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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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역사
- 3. 역대 바르셀로나 백작
- 3.1. 멘데 꽁뜨 가문
- 3.2. 셉테미니아 후작-우르헬 백작-툴루즈 백작가
- 3.3. 산리드 가문
- 3.3.1. 위프레도 1세 (878-897)
- 3.3.2. 위프레도 2세 보렐 (897-911)
- 3.3.3. 순제르 (911-947)
- 3.3.4. 보렐 2세 (947-992)
- 3.3.5. 미로 1세 (947-966)
- 3.3.6. 라몬 보렐 (988-1018)
- 3.3.7. 베렝게르 라몬 1세 (1018-1035)
- 3.3.8. 라몬 베렝게르 1세 (1035-1076)
- 3.3.9. 라몬 베렝게르 2세 (1076-1082)
- 3.3.10. 베렝게르 라몬 2세 (1076-1097)
- 3.3.11. 라몬 베렝게르 3세 (1082-1131)
- 3.3.12. 라몬 베랑가르 4세 (1131-1162)
- 3.4. 아라곤 가문
- 3.5. 트라스타마라 가문
- 3.6. 압스부르고 왕조
- 3.7.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중
- 3.8. 보르본 왕조
- 3.9. 대립 백작
- 4. 같이 보기
- 참조
1. 개요
바르셀로나 백작은 이베리아 반도 북동부의 바르셀로나 백국을 다스린 군주를 의미한다. 샤를마뉴 대제는 801년 바르셀로나를 함락시킨 후 이 지역을 백국으로 조직하면서 바르셀로나 백작령이 시작되었다. 초기 백작들은 카롤링거 왕조의 임명을 받았으며, 878년 이후에는 독립적인 세습 작위로 발전했다. 1137년 아라곤 왕국과 통합되어 아라곤 연합 왕국이 성립되었고, 이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거치며 스페인 왕국의 칭호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는 스페인 국왕이 바르셀로나 백작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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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백작 | |
---|---|
지도 | |
기본 정보 | |
국가 | 바르셀로나 |
유형 | 백작령 |
역사적 국가 | 카탈루냐 |
통치 | |
작위 | 바르셀로나 백작 |
역사 | |
설립 | 801년 |
해체 | 1714년 |
주요 사건 | 801년: 바르셀로나 점령 1162년: 아라곤 왕국과 통합 171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해체 |
이전 | |
이전 국가 | 카롤링거 제국 |
후계 국가 | 스페인 |
기타 | |
언어 | 카탈루냐어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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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샤를마뉴 대제는 785년부터 801년까지 이베리아 반도 북동부를 정복하고 바르셀로나를 함락시킨 후, 이 지역을 여러 백국으로 조직하면서 바르셀로나 백작령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 바르셀로나 백국은 마르카 중 하나였으며, 동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고티아 또는 히스파니아 변경지로 알려져 있었다. 초기 바르셀로나 백작들은 카롤링거 왕조의 임명을 받아 통치했다.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베라 | 801년-820년 | 젤론의 윌리엄의 아들, 라세와 콩플랑 백작(790년–820년), 지로나, 베잘루, 아우소나(812/817년–820년) 백작이기도 했으며, 폐위됨. |
람퐁 | 820년-826년 | 지로나와 베잘루 백작이기도 함. |
베르나르 1세 | 826년-832년 | 젤론의 윌리엄의 아들, 세프티마니아 변경백(834년–835년)이자 황실 집사(829년–830년)이기도 했으며, 폐위됨. |
베렝게르 | 832년-835년 | 툴루즈 백작이기도 함. |
베르나르 1세 | 836년-844년 | 복위되었으나, 대머리왕 샤를의 명령으로 처형됨. |
수니프레드 | 844년-848년 | 카르카손의 벨로의 아들이거나 사위, 아우소나, 베잘루, 지로나, 나르본, 아그드, 베지에, 로데브, 멜궤이유, 세르다냐, 우르젤, 콩플랑, 님 백작이기도 함. |
윌리엄 | 848년-850년 | 베르나르 1세의 아들, 툴루즈 백작(844년–850년)이기도 했으며, 반란을 일으켜 사망함. |
알레랑 | 850년-852년 | 엠푸리아스와 루시용 백작이자 세프티마니아 변경백이기도 함. |
오달리크 | 852년-858년 | 이스트리아 변경백 훈프리드의 아들, 지로나, 루시용, 엠푸리아스 백작이자 세프티마니아 변경백이기도 함. |
훈프리드 | 858년-864년 | 레티아 공작 훈프리드 2세의 아들, 지로나, 엠푸리아스, 루시용, 나르본 백작이자 고티아 변경백이기도 함. |
베르나르 2세 | 865년-878년 | 푸아티에의 베르나르의 아들, 지로나 백작이자 고티아와 세프티마니아 변경백이기도 했으며, 반란을 일으킴. |
2. 1. 프랑크 왕국 시대 (801년-878년)
샤를마뉴 대제가 785년부터 801년까지 이베리아 반도 북동부를 정복하고 바르셀로나를 함락시킨 후, 이 지역을 여러 백국으로 조직하면서 바르셀로나 백작령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 바르셀로나 백국은 마르카 중 하나였으며, 동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고티아 또는 히스파니아 변경지로 알려져 있었다. 초기 바르셀로나 백작들은 카롤링거 왕조의 임명을 받아 통치했다.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베라 | 801년-820년 | 젤론의 윌리엄의 아들, 라세와 콩플랑 백작(790년–820년), 지로나, 베잘루, 아우소나(812/817년–820년) 백작이기도 했으며, 폐위됨. |
람퐁 | 820년-826년 | 지로나와 베잘루 백작이기도 함. |
베르나르 1세 | 826년-832년 | 젤론의 윌리엄의 아들, 세프티마니아 변경백(834년–835년)이자 황실 집사(829년–830년)이기도 했으며, 폐위됨. |
베렝게르 | 832년-835년 | 툴루즈 백작이기도 함. |
베르나르 1세 | 836년-844년 | 복위되었으나, 대머리왕 샤를의 명령으로 처형됨. |
수니프레드 | 844년-848년 | 카르카손의 벨로의 아들이거나 사위, 아우소나, 베잘루, 지로나, 나르본, 아그드, 베지에, 로데브, 멜궤이유, 세르다냐, 우르젤, 콩플랑, 님 백작이기도 함. |
윌리엄 | 848년-850년 | 베르나르 1세의 아들, 툴루즈 백작(844년–850년)이기도 했으며, 반란을 일으켜 사망함. |
알레랑 | 850년-852년 | 엠푸리아스와 루시용 백작이자 세프티마니아 변경백이기도 함. |
오달리크 | 852년-858년 | 이스트리아 변경백 훈프리드의 아들, 지로나, 루시용, 엠푸리아스 백작이자 세프티마니아 변경백이기도 함. |
훈프리드 | 858년-864년 | 레티아 공작 훈프리드 2세의 아들, 지로나, 엠푸리아스, 루시용, 나르본 백작이자 고티아 변경백이기도 함. |
베르나르 2세 | 865년-878년 | 푸아티에의 베르나르의 아들, 지로나 백작이자 고티아와 세프티마니아 변경백이기도 했으며, 반란을 일으킴. |
2. 2. 독립 백작 시대 (878년-1162년)
카롤링거 왕조의 쇠퇴와 함께 바르셀로나 백작은 점차 독립적인 세습 작위로 발전했다. 카롤링거 제국의 혼란으로 인해 카탈루냐 백작들은 무어족의 공격에 대한 지원 요청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북쪽의 카롤링거 중앙 정부와의 연결이 끊어졌다.빌프레드 1세의 아들인 빌프레드 2세 보렐 1세는 897년부터 911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지냈다. 수니에르는 911년부터 947년까지 백작위를 계승했다. 보렐 2세는 947년부터 992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지냈으며, 무어인과의 전투에서 서프랑크 왕 로타르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실패하고, 987년 위그 카페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라몬 보렐은 988년부터 1017년까지 재임했다. 그의 아들 베렝게르 라몬 1세는 1017년부터 1035년까지 백작위를 이었다. 라몬 베렝게르 1세는 1035년부터 1076년까지 재임했으며, 그의 묘는 와 같이 바르셀로나 대성당 내부에 위치해 있다.
라몬 베렝게르 2세와 베렝게르 라몬 2세 형제는 1076년부터 공동 통치했다. 이후 라몬 베렝게르 3세가 1082년부터 1131년까지, 라몬 베렝게르 4세가 1131년부터 1162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역임했다. 라몬 베렝게르 4세는 1137년 아라곤 왕녀 페트로닐라와 약혼하고 1150년에 결혼했다.
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설명 |
---|---|---|---|
위프레드 1세 털 많은 백작 (el Pelós) | 100px | 878년 - 897년 | 위프레드 다리아 백작의 아들. 자신의 자손에 의한 세습 제도를 확립. |
위프레드 2세 보렐 | 897년 - 911년 | 위프레드 털 많은 백작의 아들 | |
수네르 1세 | 911년 - 947년 | 위프레드 2세의 동생. 수도원으로 은퇴함. | |
보렐 2세 | 947년 - 992년 | 수네르 1세의 아들 미로 1세와 공동 통치(947년 - 966년), 라몬 보렐과 공동 통치(988년 - 992년), 우르젤 백작(948년 - 992년). | |
미로 1세 | 947년 - 966년 | 수네르 2세의 아들, 보렐 2세와 공동 통치. | |
라몬 보렐 | 988년 - 1018년 | 보렐 2세의 아들, 아버지와 함께 공동 통치(988년 - 992년). | |
베렝게르 라몬 1세 굽은 백작 (el Corbat) | 1018년 - 1035년 | 라몬 보렐의 아들. | |
라몬 베렝게르 1세 노인 백작 (el Vell) | 1035년 - 1076년 | 베렝게르 라몬 1세의 아들 | |
라몬 베렝게르 2세 헝겊 조각 머리 백작 ('el Cap dEstopes'') | 1076년 - 1082년 | 라몬 베렝게르 1세의 아들, 쌍둥이 동생인 베렝게르 라몬 2세와 공동 통치. | |
베렝게르 라몬 2세 형제 살해자 백작 (el Fratricida) | 1076년 - 1097년 | 라몬 베렝게르 1세의 아들, 쌍둥이 동생인 라몬 베렝게르 2세와 공동 통치(1076년 - 1082년). 조카인 라몬 베렝게르 3세와 공동 통치(1082년 - 1097년) | |
라몬 베렝게르 3세 대 백작 (el Gran) | 100px | 1082년 - 1131년 | 라몬 베렝게르 2세의 아들 |
라몬 베렝게르 4세 성자 백작 (el Sant) | 100px | 1131년 - 1162년 | 라몬 베렝게르 3세의 아들. |
2. 3. 아라곤 연합 왕국 시대 (1162년-1410년)
라몬 베렝게르 4세는 아라곤 여왕 페트로닐라(카탈루냐어: 파르넬야)와 결혼하여 아라곤 연합 왕국을 성립시켰다. 두 사람의 아들인 알폰소 2세는 바르셀로나 백국과 아라곤 왕국을 함께 통치했다. 아라곤 역사에서는 이 왕가를 '''바르셀로나 가문'''이라고 부른다.하우메 1세 때인 1258년 코르베이유 조약을 체결하여 카탈루냐는 프랑스의 속국 상태에서 벗어났다.
