]

2007년 사르코지는 미국 의회에서 연설을 했는데, 이는 프랑스-미국 관계를 강력하게 확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방문 중에 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존 매케인 상원의원,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당시 대선 후보로 지명되기 전)을 만났다.[137] 2008 부쿠레슈티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캐나다,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발트 3국과 함께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 행동 계획 회원국 가입을 강력히 지지했지만, 사르코지는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와 함께 강력하게 반대했다.[138][139][140]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 중 버락 오바마와 존 매케인은 각각 후보 지명을 확보한 후 파리에서 사르코지와 만났다.[141] 2008년 이후 프랑스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 통합 사령부에 복귀했는데,[142] 이 결정은 미국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143]

2011년 두 국가는 리비아 군사 개입을 시작한 다국가 연합의 일원이었으며, 연합을 주도하고 모든 북대서양 조약 기구 공습의 35%를 수행했다. 그러나 사르코지의 리비아에 대한 관심은 더 많은 원유 생산량을 확보하고 프랑스 기업을 위한 석유 및 가스 산업의 일부를 확보하려는 욕구에 기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44] 버락 오바마는 자신의 회고록 『약속의 땅』(2020)에서 사르코지가 기만적이고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인물임을 증명했다고 썼다.[145]

9. 4. 오바마 정부 시기



2013년, 프랑스는 테러리스트들과 아자와드 반군의 임시 연합으로부터 말리를 해방시키기 위한 대규모 군사 작전인 세르발 작전을 개시했고, 미국은 프랑스에 물류 지원을 제공했다.[146]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시리아에 대한 군사 행동을 지지한다고 약속한 후, 미국의 존 케리 국무장관은 프랑스를 "우리의 가장 오래된 동맹국"이라고 언급했다.[147] 2014년 2월 10일, 올랑드 대통령은 거의 20년 만에 프랑스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을 국빈 방문했다.[148]

2014년 9월 19일, 프랑스는 이슬람 국가의 이라크 내 목표물을 폭격하는 데 있어 2014년 미국의 이라크 개입에 동참한다고 발표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합동참모본부 의장인 마틴 뎀프시는 올랑드 대통령의 작전 참여 결정을 칭찬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가장 오래되고 가까운 동맹국 중 하나인 프랑스는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우리의 노력에 있어 강력한 파트너이며, 프랑스와 미국의 군인들이 다시 한번 우리의 공동 안보와 공유 가치를 위해 함께 일하게 되어 기쁘다"라고 말했다.[149]

9. 5. 트럼프 정부 시기 갈등

2017년 7월 1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초청으로 프랑스를 방문하여 대테러 및 시리아 내전 등 여러 현안을 논의했으나, 무역, 이민, 기후변화 등 의견이 크게 엇갈리는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150] 2018년 4월, 마크롱 대통령은 미국 의회 연설에서 기후변화 억제를 위해 미국이 파리 기후 협정에 재가입할 것을 희망한다고 언급했다.[151]

2018년 말, 트럼프 대통령은 마크롱 대통령의 민족주의, 관세, 프랑스의 제2차 세계 대전 패배, 유럽군 계획, 그리고 프랑스 대통령의 지지율을 조롱했다.[152] 12월, 마크롱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시리아 미군 철수 결정에 대해 "동맹은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153][154]

2019년 4월, 퇴임하는 제라르 아로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는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 "동맹도, 친구도 없"고 "대화 상대가 없다"고 언급하며, 미국과의 협력에 대해서는 "유치한 대립"을 피하고 싶다고 말했다.[155][156][157] 2019년 11월, 마크롱 대통령은 NATO의 뇌사 상태를 언급하며 유럽에 대한 미국의 공약에 의문을 제기했다.[158]

2019년 3월, 미국-중국 무역 전쟁이 심화되던 시기에 마크롱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15건의 대규모 무역 및 사업 협정(총 400억 유로)에 서명했다.[159] 주요 내용은 에어버스로부터 300억 유로 규모의 항공기 구매였다.[160]

2019년 7월, 트럼프 대통령은 프랑스의 디지털 서비스세에 대한 보복 조치로 프랑스산 와인에 대한 관세 부과를 위협했다.[161] 이에 대해 프랑스 재무장관은 디지털 세금 계획을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고,[161] 프랑스 농업장관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162] 도널드 투스크 유럽연합 이사회 의장은 유럽연합이 프랑스를 지지하며 미국에 대한 보복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말했다.[163] 2019년 12월, 미국 정부는 프랑스의 디지털 서비스세가 미국 기술 기업에 해롭다는 결론을 내리고 프랑스산 수입품 24억 달러에 대해 최대 100%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밝혔다.[164]

