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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르보카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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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레르보카쥬 전투는 1944년 6월 13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영국군 제7기갑사단과 독일군 제101SS 중전차대대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영국군은 캉을 점령하기 위한 '퍼치 작전'의 일환으로 빌레르보카쥬를 점령하려 했지만, 미하엘 비트만이 이끄는 독일군의 기습적인 반격에 직면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이 전투는 영국군의 캉 공략 계획에 차질을 빚게 했으며, 비트만의 활약이 과장되게 선전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전투 결과 영국군은 많은 장비를 손실했고, 독일군은 전략적 이점을 얻었으며, 이후 빌레르보카쥬는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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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르보카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전투 개요
전투명빌레르보카쥬 전투
일부퍼치 작전
불에 타고 손상된 집 앞에 잔해가 흩뿌려진 채로 있는 탱크. 탱크는 부분적으로 포장 도로 위에, 부분적으로 도로 위에 있다.
제5왕립기마포병대 소속 패디 빅토리 대위가 지휘하는 크롬웰 관측 전차. 미하엘 비트만이 공격한 12대 이상의 차량 중 하나이다.
날짜1944년 6월 13일
장소프랑스 칼바도스 빌레르보카쥬
교전 세력
지휘관
영국조지 어스킨
윌리엄 힌드 (군인)
독일프리츠 바이에를라인
하인츠 폰 베스터른하겐
병력 규모
영국1개 여단 전투단
약 60대 전차
독일2개의 임시 전투단
중전차 대대의 일부
31–41대의 전차
군대
영국제2군
* 제7기갑사단
독일기갑교도사단
* 제101SS 중전차대대
피해 규모
영국약 217명의 사상자
23–27대의 전차
독일8–15대의 전차 손실, 그 외 손상
민간인 사상자 다수

2. 배경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발동되었다. 프랑스에 상륙한 연합군은 순차적으로 내륙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연합군의 작전 계획에는 조기에 확보해야 할 중요 거점이 몇 곳 있었으며, 이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캉 전면에서는 독일군의 기갑교도사단 등이 강력한 전선을 형성하고 있어 정면 공격 시 막대한 손해가 예상되었다. 이 방면을 담당하는 영국군 제21군 집단 사령관 버나드 몽고메리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활약하며 "사막의 쥐"로 불린 정예 제7기갑사단으로 기갑교도사단의 측면을 우회하여 캉 시를 공격하려 했다. 이 작전은 "퍼치 작전"으로 명명되었다.

D-데이 3개월 전, 벨기에에서 제1SS 기갑사단의 제1SS 기갑 연대 제13중대는 제101SS 중전차 대대에 합류했다. 이 대대는 티거 I 전차를 핵심으로 편성되었으며, 그 타격력으로 "소방대" 역할을 기대받았다. 대대장은 하인츠 폰 베스터하겐/하인츠 폰 베스터하겐de SS 소령이 맡았으며, 그의 휘하에는 동부 전선에서 전차 100대를 격파한 미하엘 비트만 SS 중위을 시작으로 발타자르 볼, 헬무트 벤도르프, 카를 메비우스, 위르겐 브란트 등 전차병 에이스가 다수 배치되어 있었다.

D-데이 당시, 제101SS 중전차 대대는 프랑스 북부의 피카르디 근교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요격을 위해 노르망디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공권이 연합군에게 넘어가 수송 열차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력 주행으로 노르망디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띄지 않도록 중대별로 분진했지만, 연합군의 항공 공격으로 적지 않은 차량을 잃었다. 6월 12일에는 빌레르보카쥬 북동쪽에 제2중대가 도착했으며, 제1중대는 더 북쪽에 위치했다.

6월 13일 오전 8시, N175 도로를 진군하던 제7기갑사단의 선봉(여단 규모 부대)이 도중에 있던 빌레르 보카주를 점령하고 잠시 멈춰 휴식을 취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제101SS 중전차 대대 제2중대는 정찰을 통해 이를 감지했다. 다만, 아마도 이 시점에서는 중대장 비트만은 아직 적이 대부대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소규모 선행 부대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그는 정찰(일종의 장교 정찰)을 겸해 단독으로 출격하기로 했다.

2. 1.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퍼치 작전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오버로드 작전)을 개시하여 독일 점령 하의 프랑스 해방을 위한 서막을 열었다. 영국군 제3보병사단은 소드 해변에 상륙하여 내륙의 을 목표로 진격했으나, 제21기갑사단을 비롯한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1944년 6월 12일 연합군과 추축국의 배치, 영국군의 카몽 갭을 통한 측면 공격과 이를 지원하는 미국 제1보병사단의 진격을 보여줌


연합군은 캉을 조기에 확보하기 위해 작전 페르치를 수립했다. 이 작전은 영국군 제21군 집단 사령관 버나드 몽고메리가 지휘했으며,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사막의 쥐"라는 별명으로 용맹을 떨친 제7기갑사단이 독일군 방어선의 측면을 우회하여 캉을 포위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캉 전면에는 독일군의 기갑교도사단 등이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어 정면 공격으로는 큰 피해가 예상되었다.

D-데이 3개월 전, 벨기에에서 제1SS 기갑사단의 제1SS 기갑 연대 제13중대는 제101SS 중전차 대대에 합류했다. 이 대대는 티거 I 전차를 주력으로 편성되어 "소방대"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대대장은 하인츠 폰 베스터하겐/하인츠 폰 베스터하겐de SS 소령이 맡았으며, 동부 전선에서 전차 100대를 격파한 미하엘 비트만 SS 중위를 비롯한 유능한 전차병들이 다수 배치되어 있었다.

D-데이 당시, 제101SS 중전차 대대는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근교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노르망디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공권이 연합군에게 넘어가 자력 주행으로 이동해야 했고, 연합군의 항공 공격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6월 12일에는 빌레르보카쥬 북동쪽에 제2중대가 도착했고, 제1중대는 더 북쪽에 위치했다.

6월 13일 오전 8시, N175 도로를 따라 이동하던 제7기갑사단의 선봉 부대가 빌레르보카주를 점령하고 휴식을 취했다. 제101SS 중전차 대대 제2중대는 정찰을 통해 이를 감지했으며, 중대장 비트만은 단독으로 정찰에 나섰다.

2. 2. 독일군 제101 SS 중전차대대

독일군은 제101 SS 중전차대대를 투입하여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다. 이 대대는 티거 I 전차를 주력으로 운용했으며, "소방대" 역할을 수행하며 연합군의 진격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대대장 하인츠 폰 베스터하겐/Heinz von Westernhagen영어 SS 소령 휘하에는 미하엘 비트만 SS 중위를 비롯한 뛰어난 전차 에이스들이 포진해 있었다.

D-데이 당시, 제101SS 중전차 대대는 프랑스 북부의 피카르디 근교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노르망디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공권이 연합군에게 넘어가 자력 주행으로 노르망디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6월 12일에는 비레르 보카주 북동쪽에 제2중대가 도착했으며, 제1중대는 더 북쪽에 위치했다.

2. 3. 카몽 갭

1944년 6월 6일(D-Day) 노르망디 상륙오버로드 작전이 개시된 이후, 연합군은 내륙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연합군의 작전 계획에는 조기에 확보해야 할 중요 거점 중 하나로 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캉 전면에서는 독일군의 기갑교도사단 등이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은 포위 기동을 통해 도시를 포위하는 더 큰 규모의 공격으로 작전 페르치를 수정했고, 6월 12일 캉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 공격이 시작되었다. 오른 강 동쪽에서는 제51(하일랜드)보병사단의 두 개 여단이 제21기갑사단에 의해 저지되었고, 6월 13일 공격은 중단되었다. 캉 서쪽에서는 제30군단이 틸리쉬쉬르쇠르 마을 남쪽으로 진격했지만, 기갑교도사단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독일군은 제30군단의 오른쪽 측면에서 캉 포위를 저지했다. LXXXIV 군단의 예비군을 포함한 5개의 독일 ''캄프그루페''(전투단)가 파괴되면서, 제352보병사단의 잔존 병력만이 트레비에르에서 아지까지의 전선을 방어하게 되었다. 6월 9일/10일 밤, 미군의 공격으로 사단의 좌측 측면이 무너지자, 제352보병사단은 생로로 후퇴했다. 이로 인해 판저레어 사단과 카몽 레벙테 근처의 독일군 사이에 약 12.07km의 틈(카몽 갭)이 발생했고, 해당 지역에는 제17SS 기갑척탄병 사단의 정찰대대만이 존재했다.

