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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다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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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수아 다를랑은 프랑스 해군 제독으로, 1937년부터 1939년까지 해군 참모총장을 역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비시 프랑스 정부에서 요직을 맡았다. 그는 1902년 브레스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해군 내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1939년 해군원수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 당시 영국과의 해군 협력을 추진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프랑스 해군 총사령관으로서 스칸디나비아 원정 등을 주장했다. 비시 정부에서는 부총리, 외무, 내무, 국방 장관을 겸임하며 친독 협력 정책을 펼쳤으나, 1942년 12월 알제에서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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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다를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랑수아 다를랑 (1940년경)
다를랑 (1940년경)
출생 이름장 루이 자비에 프랑수아 다를랑
출생일1881년 8월 7일
출생지네락, 로트에가론, 프랑스
사망일1942년 12월 24일
사망지알제, 알제, 프랑스령 알제리
사망 원인암살
정치 경력
직위프랑스 부총리
임기 시작1941년 2월 9일
임기 종료1942년 4월 18일
국가 원수필리프 페탱
전임피에르 에티엔 플랑댕
후임직위 폐지
직위1프랑스령 아프리카 고등판무관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및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임기 시작11942년 11월 14일
임기 종료11942년 12월 24일
전임1직위 신설
후임1앙리 지로 (프랑스 민군 총사령관)
군사 경력
소속 군대프랑스 해군
복무 기간1902년–1942년
최종 계급프랑스 해군 원수
지휘프랑스 해군 참모총장, 에드가 키네, 잔 다르크
참전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서명
기타 정보
학력브레스트 해군사관학교
훈장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 메다이유 밀리테르, 크루아 드 게르

2. 초기 생애 및 경력

다를랑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해군에 복무하며 훈련함 ''장느 다르크''와 ''에드가르 퀴네''를 지휘했으며, 1920년 프리깃 함장, 1926년 함장이 되었다. 이후 조르주 르게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2. 1. 출생과 가문

다를랑은 로트-에-가론 주 네라크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문은 프랑스 해군과 오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증조부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전사했다.[1] 그의 아버지 장-바티스트 다를랑은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 쥘 멜린 내각에서 사법부 장관을 역임했다. 다를랑의 대부는 그의 아버지의 정치 동료이자 7년 동안 해군 장관을 지낸 조르주 르게였다.[2]

2. 2. 해군 입대 및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다를랑은 로트-에-가론 주 네라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전사했다.[1] 다를랑은 1902년 에콜 나발을 졸업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그는 베르됭 전투에 참전한 포병 중대를 지휘했다.[3] 전쟁 후 다를랑은 훈련함 ''장느 다르크''와 ''에드가르 퀴네''를 지휘했으며, 1920년 프리깃 함장, 1926년 함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다를랑은 빠르게 승진했다. 1929년 contre-amiral으로 승진했고, 1930년에는 런던 해군 회의에서 프랑스 해군 대표로 활동했다. 1932년 vice-amiral으로 승진했으며, 1934년 브레스트에서 대서양 함대 사령관을 맡았다. 1936년에는 vice-amiral d'escadre로 승진했다.[50]

2. 3. 해군 내 고속 승진

다를랑은 1920년 프리깃 함장, 1926년 함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다를랑은 빠르게 승진하여 1929년 contre-amiral[2], 1932년 vice-amiral이 되었다. 1930년 런던 해군 회의에서 프랑스 해군 대표로 활동했고, 1934년 브레스트에서 대서양 함대 사령관을 맡았다. 1936년 vice-amiral d'escadre[50], 1937년 1월 1일 상급대장(vice-amiral chef d'état-major général de la marine)으로 진급하여 군령부 총장에 임명되었다.[50] 1939년 6월 24일에는 특별히 신설된 해군원수(amiral de la flotte)로 진급, 전 프랑스 해군의 지휘를 받았다.

3. 해군 참모총장 시절

1936년, 다를랑은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독일과 이탈리아가 동맹을 맺은 상황을 우려하여 영국과 프랑스 해군 간 협력 강화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런던으로 파견되어 해군성에 이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37년 1월 1일, 다를랑은 해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동시에 제독(amiral)으로 진급했다. 그는 레옹 블룸 및 국방장관 에두아르 달라디에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해군 수장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인맥을 이용하여 크리그스마리네와 레지아 마리나의 증가하는 위협에 맞서기 위한 건조 계획을 추진하는 데 성공했다.

