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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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는 1937년 나치 독일이 바이마르 인근에 설립한 강제 수용소로, 수감자들의 강제 노동을 통해 벽돌을 생산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수용소는 8,000명 수용 규모로 설계되었으며, "각자에게 마땅한 것"이라는 문구가 정문에 새겨졌다. 초기에는 독일인 정치범이 주로 수용되었으나, 점차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수감되었으며, 1945년 4월 미국군이 해방했을 당시에는 약 21,000명의 수감자가 남아 있었다. 수감자들은 강제 노동, 고문, 인체 실험, 학살 등 비인간적인 행위에 시달렸으며, 56,545명으로 추산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전후에는 미국 군사 재판이 열려 SS 가해자들이 기소되었으며, 현재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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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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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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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바이마르, 독일 |
운영 주체 | 슈츠슈타펠 |
운영 기간 | 1937년 7월 15일 – 1945년 4월 11일 |
수감자 수 | 280,000명 |
사망자 수 | 56,545명 |
해방 | 미국 육군 제6기갑사단 |
웹사이트 | www.buchenwald.de/en/69/ |
운영 | |
지휘관 | |
주요 인물 | |
수감자 | 브루노 아피츠 필 라마손 엘리 위젤 루돌프 브라즈다 에른스트 텔만 |
관련 작품 |
2. 역사
나치 독일은 1937년 7월, 바이마르 근처 에터스베르크 언덕에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를 설립했다.[36] 초기 목적은 4개년 계획 추진에 필요한 벽돌 생산을 위한 강제 노동력 동원과 증가하는 수감자 수용이었다.[36][2] 수용소 이름은 본래 지역 이름을 딴 '에터스베르크 수용소'였으나,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등 독일 문화계 중요 인물과의 연관성 때문에 주변의 너도밤나무 숲을 의미하는 '부헨발트'로 변경되었다. 수용소 정문에는 "각자에게 마땅한 것"(Jedem das Seine|예뎀 다스 자이네de)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는데, 이는 나치의 인종차별적 우월주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3]
수용소 운영 초기에는 카를-오토 코흐가 소장을 맡았으며, 그의 아내 일제 코흐는 잔혹 행위로 악명이 높았다.[37][4] 이후 헤르만 피스터가 소장직을 이어받았다. 수용소 내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으며, 수감자들은 기아, 질병, 혹독한 강제 노동으로 인해 대규모로 사망했다. 이는 사실상 '노동을 통한 절멸' 정책에 해당했다.[9][38] 친위대(SS) 경비병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처형, 소련군 포로에 대한 즉결처형, 티푸스 백신 개발 등을 위한 나치 인체 실험 등 반인륜적 범죄가 자행되었다.[9][10] 부헨발트에는 대량 학살을 위한 가스실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나, 다른 방식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52][53][54] 또한, 무기 생산 등을 위해 약 136개의 분소가 운영되었다.
초기 수감자는 주로 독일인 정치범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유대인,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 나치 독일 점령지 주민들과 소련군 포로들이 대거 이송되면서 수감자 구성이 다양해졌다.[40][41][42][47] 전쟁 말기에는 수감자 수가 8만 명을 넘어서기도 했다.[44] 예외적으로 연합군 조종사 168명이 잠시 수감된 사례도 있었다.[5][6][7][8]
1945년 4월, 미국 제3군이 접근하자 SS는 수감자들을 다른 곳으로 이송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일부는 사망 행군으로 끌려갔다. 수감자들은 비밀리에 만든 단파 라디오 송신기로 외부와 교신하며 도움을 요청했다.[15] 1945년 4월 11일, 미국 제6기갑사단 예하 부대가 수용소에 도착하여 2만 1천여 명의 생존자를 해방시켰다.[17] 해방 후 에드워드 R. 머로 등 언론인들과 조지 S. 패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 등이 수용소를 방문하여 참상을 기록하고 세상에 알렸다.[18] 패튼 장군은 인근 바이마르 시민들에게 수용소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도록 강제하여 집단적 책임을 일깨우려 했다.
전후 수용소 책임자들은 뉘른베르크 재판 등에서 처벌받았으며, 수용소 부지는 현재 기념관으로 보존되어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증언하고 있다. 2009년에는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하여 희생자들을 추모했다.[31][32][22]
2. 1. 설립 배경
1936년 아돌프 히틀러의 4개년 계획 추진 과정에서 대량의 벽돌 수요가 발생하자, 나치 독일 정부는 새로운 강제 수용소 건설을 계획했다. 이는 수감자들의 강제 노동을 통해 인근 점토 매장지를 벽돌 생산에 활용하고,[36] 동시에 증가하는 수감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36]이에 따라 1937년 7월 초, 친위대(SS)는 바이마르 북서쪽 에터스베르크 언덕 북쪽 경사면에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를 설립했다. 처음에는 이 언덕의 이름을 따 '에터스베르크 수용소'로 명명하려 했으나, 해당 지역이 계몽주의 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같은 독일 문화계 중요 인물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결국 수용소는 주변의 너도밤나무 숲을 의미하는 '부헨발트'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홀로코스트 연구가 제임스 E. 영(James E. Young)은 SS 지도부가 의도적으로 해당 지역의 문화적 유산을 지우기 위해 이 위치를 선택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수용소 건설 과정에서 부지의 나무 대부분이 제거되었으나, 괴테의 참나무로 추정되는 큰 참나무 한 그루는 남겨졌다.