텍스트에 설명된 대로 카몽 갭과 영국-미국군의 진격에 대한 다이어그램
6월 9일과 10일 밤 동안 독일 제352보병사단은 생로 방향으로 퇴각하여 독일군 방어선에 넓은 틈을 만들었고, 이는 경무장 병력만으로 방어되었습니다. 6월 12일 영국 제7기갑사단은 빌레르보카쥬와 그 너머의 능선을 향해 이 틈새를 통과했고, 미국 제1 및 제2 보병사단은 이를 지원하기 위해 자체적인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독일군은 제2기갑사단으로 이 틈을 메울 계획이었으나, 6월 10일에는 대부분의 병력이 아미앵과 알랑송 사이에 위치해 있었고, 6월 13일이 되어서야 충분한 병력이 도착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기갑부대 대장 한스 프라이헤어 폰 푼크, XLVII ''기갑군단'' 사령관은 고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사단 정찰대대를 카몽으로 급파했다.

마일스 뎀프시 중장은 제7기갑사단에게 틈새를 통과하여 빌레르보카쥬를 점령하고, 판저레어 사단의 좌측 측면을 위협하라고 명령했다. 영국군의 목표는 빌레르보카쥬 동쪽 약 2.57km 떨어진 능선(213 고지)이었다. 뎀프시는 이를 점령하면 판저레어 사단이 철수하거나 포위될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제50 (노섬브리아) 보병사단과 제7기갑사단의 대부분의 보병 여단은 틸리 쉬르 쇠 주변의 판저레어 사단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고, 미국 제1보병사단과 미국 제2보병사단은 V 미국 군단에 소속되어 진격을 계속했다.

제7기갑사단은 6월 12일 아침, 틸리 쉬르 쇠를 향해 공격을 가했다. 12:00에 조지 에르스킨 소장은 제22기갑여단에게 즉시 틈새를 통과하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사단 정찰 연대인 제8왕립 아일랜드 후사르는 여단과 사단의 나머지 병력을 위한 경로를 정찰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부대는 약 16:00에 트룽기를 출발했다. 4시간 후 주력 부대는 약 19.31km의 무저항 진격 끝에 리브리 근처에 도착했고, 마지막 약 9.66km는 독일군이 점령한 영토를 통과했다. 리브리에서 판저레어 사단 호위대의 대전차포에 의해 선두 크롬웰 전차가 파괴되면서 2시간 동안 전투가 벌어졌다. 목표에 대한 독일군의 오해를 유도하기 위해 리브리 북쪽 라 물로티에 부근에 도착한 힌데는 야간 정지를 명령했다. 제11(프린스 알버트 오운) 후사르는 우측 측면에서 저항을 받지 않았고 카몽 근처에서 미국 제1보병사단과 접촉했다. 좌측 측면에서 제8 후사르 A 중대 3개 소대는 약 3.22km 미만의 판저레어 사단 병력을 발견했고, 선두 전차 2대가 대전차포에 의해 격파되면서 소대장인 H. 탤벗 하비 중위가 그의 소대원 6명과 함께 사망했다.[1][2]

D-데이 3개월 전, 벨기에에서 제1SS 기갑사단의 제1SS 기갑 연대 제13중대는 제101SS 중전차 대대에 합류했다. 이 대대는 티거 I 전차를 핵심으로 편성되었으며, 제공권이 연합군에게 넘어가 수송 열차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력 주행으로 노르망디로 향했다. 6월 12일에는 비레르 보카주 북동쪽에 제2중대가 도착했으며, 제1중대는 더 북쪽에 위치했다.

3. 양측의 전력

제7 기갑 사단 예하 부대로 구성된 영국군은 제8 킹스 로열 아이리쉬 후사르 연대와 제4 런던 예오메너리 연대가 빌레르보카쥬 점령을 담당했다. 제4 런던 예오메너리 연대의 경우, 교전 당시 A 중대는 고지 213에, 사령부 및 B, C 중대는 시가지에, D 중대는 시가지 출구에 각각 위치해 있었다.

제7 퀸스 로열 연대 제1대대와 제5 왕립 전차 연대는 시가지 서쪽 N175 도로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제5 왕립 기마 포병 연대는 제4 런던 예오메너리 연대와 함께 빌레르보카쥬 점령을 담당했으며, 대전차포 및 자주포를 분산 배치했다. 중대 규모의 보병으로 구성된 제1 라이플 여단은 제5 왕립 전차 연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제101SS 중전차 대대(Schwere-SS-Panzer-Abteilung .101)는 제2 중대가 미하엘 비트만 휘하의 티거 I 전차 5량을 이끌고 이른 아침 고지 213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비트만은 단독으로 선행 출격하여 빌레르보카쥬 남쪽으로 이동했다. 제1 중대는 카를 메비우스 휘하의 티거 I 전차 6량으로 증원 부대로 참가했다. 장갑교도사단(Panzer-Lehr-Division)은 4호 전차 14량을 이끌고 구원 요청을 받아 증원 부대로 참가했다.

3. 1. 영국군

영국군은 제7 기갑 사단 예하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8 킹스 로열 아이리쉬 후사르 연대와 제4 런던 예오메너리 연대가 빌레르보카쥬 점령을 담당했다. 제4 런던 예오메너리 연대의 경우, 교전 당시 A 중대는 고지 213에, 사령부 및 B, C 중대는 시가지에, D 중대는 시가지 출구에 각각 위치해 있었다.

제7 퀸스 로열 연대 제1대대와 제5 왕립 전차 연대는 시가지 서쪽 N175 도로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제5 왕립 기마 포병 연대는 제4 런던 예오메너리 연대와 함께 빌레르보카쥬 점령을 담당했으며, 대전차포 및 자주포를 분산 배치했다. 중대 규모의 보병으로 구성된 제1 라이플 여단은 제5 왕립 전차 연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3. 2. 독일군

제101SS 중전차 대대(Schwere-SS-Panzer-Abteilung .101)는 제2 중대가 미하엘 비트만 휘하의 티거 I 전차 5량을 이끌고 이른 아침 고지 213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비트만은 단독으로 선행 출격하여 빌레르보카쥬 남쪽으로 이동했다. 제1 중대는 카를 메비우스 휘하의 티거 I 전차 6량으로 증원 부대로 참가했다. 장갑교도사단(Panzer-Lehr-Division)은 4호 전차 14량을 이끌고 구원 요청을 받아 증원 부대로 참가했다.

4. 전투 계획

제4 런던 예오먼리 연대(샤프슈터스)(제4 CLY)는 제1대대 라이플 여단 소대와 함께 빌레르보카쥬를 지나 포인트 213의 능선에서 가장 높은 지점을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제1/7 퀸스 로열 연대(웨스트 서리)가 뒤따라 마을을 점령할 것이며, 제5 로열 전차 연대(제5 RTR)와 라이플 여단 소대는 빌레르보카쥬 남서쪽에 있는 메종셀-펠베이의 고지를 점령할 예정이었다. 노퍽 예오먼리의 제260 대전차 포대는 17파운더 SP 아킬레스 자주 대전차포로 제4 CLY와 제5 RTR 사이의 간격을 막을 것이었다. 제5 왕립 기마 포병 연대(제5 RHA)는 섹스턴 자주포와 함께 나머지 여단 그룹을 지원했다. 제5 RHA와 여단 그룹 전술 사령부는 아메-쉬르-세울에 설치되었다. 두 척의 기병 연대는 판처-레어 사단에 대항하여 측면을 방어하고 진격선 양쪽의 독일군 진지를 발견할 예정이었다. 제131 보병 여단은 제1 로열 전차 연대(제1 RTR)와 제1/5, 제1/6 퀸스와 함께 리브리를 확고한 기지로 유지할 예정이었다.

''SS상급집단지도자'' 제프 디트리히 사령관은 유일한 예비대인 제101 SS 중전차 대대를 판처-레어 사단과 제12 SS-판처 사단 뒤 빌레르보카쥬 지역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카몽 갭으로 진격하려는 시도에 대한 대비였다. 제101 SS 중전차 대대는 보베에서 5일간의 운전을 거쳐 6월 12일에 노르망디에 도착했다. 이 대대는 45대의 타이거 I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보베에서 출발하는 동안 기계적 고장으로 인해 6월 13일까지 약 17대만이 전선에 도착했다. 일부 지원 차량도 베르사유 근처에서 공습을 받아 손상되었다. 제1중대는 빌레르보카쥬 북동쪽 9km 지점으로 이동했고, 제2중대는 빌레르보카쥬 능선의 포인트 213 바로 남쪽으로 이동했으며, 제3중대는 팔레즈 근처에서 뒤따랐다. 제2중대는 14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기계적 신뢰성이 떨어져 6월 13일에는 6대의 타이거만 있었다. 빌레르보카쥬 주변 지역은 6월 12/13일 밤에 심한 해군 포격에 시달렸고 제2중대는 세 번이나 이동했다. 중대는 아침에 기계 정비를 계획했다.

