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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누스티아노 카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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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멕시코의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1917년 멕시코 헌법 제정을 주도하고 1917년부터 1920년까지 멕시코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1859년 코아우일라 주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했으며, 1910년 프란시스코 I. 마데로의 대통령 선거 운동을 지원했다. 마데로가 쿠데타로 살해된 후, 빅토리아노 우에르타에 대항하여 혁명을 이끌었고, 헌법주의군을 결성하여 '제1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카란사는 알바로 오브레곤, 판초 비야 등과 함께 혁명군을 지휘하며 우에르타 정권을 무너뜨렸으나, 혁명 세력 간의 갈등과 미국의 압력 속에서 통치를 이어갔다. 그는 토지 개혁, 노동권 보장 등을 담은 1917년 헌법을 제정했으나, 1920년 반란으로 축출되어 암살당했다. 카란사는 멕시코 혁명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지만, 권력 투쟁과 헌법 조항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논란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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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누스티아노 카란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호세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데 라 가르사
출생 이름호세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데 라 가르사
국적멕시코
카란사의 초상 (해리스 & 에윙, 1915년경)
별칭제1 수석
출생일1859년 12월 29일
출생지멕시코 코아우일라주 쿠아트로 시에네가스
사망일1920년 5월 21일
사망지멕시코 푸에블라주 틀락스칼란통고
사망 원인암살, 또는 자살 가능성
배우자에르네스티나 에르난데스
비르히니아 살리나스 (1882년 결혼, 1919년 사망)
부모헤수스 카란사 네이라
정당멕시코 민주당
자유헌정당
로마자 표기법benusˈtjano kaˈransa ðe la ˈɣaɾsa
직책
대통령멕시코의 제44대 대통령
임기 시작1917년 5월 1일
임기 종료1920년 5월 21일
부통령직위 폐지
전임 대통령프란시스코 S. 카르바할 (멕시코 헌법 대통령으로)
프란시스코 라고스 차사로 (아구아스칼리엔테스 협약에 의해 지정)
후임 대통령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
기타 직책
행정부 수반 / 헌정군 제1 수석헌정군의 총수
임기 시작1914년 8월 14일
임기 종료1917년 4월 30일
코아우일라 주지사코아우일라 주지사
임기 시작1911년 11월 22일
임기 종료1913년 3월 7일
전임 주지사레히날도 세페다
후임 주지사마누엘 M. 블라스케스
임기 시작1911년 5월 29일
임기 종료1911년 8월 1일
전임 주지사헤수스 데 바예
후임 주지사레히날도 세페다

2. 혁명 이전

José Venustiano Carranza de la Garzaes는 1859년 멕시코 코아우일라주의 쿠아트로 시에네가스(Cuatro Ciénegas) 마을에서 번영하는 목축업 집안[10]의 15남매 중 11번째로 태어났다.[10] 그의 가문은 바스크 혈통[11][12]으로, 조상들은 중세 시대 카스티야 국왕을 위해 무슬림 세력과 싸웠으며,[11] 식민지 시대에 코아우일라에 정착하여 사제, 대주교, 주교 등을 배출했다.[11] 그는 키가 193cm에 달하는 장신이었다.

카란사의 코아우일라주 쿠아트로시에네가스에 있는 어린 시절의 집


젊은 시절의 카란사(약 1870년대)


아버지 헤수스 카란사 네이라(Jesús Carranza Neira)는 목장주이자 노새 운전수였으며, 1857년부터 1861년까지 이어진 개혁 전쟁에서는 인디언과 싸우며 자유주의 편에 섰다.[13][14] 이후 1861년부터 1867년까지 이어진 프랑스 침략 시기에는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을 지지하며 프랑스군에 맞서 싸워 대령 계급까지 올랐다. 그는 코아우일라에서 후아레스의 주요 연락책이었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강한 유대감이 형성되어 후아레스 정부가 망명 중일 때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프랑스군 축출 후, 후아레스는 헤수스 카란사에게 토지를 하사하여 그의 재산 기반을 마련해주었다.[13]

