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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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생단 사건은 1930년대 만주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 무장 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친일 단체인 민생단으로 의심받은 조선인들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대거 숙청된 비극적인 사건이다. 일본 제국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항일 연합을 와해시키기 위해 민생단을 조직했고, 중국 공산당은 이에 맞서 반민생단 투쟁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1,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조선인들이 민생단 혐의로 처형되었으며, 이는 항일 연합 전선에 큰 타격을 입혔다. 1936년 반민생단 투쟁이 종료되었지만, 사건의 여파는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의 불신을 심화시켰고, 이후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자치 고집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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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단 사건 | |
---|---|
지도 정보 | |
사건 개요 | |
사건명 | 민생단 사건 |
발생 시기 | 1933년 ~ 1936년 |
발생 장소 | 만주국 |
주요 관련 단체 | 만주국 동북항일연군 조선인 |
원인 | 만주 지역에서의 조선인에 대한 스파이 혐의 |
결과 | 수많은 조선인 항일 운동가의 숙청 및 처형 |
사건 배경 | |
당시 상황 | 만주사변 이후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독립운동이 활발하던 시기 |
주요 대상 | 만주국 내의 조선인 |
만주국 관계자 | 일본 |
오인 | 조선인들을 간첩으로 오인 |
사건 과정 | |
민생단 | 만주 지역의 조선인 자치 조직 일본의 조선인 탄압을 위한 도구로 이용됨 |
민생단원 처형 | 민생단으로 지목된 조선인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 발생 |
항일 운동 세력 와해 | 동북항일연군 등 조선인 항일운동 세력에 큰 타격 |
숙청 대상 | 공산주의자 항일운동가 기타 조선인 |
규모 | 수백명에서 수천명까지 희생 정확한 피해 규모 파악 어려움 |
사건 영향 | |
조선인 사회 | 조선인 사회 내 큰 공포와 불신 조성 조선인 항일 운동에 대한 탄압 강화 |
항일 운동 | 조선인 항일 운동 세력의 약화와 분열 심화 |
역사적 평가 | 스파이 조작극이자 인권 침해 사건으로 평가됨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김일성 (사건에 대한 비판적 입장 표명) 최현 (당시 동북항일연군 지도자) |
관련 문서 | |
관련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민생단사건 네이버 지식백과 - 민생단 사건 |
2. 배경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독립을 위해 만주로 이주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후반, 일본 제국 관동군은 만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며,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을 수립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 내에서는 일본의 문화 통치에 동조하는 세력이 나타나면서, 민족주의 우파 독립운동가들 중 일부가 변절하기도 했다. 반면, 좌파 세력은 독자적인 투쟁 노선을 강화하며 광주 학생 운동, 간도 폭동 등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 3·1 운동 이후 일제의 감시 강화로 국내 무장 투쟁이 어려워지자 대다수 좌파 무장 투쟁가들은 만주로 옮겨갔다. 코민테른의 '1국 1당' 원칙에 따라, 만주 지역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에 합류하여 항일 연합 전선을 구축하였다.[3]
1932년, 중국 공산당 연길현 노두구구 위원회 서기인 송영감(이름 불명, '영감'은 고령의 남성에 대한 존칭)의 변절이 발각되었다. 고문을 받은 송영감은 20명이 넘는 간부들을 스파이라고 자백했고, 동만특별위원회는 그들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이른바 "'''송영감 사건'''"을 계기로, 이후 3년여에 걸쳐 "반민생단 투쟁"이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5]
2. 1. 일본 제국의 이간책