제2 중대장 미하엘 비트만은 단독으로 선행 출격하기로 결정했지만, 그의 205호 전차는 고장으로 인해 222호 전차(212 또는 231호 전차라는 설도 있음. 212, 231은 당시 작전이 불가능했다는 말도 있음)에 탑승하여 오랫동안 함께 해온 동료인 발타자르 볼을 포수로 불렀다. (비트만이 212호 전차에 탑승했을 경우, 212호 전차의 원래 전차장인 볼이 포수로 이동했을 것이지만, 볼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단독으로 출격한 비트만은 시가지 남쪽으로 우회했다. 영국군의 대열을 분단하여 중대의 다른 전차와 협격하는 것이 그의 작전이었다. 이 때문에 중대의 다른 전차는 비트만의 교전 개시와 동시에 고지 213으로 공격을 가할 예정이었다.

4. 1. 영국군

제4 런던 예오먼리 연대(샤프슈터스)(제4 CLY)는 제1대대 라이플 여단 소대와 함께 빌레르보카쥬를 지나 포인트 213의 능선에서 가장 높은 지점을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제1/7 퀸스 로열 연대(웨스트 서리)가 뒤따라 마을을 점령할 것이며, 제5 로열 전차 연대(제5 RTR)와 라이플 여단 소대는 빌레르보카쥬 남서쪽에 있는 메종셀-펠베이의 고지를 점령할 예정이었다. 노퍽 예오먼리의 제260 대전차 포대는 17파운더 SP 아킬레스 자주 대전차포로 제4 CLY와 제5 RTR 사이의 간격을 막을 것이었다. 제5 왕립 기마 포병 연대(제5 RHA)는 섹스턴 자주포와 함께 나머지 여단 그룹을 지원했다.

4. 2. 독일군

제프 디트리히 상급대장은 카몽 갭으로 진격하려는 영국군을 저지하기 위해 제101 SS 중전차 대대를 빌레르보카쥬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이 대대는 타이거 I 전차 45대를 보유했으나, 기계적 문제와 베르사유 근처에서의 연합군 공습으로 인해 6월 13일에는 17대만이 전선에 도착했다.

제1중대는 빌레르보카쥬 북동쪽 5.6마일 지점에, 제2중대는 빌레르보카쥬 능선의 213 고지 바로 남쪽에 배치되었다. 제3중대는 팔레즈 근처에 있었다. 제2중대는 14대의 전차를 보유했지만, 6월 13일에는 6대만이 가동 가능했다. 6월 12/13일 밤, 빌레르보카쥬 주변은 심한 해군 포격을 받았고, 제2중대는 세 번이나 이동한 후 아침에 기계 정비를 계획했다.

미하엘 비트만은 단독 선행 출격을 결정했으나, 그의 전차 고장으로 발타자르 볼을 포수로 하는 다른 전차에 탑승했다. 비트만은 영국군 대열을 분단하여 다른 전차와 협공할 계획이었다.

5. 전투 경과

제2 중대장 미하엘 비트만은 단독으로 선행 출격하기로 결정했지만, 그의 205호 전차는 고장으로 인해 222호 전차(212 또는 231호 전차라는 설도 있음. 212, 231은 당시 작전이 불가능했다는 말도 있음)에 탑승하여 오랫동안 함께 해온 동료인 발타자르 볼을 포수로 불렀다.



단독으로 출격한 비트만은 시가지 남쪽으로 우회했다. 영국군의 대열을 분단하여 중대의 다른 전차와 협격하는 것이 그의 작전이었다. 이 때문에 중대의 다른 전차는 비트만의 교전 개시와 동시에 고지 213으로 공격을 가할 예정이었다.

오전 9시, 비트만의 티거는 공격을 시작했다. 빌레르보카쥬 남쪽에서 보카쥬 (노르망디 지방 특유의 생울타리)를 넘어 기습을 가하여, 공격 시작과 동시에 3대의 전차 (셔먼 파이어플라이 1대, 크롬웰 전차 2대)를 격파했다. 소총병과 장갑차가 반격했지만, 저지할 수 없었다. 그 후, 동쪽의 고지 213 방면으로 보카쥬를 엄폐물로 삼아 이동하면서, 가로변의 차량 행렬을 공격하여 9대의 반궤도 장갑차, 4대의 카든 로이드 캐리어, 2문의 6파운더 대전차포를 격파했다. 더욱 진격하여 3대의 스튜어트 경전차, 1대의 하프트랙을 격파했고, 레모니아 농장(Lemonnier farm) 부근에서 크롬웰 전차 4대 중 3대를 격파했다(고지 213으로 향하지 않고 공격했다는 설도 있다. 이 경우, 고지 213을 공격한 제2중대와 합류하지 않고 시가지로 돌입하게 된다). (15분도 채 안 되어 총 13~14대의 전차, 2문의 대전차포, 13~15대의 수송 차량이 제2중대에 의해 격파되었고, 그 대부분은 비트만에 의한 것이었다[5][6].)

오전 10시, 고지 213에서는 제2중대의 다른 전차가 제4 런던 자원 기병 연대 A중대에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제1/제7 퀸스 로열 연대 및 제5 왕립 전차 연대에 빌레르보카쥬로의 돌입을 명령했다. 고지 213의 제4 연대 A중대를 거의 괴멸시킨 비트만과 제2중대는 합류하여 빌레르보카쥬로 향했다. 괴멸 상태가 된 A중대는 정오에 합류한 메비우스의 제1중대에 포위되어 항복했다.

시가지에 들어선 곳에서 비트만은 2대의 셔먼 전차 (제5 왕립 전차 연대의 지휘차)와 1대의 스카우트카, 1대의 하프트랙을 격파했다. 더욱 시가지 중심부로 진격했을 때, 제4 런던 자원 기병 연대 B중대의 셔먼 파이어플라이 (록우드 하사 탑승)의 공격을 받았다. 티거 I의 장갑은 이를 견뎌냈고, 비트만은 반전하면서 반격했다. 거기서 디아스 대위의 크롬웰 전차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비트만은 시가지에서 벗어나려고 후퇴했다. 그러나 건물 안에 숨어 있던 영국군의 6파운더 대전차포의 측면 공격을 받아 티거가 행동 불능이 되었고, 비트만과 승무원들은 탈출했다.

비트만과 승무원은 7km 떨어진 장갑 교도 사단의 사령부까지 걸어갔다. 지원 요청을 받은 제130 전차 교도 연대 제2대대 지휘관 헬무트 리트겐 대위는 IV호 전차 15대로 빌레르보카쥬로 향했다. 도중, 장갑 교도 사단 사령관인 프리츠 바이어라인과 합류하여 빌레르보카쥬에서 틸리로의 도로 봉쇄를 명령받았다. 그러나 빌레르보카쥬 서쪽에서 영국군의 전면 방어 진지에 조우했다.

비트만은 슈빔바겐으로 고지 213에 있는 제1중대로 향해 롤프 메비우스에게 빌레르보카쥬로 돌입할 것을 의뢰했다. 메비우스의 제1중대는 장갑 교도 사단의 렉스 대위가 지휘하는 IV호 전차 14대와 함께 시가지로 돌입하여 영국군과 교전했다. 이 시점에서 영국군은 요격 태세를 갖추고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제1/제7 퀸스 로열 연대에 의해 3대의 티거 전차가 격파되었지만, 1대는 후에 수리되었다.

오후 4시, 빌레르보카쥬에 독일 제2 전차 사단의 보병이 도착. 제7 기갑 사단 선봉의 손실은 막대했고, 이 새로운 지원군이 오자 더 이상의 항전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철수를 시작했다. 다음 날, 영국 공군이 빌레르보카쥬 부근을 폭격했고, 독일군도 후퇴했다.

5. 1. 초기 기동 (6월 13일 새벽)

6월 13일 새벽, 제1 소총 여단은 경로의 첫 0.5 마일 (800 m)을 정찰했다. 리브리는 독일군이 없는 것으로 보고되었고, 진격은 05:30에 제4 CLY가 선두로 다시 시작되었다. 행렬은 환호하는 프랑스 민간인들을 만났고, 이로 인해 병사들 사이에는 느긋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독일 전차가 트라시-보카쥬에 고립되었다는 잘못된 정보가 영국군에게 전달되었고, 다른 전차들도 빌레르-보카쥬 성에 비슷한 상황으로 고립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6월 11일, 독일 의료진은 성에 병원을 세웠지만 6월 13일 새벽에 떠났고, 몇몇 독일군은 마을에 남아 있었다.