가족의 부 덕분에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살티요의 유명한 자유주의 학교인 아테네오 후엔테(Ateneo Fuente)와 1874년 멕시코시티의 국립 예비학교(Escuela Nacional Preparatoria)에서 공부하며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다.[13] 그가 학교에 다니던 1876년,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재선 없음"을 내걸고 투스테펙 계획(Plan of Tuxtepec)을 발표하며 세바스티안 레르도 데 테하다 대통령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카란사는 안과 질환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농장을 경영했다. 1882년 5월 12일, 그는 다른 부유한 지주의 딸인 버지니아 살리나스(Virginia Salinas)와 결혼하여[15] 두 딸을 두었다.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왼쪽)와 그의 딸들(약 1890년대)


코아우일라의 유력 가문 출신이자 교육받은 카란사는 자연스럽게 정치에 입문했다. 1887년, 친구 베르나르도 레이예스의 권유로 선거에 출마하여 28세의 나이에 쿠아트로 시에네가스의 시장이 되었고, 교육 개혁을 추진했다.[16] 그는 베니토 후아레스를 존경하는 자유주의자였으며, 점차 권위주의적으로 변해가는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권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1893년, 코아우일라의 목축업자 300여 명이 디아스의 지지자인 호세 마리아 가르사 갈란(José María Garza Galán)의 재선에 반대하며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카란사는 동생 에밀리오 카란사(Emilio Carranza)와 함께 이 봉기에 참여했다.[21] 디아스는 상황 수습을 위해 그의 "북부의 인물"인 베르나르도 레이예스를 파견했다. 카란사 형제는 레이예스와 직접 만나 봉기의 정당성과 가르사 갈란에 대한 반대 입장을 설명했다.[21] 레이예스는 카란사의 주장에 동의하여 디아스에게 가르사 갈란 지지 철회를 권고했고, 디아스는 이를 받아들여 다른 인물을 주지사로 임명했다.[17] 이 사건을 통해 디아스는 카란사 가문의 지역 내 영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18]

이후 카란사는 두 번째 시장 임기(1894-1898)를 마쳤고, 베르나르도 레이예스의 후원으로 멕시코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21] 1904년에는 레이예스의 피보호자이자 코아우일라 주지사인 미구엘 카르데나스(Miguel Cárdenas)의 추천으로 멕시코 상원에 진출했다. 상원의원 시절, 그는 디아스의 측근 그룹인 시엔티피코(Científicos)에 회의적이었지만 그들의 정책을 지지했으며, 외국 투자자를 제한하는 법안 조항 삽입을 시도하기도 했다.[19]

191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베르나르도 레이예스가 후보로 부상하자, 디아스는 레이예스를 견제하며 카란사의 코아우일라 주지사직 지지를 거부했다. 디아스는 레이예스를 해외로 보냈고, 이에 카란사는 디아스에게 도전하는 부유한 지주 프란시스코 I. 마데로와 손을 잡았다.[20] 카란사는 1909년 코아우일라 주지사 선거에 도전했고, 1910년에는 마데로의 선거 운동을 후원했다. 마데로가 1911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 카란사는 같은 해 8월 코아우일라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후 마데로와의 관계는 악화되어 마데로에 반하는 반란까지 계획하기도 했다.

3. 제2차 혁명

1913년 2월, 마데로 대통령이 비극의 열흘이라 불리는 쿠데타로 처형당하고 군인 출신의 독재자 빅토리아노 우에르타가 새 대통령이 되자, 카란사는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본격적인 멕시코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1913년 3월 초, 과달루페 지역에서 정부군에게 크게 패하면서 혁명은 잠시 주춤했다.

카란사는 쿠데타로 수립된 우에르타 정부에 대한 반란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주지사로서의 정치적 정통성, 이전의 개혁 경험, 지역 내 지지 기반, 그리고 숙련된 정치 감각을 바탕으로 우에르타에 맞서는 광범위한 북부 연합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들은 1857년 자유주의 헌법을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헌법주의자(Constitutionalists)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카란사는 이 운동의 명목상이자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1913년 2월 말, 카란사는 코아우일라 주의회에 우에르타 정부에 대한 공식적인 반란 상태 선포를 요청했다. 그는 기업에 대한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여 주 방위군을 창설했지만, 우에르타 장군이 이끄는 강력한 연방군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코아우일라 방위군은 아넬로, 살티요, 몬클로바 등지에서 연이어 패배했고, 결국 카란사는 혁명의 거점인 소노라로 피신해야 했다.[24] 코아우일라를 떠나기 전, 그는 자신의 아시엔다(대농장)가 있는 과달루페에서 프란시스코 J. 무히카, 하신토 B. 트레비뇨, 루시오 블랑코 등 젊은 혁명가들이 마데로의 산 루이스 포토시 계획을 본떠 작성한 과달루페 계획을 접하게 되었다.

