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디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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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프 디트리히는 1892년 독일에서 태어난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나치당에 입당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그는 친위대(SS)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히틀러 친위대(LSSAH)를 창설하고 지휘했으며, '긴 칼의 밤' 사건에 연루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폴란드, 프랑스, 발칸 전선 등에서 활약했으며, 벌지 전투와 헝가리 전투에도 참전했다. 전쟁 후에는 전쟁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수감되었으며, 이후 전 무장친위대원 상호부조협회 활동을 통해 무장친위대의 재평가를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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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디트리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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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요제프 "제프" 디트리히 |
원어 이름 | Josef Dietrich |
출생일 | 1892년 5월 28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하방엔 |
사망일 | 1966년 4월 21일 |
사망지 |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루트비히스부르크 |
별명 | 제프 (Sepp), 파파 제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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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파일:Josef Sepp Dietrich signature.svg|링크=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Josef_Sepp_Dietrich_signature.svg|서명]] |
군사 경력 | |
소속 | 독일 제국군 바이에른 왕국 육군 친위대 친위대 특무부대 무장친위대 |
복무 기간 | 1911년~1918년, 1928년~1945년 |
군 복무 번호 | NSDAP #89,015, SS #1,117 |
최종 계급 | 하사 (바이에른 육군), SS-오버스트그루펜퓌러 및 무장친위대 상급대장 |
지휘 부대 | LSSAH 제1 SS 기갑 군단 제5 기갑군 제6 SS 기갑군 |
참전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실레시아 봉기 안나베르크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전투 덩케르크 전투 그리스 전투 유고슬라비아 침공 동부 전선 노르망디 전투 벌지 전투 엘센보른 고지 전투 봄의 눈 각성 작전 |
훈장 | 1급 철십자장 (1914년) 전차 기념장 기사철십자장 백엽검금강석 기사철십자장 바이엘른 전공훈장 3급 검 부착 1급 2급 1급 2급 흑장 은장 동부전선 종군장 전투차량 승무원 기념장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오버란트 의용군,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당원 번호 | 89,015 |
훈장 | 황금 나치당원 배지 혈맹 훈장 등록번호: 10 나치당 근속장 25년 금장 15년 은장 10년 동장 명예 십자장 1938년 3월 13일 기념 메달 1938년 10월 1일 기념 메달 프라하 성 장식판 부착 |
직책 | 국회의원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선거구: 24구 (뮌헨 지구) 재임 기간: 1930년 9월 14일 ~ 1945년 5월 8일 SS 아돌프 히틀러 경호 연대 지휘관 재임 기간: 1933년 ~ 1945년 5월 8일 친위대 상급지구 '북' 지도자 재임 기간: 1931년 12월 18일 ~ 1933년 3월 17일 친위대 상급지구 '남' 지도자 재임 기간: 1930년 ~ 1931년 |
범죄 정보 | |
주요 범죄 | 장검의 밤 말메디 학살 보름후트 학살 |
유죄 판결 | 미국 군사 법정: 전쟁 범죄, 종신형; 25년형으로 감형 서독 법정: 과실치사 방조 (6건), 18개월 징역 |
유죄 판결 상태 | 사망 |
기타 정보 | |
제대 후 활동 | 구 무장친위대원 상호부조협회 간부 |
2. 초기 생애
1892년 5월 바이에른주 멤밍겐 근방의 하방엔에서 태어났다. 호텔 보이, 하인, 마부 등으로 일하다 1911년 독일 제국군에 입대했다.[10][13]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경리 담당 부사관으로 복무하다가 최초로 창설된 독일 전차 부대에 들어갔다.[16][17] 1917년 2급 철십자훈장, 1918년 1급 철십자훈장을 받았다.[16]
1919년 5월 바이에른 공산당에 반대하여 자유군단에 잠시 몸담았다. 이후 주경찰로 복무하다 1928년 나치당에 가입, 아돌프 히틀러의 경호 대장이 되었다. 히틀러는 그가 국내 순행을 할 때 수행한 연유로 "Chauffeureska"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1]
2. 1. 출생과 가계