행렬이 빌레르-보카쥬에 접근하면서, Sd.Kfz. 231 장갑차의 승무원들이 영국군의 진격을 지켜보고 탈출했다. 08:30, 5 마일 (8.0 km)를 이동한 후, 제22 기갑 여단 그룹은 축하하는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마을에 들어섰고, 두 명의 독일 병사가 폭스바겐 퀴벨바겐을 타고 빠른 속도로 떠나는 것이 목격되었다. 두 기병 연대는 제22 여단 그룹 경로 양쪽에서 독일군과 접촉했고, 제8 후사르는 Schwerer Panzerspähwagende (8륜 장갑차)와 교전했다. 후사르는 독일 전차가 빌레르-보카쥬로 향하고 있다고 보고했지만, 제4 CLY의 찰스 피어스 중위는 이들이 아마도 자주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2 중대장 미하엘 비트만은 단독으로 선행 출격하기로 결정했지만, 그의 205호 전차는 고장으로 인해 222호 전차(212 또는 231호 전차라는 설도 있음. 212, 231은 당시 작전이 불가능했다는 말도 있음)에 탑승하여 오랫동안 함께 해온 동료인 발타자르 볼을 포수로 불렀다. 단독으로 출격한 비트만은 시가지 남쪽으로 우회했다. 영국군의 대열을 분단하여 중대의 다른 전차와 협격하는 것이 그의 작전이었다. 이 때문에 중대의 다른 전차는 비트만의 교전 개시와 동시에 고지 213으로 공격을 가할 예정이었다.

5. 2. 오전 전투 (6월 13일 오전)

1944년 6월 13일 오전, 빌레르보카쥬에 진입한 제4 경기갑 연대 A 중대는 정찰 없이 213 고지로 이동했다. 이동 중 퀴벨바겐 1대가 파괴되었고, 전차들은 헐다운 위치로 이동하여 방어 태세를 갖췄다. 213 고지로 향하는 도로에는 소총 연대 수송차량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소총수들은 하차하여 경계를 섰지만 시야는 제한적이었다.

제1 소총 연대 지휘관 라이트 소령은 213 고지에서 A 중대 장교 및 부사관 회의를 소집했으나, 포탄 한 발에 중대 지휘부가 전멸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하프트랙 탑승자들은 여러 차량으로 분산되었다. 제4 경기갑 연대 사령관 아서, 크랜리 자작 중령은 부대의 위험한 상황을 우려했지만, 힌데로부터 모든 것이 괜찮다는 확신을 받고 213 고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힌데는 이후 빌레르보카쥬를 떠나 사령부로 향했다.

한편, 213 고지 남쪽에서 제101 SS 중전차 대대 제2 중대 사령관 미하엘 비트만은 영국군의 진격에 놀라 즉각적인 대응을 결정했다. 비트만은 "나는 내 중대를 소집할 시간이 없었다. 대신 나는 신속하게 행동해야 했는데, 적이 이미 나를 발견하고 내가 있는 곳에서 나를 파괴할 것이라고 추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차 한 대를 가지고 출발하여 다른 전차들에게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라고 회상했다.

비트만의 타이거 전차는 213 고지로 이동하던 제1 소총 연대 오코너 상사에 의해 발견되었고, 오코너 상사는 무선 침묵을 깨고 "제발 빨리 움직여! 우리 옆 50야드 떨어진 곳에 타이거가 달리고 있어!"라는 유일한 경고를 영국군 부대에 전달했다. 타이거는 국도 175호선으로 나와 213 고지에 있던 크롬웰 전차 1대를 격파하고, 이어 셔먼 파이어플라이 1대를 격파하여 길을 막았다. 213 고점에 있던 영국군은 나머지 제 2중대와 교전을 벌여 전차 3대를 추가로 잃었다.

나무와 울타리가 늘어선 길가에 여러 대의 파괴된 차량이 있다. 파괴된 대포, 꼬인 금속 및 잔해가 전경을 차지한다.
빌레르보카쥬와 213 지점 사이의 도로에 있는 제1 소총 연대 수송 열과 6파운더 대전차포의 잔해


비트만은 빌레르보카쥬 방향으로 계속 진격하며,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소총 연대 병사들의 PIAT 대전차 무기와 6파운더 대전차포 공격을 받았지만, 병사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엄폐물을 찾아 흩어졌다. 비트만은 연대 차량들을 기관총과 고폭탄으로 공격하여 불태웠지만, 사상자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빌레르보카쥬 동쪽 끝에서 비트만은 제4 경기갑 연대 정찰대의 M3 스튜어트 경전차 3대를 격파했다.

마을에서 제4 경기갑 연대 연대 본부 전차들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후진 속도가 느려 어려움을 겪었다. 전차 한 대는 타이거에 의해 파괴되기 전에 두 발을 발사했다. 다른 전차 두 대는 도로에서 정원으로 후진했고, 제4 경기갑 연대 부관 팻 다이어스 대위는 헛간 뒤에 주차했다. 타이거는 파괴된 스튜어트를 지나 마을 중앙으로 가서 또 다른 전차를 격파하고 다이어스를 놓쳤다. 찰스 피어스 중위는 정찰차를 타고 마을 중심에 있는 나머지 정찰대에 경고했고, 제4 경기갑 연대 B 중대에 알리기 위해 서쪽으로 계속 이동했다. 비트만은 또 다른 크롬웰을 격파하고, 주요 거리에서 제5 왕립 기마 포병대(RHA)의 포병 관측소(OP) 전차 2대, 정보 장교의 정찰차 및 군의관의 하프트랙을 파괴했다.

한 병사가 고가도로를 걷고 있다. 길가에는 잔해가 덮여 있다. 전경에는 격파된 전차가 있고, 전차 밑에는 나무로 된 가짜 총신과 잔해가 있다. 다른 병사가 조사하는 또 다른 격파된 전차가 배경을 차지한다.
빌레르보카쥬의 주요 거리에 있는 웰스 소령의 셔먼 OP 전차


포티와 테일러는 비트만이 셔먼 파이어플라이와 교전했고, 독일 저격수가 있던 집을 무너뜨린 후 철수했다고 기록했다. 밥 무어는 그의 전차에서 발사된 포탄이 타이거의 운전수 바이저를 움푹 들어가게 하여 비트만이 퇴각하도록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비트만의 철수는 그를 다이어스에게 가까이 데려왔는데, 다이어스는 우회당한 후 얇은 후방 장갑을 쏘기 위해 타이거를 미행하고 있었다. 크롬웰 포탄은 효과가 없었고 비트만은 영국 전차를 파괴했다. 피어스는 비트만이 타이거 포탑을 반전시켜 크롬웰과 교전했다고 썼다. 다이어스는 전차에서 탈출했고, 거리의 집 안에 있는 독일 보병에게 총격을 받았다. 비트만은 빌레르보카쥬 외곽 동쪽으로 이동했고, 틸리-쉬르-쇠르 도로 교차로에서 6파운더 대전차포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비트만은 그의 전차가 마을 중앙의 대전차포에 의해 무력화되었다고 기록했다. 15분도 채 안 되어 제101 SS 중전차 대대 제2 중대에 의해 전차 13~14대, 대전차포 2문, 수송 차량 13~15대가 파괴되었고, 그 중 많은 수가 비트만에 의해 파괴되었다. 비트만과 그의 승무원은 빌레르보카쥬 북쪽 6km 떨어진 샤토 도르부아(Cháteau d'Orbois)의 판저-레르 사단 사령부로 걸어갔다.

오전 10시, 고지 213에서는 제2중대의 다른 전차가 제4 런던 자원 기병 연대 A중대에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제1/제7 퀸스 로열 연대 및 제5 왕립 전차 연대에 빌레르보카쥬로의 돌입을 명령했다. 고지 213의 제4 연대 A중대를 거의 괴멸시킨 비트만과 제2중대는 합류하여 빌레르보카쥬로 향했다. 괴멸 상태가 된 A중대는 정오에 합류한 메비우스의 제1중대에 포위되어 항복했다.

시가지에 들어선 곳에서 비트만은 2대의 셔먼 전차 (제5 왕립 전차 연대의 지휘차)와 1대의 스카우트카, 1대의 하프트랙을 격파했다. 더욱 시가지 중심부로 진격했을 때, 제4 런던 자원 기병 연대 B중대의 셔먼 파이어플라이 (록우드 하사 탑승)의 공격을 받았다. 티거 I의 장갑은 이를 견뎌냈고, 비트만은 반전하면서 반격했다. 거기서 디아스 대위의 크롬웰 전차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비트만은 시가지에서 벗어나려고 후퇴했다. 그러나 건물 안에 숨어 있던 영국군의 6파운더 대전차포의 측면 공격을 받아 티거가 행동 불능이 되었고, 비트만과 승무원들은 탈출했다.