과달루페 계획은 우에르타뿐만 아니라 그의 정부를 구성하는 입법 및 사법 당국까지 모두 부정했다. 이 계획은 카란사를 헌법군(Constitutionalist Army)의 ''프리메르 헤페''("Primer Jefe", 제1통령 또는 최고 사령관)로 지명했으며, 카란사가 임시 대통령이 되어 총선을 실시하고 "선출된 사람에게 권한을 이양할 것"을 명시했다.[25] 카란사는 초기 과달루페 계획에 구체적인 사회 개혁 약속을 포함하지 않았다. 그는 마데로가 사회 개혁 약속을 명문화했지만 이행하지 못해 지지 기반을 잃었던 것을 교훈 삼아, 우선 헌법 질서 회복과 우에르타 축출이라는 명확하고 단일한 목표에 집중하는 것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24] 급진적인 지지자들의 비판에 대해 그는 "전쟁이 5년 동안 지속되기를 원하십니까? 저항이 적을수록 전쟁은 짧아집니다. 대지주, 성직자, 기업가들은 연방 정부보다 강합니다. 우리는 먼저 정부를 물리쳐야 당신이 제기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며 현실적인 접근을 강조했다.[26] (그러나 1914년 여름, 연방군이 붕괴되고 판초 비야와 같은 급진파의 영향력이 커지자, 카란사는 이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과달루페 계획을 수정하여 광범위한 개혁을 약속하게 된다.[27])

카란사와 그의 오른쪽에 있는 알바로 오브레곤(1914)


카란사 자신은 군인이 아니었지만, 그가 이끄는 헌법군에는 알바로 오브레곤, 판초 비야, 펠리페 안헬레스, 벤자민 G. 힐, 파블로 곤살레스 가르사와 같이 뛰어난 군 지휘관들이 합류했다. 카란사는 파블로 곤살레스 가르사, 판필로 나테라, 알바로 오브레곤 등과 함께 혁명군을 재정비하여 지휘했다. 1913년 8월, 초기 전투에서의 패배로 카란사는 북서부의 혁명 거점인 소노라로 피신했다.[24] 소노라 망명 기간 동안 카란사는 코아우일라의 지역 엘리트를 넘어 더 넓은 지지 기반을 확보해야 했다. 그는 이곳에서 중산층 및 노동자 계급 출신의 유능한 인물들을 발굴하여 자신의 운동에 합류시켰다. 여기에는 알바로 오브레곤, 그의 사촌인 벤자민 G. 힐,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 등이 포함되었으며, 파블로 곤살레스 가르사, 카나네아 파업에 참여했던 마누엘 디에게스, 리오 블랑코 파업 경험이 있는 전직 섬유 노동자 헤리베르토 하라, 그리고 루이스 카브레라와 파스토르 루아이 같은 지식인들도 카란사 진영에 합류했다.[30] 또한 디아스 정권 타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치와와주의 판초 비야의 지지도 확보했다.

힘든 시작에도 불구하고 카란사의 지휘 아래 헌법군은 점차 세력을 확장했다. 1914년 3월, 판초 비야의 승리와 곤살레스 가르사, 오브레곤 군대의 진격 소식을 접한 카란사는 소노라를 떠나 미국과의 국경 도시인 치와와주 시우다드 후아레스로 이동하여 그곳을 임시 수도로 삼고 우에르타와의 전쟁을 지휘했다.