조지 6세 대관식에 참석한 후, 다를랑은 단순한 중장으로서 의전상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며 불만을 표했다.[4] 1939년, 그는 함대 제독(Amiral de la flotte)으로 진급했는데, 이 계급은 그를 영국 해군의 해군참모총장(First Sea Lord)과 동등한 위치에 두기 위해 특별히 신설된 것이었다.[1]

1939년 말, 다를랑은 중립국 선박이 독일로 전쟁 물자를 운반하는 것을 막기에는 해군 봉쇄에 허점이 많다고 판단하여, 연합국이 더 적극적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인해 독일이 소련의 방대한 천연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해군 봉쇄가 효과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다를랑은 스칸디나비아 원정의 주요 옹호자 중 한 명이었으며, 스웨덴 철광산을 점령하면 1941년 봄 이전에 독일 경제가 붕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0년 1월, 다를랑은 스칸디나비아 원정이 연합국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달라디에를 설득했다.

3. 1. 해군 참모총장 임명

1936년 8월 5일, 다를랑은 해군참모총장 어니 채트필드 제독을 만나 이탈리아가 발레아레스 제도에, 독일이 카나리아 제도에 해군 및 공군 기지를 확보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추축국을 막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대응을 주장했다.

레옹 블룸은 이탈리아 해군 위협에 대한 다를랑의 생각에 공감하며, 그를 차기 해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블룸은 다를랑이 공화국에 충실하고 인민전선의 사회 개혁을 지지한다고 믿었다. 1936년 가을, 다를랑은 프랑스가 발레아레스 제도를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해군 내에서 주목받았다. 블룸은 다를랑의 제안을 거부했지만, 반이탈리아 성향의 그를 높이 평가했다. 1936년 10월, 블룸이 다를랑을 해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한 것은 논란이 되었다.

1937년 1월 1일, 다를랑은 해군 참모총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제독(amiral)으로 진급했다. 그는 에두아르 달라디에와 가까운 사이였다. 다를랑은 자신의 정치적 인맥을 이용하여 크리그스마리네와 레지아 마리나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건조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프랑스 해군을 위한 군함 건조 계획을 통해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유지하는 데 전념하는 보수적인 프랑스 민족주의자로 묘사되었다. 다를랑은 우익 성향이었지만, 달라디에와 블룸과도 잘 협력했다.

1939년, 다를랑은 함대 제독(Amiral de la flotte)으로 진급했는데, 이는 영국 해군의 해군참모총장(First Sea Lord)과 동등한 위치를 부여하기 위해 특별히 신설된 계급이었다.[1]

다를랑은 레지아 마리나를 주요 위협으로 간주하고, 프랑스를 지중해의 주요 강국으로 만들기 위한 해군 확장을 추진했다. 그는 독일의 수적 우세에 대응하기 위해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에서 병력을 프랑스로 수송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지중해 서부 해상 항로 장악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는 이탈리아가 독일 편에 설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프랑스-알제리 간 해상 항로 방어를 위한 강력한 지중해 함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모리스 가멜랭은 해군 군비 경쟁이 육군 예산을 빼앗을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블룸과 달라디에는 다를랑의 주장을 지지하여 1936년 12월 프랑스 지중해 함대를 강화하는 해군 건조 계획을 승인했다. 1938년 9월 수데텐란트 위기 동안, 다를랑은 프랑스 해군을 동원하여 최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1938년 가을과 1939년 겨울, 다를랑은 지중해 전략을 계속 주장하며, 프랑스는 마지노 선 뒤에 안전하며, 전쟁 시 지중해 해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달라디에는 다를랑의 지중해 전략에 크게 감명받았다. 1938년 11월 30일, 이탈리아의 프랑스 영토 요구 시위로 양국은 전쟁 직전까지 갔고, 이는 다를랑의 주장을 강화했다. 1939년 1월 국방 당국자 회의에서 다를랑은 해군이 이탈리아-리비아 해상 항로를 차단하고, 프랑스 군함이 나폴리, 라 스페치아, 판텔레리아를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프랑스가 도데카니사 제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도시에 대한 폭격을 실시하며, 튀니지에서 리비아로,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침공할 것을 촉구했다.

단치히 위기 동안, 다를랑은 1939년 8월 8일 런던에서 더들리 파운드 제독을 만나 전쟁 발발 시 계획을 논의했다. 다를랑-파운드 회의에서 프랑스 함대는 지중해에 집중하고, 툴롱, 메르스엘케비르, 비제르테에 주둔하며, 대서양 연안 브레스트에는 단 한 개의 함대만 주둔하기로 합의했다. 북대서양과 북해는 영국 해군이 담당하기로 했다. 1939년 5월 22일 독일과 이탈리아의 강철 조약 체결 이후, 다를랑은 지중해에 집중했다.