5. 3. 213 고지 전투 (6월 13일 오전)

오전 10시, 고지 213에서는 제101 SS 중전차대대 제2중대의 다른 전차가 제4 런던 자원 기병 연대 A중대에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5][6] 영국군은 전차와 병력을 잃고 포위되었으며, 결국 항복했다.[5][6] 영국군은 전차를 불태우려 했지만, 독일 군인들이 신속하게 도착하여 CLY 병사 30명과 소총병 및 왕립 기마 포병대 병력을 포로로 잡았다. 소수의 병사가 탈출했으며, 라이플 여단의 크리스토퍼 밀너 대위는 남은 하루 동안 도망 다녔고 어둠 속에서 영국군으로 돌아갔다.

Two tanks are parked on a grass verge to the left of a road while another tank is parked on the right side being inspected by a group of men. Two men are standing in the middle of the road.

5. 4. 오후 전투 (6월 13일 오후)

오후 1시경, 기갑교도사단의 전차들이 보병 지원 없이 빌레르보카쥬로 진격했다. 네 대의 4호 전차가 파괴된 4호 전차 근처 남쪽에서 진입을 시도했고, 두 대가 대전차 화기에 의해 격파되었다. 몇 대의 타이거 전차가 투입되어 대전차 진지를 제압했다. 제1중대 지휘관 롤프 뫼비우스(Rolf Möbius)는 빌레르보카쥬를 가로지르는 주요 도로와 주요 도로와 평행한 마을 남쪽 구역으로 주공격을 분산하여 시내 중심부를 확보했다. 타이거 전차는 영국군을 위협하여 후퇴시키기 위해 천천히 전진했고, 영국군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파이어플라이는 선두 전차에 발포했지만 빗나갔고, 대전차포가 파괴했다. 세 대의 타이거 전차는 분리되어 뒷골목으로 진입하여 영국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한 대는 대전차포에 의해 격파되었고, 다른 두 대는 PIAT로 공격받아 한 대는 파괴되었고 다른 한 대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도로 교차로와 세 대의 전차에 대한 연필 드로잉; 한 대의 전차는 부분적으로 파괴된 건물을 통해 다른 전차를 향해 발포합니다. 드로잉의 오른쪽 하단 모서리에는 대전차포의 포신이 보입니다.
브래멀(Bramall)의 셔먼 파이어플라이(Sherman Firefly)가 코너 창문을 통해 공격받는 모습을 그린 ''런던 일러스트레이티드 뉴스''의 아티스트의 인상. 아티스트는 파이어플라이를 코베넌트 전차로 그렸다.


다섯 번째 타이거 전차는 매복 지점 근처의 주요 도로에서 멈췄는데, 영국군이 엄폐물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으로 보였다. 타이거 전차는 코너 건물의 창문을 통해 파이어플라이 승무원에게 발견되었고, 승무원은 후진하여 창문을 통해 사격했다. 타이거 전차는 포가에 명중되어 길가를 지나갔다. 크롬웰 전차는 주요 도로로 진입하여 타이거 전차의 후방에 발포하여 격파한 후 엄폐물로 후진했다. 파이어플라이는 4호 전차를 격파했고, 소강 상태에서 불가능한 전차에 담요와 휘발유를 사용하여 불을 질렀다.

미하엘 비트만이 오전 9시에 공격을 시작하여 보카쥬를 넘어 기습, 다수의 전차와 차량을 파괴한 후, 시가지에 진입하여 추가적인 피해를 입혔다. 비트만은 제101SS중전차대대 제2중대와 합류하여 빌레르보카쥬로 진격, A중대는 이들에게 포위되어 항복하였다. 시가지에서 비트만은 추가 전차와 차량을 격파했으나, 셔먼 파이어플라이와 6파운더 대전차포의 공격을 받고 후퇴, 차량이 파괴되어 도보로 탈출하였다.

마을 밖에서는 제7기갑사단 여단이 아마예-쉬르-쇨(Amayé-sur-Seulles)까지 뻗어 있었고, 북쪽과 남쪽에서 공격을 받았다. 공격은 격퇴되었고, 트레이시-보카쥬(Tracey-Bocage)에서 제11 후사르 부대가 저항 세력을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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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격포와 포격 아래에서 독일군은 마을의 A 중대 1/7 퀸스(1/7th Queen's)를 공격했고, 한 소대가 고립되어 포로로 잡혔다. 퀸스 대대가 마을 전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내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제2 기갑사단의 두 개의 척탄병 대대가 남쪽에서 공격했고, B 중대 4 CLY와 교전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양측은 포병 지원을 요청했고, 여러 영국 박격포와 수송차가 파괴되었다. 오후 6시까지 퀸스 대대 본부가 위협받았고, 힌데(Hinde)는 어둠이 마을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기 전에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연막과 제5 RHA 및 V 미국 군단의 포격 뒤에서 보병은 제4 CLY 전차의 엄호를 받으며 후퇴했다. 독일군은 포격과 트레이시-보카쥬에서 온 보병의 2시간 30분 동안의 공격으로 후퇴를 방해했다.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이는 오후 10시 30분경까지 계속되었다.

5. 5. 6월 14일

6월 14일, 제22 기갑여단은 빌레르보카쥬 서쪽의 아마예쉬르쇨, 트라시보카쥬, 생제르맹 지역에 방어 진지인 "여단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방어선은 언덕 174 주변, 트라시보카쥬 북쪽, 생제르맹 부락 주변 등 다양한 위치에 걸쳐 있었다. 제101SS중전차대대 제1중대의 지원을 받은 판저-레어 사단이 이 방어선을 공격했다. 카몽 주변 고지에 있던 제1 미국 보병사단의 관측 포격 지원으로 독일군의 첫 번째 공격은 격퇴되었다. 이후 독일군은 지속적인 포격과 전차, 보병을 동원한 공격으로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으나, 영국군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제50 (노섬브리아) 보병사단의 도착이 지연되면서, 여단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전선 정비를 위해 여단 그룹을 소환하기로 결정했다. 영국 공식 역사가 라이오넬 엘리스는 제2 기갑사단의 예기치 않은 도착으로 인해 제7 기갑사단이 완전한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울트라 정보에 따르면 제2 기갑사단은 6월 12일에 전선에서 35마일(약 56km) 떨어진 곳에 위치했었고, 철수 명령은 제2 기갑사단이 충분한 병력을 갖추기 전에 내려졌다.

1944년 6월 30일 폭격 중에 촬영된 빌레르보카쥬 마을

6. 결과

A knocked out tank sits at the side of a road, in front of a two-story house.
빌레르보카쥬의 격파된 크롬웰 전차


제2 중대, 제101 SS 중전차 대대의 매복 공격과 213 고지 손실 이후, 제22 기갑여단은 이틀 동안 모든 독일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전투 연구자들은 빌레르보카쥬에서의 "실패한 실패"를 설명하기 위해 관련된 고위 지휘관들을 주시했다. 뎀시는 전쟁 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그 전투의 전체적인 처리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빌레르보카쥬에서] 철수하라는 그들의 결정은 군단 사령관과 어스킨에 의해 이루어졌다.|뎀시}}

데스테는 뎀시를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칭하며, 도시가 버려지자 여단 철수는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다른 역사가들은 버크넬이 캉을 신속하게 점령할 기회를 날려 버렸다고 주장한다. 몽고메리는 버크넬의 후원자였으며, 자신의 제자 "전투가 기동전으로 전환되면 군단을 관리할 수 없었다"고 썼다. 버클리는 문제가 발생하자 버크넬이 공격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어스킨은 그 임무에 적합하지 않았다고 썼다. 윌모트는 뎀시의 말에 동의하여 제7 기갑 사단의 철수에 대한 책임은 독일군이 아니라 버크넬에게 있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버크넬이 사단의 보강을 거부했는데, 이는 이미 통신선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데스테는 캉 남쪽의 독일군 전선을 무너뜨리고 제1 SS 기갑 군단을 포위하는 데 실패한 것은 캠페인의 "가장 치명적인 연합군 실수 중 하나"였다고 썼다. 영국군의 철수로 인해 캉을 점령하거나 연합군 교두보를 깊게 할 "기습 공수 작전"을 감행할 기회를 잃었다. 윌모트는 전투 후 "캉은 [세트피스 공격]으로만 점령될 수 있었다"고 썼다. 헤이스팅스는 빌레르보카쥬를 "참패"라고 불렀고, "영국군에게 D-Day 이후 계속되었던 영토 확보 경쟁의 종말을 알리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레이놀즈는 캉과 주변 지역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해 필요한 치명적인 공격으로 인해 전투의 결과가 앞으로 몇 주 동안 느껴질 것이라고 썼다. 제7 기갑 사단의 공식 역사는 이 전투를 결정적이지 않다고 불렀다. "... 빌레르보카쥬의 훌륭한 방어 전투... 비록 우리가 약 7마일을 철수해야 했지만, 이 이득에 비해 적에게 과도한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이 견해는 테일러와 일치하며, 그는 전투가 뚜렷한 승자 없이 끝났다고 썼다.