한편, 탐피코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베라크루스를 점령하자 우에르타 정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카란사는 미국의 군사 개입에 대해 강력한 민족주의적 입장을 취하며 미국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멕시코에서 미군을 철수하고 헌법 정부와 우에르타에 대한 불만을 제기할 것을 요구했다.[31] 이러한 카란사의 단호한 태도는 그의 민족주의적 지도자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반면, 판초 비야는 미국의 베라크루스 점령에 대해 카란사와 다른 입장을 보여 혁명 세력 내의 미묘한 균열을 드러내기도 했다.[31][32]

미국 우드로 윌슨 행정부는 우에르타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헌법주의자들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 해제를 고려하는 등 카란사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카란사는 미국의 지원을 원했지만, 미국의 요구에 직접적으로 응하기보다는 루이스 카브레라를 특사로 파견하여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34][36]

1914년 여름, 헌법군과 남부의 에밀리아노 사파타 군대의 공세로 연방군은 마침내 붕괴되었다. 1914년 7월 15일, 우에르타는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카란사는 우에르타의 전쟁 장관 프란시스코 S. 카바잘이 연방군을 유지하여 사파타 군대를 진압하자는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고, 연방군의 완전한 해산과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이는 과거 마데로가 연방군을 존속시켰다가 결국 쿠데타로 몰락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33]

우에르타에 대한 투쟁은 1914년 8월 13일, 알바로 오브레곤이 테올로유칸 조약에 서명하면서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 조약으로 우에르타의 마지막 남은 군대가 오브레곤에게 항복하고 헌법주의자들을 인정했다. 1914년 8월 20일, 카란사는 오브레곤이 이끄는 부대와 함께 멕시코시티에 개선 입성했다. 이로써 우에르타 정부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카란사는 권력 공백을 메우고 새로운 정부를 이끌 가장 유력한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의 정부는 화폐를 발행하고 법률을 통과시키는 등 국가 운영을 시작했다.

4. 혁명 이후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정권이 1914년 7월 붕괴된 후,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멕시코시티에 입성했지만, 혁명 동지였던 판초 비야, 에밀리아노 사파타 등과 권력 투쟁에 직면했다. 카란사가 기존 체제를 유지하며 구 지배층과 타협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비야와 사파타를 포함한 급진 혁명 세력은 강하게 반발했다.[38]

혁명 세력 간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1914년 10월 아과스칼리엔테스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카란사와 비야의 동반 퇴진 및 에울랄리오 구티에레스를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중재안이 제시되었으나,[43][44] 카란사는 이를 거부했다.[45] 결국 혁명 세력은 카란사를 중심으로 한 헌법주의파와 비야, 사파타가 연대한 협약파로 나뉘어 다시 내전에 돌입했다.

판초 비야(왼쪽)와 에밀리아노 사파타(오른쪽). 비야가 팔라시오 나시오날의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다. 두 사람은 아과스칼리엔테스 회의 이후 카란사와 결별하고 협력했다.


카란사는 유능한 군사 지도자 알바로 오브레곤의 지지를 확보하고, 석유 자원이 풍부하며 항구를 통제할 수 있는 베라크루스로 이동하여 거점을 마련했다.[45] 초기에는 군사적으로 열세였으나, 농민과 노동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토지 개혁을 약속하는 법령을 발표하고[46][47], 아나키즘 성향의 노동조합 '세계 노동자의 집'(Casa del Obrero Mundiales)과 협정을 맺어 그들의 무장 조직인 적색대대를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켰다.[51]

내전의 향방을 가른 것은 1915년 4월의 셀라야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오브레곤이 이끄는 카란사 군대는 판초 비야의 북부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53] 이후 사파타 군대도 모렐로스에서 게릴라전으로 약화되면서 카란사는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1915년 10월, 미국 정부는 카란사 정부를 멕시코의 사실상 정부로 승인했다.[21]

프랑스 사회 정책 연감 ''Les hommes du jour'' (오늘의 인물들) 1916년 표지에 실린 카란사


권력을 공고히 한 카란사는 1916년 케레타로에서 헌법 제정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를 통해 제정된 1917년 멕시코 헌법은 토지 개혁, 노동권 보장, 강력한 반교권주의 등 카란사 본인의 의도보다 훨씬 급진적인 내용을 담았다.[64][65] 카란사는 이 헌법에 따라 1917년 3월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5월에 공식 취임했다.