1939년 9월 전쟁 선포 후, 다를랑은 프랑스 해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달라디에의 살로니카 전선 계획에 반대했다. 1939년 9월 22일 영국-프랑스 최고 전쟁 평의회 회의에서 다를랑은 폴란드 지원을 위한 발칸반도 제2전선 개설에 반대하는 영국 측에 가담했다. 그는 새로운 살로니카 전선 계획이 독일 봉쇄에서 주의를 흐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3. 2. 지중해 전략 강조

다를랑은 레지아 마리나를 프랑스의 주된 위협으로 간주하고, 프랑스를 지중해의 주요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해군력 확장을 강력하게 추진했다.[1] 독일은 7천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반면, 프랑스는 4천만 명이었다. 독일의 수적 우세로 인해 프랑스 육군이 독일 국방군(베르마흐트)과 대등하게 맞서기 위해서는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에서 모집된 병사들을 프랑스로 수송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프랑스가 지중해 서부의 해상 항로를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다를랑은 이탈리아의 친독일 외교 정책으로 인해 이탈리아가 또 다른 세계 대전에서 독일 편에 설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프랑스는 알제리와 프랑스를 잇는 해상 항로를 방어하기 위해 강력한 지중해 함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의사결정자들은 독일의 수적 우세를 고려하여, 지난 세계 대전과 마찬가지로 프랑스가 승리하려면 마그레브 지역에서 다수의 병력이 필요하며, 이 병력 없이는 프랑스가 패배할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다를랑은 "영국과 프랑스의 상당한 물자, 특히 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동부 유전에서 채굴된 거의 모든 석유는 지중해 장악에 달려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중해는 중앙 유럽 동맹국들에게 '물자'를 보낼 수 있는 유일한 통신망이다."라고 주장했다.

모리스 가믈랭 장군은 해군 군비 경쟁이 프랑스 육군의 예산을 빼앗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탈리아와의 화해를 주장했지만, 블룸에두아르 달라디에는 다를랑의 주장을 받아들여 1936년 12월 프랑스 지중해 함대를 지중해 서부의 주력 함대로 만들기 위한 해군 건조 계획을 승인했다. 1938년 9월 주데텐 위기 동안, 다를랑은 프랑스 해군을 동원하여 최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이탈리아가 추축국 편에 설 것으로 예상하여 프랑스 지중해 함대를 증강했다.

1938년 가을과 1939년 겨울, 다를랑은 지중해 전략을 계속 주장하며, 프랑스는 마지노 선 뒤에 안전하며, 전쟁 시 지중해의 해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당시 총리였던 달라디에는 다를랑의 지중해 전략에 크게 감명받았다. 1938년 11월 30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은 프랑스가 니스, 코르시카, 튀니지를 이탈리아에 할양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조직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전쟁 직전까지 갔다. 1938-1939년 겨울 프랑스-이탈리아 관계의 긴장 고조는 프랑스 정부 내에서 이탈리아에 대한 공격 전략에 대한 다를랑의 주장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1939년 1월 국방 당국자 회의에서 다를랑은 전쟁 시 해군이 이탈리아와 리비아를 잇는 해상 항로를 차단하고, 프랑스 군함이 나폴리, 라스페치아, 판텔레리아를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프랑스가 이탈리아의 식민지인 도데카니사 제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도시에 대한 폭격을 실시하며, 튀니지에서 리비아로,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침공할 것을 촉구했다.

단치히 위기 동안, 다를랑은 1939년 8월 8일 런던으로 가서 해군참모총장인 더들리 파운드 제독을 만나 위기가 전쟁으로 이어질 경우에 대한 계획을 논의했다. 다를랑-파운드 회의에서 프랑스 함대는 지중해에 집중되어야 하며, 프랑스 함대의 대부분은 툴롱, 메르스엘케비르, 비제르테의 해군 기지에 주둔하고, 대서양 연안 브레스트에는 단 한 개의 함대만 주둔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나머지 북대서양과 북해는 영국 해군이 담당하기로 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1939년 5월 22일 강철 조약으로 알려진 공수 동맹을 체결했고, 런던과 파리 모두 위기가 전쟁으로 이어질 경우 이탈리아가 어느 시점에 독일 편에 참전할 것이라고 예상하여 다를랑은 단치히 위기 동안 지중해에 집중했다.