부헨발트는 약 8,000명의 수감자를 수용하도록 설계되었으며, 인근의 바트 술자(Bad Sulza), 작센부르크, 리히텐부르크 등 소규모 수용소들을 대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2] SS는 부헨발트가 점토 매장지를 활용한 벽돌 생산을 통해 다른 수용소들보다 더 큰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했다. 최초의 수감자들은 1937년 7월 15일에 도착하여 벌목과 수용소 건물 건설에 강제로 동원되었다. 같은 해 9월까지 바트 술자, 작센부르크, 리히텐부르크에서 추가로 수감자들이 이송되면서 수용 인원은 2,400명으로 늘어났다.

수용소 정문에는 "각자에게 마땅한 것"(Jedem das Seine|예뎀 다스 자이네de)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SS는 이 문구를 소위 "마스터 레이스"가 다른 민족이나 집단을 억압하고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나치의 인종차별적 사상을 정당화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문구 디자인은 수감자였던 바우하우스 건축가 프란츠 어흘리히가 바우하우스 서체를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나치즘은 바우하우스를 퇴폐 예술로 규정하고 금지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디자인적 저항은 SS에게 인지되지 않았다.[3]
2. 2. 운영 및 실태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의 초대 소장은 1937년 8월 1일부터 1941년 7월까지 SS-상급돌격대장 카를-오토 코흐였다. 그의 두 번째 부인 일제 코흐는 잔혹함으로 인해 "부헨발트의 마녀"(Die Hexe von Buchenwaldde)라는 악명을 얻었다. 코흐는 수감자 노동력을 착취하여 사적인 이득을 취하는 등 부패 혐의로 나치 당국에 의해 기소되어[37] 1945년 4월 5일 처형되었다. 일제 코흐는 SS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전후 미군과 서독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1967년 감옥에서 자살했다. 1941년 12월(또는 1942년)부터 1945년 해방 시까지는 헤르만 피스터가 소장을 맡았다. 그는 전후 다하우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948년 9월 란츠베르크 교도소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수용소 내 여성 수감자는 500명에서 1,000명 사이였다. 초기에는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에서 이송된 소수의 여성이 수용소 매춘굴에서 성적 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 1944년 이후 아우슈비츠, 라벤스브뤼크, 베르겐-벨젠 등지에서 더 많은 여성 수감자들이 이송되었으나, 대부분 부헨발트의 여러 여성 위성 수용소로 보내졌다. 일제 코흐는 수용소 내 공식 직책이나 간수 역할을 맡지 않았다.[4]
부헨발트에는 약 136개의 분소가 있었으며, 주로 무기 생산을 위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SS는 수감자 노동력을 민간 기업에 제공하고 대가를 받았으며, 1943년 6월부터 1945년 2월까지 약 이상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분소의 환경은 본 수용소보다 더 열악한 경우가 많았다.
예외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 포로 168명이 부헨발트에 수감되기도 했다.[5] 이들은 미국, 영국, 캐나다 등에서 온 조종사들로, 1944년 8월 20일에 도착했다.[6][7] 이들이 제네바 협약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이유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접촉하여 간첩으로 간주되었거나, "테러플리거"(공포의 비행사)로 분류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8]

수용소의 주된 사망 원인은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질병과 기아였다. 수감자들은 혹독한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9] 이는 사실상 '노동을 통한 절멸'(Vernichtung durch Arbeitde)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많은 수감자들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사망했으며,[38] SS 경비병들의 임의적인 폭력이나 처형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9] 노동 능력을 상실한 수감자들은 14f13 작전에 따라 존넨슈타인 살해 시설로 보내져 가스로 살해되었다.
마르틴 조머(Walter Gerhard Martin Sommer)와 같은 잔혹한 SS 간수들은 수감자들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조머는 수감자들을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고문하는 등의 행위로 "부헨발트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렸다.[10]
소련군 포로에 대한 즉결처형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최소 1,000명 이상의 소련군 포로가 목덜미에 총격을 가하는 ''Genickschuss'' 방식으로 학살되었다.