대통령 띠를 두르고 대통령 의자에 앉아 있는 카란사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카란사는 혁명 후 혼란 수습과 국가 안정에 주력했지만,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혁명 전쟁으로 경제는 파탄 났고 식량 부족과 질병이 만연했으며,[16] 에밀리아노 사파타, 판초 비야 등 반대 세력의 저항도 계속되었다. 카란사는 1919년 파블로 곤살레스 장군을 통해 사파타를 암살하는 등 강경책을 사용했다. 외교적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짐머만 전보를 통한 동맹 제안을 거절하고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헌법에 명시된 급진적 개혁, 특히 토지 개혁과 반교권주의 조항 이행에는 소극적이었으며,[63][66] 정부 내 부패 문제도 만연하여 국민적 비판을 받았다.[16]

1920년 임기 만료를 앞두고 카란사는 헌법상 재선이 금지되자, 자신의 후계자로 미국 유학파 민간인 이그나시오 보닐라스를 지명했다. 이는 혁명 과정에서 군공을 세운 알바로 오브레곤,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 아돌포 데 라 후에르타 등 군부 실력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이들은 카란사가 혁명 정신을 배반하고 권력을 사유화하려 한다며 1920년 4월 '아과 프리에타 계획'을 발표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군부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은 반란군은 빠르게 세력을 넓혔고, 카란사는 멕시코시티를 탈출해 베라크루스로 피신하려 했다. 그러나 도주 중이던 1920년 5월 21일, 푸에블라주의 산악 마을 트라스칼란톤고에서 지역 유력자 로돌포 에레로의 배신으로 잠자던 중 암살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4. 1. 1917년 멕시코 헌법의 주요 내용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1916년 9월 케레타로에서 헌법 제정 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기존의 자유주의적인 멕시코 1857년 헌법을 존중하며 일부 단점만 수정하겠다고 밝혔으나, 실제 의회에서는 급진파의 목소리가 더 컸다.[64][65]

헌법 제정 의회는 1916년 12월에 소집되었는데, 카란사의 입장에 가까운 보수파 및 중도파("쇄신파", bloque renovadores)는 85명에 불과했다. 반면, 토지 개혁 등 급진적인 내용을 헌법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표들은 132명에 달했다. 이들 급진파는 특히 안드레스 몰리나 엔리케스의 1909년 저서 ''위대한 국가적 문제들'' (Los Grandes Problemas Nacionaleses)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몰리나 엔리케스는 직접 대표는 아니었지만, 헌법 제27조 초안 작성 위원회의 핵심 자문 역할을 했다.[64][65]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27조 (토지 소유권 및 천연자원)''': 이 조항은 사유재산이 원칙적으로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국가는 공익을 위해 사유재산을 규제할 권리가 있다고 명시했다. 특히 토지가 부족한 공동체가 라티푼디오나 아시엔다로부터 토지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칼보 독트린의 원칙을 넘어, 멕시코 내 토지 소유권은 멕시코 국민이나 원주민에게만 주어진다고 선언했다. 외국인에게 토지 소유권이 부여되더라도 이는 임시적이며, 소유권 분쟁 시 외국 정부에 외교적 보호를 요청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64][65] 이는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권 하에서 외국 기업에게 주어졌던 특혜를 제한하고 국가의 자원 주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 '''제123조 (노동권)''': 급진파들은 노동 문제에 있어서도 카란사의 구상보다 훨씬 진보적인 내용을 담았다. 이 조항은 8시간 노동제를 확립하고, 아동 노동을 금지했으며, 여성 및 청소년 노동자를 보호하는 규정을 포함했다. 또한 법정 공휴일 지정, 현금으로 지급되는 적정 임금 보장, 이익 분배 제도, 노동 분쟁 조정을 위한 중재위원회 설립, 부당 해고 시 보상 등을 의무화했다.[64][65] 이는 멕시코 혁명 과정에서 중요하게 부각된 노동자들의 권리를 헌법적으로 보장하려는 시도였다.

  • '''제3조 및 제130조 (정교분리 및 반교권주의)''': 급진파는 카란사가 지지했던 수준보다 훨씬 강력한 반교권주의적 조항들을 관철시켰다. 멕시코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법인격을 인정받지 못했으며, 성직자들은 투표권 등 여러 권리를 박탈당하고 정부에 의무적으로 등록해야 했다. 학교에서의 종교 교육과 교회 밖에서의 공개적인 종교 의식은 금지되었고, 모든 교회 건물과 재산은 국가 소유로 선언되었다.[64][65]


결과적으로 1917년 멕시코 헌법은 카란사가 처음 구상했던 자유주의적 개정안보다 훨씬 급진적인 내용을 담게 되었다.[64][65] 그럼에도 카란사 지지자들은 몇 가지 중요한 성과를 얻었다. 행정부의 권한이 강화된 반면 입법부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고, 부통령직이 폐지되었다. 또한 사법부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판사들에게 종신 임기를 보장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64][65]

