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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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석윤은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와 만주국 관료 활동을 한 인물이다. 1932년 민생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방해했으며, 만주국 외교부 공무원으로 이승만 등 독립운동가 동정을 일제에 보고했다. 만주국 총영사직을 역임했으며, 광복 후 친일 혐의로 북한에서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2002년, 2008년, 2009년 발표된 친일 관련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박석윤은 전라남도 담양 출신으로 본적은 경성부 종로이다. 최남선의 여동생과 결혼했으며,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유학했다.
박석윤은 일제강점기에 언론인, 만주국 관료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 행위를 했다.[1] 시대일보 정치부장, 매일신보 부사장 등을 지냈고, 1932년에는 민생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방해했다. 이후 만주국 외교부 공무원, 폴란드 주재 총영사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 등의 독립운동 동정을 보고하는 밀정 활동을 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에는 간도협조회에서 독립 운동가들을 상대로 귀순 공작에 종사했다. 1940년에는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4위 경운장을 받았으며, 만주국협화회 중앙본부 위원 등을 지냈다.
2. 일제강점기 이전 생애
2. 1. 출생과 가계
전라남도 담양 출신으로 본적은 경성부 종로이다. 최남선의 여동생 최설경과 결혼했다.
2. 2. 학업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유학했다.
3. 일제강점기 활동
3. 1. 언론 활동
시대일보 정치부장과 매일신보 부사장을 지내며, 언론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적극 협력했다.[1]
3. 2. 민생단 조직 및 독립운동 방해
1932년 2월 5일, 박석윤은 동민회의 조병상, 김동한 등 친일 인물들과 천도교 인사들을 규합하여 간도에서 민생단을 창단했다. 단장은 군인 출신의 박두영이 맡았다. 이 조직은 중국 공산당의 오판을 불러와 민생단 사건으로 조선인 독립 운동가 수백여 명이 희생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박석윤은 민생단의 후신인 간도협조회에도 참가하여 밀정 조직을 관리했으며, 관제 조직인 만주국 협화회에 가담하여 선무 공작을 지도했다.
3. 3. 만주국 관료 활동
만주국 외교부 공무원으로 임명되어 해외에서 이승만 등의 독립 운동 동정을 일제에 보고하는 밀정 활동을 했다. 만주국의 폴란드 바르샤바 주재 총영사를 역임했다. 1939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만주국으로 귀국했다. 이후 간도협조회에서 독립 운동가들을 상대로 귀순 공작에 종사했다.
1940년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4위 경운장(景雲章)을 받았다. 1941년 만주국 국무원 총무청 참사관 겸 외무국 참사관, 1942년 만주국 국무원 총무청 외교부 참사관 등을 역임했다. 1940년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총무를 맡아 일제의 항일 무장 세력 탄압과 귀순 공작에 가담했고, 1942년 만주국협화회 중앙본부 위원을 지냈다.
4. 광복 이후 활동과 최후
1945년 8월 10일 일본 패전 소식이 경성에 전달되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는 다음 날 최하영에게 치안권 인수 적임자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최하영의 추천으로 박석윤은 여운형의 대리인으로서 1945년 8월 16일부터 9월 2일 미군정 주둔 시까지 총독부 경무국장과 함께 치안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미군 개입으로 건준에 대한 치안권 인수는 취소되었고, 박석윤은 니시히로 다다오를 보조하는 역할로 전락하였다.
1946년 3월 평양에 도착한 박석윤은 고혈압과 동맥경화 치료를 위해 양덕온천으로 요양을 갔다. 같은 해 7월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친일분자' 혐의로 체포되어 3일간 양덕보안소에 구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47년 2월 24일 평양 인민교화소에 구류되어 검찰소 심문을 받았고, 4월 19일 최고재판소에 기소되었다.
1948년 1월 22일 평안남도재판소는 박석윤에게 '친일반역자'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 박석윤은 1심 판결에 불복, 3월 6일 최고재판소에 상소했지만 기각되어 6월 9일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는 평양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50년 10월 19일 대한민국 국군이 평양에 입성하자 조선인민군에 의해 처형당했다.
4. 1. 조선총독부와 여운형 사이의 교섭
1945년 8월 10일 일본 패전 소식이 전달되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는 8월 11일 아침 총독부 농림국 관방농상과장 최하영(崔夏永)을 불러 치안권 인수 적임자를 추천해달라 요청했다. 최하영은 박석윤을 추천했고, 박석윤은 여운형의 대리인으로서 1945년 8월 16일부터 9월 2일 미군정 주둔 시까지 총독부 경무국장과 함께 치안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미군의 개입으로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한 치안권 인수는 취소되었고, 그는 니시히로 다다오(西廣忠雄)를 보조하는 역할로 전락하였다.4. 2. 미군정 개입과 실패
1945년 8월 10일 일본 패전 소식이 경성의 조선총독부에 전달되자,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는 당황하였다. 8월 11일 아침, 엔도 류사쿠는 총독부 농림국 관방농상과장 최하영(崔夏永)에게 치안권 인수 적임자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최하영은 박석윤을 추천했고, 1945년 8월 16일부터 9월 2일 미군정 주둔 시까지 박석윤은 총독부 경무국장과 함께 치안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미군 개입으로 건준에 대한 치안권 인수는 취소되었고, 박석윤은 니시히로 다다오(西廣忠雄)를 보조하는 역할로 전락하였다.4. 3. 북한에서의 체포와 처형
1946년 3월 평양에 도착한 뒤 지병인 고혈압과 동맥경화를 치료하기 위해 양덕온천으로 요양을 갔다고 전해진다. 1946년 7월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친일분자'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3일 동안 양덕보안소에 구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47년 2월 24일 평양 인민교화소에 구류된 뒤 검찰소의 심문을 받았고 같은 해 4월 19일 최고재판소에 기소되었다.1948년 1월 22일 평안남도재판소에서 '친일반역자'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박석윤은 1948년 3월 6일 1심 판결에 불복하여 최고재판소에 상소했지만 기각되었고 1948년 6월 9일 사형이 확정되었다. 평양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50년 10월 19일 대한민국 국군이 평양에 입성하자, 조선인민군에 의해 처형당했다.
5. 사후 평가
박석윤은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1]
5. 1. 친일반민족행위자 지정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박석윤의 이력이 상세히 실려 있으며, 그의 최후와 관련하여 "(광복 후 신분을 감추고) 숨어살다가 적발되어 민족반역자로서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고 밝혔다.[1]
5. 2. 김일성 회고록에서의 언급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박석윤의 이력이 상세히 실려 있으며, 그의 최후와 관련하여 "(광복 후 신분을 감추고) 숨어살다가 적발되어 민족반역자로서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라고 밝혔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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