또한, 수용소는 나치 인체 실험의 장소이기도 했다. 1942년과 1943년에는 티푸스 백신 개발을 위한 대규모 인체 실험이 진행되어, 729명의 수감자 중 154명이 사망했다. 이 외에도 독극물 치사량 실험이나 흰 인 화상 치료제 실험 등 비인간적인 실험들이 자행되었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 등에서 가스실 학살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나,[49][50][51] 현재 부헨발트에는 대량 학살을 위한 가스실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된다.[52][53][54] 학살은 주로 총살, 교수형, 노동을 통한 절멸, 질병 방치, 인체 실험 등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2. 3. 수감자 구성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는 1937년 7월 개설 당시 주로 독일인 정치범 929명을 수용했으나, 이후 형사범, 부랑자, 노동 기피자 등이 추가되면서 인원이 늘어났다.[40] 1938년 1월 1일에는 2,557명, 1939년 1월 1일에는 11,028명이 수감되었다.[41]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출신(독일 국적으로 변경됨) 수감자들이,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한 후에는 체코인들이 이송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수정의 밤 사건 직후에는 체포된 유대인 약 1만 명이 대량으로 이송되어 수감자 수가 일시적으로 1만 8천 명을 넘기도 했으나, 이들은 대부분 몇 주 안에 석방되어 수감자 수는 다시 1만 명 전후로 돌아왔다.[42]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독일 점령 하의 유럽 각국 사람들이 이송되었다. 특히 독소전쟁 개시 후인 1941년 10월부터는 소련군 포로들이 도착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점차 수가 증가하여 수용소 해방 당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그룹이 되었다.[47] 전쟁 초기부터 1943년 1월까지 수감자 수는 대체로 1만 명 미만을 유지했다.[43] 또한 전쟁 중에는 이례적으로 연합군 조종사 168명이 약 2개월간 부헨발트에 수감되기도 했다.[5] 이들은 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자메이카 출신으로, 1944년 8월 20일에 부헨발트에 도착했다.[6][7] 이들은 독일 점령 하의 프랑스에서 비행기가 추락한 후 체포된 승무원들이었다. 독일 당국이 이들을 강제 수용소로 보낸 이유로는, 이들이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접촉하고 민간인 위장 및 위조 서류 소지 등으로 간첩으로 분류되었거나, 소위 "테러플리거(Terrorflieger, 공포의 비행사)"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이 조종사들은 프랑스의 게슈타포 감옥을 거쳐 1944년 4월 또는 8월, 다른 게슈타포 수감자들과 함께 짐칸에 실려 부헨발트로 이송되었으며, 5일간의 이송 과정에서 거의 음식과 물을 공급받지 못했다.[8]
나치 독일의 총력전 체제가 강화된 1943년부터는 한 번에 1,000명 단위로 수감자들이 대규모로 이송되기 시작했다. 1944년 1월 1일에는 수감자 수가 37,319명에 달했고, 다른 수용소 폐쇄에 따른 이송이 이어지면서 1945년 1월 1일에는 63,048명, 같은 해 4월 1일에는 8만 명을 넘어섰다.[44] 급격한 수감자 증가는 수용소 내 열악한 생활 환경을 더욱 악화시켰다. 수용소 철거 결정 후 마지막 이송이 시작되었고, 미국군이 도착했을 때는 약 21,000명의 수감자가 남아 있었다.[45]
수감자들은 처음에는 소규모 격리 구역에 잠시 수용되었다가 대규모 수용 구역으로 옮겨져 강제 노동 분대에 편성되었다. 부헨발트의 외부 노동 분대는 1940년 12월에는 2개(7,400명)에 불과했으나, 1945년 3월에는 107개로 늘어났다.[46]
2. 4. 해방과 그 이후


1945년 4월 4일, 미국 제89보병사단이 부헨발트의 부속 수용소인 오르드루프를 점령했다.
미군이 다가오자 1945년 4월 3일, 친위대 전국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는 수용소 철수를 결정했다. 수감자들을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송하려 했으나, 수가 너무 많아 계획은 완전히 실행되지 못했다. 4월 6일부터 11일까지 독일군은 수용소를 부분적으로 비우면서, 미군이 도착하기 전에 수천 명의 수감자들을 사망 행군으로 강제 이동시켰다.
수감자들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1941년 3월부터 수감되었던 폴란드계 엔지니어이자 단파 라디오 아마추어 무선 통신사였던 그비돈 다마진(Gwidon Damazyn)은 동료들과 함께 영화 상영실에 비밀 단파 송신기와 소형 발전기를 만들어 숨겨두었다. 4월 8일 정오, 다마진과 러시아 수감자 콘스탄틴 이바노비치 레오노프는 수감자 지하 저항 조직 지도부가 작성한 모스 부호 메시지를 송신했다.
> 연합군에게. 패튼 장군의 군대에게. 여기는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입니다. SOS. 도움을 요청합니다. 우리를 이송하려 합니다. SS가 우리를 없애려 합니다.
이 메시지는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로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다마진이 마지막 송신을 보낸 지 3분 후, 미국 제3군 사령부가 응답했다.
> KZ Bu. 버티십시오. 곧 지원군이 도착할 것입니다. 제3군 참모부.

함께 수감되었던 폴란드 수감자 테오필 비텍의 증언에 따르면, 다마진은 응답 메시지를 받고 감격에 겨워 실신했다고 한다.[15]
미군이 접근하자 바이마르의 게슈타포 본부는 수용소 관리국에 전화를 걸어 수감자를 포함한 수용소의 모든 증거를 파괴하기 위한 폭발물을 보내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당시 관리국 직원들은 이미 도망친 상태였다. 한 수감자가 전화를 받아 수용소가 이미 폭파되었으니 폭발물은 필요 없다고 거짓으로 알렸다.[16]
1945년 4월 10일, 미군 병장 릭 캐리어(Rick Carrier)가 수용소를 발견하고 상부에 보고했다.

