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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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철언은 1942년 경상북도 성주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검사로 활동하며 제5공화국 헌법 기초 작업에 참여했고, 청와대 비서관,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등을 역임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정무제1장관, 체육청소년부 장관을 지냈으며, 3당 합당을 중재하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이후 슬롯머신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자유민주연합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2000년 총선에서 낙선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저서로는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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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정치인 정보 | |
이름 | 박철언 |
출생일 | 1942년 8월 5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
국적 | 대한민국 |
종교 | 불교 |
본관 | 밀양 |
군복무 | 육군대위 전역 |
부모 | 어머니 김당한 |
배우자 | 현경자 |
자녀 | 1남 2녀 |
경력 | |
정치 활동 | |
정당 | 무소속 |
지역구 | 대구 수성구 갑 |
의원 선수 | 3 |
의원 대수 | 13·14·15 |
2. 생애
박철언은 1942년 8월 5일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났다. 1961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합격, 이듬해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였다. 1965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총장상을 받았으며,[2][3] 같은 해 고등고시 사법과 1차에 합격하였다.[2][3]
1967년 제7회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고,[4] 그해 8월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최종 합격하였다. 1972년 4월 12일 부산지검 검사로 발령받았다. 1974년 8월 23일 서울지검으로 발령받았고, 이후 서울지검 검사, 1976년 7월 23일 법무부 검찰국 겸 서울지검 검사, 1977년 8월 27일 법무부 검찰국 검찰제2과 검사, 1978년 2월 7일 서울지검 검사를 역임했다. 1980년 법무부 검찰국으로 발령받았다.
신군부 등장 이후 1980년 검사로 활동하다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법사위원으로 파견 근무하면서 제5공화국 헌법 기초작업에 참여했다. 1980년 11월 4일 법무부 검찰국 검사가 됐다가 12월 9일 서울고검 검사로 발령받았다. 그 후 청와대 정무비서관과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등을 지내면서 비밀리에 20여 차례 북한을 방문하였다. 박철언은 전두환의 후계자로 지목되던 노태우를 보좌하였다.
1986년 11월 28일 검사장으로 승진했다. 1987년 대검찰청 검사장으로 재직 중 고문 수사는 민주 질서에 역행한다는 논문을 발표해 화제가 되었다.[12]
노태우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1988년 3월 대통령 정책담당 보좌관, 7월 청와대 비서관이 되었으며, 곧 민주정의당 제13대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고 '6공의 황태자'로 불리면서 정무제1장관과 체육청소년부 장관 등을 지냈다. 하지만 박철언은 '6공의 황태자'라는 명칭은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대표에게 해당되는 말이라며 자신은 그 명칭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1]
노태우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으로서 노태우 정부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전두환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노태우를 명실상부한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며, 민주정의당의 공천권을 가졌고 7·7 선언의 주역이기도 하였다.[1]
1990년 1월 3당합당 직전 합당을 중재하였다.[1] 김영삼이 3당합당을 의논한 대상이기도 하였으나, 이후 차기 후계자 자리를 놓고 김영삼과 다투다가 밀려났고,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통일국민당에 합류하였다.[1] 그해 4월 정무1장관에서 사직하고 8월 4일부터 14일에는 소련을 방문,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면담하고 귀국했다.[1]
3당합당 이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김영삼과 충돌하면서 1992년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제14대 대선에 출마한 정주영 후보를 지원하였으나 정주영은 3위로 낙선하였다.[1] 1993년 슬롯머신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1년 6개월을 복역했다.[1]
2. 1. 생애 초반
박철언은 1942년 8월 5일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났다. 1961년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합격, 이듬해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였다.1965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총장상을 수상했다.[2][3] 1965년 고등고시 사법과 1차에 합격하였다.[2][3]
2. 2. 검사 생활
1967년 제7회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고[4], 그해 8월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최종 합격하였다. 1972년 4월 12일 부산지검 검사로 발령받았다. 그해 5월 4일 오염된 물에 어패류를 씻은 수산업자와 5월 6일 냉동설비를 갖추지 않고 우유를 운송한 비락우유 대표 등을 적발, 기소하였다.1973년 7월 21일 학벌, 파벌싸움을 하던 부산복음병원 수련의들을 기소, 송치하였다.
1973년 8월 13일 폭력행위등 처벌에관한법률위반혐의로 송치된 축구선수 이회택을 기소했으나 차범근 등의 선처 탄원으로 8월 24일 기소유예, 석방시켰다.[5] 1973년 10월 보조금 3억원을 횡령한 부산 아네리세 육아원장, 이사장을 구속했다.
1974년 3월 낙동강 하구 무허가 매립 사건, 천연기념물 179호로 지정한 낙동강 하구 철새도래지를 훼손한 업자들을 수사, 부산시청 건설사업소장 등을 입건, 기소하였다. 1974년 8월 23일 서울지검으로 발령받고, 이후 검찰1과 겸 서울지검 검사, 1976년 7월 23일 법무부 검찰국 겸 서울지검 검사, 1977년 8월 27일 법무부 검찰국 검찰제2과 검사, 1978년 2월 7일 서울지검 검사가 됐다.
1978년 7월에는 아파트 분양 특혜를 준 현대건설 임직원 및 관련자 수사에 추가 투입되었다.[6] 1979년 8월에는 공무원 신분을 숨기고 민간 기업 활동을 겸직한 서울중부세무서 부가가치계장 조OO을 수사하였다.[7] 1979년 8월 YH 무역 여자노동자 김경숙 추락사망 사건의 수사를 담당하였다.[8] 1980년 법무부 검찰국으로 발령받았다.