요제프 "제프" 디트리히는 1892년 5월 28일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멤밍겐 근처 하우앙겐에서 크레센티아 디트리히의 사생아로 태어났다.[10] 그의 어머니 크레센티아는 나중에 마부 펠라기우스 밀츠와 결혼하여 밀츠는 디트리히의 계부가 되었다.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1년 아우크스부르크에 주둔한 바이에른 왕국군 제4 바이에른 야전포병 연대 "킹"(4. Bayerische Feldartillerie-Regiment "König")에 입대했다.[13] 그러나 낙마 사고로 부상을 입어 같은 해 11월 27일에 조기 제대하였다.[7][8][13]1914년 7월 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8월 6일 바이에른 제7 야전 포병 연대 “프린츠레겐트 루이트폴트” (de)에 입대하였다.[13] 10월에는 바이에른 제6 야전 포병 연대 “칼라브리아 공작 페르디난트 폰 부르봉 왕자”로 전속되어 서부 전선의 벨기에, 플랑드르 및 이프르에서 전투를 치렀으나,[7] 11월에 포탄 파편을 맞아 오른발을 부상당했다.[13]
1915년 1월 중순 존트호펜(de)의 포병학교에서 하사관 훈련을 받았다.[13] 2월에 제7 야전 포병 연대에 복귀하여 다시 서부 전선에 나섰으나, 봄에 솜므에서 파편을 머리에 맞는 중상을 입었다.[7][13] 전상에서 회복된 후 돌격대(제3군 제2돌격대)에 배속되었다.[13][15] 이 부대는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창설된 부대로, 특히 우수한 병사들이 선발되었고, 계급에 관계없이 모두 함께 먹고 자면서 사기를 높였다. 이 부대에서의 경험은 후에 자신의 라이프슈탄달테 운영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15] 1917년에는 2급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16]
1918년 2월 19일 영국군으로부터 노획한 전차 11량으로 구성된 바이에른 돌격 전차 분견대 (Bayerische Sturmpanzerkampfwagen-Abteilung)에 배속되었다.[15] 마크 IV 전차 “모리츠”호에 기관총수로 탑승했다.[13][8] 3월 21일 생캉탱에서 전차전 첫 출전을 했다. 5월 31일에는 프랑스군에 노획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모리츠”호를 폭파할 수밖에 없었지만,[13] 이 탈출 과정에서 증류주를 가지고 돌아와 대원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17] 6월에는 1급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16] 7월 18일 빌레르코트레(fr) 근처에서 처음으로 영국 전차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13] 11월 1일 발랑시엔에서의 전투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마지막 전투가 되었다.[17]
독일 혁명 중이던 1918년 11월 9일 제13 돌격 전차 분견대의 라테 의장에 취임했다.[13] 11월 20일 바이에른 제7 야전 포병 연대에 복귀했지만, 이듬해인 1919년 3월 26일 제대했다.[13] 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부상사(Vizewachtmeister)였다.[17][14][9]
2. 3.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1919년 5월 바이에른 공산당에 반대하여 프라이코르프스에 잠시 몸담았다. 그 후 주경찰로 복무하다 1928년 나치당에 가입해 아돌프 히틀러의 경호 대장이 되었다. 히틀러는 그가 국내를 순행할 때 수행하여 "Chauffeureska"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1]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경찰과 세관원을 포함한 여러 직업을 가졌다. 실레지아 봉기 동안 폴란드 반군과 싸웠지만, 맥주홀 폭동에 연루된 혐의로 경찰에서 해임되었다. 1928년 나치당에 가입(당원 번호 89,015)한 후, 나치당 출판사인 에어어 출판사에 고용되었고 친위대(SS) 번호는 1,117이었다. 뮌헨의 ''Tankstelle-Blauer-Bock'' 주유소 고용주였던 크리스티안 베버를 통해 나치즘에 입문했다. 그는 독일 전역을 순회하는 히틀러를 수행했다. 나중에 히틀러는 그에게 여러 SS 직책을 포함한 다른 직업을 마련해주었고, 총통 관저에 살도록 했다.
1930년 9월 14일 선거에서 나치당 대의원으로 국회에 당선되었다. 그는 나치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하부 바이에른–슈바벤(1933년까지, 선거구 #24), 상부 바이에른(1936년까지, #25), 프랑크푸르트/오더(1945년까지, #5) 선거구를 대표하여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 ''SS-그룹펜퓨러''로 승진했다. 1933년 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빠르게 승진했다. 1933년 말, 프로이센 총리 헤르만 괴링은 그를 새롭게 재편된 프로이센 주의회에 임명했고, 1945년까지 재임했다. 1932년 2월부터 히틀러의 개인 경호를 담당했으며, 1933년 8월 2일 ''SS-손더콤만도 베를린''(SS-특수 사령부 베를린) 사령관이 되었다. 1934년 4월 13일 이 특수 경호 부대는 ''히틀러 친위대''(LSSAH)로 개명되었다. 히틀러의 측근이었던 그는 종종 그의 SS 상관인 하인리히 힘러를 무시했고, 한때 힘러를 ''라이프슈탄다르테'' 병영에서 금지하기도 했다. LSSAH는 결국 ''바펜-SS''의 엘리트 사단으로 성장했다. 이 부대는 명목상 힘러의 지휘 아래 있었지만, 디트리히가 실질적인 사령관이었고 일상적인 행정을 처리했다.