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설명 |
---|---|---|---|
알폰소 1세 순결왕 (el Cast) 기타리스트 왕 (el Trobador) | 1162년 - 1196년 | 라몬 베랑게르 4세와 아라곤 여왕 파르넬야의 아들 | |
페레 1세 (Pere I) 가톨릭왕 (el Catòlic) | 1196년 - 1213년 | 알폰소 2세의 아들 | |
자우메 1세 (Jaume I) 정복왕 (el Conqueridor) | 1213년 - 1276년 | 페레 1세의 아들. 1258년 코르베이유 조약을 체결하여 카탈루냐는 프랑스의 속국 상태에서 벗어난다. | |
페레 2세 (Pere II) 대왕 (el Gran) | ![]() | 1276년 - 1285년 | 자우메 1세의 아들 |
알폰소 2세 자유왕 (el Franc) | 1285년 - 1291년 | 페레 2세의 아들 | |
자우메 2세 (Jaume II) 정의왕 (el Just) | 1291년 - 1327년 | 알폰소 2세의 동생 | |
알폰소 3세 자비왕 (el Benigne) | 1327년 - 1336년 | 자우메 2세의 아들 | |
페레 3세 (Pere III) 의전왕 (el Cerimoniós) el del Punyalet | 1336년 - 1387년 | 알폰소 3세의 아들 | |
후안 1세 (Joan I) 사냥왕 (el Caçador) 경솔왕 (el Descurat) 우아함의 애호가 ('lAmador de la Gentilesa'') | 1387년 - 1396년 | 페레 3세의 아들 | |
마르티 1세 (Martí I) 인문왕 ('lHumà) 성직자왕 (lclesiàstic) | 1396년 - 1410년 | 후안 1세의 동생.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 | |
2. 4. 트라스타마라 왕조 시대 (1412년-1516년)
1410년 마르틴 1세가 적법한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바르셀로나 백작 가문은 단절되었다. 2년간의 무정부 상태 이후, 1412년 카스페 협정에 따라 트라스타마라 가문 출신의 페르난도 1세가 바르셀로나 백작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 엘레오노르가 페드로 4세의 딸이자 가장 가까운 남자 친족이었기 때문이다.페르난도 1세의 아들 알폰소 5세를 거쳐, 후안 2세가 바르셀로나 백작을 계승했다. 후안 2세와 그의 첫 번째 왕비인 블랑카 1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카를로스와의 대립으로 인해, 카탈루냐 내전(1462년-1472년)이 발발했다. 이 내전으로 인해 바르셀로나 백작위는 엔리케 4세, 페드로 5세, 르네 1세에게 차례로 넘어갔다.
카탈루냐 내전 이후, 후안 2세가 다시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복위되었고, 그의 아들 페르난도 2세가 그 뒤를 이었다. 페르난도 2세는 1469년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결혼했다. 페르난도 2세 사후, 그의 딸 후아나가 바르셀로나 백작위를 계승했으나, 그녀의 아들 카를 5세가 공동 통치자였기 때문에 그녀의 통치는 명목상이었다.
이름 | 초상화 | 재위 | 비고 |
---|---|---|---|
페르난도 1세 | ![]() | 1412년 9월 3일 – 1416년 4월 2일 | 마르틴 1세의 조카이자 트라스타마라 가문 출신의 첫 번째 바르셀로나 백작. |
알폰소 4세 | ![]() | 1416년 4월 2일 – 1458년 6월 27일 | 페르난도 1세의 아들. |
후안 2세 | ![]() | 1458년 6월 27일 – 1462년 | 알폰소 4세의 동생. 카탈루냐 내전 동안 카탈루냐인들은 그에게 대항했으며, 1462년 다른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왕위 계승자에게 백작 작위를 넘겼다. |
후안 2세가 가지고 있던 아라곤 왕과 바르셀로나 백작의 칭호는 카탈루냐 내전(1462년 - 1472년) 기간 동안 아라곤 왕가의 피를 이은 다음 인물들에 의해 다투어졌다: | |||
엔리케 4세 | ![]() | 1462년 - 1463년 | 페르난도 1세의 손자이자 트라스타마라 가문 출신이었다. |
페드로 4세 | ![]() | 1463년 – 1466년 | 페드로 3세의 증손자였다. |
르네 1세 | 1466년 – 1472년 | 후안 1세의 손자였다. | |
후안 2세 | 1472년 – 1479년 1월 20일 | 알폰소 4세의 동생. 카탈루냐 내전 이후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복위되었다. | |
페르난도 2세 | ![]() | 1479년 1월 20일 – 1516년 1월 23일 | 후안 2세의 아들. |
후아나 | ![]() | 1516년 1월 23일 – 1555년 4월 12일 | 페르난도 2세의 딸. 그녀의 아들 카를 5세가 공동 통치자였기 때문에 그녀의 통치는 명목상이었다. |
2. 5. 합스부르크 왕조 시대 (1516년-1700년)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통합으로 스페인 왕국이 형성되면서, 바르셀로나 백작위는 스페인 국왕의 칭호 중 하나가 되었다.카를 1세는 후아나 여왕과 카스티야의 필리페 1세의 아들로, 1516년부터 1555년 어머니가 사망할 때까지 섭정으로서, 이후 1556년까지 단독으로 통치했다. 그는 카탈루냐 당국과 좋은 관계를 맺어 카탈루냐 공의 칭호를 받았다.[1] 필리페 1세는 카를 1세의 아들로 1556년부터 1598년까지 재위했다. 필리페 2세는 필리페 1세의 아들로 1598년부터 1621년까지 재위했다.
필리페 3세는 필리페 2세의 아들로 1621년부터 재위했으나,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축소하려 시도하면서 가을 추수 봉기(1640-1659)가 발발했다. 1641년 카탈루냐 공국의 브라ços 제너럴(Braços Generals)은 프랑스의 루이 13세를 바르셀로나 백작 루이 1세로 선포했다.[2][3] 루이 2세는 가을걷이 전쟁 중 아버지로부터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를 상속받았으나, 1652년 펠리페 3세에게 루시옹과 교환하는 대가로 작위를 포기했다.
이후 필리페 3세가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복위되어 1659년부터 1665년까지 재위했으며, 그의 아들 카를로스 2세가 1665년부터 1700년까지 재위했다. 1697년, 뱅돔 공작 지휘하의 프랑스군이 바르셀로나를 점령하였고, 루이 14세가 몇 달 동안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복위되었다. 그러나 1698년 1월 9일, 리스위크 조약에 따라 카탈루냐(바르셀로나 포함)는 카를로스 2세에게 반환되었다.
이 시기 카탈루냐는 중앙 집권화되는 과정을 겪으며 자치권을 잃어갔다.
2. 6.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부르봉 왕조 (1700년-현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0년-1714년) 동안, 카탈루냐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지지했으나,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가 승리하면서 카탈루냐의 자치권은 더욱 축소되었다. 카를로스 2세는 그의 계승자로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 필립(필립 5세)을 지명했고, 다른 유럽 열강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을 스페인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다. 카탈루냐는 이러한 분쟁에서 처음에 필립을 지지했으나, 이후 카를에게 충성을 바쳤다.이름 | 초상 | 재위 | 비고 |
---|---|---|---|
필립 4세 | ![]() | 1700 – 1705 | 그는 필립 3세의 증손자였다. |
카를 3세 | ![]() | 1705 – 1714 | 그는 필립 3세의 아들이었다. |
1714년, 앙주 공 필리페에게 패배한 후, 누에바 플랜타 법령을 통해 카탈루냐 헌법이 폐지되고 아라곤 연합왕국이 해체되어 스페인 왕국이 형성되었다. 이로써 카탈루냐 공국은 또 다른 주가 되었고, 바르셀로나 백작의 칭호는 실질적인 정치적 의미와 권력을 상실했다.
이름 | 초상화 | 재위 기간 | 비고 |
---|---|---|---|
필리페 5세 | ![]() | 1714년 – 1724년 1월 15일 | 이전에는 필리페 4세로 불렸습니다. 필리페 3세의 증손자. |
루이 1세 | ![]() | 1724년 1월 15일 – 1724년 8월 31일 | 필리페 5세의 아들. |
필리페 5세 (두 번째 재위) | 1724년 9월 6일 – 1746년 7월 9일 | 이전에는 필리페 4세로 불렸습니다. | |
페르난도 6세 | ![]() | 1746년 7월 9일 – 1759년 8월 10일 | 필리페 5세의 아들. |
카를로스 3세 | ![]() | 1759년 8월 10일 – 1788년 12월 14일 | 필리페 5세의 아들. |
카를로스 4세 | ![]() | 1788년 12월 14일 – 1808년 3월 19일 | 카를로스 3세의 아들. |
페르난도 7세 | ![]() | 1808년 3월 19일 – 1808년 5월 6일 | 카를로스 4세의 아들. |
1808년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는 스페인 왕관의 칭호를 나폴레옹 황제에게 넘겼다. 1812년 카탈루냐 공국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확보한 나폴레옹은 카탈루냐를 프랑스 제국에 합병했다.
이름 | 초상화 | 재위 기간 | 비고 |
---|---|---|---|
나폴레옹 1세, 황제 | ![]() | 1808–1813 | 나폴레옹은 4개의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카탈루냐를 프랑스 제국에 합병했다. |
이후 페르난도 7세가 복위되었고, 이사벨 2세를 거쳐 자유주의 혁명으로 퇴위당했다.
공화정 시대 이후, 아마데오 1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퇴위하고, 알폰소 12세가 즉위하면서 부르봉 왕가가 복위되었다.
이름 | 초상 | 재위기간 | 비고 |
---|---|---|---|
아마데오 1세(Amadeo I) | ![]() | 1870년 11월 16일 – 1873년 2월 11일 | 짧은 재위 기간 후 아마데오는 퇴위했다. |
이름 | 초상 | 재위기간 | 비고 |
---|---|---|---|
알폰소 12세 | 1874년 12월 29일 – 1885년 11월 25일 | 이사벨라 2세(Isabella II)의 아들. | |
알폰소 13세 | ![]() | 1886년 5월 17일 – 1931년 4월 14일 | 알폰소 12세의 아들. |
스페인 제2공화국과 프랑코 독재 시대 동안 부르봉 왕가는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1947년 스페인이 왕국으로 선포되었지만, 1969년 프랑코가 후안 카를로스 1세를 공식 상속자로 지명할 때까지 군주는 없었다. 1975년 프랑코 사망 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스페인 국왕이 되었다.