1980년 2월 남민전 관련자 수사에 참여하였다.[9][10]
2. 3. 5공화국 활동
신군부의 등장 이후 1980년에 검사로 활동하다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법사위원으로 파견 근무하면서 제5공화국 헌법의 기초작업에 참여했다. 1980년 11월 4일 법무부 검찰국 검사가 됐다가 12월 9일 서울고검 검사로 발령받았다. 그 후 청와대 정무비서관과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등을 지내면서 비밀리에 20여 차례 북한을 방문하였다. 박철언은 전두환의 후계자로 지목되던 노태우를 언제나 보좌하였다.1983년 청와대 비서관으로 서울지검 특수2부장을 겸직했다.[11] 1984년 서울지검 부장검사 겸 법무부 갱생보호위원, 이후 법무연수원연구위원을 거쳐 1986년 11월 28일 검사장으로 승진했다. 1987년 대검찰청 검사장으로 재직 중 고문 수사는 민주 질서에 역행한다는 논문을 발표, 화제가 되었다.[12]
2. 4. 6공화국 활동
노태우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1988년 3월 대통령 정책담당 보좌관, 7월 청와대 비서관이 되었으며, 곧 민주정의당 제13대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고 '6공의 황태자'로 불리면서 정무제1장관과 체육청소년부 장관 등을 지냈다. 하지만 박철언은 '6공의 황태자'라는 명칭 자체가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대표에게 해당되는 말이라면서 정작 본인 자신은 그 명칭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1]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으로서 노태우 정부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전두환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노태우를 명실상부한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며, 민주정의당의 공천권을 가졌고 7·7 선언의 주역이기도 하였다.[1]
1990년 1월 3당합당 직전 합당을 중재하였다.[1] 김영삼이 3당합당을 의논한 대상이기도 하였으나, 후일 차기 후계자 자리를 놓고 김영삼과 다투다가 밀려났고, 결국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통일국민당에 합류한 후에는 슬롯머신 사건으로 정치적 몰락의 길을 걸었다.[1] 그해 4월 정무1장관에서 사직서를 제출하고 8월 4일부터 14일에는 소련을 방문,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면담하고 귀국했다.[1]
3당합당 이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김영삼과 충돌하면서 1992년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제14대 대선에 대항하여 출마한 정주영 후보를 지원하였으나 정주영은 3위로 낙마하였다.[1] 1993년에 슬롯머신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1년 6개월을 복역했다.[1]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는데, 이 내용은 자신의 자서전에 서술되어 있다.[1]
3. 내각 책임제 개헌과 김영삼과의 갈등
박철언은 내각 책임제 개헌을 고수하였다. 1990년 10월 25일자 중앙일보 기사에서는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표, 김종필 최고위원이 내각 책임제 개헌에 합의하고 각서를 만들었다는 내용을 보도하며 합의각서의 복사본을 공개했다.[13]
김영삼 측에서는 "합의 문서 공개는 김 대표를 궁지에 몰아넣어 대권을 주지 않으려는 정치공작"이라며 "국민이 원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못하니 차라리 내각제를 백지화하라"고 저항했다.
박철언은 국회의원을 많이 거느린 사람이 권력을 쥐는 내각제가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보았다. 그는 다수파인 민정계의 실질적인 리더였지만, 김영삼이 반대하면 내각제 개헌은 불가능했다. 박철언은 내각제가 무너지면 자신도 무너진다고 보고, 김영삼이 내각제 합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박철언은 김영삼에게 내각제 합의 문서에 서명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90년 10월 당시 김영삼은 내각제 합의를 지킬 생각이 없었다. 대통령직의 실권이 사라진다는 점 때문에 김영삼은 내각제를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1992년 초, 김영삼은 노태우와 박철언에게 내각제를 백지화하지 않으면 탈당하겠다고 압박했다. 노태우와 박철언은 김영삼이 없는 정권 재창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14] 노태우와 박철언은 전두환이 후계자로 고려했던 노재봉을 영입하였다. 노재봉 내각을 내세운 박철언의 공세는 김영삼에게 압박을 가했지만, 결국 노태우는 1991년 4월 6일 박철언에게 월계수회 고문직 사임을 명했다. 김영삼에 맞서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가 되려 했던 박태준과 이종찬도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1992년 5월 19일, 김영삼은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4. 학력
5. 저서
-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중국어 (5공, 6공, 3김 시대의 정치 비사) 전2권 (랜덤하우스중앙, 2005)
- 《4077 면회 왔습니다》 (행림출판, 1995)
- 《변화를 두려워하는 자는 창조할 수 없다》 (고려원, 1992)
- 《작은 등불 하나》 (시집, 행림출판, 2004)
6. 가족
배우자 | 현경자 |
---|---|
자녀 | 1남 2녀 |
7.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대회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1988년 | 총선 | 전국구 17번 | 민주정의당 | 6,670,494표 | 34.0% | 당선 | 초선 | |
1992년 | 총선 | 대구 수성구 갑 | 민주자유당 | 51,756표 | 58.81% | 1위 | 당선 | 재선 |
1996년 | 총선 | 대구 수성구 갑 | 자유민주연합 | 49,735표 | 53.34% | 1위 | 당선 | 3선 |
2000년 | 총선 | 대구 수성구 갑 | 자유민주연합 | 22,487표 | 24.04% | 2위 | 낙선 |
8. 박철언을 연기한 배우들
참조
[1]
뉴스
문민 황태자 ‘정치적 환생’
http://h21.hani.co.k[...]
한겨레21
2002-01-3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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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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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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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03-14
[13]
서적
WWW.한국현대사.COM
민연
2000
[14]
서적
WWW.한국현대사.COM
민연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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