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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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주영은 1915년 강원도 통천군에서 태어나, 현대그룹을 대한민국 대표 기업으로 성장시킨 기업인이다. 그는 소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여러 차례 가출과 노동을 거쳐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1940년 아도 서비스 공장을 인수하며 기업 활동을 시작하여, 현대건설, 현대자동차 등을 설립하며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를 주도하고 대북 사업을 추진하는 등 국가적 위상 제고에도 기여했다.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여 정계에 진출했으나 대통령 선거에서 3위에 머물렀다. 2001년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불굴의 도전 정신과 뛰어난 사업 감각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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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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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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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정주영 |
한국어 이름 | 정주영 |
한자 표기 | 鄭周永 |
로마자 표기 | Jeong Ju-yeong |
매큔-라이샤워 표기 | Chŏng Chuyŏng |
아호 | 아산 |
한자 아호 | 峨山 |
로마자 아호 | Asan |
출생일 | 1915년 11월 25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 (현재 북한 강원도 통천군) |
사망일 | 2001년 3월 21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
국적 | 대한민국 |
배우자 | 변중석 |
자녀 | 11명 (아들 8명, 딸 3명) |
본관 | 하동 |
직업 | 기업인 |
경력 | |
주요 활동 | 현대그룹 창업주 및 명예회장 현대건설 대표이사 명예회장 현대자동차그룹 창업회장 현대중공업그룹 창업회장 울산공업학원 이사장 전경련 제13대 회장 및 명예회장 대한체육회 회장 유전공학연구조합 이사장 세종연구소 이사장 한국정보산업협회 회장 및 명예회장 통일국민당 총재 제14대 국회의원 자유민주연합 전임고문 |
정치 활동 | |
정당 | 무소속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14 |
지역구 | (14) |
통일국민당 총재 임기 | 1992년 ~ 1993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정봉식 |
어머니 | 한성실 |
형제자매 | 남동생 5명, 누이동생 2명 |
장남 | 정몽필 |
차남 | 정몽구 |
삼남 | 정몽근 |
사남 | 정몽우 |
오남 | 정몽헌 |
육남 | 정몽준 |
칠남 | 정몽윤 |
팔남 | 정몽일 |
장녀 | 정경희 |
학력 | |
학력 | 통천 송전소학교 졸업 |
종교 | |
종교 | 개신교 |
수상 | |
수상 내역 | 1977년 명예 대영 제국 훈장 3등급 1981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 1987년 한국경영대상 1988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년 IOC 훈장 1998년 노르웨이 왕실 훈장 2001년 만해상 평화상 추서 2008년 DMZ 평화상 대상 추서 |
기타 | |
공식 웹사이트 | 대한민국헌정회 |
2. 생애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통천군 로상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51][52] 아산(峨山)이라는 그의 아호는 자신의 출생지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1930년 통천 송전소학교를 27명의 동창생들과 함께 졸업하였으며, 정주영의 최종 학력은 소학교(초등학교) 졸업이 유일하다.[53][54]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하였다. 가출 후 청진의 개항 공사와 제철 공장 건설 공사장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다.[28] 이후 패천(Paechun) 계곡을 걸어 고원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했다.[3] 장시간 일했지만 임금이 적었으나, 정주영은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1933년 18세의 정주영은 네 번째 탈출을 결심하고, 강제 결혼을 피하려던 친구와 함께 밤에 도망쳤다.[3][5] 경성에 도착한 정주영은 인천항(현재 대한민국 인천)에서 노동자로 일했고,[3][5] 보성전문학교에서 건설 노동자로, 그리고 녹말 시럽 공장에서 잡역부로 일했다.[3][5]
1934년 경성의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다.[3][5] 새로운 직업은 그에게 발전의 기회를 제공했고, 일을 잘하게 되면서 정규직으로 남기로 결정했다. 결국 그는 미곡상회의 주요 고객들의 칭찬을 받았고, 이에 감명받은 주인은 6개월 만에 정 씨에게 상회의 회계를 맡겼다. 1935년 11월 23일 밤 변중석 여사를 집에서 처음 대면하였고, 한 달 보름 뒤 결혼식을 올렸다.[58][59]
1938년 쌀가게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물려받아 경일상회라는 이름을 짓고 그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60] 하지만 경일상회는 개업 후 2년 만인 1940년에 중일 전쟁이 일어나 일제가 식량배급제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복흥상회를 폐업해야 했다. 1940년 3월 합자회사 아도(Art)서비스 공장을 인수하였다.