1934년 여름, 긴 칼의 밤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히틀러는 그와 ''라이프슈탄다르테'' 부대와 함께 바트 비스제에 가서 6월 30일 에른스트 뢰름의 체포를 직접 감독했다. 오후 5시경, 히틀러는 ''라이프슈탄다르테''에게 "처형대"를 형성하여 돌격대(SA) 지도자들이 수감되어 있는 스타델하임 감옥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감옥 마당에서 ''라이프슈탄다르테''의 사격대는 에드문트 하이네스를 포함한 6명의 SA 장교를 사살했다. 정권에 의해 반역자로 지목된 추가 SA 요원들은 히틀러가 그에게 6명의 부하를 데리고 사법부에 가서 특정 SA 지도자들을 사살하라고 지시한 후 베를린에서 ''라이프슈탄다르테'' 부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 직후, ''SS-오베르그룹펜퓨러''로 승진했다.[1]
3. 나치 시대
1930년 제국 의회에 남부 바이에른 주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31년 SS중장이 되었다.[18] 나치당 집권 후 디트리히는 나치의 핵심 인물로 빠르게 부상했다. 1934년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LSSAH) 지휘관이 되었고, 프로이센 주의원도 겸임했다.
1934년 6월 장검의 밤 사건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SA 수뇌부를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SS대장으로 승진했다.[6][30][9]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라이프슈탄다르테를 이끌고 파리, 됭케르크 공격,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침공 작전, 바르바로사 작전 등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다.
3. 1. 친위대(SS) 내 승진
1928년 5월 1일 나치당에 입당한(당원 번호 89,015)[9] 디트리히는 4일 후인 5월 5일 친위대(SS)에 입대했다.(대원 번호 1,177)[9] 당시 친위대는 하인리히 힘러가 친위대 전국 지도자가 되기 전이었고, 대원 수는 약 280명에 불과했다.[23] 경찰 경력이 있던 그는 입대와 함께 빠르게 승진했다.[18]뮌헨에 본부를 둔 친위대 제1중대(SS-Sturm I)에 배속된 그는 입대 한 달도 안 되어 중대장(Führer)에 임명되었고,[21] 1928년 8월에는 제1친위대 연대 "뮌헨"(SS-Standarte I "München")의 연대장이 되었다.[24] 1929년 9월에는 친위대 여단 "바이에른"(SS-Brigade "Bayern")의 여단장으로 승격했다.[21] 1930년 7월에는 친위대 상급 지도자 지역 "남부"(SS-Oberführer Abschnitt "Süd")의 상급 지도자(SS-Oberführer "Süd")가 되었다.[21][25]
1930년에는 남부 바이에른 주의원으로 제국 의회에 선출되었으며,[22][26] 1931년에는 SS중장으로 승진했다.[18] 1931년 7월 중순에는 브라운슈바이크에 본부를 둔 제4친위대 지역의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26][19] 1932년 7월에는 독일 남부의 친위대를 관할하는 친위대 집단 "남부"(SS-Gruppe "Süd")의 지도자가 되었다.[26]
1932년 2월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경호 부대인 친위대 경호 사령부 "총통(데어 퓌러)"(SS-Begleit-Kommando "Der Führer")의 지도자가 되었다.[26] 1932년 10월부터 1933년 4월까지는 친위대 집단 "북부"(SS-Gruppe "Nord")의 지도자를, 1933년 4월부터는 친위대 집단 "동부"(SS-Gruppe "Ost") 지도자를 역임했다. 친위대 집단 "동부"는 1933년 11월에 친위대 상급 지역 "동부"(SS-Oberabschnitt "Ost")로, 1939년에는 친위대 상급 지역 "슈프레"(SS-Oberabschnitt "Spree")로 개편되었지만, 디트리히는 1945년 5월까지 그 지도자직을 계속 수행했다.[27]
1934년 12월 14일, LSSAH와 친위대 정치 예비대(SS-Politische Bereitschaft)로 구성된 친위대 특무부대(SS-Verfügungstruppe, 약칭 SS-VT)가 편성되었다.[50] 디트리히는 형식적으로 특무부대 LSSAH 연대장이었다.