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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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13세 (망명 중) | 1931년 4월 14일 – 1941년 2월 28일 | 폐위되어 망명 생활을 하던 왕은 스페인 왕위와 관련된 칭호들을 유지했다. | |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 (망명 중 왕위 계승권 주장자) | ![]() | 1941년 1월 15일 – 1975년 11월 22일 | 알폰소 13세의 아들. 아버지의 서거 후 왕위 계승을 주장하기 위해 바르셀로나 백작 칭호를 사용했다. |
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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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3세 | 1977 – 1993 | 1977년 그의 아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권 포기에 대한 답례로 예우상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를 공식적으로 수여했습니다. | |
후안 카를로스 1세 | ![]() | 1975년 11월 22일 – 1977년 | 알폰소 13세의 손자. 아버지 사후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를 계승했습니다. 아들 펠리페 6세에게 퇴위했습니다. |
펠리페 6세 | ![]() | 2014년 6월 19일 – 현재 | 현 스페인 국왕이자 바르셀로나 백작(다른 작위들 중에서). |
인명은 카탈루냐어 표기를 우선한다.
3. 역대 바르셀로나 백작
베라는 801년부터 820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젤론의 윌리엄의 아들로, 라세와 콩플랑 백작(790–820), 지로나, 베잘루, 아우소나(812/817–820) 백작이기도 했다. 그는 카롤링거 당국에 의해 임명된 고티아 또는 히스파니아 변경지의 백작 중 한 명이었다. 통치 기간 동안 바르셀로나 백국은 마르카 중 하나였다. 결국 베라는 폐위되었다.
람포(Rampó)는 820년부터 826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람포는 지로나와 베잘루 백작이기도 했다. 이 시기 바르셀로나 백국은 마르카 중 하나였으며, 동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고티아 또는 히스파니아 변경지로 알려져 있었다. 이 변경지의 백작들은 카롤링거 당국에 의해 임명되었다.
베르나르 1세는 826년부터 832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젤론의 윌리엄의 아들이자, 세프티마니아 변경백(834–835)이자 황실 집사(829–830)이기도 했으며, 폐위되었다.
베렝게르는 832년부터 835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툴루즈 백작이기도 했다.
베르나르 1세는 836년부터 844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복위되었으나, 대머리왕 샤를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수니프레드는 844년부터 848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카르카손의 벨로의 아들이거나 사위였으며, 아우소나, 베잘루, 지로나, 나르본, 아그드, 베지에, 로데브, 멜궤이유, 세르다냐, 우르젤, 콩플랑, 님 백작이기도 했다.
윌리엄은 848년부터 850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베르나르 1세의 아들이자, 툴루즈 백작(844–850)이기도 했으며, 반란을 일으켜 사망했다.
알레랑은 850년부터 852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엠푸리아스와 루시용 백작이자 세프티마니아 변경백이기도 했다.
오달리크는 852년부터 858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이스트리아 변경백 훈프리드의 아들이자, 지로나, 루시용, 엠푸리아스 백작이자 세프티마니아 변경백이기도 했다.
훈프리드는 858년부터 864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레티아 공작 훈프리드 2세의 아들이자, 지로나, 엠푸리아스, 루시용, 나르본 백작이자 고티아 변경백이기도 했다.
베르나르 2세는 865년부터 878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푸아티에의 베르나르의 아들이자, 지로나 백작이자 고티아와 세프티마니아 변경백이기도 했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위프레도 1세는 878년부터 897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보렐 1세는 위프레도 1세의 아들이다. 897년부터 911년 4월 26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지냈다.
수니에르는 911년 4월 26일부터 947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위프레도 1세와 기니딜다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째 아들로, 890년경 지로나에서 태어났다. 914년 아이밀다와 결혼하여 자녀 1명을 두었고, 925년 리킬드와 재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950년 10월 15일 라그라스에서 사망했으며, 당시 나이는 59~60세였다.
보렐 2세는 수니에르의 아들이다. 미로 1세와 공동 통치(947년 - 966년)를 하였으며, 라몬 보렐과 공동 통치(988년 - 992년)를 하였다. 우르젤 백작(948년 - 992년)이기도 하다. 무어인과의 전투에서 서프랑크 왕 로타르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987년 위그 카페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이름 초상 재위 기간 설명 보렐 2세 (Borrell II) 947년 - 992년 수네르 1세의 아들
미로 1세와 공동 통치(947년 - 966년), 라몬 보렐과 공동 통치(988년 - 992년),
우르젤 백작(948년 - 992년). 무어인과의 전투에서 서프랑크 왕 로타르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987년 위그 카페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미로 1세는 수니에르의 아들이자 보렐 2세와 공동 통치(947년-966년)를 하였다.
라몬 보렐은 972년 5월 26일 지로나에서 보렐 2세와 루이트가르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993년에 카르카손의 에르멘센드와 결혼하여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버지 보렐 2세가 992년에 사망하자 단독 통치를 시작했다. 1017년 9월 8일 바르셀로나에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베렝게르 라몬 1세는 라몬 보렐의 아들이다. 어머니인 카르카손의 에르멘센드가 섭정을 맡았고, 그는 산초 대왕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강요받았다.이름 초상 재위 기간 설명 베렝게르 라몬 1세 (Berenguer Ramón I)
굽은 백작 (el Corbat)1018년 - 1035년 라몬 보렐의 아들. 어머니인 카르카손 백작 부인 에르메신다가 섭정을 맡았고, 그는 나바라 왕 산초 대왕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강요받았다.
라몬 베렝게르 1세는 베렝게르 라몬 1세의 아들로, 1035년부터 1076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어머니 카르카손의 에르멘센드가 1035년부터 1039년까지 섭정을 맡았다.
1039년 니므의 엘리자베트와 결혼해 세 명의 자녀를 두었고, 1051년 3월 16일 나르본의 블랑슈와 재혼했으나 1052년 파혼했다. 1052년부터 라 마르슈의 알모디스와 함께 살았으며, 1056년 정식으로 결혼해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1076년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으며, 바르셀로나 대성당에 라 마르슈의 알모디스와 합장되었다.
라몬 베렝게르 2세는 라몬 베렝게르 1세의 아들로, 쌍둥이 형제인 베렝게르 라몬 2세와 함께 1076년부터 공동 통치하였다. 헝겊 조각 머리 백작 (''el Cap d'Estopes'')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1082년 산 펠리우 드 부이살류에서 사망했다.
베렝게르 라몬 2세 형제 살해자 백작 (''el Fratricida'')은 1076년부터 1097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라몬 베렝게르 1세의 아들로, 쌍둥이 동생인 라몬 베렝게르 2세와 공동 통치(1076년–1082년)하였고, 조카인 라몬 베렝게르 3세와 공동 통치(1082년–1097년)하였다.
'''라몬 베렝게르 3세'''(1082년 11월 11일 ~ 1131년 7월 19일)는 1082년 12월 6일부터 1131년 7월 19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대왕"이라고도 불린다. 라몬 베렝게르 2세와 아풀리아-칼라브리아의 마팔다의 아들이다. 1082년부터 1097년까지는 베렝게르 라몬 2세와 공동 통치하였다.
그는 마리아 디아스 데 비바르와 1103년에 결혼하여 2명의 자녀를 두었고, 1106년에는 모르탱의 알모디스와 결혼하였으나 자녀는 없었다. 1112년 2월 3일 두스 1세와 아를에서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
라몬 베렝게르 4세는 라몬 베렝게르 3세의 아들이다. 1137년, 아라곤 왕녀 페트로닐라와 약혼하였고 1150년에 결혼하였다. 페트로닐라와의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두었다. 1162년 8월 6일 보르고 산 달마조에서 사망했다.
알폰소 1세 (1162년 - 1196년)는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와 페트로닐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아라곤 연합왕국의 성립으로, 알폰소 1세는 바르셀로나 백작과 아라곤의 군주 지위를 동시에 계승받았다. 아라곤 역사에서는 이 왕가를 '''바르셀로나 가문'''이라고 부른다. 알폰소 1세는 1196년 사망하였다.
페드로 1세 가톨릭은 1178년 7월 우에스카에서 알폰소 1세와 카스티야의 산차의 아들로 태어났다. 1196년 4월 25일부터 1213년 9월 13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몽펠리에의 마리와 1204년 6월 15일에 결혼하여 자녀 2명을 두었다. 1213년 9월 12일 무레 전투에서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하우메 1세 정복왕(1208년 2월 2일 ~ 1276년 7월 27일)은 페드로 1세 가톨릭와 몽펠리에의 마리의 아들로 1213년 9월 13일 부터 1276년 7월 27일까지 재위하였다.
하우메 1세는 ''우르젤 백작녀 아우렘비아이슈와의 혼인 계약(1209), 이행되지 않음''을 맺었다. 이후, 카스티야의 엘레오노르와 1221년 2월 6일 아그레다에서 결혼하여 자녀 1명을 두었다. 헝가리의 비올란트와 1235년 9월 8일 바르셀로나에서 결혼하여 자녀 10명을 두었다. 테레사 질 데 비다우레와 ''(정부, 후에 아내)'' 1255년 ''(비합법적인 결혼, 1260년 파기)''하여 자녀 2명을 두었다. 1276년 7월 27일 발렌시아에서 6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258년 콜베유 조약을 체결하여 바르셀로나 백작령은 프랑스의 속국 상태에서 벗어났다.
페드로 2세 대왕은 1240년 7월 또는 8월 발렌시아에서 하우메 1세와 헝가리의 비올란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76년 7월 27일부터 1285년 11월 2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시칠리아의 콘스탄스와 1262년 6월 13일 몽펠리에에서 결혼하여 자녀 6명을 두었다. 1285년 11월 2일 빌라프랑카 델 페네데스에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페드로 2세의 아들로 1285년 11월 2일부터 1291년 6월 18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알폰소 2세는 1265년 11월 4일 발렌시아에서 태어났으며, 시칠리아의 콘스탄스를 어머니로 두었다. 잉글랜드의 엘레오노르와 1290년 8월 15일에 대리 결혼을 하였으나, 신부가 아라곤으로 오는 도중 신랑이 사망하여 성사되지 않았다. 1291년 6월 18일 바르셀로나에서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하이메 2세 (1291–1327)는 페드로 2세와 시칠리아의 콘스탄스의 아들로, 1291년 형 알폰소 2세가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카스티야의 이사벨라와 1291년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고, 이후 앙주의 블랑슈와 1295년 재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루지냥의 마리와 1315년에, 엘리산다 데 몬트카다와 1322년에 각각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1327년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하였다. 100px
알폰소 3세 자비로운(1299년 11월 2일 - 1336년 1월 24일)는 아라곤의 하우메 2세와 앙주의 블랑슈의 아들이다. 1327년부터 1336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역임했다.