3. 3.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스칸디나비아 원정 계획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다를랑은 프랑스 해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추진했던 살로니카 전선 부활 계획에 반대했다.[10] 1939년 9월 22일 영국-프랑스 최고 전쟁 평의회 회의에서 다를랑은 폴란드를 지원하기 위해 베이루트에서 테살로니키로 레반트 군(Armée du Levant)을 이동시켜 발칸반도에 제2전선을 개설하려는 달라디에의 계획에 영국 측과 함께 반대하며, 독일 봉쇄에 집중해야 할 노력을 분산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10]

처음에 다를랑은 해군 봉쇄와 전략 폭격만으로도 대규모 지상전 없이 독일을 패배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11] 그러나 1939년 말, 중립국 선박이 독일로 전쟁 물자를 운반하는 것을 막기에는 봉쇄에 허점이 많다고 판단하고, 더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2]

특히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독일이 소련의 방대한 천연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해군 봉쇄가 효과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소련은 현대 산업 경제 유지에 필요한 거의 모든 천연자원을 자급자족했고, 독일-소련 무역으로 인해 해군 봉쇄의 목적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12]

이에 다를랑은 1939년 12월부터 독일에 고품질 철을 공급하는 스웨덴 철광산을 점령하기 위해 영국-프랑스가 스칸디나비아로 원정을 떠날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13] 그는 독일과 소련이 추가적인 경제 협정을 체결하기 전에 스웨덴 철에 대한 독일의 접근을 차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3]

다를랑은 스칸디나비아 원정의 주요 옹호자 중 한 명으로, 스웨덴 철광산을 점령하면 1941년 봄 이전에 독일 경제가 붕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14] 1940년 1월, 다를랑은 스칸디나비아 원정이 연합국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달라디에를 설득했다.[15]

같은 달, 다를랑은 독일의 반응을 유발하여 프랑스군이 스웨덴 북부를 점령하고 독일의 가장 중요한 철 공급원을 차단할 수 있기를 바라며, 최근 적군이 점령한 핀란드 페트사모 주를 점령하기 위해 육군-해군 합동 원정대가 북극해를 통해 항해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사실상 소련과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6] 다를랑은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16]

스칸디나비아 원정 계획은 모리스 가멜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가멜랭이 설득력 있는 대안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달라디에는 다를랑의 권고를 따랐다.[17] 윈스턴 처칠을 포함한 영국 지도자들은 스칸디나비아 원정에 매우 열의를 보였다.[18]

다를랑은 또한 독일의 소련 석유 공급을 차단하기 위해 시리아와 이라크에 주둔한 영국-프랑스 폭격기가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유전을 폭격하는 "바쿠 프로젝트"를 지지했다.[19] 그는 프랑스 잠수함을 흑해로 보내 소련 유조선을 침몰시키는 계획도 지지했다.[20]

4. 비시 프랑스 정부 시절

1940년 5월, 추축국이 프랑스 전투에서 프랑스를 패배시킨 후, 다를랑은 필리프 페탱 원수를 지지하여 해군장관 직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 함대의 대부분을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로 이동시켰다. 영국은 프랑스 함대가 독일군의 손에 들어갈 것을 우려하여 1940년 7월 3일 머스엘케비르 공격(캐터펄트 작전)을 통해 프랑스 해군을 공격했다.[12] 이 공격으로 약 1,300명의 프랑스 해군이 희생되었지만, 프랑스 해군의 손실은 구식 전함 1척에 불과했다.[12]

다를랑은 추축국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고, 프랑스가 독일과 협력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13] 그는 영국을 불신했고, 머스엘케비르 공격 이후 영국에 대한 해전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다.[13]

1941년 2월, 다를랑은 피에르-에티엔 플랑댕을 대신하여 "국무회의 부의장"(총리)이 되었다. 그는 또한 외무장관, 내무장관 및 국방장관을 겸임하여 사실상 비시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13] 1941년 5월, 다를랑은 독일과 파리 의정서를 협상했는데, 독일은 전쟁 포로와 점령 조건에 양보했고 프랑스는 프랑스 식민지에 독일 기지를 허용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이 조건은 막심 베이강 장군의 반대를 받았고, 의정서는 비준되지 않았다.[21]