1936년 10월 1일, 전 국방군 중장 파울 하우서가 특무부대 총감에 취임했지만, 디트리히는 하우서보다 계급이 높아 히틀러에게만 책임을 지는 독립적인 부대로 LSSAH를 유지하려 했고, 하우서의 지휘권에 잘 따르지 않았다.[52][53][54][55] 그러나 훈련 수준 차이가 명확해지자 디트리히도 LSSAH가 미숙함을 인정하고 하우서에게 훈련을 허가했다.[57]
3. 2.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LSSAH) 창설과 지휘
1933년 3월 17일, 아돌프 히틀러는 제프 디트리히에게 엄선된 120명의 친위대(SS)원으로 구성된 호위부대인 친위대 사령부 경비대 "베를린"(SS-Stabswache "Berlin") 창설을 명령했다.[28][29][30] 이 부대는 디트리히가 지휘하던 친위대 호위사령부 "총통(Der Führer)"을 개편하여 창설되었다.[26]이 부대는 두 개 중대 규모로 증원되었고, 리히터펠데에 있던 구 사관학교를 병영으로 삼았다. 여기서 세 개의 친위대 중대가 추가되어 대대 규모가 되었고, 포츠담의 독일 국방군으로부터 훈련을 받았다.[31] 급여와 처우도 국방군과 동등하게 받았다.[32]

초센(Zossen)과 유터보크(Jüterbog)의 친위대 대대와 합류하여 연대 규모가 되었고,[38][33] 1933년 9월 3일 나치당 당대회(뉘른베르크 당대회)에서 "아돌프 히틀러 친위대 연대"(Adolf Hitler-Standarte)라는 이름을 받았다.[30][32][34] 1934년 4월 13일에는 "제1SS 기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신변호위연대) SS 아돌프 히틀러(Leibstandarte SS Adolf Hitler, 약칭 LAH)"라는 명칭을 받았다.[30][34][35][36][37][38]
초기 라이프슈탄다르테에는 신장 180cm 이상 등의 엄격한 입대 조건이 있었다.[39] 또한 파울 폰 히덴부르크 사후, 국방군이 히틀러에게 하는 충성 맹세보다 엄격한 맹세가 작성되었다.[40] 따라서 라이프슈탄다르테는 엘리트 부대라는 인상을 주었다.[41]
라이프슈탄다르테는 실질적으로 친위대 전국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로부터 독립된 존재였으며, 히틀러에게만 책임을 지는 개인적인 호위 부대였다.[42] 따라서 창설 초기부터 디트리히와 힘러 사이에 부대 지휘권을 둘러싼 다툼이 있었다.[14]
1934년 12월 14일, 라이프슈탄다르테와 친위대 정치 예비대로 구성된 친위대 특무부대(SS-Verfügungstruppe, 약칭 SS-VT)가 편성되었다.[50] 디트리히는 형식적으로 특무부대 라이프슈탄다르테 연대장이었다.
1936년 3월 라인란트 진주에서 라이프슈탄다르테는 친위대 소속으로 유일하게 참전했으며, 가장 먼저 자르브뤼켄에 진입한 부대였다.[51]
1936년 10월 1일, 전 국방군 중장 파울 하우서가 특무부대 총감에 취임했지만, 디트리히는 하우서보다 계급이 높았던 까닭에 계속 히틀러에게만 책임을 지는 독립적인 부대로 유지하려 했고, 하우서의 지휘권에 잘 따르지 않았다.[52][53][54][55] 하인리히 힘러가 특무부대 총감부 지휘에 복종하도록 디트리히에게 편지를 보내 간언한 적도 있었다.[56] 그러나 다른 특무부대와 라이프슈탄다르테의 훈련 수준 차이가 명확해지자 디트리히도 라이프슈탄다르테가 미숙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우서에게 라이프슈탄다르테 대원 훈련을 허가하게 된다.[57]
1938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 합병(안슐루스) 당시 라이프슈탄다르테는 친위대 소속으로 유일하게 참전했다. 디트리히가 이끄는 1개 자동차 대대가 오스트리아 진주에 활약했다.[58][59] 1938년 10월 주데텐란트 합병 당시 진주에도 참가했다. 이 진주에는 라이프슈탄다르테 이외의 특무부대 연대, "게르마니아" 연대와 "도이칠란트" 연대도 참가했다.[60]
라이프슈탄다르테는 우선적으로 기계화(자동차화)되었고,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당시에는 친위대 특무부대 중 유일하게 자동차화된 부대였다.[61]
3. 3. 장검의 밤 사건
1934년 6월 장검의 밤 사건에서 제프 디트리히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숙청 전날인 6월 29일, 히틀러의 명령으로 뮌헨으로 급히 이동하여 카우페링에서 라이프슈탄달테의 두 개 중대와 합류했다.[44] 히틀러의 명령을 기다리며 에른스트 룀 이하 돌격대(SA) 간부들이 모여 있던 바트 비스제(de)로 향했으나, 도중에 진흙탕 때문에 부대의 군용 트럭이 움직이지 못해 지각하게 되었다.[45]6월 30일 오전 6시 30분경, 히틀러는 디트리히 일행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친위대원들을 이끌고 바트 비스제의 돌격대 간부 숙소에 들어가 룀 등을 체포했다.[46] 디트리히는 오후가 되어서야 뮌헨 나치당 본부에 도착했고,[45] 히틀러는 도착 지연을 질책하며 체포한 돌격대 간부 중 6명의 총살을 그에게 맡겼다.[47]
디트리히는 오후 6시에 돌격대 간부들이 수용되어 있던 뮌헨의 슈타델하임 교도소(de)에 도착하여 6명의 처형을 지휘했다.[48] 처형된 돌격대 간부 중 한 명인 아우구스트 슈나이트후버는 "제프! 무슨 일이냐! 우리는 무죄다!"라고 외쳤지만, 디트리히는 "당신들은 총통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일 히틀러!"라고만 대답했다고 한다.[49] 그는 총살을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 중간에 자리를 떴으며, 훗날 "슈나이트후버의 차례가 오기 전에 나는 자리를 피했다. 이제 충분했다"고 회고했다.[49]