알폰소 3세는 테레사 덴텐사와 1314년에 레이다에서 결혼하여 자녀 7명을 두었고, 카스티야의 엘레오노르와 1329년 2월 5일 타라소나에서 결혼하여 자녀 2명을 두었다. 1336년 1월 27일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페드로 3세'''(1319년 10월 5일 발라게르 출생 - 1387년 1월 5일 바르셀로나 사망)는 알폰소 3세와 테레사 덴텐사의 아들이다. 나바라의 마리아와 1337년 7월 25일 사라고사에서 결혼하여 자녀 2명을 두었다. 이후 포르투갈의 레오노르와 1347년 11월 14일 또는 15일에 바르셀로나에서 재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시칠리아의 엘레오노르와 1349년 8월 27일 발렌시아에서 세 번째 결혼을 하여 자녀 4명을 두었고, 포르티아의 시빌라와 1377년 10월 11일 바르셀로나에서 네 번째 결혼을 하여 자녀 3명을 두었다.이름 초상 재위 기간 설명 페레 3세
(Pere III)
의전왕 (el Cerimoniós)
el del Punyalet100px 1336년 - 1387년 알폰소 3세의 아들
페드로 3세와 시칠리아의 엘레오노르의 아들인 후안 1세는 1350년 12월 27일 페르피냥에서 태어났다. 그는 1387년 1월 5일부터 1396년 5월 19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지냈다.
후안 1세는 아르마냐크의 마르타와 1373년 6월 24일 바르셀로나에서 결혼하여 자녀 5명을 두었고, 바르의 비올란트와 1380년 2월 2일 페르피냥에서 재혼하여 자녀 7명을 두었다.
후안 1세는 '사냥왕'(''el Caçador''), '경솔왕'(''el Descurat''), '우아함의 애호가'(''l'Amador de la Gentilesa'') 등으로 불렸다. 1396년 5월 19일 포이샤에서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페드로 3세와 시칠리아의 엘레오노르의 아들인 마르티 1세는 1396년 5월 19일부터 1410년 5월 31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역임했다. 마르티 1세는 '인문왕' 또는 '성직자왕'으로 불렸다. 그는 후안 1세의 동생이었다. 마리아 데 루나와 1372년 6월 13일 바르셀로나에서 결혼하여 자녀 4명을 두었으나,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이후 프라데스의 마가렛과 1409년 9월 17일 바르셀로나에서 재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페르난도 1세(1412–1416)는 마르틴 1세의 조카이자 트라스타마라 가문 출신의 첫 번째 바르셀로나 백작이다. 마르티 1세의 죽음으로 기프레 다모 백작 이래로 남자 계승으로 이어져 온 바르셀로나 백작가가 단절되었다. 카스페의 타협 이후 2년 만에 카스티야 왕가인 트라스타마라 가문 출신인 페랑 1세가 바르셀로나 백작이 되었다. 페랑의 어머니 에리오노르가 페드로 4세의 딸이자 가장 가까운 남자 친족이었기 때문이다.이름 초상화 재위 비고 페르난도 1세 (정직왕) (Ferdinand I the Honest) 1412년 9월 3일 – 1416년 4월 2일 마르틴 1세의 조카이자 트라스타마라 가문 출신의 첫 번째 바르셀로나 백작.
'''알폰소 5세'''(알폰스 4세 엘 마그나님/Alfons IV el Magnànimca)는 1416년 4월 2일부터 1458년 6월 27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페르난도 1세의 아들이다.
후안 2세는 1458년 6월 27일부터 1462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지냈다. 그는 알폰소 4세의 동생이었다. 카탈루냐인들은 카탈루냐 내전 동안 그에게 대항했으며, 1462년 다른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왕위 계승자에게 백작 작위를 넘겼다.
3. 1. 멘데 꽁뜨 가문
베라는 801년부터 820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젤론의 윌리엄의 아들로, 라세와 콩플랑 백작(790–820), 지로나, 베잘루, 아우소나(812/817–820) 백작이기도 했다. 그는 카롤링거 당국에 의해 임명된 고티아 또는 히스파니아 변경지의 백작 중 한 명이었다. 통치 기간 동안 바르셀로나 백국은 마르카 중 하나였다. 결국 베라는 폐위되었다.
람포(Rampó)는 820년부터 826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람포는 지로나와 베잘루 백작이기도 했다. 이 시기 바르셀로나 백국은 마르카 중 하나였으며, 동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고티아 또는 히스파니아 변경지로 알려져 있었다. 이 변경지의 백작들은 카롤링거 당국에 의해 임명되었다.
베르나르 1세는 826년부터 832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젤론의 윌리엄의 아들이자, 세프티마니아 변경백(834–835)이자 황실 집사(829–830)이기도 했으며, 폐위되었다.
베렝게르는 832년부터 835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툴루즈 백작이기도 했다.
베르나르 1세는 836년부터 844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복위되었으나, 대머리왕 샤를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수니프레드는 844년부터 848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카르카손의 벨로의 아들이거나 사위였으며, 아우소나, 베잘루, 지로나, 나르본, 아그드, 베지에, 로데브, 멜궤이유, 세르다냐, 우르젤, 콩플랑, 님 백작이기도 했다.
윌리엄은 848년부터 850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베르나르 1세의 아들이자, 툴루즈 백작(844–850)이기도 했으며, 반란을 일으켜 사망했다.
알레랑은 850년부터 852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엠푸리아스와 루시용 백작이자 세프티마니아 변경백이기도 했다.
오달리크는 852년부터 858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이스트리아 변경백 훈프리드의 아들이자, 지로나, 루시용, 엠푸리아스 백작이자 세프티마니아 변경백이기도 했다.
훈프리드는 858년부터 864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레티아 공작 훈프리드 2세의 아들이자, 지로나, 엠푸리아스, 루시용, 나르본 백작이자 고티아 변경백이기도 했다.
베르나르 2세는 865년부터 878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푸아티에의 베르나르의 아들이자, 지로나 백작이자 고티아와 세프티마니아 변경백이기도 했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3. 1. 1. 베라 (801-820)
베라는 801년부터 820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젤론의 윌리엄의 아들로, 라세와 콩플랑 백작(790–820), 지로나, 베잘루, 아우소나(812/817–820) 백작이기도 했다. 그는 카롤링거 당국에 의해 임명된 고티아 또는 히스파니아 변경지의 백작 중 한 명이었다. 통치 기간 동안 바르셀로나 백국은 마르카 중 하나였다. 결국 베라는 폐위되었다.
3. 1. 2. 람포 (820-826)
람포(Rampó)는 820년부터 826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람포는 지로나와 베잘루 백작이기도 했다. 이 시기 바르셀로나 백국은 마르카 중 하나였으며, 동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고티아 또는 히스파니아 변경지로 알려져 있었다. 이 변경지의 백작들은 카롤링거 당국에 의해 임명되었다.
3. 2. 셉테미니아 후작-우르헬 백작-툴루즈 백작가
베르나르도 1세는 젤론의 윌리엄의 아들로, 826년부터 832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지냈다. 그는 세프티마니아 변경백(834–835)이자 황실 집사(829–830)이기도 했으나 폐위되었다. 이후 베렝게르가 832년부터 835년까지 백작위를 이었다. 베르나르 1세는 835년 복위되었으나, 대머리왕 샤를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베렝게르는 832년부터 835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역임했다. 그는 툴루즈 백작이기도 했다.
수니프레도는 카르카손의 벨로의 아들이거나 사위로, 843년 루이스 1세 ''경건왕''으로부터 안도라를 기증받았다. 수니프레도는 아우소나, 베잘루, 지로나, 나르본, 아그드, 베지에, 로데브, 멜궤이유, 세르다냐, 우르젤, 콩플랑, 님 백작이기도 했다.
굴리엘모는 베르나르 1세의 아들로, 툴루즈 백작(844년 ~ 850년)이기도 했으며, 반란을 일으켜 사망했다.
알레란은 850년부터 852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엠푸리아스 백작과 루시용 백작이자 셉테미니아 변경백이기도 했다. 엘리자베트와 공동 통치하였다.
엘리자베트는 850년부터 852년까지 알레란과 공동으로 바르셀로나 백작을 지냈다. 알레란은 엠푸리아스와 루시용 백작이자 세프티마니아 변경백이기도 했다.
오달리크는 훈프리트 1세의 아들로, 852년부터 858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그는 히로나 백작, 루살료 백작, 암프리아스 백작, 세프티마니아 변경백을 겸했다.
레티아 공작 훈프리드 2세의 아들 훈프리드가 858년부터 864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역임했다. 훈프리드는 히로나, 엠푸리아스, 루시용, 나르본 백작이자 고티아 변경백이기도 했다.
베르나르도 2세는 푸아티에의 베르나르의 아들로,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지로나 백작이며, 고티아와 셉테미니아 변경백이었다. 그는 865년부터 878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통치했다. 당시 바르셀로나 백국은 마르카 중 하나였으며, 동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고티아 또는 히스파니아 변경지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
3. 2. 1. 베르나르도 1세 (826-832, 835-844)
베르나르 1세는 젤론의 윌리엄의 아들로, 826년부터 832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지냈다. 그는 세프티마니아 변경백(834–835)이자 황실 집사(829–830)이기도 했으나 폐위되었다. 이후 베렝게르가 832년부터 835년까지 백작위를 이었다.
베르나르 1세는 835년 복위되었으나, 대머리왕 샤를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3. 2. 2. 베렝게르 (832-835)
베렝게르는 832년부터 835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역임했다. 그는 툴루즈 백작이기도 했다. 그는 대머리왕 샤를에 의해 임명되었다.
3. 2. 3. 수니프레도 (844-848)
카르카손의 벨로의 아들이거나 사위로, 843년 루이스 1세 ''경건왕''으로부터 안도라를 기증받았다. 수니프레도는 아우소나, 베잘루, 지로나, 나르본, 아그드, 베지에, 로데브, 멜궤이유, 세르다냐, 우르젤, 콩플랑, 님 백작이기도 했다.
3. 2. 4. 굴리엘모 (848-850)
굴리엘모는 베르나르 1세의 아들로, 툴루즈 백작(844년 ~ 850년)이기도 했으며, 반란을 일으켜 사망했다.