미국 제6기갑사단 소속 미국 제3군의 미국 육군 대위 프레더릭 케퍼(Frederic Keffer)가 지휘하는 미국 제9기갑보병대대 병력이 1945년 4월 11일 오후 3시 15분에 부헨발트에 도착했다. 이 시간은 현재 정문 시계에 영구적으로 표시되어 있다. 병사들은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고, 쇠약해진 생존자들은 남은 힘을 다해 해방자들을 공중으로 던져 올리며 기뻐했다.[17] 같은 날, 미국 제83보병사단의 일부 병력은 부헨발트 복합 단지의 소규모 수용소 중 하나인 랑겐슈타인을 점령하고 2만 1천 명이 넘는 수감자들을 해방시켰다.[17] 미군은 랑겐슈타인 시장에게 수용소에 식량과 물을 공급하도록 명령하고, 20야전병원에서 긴급 의료품을 보냈다.
제3군 사령부는 1945년 4월 12일 아침, 부헨발트 수용소 통제를 위해 미국 제80사단 병력을 파견했다. 같은 날 여러 기자들이 도착했는데, 그중에는 에드워드 R. 머로도 있었다. 그의 CBS 라디오 보도는 부헨발트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 막사 하나를 보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이 거주하는 막사였습니다. 들어가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어깨에 저를 들어 올리려 했습니다. 그들은 너무 약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침대에서 일어설 수 없었습니다. 이 건물에는 한때 말 80마리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1200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다섯 명이 한 침대를 사용했습니다. 악취는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
> 의사를 불렀습니다. 그의 기록을 검토했습니다. 작은 검은 책에는 이름만 있었고, 그 이상은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했고, 무엇을 바랐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었습니다. 사망자의 이름 뒤에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세어 보았습니다. 총 242명이었습니다. 한 달 만에 1200명 중 242명이었습니다.
>
> 마당으로 나가자 한 남자가 죽어 쓰러졌습니다. 60세가 넘었을 두 사람은 화장실 쪽으로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보았지만 묘사하지 않겠습니다.
>
> -- 에드워드 R. 머로의 부헨발트 보고서 발췌 – 1945년 4월 15일.[18]
조지 S. 패튼 장군은 수용소를 직접 시찰한 후 큰 충격을 받고 격노했다. 그는 독일 국민들이 나치 정권의 만행을 직시하고 집단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인근 도시 바이마르 시장에게 시민 1,000명(주로 중상류층 남성)을 수용소로 데려오도록 명령했다. 무장한 미군 경비 하에 바이마르 시민들은 왕복 25km를 걸어서 이동하며 화장장과 나치의 잔혹 행위 증거들을 목격해야 했다. 많은 독일인들은 참혹한 광경 앞에서 외면하거나 실신했다고 전해진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 또한 1945년 4월 중순, 미국의 주요 언론인 및 편집자 그룹과 상원 원내대표 앨번 W. 바클리가 이끄는 미 의회 대표단 12명을 부헨발트로 초청하여 참상을 직접 확인하도록 했다.
종군 기자 오스마르 화이트는 화장장 문 위에 "벌레가 나를 삼키지 않으리라, 오직 불꽃이 이 몸을 태우리라. 나는 항상 열과 빛을 사랑했지…"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시가 적혀 있었다고 기록했다.[19]
2009년 6월 5일,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와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드레스덴 성과 성모 교회 방문 후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를 방문했다. 이 방문에는 수용소 생존자인 엘리 위젤과 베르트랑 헤르츠가 동행했다.[31] 부헨발트 및 미텔바우-도라 기념관 재단 소장인 볼크하르트 크니게(Volkhard Knigge) 교수가 안내를 맡았다.[32] 방문 중 엘리 위젤은 "만약 이 나무들이 말할 수 있다면"이라고 말하며,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그 속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역사의 비극적인 대조를 표현했다.[32]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큰아버지가 부헨발트의 위성 수용소인 오르드루프를 해방시킨 미국 제89사단 소속이었다는 개인적인 인연을 언급하며, 부헨발트 방문의 의미를 더했다.[31] 그는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를 방문한 최초의 현직 미국 대통령이었다.[22]
3. 구조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는 크게 다섯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구역 | 주요 시설 및 기능 |
---|---|
제1구역 | 수감자 거주 공간 |
제2구역 | 수용소 사령부 |
제3구역 | 친위대(SS) 경비대 막사 |
제4구역 | 독일 군수 산업 회사(DAW) 작업장 (오스왈트 폴 운영) |
제5구역 | 구스트로프(Güstrow) 무기 공장 작업장 |
수감자들이 생활하는 제1구역과 노동하는 제4구역 및 제5구역 주변은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또한, 일정 간격으로 설치된 감시탑에는 서치라이트와 기관총이 갖추어져 있어 수감자들을 상시 감시했다.