일본 제국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항일 연합 전선을 와해시키기 위해 다양한 공작을 시도했다. 1932년, 일본은 조선인들을 동원하여 '민생단'이라는 친일 어용 단체를 조직하여,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를 이간질하고, 중국공산당 조직을 파괴하려 했다.[1] 민생단은 재만 조선인의 생활 안정과 낙토 건설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친일 반공 밀정 조직이었다.[1]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만주사변을 구실로 만주를 침략한 일본의 침략으로 친일 단체와 민족주의적 한국 단체들이 경쟁적으로 생겨났다.[2]
1932년 2월, 조선총독부와 간도일본총영사관의 후원을 받은 민생단은 일본 제국 육군 대좌 출신 박두영을 단장으로 하여 용정에서 발족하였다.[1] 이 단체는 최남선의 매부 박석윤이 동민회 계열의 친일파 조병상과 북간도의 친일파 김동한, 김택현, 이경재, 이인선, 최윤주 등 친일 조선인들과 협의하여 조직되었다.[1]
민생단은 표면적으로는 재만 조선인의 생활 안정과 낙토 건설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하고 중국공산당 조직과 그 산하 대중단체를 파괴하려는 목적을 가진 친일 반공 밀정 조직이었다.[1] 그러나 중국공산당 조직이 강력하여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1932년 7월 스스로 사무소를 폐쇄하였다.[1]
1932년 2월 15일, 만주국 건국을 앞두고 조선인 정치인들이 용정 마을의 간도 공회당에서 민생단의 발기총회 및 창립대회를 개최하여 간도의 자치구화를 목표로 했다.[5]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고, 단장은 일본 육군 포병대좌 박두영이었다.[5] 3월 1일 만주국이 건국되었다.[5] 10월 5일, 목표했던 간도의 “자치구화”, “특별행정구화”가 만주국 관동군과 조선총독부에 의해 부정되자 민생단 해산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5]
3. 전개
1932년 8월, 만주국 연길에서 농민협회 기관지 인쇄 책임자였던 조선인 송노톨이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가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 조·중 연합 항일유격대는 송노톨을 민생단원으로 의심했다.[3] 10월에는 생포한 일본군 몇 명이 송노톨이 관동군 헌병대에 매수된 민생단 조직원이라고 진술했다.[3] 중국공산당 동만주특별위원회(동만특위)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송노톨을 고문하여 민생단 조선인 간부 명단을 요구했고, 송노톨은 몇몇 조선인의 이름을 언급했다.[3]
1932년 11월부터 12월까지, 동만특위는 송노톨 처형을 시작으로 민생단으로 의심되는 조선인 200여 명을 체포, 처형했다.[3] 1932년 2월 만주 거주 한국인 이주민들에 의해 결성된 친일 단체 민생단(人民生業團중국어)은 일본 당국의 후원을 받으며 간도 지역 자치를 요구하며 공산당과 중국 당국으로부터의 보호를 요청했으나,[3][2] 일본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고 1932년 10월 공산당의 공격으로 해체되었다.[3][2]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생단 활동에 대한 의심은 계속되었고,[3] 일본의 개입과 수많은 체포는 민생단 침투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켰다.[2] 만주 공산당(CCP)은 어떤 한국인이라도 비밀리에 친일 반공 단체인 민생단의 일원일 수 있다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3]
1933년 5월, 훈춘유격대 정치위원이었던 박두남이 조선인 중국공산당원 반경유(潘慶由: 조선명 이기동(李起東))를 사살하고 도주하여 일제에 투항해 유격대 근거지 파괴에 앞장섰다.[3] 이 사건은 만주의 조선인 및 중국인들을 크게 동요하게 했고, 동만특위는 반민생단 투쟁을 더욱 치열하게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3]
박두남 사건 이후, 조·중 연합 전선은 민생단으로 의심되는 조선인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가 민생단원인지 명확히 가려낼 방법이 없어, 동만특위는 체포해야 할 민생단원 할당량을 정하는 등 비이성적인 숙청을 강행했다.
이러한 무차별 숙청으로 많은 무고한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 동만주특별위원회와 현위의 간부 이상묵은 조선인 유격대원의 70% 이상이 민생단원이라고 주장하며 60여 명의 조선인을 처형했다. 훈춘현 공산주의청년단 서기 정필국은 반민생단 투쟁에 앞장섰으나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민생단원으로 몰려 처형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보초들에게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 왕청유격대 창시자 양성룡은 가족을 잃었음에도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군중들의 항의로 살아남았다. 이외에도 박동근, 윤창범, 김일환 등 많은 이들이 민생단원으로 몰려 희생되었다.