3. 2. 5. 알레란 (850-852)
알레란은 850년부터 852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엠푸리아스 백작과 루시용 백작이자 셉테미니아 변경백이기도 했다. 엘리자베트와 공동 통치하였다.
3. 2. 6. 엘리자베트 (850-852)
알레란과 엘리자베트는 850년부터 852년까지 공동으로 바르셀로나 백작을 지냈다. 알레란은 엠푸리아스와 루시용 백작이자 세프티마니아 변경백이기도 했다.
3. 2. 7. 오달리크 (852-858)
오달리크는 이스트리아 변경백 훈프리트 1세의 아들로, 852년부터 858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그는 히로나 백작, 루살료 백작, 암프리아스 백작, 세프티마니아 변경백을 겸했다.
3. 2. 8. 후니프레도 (858-864)
레티아 공작 훈프리드 2세의 아들 훈프리드가 858년부터 864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역임했다. 훈프리드는 히로나, 엠푸리아스, 루시용, 나르본 백작이자 고티아 변경백이기도 했다.
3. 2. 9. 베르나르도 2세 (865-878)
베르나르 2세는 푸아티에의 베르나르의 아들로,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지로나 백작이며, 고티아와 셉테미니아 변경백이었다. 그는 865년부터 878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통치했다. 당시 바르셀로나 백국은 마르카 중 하나였으며, 동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고티아 또는 히스파니아 변경지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
3. 3. 산리드 가문
위프레도 1세는 878년부터 897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위프레도 1세는 지로나 출신으로, 기니딜다와 결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897년 트렘프에서 사망했다. 위프레도 1세는 자신의 자손에 의한 세습 제도를 확립하였다. 카롤링거 제국의 혼란으로 인해 카탈루냐 백작들의 무어족 공격에 대한 지원 요청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되면서, 카탈루냐 백작들과 북쪽의 카롤링거 중앙 정부 간의 연결이 끊어졌다.
3. 3. 1. 위프레도 1세 (878-897)
위프레도 1세는 878년부터 897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위프레도 1세는 지로나 출신으로, 기니딜다와 결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897년 트렘프에서 사망했다. 위프레도 1세는 자신의 자손에 의한 세습 제도를 확립하였다. 카롤링거 제국의 혼란으로 인해 카탈루냐 백작들의 무어족 공격에 대한 지원 요청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되면서, 카탈루냐 백작들과 북쪽의 카롤링거 중앙 정부 간의 연결이 끊어졌다.
3. 3. 2. 위프레도 2세 보렐 (897-911)
위프레도 1세의 아들이다. 897년부터 911년 4월 26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지냈다. 그는 약 874년 지로나에서 위프레도 1세와 기니딜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98년에 가르센다와 결혼하여 자녀 1명을 두었다. 911년 4월 26일 바르셀로나에서 36~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3. 3. 순제르 (911-947)
수니에르는 911년 4월 26일부터 947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위프레도 1세와 기니딜다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째 아들로, 890년경 지로나에서 태어났다. 914년 아이밀다와 결혼하여 자녀 1명을 두었고, 925년 리킬드와 재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950년 10월 15일 라그라스에서 사망했으며, 당시 나이는 59~60세였다.
3. 3. 4. 보렐 2세 (947-992)
수니에르의 아들이다. 미로 1세와 공동 통치(947년 - 966년)를 하였으며, 라몬 보렐과 공동 통치(988년 - 992년)를 하였다. 우르젤 백작(948년 - 992년)이기도 하다. 무어인과의 전투에서 서프랑크 왕 로타르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987년 위그 카페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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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렐 2세 (Borrell II) | 947년 - 992년 | 수네르 1세의 아들 미로 1세와 공동 통치(947년 - 966년), 라몬 보렐과 공동 통치(988년 - 992년), 우르젤 백작(948년 - 992년). 무어인과의 전투에서 서프랑크 왕 로타르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987년 위그 카페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 |
3. 3. 5. 미로 1세 (947-966)
수니에르의 아들이자 보렐 2세와 공동 통치(947년-966년)를 하였다.3. 3. 6. 라몬 보렐 (988-1018)
972년 5월 26일 지로나에서 보렐 2세와 루이트가르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993년에 카르카손의 에르멘센드와 결혼하여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버지 보렐 2세가 992년에 사망하자 단독 통치를 시작했다. 1017년 9월 8일 바르셀로나에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보렐 2세의 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공동 통치(988년 - 992년)를 하였다.
3. 3. 7. 베렝게르 라몬 1세 (1018-1035)
라몬 보렐의 아들이다. 어머니인 카르카손의 에르멘센드가 섭정을 맡았고, 그는 산초 대왕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강요받았다.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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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게르 라몬 1세 (Berenguer Ramón I) 굽은 백작 (el Corbat) | 1018년 - 1035년 | 라몬 보렐의 아들. 어머니인 카르카손 백작 부인 에르메신다가 섭정을 맡았고, 그는 나바라 왕 산초 대왕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강요받았다. | |
3. 3. 8. 라몬 베렝게르 1세 (1035-1076)
베렝게르 라몬 1세의 아들로, 1035년부터 1076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어머니 카르카손의 에르멘센드가 1035년부터 1039년까지 섭정을 맡았다.
1039년 니므의 엘리자베트와 결혼해 세 명의 자녀를 두었고, 1051년 3월 16일 나르본의 블랑슈와 재혼했으나 1052년 파혼했다. 1052년부터 라 마르슈의 알모디스와 함께 살았으며, 1056년 정식으로 결혼해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1076년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으며, 바르셀로나 대성당에 라 마르슈의 알모디스와 합장되었다.
3. 3. 9. 라몬 베렝게르 2세 (1076-1082)
라몬 베렝게르 1세의 아들로, 쌍둥이 형제인 베렝게르 라몬 2세와 함께 1076년부터 공동 통치하였다. 헝겊 조각 머리 백작 (''el Cap d'Estopes'')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1082년 산 펠리우 드 부이살류에서 사망했다.3. 3. 10. 베렝게르 라몬 2세 (1076-1097)
라몬 베렝게르 2세 헝겊 조각 머리 백작 (''el Cap d'Estopes'')은 1076년부터 1082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라몬 베렝게르 1세의 아들로, 쌍둥이 동생인 베렝게르 라몬 2세와 공동으로 통치하였다.베렝게르 라몬 2세 형제 살해자 백작 (''el Fratricida'')은 1076년부터 1097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라몬 베렝게르 1세의 아들로, 쌍둥이 동생인 라몬 베렝게르 2세와 공동 통치(1076년–1082년)하였고, 조카인 라몬 베렝게르 3세와 공동 통치(1082년–1097년)하였다.
3. 3. 11. 라몬 베렝게르 3세 (1082-1131)
'''라몬 베렝게르 3세'''(1082년 11월 11일 ~ 1131년 7월 19일)는 1082년 12월 6일부터 1131년 7월 19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대왕"이라고도 불린다. 라몬 베렝게르 2세와 아풀리아-칼라브리아의 마팔다의 아들이다. 1082년부터 1097년까지는 베렝게르 라몬 2세와 공동 통치하였다.
그는 마리아 디아스 데 비바르와 1103년에 결혼하여 2명의 자녀를 두었고, 1106년에는 모르탱의 알모디스와 결혼하였으나 자녀는 없었다. 1112년 2월 3일 두스 1세와 아를에서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
3. 3. 12. 라몬 베랑가르 4세 (1131-1162)
라몬 베렝게르 3세의 아들이다. 1137년, 아라곤 왕녀 페트로닐라와 약혼하였고 1150년에 결혼하였다. 페트로닐라와의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두었다. 1162년 8월 6일 보르고 산 달마조에서 사망했다.3. 4. 아라곤 가문
알폰소 1세 (1162년 - 1196년)는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와 페트로닐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아라곤 연합왕국의 성립으로, 알폰소 1세는 바르셀로나 백작과 아라곤의 군주 지위를 동시에 계승받았다. 아라곤 역사에서는 이 왕가를 '''바르셀로나 가문'''이라고 부른다. 알폰소 1세는 1196년 사망하였다.페드로 1세 가톨릭은 1178년 7월 우에스카에서 알폰소 1세와 카스티야의 산차의 아들로 태어났다. 1196년 4월 25일부터 1213년 9월 13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몽펠리에의 마리와 1204년 6월 15일에 결혼하여 자녀 2명을 두었다. 1213년 9월 12일 무레 전투에서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하우메 1세 정복왕(1208년 2월 2일 ~ 1276년 7월 27일)은 페드로 1세 가톨릭와 몽펠리에의 마리의 아들로 1213년 9월 13일 부터 1276년 7월 27일까지 재위하였다.
하우메 1세는 ''우르젤 백작녀 아우렘비아이슈와의 혼인 계약(1209), 이행되지 않음''을 맺었다. 이후, 카스티야의 엘레오노르와 1221년 2월 6일 아그레다에서 결혼하여 자녀 1명을 두었다. 헝가리의 비올란트와 1235년 9월 8일 바르셀로나에서 결혼하여 자녀 10명을 두었다. 테레사 질 데 비다우레와 ''(정부, 후에 아내)'' 1255년 ''(비합법적인 결혼, 1260년 파기)''하여 자녀 2명을 두었다. 1276년 7월 27일 발렌시아에서 6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258년 콜베유 조약을 체결하여 바르셀로나 백작령은 프랑스의 속국 상태에서 벗어났다.
페드로 2세 대왕은 1240년 7월 또는 8월 발렌시아에서 하우메 1세와 헝가리의 비올란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76년 7월 27일부터 1285년 11월 2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시칠리아의 콘스탄스와 1262년 6월 13일 몽펠리에에서 결혼하여 자녀 6명을 두었다. 1285년 11월 2일 빌라프랑카 델 페네데스에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페드로 2세의 아들로 1285년 11월 2일부터 1291년 6월 18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알폰소 2세는 1265년 11월 4일 발렌시아에서 태어났으며, 시칠리아의 콘스탄스를 어머니로 두었다. 잉글랜드의 엘레오노르와 1290년 8월 15일에 대리 결혼을 하였으나, 신부가 아라곤으로 오는 도중 신랑이 사망하여 성사되지 않았다. 1291년 6월 18일 바르셀로나에서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하이메 2세 (1291–1327)는 페드로 2세와 시칠리아의 콘스탄스의 아들로, 1291년 형 알폰소 2세가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카스티야의 이사벨라와 1291년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고, 이후 앙주의 블랑슈와 1295년 재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루지냥의 마리와 1315년에, 엘리산다 데 몬트카다와 1322년에 각각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1327년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하였다. 100px
알폰소 3세 자비로운(1299년 11월 2일 - 1336년 1월 24일)는 아라곤의 하우메 2세와 앙주의 블랑슈의 아들이다. 1327년부터 1336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역임했다.