수용소 정문에는 Jedem das Seine|예뎀 다스 자이네de("각자에게 각자의 것을")이라는 표어가 걸려 있었다.[48]
부헨발트에 직접적인 가스실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지만, 노동 능력을 상실한 수감자들은 필르나-존넨슈타인 안락사 시설로 이송되어 가스로 살해되었다.
4. 희생자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서의 총 사망자 수는 약 56,545명으로 추산된다.[11][12][13] 이는 SS가 남긴 공식 사망 기록 33,462명을 훨씬 웃도는 수치로, 기록되지 않은 처형(총살 8,483명, 교수형 추산 1,100명)과 수용소 이송 과정에서의 사망자(추산 13,500명)를 포함한 결과이다. 수용소를 거쳐 간 총 24만 명의 수감자 중 약 24%가 사망한 셈이다.[14]
사망 원인수감자들의 주된 사망 원인은 열악한 수용소 환경으로 인한 질병이었다. 고의적인 기아 상태와 혹독한 강제 노동[9]은 수감자들의 건강을 극도로 악화시켰고, 이는 Vernichtung durch Arbeit|페어니히퉁 두르히 아르바이트de(노동을 통한 절멸) 정책에 따른 사실상의 '과로사'로 이어졌다. 영양실조와 질병 외에도 많은 수감자들이 SS 경비병들의 임의적인 폭력 행위나 나치 인체 실험의 희생자가 되었다.[9]
단순 살해도 빈번했으며, 주로 총격과 교수형 방식으로 이루어졌다.[9] 14f13 작전의 일환으로 노동 능력이 없거나 병든 수감자들은 존넨슈타인 살해 시설로 보내져 일산화탄소 가스로 살해되었다.
SS-Hauptscharführer|하웁트샤르퓌러de 마르틴 조머는 "부헨발트의 교수대"로 불릴 만큼 잔혹한 가혹 행위로 악명 높았다. 그는 수감자들을 나무에 거꾸로 매다는 스트라파도 고문을 자행했으며, 이 고문이 행해진 숲은 희생자들의 비명 소리 때문에 "노래하는 숲"이라 불렸다.[10]
소련군 포로에 대한 즉결처형도 이루어졌다. 1941년부터 1942년 사이, 드레스덴 게슈타포 장교들은 최소 1,000명의 소련군 포로를 선발하여 부헨발트로 보냈고, 이들은 목덜미에 총격을 가하는 Genickschuss|게닉슈스de 방식으로 살해되었다. 이들은 수용소 등록부에 기록되지 않아 공식 사망자 수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생존자 아르민 발터는 자신이 설치한 라디오 시설을 통해 처형 통보 텔렉스를 확인하여 총살된 소련군 포로가 8,483명에 달한다고 증언했다.[11]
부헨발트는 나치 인체 실험의 장소이기도 했다. 1942년과 1943년에는 티푸스 백신 실험이 대규모로 진행되어 729명의 수감자가 동원되었고 그중 154명이 사망했다. 독극물의 치사량을 알아내기 위해 소련군 포로 4명에게 독극물을 투여하고, 죽지 않자 교살 후 해부한 사례도 보고되었다. 또한 소이탄으로 인한 상처 치료 연고 효과를 시험하기 위해 수감자들에게 흰 인으로 심각한 화상을 입히는 실험도 자행되었다.
특정 희생자 집단
- 여성 수감자: 부헨발트에 수감된 여성은 500명에서 1,000명 사이였다. 1941년 라벤스브뤼크에서 이송된 초기 정치범 20명은 수용소 내 매춘굴에서 성적 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 이들은 여성 친위대 간수( Aufseherin|아우프제헤린de ) 1명과 함께 왔다. 1944년과 1945년에는 아우슈비츠, 라벤스브뤼크, 베르겐-벨젠 등 다른 수용소에서 더 많은 여성들이 이송되어 왔으며, 이들은 이후 죄머다, 부텔슈테트, 뮐하우젠, 고타, 겔젠키르헨, 에센, 리프슈타트, 바이마르, 마그데부르크, 페니히 등 여러 여성 위성 수용소로 다시 보내졌다. 에센에서 온 여성 수용소장( Blockführerin|블록퓌러린de ) 프란치스카 호엔게스베르크가 여성 막사를 감독했다. 악명 높은 일제 코흐는 "부헨발트의 암캐"로 불렸으나, 실제로는 수용소 내 공식 직책이나 간수 역할을 맡지 않았다.[4] 부헨발트 전체 하위 수용소 시스템에서는 총 530명 이상의 여성이 간수로 복무했지만, 부헨발트 본 수용소에서 직접 복무하거나 훈련받은 여성은 22명에 불과했다.
