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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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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일우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정치인 및 군인이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항일 투쟁에 참여했으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했다. 광복 후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여 내무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중국 인민지원군 부사령원과 조선인민군 전선 부사령관을 지냈다. 이후 김일성과의 갈등으로 숙청되었으며, 펑더화이 등 중국 측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치적 입지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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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박일우
한글박일우
한자朴一禹
로마자 표기Bak Ilu
문화어 표기Pak Iru
인물 정보
출생1903년
출생지호룡, 함경북도, 대한제국
사망1955년
소속 정당조선로동당
경력
직책내무상
임기 시작1948년 9월
임기 종료1952년 10월
직책체신상
임기 시작1953년 3월
임기 종료1955년 11월

2. 생애

박일우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1903년 함경북도 회령[4] 또는 1904년(혹은 1912년) 간도 연길현[5]이라는 기록이 있다. 어린 시절 만주로 이주하여 교사로 활동하다 중국 공산당에 입당[6]하였고,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하였다.

1942년 조선독립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고, 조선의용군 부사령관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북조선 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북조선 인민위원회 내무국장 등을 거쳐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후 초대 내무상에 임명되었다.

한국 전쟁 발발 후에는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하자 중국 측의 요청으로 인민지원군 부사령원 겸 부정치위원, 중조연합사령부 부정치위원 등을 역임하며 전쟁에 깊숙이 관여했다.[8][9] 이 과정에서 조선인민군 대장 및 차수 계급까지 올랐다.

그러나 김일성과의 권력 갈등 속에서 연안파 숙청 과정에 휘말려, 1953년 주요 직위에서 해임되고 체신상으로 좌천되었다. 결국 1955년 박헌영의 남로당에 가담했다는 반당종파 혐의로 숙청되었다.[2][3]

2. 1. 초기 생애 및 항일 무장 투쟁

1903년 대한제국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는 정보와[4], 1904년(혹은 1912년) 간도 (연변) 연길현 개산 출생이라는 정보가 있다.[5] 어린 시절 만주로 이주하여 길림성 용정현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활동했다. 1928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6]했으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중국 본토로 이동했다.

연안의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와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인 1937년 겨울에는 평서 지역에서 제1유격대에 참가했으며, 1938년 1월에는 진차지 군구로 이동하여 활동했다. 진차지 변구에서는 현장 의료 검사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팔로군에 소속되어 해방구의 현(縣) 책임자 등을 역임했다. 또한 연안의 군정대학에서 교관으로 활동했다.

1942년 7월, 태항산의 항일 혁명 근거지에서 조선독립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고, 조선의용군 부사령관을 맡았다. 1945년 2월부터는 조선혁명군정학교 부교장을 겸임했으며, 산간녕변구 정부의 참의원으로도 활동했다.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열린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2. 2. 광복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

1945년 11월, 광복 후 북한에 입국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과정에 참여했다. 1946년 8월 북조선 로동당 제1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7], 1947년 2월에는 북조선 인민위원회 내무국장에 취임했다. 1948년 3월 제2차 당대회에서 당 상무위원으로 재선되었으며, 같은 해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김일성 내각의 초대 내무상으로 임명되어 1953년 3월까지 재임했다. 이 시기 그는 중장 계급을 받았다. 1949년 6월, 남북 노동당이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중앙위원이 되었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도 역임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해 10월,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하자 중국 측의 요청으로 인민지원군에 파견되었다. 10월 25일, 마오쩌둥의 명령으로 중국 인민지원군 부사령원 겸 부정치위원에 임명되었다.[8] 12월에는 중조 군 지휘 일원화를 위해 조직된 중조연합사령부의 부정치위원에도 임명되었는데, 이는 펑더화이 사령관이 김일성보다 연안파인 박일우가 연합군 지휘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9] 1950년 11월부터 1952년 2월까지는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부사령관을 겸임하며 대장 계급을 받았다. 1951년 7월에는 정치보위상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김일성과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1953년 2월 5일, 김일성에 의해 중조연합사령부 부사령관직에서 소환되었고, 그 자리는 최용건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박일우가 마오쩌둥의 개인 대표처럼 여겨졌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는 시각이 있다. 같은 해 차수 계급으로 진급했으나, 3월 내각 개편 시 내무상에서 해임되어 체신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8월에는 당 중앙위원 직에서도 해임되었다.