5. 대통령 재임 (1917-1920)

1917년 헌법이 공포된 후,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1917년 3월 11일 실시된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카란사 797,305표, 파블로 곤살레스 11,615표, 알바로 오브레곤 4,008표)로 승리하여[21] 5월 1일 멕시코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했다.[21]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은 순탄치 않았다. 오랜 내전으로 멕시코 경제는 피폐해졌고, 식량 공급 체계가 무너졌으며, 사회 혼란 속에 질병이 만연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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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란사 정부는 여전히 활동 중인 여러 무장 반대 세력과 마주해야 했다. 모렐로스주에서는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게릴라전을 이어갔고, 판초 비야는 비록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치와와주에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조카인 펠릭스 디아스는 베라크루스주에서 '국가 재편성군'을 조직했으며,[21] 오악사카주에서는 기예르모 메이슈에이로 등이 지역 자치를 주장하는 '주권주의자' 운동을 벌였다.[21] 카란사는 이들 반대 세력 진압에 나섰으며, 특히 1919년 4월에는 파블로 곤살레스 가르사 장군과 그의 정보 책임자 헤수스 과하르도를 통해 에밀리아노 사파타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21]

카란사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멕시코의 중립을 유지했다. 1917년 1월, 독일 제국의 외무장관 아서 치머만은 멕시코가 독일 편에 참전할 경우,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미국에 빼앗긴 영토(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 회복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치머만 전보를 보냈다.[21][70][71] 카란사는 이 제안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군사적 실현 가능성을 검토했으나, 독일의 지원을 보장받기 어렵고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거절했다.[21][72] 이러한 중립 정책 덕분에 멕시코는 1917년 8월 31일 미국으로부터 공식적인 정부 승인을 받았으며,[72][73] 전쟁 중에도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걸을 수 있었다. 카란사는 독일 기업의 활동을 보장하는 한편, 영국 해군이 사용하는 연료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멕시코산 석유를 영국에 계속 판매했다.[71][74][75] 그는 미국이 멕시코 유전을 점령하려 할 경우 불태워 버리겠다고 위협하며 자원 주권을 지키려 노력했다.[77][78][79][73]

국내 정책에서 카란사는 1917년 헌법에 담긴 급진적인 개혁 조항 이행에 소극적이었다. 특히 토지 개혁을 명시한 제27조와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한 제123조, 반교권주의적인 제3조와 제130조의 실행에 소극적이었다.[64][65] 그는 대지주 출신으로서 급진적인 토지 분배보다는 기존 지주들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경향을 보였으며, 몰수되었던 토지를 호세 이브스 리만투르와 같은 구체제 인사들에게 반환하기도 했다.[63] 노동 문제에서도 초기에는 적색대대 결성 등 노동계와 협력했지만, 전쟁이 끝나자 파업을 강경하게 탄압하고 1916년에는 세계 노동자의 집을 강제 해산시키는 등 반노동적인 태도로 돌아섰다.[57][59] 반교권주의 조항 역시 수정을 시도했으나 의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66] 이러한 카란사의 보수적인 정책 운영과 더불어 행정부 내 부패가 만연하여 국민들의 불만은 커져갔다. 당시 "노인은 훔치지 않지만, 그들이 훔치도록 내버려 둔다"는 말이 유행했고, '카란세아르(carrancear)'라는 단어가 '훔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될 정도였다.[16]

1920년 미국에서 발표된 카란사 축출 풍자 만화


1920년 대선을 앞두고 헌법상 재선이 금지된 카란사는 자신의 후계자로 미국 주재 대사를 지낸 이그나시오 보닐라스를 지명했다.[80] 이는 혁명의 군사적 공로자이자 유력한 대권 주자였던 알바로 오브레곤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군부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21] 오브레곤 지지자들이 탄압받는 상황에서 오브레곤과 그를 따르는 소노라 출신 장군들(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 포함)은 1920년 4월 23일, 카란사 정부를 부인하고 혁명을 재개한다는 내용의 아과 프리에타 계획을 발표했다.[21]