2. 1. 초기 생애 (1915년 ~ 1940년)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통천군 로상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51][52] 아산(峨山)이라는 그의 아호는 자신의 출생지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1930년 통천 송전소학교를 27명의 동창생들과 함께 졸업하였으며, 정주영의 최종 학력은 소학교(초등학교) 졸업이 유일하다.[53][54]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하였다. 가출 후 청진의 개항 공사와 제철 공장 건설 공사장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다.[28] 이후 패천(Paechun) 계곡을 걸어 고원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했다.[3] 장시간 일했지만 임금이 적었으나, 정주영은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1933년 18세의 정주영은 네 번째 탈출을 결심하고, 강제 결혼을 피하려던 친구와 함께 밤에 도망쳤다.[3][5] 경성에 도착한 정주영은 인천항(현재 대한민국 인천)에서 노동자로 일했고,[3][5] 보성전문학교에서 건설 노동자로, 그리고 녹말 시럽 공장에서 잡역부로 일했다.[3][5]
1934년 경성의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다.[3][5] 새로운 직업은 그에게 발전의 기회를 제공했고, 일을 잘하게 되면서 정규직으로 남기로 결정했다. 결국 그는 미곡상회의 주요 고객들의 칭찬을 받았고, 이에 감명받은 주인은 6개월 만에 정 씨에게 상회의 회계를 맡겼다. 1935년 11월 23일 밤 변중석 여사를 집에서 처음 대면하였고, 한 달 보름 뒤 결혼식을 올렸다.[58][59]
1938년 쌀가게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물려받아 경일상회라는 이름을 짓고 그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60] 하지만 경일상회는 개업 후 2년 만인 1940년에 중일 전쟁이 일어나 일제가 식량배급제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복흥상회를 폐업해야 했다.
2. 2. 기업 활동 (1940년 ~ 1992년)
2. 2. 1. 현대그룹 창립과 성장 (1940년 ~ 1970년대)
1940년 경성부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던 이을학에게서 경영난에 처한 아도 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의 소식을 접하고 인수를 시작한다.[61] 빚을 내어 아도 서비스의 사업을 맡기도 하였으나 1달도 채 지나기 전에 불에 타버렸다. 다시 빚을 내어 신설동 빈터에다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공장도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게 된다.1946년 해방 후 서울에서 현대자동차공업사(수리업)를, 이듬해 현대토건사(후 현대건설)를 설립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동생인 정인영의 도움을 받아 미군의 건설 공사를 수주하였다.[28] 군사 정권 시절에는 군사 기지, 댐, 경부고속도로, 원자력발전소 건설 등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성장하였다.
1967년,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
1970년대에는 1973년 석유 파동이 발생하자, 석유 달러로 풍족한 중동의 건설 공사에 진출하여 외화 획득에 기여하였다. 1976년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해상 탱커 터미널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1972년에는 한국 최초로 조선업에 진출하여 울산에 현대조선소(후 HD현대중공업)를 건설하였다. 1971년 정주영 회장은 혼자서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 들고 유럽을 돌았다. 차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부정적인 반응만 받다가 1971년 9월 영국 바클레이 은행의 차관을 받기 위한 추천서를 부탁하기 위해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지만 대답은 역시 'No'였다. 이 때 정주영은 우리 나라 5백원짜리 지폐를 꺼내 거기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줬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어 외국을 물리쳤소. 비록 쇄국정책으로 시기가 좀 늦어졌지만, 그 잠재력만큼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라며 설득해 결국 차관 도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62]
조선소와 선박을 동시에 건설하여 예상 기간 5년보다 3년 만에 첫 선박을 완공했다. 그는 유럽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1975년 현대 포니(Hyundai Pony)와 1986년 현대 엑셀(Hyundai Excel)을 출시했다.[6][7]
1977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분양특혜사건'''으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건축법 위반에 대해 징역 6월 벌금 500만원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으나 현대산업개발 사장이었던 장남 정몽구가 서울지검 특수부에 구속되어 아들이 아버지 대신 처벌받는 전례가 만들어졌다.