1954년 북한 내 식량 부족으로 수백 명이 아사하자, 박일우는 이 정보를 중국 측에 알렸다. 박금철의 밀고로 이를 알게 된 김일성은 격노하여 박일우를 강하게 질책했다.

결국 1955년 4월 당 전원회의에서 박일우에 대한 공개 비판이 이루어졌다. 김일성은 박일우, 김웅, 방호산 등을 "전 중국 공산당 당원 소그룹"으로 지목하며, 박일우가 중국 대표를 자처하며 파벌을 만들고 당 분열을 획책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박일우가 자신의 행동은 마오쩌둥에 의해 결정되며 김일성의 지도를 받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말했다는 점, 소련 군사고문단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점 등이 비판 이유로 제시되었다. 김일성은 박일우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고 언급했지만, 몇 달 후 박일우와 김웅은 연금되었고 방호산은 숙청되었다. 박일우는 박헌영의 남로당에 가담했다는 반당종파 혐의로 1955년 11월 최종 숙청되어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2][3]

8월 종파 사건 이후인 1956년, 중국의 펑더화이는 김일성에게 박일우의 석방과 중국행 허가를 요청했고 김일성도 이를 수락했으나, 이후 정세 변화로 실행되지 않았다. 펑더화이는 한국 전쟁 휴전 협정 이후에도 박일우를 중시하여 그를 조선로동당 총비서로 앉히려 했다는 설도 있으며, 이는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 이후 악화된 중조 관계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1959년 펑더화이가 대약진 운동 비판으로 실각하면서 중조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10]

2. 3. 한국전쟁 참전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해 10월 중국 인민지원군이 유엔군에 맞서 참전하자, 중국 측의 요청으로 박일우는 중국 인민지원군에 합류했다. 10월 25일, 마오쩌둥의 명령에 따라 중국 인민지원군 부사령원 겸 부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다.[8]

1950년 11월부터 1952년 2월까지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부사령관을 겸임했으며, 이 기간 중인 1950년에 조선인민군 대장 계급을 받았다. 1950년 12월에는 중국인민지원군조선인민군의 지휘 일원화를 위해 중조연합사령부가 조직되자, 연합사령부 부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김일성보다는 연안파인 박일우가 중조 연합군의 지휘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펑더화이 사령관의 의중이 반영된 인사였다.[9] 1951년 7월에는 정치보위상을 맡기도 했다.

박일우는 마오쩌둥의 개인적 대표로 여겨질 정도로 중국과의 관계가 깊었으며, 이는 김일성과의 갈등 요인이 되었다. 1953년 2월 5일, 김일성에 의해 중조연합사령부 부정치위원직에서 소환되었고, 그의 자리는 최용건이 대신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박일우는 중국 인민지원군과의 연락을 계속 유지했다. 1953년에는 차수 계급으로 진급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 휴전 협정 이후에도 펑더화이 사령관은 박일우를 중시하여 그를 조선로동당 총서기에 앉히려는 구상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박일우는 1955년 연안파 숙청 과정에서 김일성에 의해 "파벌 형성", "당 분열 획책" 등의 비판을 받고 숙청되었다.[2][3]

2. 4. 숙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선포 이후 그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김일성 수상이 이끄는 북한 내각에서 1953년까지 초대 내무상으로 임명되었으며, 중장 계급을 받았다.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위원이 되었고, 1950년 6월 군사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그해 10월 중국 인민지원군이 한국 전쟁에 참전하자 중국 측의 요청으로 동군에 참가하여 10월 25일 마오쩌둥의 명령으로 중국 인민지원군 부사령원 겸 부정치위원에 임명되었다.[8] 11월에는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부사령관(1950.11-1952.2)을 역임했다. 12월에는 중조 연합사령부가 조직되자 연합사령부 부정치위원에 임명되었다. 이 인사는 김일성보다, 연안파 박일우가 중조 연합군의 부사령관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펑더화이 사령관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었다.[9] 1951년 7월 정치보위상을 지냈다.

한국 전쟁 중 내무상이었던 박일우는 마오쩌둥의 개인적 대표로 여겨졌으며, 이는 김일성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2][3] 1953년 2월 5일, 김일성은 박일우를 중국-조선군 연합사령부 부정치위원에서 소환하였고, 그 자리는 최용건으로 대체되었다.[2][3] 이후 박일우는 중국 인민지원군과의 연락을 유지했으며, 1954년 북한 내 식량 부족으로 수백 명이 아사하자 이 정보를 중국 측에 알렸다. 이 사실이 박금철의 밀고로 김일성에게 알려지자, 김일성은 격노하여 박일우를 질책했다.