알폰소 3세는 테레사 덴텐사와 1314년에 레이다에서 결혼하여 자녀 7명을 두었고, 카스티야의 엘레오노르와 1329년 2월 5일 타라소나에서 결혼하여 자녀 2명을 두었다. 1336년 1월 27일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페드로 3세'''(1319년 10월 5일 발라게르 출생 - 1387년 1월 5일 바르셀로나 사망)는 알폰소 3세와 테레사 덴텐사의 아들이다. 나바라의 마리아와 1337년 7월 25일 사라고사에서 결혼하여 자녀 2명을 두었다. 이후 포르투갈의 레오노르와 1347년 11월 14일 또는 15일에 바르셀로나에서 재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시칠리아의 엘레오노르와 1349년 8월 27일 발렌시아에서 세 번째 결혼을 하여 자녀 4명을 두었고, 포르티아의 시빌라와 1377년 10월 11일 바르셀로나에서 네 번째 결혼을 하여 자녀 3명을 두었다.
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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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 3세 (Pere III) 의전왕 (el Cerimoniós) el del Punyalet | 100px | 1336년 - 1387년 | 알폰소 3세의 아들 |
페드로 3세와 시칠리아의 엘레오노르의 아들인 후안 1세는 1350년 12월 27일 페르피냥에서 태어났다. 그는 1387년 1월 5일부터 1396년 5월 19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지냈다.
후안 1세는 아르마냐크의 마르타와 1373년 6월 24일 바르셀로나에서 결혼하여 자녀 5명을 두었고, 바르의 비올란트와 1380년 2월 2일 페르피냥에서 재혼하여 자녀 7명을 두었다.
후안 1세는 '사냥왕'(''el Caçador''), '경솔왕'(''el Descurat''), '우아함의 애호가'(''l'Amador de la Gentilesa'') 등으로 불렸다. 1396년 5월 19일 포이샤에서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페드로 3세와 시칠리아의 엘레오노르의 아들인 마르티 1세는 1396년 5월 19일부터 1410년 5월 31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역임했다. 마르티 1세는 '인문왕' 또는 '성직자왕'으로 불렸다. 그는 후안 1세의 동생이었다. 마리아 데 루나와 1372년 6월 13일 바르셀로나에서 결혼하여 자녀 4명을 두었으나,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이후 프라데스의 마가렛과 1409년 9월 17일 바르셀로나에서 재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3. 4. 1. 알폰소 1세 (1162-1196)
알폰소 1세 (1162년 - 1196년)는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와 페트로닐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아라곤 연합왕국의 성립으로, 알폰소 1세는 바르셀로나 백작과 아라곤의 군주 지위를 동시에 계승받았다. 아라곤 역사에서는 이 왕가를 '''바르셀로나 가문'''이라고 부른다. 알폰소 1세는 1196년 사망하였다.3. 4. 2. 페드로 1세 (1196-1213)
페드로 1세 가톨릭은 1178년 7월 우에스카에서 알폰소 1세와 카스티야의 산차의 아들로 태어났다. 1196년 4월 25일부터 1213년 9월 13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몽펠리에의 마리와 1204년 6월 15일에 결혼하여 자녀 2명을 두었다. 1213년 9월 12일 무레 전투에서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4. 3. 하이메 1세 (1213-1276)
하우메 1세 정복왕(1208년 2월 2일 ~ 1276년 7월 27일)은 페드로 1세 가톨릭와 몽펠리에의 마리의 아들로 1213년 9월 13일 부터 1276년 7월 27일까지 재위하였다.하우메 1세는 ''우르젤 백작녀 아우렘비아이슈와의 혼인 계약(1209), 이행되지 않음''을 맺었다. 이후, 카스티야의 엘레오노르와 1221년 2월 6일 아그레다에서 결혼하여 자녀 1명을 두었다. 헝가리의 비올란트와 1235년 9월 8일 바르셀로나에서 결혼하여 자녀 10명을 두었다. 테레사 질 데 비다우레와 ''(정부, 후에 아내)'' 1255년 ''(비합법적인 결혼, 1260년 파기)''하여 자녀 2명을 두었다. 1276년 7월 27일 발렌시아에서 6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258년 콜베유 조약을 체결하여 바르셀로나 백작령은 프랑스의 속국 상태에서 벗어났다.
3. 4. 4. 페드로 2세 (1276–1285)
페드로 2세 대왕은 1240년 7월 또는 8월 발렌시아에서 하우메 1세와 헝가리의 비올란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76년 7월 27일부터 1285년 11월 2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시칠리아의 콘스탄스와 1262년 6월 13일 몽펠리에에서 결혼하여 자녀 6명을 두었다. 1285년 11월 2일 빌라프랑카 델 페네데스에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4. 5. 알폰소 2세 (1285-1291)
페드로 2세의 아들로 1285년 11월 2일부터 1291년 6월 18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알폰소 2세는 1265년 11월 4일 발렌시아에서 태어났으며, 시칠리아의 콘스탄스를 어머니로 두었다. 잉글랜드의 엘레오노르와 1290년 8월 15일에 대리 결혼을 하였으나, 신부가 아라곤으로 오는 도중 신랑이 사망하여 성사되지 않았다. 1291년 6월 18일 바르셀로나에서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4. 6. 하이메 2세 (1291–1327)
하이메 2세 (1291–1327)는 페드로 2세와 시칠리아의 콘스탄스의 아들로, 1291년 형 알폰소 2세가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카스티야의 이사벨라와 1291년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고, 이후 앙주의 블랑슈와 1295년 재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루지냥의 마리와 1315년에, 엘리산다 데 몬트카다와 1322년에 각각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1327년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하였다. 100px3. 4. 7. 알폰소 3세 (1327-1336)
알폰소 3세 자비로운(1299년 11월 2일 - 1336년 1월 24일)는 아라곤의 하우메 2세와 앙주의 블랑슈의 아들이다. 1327년부터 1336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역임했다.알폰소 3세는 테레사 덴텐사와 1314년에 레이다에서 결혼하여 자녀 7명을 두었고, 카스티야의 엘레오노르와 1329년 2월 5일 타라소나에서 결혼하여 자녀 2명을 두었다. 1336년 1월 27일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3. 4. 8. 페드로 3세 (1336–1387)
'''페드로 3세'''(1319년 10월 5일 발라게르 출생 - 1387년 1월 5일 바르셀로나 사망)는 알폰소 3세와 테레사 덴텐사의 아들이다. 나바라의 마리아와 1337년 7월 25일 사라고사에서 결혼하여 자녀 2명을 두었다. 이후 포르투갈의 레오노르와 1347년 11월 14일 또는 15일에 바르셀로나에서 재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시칠리아의 엘레오노르와 1349년 8월 27일 발렌시아에서 세 번째 결혼을 하여 자녀 4명을 두었고, 포르티아의 시빌라와 1377년 10월 11일 바르셀로나에서 네 번째 결혼을 하여 자녀 3명을 두었다.
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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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 3세 (Pere III) 의전왕 (el Cerimoniós) el del Punyalet | 100px | 1336년 - 1387년 | 알폰소 3세의 아들 |
3. 4. 9. 후안 1세 (1387-1396)
페드로 3세와 시칠리아의 엘레오노르의 아들인 후안 1세는 1350년 12월 27일 페르피냥에서 태어났다. 그는 1387년 1월 5일부터 1396년 5월 19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지냈다.후안 1세는 아르마냐크의 마르타와 1373년 6월 24일 바르셀로나에서 결혼하여 자녀 5명을 두었고, 바르의 비올란트와 1380년 2월 2일 페르피냥에서 재혼하여 자녀 7명을 두었다.
후안 1세는 '사냥왕'(''el Caçador''), '경솔왕'(''el Descurat''), '우아함의 애호가'(''l'Amador de la Gentilesa'') 등으로 불렸다. 1396년 5월 19일 포이샤에서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4. 10. 마르티노 1세 (1396-1410)
페드로 3세와 시칠리아의 엘레오노르의 아들인 마르티 1세는 1396년 5월 19일부터 1410년 5월 31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역임했다. 마르티 1세는 '인문왕' 또는 '성직자왕'으로 불렸다. 그는 후안 1세의 동생이었다. 마리아 데 루나와 1372년 6월 13일 바르셀로나에서 결혼하여 자녀 4명을 두었으나,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이후 프라데스의 마가렛과 1409년 9월 17일 바르셀로나에서 재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3. 5. 트라스타마라 가문
페르난도 1세(1412–1416)는 마르틴 1세의 조카이자 트라스타마라 가문 출신의 첫 번째 바르셀로나 백작이다. 마르티 1세의 죽음으로 기프레 다모 백작 이래로 남자 계승으로 이어져 온 바르셀로나 백작가가 단절되었다. 카스페의 타협 이후 2년 만에 카스티야 왕가인 트라스타마라 가문 출신인 페랑 1세가 바르셀로나 백작이 되었다. 페랑의 어머니 에리오노르가 페드로 4세의 딸이자 가장 가까운 남자 친족이었기 때문이다.'''알폰소 5세'''(알폰스 4세 엘 마그나님/Alfons IV el Magnànimca)는 1416년 4월 2일부터 1458년 6월 27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페르난도 1세의 아들이다.
후안 2세는 1458년 6월 27일부터 1462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지냈다. 그는 알폰소 4세의 동생이었다. 카탈루냐인들은 카탈루냐 내전 동안 그에게 대항했으며, 1462년 다른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왕위 계승자에게 백작 작위를 넘겼다.
카탈루냐 내전 이후, 트라스타마라 가문은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의 소유자이자 카탈루냐 공국의 군주로 복위되었다. 1472년부터 1479년 1월 20일까지 후안 2세는 다시 바르셀로나 백작 지위를 회복했다.
후안 2세는 페랑 1세의 아들이었다. 첫 번째 왕비인 나바라 여왕 블랑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카를로스 (비아나 공작)과의 대립으로 왕당파와 비아나 공작파로 나뉘어 카탈루냐 내전이 발생했다.
페르난도 2세는 요한 2세의 아들이다. 1469년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과 결혼했다.