영국 제7기갑사단의 손실은 다음과 같다.

  • 제8 킹스 로열 아일랜드 후사르 연대(8th King's Royal Irish Hussars) - 스튜어트 전차 여러 대.
  • 제4 런던 예비 기병 연대(4th County of London Yeomanry) - 크롬웰 전차 8대, 셔먼 파이어플라이 4대, 스튜어트 전차 3대, 하프트랙 1대, 스카우트카 3대.
  • 제5 왕립 기마 포병 연대(5th Royal Horse Artillery) - 크롬웰 전차 4대, 셔먼 전차 1대.
  • 제1 라이플 여단(1st Rifle Brigade) - 하프트랙 9대, 브렌건 캐리어 2대, 카덴 로이드 캐리어 4대.


이에 더해 다수의 장교, 병사가 사망하거나 부상, 포로가 되었다. 막대한 손해를 입은 제4 런던 예비 기병 연대는 연대장 클랜리 중령(자작)이 포로가 되었다.

독일군의 손실은 티거 I 전차 6대(나중에 3대가 수리되어 복귀), 4호 전차 5대라는 비교적 경미한 수준이었다.

제7기갑사단의 손실은 컸고, 특히 기동력의 핵심인 장갑 차량을 다수 잃은 것은 치명적이었다. 이로 인해 독일군 장갑교도사단의 측면을 우회하여 시를 공격한다는 작전은 불가능해졌다. 또한, 독일군의 저항이 예상 이상으로 컸기 때문에 이후 버나드 몽고메리는 신중하다기보다는 둔중한 작전 지도를 하게 되었다(원래 몽고메리의 용병술은 신속성을 결여했지만, 이 이후에는 진격할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졌다).

미하엘 비트만의 전과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눈부시지만 과대 선전된 감이 없지 않다. D-Day 이후, 독일군이 열세에 놓이면서 수뇌부는 사기를 높이기 위한 영웅이 필요했고, 이 전투와 비트만은 훌륭한 선전 재료였다. 이 때문에 비트만은 단독으로 전차 30대 이상을 격파했다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비트만이 격파한 것은 27대의 "전투 차량"이었으며, 27대 전부가 전차는 아니었다. 그의 전과 내역은

  • 전차 12대(크롬웰 전차 5대, 스튜어트 전차 3대, 셔먼 전차 4대), 하프트랙 10대, 카덴 로이드 캐리어 4대, 스카우트카 1대.


가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비트만의 전과가 큰 것은 변함없고, SS 제1 장갑군단 사령관 요제프 디트리히에게도 높이 평가받았다. 6월 22일, 총통 관저에 출두한 비트만에게 빌레르보카쥬에서의 공적으로 떡갈나무 잎 기사십자 훈장이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수여되었고, 아울러 SS 대위로 진급했다.

현재 빌레르보카쥬에는 이 전투를 기념하는 "1944년 6월 13일 거리(Boulevard du 13 juin 1944)"라는 이름의 도로가 있으며, 구글 지도에서 볼 수 있다.

6. 1. 피해

상반되는 자료들로 인해 빌레르보카쥬 전투의 정확한 사상자 수를 확정하기는 어렵다.

영국군 제22 기갑여단은 약 217명의 전사자, 부상자, 실종자를 냈으며, 이들 중 다수는 213고지에서 포로로 잡혔다. 포로 중 5명의 소총수는 탈출을 시도하다 미군의 포격 속에서 참호에 숨어 있다가 경비병에 의해 사살되었다. 영국군은 23~27대의 전차를 잃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213고지에 있었다. 제4CLY A중대는 15대의 전차를 모두 잃었다. 일부 자료에서는 하프트랙 14대와 유니버설 캐리어 14대를 잃었다고 기록했고, 레이놀즈는 유니버설 캐리어 16대, 마리는 하프트랙 11대와 유니버설 캐리어 6대를 잃었다고 기록했다. 3대의 정찰차, 9대의 다임러 장갑차와 2문의 대전차포도 전투 중에 손실되었다.

독일군 전차 손실에 대해서는 자료가 엇갈린다. 판저레어 사단이 조각조각 투입되어 격파된 판저 IV의 수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독일군 전차 손실은 8~15대(타이거 6대 포함)로 간주된다. 체스터 윌모트는 노르망디에 타이거 전차가 36대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심각한 손실이라고 말한다. 테일러는 영국군이 주장한 수치에는 무력화되었다가 나중에 회수된 전차도 포함되어 있다고 기록했다. 추가적인 독일군 손실에는 장갑차 1대, 퀴벨바겐 1대, 하프트랙 2대가 포함되었다.

6월 13일에 사망한 프랑스 민간인은 9명 이상이었다. 6명은 전투 중에 교차 사격이나 파편에 의해 사망했고, 3명은 자정 직전에 포격에 의해 사망했다. 사망자 3명은 전쟁 범죄일 수 있다. 이후 전투와 폭격으로 더 많은 민간인이 사상되었다. 영국군이 철수한 후, 마을은 독일군에 의해 재점령되어 수색되었고, 여러 상점, 주택, 시청이 불탔다.

6. 2. 영향

빌레르보카쥬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황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전술적 측면에서 중요한 사례로 연구되고 있다. 영국군의 캉 포위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독일군은 연합군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공식 역사가 라이오넬 엘리스는 제22 기갑여단 그룹의 철수를 설명하면서 제2 기갑사단의 예기치 않은 도착으로 인해 제7 기갑사단이 완전한 성공을 거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1979년 울트라가 공개된 후, 도청된 독일 통신에서 제2 기갑사단이 6월 12일에 전선에서 35마일(56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랠프 베넷은 몽고메리가 그 사단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주장한 것을 솔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데이비드 프렌치는 노르망디에 상륙한 후속 부대가 평균 이틀 늦었고, 제 시간에 상륙했다면 제30 군단이 상당한 독일군이 도착하기 전에 빌레르보카쥬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썼다.

전투 연구자들은 빌레르보카쥬에서의 "실패한 실패"를 설명하기 위해 관련된 고위 지휘관들을 주시했다. 뎀시는 전쟁 후 제7 기갑 사단의 이 공격은 성공했어야 했다고 언급하며, 버크넬과 어스킨이 물러나야 할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은 그 실패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데스테는 뎀시를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칭하며, 도시가 버려지자 여단 철수는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다른 역사가들은 버크넬이 캉을 신속하게 점령할 기회를 날려 버렸다고 주장한다.

데스테는 캉 남쪽의 독일군 전선을 무너뜨리고 제1 SS 기갑 군단을 포위하는 데 실패한 것은 캠페인의 "가장 치명적인 연합군 실수 중 하나"였다고 썼다. 영국군의 철수로 인해 캉을 점령하거나 연합군 교두보를 깊게 할 "기습 공수 작전"을 감행할 기회를 잃었다.

영국 제7기갑사단의 손실은 다음과 같다. 제8 킹스 로열 아일랜드 후사르 연대는 스튜어트 전차 여러 대를, 제4 런던 예비 기병 연대는 크롬웰 전차 8대, 셔먼 파이어플라이 4대, 스튜어트 전차 3대, 하프트랙 1대, 스카우트카 3대를 잃었다. 제5 왕립 기마 포병 연대는 크롬웰 전차 4대, 셔먼 전차 1대를 잃었으며, 제1 라이플 여단은 하프트랙 9대, 브렌건 캐리어 2대, 카덴 로이드 캐리어 4대를 잃었다. 다수의 장교, 병사가 사망하거나 부상, 포로가 되었으며, 막대한 손해를 입은 제4 런던 예비 기병 연대는 연대장 클랜리 중령(자작)이 포로가 되었다.

독일군의 손실은 티거 I 전차 6대(나중에 3대가 수리되어 복귀), 4호 전차 5대라는 비교적 경미한 수준이었다. 제7기갑사단의 손실은 컸고, 특히 기동력의 핵심인 장갑 차량을 다수 잃은 것은 치명적이었다. 이로 인해 독일군 장갑교도사단의 측면을 우회하여 시를 공격한다는 작전은 불가능해졌다.