- 연합군 포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 포로를 강제 수용소로 보내는 것은 이례적이었으나, 부헨발트에는 1944년 8월 20일부터 약 2개월간 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자메이카 출신 조종사 168명이 수감되었다.[5][6][7] 이들은 독일 점령 하 프랑스에서 비행기 추락 후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접촉했거나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위조 서류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분류되었거나, 또는 "Terrorflieger|테러플리거de"(공포의 비행사)로 간주되어 제네바 협약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게슈타포 감옥을 거쳐 부헨발트로 이송되었다. 이송 과정은 5일이나 걸렸으며 음식과 물이 거의 제공되지 않았다.[8]
수감자 구성의 변화1937년 7월 개소 당시 수감자는 주로 정치범 929명이었으나, 형사범, 부랑자 등이 추가되어 1939년 1월에는 11,028명으로 늘었다.[40][41] 1938년 11월 수정의 밤 사건 때는 체포된 유대인들이 대량 이송되어 일시적으로 1만 8천 명을 넘기도 했으나, 이들 대부분이 곧 석방되면서 수감자 수는 다시 1만 명 전후로 돌아왔다.[42]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43년까지 수감자 수는 1만 명 내외를 유지했으나,[43] 총력전 체제가 강화되면서 1943년부터 수감자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1944년 1월에는 37,319명, 1945년 1월에는 63,048명, 그리고 1945년 4월에는 8만 명을 넘어섰다.[44] 이는 폐쇄된 다른 수용소에서의 이송이 잇따랐기 때문이며, 수용소 환경은 더욱 열악해졌다. 해방 직전 수용소 철거 결정으로 마지막 이송이 시작되었고, 미국군 도착 당시에는 약 21,000명의 수감자가 남아 있었다.[45]
초기에는 독일인 수감자가 대부분이었으나, 오스트리아 합병(1938) 후 오스트리아인, 체코슬로바키아 합병(1939) 후 체코인이 이송되기 시작했다. 전쟁 발발 후에는 독일 점령 하 유럽 각국의 사람들이 보내졌으며, 독소전쟁 개시 후인 1941년 10월부터는 소련군 포로가 대거 이송되어 최종적으로 수용소 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게 되었다.[47] 수감자들은 이송 후 잠시 소수용 구역에 격리되었다가 대수용 구역으로 옮겨져 강제 노동 분대에 편성되었다. 외부 노동 분대는 1940년 12월 2개(7,400명 배속)에서 1945년 3월 107개로 늘어났다.[46]
5. 전후 처리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후,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 규명과 희생자 추모를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수용소 운영에 관여했던 SS 관계자들에 대한 전범 재판이 진행되었으며, 동시에 수용소 부지를 중심으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 사업이 추진되었다.
5. 1. 부헨발트 재판

1947년 미국 군사재판소에서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의 SS 가해자 30명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에는 부헨발트가 위치한 SS 지구를 감독했던 고위 SS 및 경찰 지도자 요시아스 발덱 피르몬트 공작(Josias Erbprinz zu Waldeck und Pyrmont)과 나치 인체 실험을 담당했던 많은 의사들이 포함되었다. 피고인 대부분은 유죄 판결을 받았고, 22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사형이 집행된 것은 9명에 불과했으며, 1950년대 중반까지 일제 코흐를 제외한 모든 가해자들이 석방되었다. 일제 코흐는 이후 서독 법원에서 다시 재판을 받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60년대에는 독일 법원에서 추가적인 가해자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5. 2. 기념 사업

오늘날 부헨발트 수용소 부지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수용소 역사에 관한 상설 전시가 있는 박물관이 있으며, 부헨발트와 미텔바우-도라 기념관 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이 재단은 미텔바우-도라의 수용소 기념관도 관리한다.[26]
수용소 해방 직후, 부헨발트 수감자들은 나무로 임시 기념비를 세웠다. 이후 1945년 8월부터 1950년 3월까지 부헨발트 부지는 NKVD 특별수용소 2호로 사용되었으며, 소련의 비밀경찰은 이곳에 전 나치 인사들과 반공산주의 반체제 인사들을 수감했다. 소련 기록에 따르면 28,455명이 구금되었고 그중 7,113명이 사망했다. NKVD 수용소가 폐쇄된 후 수용소의 대부분은 파괴되었다.