한편, 베를린에 남아 있던 라이프슈탄달테 대원들은 프로이센 주 내무장관 헤르만 괴링, 친위대 전국 지도자 히믈러, 친위대 정보부(SD) 사령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등이 선정한 숙청 대상자들을 리히터펠데 사관학교에서 총살했다.[14] 7월 1일, 디트리히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베를린에서의 총살대를 조직했으며,[34] 이 공로로 친위대 대장으로 승진했다.[6][30][9]
4.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디트리히는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LSSAH)를 이끌고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에 참전했다. 됭케르크에서는 히틀러의 진격 중지 명령을 무시하고 아 운하를 도하하여 와텐 고지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LSSAH 부대원들이 웜하우트 학살을 일으키기도 했다.[2]
1941년 발칸 전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LSSAH를 지휘하여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빠르게 점령했다. 특히 그리스군 지휘관의 항복 제안을 독단적으로 수용하여 그리스군 포로를 즉시 석방, "용감하지만 공정한 부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94]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LSSAH를 이끌고 동부 전선에 참전,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진격하여 우만 포위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로스토프를 일시 점령하기도 했으나, 소련군의 반격으로 후퇴했다. 동부 전선에서 LSSAH는 용맹함을 인정받았지만, 1942년 4월 소련군 포로 4,000명을 학살하는 등 잔혹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103] 1943년 하르키우 전투에서는 파울 하우서의 지휘 아래 쿠르트 마이어, 테오도르 비슈 등 부하들이 활약하여 소련군 52개 사단을 궤멸시키고 하르키우를 탈환, 히틀러는 하우서와 디트리히를 칭찬하며 디트리히를 "영웅주의의 진정한 위업을 달성했다"고 평가했다.[105] 이후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했으나 소련군의 저항에 막혔다.[106]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제1SS기갑군단장으로서 캉 주변에서 영국군과 격전을 벌여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히틀러의 신임을 받아 제6SS 기갑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벌지 전투에 참전했으나, 작전은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말메디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전후 디트리히의 운명에 영향을 미쳤다.
1945년 4월 플라텐지 공세 실패 후 히틀러는 디트리히와 휘하 장병들에게 소매띠 반납을 명령했고, 디트리히는 이에 항명했다. 1945년 5월 8일, 디트리히는 조지 패튼이 이끄는 미군에게 항복했다.[110]
4. 1.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침공
1939년 9월 1일부터 시작된 폴란드 침공에서 LSSAH는 남방군집단(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 예하 제10군(발터 폰 라이헨나우 대장)에 소속되어 참전했다.[62][63]LSSAH는 국방군으로부터 가혹한 임무를 부여받았음에도 용감하게 싸웠다.[64] 특히 부즈라 전투에서는 폴란드 회랑에서 남하하는 폴란드군을 저지하여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수도 바르샤바로의 돌파를 허용하지 않았다.[65] 디트리히는 이 전투에서 2급 철십자훈장과 1급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66][67]
하지만 국방군의 평가는 낮았는데,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대장은 "LSSAH는 평범한 부대이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며 뛰어난 점은 없다"라고 평가했다.[68]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디트리히의 군사적 교양 부재에 놀랐다고 회고했다.[69] 또 다른 육군 장교는 "디트리히의 부대는 진군 중에 함부로 총을 쏘고, 관례처럼 폴란드의 마을들을 불태운다"라고 비판했다.[68]

1940년 5월부터 시작된 프랑스 침공에서 LSSAH는 B군 집단(페도어 폰 보크 상급 대장) 제18군(게오르크 폰 퀴힐러 대장) 예하에 배속되어 네덜란드 침공 부대에 참여했다.[70]
5월 10일, LSSAH는 네덜란드 영토를 신속히 진군하여 아이셀 강을 도하하고 호엔을 점령한 뒤, 덴 하흐로 진군했다.[71] 이후 로테르담에서 네덜란드군에 포위되었던 공수부대와 합류했다.[62][72]