요제프 디트리히에게 높이 평가받은 비트만은 6월 22일, 총통 관저에 출두하여 빌레르보카쥬에서의 공적으로 떡갈나무 잎 기사십자 훈장이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수여되었고, 아울러 SS 대위로 진급했다. 현재 빌레르보카쥬에는 이 전투를 기념하는 "1944년 6월 13일 거리(Boulevard du 13 juin 1944)"라는 이름의 도로가 있다.

7. 분석

## 전술

비보(Beevor)와 패트릭 델라포스(Patrick Delaforce)는 매복이 더 일찍 감지되었다면 완화되었을 것이라고 썼으며, 영국 선봉대가 213 지점으로 이동할 때 "얼스킨(Erskine)의 정찰 방어 제공 실패"를 비난했다. 마리(Marie)는 영국의 선봉대가 다른 여단 그룹보다 앞섰으며, 측면은 잘 보호되었지만 정보 부족과 정보 수집 부족으로 진격했다고 썼다. 소총 여단(Rifle Brigade)의 밀너(Milner)는 도시 주민들로부터 정보를 얻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대대 정찰 소대가 있었다면 첫 교전의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다고 썼다. 밀너는 또한 대대 장교와 부사관이 능선에 있는 O-group 대신 부하들과 함께 있었다면 첫 번째 공격을 격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썼다.

버클리(Buckley)는 비트만(Wittmann)이 뛰어난 대담함을 보여주었지만, 영국의 패배 원인은 더 광범위했으며, 열등한 독일 탱크가 아니라 빌레르보카쥬 전투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영국에게 있다고 썼다. 헤이스팅스(Hastings)는 타이거가 크롬웰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이지만, 타이거로 인한 "혼란"은 영국군의 전술에 대한 좋지 않은 반영이라고 하였다.

마리는 뎀프시(Dempsey)가 전투 내내 여단장 힌데(Hinde)가 보여준 전술적 재능의 부족에 실망했으며, 영국군은 보카쥬에서 보병의 지원 없이 장갑차 진격을 시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더 잘 알았어야 했다고 언급했다. 영국군은 아침에 조율되지 않은 보병과 전차 전투를 벌였고, 독일군은 하루 종일 비슷한 행동을 했다.

Two tanks are positioned on either side of a street with a soldier standing in the middle of the road; the road is damaged and scattered with debris.
빌레르보카쥬에서 파괴된 판처 IV


슈나이더(Schneider)는 제101SS 중전차 대대의 전투 기여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이라고 묘사했다. 타이거 중대와 판저-레어 사단(Panzer-Lehr Division)은 심각한 영국의 돌파를 막았지만, 독일군의 반격이 조각조각으로 이루어질 필요는 없었다. 뫼비우스(Möbius)와 제1 중대는 (Caen)으로 가는 길을 지휘하고 있었으므로, 비트만은 조율된 공격을 계획할 시간이 있었다. 슈나이더는 "유능한 전차 중대 지휘관은 그렇게 많은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썼다. 비트만은 타이거를 하룻밤 사이에 움푹 들어간 차선에 배치하고, 열의 선두에 엔진 고장 차량을 둠으로써 중대를 막을 위험을 감수했다. 슈나이더는 비트만의 도시 진격을 용감하다고 불렀지만 "모든 규칙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사전에 정보가 수집되지 않았고 공격에 "중심" 또는 "병력 집중"이 없었다. "제2 중대와 롤프 뫼비우스의 제1 중대의 대부분은 방어에 들어간 적과 맞닥뜨렸다."

비트만의 영국군 점령 지역으로의 "무모한" 진격은 "순수한 어리석음"이었고 "그러한 과도한 조급함은 필요하지 않았다". 비트만이 나머지 중대와 제1 중대를 포함한 공격을 제대로 준비했다면 더 큰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무사려한 행동은 [비트만]에게 8월 ... 개방된 지역에서 노출된 측면으로 무심코 시작된 공격 중에 가움스닐(Gaumesnil) 근처에서 그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다" 메이어(Meyer)는 보병 지원 없이 제2 중대가 도시로 진격한 것은 "분명히 부적절했다"고 썼다. 마리는 이것을 뫼비우스의 심각한 전술적 오류라고 불렀지만, 상황상 정당한 위험이었다. 보병을 사용할 수 없었고, 영국군은 "그들의 선봉대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보고 엄청난 인상을 받았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다.

## 논란

나치 독일의 선전 기계는 독일에서 유명 인사인 미하엘 비트만에게 빌레르보카쥬에서 파괴된 모든 영국 전차의 공을 돌렸다. 비트만은 6월 13일 저녁, 전투를 묘사하고 이후의 반격으로 영국 기갑 연대와 보병 대대를 파괴했다고 주장하는 라디오 메시지를 녹음했다. 조작된 이미지가 제작되었는데, 독일 국방군 잡지인 ''신호(Signal)''에 게재된 세 개의 합쳐진 사진은 마을의 파괴 규모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주었다. 이 선전 캠페인은 독일 국내와 해외에서 신뢰를 얻었고, 영국은 빌레르보카쥬 전투의 결과가 명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재앙이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파일:Bundesarchiv_Bild_101I-299-1802-08,_Nordfrankreich,_Michael_Wittmann_auf_Panzer_VI_(Tiger_I).jpg|thumb|upright=0.8|alt=A man, wearing dress uniform and a cap, sits on top of a tank barrel; the tank is not fully in view.|]

존 버클리(John Buckley)는 비트만에 대한 과장된 표현이 독일 선전전의 잔재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역할을 과장하고 그가 혼자서 제7기갑사단을 멈추게 했다고 암시한 데스테와 마이어를 비판했다. 버클리는 러셀 A. 하트(Russell A Hart)의 주장이 비트만이 제7기갑사단 선두를 "거의 전멸시켰다"는 것은 잘못되었으며, "완전한 독일 선전물"은 게리 심슨(Gary Simpson)에게서 얻을 수 있다고 썼다. 스티븐 배드지(Stephen Badsey)는 비트만의 공격과 그것이 받은 관심을 "놀랍지만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불렀다. 2013년, 버클리는 작가와 역사가들이 나치 선전을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며, 사실을 살펴보면 비트만이 이끄는 한 대의 타이거 승무원이 제7기갑사단을 격파했다는 것은 신화임을 알 수 있다고 썼다. 비트만은 대담한 공격을 감행하여 제4CLY의 진격을 막는 데 기여했지만, 단독으로 노력하지는 않았다. 213지점에서의 작전은 롤프 뫼비우스(Rolf Möbius)가 지휘했다.

D-데이 이후, 독일군이 열세에 놓이면서 수뇌부는 사기를 높이기 위한 영웅이 필요했고, 이 전투와 비트만은 훌륭한 선전 재료였다. 이 때문에 비트만은 단독으로 전차 30대 이상을 격파했다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비트만이 격파한 것은 27대의 "전투 차량"이었으며, 27대 전부가 전차는 아니었다. 그의 전과 내역은 전차 12대(크롬웰 5대, 스튜어트 3대, 셔먼 4대), 하프트랙 10대, 카덴 로이드 캐리어 4대, 스카우트카 1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비트만의 전과가 큰 것은 변함없고, SS 제1 장갑군단 사령관 요제프 디트리히에게도 높이 평가받았다. 6월 22일, 총통 관저에 출두한 비트만에게 빌레르보카쥬에서의 공적으로 떡갈나무 잎 기사십자 훈장이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수여되었고, 아울러 SS 대위로 진급했다.

제7기갑사단의 손실은 컸고, 특히 기동력의 핵심인 장갑 차량을 다수 잃은 것은 치명적이었다. 이로 인해 독일군 장갑교도사단의 측면을 우회하여 시를 공격한다는 작전은 불가능해졌다. 또한, 독일군의 저항이 예상 이상으로 컸기 때문에 이후 버나드 몽고메리는 신중하다기보다는 둔중한 작전 지도를 하게 되었다.

7. 1. 전술

비보(Beevor)와 패트릭 델라포스(Patrick Delaforce)는 매복이 더 일찍 감지되었다면 완화되었을 것이라고 썼으며, 영국 선봉대가 213 지점으로 이동할 때 "얼스킨(Erskine)의 정찰 방어 제공 실패"를 비난했다. 마리(Marie)는 영국의 선봉대가 다른 여단 그룹보다 앞섰으며, 측면은 잘 보호되었지만 정보 부족과 정보 수집 부족으로 진격했다고 썼다. 소총 여단(Rifle Brigade)의 밀너(Milner)는 도시 주민들로부터 정보를 얻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대대 정찰 소대가 있었다면 첫 교전의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다고 썼다. 밀너는 또한 대대 장교와 부사관이 능선에 있는 O-group 대신 부하들과 함께 있었다면 첫 번째 공격을 격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썼다.