1932년 11월부터 1936년 2월까지 1,000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민생단원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김일성도 1933년 말 체포되었다가 1934년 초 무죄로 석방되었다.
3. 1. 민생단 사건의 발단
1932년 8월, 만주국 연길의 농민협회 기관지 인쇄 책임자였던 조선인 송노톨(宋老頭)이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가 일주일 만에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 조·중 연합 항일유격대원들은 송노톨이 민생단원이라고 의심했다.[3]1932년 10월, 항일유격대원이 생포한 일본군 몇 명은 송노톨이 관동군 헌병대에 매수된 민생단 조직원이라고 진술했다.[3] 중국공산당 동만주특별위원회(동만특위)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송노톨을 고문하여 민생단 조선인 간부 명단을 요구했고, 송노톨은 몇몇 조선인의 이름을 언급했다.[3]
1932년 11월부터 12월까지, 동만특위는 송노톨 처형을 시작으로 민생단으로 의심되는 조선인 200여 명을 체포, 처형하는 반민생단 투쟁을 시작했다.[3]
한편, 1932년 2월 만주 거주 한국인 이주민들에 의해 결성된 친일 단체 민생단(Minsaengdan, 人民生業團중국어)은 일본 당국의 후원을 받으며 간도 지역 자치를 요구하며 공산당과 중국 당국으로부터의 보호를 요청했다.[3][2] 그러나 일본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고 1932년 10월 공산당의 공격으로 해체되었다.[3][2]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생단 활동에 대한 의심은 계속되었고,[3] 일본의 개입과 수많은 체포는 민생단 침투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켰다.[2] 만주 공산당(CCP)은 어떤 한국인이라도 비밀리에 친일 반공 단체인 민생단의 일원일 수 있다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3]
3. 2. 박두남 사건과 숙청의 격화
1932년까지 중국공산당 동만특위의 반민생단 투쟁은 그 기세가 격렬하지 않았는데, 이는 항일투쟁을 함께하던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의 유대감이 아직은 끈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33년 5월 훈춘유격대 정치위원이었던 박두남이 조선인 중국공산당원 반경유(潘慶由: 조선명 이기동(李起東))를 사살하고 도주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박두남은 이후 일제에 투항해 유격대 근거지 파괴에 앞장섰다. 이 사건은 만주의 조선인 및 중국인들을 크게 동요하게 했고, 동만특위는 반민생단 투쟁을 더욱 치열하게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3]3. 3. 무차별 숙청과 피해
박두남 사건 이후, 조·중 연합 전선은 민생단으로 의심되는 조선인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가 민생단원인지 명확히 가려낼 방법이 없어, 동만특위는 체포해야 할 민생단원 할당량을 정하는 등 비이성적인 숙청을 강행했다.이러한 무차별 숙청으로 많은 무고한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 동만주특별위원회와 현위의 간부 이상묵은 조선인 유격대원의 70% 이상이 민생단원이라고 주장하며 60여 명의 조선인을 처형했다. 훈춘현 공산주의청년단 서기 정필국은 반민생단 투쟁에 앞장섰으나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민생단원으로 몰려 처형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보초들에게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 왕청유격대 창시자 양성룡은 가족을 잃었음에도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군중들의 항의로 살아남았다. 이외에도 박동근, 윤창범, 김일환 등 많은 이들이 민생단원으로 몰려 희생되었다.
1932년 11월부터 1936년 2월까지 1,000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민생단원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김일성도 1933년 말 체포되었다가 1934년 초 무죄로 석방되었다.
