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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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변이중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46년 전라도 장성에서 태어나 1611년 사망했다. 그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7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소모사, 조도사 등을 역임하며 군량미 조달과 화차 제작에 기여했으며, 행주산성 전투 승리에 힘을 보탰다. 학문에도 능하여 성리학과 경학에 밝았고, 《총통화전도설》과 《화차도설》을 저술하여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사후에는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장성 봉암서원에 제향되었다.
변이중은 1546년 전라도 장성군에서 태어나 1611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이이와 성혼에게서 수학하였으며, 1568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전라도 소모사 및 조도사로 활동하며 군량미 조달과 의병 모집에 힘썼고, 특히 화차를 만들어 권율의 행주산성 전투 승리에 기여하였다. 1605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장성군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사후 무안군에 안장되었다.[1]
변이중은 성리학과 경학에 밝았으며, 군사 전략에도 능통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임진왜란 때 소모사로 군기와 군량 조달에 공이 컸으며, 그가 쓴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에 의거 화차를 제조한 공로는 조선 과학사에 있어서 커다란 업적으로 남는다.[2] 강항과 이정구는 묘지명과 묘갈명에서 변이중의 학문, 인품, 뛰어난 전략과 창의성을 높이 평가했다.[1]
2. 생애
2. 1. 초기 생애 및 수학
1546년 전라도 장성군 장안리 장안(長安)부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참봉 변택(邊澤)이며, 어머니는 함평 이씨로 이조참판을 지낸 이긍(李兢)의 손녀딸이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글과 학문을 수학하였다.[1]
제자로는 추담 김우급(金友伋) 등이 있다.[1]
2. 2. 관직 생활
1568년 증광시 생원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년) 식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6월 어천찰방에 임명되었으며, 1593년 2월에는 소모사가 되어 죽산의 적둔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였다.[1]
1593년 2월 12일 자신이 쓴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 내용에 따라 화차 300량을 제조하여 그중 40대를 배편으로 경기도 고양 행주산성에 보내 권율 장군이 크게 승리하는데 힘을 보탰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수레 만들기를 독촉하고 소를 바치라 하여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기도 하였다.[1]
이후 조도어사가 되어 양천산에 주둔해 있을 때 묘책을 써서 왜적을 물리치는 등 누차 전공을 세웠으며, 1593년 11월에 전라도 조도사로 군량미 수십만 석을 조달해 명나라 군대에게 대주었다.[1]
임진왜란 중에는 전라도 소모사 및 조도사가 되어 병마·군기·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하였으며, 수원에 주둔하여 기호의 적에 대비하였다.[1]
1595년(선조 28년) 부호군, 1599년(선조 32년) 선산 부사, 1600년(선조 33년) 성균관 전적, 1601년(선조 34년) 비변사 낭청, 1603년 함안 군수로 부임하여 1605년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갔다.[1]
2. 3.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의 활동
1592년 6월 어천찰방에 임명되었으며, 1593년(선조 26년) 2월에 소모사가 되었으나 죽산에서 적에게 크게 패하였다.[1]
1593년 2월 12일 자신이 쓴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에 따라 화차 300량을 제조, 그중 40대를 배편으로 행주산성에 보내 권율 장군이 크게 승리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수레 제작과 소 징발을 독촉하여 고통을 주기도 하였다.[1]
이후 조도어사가 되어 양천산에 주둔하며 묘책으로 왜적을 물리치는 전공을 세웠고, 1593년 11월 전라도 조도사로서 군량미 수십만 석을 조달하여 명나라 군대에 제공하였다.[1]
임진왜란 동안 전라도 소모사 및 조도사로서 병마, 군기,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했으며, 수원에 주둔하며 기호 지방의 적에 대비하였다.[1]
2. 4. 은퇴 이후
1605년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변이중의 묘는 무안군 현경면 가입길 17-11(현경면 가입리 산44-5)에 있는데, 그가 출생하고 성장하면서 학문을 연마했던 장성이 아닌 고향에서 50km나 떨어진 이곳에 있는 이유는 전라도 소모사로 일하면서 봐두었던 명당에 묻어 달라는 유언 때문이었다고 한다. 1546년 장성에서 태어나 66세(1611년)에 여생을 마친 망암 선생은 장성에 안장됐다가 몇 해 후 아들에 의해 화해롱주(花蟹弄珠, 게가 구슬을 희롱하는 명당)로 알려진 이곳에 안장되었다.
2. 5.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장성 봉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망암집(望菴集)》, 《가례고징(家禮考徵)》등이 있다.[1][2]
3. 업적
3. 1. 학문적 업적
1590년(선조 23년) 변성온, 기효간 등 호남의 선비들과 함께 하서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장성 필암서원을 세웠다.[1] 김인후는 호남 유림의 종장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1] 성리학과 경학에 밝았다.[2]
3. 2. 군사적 업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성리학과 경학에 밝아 군사 전략에도 능통했던 변이중은 소모사로서 군기와 군량 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 특히, 그가 저술한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을 바탕으로 화차를 제작한 것은 조선 과학사에 큰 업적으로 기록된다.[1] 강항과 이정구는 묘지명과 묘갈명에서 변이중의 학문, 인품, 뛰어난 전략과 창의성을 높이 평가했다.[1]
3. 3. 과학적 업적
변이중은 성리학과 경학에 밝았으며, 군사 전략에도 능통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임진왜란 때 소모사로서 군기와 군량 조달에 큰 공을 세웠고, 그가 저술한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을 바탕으로 화차를 제작하여 조선 과학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2]
4. 저서
- 총통화전도설
- 화차도설
5. 관련 문화재
봉암서원은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에 있으며, 전라남도 시도기념물 제54호이다.
6.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고조부 | 변효우(邊孝友) |
증조부 | 변호(邊浩) |
조부 | 변처정(邊處楨) |
아버지 | 변택(邊澤) |
어머니 | 함풍 이씨(咸豐 李氏) (이긍(李兢)의 손녀) |
전처 | 나주 오씨(羅州 吳氏) (오인준(吳仁俊)의 딸) |
장남 | 조졸 |
차남 | 변경윤(邊慶胤) |
손자 | 변명익(邊命益) |
후처 | 진산 소씨(晉山蘇氏) (소형선(蘇亨善)의 딸) |
삼남 | 변소윤(邊蘇胤) |
사남 | 변효윤(邊孝胤) |
오남 | 변후윤(邊厚運) |
육남 | 변달윤(邊達胤) |
장녀 사위 | 김자점(金自點) |
7. 상훈과 추모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장성 봉암서원에 제향되었다.[1][2] 봉암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2월 20일과 8월 20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
웹사이트
황하문화원
http://www.shinjongw[...]
201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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