1941년 프랑스에서 다를랑, 페탱, 괴링


다를랑은 프랑스의 "유대인 문제"를 독일과의 더 나은 평화 조약을 위한 교섭 카드로 여겼다. 그는 ''les Israélites''(프랑스어와 문화를 받아들인 동화된 프랑스 유대인)와 ''les Juifs''(동유럽 출신 유대인 이민자를 가리키는 다소 경멸적인 용어)를 구분했다. 다를랑은 1930년대에 프랑스가 범죄와 경제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비난한 동유럽 출신 유대인 이민자를 너무 많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불평했다. 그는 "좋은" 프랑스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조치에는 반대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나쁜" 이민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조치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러나 독일은 다를랑의 기회주의와 변덕스러운 충성심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1941년 6월-7월 프랑스 시리아와 레바논 점령과 1941년 12월 모스크바 앞에서 독일의 소련 침공이 지체되자 다를랑은 협력 정책에서 벗어났다.[13]

1942년 4월, 독일의 압력으로 다를랑은 장관직에서 사퇴했고, 독일이 더 신뢰할 만하다고 여긴 피에르 라발이 그를 대신했다. 다를랑은 프랑스군 최고사령관직을 포함하여 여러 하급 직책을 유지했다.

4. 1. 프랑스 항복과 비시 정부 참여

1940년 5월부터 6월까지 추축국이 프랑스 전투에서 프랑스를 패배시킨 후, 다를랑은 6월 3일 휴전이 이루어질 경우 반란을 일으켜 영국 국기 아래에서 함대를 이끌고 싸우겠다고 위협했다.[5] 6월 12일 브리아르 회담에서 처칠에게 어떤 프랑스 함선도 독일의 손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12] 그러나 6월 15일, 내각이 카미유 쇼탕의 타협안(가능한 휴전 조건을 문의하는 것)을 가결하자, 프랑스 함대가 독일의 손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휴전을 받아들일 의향을 보였다.[7]

6월 16일, 처칠은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항구로 이동한다는 조건 하에 휴전에 동의하는 전보를 보냈으나, 다를랑은 프랑스의 방어력이 약해진다며 이를 거부했다.[8] 같은 날 쥘 모슈에 따르면, 다를랑은 영국이 끝났다고 판단하여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다고 선언했으며, 휴전이 없을 경우 히틀러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스페인을 통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침략할 것을 우려했다. 그날 저녁, 폴 레노는 전쟁을 계속할 내각의 지지를 얻지 못해 총리직에서 사임했고, 필리프 페탱독일과의 휴전을 모색하는 새 정부를 구성했다.

다를랑은 6월 16일부터 페탱 정부에서 해군장관을 역임했다.[12] 6월 18일, 그는 영국 제1해군장관인 더들리 파운드 경에게 프랑스 함대가 독일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명예의 말씀"을 전했다.[9] 1940년 6월 22일, 페탱 정부는 휴전에 서명했지만, 7월 초 수도가 비시로 이전된 후 "비시 프랑스"로 알려진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12] 샤를 누게 장군은 휴전에 실망했지만, 다를랑이 추축국에 대한 적대 행위를 계속하기 위해 프랑스 함대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부분적으로 수용했다.[10]

처칠은 다를랑이 이때 배신했더라면 "10배 강력한 드골"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고, 드골의 전기 작가인 장 라쿠튀르는 그를 "실패한 운명의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정전 협정 조건은 프랑스 해군 함선들이 독일의 감독하에 해체되고 무장 해제될 것을 요구했지만, 이탈리아의 제안으로 함대가 북아프리카 항구에 일시적으로 머물 수 있도록 수정되었다. 다를랑은 대서양 항구에 있던 함선들을 프랑스 해외 영토로 이동시켰다.[12]

처칠은 다를랑이 정치인들에게 휘둘릴 수 있다고 우려했고, 다를랑이 정부 장관이 된 후에도 이러한 우려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를랑은 영국 함대를 영국 보호하에 두거나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에 두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정전 협정 조건에 대해 영국에 거짓 정보를 제공했다.[12] 이러한 불신은 1940년 7월 3일 영국 해군의 머스엘케비르 공격(캐터펄트 작전)으로 이어졌다.[12] 다를랑은 공격 당시 연락이 닿지 않았다.[11]

이후, 비시 정부에 충성하는 프랑스군은 다를랑의 지휘하에 영국군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때로는 독일군과 협력했다. 그러나 다를랑의 약속대로 주력함은 독일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고, 소수의 구축함과 잠수함, 소형 함선만이 독일의 통제하에 들어갔다.[12]