오브레곤 군대가 멕시코시티로 진격하자 카란사는 정부 요인 및 재산을 열차에 싣고 베라크루스로 피신하여 임시 정부 수립을 시도했다.[21] 그러나 도주 중이던 1920년 5월 21일 새벽, 푸에블라주 북부 산맥의 작은 마을 틀라스칼란통고(Tlaxcalantongo)에서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로돌포 에레로 장군의 부대에게 습격당해 잠든 사이 암살되었다.[21][81] 카란사의 측근 프란시스코 L. 우르키소 장군에 따르면, 총소리에 깨어난 카란사의 마지막 말은 "리센시아도, 야 메 롬피에론 우나 피에르나"(변호사님, 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였는데, 이는 그의 파트너였던 마누엘 아기레 베를랑가를 지칭한 것이었다.[81] 카란사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암살설 외에 자살설도 제기되었지만,[83] 암살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이후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당시 대령이었던 라사로 카르데나스가 카란사 사살 명령을 내린 전보를 보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82]

6. 최후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장기 집권이 그의 축출 원인 중 하나였기에, 카란사는 1920년 대통령 선거에 재선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 대통령을 선호하여, 당시 워싱턴 주재 멕시코 대사였던 이그나시오 보닐라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지했다.[80] 이는 판초 비야를 격파하며 군사적 명성을 쌓은 알바로 오브레곤 장군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카란사 정부가 오브레곤 지지자들을 탄압하고 일부를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21], 오브레곤은 카란사가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오브레곤은 소노라주 출신의 동료 장군들(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 등)과 함께 아과 프리에타 계획(Plan de Agua Prieta)을 발표하며 카란사 정부를 부정하고 사실상 반란을 일으켰다. 1920년 4월 8일, 오브레곤 측 인사에 대한 암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오브레곤은 군대를 이끌고 멕시코시티로 진격하여 카란사를 축출했다.[21]

카란사는 정부를 재정비하기 위해 베라크루스로 향했으나[21], 이동 중 배신을 당했다. 1920년 5월 21일, 푸에블라주 북부 산맥 지역인 틀라스칼란통고(Tlaxcalantongo)에서 잠을 자던 중, 과거 카란사의 동맹이었던 지역 군벌 로돌포 에레로 장군 부대의 기습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21] 당시 함께 있던 측근 프란시스코 L. 우르키소 장군에 따르면, 총소리에 깬 카란사의 마지막 말은 Licenciado, ya me rompieron una pierna|리센시아도, 다리가 부러졌소!es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그의 동료였던 마누엘 아기레 베를랑가를 부른 말이었다.[81]

카란사의 죽음을 둘러싸고 암살 배후 논란과 자살설이 제기되었다. 역사가 클라우디오 롬니츠는 오브레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총격전을 계획하여 카란사를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에 공개된 문서에서는 당시 대령이었던 라사로 카르데나스가 카란사 제거 명령을 내리는 전보를 보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82] 반면, 역사가 아기레 베를랑가는 카란사가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카란사의 셔츠에 남은 총탄 구멍이 당시 공격자들이 사용한 카빈총의 구경과 맞지 않게 작다는 점, 그리고 가슴과 왼손 손가락에 총상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즉, 다리에 총을 맞은 후 스스로 가슴에 총을 쏘아 자살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가 엔리케 크라우제 역시 여러 정황을 분석한 결과 자살 가능성이 더 높다고 결론지었으나[83], 이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완전히 합의된 견해는 아니며 진실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카란사의 유해가 1942년 안치된 멕시코시티의 혁명 기념탑


카란사 사후, 오브레곤은 로돌포 에레로 대령을 암살 혐의로 재판에 회부했지만, 에레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21] 카란사의 시신이 멕시코시티로 옮겨져 장례가 치러질 때 오브레곤은 자리를 비웠다. 한 신문은 장례 행렬에 약 3만 명의 지지자들이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그의 유해는 멕시코시티의 돌로레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는데, 저명인사 구역이 아닌 일반인 구역에 묻혔다.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심장은 1942년 혁명 기념탑에 유해를 재매장할 때 함께 안치되었다.[84]