사망자들을 기리는 공식적인 기념비는 1958년 독일 민주 공화국(GDR) 정부에 의해 집단 매장지 근처에 세워졌다. 1958년 9월 14일 동독 총리 오토 그로테볼(Otto Grotewohl)이 참석한 가운데 낙성식이 거행되었다.[20] 수용소 내부에는 최초의 임시 기념비가 있던 자리에 스테인리스 스틸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 표면은 일년 내내 인체의 체온인 37°C로 유지된다.[21][22]
부헨발트, 작센하우젠, 라벤스브뤼크에 세워진 동독의 세 국가 기념관은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정권 하에서 동독의 기억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23] 이 기념관들은 문화부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동독의 정체성 확인과 정당성 확보의 장소로 기능했다.[24] 특히 강제 수용소 해방 기념식 등에서 당시 동독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기념관을 활용하는 모습이 나타났는데, 이는 공식 당 기관지인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관련 연구에서도 분석된 바 있다.[25]
2009년 6월 5일,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와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를 방문했다. 이 방문에는 수용소 생존자인 엘리 위젤과 베르트랑 헤르츠가 동행했다.[31] 부헨발트와 미텔바우-도라 기념관 재단의 소장인 폴크하르트 크니게(Volkhard Knigge)가 안내를 맡았다.[32] 오바마 대통령은 방문 중 자신의 큰아버지가 부헨발트의 위성 수용소 중 하나인 오르드루프 수용소를 해방시킨 미 제89보병사단 소속이었다는 개인적인 인연을 언급하기도 했다.[31] 오바마는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를 방문한 최초의 재임 중인 미국 대통령이었다.[22]
6. 관련 인물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다룸)
6. 1. 가해자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의 초대 소장은 1937년 8월 1일부터 1941년 7월까지 SS-상급돌격대장(Obersturmbannführer) 카를 오토 코흐였다. 그는 수용소 운영 기간 동안 잔혹한 행위로 악명을 떨쳤다. 1940년 2월, 코흐는 수감자들에게 혹독한 환경 속에서 실내 승마장 건설을 강요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의 수감자가 목숨을 잃었다. 코흐는 이후 부패, 횡령, 암시장 거래, 수감자 노동 착취, 살인 교사 등의 혐의로 나치 당국에 의해 기소되어 부헨발트에 투옥되었다. 결국 그는 자신과 SS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죄목으로 1945년 4월 5일 총살형에 처해졌다.카를 코흐의 두 번째 부인인 일제 코흐는 공식적인 직책은 없었으나[4], "부헨발트의 마녀"(Die Hexe von Buchenwald|디 헥세 폰 부헨발트de)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잔혹함으로 유명했다. 남편 코흐가 건설한 실내 승마장에서 아침마다 수감자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승마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기소되었으나 SS 법정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종전 후 미군에게 체포되어 다하우 군사위원회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이후 감형되었다가 석방 후 서독 당국에 의해 다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67년 9월 아이히하흐 교도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42년부터 1945년 해방 직전까지 수용소의 두 번째 소장은 헤르만 피스터였다. 그는 전후 다하우 재판에서 전쟁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이 집행되기 전인 1948년 9월 28일 란츠베르크 교도소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수용소 내에서는 가혹 행위와 살해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SS-하웁트샤르퓌러였던 마르틴 조머는 "부헨발트의 교수대"로 불렸으며, 수감자들을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고문하는 등 잔혹한 행위로 악명이 높았다.[10] 그는 오스트리아인 사제 오토 노이루러와 마티아스 슈판랑을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도록 명령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수용소 소속 의사들은 비인간적인 인체 실험을 자행했다. 발데마르 호펜과 엘빈 딘-슐러 등이 주도한 실험에는 티푸스 백신 개발을 명목으로 수감자들에게 병원균을 주입하는 실험이 포함되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수감자들이 사망했다. 또한 독극물의 치사량 확인 실험, 소이탄으로 인한 화상 치료제 개발을 위한 실험 등 잔인한 실험들이 자행되었다.
이 외에도 부헨발트 운영에 관여하며 수감자 학살 및 학대에 책임이 있는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 | 계급 | 주요 직책 및 행적 |
---|---|---|
카를 오토 코흐 | SS 대령 | 초대 소장 (1937년 7월 ~ 1941년 12월). 부정부패 혐의로 SS에 의해 처형됨. |
헤르만 피스터 | SS 상급대령 | 2대 소장 (1941년 12월 ~ 1945년 4월). 전후 사형 선고 후 옥중 사망. |
일제 코흐 | - | 초대 소장 카를 코흐의 아내. "부헨발트의 마녀". 전후 무기징역 선고 후 자살. |
발데마르 호펜 | 친위대 대위 | 수용소 군의관. 인체 실험 주도. |
헬만 플로르슈테트 | 친위대 대령 | 감시 블록 사령관. 이후 마이다네크 강제 수용소 소장. |
오토 포슈너 | 친위대 소좌 | 간수 대대장. 이후 미텔바우-도라 강제 수용소, 카우페링 강제 수용소 소장. |
마르틴 조머 | 하웁트샤르퓌러 | "부헨발트의 교수대". 잔혹한 고문 자행. |
안톤 베르크마이어 | 친위대 상사 | - |
미하엘 레트비츠 | 친위대 대위 | - |
프리드리히 카를 빌헬름 | 친위대 소위 | - |
한스-테오도어 슈미트 | 친위대 대위 | 간수 대대 부관, 소장 부관. |
엘빈 딘-슐러 | 친위대 소좌 | 수용소 소속 의사. 인체 실험 관여. |
6. 2. 피해자