다를랑은 추축국의 승리를 예상하고 독일과의 협력을 유리하게 생각했다. 그는 영국을 불신했고, 머스엘케비르 공격 이후 영국에 대한 해전을 진지하게 고려했다.[13] 1940년 파리독일군에게 점령되자, 달랑은 필리프 페탱 원수를 지지하여 해군대신직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 함대의 대부분을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로 이동시켰다. 영국은 프랑스 함대가 독일군에 넘어갈 것을 우려하여 머서케비어 해전을 일으켜 프랑스 해군에 약 1,300명의 희생자를 내고 함대에 타격을 입혔지만, 구식 전함 1척만 손실되었다. 1940년 12월 13일, 페탱은 부총리 피에르 라발을 해임했고, 독일은 라발의 복귀를 요구했다. 페탱이 이를 거부하자 독일은 달랑을 후임 부총리로 지명할 것을 요구했다.[51]

1941년 2월 9일, 피에르-에티엔느 플랑댕이 사퇴하고 달랑이 부총리가 되었다. 그는 내무, 국방, 외무장관을 겸임하며 실질적인 정부 수반이 되었고, 1942년 1월에는 더 많은 직책을 장악했으며, 4월 17일에는 프랑스 육해공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52] 달랑은 친독 협력을 강화하여, 1941년 5월 11일 히틀러와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달랑을 기회주의자로 의심했다. 1942년 4월, 페탱은 달랑을 해임하고 라발을 총리로 임명했지만, 달랑은 프랑스군 사령관, 해군대신직은 유지했다.[54]

4. 2. 비시 정부 부총리 및 친독 협력



다를랑은 공화주의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1941년까지 페탱의 가장 신뢰받는 동료가 되었다. 1941년 2월, 다를랑은 피에르-에티엔 플랑댕을 대신하여 "국무회의 부의장"(총리)이 되었다. 그는 또한 외무장관, 내무장관 및 국방장관을 겸임하여 사실상 비시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13] 2월 11일 그는 헌법 제4조에 따라 페탱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13]

다를랑은 프랑스의 "유대인 문제"를 독일과의 평화 조약을 위한 교섭 카드로 여겼다.[21] 그는 제3제국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고, 전후 세계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자신의 주요 임무로 여겼다.[21]

다를랑은 ''les Israélites''(동화된 프랑스 유대인)와 ''les Juifs''(동유럽 출신 유대인 이민자)를 구분했다. 그는 1930년대에 프랑스가 동유럽 출신 유대인 이민자를 너무 많이 받아들여 범죄와 경제적 문제를 일으켰다고 비난했다.[21] 그는 "좋은" 프랑스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조치에는 반대했지만, "나쁜" 이민 유대인에 대한 조치에는 침묵했다.[21]

비시 정부의 유력 인사로서, 다를랑은 히틀러에게 영국에 대한 적극적인 군사 협력을 여러 차례 제안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프랑스를 불신했다.[13] 1941년 5월, 다를랑은 독일과 파리 의정서를 협상하여 프랑스 식민지에 독일 기지를 허용하는 데 동의했지만, 막심 베이강 장군의 반대로 비준되지 않았다.[21]

독일은 다를랑의 기회주의와 변덕스러운 충성심을 의심했고, 1941년 6월-7월 프랑스 시리아와 레바논 점령과 1941년 12월 모스크바 앞에서 독일의 소련 침공이 지체되자 다를랑은 협력 정책에서 벗어났다.[13]

1942년 1월, 다를랑은 추가적인 정부 직책을 맡았다.[21] 그러나 1942년 4월, 독일의 압력으로 다를랑은 장관직에서 사퇴했고, 피에르 라발이 그를 대신했다. 다를랑은 프랑스군 최고사령관직을 포함하여 여러 하급 직책을 유지했다.

1940년 6월, 파리독일군에 점령되었을 때, 다를랑은 페탱 원수를 지지하여 해군대신직을 받았다. 다를랑은 프랑스 함대의 대부분을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로 이동시켰다. 영국은 머서케비어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공격하여 약 1,300명의 프랑스 해군 희생자를 냈다.[51]

1941년 2월 9일, 다를랑은 부총리가 되었고, 내무, 국방, 외무장관을 겸임하며 실질적인 정부 수반이 되었다. 1942년 1월에는 더 많은 직책을 장악했고, 4월 17일에는 프랑스 육해공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52] 다를랑은 친독 협력을 강화하여 히틀러와 회담을 갖고, 파리 의정서 체결 등을 통해 비시 프랑스와 나치 독일 간의 정치 동맹을 촉진했다.[53] 그러나 독일 정부는 다를랑을 의심했고, 1942년 4월, 페탱은 다를랑을 해임하고 라발을 총리로 임명했다.[54] 다를랑은 프랑스군 사령관, 해군대신직은 유지했다.