1977년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하였으며 1978년 4월 29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현대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기간 동안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중공업, 현대제철 등 현대그룹 계열사들을 잇달아 설립하였다. “1만 5000톤급의 경험밖에 없는데 30만 톤급 선박을 수주했다. 그 후 일본 K조선에 연수생을 보내 설계도부터 도구까지 훔쳤다. 이때 훔친 총량은 컨테이너 2대 분량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30]
2. 2. 2. 사회 활동과 올림픽 유치 (1980년대)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 주도로 88 올림픽의 서울특별시 유치 운동에 참여하였고, 1981년 3월에는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가 조직되자 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어 각국을 상대로 올림픽 유치 활동, 설득 작업을 추진했다.[33][34]
1981년 11월 88올림픽의 서울 유치가 확정되자 그는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에 선임되고, 바로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81년, IOC 바덴바덴 총회에서는 당선이 확실시되었던 나고야를 제치고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유치 성공은 맡은 이상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맹렬한 로비 활동을 펼친 정주영의 공적이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는 대한체육회장에 선출되어 서울올림픽 사전 준비와 86 아시안게임 사전 준비활동을 추진하였고, 1982년부터 1987년에는 유전공학연구조합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87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명예회장에 추대되고, 그해 5월에는 한국정보산업협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2. 3. 정계 진출과 대북 사업 (1992년 ~ 2001년)
1987년 재단법인 세종연구소의 이사장으로 특별 초빙되었으며 그해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고 현대그룹 명예 회장에 추대되었다. 1992년 1월초 정계에 입문, 가칭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이어 김동길 등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 조직하고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33][34]198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과의 수교를 대비하여 조직된 한·소 경제협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입후보,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2년에는 통일국민당의 원내진출을 이룬 뒤 그해 12월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밀려 3위로 석패하였다. 그런데 선거 직후 김영삼 정권의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이를 두고 정치 보복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김영삼(민주자유당)이 당선되었고, 정주영은 신정부의 눈총을 받으며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김영삼과의 경쟁구도 때문에 생긴 감정 때문인지 김영삼 정권 아래서는 별 다른 행적이 없다가, 이후 김대중정권을 적극 도우며 방북을 한다던지 하는 행동을 보였다.
1993년 초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고 그해 2월에는 국회의원직도 사직하고 탈당, 이후 기업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993년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통일국민당에서 탈당했다.[33][34]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햇볕 정책에 맞춰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하였다.[35][36]
1998년 6월 16일 '통일소'라고 명명된 소 500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하였고,[9] 같은 해 10월 27일에는 소 501마리를 추가로 가져갔다.[37][38]

1999년 2월, 대북사업의 추진과 중계 사업을 위해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2. 3. 1. 정계 입문과 대통령 선거 출마 (1992년)
1987년 재단법인 세종연구소의 이사장으로 특별 초빙되었으며 그해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고 현대그룹 명예 회장에 추대되었다. 1992년 1월초 정계에 입문, 가칭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이어 김동길 등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 조직하고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33][34]198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과의 수교를 대비하여 조직된 한·소 경제협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입후보,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2년에는 통일국민당의 원내진출을 이룬 뒤 그해 12월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밀려 3위로 석패하였다. 그런데 선거 직후 김영삼 정권의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이를 두고 정치 보복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김영삼(민주자유당)이 당선되었고, 정주영은 신정부의 눈총을 받으며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김영삼과의 경쟁구도 때문에 생긴 감정 때문인지 김영삼 정권 아래서는 별 다른 행적이 없다가, 이후 김대중정권을 적극 도우며 방북을 한다던지 하는 행동을 보였다.
1993년 초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고 그해 2월에는 국회의원직도 사직하고 탈당, 이후 기업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2. 3. 2. 대북 사업 추진과 남북 관계 개선 (1998년 ~ 2001년)
1993년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통일국민당에서 탈당했다.[33][34]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햇볕 정책에 맞춰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하였다.[35][36]1998년 6월 16일 '통일소'라고 명명된 소 500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하였고, 같은 해 10월 27일에는 소 501마리를 추가로 가져갔다.[37][38] 정 명예회장은 직접 판문점을 통해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협력 사업을 논의하여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한 합의를 얻었다.[39][40] 1998년 11월 18일 첫 금강산 관광선이 출항하였다.
1999년 2월, 대북사업의 추진과 중계 사업을 위해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2. 4. 사망 (2001년)
2000년 5월에 현대그룹 명예회장직을 사퇴하였다. 1987년 제1회 한국경영대상, 198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년 IOC훈장과 노르웨이 왕실훈장을 수상하였다. 1998년 아시아 외환 위기는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고, 당시 한국 최대 재벌이었던 현대그룹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의 재벌 개혁 정책과 맞물려 현대그룹도 해체·분리·쇠퇴의 어려움을 겪었다. 재벌 기업의 주식 대부분이 상장되면서 정주영 일가의 지배력이 약해졌다. 현대그룹은 형제 간의 경영권 분쟁에 휘말려 유동성 위기에 처했다.정주영은 건강이 악화되어 변중석이 입원해있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고 나중에 자택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기력이 쇠한 뒤에는 외부 활동도 줄이고 병원과 자택에서 의료진의 간호를 받았다. 2000년 6월 북한 방문 후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장기 입원했고, 2001년 1월에 병원에 입원한 뒤 2개월 뒤인 3월 21일 서울아산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향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주영은 불교 및 유교 장례 의식에 따라 매장되었다.