3. 5. 1. 페르난도 1세 (1412–1416)
페르난도 1세(1412–1416)는 마르틴 1세의 조카이자 트라스타마라 가문 출신의 첫 번째 바르셀로나 백작이다. 마르티 1세의 죽음으로 기프레 다모 백작 이래로 남자 계승으로 이어져 온 바르셀로나 백작가가 단절되었다. 카스페의 타협 이후 2년 만에 카스티야 왕가인 트라스타마라 가문 출신인 페랑 1세가 바르셀로나 백작이 되었다. 페랑의 어머니 에리오노르가 페드로 4세의 딸이자 가장 가까운 남자 친족이었기 때문이다.이름 | 초상화 | 재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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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1세 (정직왕) (Ferdinand I the Honest) | 1412년 9월 3일 – 1416년 4월 2일 | 마르틴 1세의 조카이자 트라스타마라 가문 출신의 첫 번째 바르셀로나 백작. |
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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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랑 1세 (Ferran I) 안테케라 왕 'el dAntequera'' | 100px | 1412년 - 1416년 | 카스티야 왕 후안 1세와 왕비 에리오노르 다라곤의 아들 |
3. 5. 2. 알폰소 5세 (1416–1458)
'''알폰소 5세'''(Alphonse IV the Magnanimous, 알폰스 4세 엘 마그나님/Alfons IV el Magnànimca)는 1416년 4월 2일부터 1458년 6월 27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 페르난도 1세의 아들이다.
3. 5. 3. 후안 2세 (1458–1479)
후안 2세는 1458년 6월 27일부터 1462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지냈다. 그는 알폰소 4세의 동생이었다. 카탈루냐인들은 카탈루냐 내전 동안 그에게 대항했으며, 1462년 다른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왕위 계승자에게 백작 작위를 넘겼다.카탈루냐 내전 이후, 트라스타마라 가문은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의 소유자이자 카탈루냐 공국의 군주로 복위되었다. 1472년부터 1479년 1월 20일까지 후안 2세는 다시 바르셀로나 백작 지위를 회복했다.
후안 2세는 페랑 1세의 아들이었다. 첫 번째 왕비인 나바라 여왕 블랑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카를로스 (비아나 공작)과의 대립으로 왕당파와 비아나 공작파로 나뉘어 카탈루냐 내전이 발생했다.
3. 5. 4. 페르난도 2세 (1479–1516)
요한 2세의 아들이다. 1469년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과 결혼했다.3. 6. 압스부르고 왕조
- 카를로스 1세는 후아나 여왕과 카스티야의 필리페 1세의 아들이다. 1516년 3월 14일부터 1555년 4월 12일까지는 섭정으로서, 1555년 4월 12일부터 1556년 1월 16일까지는 단독 통치자로서 재위했다. 1555년 어머니가 사망할 때까지 그는 섭정이었지만 사실상 통치자였다. 그는 (어머니가 사망할 때까지) 백작이 아니었고 카탈루냐 당국과 좋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카탈루냐 공의 칭호를 받았다.[1]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결혼하여 스페인 왕국이 성립되었으며, 그의 사후 합스부르크가(家)의 손자 찰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펠리페 1세는 카를 1세의 아들이었다. 1556년 1월 16일부터 1598년 9월 13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지냈다.


그는 필리페 1세의 아들이었다. 1598년 9월 13일부터 1621년 3월 31일까지 재위했다.
펠리페 3세는 펠리페 2세의 아들이었다. 그는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축소하려고 했고, 카탈루냐 당국은 가을 추수 봉기 동안 그에게 맞섰다. 바르셀로나 백작의 칭호는 카탈루냐 의회에 의해 프랑스 부르봉 왕가로 넘어갔다.

카를로스 2세는 펠리페 3세의 아들로, 1665년 9월 17일부터 1700년 11월 1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1] 1697년, 뱅돔 공작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바르셀로나를 점령했고, 루이 14세가 몇 달 동안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복위되기도 했다. 그러나 1698년 1월 9일, 리스위크 조약에 따라 카탈루냐(바르셀로나 포함)가 카를로스 2세에게 반환되었다. 카를로스 2세는 후사 없이 사망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의 바르셀로나 백작 계보는 단절되었다.

3. 6. 1. 카를로스 1세 (1516–1554)
카를로스 1세는 후아나 여왕과 카스티야의 필리페 1세의 아들이다. 1516년 3월 14일부터 1555년 4월 12일까지는 섭정으로서, 1555년 4월 12일부터 1556년 1월 16일까지는 단독 통치자로서 재위했다. 1555년 어머니가 사망할 때까지 그는 섭정이었지만 사실상 통치자였다. 그는 (어머니가 사망할 때까지) 백작이 아니었고 카탈루냐 당국과 좋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카탈루냐 공의 칭호를 받았다.[1]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결혼하여 스페인 왕국이 성립되었으며, 그의 사후 합스부르크가(家)의 손자 찰스가 왕위를 계승했다.3. 6. 2. 펠리페 1세 (1554-1598)
펠리페 1세는 카를 1세의 아들이었다. 1556년 1월 16일부터 1598년 9월 13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지냈다.이름 | 초상화 | 재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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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페 1세 (Philip I) | 1556년 1월 16일 – 1598년 9월 13일 | 그는 카를 1세의 아들이었다. | |
3. 6. 3. 펠리페 2세 (1598-1621)
그는 필리페 1세의 아들이었다. 1598년 9월 13일부터 1621년 3월 31일까지 재위했다.
3. 6. 4. 펠리페 3세 (1621-1665)
펠리페 3세는 펠리페 2세의 아들이었다. 그는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축소하려고 했고, 카탈루냐 당국은 가을 추수 봉기 동안 그에게 맞섰다. 바르셀로나 백작의 칭호는 카탈루냐 의회에 의해 프랑스 부르봉 왕가로 넘어갔다.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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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3세 (Felip III) | 100px | 1621년 - 1665년 | 펠리페 2세의 아들 |
카탈루냐 농민 반란 기간 동안, 바르셀로나 백작의 칭호를 부르봉 왕가(Bourbon)의 프랑스 왕들이 칭하였다: | |||
루이 13세 | 100px | 1641년 - 1643년 | style="text-align:left" | |
루이 14세 | 100px | 1643년 - 1652년 | style="text-align:left" | |
3. 6. 5. 카를로스 2세 (1665-1700)
카를로스 2세는 펠리페 3세의 아들로, 1665년 9월 17일부터 1700년 11월 1일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다.[1] 1697년, 뱅돔 공작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바르셀로나를 점령했고, 루이 14세가 몇 달 동안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복위되기도 했다. 그러나 1698년 1월 9일, 리스위크 조약에 따라 카탈루냐(바르셀로나 포함)가 카를로스 2세에게 반환되었다. 카를로스 2세는 후사 없이 사망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의 바르셀로나 백작 계보는 단절되었다.이름 | 초상화 | 재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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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2세 (Charles II) | 1665년 9월 17일 – 1700년 11월 1일 | 필리페 3세의 아들. | |
3. 7.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중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기간 동안, 잉글랜드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오스트리아 등 대동맹 국가들은 합스부르크가의 스페인 왕위 계승자 카를 대공(레오폴트 1세의 아들)을 지지하며 군사 지원을 했다. 카탈루냐는 처음에는 펠리페 4세를 지지했으나, 이후 카를에게 충성을 바쳤다. 카를 대공은 1705년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여 1706년 스페인 왕임을 선포했다.1705년부터 1714년까지 지속된 전쟁의 결과, 카를 대공의 외국 동맹 측은 이득을 보았지만, 카탈루냐와 아라곤 모두에게는 재앙이었다. 1711년, 형 요제프 1세의 죽음으로 카를 대공은 황제 카를 6세로 즉위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대동맹 국가들은 합스부르크가의 영토 확장 가능성을 우려하여 카를 6세 지지에 소극적이 되었고, 펠리페 4세를 지지하는 스페인-프랑스 측과 협상을 시작했다. 철저한 항전을 호소했던 카탈루냐는 우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저항 운동이 진압되었다. 1714년 9월 11일 바르셀로나가 스페인군에 함락되었다.
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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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레스 3세 (카를레스 3세/Carles IIIca) | 100px | 1705년 - 1714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레오폴트 1세의 아들. 1705년부터 1714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인정받았다. |
3. 7. 1. 펠리페 4세 (1700-1714)
펠리페 4세는 카를로스 2세의 지명에 따라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다른 유럽 열강들은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여 카를로스 3세를 지지하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 카탈루냐는 처음에는 펠리페 4세를 지지했으나, 이후 카를로스 3세가 카탈루냐 헌법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하자 그에게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펠리페 4세가 전쟁에서 승리하였다.이름 | 초상 | 재위 | 비고 |
---|---|---|---|
펠리페 4세 | 1700년 – 1705년 | 그는 필립 4세의 증손자였다. | |
카를 3세 | 1705년 – 1714년 | 그는 필립 4세의 아들이었다. |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기간 동안, 잉글랜드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오스트리아 등 대동맹 국가들은 레오폴트 1세의 아들인 카를 대공(카를 6세)을 지지했다. 카탈루냐는 펠리페 4세를 거부하고 1705년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카를 대공을 1706년 스페인 왕으로 선포했다.
1705년부터 1714년까지 지속된 전쟁은 카를 대공의 동맹 측에 이득이 되었지만, 카탈루냐와 아라곤에는 재앙이었다. 1710년 이후 발렌시아와 아라곤의 독자적인 정치 행정 기구와 특권이 폐지되었다. 1711년, 카를 대공은 형 요제프 1세의 죽음으로 황제 카를 6세로 즉위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대동맹 국가들은 합스부르크가의 영토 확장을 우려하여 카를 6세 지지에 소극적이 되었고, 펠리페 4세를 지지하는 스페인-프랑스 측과 협상을 시작했다. 카탈루냐는 철저한 항전을 호소했지만, 우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진압되었다. 1714년 9월 11일 바르셀로나가 스페인군에 함락되었다.
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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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4세 (펠리프 4세/Felip IVes) | 100px | 1700년 - 1714년 | 프랑스의 루이의 아들. 1700년부터 1705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인정받았다. |
카를레스 3세 (카를레스 3세/Carles IIIca) | 100px | 1705년 - 1714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레오폴트 1세의 아들. 1705년부터 1714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인정받았다. |
1707년부터 1716년 사이에 펠리페 4세는 전 영토를 중앙집권 체제하의 스페인 왕국으로 통합했다. 1716년 1월 바르셀로나에서는 신국가 기본법(en)에 따라 카탈루냐 지방 의회, 코르츠 등 중세 이래의 조직이 모두 폐지되었다. 마드리드에서 군·민 양쪽을 통괄하는 총독이 파견되었고, 대학이 폐지되었다. 카탈루냐 법은 폐지되었고, 공공장소에서의 카탈루냐어 사용도 금지되었다. 바르셀로나 백작의 칭호는 독립적인 카탈루냐 군주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페인 왕이 사용하는 많은 칭호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되었다.