4. 3. 독일과의 관계 악화 및 해임

다를랑은 공화주의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41년 2월, 피에르-에티엔 플랑댕을 대신하여 비시 프랑스의 "국무회의 부의장"(총리)이 되었다. 그는 외무, 내무, 국방 장관직을 겸임하며 사실상 비시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그는 제3제국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 예상하고 독일 주도의 전후 세계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자신의 주요 임무로 여겼다.

다를랑은 프랑스의 "유대인 문제"를 독일과의 더 나은 평화 조약을 위한 교섭 카드로 여겼다. 그는 동유럽 출신 유대인 이민자들을 범죄와 경제 문제의 원인으로 비난하며, 이들에 대한 나치의 조치에는 침묵했지만, 프랑스 유대인에 대한 조치에는 반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비시 정부의 유력 인사로서, 다를랑은 히틀러에게 영국에 대한 적극적인 군사 협력을 여러 차례 제안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프랑스를 불신했고, 소련 침공 동안 프랑스가 중립을 유지하기를 원했다.[13] 1941년 5월, 다를랑은 독일과 파리 의정서를 협상하여 프랑스 식민지에 독일 기지를 허용하는 데 동의했지만, 이는 막심 베이강 장군의 반대로 비준되지 않았다.

독일은 다를랑의 기회주의적인 태도와 변덕스러운 충성심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1941년 6월-7월 연합군의 프랑스령 시리아와 레바논 점령과 1941년 12월 모스크바 앞에서 독일의 소련 침공이 지체되자, 다를랑은 협력 정책에서 벗어났다.[13]

1942년 4월, 독일의 압력으로 다를랑은 장관직에서 사퇴했고, 독일이 더 신뢰할 만하다고 여긴 피에르 라발이 그를 대신했다. 다를랑은 프랑스군 최고사령관직을 포함한 여러 하급 직책을 유지했다.

4. 4.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과 협력

1942년 11월 7일, 연합군이 횃불 작전을 개시하기 전날, 다를랑은 아들의 병문안을 위해 알제를 방문했다. 당시 그는 윈스턴 처칠의 주선으로 10월 23일 알제리 저항 세력과 연합군 마크 W. 클라크 장군 사이에 비밀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55] 같은 날, 다를랑은 미국 참사관으로부터 상륙 작전이 임박했다는 통보를 받고 페탱에게 지시를 요청했다. 페탱은 "귀하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전보를 보냈고, 다를랑은 이를 연합국과의 협상 승인으로 해석했다.[55]

11월 8일 정오 직후, 무장이 부족했던 400명의 프랑스 저항 세력이 해안 포대와 알제의 비시 프랑스 제19군단을 공격했다. 약 15시간 후, 저항 세력은 두 부대의 무장을 해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조제 아불케르, 앙리 다스티에 드 라 비제리, 제르맹 주스 대령의 지휘 아래 반정부 세력은 알제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고 비시 정부 인사들을 체포했다. 다를랑은 오후 7시에 미국군과 휴전 협정을 맺었고,[55] 알제 군 사령관 주앙 장군도 이에 따랐다.

11월 9일, 다를랑은 페탱에게 다시 전보를 보내 휴전 조건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11월 10일, 다를랑은 북아프리카 전역에 휴전을 명령했다.[55] 오랑에서는 11월 10일에, 모로코에서는 11월 11일에 휴전이 이루어졌다. 페탱은 공식적으로는 북아프리카 비시군에게 저항을 명령했지만, 다를랑에게는 비밀 전보를 통해 독일 측에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알렸다.[55] 그러나 이 사건으로 비시 프랑스가 통치하던 프랑스 남부는 안톤 작전[56]에 의해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아프리카에 있던 대부분의 프랑스군은 다를랑의 지휘 하에 들어갔지만, 일부 부대는 튀니지에서 독일군에 합류했다. 11월 27일, 툴롱의 프랑스 함대는 자침했다.