네덜란드 항복 후, LSSAH는 제19기갑군단(하인츠 구데리안 대장)에 소속되어 북프랑스의 덩케르크 전투에 참전했다.[73] 독일군은 히틀러에 의해 덩케르크 진군 중지 명령을 받았으나, 디트리히는 명령을 무시하고 전진하여 아 운하를 도하하고 와텐 고지를 점령했다. 구데리안은 진군 중지 명령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에 디트리히의 행동을 묵인했다.[74][75][76][77] 이 전투 중 LSSAH 제2대대 소속 대원들이 80명의 영국과 프랑스군 포로를 살해한 웜하우트 학살이 발생했다.[2]
이후 남프랑스 진격에서 LSSAH는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대장의 기갑집단 선봉 부대로서 국방군 부대를 후방에 남겨둔 채 생테티엔까지 급진군하여,[78][79][80] 가장 내륙까지 진격한 부대가 되었다.[81]
디트리히는 서부 전선에서의 공적으로 1940년 7월 5일 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16]
4. 2. 발칸 전선
1941년 4월 발칸 전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LSSAH)는 빌헬름 리스트 원수의 제12군 예하 부대로 참전했다.[84] LSSAH는 프랑스 메스에서 불가리아 소피아로 이동한 후, 1941년 4월 6일 유고슬라비아 남부를 침공하여 스코페, 비톨라 등 요충지를 점령하고 4월 10일에는 그리스로 진격했다.[85][86]쿠르트 마이어 등 부하들의 활약으로 LSSAH는 클리디 협곡에서 오스트레일리아 국방군, 뉴질랜드 군의 격렬한 저항과 클리슬라 협곡에서 그리스군의 치열한 반격을 이겨내고 빠른 속도로 그리스를 점령했다.[87] 1941년 4월 23일, 그리스는 항복 문서에 서명했고, 영국군은 크레타섬으로 철수했다.[86][88][89][90]
그리스 전군 항복 3일 전인 4월 20일, 디트리히는 후퇴로가 막힌 그리스 에피루스 군(16개 사단)의 항복 제안을 독단적으로 받아들였다.[91][92] 이때 그리스군 병사들을 포로로 하지 않고 즉시 복귀시켰다.[93]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 전투에서 LSSAH는 "용감하지만 공정한 부대"라는 평가를 받았다.[94]
LSSAH는 아테네에서 승전 기념 퍼레이드를 한 후, 프라하로 돌아가 사단 편성을 받았다.[89][95][96]
4. 3. 독소전쟁 (동부 전선)
1941년 6월 말 바르바로사 작전이 발동되자, 라이프슈탄다르테는 남방집단군(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에 소속되어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진격했다. 스탈린그라드를 돌파하여 키예프 방면으로 진군, 우만 포위전에서 소련군 10만 명을 포로로 잡는 데 기여했다.[97][98] 8월에는 항구 도시 미콜라이우를 점령했고, 9월에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제11군 예하에서 크림반도 전투에 잠시 참가했다.[98] 10월에는 항구 도시 로스토프 공격을 개시, 11월에 일시 점령했으나 곧 소련군의 반격으로 라이프슈탄다르테는 큰 타격을 입고 후퇴했다.[99][100] 디트리히는 1941년 12월 31일 참나무잎장식 철십자훈장을 받았다.[16] 1942년 봄, 라이프슈탄다르테는 도네츠 지역에서 방어전을 펼치다 스타리노로 이동했고, 6월에는 프랑스로 돌아가 휴식과 보충을 받았다.[101][102]
동부 전선에서 라이프슈탄다르테는 육군에게도 높이 평가받았으나, 잔혹 행위도 두드러졌다. 1942년 4월, 동료 6명이 살해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군 포로 4,000명을 학살하기도 했다.[103]
1943년 1월, 라이프슈탄다르테는 동부 전선에 복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제6군 패배 이후 소련군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해 편성된 친위대 기갑군단(파울 하우서 친위대 대장)에 소속되었다.[101] 친위대 기갑군단은 하르키우 전투에 투입, 하우서의 지휘 아래 쿠르트 마이어, 테오도르 비슈 등 부하들의 활약으로 소련군 52개 사단을 궤멸시키고 하르키우를 탈환했다.[104] 히틀러는 하우서와 디트리히를 칭찬하며, 디트리히를 "영웅주의의 진정한 위업을 달성했다"고 평가했다.[105] 디트리히는 1943년 3월 14일 참나무잎·검장식 철십자훈장을 받았다.[16]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했으나 소련군의 저항에 막혔다.[106] 이후 라이프슈탄다르테 사단장에서 물러나 제1SS기갑군단 군단장이 되었고,[107] 8월부터 9월까지는 북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군 무장 해제 감독을 맡았다.[102]
4. 4. 서부 전선과 벌지 전투
노르망디 전투 당시 제1 SS 기갑 군단장으로서 연합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한 공로로 히틀러에게 인정받아 제6 기갑군 사령관으로 승진했다.[16]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국방군 장교들을 신뢰하지 않게 된 히틀러는 디트리히를 더욱 신임했다.[16] 1943년 10월부터 디트리히의 제1SS 기갑군단은 서유럽으로 이동하여 연합국의 상륙에 대비했다. 1944년 6월 연합군의 대륙 반격 작전(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지만, 상륙 저지에 실패했다.[108] 이어 캉 주변에서 영국군과 격전을 벌여 8월까지 영국군의 진격을 저지했다.[102] 이 공로로 8월 1일 친위대 상급대장으로 승진했고, 8월 6일에는 떡갈잎·검·다이아몬드 훈장을 수여받았다.[16]