9. 6. 바이든 정부 시기 관계 회복 노력

2021년 9월, 프랑스는 미국, 영국, 호주 간의 AUKUS 방위 기술 동맹 체결에 반발하여 미국 주재 프랑스 대사 필립 에티엔을 소환했다.[165][166][167] 이 새로운 안보 협정으로 미국은 호주 해군에 핵잠수함을 제공하고, 호주는 프랑스산 재래식 잠수함 구매 계약을 취소했다.[165][166][167] 프랑스 정부는 이를 "등 뒤에 칼을 꽂은 짓"이라고 비난했다.[165][166][167] 9월 22일, 조 바이든 대통령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양국 관계 개선을 약속했고,[168] 에티엔 대사는 9월 30일 미국으로 복귀했다.[169]

2022년 초, 프랑스는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처벌에 있어 미국 및 NATO와 긴밀히 협력했다. 2022년 12월 마크롱 대통령의 미국 방문 기간 중, 그와 바이든 대통령은 양국 간의 협력을 재확인하고 우크라이나 전쟁과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했다.[170]

2023년 4월,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 국가들이 대만 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중국과의 대립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여, 일부 미국 공화당 의원들의 분노를 사 미국-프랑스 관계 재평가를 촉구하게 만들었다.[171][172]

2023년 11월, 미국 내 프랑스 무역업자 및 투자자를 위한 E-1 비자 및 E-2 비자의 유효기간이 2년에서 4년으로 연장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173]

10. 21세기 현재의 과제

10. 1. 경제 및 무역 관계

2019년 3월, 중국미국 간의 무역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마크롱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은 15건의 대규모 무역 및 사업 협정(총 400억 유로, 약 450억 달러)에 서명했다.[159] 이 협정들은 에어버스(Airbus)로부터 300억 유로 규모의 항공기 구매, 프랑스산 닭고기 수출, 중국 내 프랑스산 해상 풍력 발전소 건설, 프랑스-중국 협력 기금, BNP 파리바(BNP Paribas)와 중국은행(Bank of China) 간 수십억 유로의 공동 자금 조달, 중국 공장 현대화에 투입될 수십억 유로, 그리고 새로운 선박 건조 등을 포함하여 여러 분야를 포괄하며 수년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었다.[159][160]

7월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다국적 기업에 대한 프랑스의 디지털 서비스세(Taxation of digital goods)에 대한 보복 조치로 프랑스에 대한 관세 부과를 위협했다.[161] 트럼프 대통령은 트윗을 통해 "프랑스가 우리 위대한 미국 기술 기업에 디지털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누군가 그들에게 세금을 부과한다면 미국이어야 합니다. 마크롱의 어리석음에 대한 상당한 상호 조치를 곧 발표할 것입니다. 저는 항상 미국 와인이 프랑스 와인보다 낫다고 말해왔습니다!"라고 밝혔다.[161] 프랑스 재무장관 브뤼노 르 메르(Bruno Le Maire)는 프랑스가 디지털 세금 계획을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161] 프랑스 농업장관 디디에 기욤(Didier Guillaume)은 "GAFA(Big Four tech companies)에 세금을 부과하면 와인에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것은 정치적, 경제적 논쟁 측면에서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완전히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라고 반박했다.[162]

트럼프 대통령의 프랑스산 와인에 대한 세금 부과 의사에, 도널드 투스크(Donald Tusk) 유럽연합 이사회 의장은 유럽연합이 프랑스를 지지하고 미국에 대한 보복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말했다.[163] 2019년 12월, 미국 정부는 프랑스의 디지털 서비스세가 미국 기술 기업에 해롭다는 결론을 내리고 샴페인, 핸드백, 치즈 등 프랑스산 수입품 24억 달러에 대해 최대 100%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밝혔다.[164]

10. 2. 안보 및 군사 협력

10. 3. 기후 변화 및 환경 문제

10. 4. 문화적 교류와 반미 감정

리처드 쿠이젤(Richard Kuisel)에 따르면, 프랑스는 미국의 소비주의를 일부 수용하면서도 미국의 가치관과 권력의 상당 부분을 거부했다.[174] 프랑스인들은 미국인들이 순응적이고, 물질주의적이며, 인종차별적이고, 폭력적이며, 저속하다고 여겼던 반면, 프랑스인들은 개인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이며, 관용적이고, 문명화되었다고 생각했다.[174] 미국인들은 부를 숭배했고, 프랑스인들은 삶의 달콤함(''la douceur de vivre'')을 숭배했다.[174] 이러한 미국의 캐리커처는 20세기 초에 이미 널리 받아들여졌고, 프랑스 국가 정체성을 본질화하는 데 기여했다.[174]

반면에, 쿠이젤은 여러 가지 강력한 흡인 효과 또한 확인했다. 미국 제품은 종종 현대성, 젊음, 반항, 일탈, 지위, 자유와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었으며, 정치적, 경제적 권력과의 연관성이 있었다.[175] 역사적으로 문화는 권력을 따랐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미국 기술, 교육 및 사업이 특징인 세계화된 환경에서 필수적인 기술이기 때문에 영어를 배웠다.[175] 코카콜라와 같은 글로벌 거대 기업인 미국 다국적 기업의 규모와 힘은 미국 제품이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175] 또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TV 프로그램 및 유행과 같이 미국 제품 자체에 대한 유럽인들의 선호 또한 존재했다.[175]

11.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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