3. 7. 2. 카를로스 3세 (1705-1714)
펠리페 4세에 이어 카를로스 3세가 1705년부터 1714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지냈다. 카를로스 2세는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 필립(펠리페 5세)을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다른 유럽 국가들은 프랑스에 과도한 권력이 집중될 것을 우려했다. 이들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카를 6세)을 스페인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이름 | 초상 | 재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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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3세 | 1705 – 1714 | 그는 필립 4세의 아들이었다. |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기간 동안, 잉글랜드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오스트리아 등 대동맹 국가들은 합스부르크가의 스페인 왕위 계승자 카를 대공(레오폴트 1세의 아들)을 지지하며 군사 지원을 했다. 카탈루냐는 처음에는 펠리페를 지지했으나, 이후 카를에게 충성을 바쳤다. 카를 대공은 1705년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여 1706년 스페인 왕임을 선포했다.
1705년부터 1714년까지 지속된 전쟁의 결과, 카를 대공의 외국 동맹 측은 이득을 보았지만, 카탈루냐와 아라곤 모두에게는 재앙이었다. 1711년, 형 요제프 1세의 죽음으로 카를 대공은 황제 카를 6세로 즉위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대동맹 국가들은 합스부르크가의 영토 확장 가능성을 우려하여 카를 6세 지지에 소극적이 되었고, 펠리페 4세를 지지하는 스페인-프랑스 측과 협상을 시작했다. 철저한 항전을 호소했던 카탈루냐는 우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저항 운동이 진압되었다. 1714년 9월 11일 바르셀로나가 스페인군에 함락되었다.
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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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레스 3세 (Carles III) | 100px | 1705년 - 1714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레오폴트 1세의 아들. 1705년부터 1714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인정받았다. |
3. 8. 보르본 왕조
171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왕위 계승자였던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을 지지했던 카탈루냐는 보르본 왕조의 왕위 계승자였던 앙주 공 필리페에게 패배했다. 누에바 플랜타 법령을 통해 스페인의 새 국왕이 된 필리페 5세는 카탈루냐 헌법을 폐지하고 아라곤 연합왕국을 해체하여 그 영토를 카스티야 왕관의 영토와 합쳐 스페인을 형성했다. 카탈루냐 공국은 또 다른 주가 되었고, 따라서 바르셀로나 백작의 칭호는 실질적인 정치적 의미와 권력을 상실했다. 그 이후로 바르셀로나 백작의 계승은 카스티야 왕관의 계승을 따랐다. 1702년 카탈루냐 당국은 필리페 앙주를 '펠리페 4세'라고 불렀지만, 카탈루냐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1714년 바르셀로나 백작의 칭호를 획득했을 때 자신을 '펠리페 5세'라고 불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이름 | 초상화 | 재위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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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페 5세 | 1714년 – 1724년 1월 15일 | 이전에는 필리페 4세로 불렸습니다. 필리페 3세의 증손자. | |
루이 1세 | 1724년 1월 15일 – 1724년 8월 31일 | 필리페 5세의 아들. | |
필리페 5세 (두 번째 재위) | 1724년 9월 6일 – 1746년 7월 9일 | 이전에는 필리페 4세로 불렸습니다. | |
페르난도 6세 | 1746년 7월 9일 – 1759년 8월 10일 | 필리페 5세의 아들. | |
카를로스 3세 | 1759년 8월 10일 – 1788년 12월 14일 | 필리페 5세의 아들. | |
카를로스 4세 | 1788년 12월 14일 – 1808년 3월 19일 | 카를로스 3세의 아들. | |
페르난도 7세 | 1808년 3월 19일 – 1808년 5월 6일 | 카를로스 4세의 아들. | |
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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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7세 (복위) | 1814년 5월 4일 – 1833년 9월 29일 | 카를로스 4세의 아들. | |
이사벨 2세 | ![]() | 1833년 9월 29일 – 1868년 9월 30일 | 페르난도 7세의 딸. |
이사벨 2세는 자유주의 혁명으로 퇴위당하고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아마데오 1세의 퇴위 후를 이은 공화정부는 선언에 의해 폐지되었고, 보르본 왕가가 스페인 국왕으로 복위되었다.
이름 | 초상 | 재위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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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12세 | 1874년 12월 29일 – 1885년 11월 25일 | 이사벨 2세의 아들. | |
알폰소 13세 | 1886년 5월 17일 – 1931년 4월 14일 | 알폰소 12세의 아들. | |
1931년 4월 12일 1931년 스페인 지방 선거에서 공화파는 전체 의원 과반수를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주요 도시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선거는 군주제에 대한 국민투표로 여겨졌고, 국왕은 스페인을 떠났으며, 1931년 4월 14일 스페인 제2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스페인 제2공화국과 프랑코 독재 시대 동안 보르본 왕가는 망명 생활을 이어가며 "바르셀로나 백작"을 포함한 왕가의 칭호들을 유지했다.
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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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13세 (망명 중) | 1931년 4월 14일 – 1941년 2월 28일 | 폐위되어 망명 생활을 하던 왕은 스페인 왕위와 관련된 칭호들을 유지했다. | |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 (망명 중 왕위 계승권 주장자) | 1941년 1월 15일 – 1975년 11월 22일 | 알폰소 13세의 아들. 아버지의 서거 후 왕위 계승을 주장하기 위해 바르셀로나 백작 칭호를 사용했다. | |
1947년 7월 26일 스페인이 왕국으로 선포되었지만, 1969년 프랑코가 후안 카를로스 1세를 공식 상속자로 지명할 때까지 군주는 없었다. 1975년 11월 20일 프랑코 사망 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스페인 국왕이 되었다.
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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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3세 | 1977 – 1993 | 1977년 그의 아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권 포기에 대한 답례로 예우상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를 공식적으로 수여했습니다. | |
후안 카를로스 1세 | 1975년 11월 22일 – 2014년 6월 19일 | 알폰소 13세의 손자. 아버지 사후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를 계승했습니다. 아들 펠리페 6세에게 퇴위했습니다. | |
펠리페 6세 | 2014년 6월 19일 – 현재 | 현 스페인 국왕이자 바르셀로나 백작(다른 작위들 중에서). |
3. 8. 1. 바르셀로나 백작 인판테 후안 (1944 - 1993)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은 1941년 1월 15일부터 1975년 11월 22일까지 망명 중 왕위 계승권 주장자였다. 알폰소 13세의 아들로, 아버지의 서거 후 왕위 계승을 주장하기 위해 바르셀로나 백작 칭호를 사용했다. 스페인 제2공화국과 프랑코 독재 시대 동안 부르봉 왕가는 망명 생활을 이어가며 "바르셀로나 백작"을 포함한 왕가의 칭호들을 유지했다.
3. 8. 2. 후안 카를로스 1세 (1993 - 2014)
후안 카를로스 1세(Juan Carlos I)는 알폰소 13세(Alfonso XIII)의 손자이다. 아버지 후안 3세 사후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를 계승했으며, 아들 펠리페 6세(Felipe VI)에게 퇴위했다. 1975년 11월 22일부터 1977년까지 재위했다.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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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카를로스 1세(Juan Carlos I) | 1975년 11월 22일 – 1977년 | 알폰소 13세(Alfonso XIII)의 손자. 아버지 사후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를 계승했습니다. 아들 펠리페 6세(Felipe VI)에게 퇴위했습니다. |
3. 8. 3. 펠리페 6세 (2014 - )
wikitext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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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6세(Felipe VI) | 2014년 6월 19일 – 현재 | 현 스페인 국왕이자 바르셀로나 백작(다른 작위들 중에서). |
3. 9. 대립 백작
대립백 엔리케 (1462-1463)페르난도 1세의 손자이자 트라스타마라 가문 출신이었다.
대립백 페드로 4세 (1463–1466)
페드로 3세의 증손자였다.
대립백 레나토 (1466–1472)
사냥꾼 후안의 손자였다. 또한 프로방스 백작이기도 했다.
루이스 1세 정의백 (1641-1643)

가을걷이 전쟁 중, 1641년 1월 21일 카탈루냐 공국의 브라ços 제너럴(Braços Generals)이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를 루이 1세로서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선포했다.[2][3]
루이스 2세 태양백 (1643-1652)

'''루이 2세'''(루이 14세 드 프랑스/Louis XIV de France프랑스어, 1638년 9월 5일 – 1715년 9월 1일)는 가을걷이 전쟁 중 아버지 루이 1세로부터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를 상속받았다. 1652년 펠리페 3세에게 루시옹과 교환하는 대가로 작위를 포기했다.
카탈루냐 내전 기간 동안 카탈루냐 당국은 바르셀로나 백작의 칭호를 3명의 외국 군주에게 차례로 이양했다.
3. 9. 1. 대립백 엔리케 (1462-1463)
대립백 엔리케는 1462년부터 1463년까지 바르셀로나 백작 지위를 가졌다. 카탈루냐 내전 기간 동안, 카탈루냐 당국은 바르셀로나 백작 칭호를 외국 군주들에게 차례로 넘겼다.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비고 |
---|---|---|---|
헨리 1세 (무력한 자) | 1462년 - 1463년 | 페르난도 1세의 손자이자 트라스타마라 가문 출신이었다. |
3. 9. 2. 대립백 페드로 4세 (1463–1466)
페드로 3세의 증손자였다.
3. 9. 3. 대립백 레나토 (1466–1472)
카탈루냐 내전 기간 동안 카탈루냐 당국은 바르셀로나 백작의 칭호를 3명의 외국 군주에게 차례로 이양했다.이름 | 초상 | 재위 기간 | 비고 |
---|---|---|---|
헨리 1세 (무력한 자) | 1462년 - 1463년 | 페르난도 1세의 손자이자 트라스타마라 가문 출신이었다. | |
포르투갈의 페드루 4세 | 1463년 – 1466년 | 페드로 3세의 증손자였다. | |
르네 1세 | 1466년 – 1472년 | 사냥꾼 후안의 손자였다. 또한 프로방스 백작이기도 했다. |
3. 9. 4. 루이스 1세 정의백 (1641-1643)
가을걷이 전쟁 중, 1641년 1월 21일 카탈루냐 공국의 브라ços 제너럴(Braços Generals)이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를 루이 1세로서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선포했다.[2][3]
3. 9. 5. 루이스 2세 태양백 (1643-1652)
'''루이 2세'''(루이 14세 드 프랑스/Louis XIV de France프랑스어, 1638년 9월 5일 – 1715년 9월 1일)는 가을걷이 전쟁 중 아버지 루이 1세로부터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를 상속받았다. 1652년 펠리페 3세에게 루시옹과 교환하는 대가로 작위를 포기했다.
4.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Testamento de Carlos V
[2]
간행물
Pau Claris. Una vida amb misteris
2012-10
[3]
서적
Republicanism: Volume 1, Republicanism and Constitutionalism in Early Modern Europe: A Shared European Heritag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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