1953년 3월 북한 내각이 재편될 때 내무상에서 해임되어 체신상으로 임명되었고(1955년 4월까지 재임), 같은 해 8월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 직에서도 해임되었다.[2][3] 1955년 4월 14일에 열린 총회에서는 박일우에 대한 공개 비판이 이루어졌다. 김일성은 박일우, 김웅, 방호산을 "전 중국 공산당 당원 소그룹"으로 지목하며, 박일우가 중국 대표를 자처하며 파벌을 만들고 당의 분열을 획책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박일우가 자신은 마오쩌둥으로부터 중조 연합사령부에 지명되었기에 김일성의 지도를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거나, 소련 군사 전문가를 비하했다는 등의 이유를 제시했다. 김일성은 "박일우 및 그 일당이 완전 항복하여 업무와 정치적 관점에서 올바른 입장에 복귀할 마지막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몇 달 후 박일우와 김웅은 연금되었고 방호산은 숙청되었다. 최종적으로 박일우는 박헌영의 남로당에 가담하였다는 반당종파 혐의로 1955년에 숙청되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2][3]

1956년 8월 종파 사건 이후 중국과 소련의 내정 간섭 과정에서, 펑더화이는 김일성에게 박일우를 석방하고 그가 중국으로 갈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펑더화이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조선로동당 중앙상무위원회도 1956년 10월 회의에서 박일우를 석방하여 자택 연금하거나 중국으로 송환하는 것에 관한 결정을 내렸지만, 이후 정세 변화로 인해 이 결정은 실행되지 않았다.

한국 전쟁 휴전 협정 이후에도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김일성보다 박일우를 더 중시하여 그를 조선로동당 총서기에 앉히려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김일성에 의한 연안파 숙청 이후 중조 관계는 악화되었다.[10] 하지만 1959년 펑더화이마오쩌둥 주석의 대약진 운동을 비판하여 실각한 후, 마오쩌둥 주석으로부터 김일성 수상에게 중조 지도자 간의 관계 개선 계기가 마련되었다.[10]

3. 논란 및 평가

박일우는 한국 전쟁 시기 중국 인민지원군과의 관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나, 이는 김일성과의 권력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연안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그는 전쟁 중 중국 측의 신임을 바탕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점차 김일성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 결국 1955년, 반당종파혐의로 숙청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숙청은 북한 내 연안파 세력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되며, 이후 중조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3. 1. 김일성과의 갈등

한국 전쟁 중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하면서, 중국 측 사령관 펑더화이김일성보다 연안파인 박일우가 중조 연합군 지휘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9] 이에 따라 1950년 10월 25일, 박일우는 마오쩌둥의 지시로 중국 인민지원군 부사령원 겸 부정치위원에 임명되었고[8], 12월에는 통합 지휘를 위한 중조연합사령부의 부정치위원에도 임명되었다. 이 인사는 박일우가 마오쩌둥의 개인 대표로 여겨질 만큼[2] 중국과의 관계가 깊었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김일성의 권력 기반에 잠재적인 위협 요소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점차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며 연안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1953년 2월 5일, 김일성은 박일우를 중조연합사령부 부정치위원에서 소환하고 그 자리를 최용건으로 대체하였다. 이후 박일우는 중국 인민지원군과의 연락 역할을 계속했지만[2], 같은 해 3월 내각 개편 시 내무상에서 체신상으로 좌천되었다.[2] 8월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에서도 해임되었다.

1954년 북한 내 식량 부족으로 수백 명이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하자, 박일우는 이 정보를 중국 측에 알렸다. 박금철의 밀고로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일성은 격노하여 박일우를 강하게 질책했다.