버클리(Buckley)는 비트만(Wittmann)이 뛰어난 대담함을 보여주었지만, 영국의 패배 원인은 더 광범위했으며, 열등한 독일 탱크가 아니라 빌레르보카쥬 전투(Villers-Bocage)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영국에게 있다고 썼다. 헤이스팅스(Hastings)는 타이거가 크롬웰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이지만, 타이거로 인한 "혼란"은 영국군의 전술에 대한 좋지 않은 반영이라고 하였다.

마리는 뎀프시(Dempsey)가 전투 내내 여단장 힌데(Hinde)가 보여준 전술적 재능의 부족에 실망했으며, 영국군은 보카쥬에서 보병의 지원 없이 장갑차 진격을 시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더 잘 알았어야 했다고 언급했다. 영국군은 아침에 조율되지 않은 보병과 전차 전투를 벌였고, 독일군은 하루 종일 비슷한 행동을 했다.

슈나이더(Schneider)는 제101SS 중전차 대대의 전투 기여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이라고 묘사했다. 타이거 중대와 판저-레어 사단(Panzer-Lehr Division)은 심각한 영국의 돌파를 막았지만, 독일군의 반격이 조각조각으로 이루어질 필요는 없었다. 뫼비우스(Möbius)와 제1 중대는 (Caen)으로 가는 길을 지휘하고 있었으므로, 비트만은 조율된 공격을 계획할 시간이 있었다. 슈나이더는 "유능한 전차 중대 지휘관은 그렇게 많은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썼다. 비트만은 타이거를 하룻밤 사이에 움푹 들어간 차선에 배치하고, 열의 선두에 엔진 고장 차량을 둠으로써 중대를 막을 위험을 감수했다. 슈나이더는 비트만의 도시 진격을 용감하다고 불렀지만 "모든 규칙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사전에 정보가 수집되지 않았고 공격에 "중심" 또는 "병력 집중"이 없었다. "제2 중대와 롤프 뫼비우스의 제1 중대의 대부분은 방어에 들어간 적과 맞닥뜨렸다."

비트만의 영국군 점령 지역으로의 "무모한" 진격은 "순수한 어리석음"이었고 "그러한 과도한 조급함은 필요하지 않았다". 비트만이 나머지 중대와 제1 중대를 포함한 공격을 제대로 준비했다면 더 큰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무사려한 행동은 [비트만]에게 8월 ... 개방된 지역에서 노출된 측면으로 무심코 시작된 공격 중에 가움스닐(Gaumesnil) 근처에서 그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다" 메이어(Meyer)는 보병 지원 없이 제2 중대가 도시로 진격한 것은 "분명히 부적절했다"고 썼다. 마리는 이것을 뫼비우스의 심각한 전술적 오류라고 불렀지만, 상황상 정당한 위험이었다. 보병을 사용할 수 없었고, 영국군은 "그들의 선봉대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보고 엄청난 인상을 받았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다.

7. 2. 논란

나치 독일의 선전 기계는 독일에서 유명 인사인 미하엘 비트만에게 빌레르보카쥬에서 파괴된 모든 영국 전차의 공을 돌렸다. 비트만은 6월 13일 저녁, 전투를 묘사하고 이후의 반격으로 영국 기갑 연대와 보병 대대를 파괴했다고 주장하는 라디오 메시지를 녹음했다. 조작된 이미지가 제작되었는데, 독일 국방군 잡지인 ''신호(Signal)''에 게재된 세 개의 합쳐진 사진은 마을의 파괴 규모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주었다. 이 선전 캠페인은 독일 국내와 해외에서 신뢰를 얻었고, 영국은 빌레르보카쥬 전투의 결과가 명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재앙이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File:Bundesarchiv_Bild_101I-299-1802-08,_Nordfrankreich,_Michael_Wittmann_auf_Panzer_VI_(Tiger_I).jpg|thumb|upright=0.8|alt=A man, wearing dress uniform and a cap, sits on top of a tank barrel; the tank is not fully in view.|]

존 버클리(John Buckley)는 비트만에 대한 과장된 표현이 독일 선전전의 잔재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역할을 과장하고 그가 혼자서 제7기갑사단을 멈추게 했다고 암시한 데스테와 마이어를 비판했다. 버클리는 러셀 A. 하트(Russell A Hart)의 주장이 비트만이 제7기갑사단 선두를 "거의 전멸시켰다"는 것은 잘못되었으며, "완전한 독일 선전물"은 게리 심슨(Gary Simpson)에게서 얻을 수 있다고 썼다. 스티븐 배드지(Stephen Badsey)는 비트만의 공격과 그것이 받은 관심을 "놀랍지만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불렀다. 2013년, 버클리는 작가와 역사가들이 나치 선전을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며, 사실을 살펴보면 비트만이 이끄는 한 대의 타이거 승무원이 제7기갑사단을 격파했다는 것은 신화임을 알 수 있다고 썼다. 비트만은 대담한 공격을 감행하여 제4CLY의 진격을 막는 데 기여했지만, 단독으로 노력하지는 않았다. 213지점에서의 작전은 롤프 뫼비우스(Rolf Möbius)가 지휘했다.

D-데이 이후, 독일군이 열세에 놓이면서 수뇌부는 사기를 높이기 위한 영웅이 필요했고, 이 전투와 비트만은 훌륭한 선전 재료였다. 이 때문에 비트만은 단독으로 전차 30대 이상을 격파했다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비트만이 격파한 것은 27대의 "전투 차량"이었으며, 27대 전부가 전차는 아니었다. 그의 전과 내역은 전차 12대(크롬웰 5대, 스튜어트 3대, 셔먼 4대), 하프트랙 10대, 카덴 로이드 캐리어 4대, 스카우트카 1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비트만의 전과가 큰 것은 변함없고, SS 제1 장갑군단 사령관 요제프 디트리히에게도 높이 평가받았다. 6월 22일, 총통 관저에 출두한 비트만에게 빌레르보카쥬에서의 공적으로 떡갈나무 잎 기사십자 훈장이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수여되었고, 아울러 SS 대위로 진급했다.

제7기갑사단의 손실은 컸고, 특히 기동력의 핵심인 장갑 차량을 다수 잃은 것은 치명적이었다. 이로 인해 독일군 장갑교도사단의 측면을 우회하여 시를 공격한다는 작전은 불가능해졌다. 또한, 독일군의 저항이 예상 이상으로 컸기 때문에 이후 버나드 몽고메리는 신중하다기보다는 둔중한 작전 지도를 하게 되었다.

8. 전후 상황

세 명의 군인이 전차에 앉아 있고, 다른 두 명이 옆에 서 있다.


빌레르보카쥬는 1944년 6월 14일과 6월 30일, 영국 공군(RAF)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6월 14일에서 15일 밤, 337대의 영국 공군 폭격기가 랭커스터, 핼리팩스, 모스키토를 이용하여 Évrecy 마을과 빌레르보카쥬 주변에 1,700톤의 고성능 폭탄을 투하, Tiger 전차 1대를 파괴하고 3대를 손상시켰다. 6월 30일에는 작전 엡섬을 지원하기 위해 266대의 폭격기가 1,10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 폭격은 독일군에게 중요한 교통 중심지였던 빌레르보카쥬를 목표로 했으나, 당시에는 프랑스 민간인만 있었다.

1944년 8월 4일, 빌레르보카쥬는 제50(노섬브리아) 보병 사단의 제1대대 도싯 연대 정찰대에 의해 해방되었다. 전투 이후, 영국군 지휘관 교체 및 재배치가 이루어졌다. 버크널, 어스킨, 힌드 및 기타 고위 장교를 포함하여 최대 100명의 병력이 해임 및 재배치되었는데, 이는 빌레르보카쥬 전투의 실패에 대한 결과라는 것이 중론이다.

현재 빌레르보카쥬에는 이 전투를 기념하는 "1944년 6월 13일 거리(Boulevard du 13 juin 1944)"라는 이름의 도로가 있다.

참조

[1] 간행물 War Diaries of 8th (KRI) Hussars – June 1944
[2] 웹사이트 Forces War Records - HLCA Talbot Harvey
[3] 문서 広田, p. 50
[4] 웹사이트 Villers-Bocage, zerstörter Panzer VI https://www.bild.bun[...] 2022-02-11
[5] 서적 Villers-Bocage: Through the Lens of the German War Photographer Battle of Britain International 1999
[6] 서적 Villers-Bocage: Through the Lens of the German War Photographer Battle of Britain International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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