생전에 카란사 정부는 부패 문제로 비판받았으며, "훔치다"라는 의미의 신조어 carrancear|카란세아르es가 생겨날 정도였다.[16] 오브레곤 집권 후, 소위 '소노라 왕조'는 카란사를 "멕시코 정부 역사상 가장 부패한 인물"로 묘사했다. 오브레곤 대통령 임기 말년에 정부가 카란사의 딸 훌리아에게 "국가에 대한 탁월한 공헌"을 이유로 연금을 제안했으나, 그녀와 형제들은 오브레곤이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며 이를 격렬히 거부했다. 그들은 답신 편지에 "당신의 충실한 적, 훌리아, 에밀리오, 베누스티아노, 헤수스 카란사"라고 서명했다.[85]

7. 역사적 평가와 유산



카란사, 옛 100페소 동전 앞면에 묘사됨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에밀리아노 사파타, 판초 비야, 알바로 오브레곤과 함께 멕시코 혁명의 주요 지도자인 "빅 포"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21] 그는 빅토리아노 우에르타의 독재 정권에 맞서 광범위한 헌법주의 운동을 이끌었으며, 멕시코 북부의 정치 및 군사력을 결집하여 헌법 질서 회복을 목표로 삼았다. 그의 휘하에는 오브레곤,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 라사로 카르데나스 등 훗날 멕시코 대통령이 되는 뛰어난 군 지도자들이 있었다.

카란사는 노련하고 실용적인 정치가였으며, 우에르타에 대한 그의 초기 반대는 반독재 연합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프란시스코 마데로를 경험이 부족한 이상주의자로 보았고, 마데로가 구체제를 온존시키려 한 것에 비판적이었다. 우에르타 축출 후, 카란사는 마데로와 달리 구 연방군을 해산하고 혁명군을 유지하는 단호함을 보였다. 그는 "혁명이 양보를 하면 자살을 저지른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90][91]

카란사 정권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업적은 1917년 멕시코 헌법의 제정을 주도한 것이다. 그는 새로운 헌법 제정을 통해 토지 개혁, 노동자의 권리 보장, 외국 자본에 대한 통제 강화, 민족주의적 원칙 확립 등 혁명의 핵심 요구 사항들을 법제화했다. 이는 멕시코 현대사의 기틀을 마련한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미국의 강력한 경제적, 정치적 압력에 맞서 멕시코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역사가 레스터 랭글리는 "카란사는 혁명의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링고(미국인)들을 멕시코시티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고 평가하며 그의 민족주의적 노력을 인정했다.[73][94]

그러나 카란사는 다른 혁명 지도자들과의 끊임없는 갈등에 시달렸다. 우에르타 축출 후 혁명 세력은 분열되었고, 카란사는 오브레곤의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비야와 사파타는 카란사의 노선에 강하게 반발하며 그와 결별했다. 비야는 카란사를 혁명 이상을 배신한 인물로 여겼고,[92] 사파타는 카란사가 혁명 원칙을 짓밟고 독재적으로 권력을 행사한다고 비판했다.[93] 이러한 내부 갈등은 그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켰고, 결국 오브레곤과의 대립 끝에 암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배경이 되었다.

카란사 사후, 알바로 오브레곤 정부는 카란사를 "멕시코 정부 연대기에 가장 부패한 인물"로 묘사하는 등[85]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공식적인 혁명 역사에서 배제하려 했다. 당시 교육부 장관 호세 바스콘셀로스는 "카란사의 죽음은 평화의 물결과 같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86] 카란사는 한때 포르피리오 디아스, 빅토리아노 우에르타와 함께 반혁명의 상징처럼 취급되었고, 1917년 헌법 제정에 대한 그의 공로마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87] 그의 지지자들은 그의 명예를 지키려 했으나, 대중적인 기억 속에서는 카리스마 넘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사파타나 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았다. 그를 기리는 대중적인 ''코리도스''(민중 발라드)도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89]

시간이 흘러 라사로 카르데나스 정부 시기인 1942년, 1917년 헌법 제정 25주년을 계기로 카란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그의 유해는 돌로레스 공동묘지에서 발굴되어 성대한 의식을 거쳐 멕시코시티 혁명 기념탑의 네 기둥 중 하나에 안치되었다.[84][95] 이는 멕시코 혁명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상징적인 조치였다. 현재 카란사는 그의 사망 기념일에 공식적으로 추모되고 있으며,[95] 과거 100페소 지폐에 그의 초상이 사용되기도 했다. 멕시코시티에는 그의 이름을 딴 카란사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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