결정적으로 1955년 4월 14일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박일우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 이루어졌다. 김일성은 박일우, 김웅, 방호산 등을 '전 중국 공산당 당원 소그룹'으로 지목하며, 박일우가 중국 대표를 자처하며 파벌을 만들고 당의 분열을 꾀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박일우가 마오쩌둥에 의해 임명되었다는 점을 내세워 김일성의 군사 지도 방침을 따르지 않으려 했으며, 소련 군사 전문가들을 비하하여 명예를 훼손했다는 점 등을 숙청의 이유로 들었다. 김일성은 이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언급했지만, 몇 달 후 박일우와 김웅은 연금되었고 방호산은 숙청되었다. 박일우는 1955년 11월 최종적으로 숙청되어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2][3]

8월 종파 사건 이후 북한 문제에 개입한 펑더화이는 김일성에게 박일우의 석방과 중국행을 요청했다.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수락했고 노동당 중앙상무위원회에서도 관련 결정이 내려졌으나, 이후 정세 변화로 인해 실행되지 않았다. 펑더화이는 휴전 이후에도 김일성보다 박일우를 더 중시하여 그를 조선로동당 총비서로 앉힐 생각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10], 박일우를 포함한 연안파 숙청은 이후 중조 관계 악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10]

3. 2. 숙청 배경

한국 전쟁 중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면서 박일우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중국 측의 요청과 펑더화이 사령관의 판단에 따라[9], 1950년 10월 25일 마오쩌둥의 명령으로 박일우는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원 겸 부정치위원에 임명되었다.[8] 이는 김일성보다 연안파인 박일우가 중국과의 소통에 더 적합하다는 펑더화이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였다.[9] 12월에는 중조연합사령부가 조직되면서 연합사령부 부정치위원에도 임명되었다. 또한 1950년 11월부터 1952년 2월까지 조선인민군 전선 부사령관을 겸임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긴밀한 관계와 높은 위상은 점차 김일성과의 갈등 요인이 되었다. 펑더화이 사령관은 한국 전쟁 휴전 협정 이후에도 김일성보다 박일우를 더 중시하며 그를 조선로동당 총서기로 앉히려 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10] 김일성은 점차 연안파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1953년 2월 5일, 박일우는 김일성에 의해 중조연합사령부 부사령관 겸 부정치위원에서 소환되었고, 그 자리는 최용건으로 대체되었다. 같은 해 3월에는 내각 개편 과정에서 내무상에서 체신상으로 자리를 옮겼다.[2][3] 1953년 8월에는 당 중앙위원에서도 해임되었다.

결정적인 숙청 계기는 1954년 북한의 식량 부족 사태 때 박일우가 이 정보를 중국 측에 알린 사건이었다. 박금철의 밀고로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일성은 크게 분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1955년 4월 14일 열린 총회에서는 박일우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 이루어졌다. 김일성은 박일우, 김웅, 방호산 등을 "전 중국 공산당 당원 소그룹"으로 지목하며, 박일우가 중국 대표를 자처하며 파벌을 만들고 당의 분열을 획책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박일우가 마오쩌둥의 지명을 내세워 김일성의 군사 지도 방침에 따르지 않으려 했다는 점과, 소련 군사 전문가를 비하했다는 점 등이 비판의 이유로 제시되었다. 김일성은 마지막 기회를 언급했지만, 몇 달 후 박일우와 김웅은 연금되었고 방호산은 숙청되었다. 박일우는 결국 1955년 박헌영-리승엽 간첩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반당종파혐의)로 숙청되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2][3]

이후 8월 종파 사건 당시 중국과 소련이 북한 내정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펑더화이가 김일성에게 박일우의 석방과 중국행을 요구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이를 수락하는 듯했으나, 이후 정세 변화로 인해 실행되지는 않았다.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으로 악화되었던 중조 관계는 1959년 펑더화이가 대약진 운동 비판으로 실각한 이후 마오쩌둥의 제안으로 개선의 계기를 맞게 된다.[10]

참조

[1] 웹사이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경향신문. 1948년 9월 11일. 1면 https://newslibrary.[...] 2020-04-12
[2] 웹사이트 박일우(朴一禹) http://encykorea.aks[...] 2020-04-12
[3] 서적 The Ashgate Research Companion to the Korean War
[4] 문서 「朴一禹」(『岩波小辞典 現代韓国・朝鮮』)は「1904(1912?)-?」と生没年を表示。
[5] 문서 「朴一禹」(『岩波小辞典 現代韓国・朝鮮』)は「延吉県開山生まれ」とする。
[6] 문서 「朴一禹」(『岩波小辞典 現代韓国・朝鮮』)は1928年入党とする。
[7] 문서 鐸木(1990年)、69ページ 1990
[8] 문서 鈴木(2002年) 2002
[9] 서적 彭徳懐と金日成 河出書房新社 2011-04-30
[10] 서적 아시아 냉전사 중앙공론신사 2004-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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