1944년 9월에는 새로 편성된 제6SS 기갑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연말에 시작된 라인 방어 작전(아르덴 공세)에 참가했다. 벌지 전투에서 디트리히의 제6SS 기갑군은 제5기갑군과 제7군과 함께 공세 주력을 담당했다.[109][110] 요아힘 파이퍼 친위대 중령이 이끄는 파이퍼 전투단을 선두로 격전을 벌였지만, 연료 부족과 병력 배치의 부실 등으로 작전은 실패했다.[109]
이 작전 과정에서 제6SS 기갑군 예하 라이프슈탄다르테 사단이 말메디에서 미군 포로 사살 사건(말메디 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전후 미국에 의해 추궁되어 디트리히의 전후 운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110] 당시 6 기갑군 사령관이었던 디트리히와 LSSAH 사단장 빌헬름 몽케 그리고 파이퍼 전투단 지휘관 요아힘 파이퍼가 포로를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16]
4. 5. 헝가리 전투와 종전
1945년 4월, 디트리히의 제6 SS 기갑군이 선봉이 된 플라텐지 공세가 실패하자, 히틀러는 디트리히와 휘하 장병들에게 소매띠를 반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분노한 디트리히는 항명했다.[110] 히틀러는 벌지 전투와 플라텐지 공세의 잇따른 실패로 디트리히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었다. 1945년 5월 8일, 디트리히는 조지 패튼이 이끄는 미군에게 항복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을 마감했다.[110]5. 평가
제프 디트리히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높이 평가받지 못했지만, 히틀러의 개인적인 신임을 얻어 이례적인 승진을 거듭했다. 부하들에게는 인기가 많았으며, 전후에도 전우회 활동을 통해 굳건한 지지를 받았다.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가가 많다. 하사관 출신으로 정규 장교 교육을 받지 못한 디트리히는 지도를 읽는 법조차 배우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124][125]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는 그를 "괜찮지만 어리석다"고 평가했으며, 아르덴느 전투에서 제6기갑군을 지휘한 디트리히의 행동을 비판했다. 디트리히의 주요 참모 장교조차 그가 "전략적 천재는 아니다"라고 인정했다.
반면 디트리히는 히틀러와의 오랜 친분 덕분에 다른 고위 장교들보다 히틀러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그는 히틀러와 그의 측근을 비난하며, 히틀러에게 "우리 모두를 파멸로 이끌고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디트리히를 푸른츠베르크, 치텐, 자이트리츠와 같은 독일의 명장에 필적하는 인물로 평가하며 각별히 신임했다. 디트리히가 원수 계급을 원하자, 히틀러는 민족원수라는 새로운 계급을 신설하여 그를 임명하려 했으나, 아르덴느 전투의 패배로 무산되었다.[126]
디트리히는 부하들에게 "파파 제프", "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다. 전후에도 전우회에서 그의 인기는 여전했으며, 전 부하들의 굳건한 지지를 받았다.
그는 규정된 제복을 착용하지 않고 임의로 개조하는 버릇이 있었다. 국방군 장관을 본떠 은색 모로 자수된 친위대의 국가 휘장을 금색 모로 자수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히틀러 암살 계획의 용의자로 체포된 한스 슈파이델 육군 중장을 석방시키기 위해 국가안전본부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127]
디트리히의 키는 158cm로, 173cm인 히틀러와 함께 있을 때 그 불균형이 두드러졌다는 평가가 있다.[123] 다만, 170cm였다는 설도 있다.[122] 그의 종교는 가톨릭이었다.[10]
6. 전후
제프 디트리히는 1946년 말메디 학살 사건으로 미군 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했다. 1956년에는 긴 칼의 밤 사건으로 다시 기소되어 복역하다 1959년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되었다.[5]
석방 후, 전 무장친위대(Waffen-SS) 대원들의 조직인 히아그 활동에 참여하며 과거를 옹호했다. 1966년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장례식에는 6천여 명이 참석했다.[3]
6. 1. 전쟁 범죄 재판
1946년 말메디 학살 사건에서 미군 포로를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혐의로 말메디 학살 관련 재판에 회부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3] 그러나 룬트슈테트, 구데리안 등 다른 독일 장교들의 변호 덕분에 25년형으로 감형되었다.[119] 그는 바이에른의 란츠베르크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0년만 복역하고 1955년 10월 22일 가석방되었다.[3]1943년에는 하르키우에서 저지른 전쟁 범죄로 소련으로부터 결석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전후 소련은 그의 인도를 요구하지 않았다.[116] 1946년 5월 16일부터 7월 16일까지 다하우의 미군 군사재판소(미합중국 대 발렌틴 베르신 외, 사건번호 6-24)에서 피고 11번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말메디 학살 사건에서 미군 포로 처형 명령에 연루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3]