3. 평가
정주영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사업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영향력은 현대 한국 사회와 산업 전반에 널리 미치고 있다.[15] 특히 현대자동차의 성공은 정주영의 통찰력과 결단력에 기인하며, 현대 경영진은 그의 이상을 계승하고 있다.[16] 창의성과 혁신을 강조하는 사업 관련 행사들이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기도 한다.[15]
그의 사후인 2001년 5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되었다. 2006년 11월에는 타임(TIME)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에 선정되었으며, 2008년 DMZ 평화상 대상이 특별 추서되었다.
정주영은 불굴의 도전 정신과 뛰어난 사업 감각으로 현대그룹을 대한민국 대표 기업으로 성장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조선, 자동차, 건설 등 중화학공업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며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와 대북 사업 추진을 통해 국가적 위상을 높이고 남북 관계 개선에 기여한 점도 높이 평가받는다.
하지만, 정경유착, 노동 탄압, 권위주의적 경영 방식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정주영의 업적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지만, 재벌 중심 경제 구조의 폐해를 심화시킨 책임도 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3. 1. 비판
4. 어록
정주영은 생전에 다음과 같은 어록을 남겼다.
-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 "이봐, 해 보기나 했어?"
-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야 하며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 나아가야 한다."
- "나는 재벌이란 표현이 싫다. 나는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으로 재화를 생산해 내는 사람일 뿐이다." (스스로를 겸손하게 표현)
- "목표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고 이에 상응한 노력만 쏟아 부으면 그 누구라도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
- "위대한 사회는 평등 의식 위에 세워진다."
- "모든 일의 성패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사고와 자세에 달려 있다."
- "고정관념이 사람을 멍청이로 만든다."
-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다하는 최선."
- "지식은 쟁탈해서 분배할 수 없다. 하지만 재물은 쟁탈할 수 있다."
- "폭 넓은 인간 교류는 나에게 유머를 잃지 않게 하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고 인생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고 공감대를 확대시키고 그들의 정서를 흡수함으로써 사람이 빠지기 쉬운 사고의 경직을 방지해 준다."
- "미련한 사람은 예체능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
5. 가족 관계
정주영은 슬하에 8남 1녀를 두었다.[18] 배우자는 변중석(1921년 ~ 2007년)이다.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활동사항 | 비고 |
---|---|---|---|---|---|
배우자 | 변중석 | 1921년 | 2007년 | ||
장남 | 정몽필 | 1934년 | 1982년 | 前 현대제철 회장 | |
차남 | 정몽구 | 1938년 |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 | ||
3남 | 정몽근 | 1942년 | 현대백화점 명예회장 | ||
장녀 | 정경희 | 1944년 | |||
4남 | 정몽우 | 1945년 | 1990년 | 前 현대알루미늄 회장 | |
5남 | 정몽헌 | 1948년 | 2003년 | 前 현대그룹 회장 | |
6남 | 정몽준 | 1951년 | 前 현대중공업 회장, 정치인 | ||
7남 | 정몽윤 | 1955년 |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 ||
8남 | 정몽일 | 1959년 | 현대기업금융 회장 |
정몽필은 1982년 경부고속도로 김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23] 정몽우는 1990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정몽헌은 2003년 8월 자살하기 전까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현대그룹 회장이었다.[58]
정주영은 또한 1973년부터 관계를 맺은 여성과의 사이에서 혼외 자녀로 두 딸을 두었으며, 이들은 정주영 사후에 인정받았다.[25][26]
정주영의 형제로는 5명의 남동생과 1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6. 대중 매체
7. 기타
1992년 11월, MBC 방송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 진행자였던 최병서가 사회 저명인사를 흉내 내면서 정주영의 성대모사를 하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다른 대통령 후보자들과 함께 최병서 패러디의 대상이 되었다. 1995년 세계 부자 순위에서 9위를 차지했다.
현대그룹 회장 재직 당시, 청운동 자택에서 계동 현대그룹 본사까지 아들들과 함께 걸어서 출근했다. 매일 아침 6시 온 가족이 모여 미역국으로 아침 식사를 하는 가풍을 유지했으며, 이 때문에 현대가 며느리들은 새벽부터 식사 준비를 해야 했다.
2004년에는 정주영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 《영웅시대》가 제작되었다. 2021년 아산사회복지재단은 정주영 20주기를 맞아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 독후감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책에 담긴 기업가 정신과 역경 극복 사례를 통해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마련되었으며, 2021년 1월 5일부터 2월 25일까지 접수를 받아 3월 중 시상했다. 시상은 중/고등학생 부문, 대학생/대학원생/일반 부문으로 나누어 총 49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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