11월 13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알제에 상륙하여 다를랑과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으로 북아프리카 행정권은 다를랑에게, 북아프리카 비시군의 군사 지휘권은 앙리 지로 대장에게 주어졌다. 다를랑은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국가 원수 겸 육해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고 선언했다. 영국은 친독·반영 성향으로 여겨졌던 다를랑과의 협정에 반발했고, 이는 일시적인 조치임을 확인하려 했다.[57] 자유 프랑스샤를 드골도 반발하며 다를랑을 "프랑스 세력 결집의 장애물"이라고 비판했다.[58] 다를랑은 비시 시대의 대독 협력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해명하고, 툴롱 함대의 자침은 독일에게 함정을 인도하지 않겠다는 과거 영국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12월 20일, 자유 프랑스 사절 프랑수아 다스티에 드 라 비제리 장군이 드골과의 협력을 제안했지만, 다를랑은 이를 거절하고 다스티에 장군을 추방했다.[59]

5. 암살

1942년 12월 24일 오후, 프랑스 반(反) 비시 정부파이자 왕당파였던 페르낭 보니에 드 라 샤펠이 알제에 있는 다를랑의 본부에서 총을 쏘아 다를랑은 몇 시간 후 사망했다. 페르낭 보니에 드 라 샤펠은 앙리 다스티에가 이끄는 저항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설과 단독 행동을 했다는 설이 있다.[27]

5. 1. 암살 사건

1942년 12월 24일 오후, 프랑스 반(反) 비시 정부파이자 왕당파였던 페르낭 보니에 드 라 샤펠이 다를랭의 본부에서 총을 쏘았고, 다를랭은 몇 시간 후 사망했다. 20세의 보니에 드 라 샤펠은 프랑스 언론인의 아들이자, 프랑스 왕위 계승자였던 파리 백작을 복위시키려는 친왕당파 그룹에 속해 있었다.[27]

드 라 샤펠은 즉시 체포되어 다음 날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2월 26일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28][29][30] 페르낭 보니에 드 라 샤펠은 앙리 다스티에가 이끄는 저항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설과 단독 행동을 했다는 설이 있다. 다를랑 암살 이후, 그의 자리는 육군 장군인 앙리 지로가 계승했다.

5. 2. 암살 배후 의혹

페르낭 보니에 드 라 샤펠이 다를랭을 암살한 배경에는 여러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앙리 다스티에의 아들이자 프랑수아 다스티에 장군의 조카인 장-베르나르 다스티에는 자신의 저서에서 앙리 다스티에와 파리 백작이 회담했던 사실을 기록했다. 회담에 동석했던 앙리 다스티에의 아내 루이즈는 파리 백작이 "다를랑 제독을 제거해야 한다. 그를 없애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파리 백작 자신은 이 회담의 존재를 부인했다.[60]

샤를 드골의 측근이었다가 후에 정적이 된 자크 수스텔은 알제의 드골파와 파리 백작이 다를랑 사퇴를 요구하는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앙리 지로 장군은 사건 후 "미국인들은 다를랑 암살이 드골을 위해 협력한 영국 정보기관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중략) 지금은 파리 백작과 드골의 공모가 있었고, 목적은 파리 백작의 복권이었다고 확신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당시 미국 측에 그러한 견해가 있었음을 증언했다.[60]

지로는 드골파 관계자 몇 명을 체포했지만,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귀국한 후 "다를랑 암살 사건의 진상 규명은 영국과 미국에 프랑스 국내의 음모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 되어, 영국과 미국의 신뢰를 잃게 될 것이라는 점에 드골과 합의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조사의 목적은 달성되었고, 영국과 미국도 만족하고 있다"라며 용의자들을 모두 석방했다.[61] 당시 수사에 임했던 알베르-장 보아튀리에 소령은 이러한 정치적 결정에 항의하여 사임했고, 1980년 저서에서 "파리 백작과 드골을 기소할 수 있을 만한 기소 이유가 존재한다"라고 말했다.[62]

영국의 역사가 데이비드 레이놀즈는 자신의 저서에서, 전쟁 중 런던을 떠나지 않았던 영국 비밀정보국(SIS) 국장 스튜어트 멘지스가 암살 당시 알제에 체류하고 있었던 점을 지적하며, 라 샤펠과 영국 특수작전본부(SOE)가 관계가 있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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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웹사이트 Tableaux de concours pour la Legion d'Honneur https://gallica.bnf.[...] 1913-11-26
[50] 문서 ともに旧呼称。現呼称に改められるのは1939年6月6日の事である。中将の役職に応じた地位や待遇であり、Vice-amiralを冠するため、中将から元帥になったように見受けられるのはこれが理由である。
[51] 문서 大井、803p
[52] 문서 ゲシュタポ狂気の歴史P436
[53] 문서 村田、二、134p
[54] 문서 村田、二、136p
[55] 문서 大井、887p
[56] 문서 ゲシュタポ狂気の歴史P437
[57] 문서 大井、892p
[58] 문서 大井、911p
[59] 문서 大井、904p
[60] 문서 大井、906p
[61] 문서 大井、906-907p
[62] 문서 大井、9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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