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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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완혁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료를 지냈으며, 해방 후에는 고려대학교 교수, 국무총리 비서관, 언론인,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선산군 군수를 역임했으며, 창씨개명으로 오야마 다케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미군정 시기에는 고려대 교수로, 이후 관료로 복귀하여 기획처 물동국장 등을 지냈다. 조선일보 논설위원, 주필을 거쳐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4·19 혁명 이후에는 사상 잡지 《사상계》 발행인으로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1976년에는 사위가 설립한 율산그룹 회장을 맡았으나 실패했다. 일제강점기 관료 경력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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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완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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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부완혁 |
한글 | 부완혁 |
한자 | 夫琓爀 |
가타카나 | 푸 완히ョク |
![]() | |
출생일 | 1919년 3월 1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
사망일 | 1984년 12월 31일 (65세) |
국적 | 대한민국 |
본관 | 제주 |
경력 | |
직업 | 언론인 |
활동 기간 | 미상 |
소속 | 미상 |
2. 생애
경성부에서 태어나 1941년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어 경상북도 선산군 군수를 역임했으며, 창씨개명에 따른 일본식 이름은 大山丈夫|오야마 다케오일본어이다.
미군정 시기에는 고려대학교 법과 교수로 임용되어 학계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이범석 국무총리의 비서관이 되어 관료계로 복귀했다. 1952년에는 기획처 물동국장, 한미합동경제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1955년 관료계를 떠나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되었고, 경제 전문가 출신의 언론인으로 알려졌다. 4·19 혁명 이후 조선일보 주필,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5·16 군사 정변 발생으로 야인이 되었다.
박정희 정권 하(제3공화국)에서는 장준하가 창간한 사상계의 기고가로 문필 활동을 했다. 1967년에는 신민당에 입당하여 박정희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활동했다. 장준하가 정계에 진출하자 사상계 발행인을 맡아 경영했지만, 1970년 김지하의 단시 「오적」을 게재한 것으로 인해 사상계는 폐간되었다.
1976년 사위 신선호가 설립한 율산그룹 회장을 맡아 경제인으로 변신을 꾀했지만, 그룹 해체로 성공하지 못했다. 저서로는 『신제국주의』, 『국제공산당과 세계혁명』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말기 총독부 관리를 역임한 경력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2. 1. 초기 활동 (일제 강점기)
경성부에서 출생하여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어 경상북도 선산군 군수를 지냈다. 창씨개명에 따른 일본식 이름은 大山丈夫|오야마 다케오일본어이다.[1] 일제강점기 관료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1] 이는 그의 생애에서 비판받는 부분이다.2. 2. 광복 이후
미군정 시기 고려대학교 법과 교수로 임용되어 학계에서 활동했다. 1948년 이범석 국무총리의 비서관이 되면서 관료로 복귀, 1952년 기획처 물동국장 및 한미합동경제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1955년 관료계를 떠나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되었고, 경제 전문 언론인으로 알려졌다. 4·19 혁명 이후 조선일보 주필,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을 역임했으나, 5·16 군사 정변으로 야인이 되었다.
박정희 정권 하(제3공화국)에서는 장준하의 『사상계』 기고가로 문필 활동을 했다. 1967년 신민당에 입당, 박정희에 반대하는 대표적 인물로 활동했다. 장준하가 정계에 진출하자 『사상계』 발행인을 맡았지만, 1970년 김지하의 단시 「오적」 게재 (오적필화 사건)로 인해 『사상계』는 폐간되었다.
1976년 사위 신선호가 설립한 율산그룹 회장을 맡았지만, 그룹 해체로 성공하지 못했다. 저서로는 『신제국주의』, 『국제공산당과 세계혁명』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말기 총독부 관리를 역임한 경력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2. 2. 1. 관료 및 학계 활동
1945년 8월 15일 8.15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고려대학교 법과 교수로 임용되어 잠시 학계에 몸담았다.[1] 1948년 이범석 국무총리의 비서관으로 발탁되어 다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1] 1952년 기획처 물동국장 및 한미합동경제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1]2. 2. 2. 언론 활동과 5.16 군사정변
1955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되어 경제 전문 언론인으로 알려졌다.[1] 4·19 혁명 이후에는 조선일보 주필을 거쳐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1] 5·16 군사 정변 발생으로 야인으로 물러났다.[1]2. 2. 3. 정치 활동 (제3공화국)
제3공화국 시절 《사상계》에 기고하며 문필 활동을 했다.[4] 1967년 신민당에 입당하여 박정희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야당 인사로 활동했다.[4] 장준하로부터 사상계를 인수받아 발행인으로 경영했으나,[4] 1970년 김지하의 담시 〈오적〉 필화 사건으로 인해 사상계가 폐간되었다.2. 3. 만년
1976년 맏사위 신선호가 설립한 율산그룹 회장을 맡아 경영인으로 변신을 꾀했으나, 회사가 해체되면서 실패로 끝났다.[5] 저서로는 《신제국주의》, 《국제공산당과 세계혁명》 등이 있다.3. 평가
부완혁은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리로 일하며 친일 행적을 남겼다는 비판을 받으며,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1]
그러나 해방 이후, 특히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야당 정치인이자 언론인으로서 독재와 부패에 맞서 싸웠다. 사상계 발행인으로서 김지하의 시 〈오적〉을 게재하여 박정희 정권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오적필화 사건으로 사상계가 폐간되기도 했다.[4] 이러한 그의 용기와 헌신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3. 1. 친일 논란
1941년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경상북도 선산군 군수를 지내는 등 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선총독부 관리로 일했다.[1] 창씨개명 후 일본식 이름은 오야마 다케오(大山丈夫)였다.[2] 이러한 경력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1]참조
[1]
웹사이트
부완혁(夫琓爀)
https://encykorea.ak[...]
2023-08-18
[2]
웹사이트
(글 김창욱기자 사진 양영훈기자){{!}}제주부씨
https://www.joongang[...]
1984-02-25
[3]
뉴스
조선일보 전 주필 부완혁씨 별세
조선일보
1985-01-01
[4]
웹사이트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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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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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취재] 율산 再起 8857일의 기록 - 집념의 신선호, 신화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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