수용소 경험을 글로 남긴 생존자 중에는 호르헤 셈프룬과 에른스트 비히어트가 있다. 셈프룬은 그의 저서 ''멋진 일요일!''(Quel beau dimanche!fra)에서 괴테와 레옹 블룸과의 가상 대화를 묘사했으며, 비히어트는 1939년에 집필하여 1945년에 출판된 ''죽음의 숲''(Der Totenwalddeu)에서 괴테를 다루었다. 학자들은 수감자들이 예술, 특히 괴테의 작품을 통해 어떻게 수용소 생활의 어려움에 대처했는지 연구해왔다.[27] 화가 레옹 델라브르는 수용소 생활의 다양한 장면과 함께, 자신이 글을 쓰곤 했던 괴테의 떡갈나무를 스케치로 남겼다.[28] 수용소에서 탈출한 소수의 생존자 중 한 명인 벨기에인 에드몽 반디부아는 자신의 경험을 "나는 나치 사형 수용소에서 탈출했다"(I escaped from a Nazi Death Campeng, 2015)라는 책으로 출간했다.엘리 위젤은 그의 회고록 ''밤''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포함한 부헨발트에서의 경험을 상세히 기록했다.[29]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지도자였던 자크 뤼세이랑 역시 체포 후 부헨발트로 보내졌으며, 그의 자서전에서 수용소에서의 시간을 묘사했다.[30]
2009년 6월 5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그리고 부헨발트 생존자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과 함께 수용소 옛터를 방문했다.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는 다양한 배경의 인물들이 수감되었다. 주요 수감자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신분/직업 | 주요 활동/수감 이유 | 결과/특이사항 |
---|---|---|---|
브루노 베텔하임 | 정신과 의사 | 유대인 | 생존 |
레옹 블룸 | 프랑스 전 총리 | 유대인 | 생존 |
디트리히 본회퍼 | 신학자, 루터파 목사 | 반나치주의자 | 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로 이송 후 1945년 사형 |
에두아르 달라디에 | 프랑스 전 총리 | 생존 | |
마르셀 블록 | 프랑스 항공기 제조사(다쏘 에비아시옹) 사장 | 유대인, 나치 협력 거부 | 생존 |
모리스 알부바크스 | 프랑스 사회학자 | 사회주의자 | 1945년 수용 중 사망 |
쿠르트 헤르츠슈타르크 | 쿠르타 계산기 발명가 | 유대인, 기술력 인정받아 특별 대우 | 생존 |
레옹 주오 | 프랑스 노동조합 운동가 | 반나치주의자 | 생존, 전후 노벨 평화상 수상 |
케르테스 임레 | 헝가리 작가 | 유대인 | 생존, 전후 노벨 문학상 수상 |
마팔다 디 사보이아 | 이탈리아 공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딸, 필리프 폰 헤센의 아내) | 이탈리아 왕국의 연합국 항복 후 수감 | 1944년 연합군 공습으로 사망 |
유라 조이퍼 | 오스트리아 언론인, 작가 | 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 | 1939년 사망 |
에른스트 텔만 | 독일 공산당 의장 | 반나치주의자 | 1944년 살해됨 |
엘리 위젤 | 루마니아 태생 작가 | 유대인 | 생존, 전후 노벨 평화상 수상 |
칼 마이어 | 군인 | 반나치 전향 후 파리에서 체포 | 1945년 수용 중 사망 |
호리아 시마 | 루마니아 파시즘 정당 철위대 지도자 | 이온 안토네스쿠 정권에 대한 쿠데타 실패 후 망명, 수감 | 생존 |
호르헤 셈프룬 | 스페인 작가 | 전 스페인 공산당원, 파리에서 체포 | 생존, 수용소 경험 저술 (아, 얼마나 아름다운 일요일인가!, 부헨발트의 일요일) |
앙리 마스페로 | 프랑스 중국학자 | 1945년 해방 직전 사망 | |
헬베르트 샤이베 | 독일 공산당원 | 생존, 전후 동독 국가인민군 공군 사령관 역임 |
7. 논란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의 운영과 관련하여 몇 가지 논란이 제기되었다. 특히, 수용소 내에서의 학살 방식과 관련된 초기 증언과 이후의 역사적 연구 결과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여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7. 1. 가스실 존재 여부
종전 직후인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연합군 검찰은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가스실을 이용한 대량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했다.[49] 당시 재판에서는 가스실 존재를 뒷받침하는 다음과 같은 증언들이 나왔다.- “1944년 부헨발트에서는 수용자들을 가스실에 넣기 위해 철도가 연장되었고, 시체는 화장로에 넣어졌다.”[50]
- “가스실은 다공질 재료의 기둥으로 지탱되었고, 그로 인해 가스가 스며들었다. 모두 호화로워서 건축가들이 기꺼이 구상하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으며, 미적 감각이 모두 담겨 있었다. 수용소에서 애정을 가지고 제작된 유일한 부분이었다.”[49]
- “천장에는 샤워 헤드가 17개 설치되어 있었고, 샤워실에 들어가기 전에 모두에게 수건과 작은 비누가 주어졌다. 가스가 바닥에 쏟아졌기 때문에 희생자는 아무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것은 엄밀한 과학에 근거하여 제작되었으며, 악마조차 이렇게 잘 계획할 수 없었다.”[51]
그러나 이러한 초기 증언들과는 달리, 현재는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 가스실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52] [53] 부헨발트 수용소 기념관 공식 웹사이트에도 가스실을 이용한 학살에 대한 설명은 없으며,[54] 종전 직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부헨발트에서 가스실을 통한 대량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중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부헨발트에 수용되었던 폴 라시니에는 전후 석방된 후, 일부 수용자들의 증언이 과장되거나 거짓되었다고 비판하며 부헨발트에는 가스실이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55]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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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chenwald Concentration Camp, 1937–1945
https://www.buche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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