4. 영향
중국공산당 내에서 민생단 밀정이 모두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조선인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3] 무고하게 처형된 조선인들의 가족과 동료들은 중국인과 조선인 모두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어,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연대가 약화되었다.[3]
만주사변 이후, 친일 단체 중 하나인 민생단은 1932년 2월 만주 거주 한국인 이주민들에 의해 결성되었다.[3] 이 단체는 일본 당국의 후원을 받아 간도 지역의 자치를 요구하며 공산당과 중국 당국으로부터의 보호를 요청했지만, 결국 일본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고 1932년 10월 공산당의 공격으로 해체되었다.[3][2]
민생단 활동에 대한 의심은 계속되었고,[3] 일본의 개입과 수많은 체포는 민생단 침투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켰다.[2] 만주 공산당은 어떤 한국인이라도 비밀리에 친일 반공 단체인 민생단의 일원일 수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다.[3] 일본 당국은 계급 및 민족적 적대감을 조장하여 중국과 한국의 반일 연합을 약화시켰다.[2]
이어진 숙청으로 1,000명이 넘는 한국인이 중국 공산당에서 축출되었고, 김일성을 포함하여 500명이 사망했다.[3] 1932년 초, 중국 공산당 만주 동부 지부는 민생단에 대한 대규모 폭동, 방화, 암살 운동을 시작했다.[2]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한국 공산주의자들은 의심되는 협력자들을 맹렬하게 추격했다.[2] 그러나 의심이 커짐에 따라 민생단과 연관이 있다고 고발된 사람과의 어떤 연관성도 공격 대상이 되었고, 한국 공산주의자들도 포함되었다.[2] 1932년 말까지 중국 공산당 만주 동부 지부의 중국 지도자들은 민생단과 연관된 일반 당원들(대부분 한국인)을 심문하고 고문하고 처형했다.[2] 한국 독립을 주장하는 것조차도 민생단과 같은 반동 단체에 편을 드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2]
결국 이 숙청은 간도 지역을 일본에 저항하는 작전 기지로서 파괴했다.[2] 이 숙청으로 인해 일본군이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벌인 탄압보다 더 많은 한국 혁명가와 지지자들이 사망했다.[2]
민생단 사건 숙청 당시 김일성은 숙청 위원회의 용의자 파일을 압수하여 소각했다.[2] 김일성의 회고록과 그와 함께 싸운 게릴라들의 증언에 따르면, 숙청 위원회의 용의자 파일을 압수하여 소각한 것이 그의 지도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2] 용의자 파일이 파괴되고 용의자들이 복권된 후 숙청에서 도망친 사람들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결집했다.[2] 역사학자 김수지의 요약에 따르면, 김일성은 "[숙청위원회 용의자 파일을 파기한] 과감한 조치뿐만 아니라 그의 연민 덕분에" 숙청 이후 확고한 지도자로 부상했다.[2] 숙청을 피한 다른 한국 공산주의자들도 북한에서 지도적 역할을 맡았다.[4]
1930년대 후반, 통일된 한국과 중국 게릴라 부대가 민생단 사건에서 회복 중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숙청의 유산은 한국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해방 이후 자치를 고집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3]
1932년, 중국 공산당 연길현 노두구구 위원회 서기인 송영감(宋令監)의 변절이 발각되었다.[5] 고문을 받은 송영감은 20명이 넘는 간부들을 스파이라고 자백했고, 동만특별위원회는 그들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이른바 "'''송영감 사건'''"을 계기로, 이후 3년여에 걸쳐 "반민생단 투쟁"이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숙청된 조선인 간부와 유격대원은 400명이 넘었다.[5] 북한의 역사에서는 김일성이 민생단 사건을 조정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6] 확실한 증거는 없다.[7]
5. 민생단 사건을 다룬 작품
참조
[1]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1999
[2]
서적
Everyday Life in the North Korean Revolution, 1945–1950
https://muse.jhu.edu[...]
Cornell University Press
2016
[3]
서적
The North Korean Revolution, 1945–1950
https://muse.jhu.edu[...]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4]
학술지
Witch Hunt among the Guerrillas: The Min-Sheng-T'uan Incident
1966
[5]
서적
在満朝鮮人親日団体民生団について
明石書店
1996
[6]
뉴스
互いに日本スパイと疑い殺した民生団事件 金日成が終止符
http://www.hani.co.k[...]
ハンギョレ
2014-03-03
[7]
서적
ドキュメント 金日成の真実―英雄伝説「1912年~1945年」を踏査する
毎日新聞
1993-03
[8]
뉴스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밥을 흘려도 죽였다
http://h21.hani.co.k[...]
한겨레21
2002-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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