1944년 아르덴 공세 과정에서 발생한 말메디 학살 사건으로 인해 전후 미군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1946년 초, 요아힘 파이퍼 등 72명의 무장 친위대원들과 함께 기소되었다.[117][118] 1951년에는 25년으로 감형되었고,[120] 1955년 10월 22일에는 집행유예로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석방되었다.[121][110]
6. 2. 긴 칼의 밤 사건 재판
1955년 10월 22일 가석방되었으나, 1956년 8월 루드비히스부르크에서 긴 칼의 밤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다.[3] 1957년 5월 6일부터 14일까지 뮌헨 제1지방법원(Landgericht München I)에서 전 SS-슈탄텐퓌러 미하엘 리퍼트와 함께 1934년 긴 칼의 밤 동안 SA 지도자들을 살해한 역할로 재판을 받았다. 디트리히는 6명의 SA 대원 처형을 위한 총살대를 제공한 것에 대해 과실치사 공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18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1][4] 항소가 기각된 후 1958년 8월 7일 란츠베르크 감옥으로 돌아갔다. 1959년 2월 6일 심장 질환과 다리의 순환기 장애로 인해 석방되었다.[5]
6. 3. 전우회 활동과 사망
출옥 후 디트리히는 전 무장친위대(Waffen-SS) 대원들의 조직이자 로비 단체인 히아그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고위급 무장친위대 출신들이 설립한 이 단체는 무장친위대의 법적, 경제적, 역사적 재평가를 위해 활동했으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1966년 심장마비로 루트빅스부르크(Ludwigsburg)에서 향년 74세로 사망했다. 전쟁 당시 전우들뿐만 아니라 과거 적이었던 사람들까지 포함해 6천 명이 넘는 사람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3]
7. 인물과 평가
디트리히는 키가 158cm에 불과했다는 설과 170cm였다는 설이[122][123] 공존한다. 히틀러는 173cm였기에, 디트리히와의 키 차이가 두드러졌다고 여겨진다.[123] 디트리히는 하사관 출신으로 정규 장교 교육을 받지 못해 군사적 능력은 높이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개인적인 신임을 얻어 그의 지시를 여러 번 어기고도 처벌 대신 훈장과 승진을 거듭했다. 히틀러는 디트리히를 푸른츠베르크, 치텐, 자이트리츠 같은 독일 명장에 비견했다.
부하들에게 "파파 제프", "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큰 인기를 얻었고, 전후에도 전우회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히틀러 암살 계획 연루 혐의로 체포된 한스 슈파이델 육군 중장 석방을 위해 국가안전본부에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127] 그는 가톨릭 신자였다.[10]
7. 1. 외모와 성격
디트리히는 키가 158cm에 불과했다는 설과 170cm였다는 설이[122][123] 공존한다. 참고로 히틀러의 키는 173cm였다. 그는 하사관 출신으로 정규 장교 교육을 받지 못해 군사적 능력은 높이 평가받지 못했다. 미군 장교 로버트 E. 멜리엄은 심문 과정에서 디트리히가 아르덴느 공세에서 자신의 부대 역할이나 작전 전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고 기록했다.[124] 빌헬름 빗트리히 SS 대장은 디트리히에게 1시간 30분 동안 전황을 설명했지만, 디트리히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125]그러나 디트리히는 히틀러의 개인적인 신임을 얻어 그의 지시를 여러 번 어기고도 처벌 대신 훈장과 승진을 거듭했다. 히틀러는 디트리히를 푸른츠베르크, 치텐, 자이트리츠 같은 독일 명장에 비견했다.
대전 말, 원수 계급을 원했던 디트리히에게 히틀러는 "민족원수" 신설을 지시했다. 아르덴느 공세 승리 시 이 계급을 부여할 예정이었으나, 패전으로 무산되었고 민족원수 계급도 계획에 그쳤다.[126]
디트리히는 부하들에게 "파파 제프", "아버지"로 불리며 큰 인기를 얻었고, 전후에도 전우회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그는 제복을 규정대로 착용하지 않고 임의로 개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국방군 장관 복장을 참고하여(자세한 내용은 불명) 친위대 국가 휘장을 은색 대신 금색 실로 수놓아 사용했다. 히틀러 암살 계획 연루 혐의로 체포된 한스 슈파이델 육군 중장 석방을 위해 국가안전본부에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127] 그는 가톨릭 신자였다.[10]
7. 2. 어록
- "당신들은 총통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일 히틀러!"[49]: 1934년 긴 칼의 밤 당시 슈타델하임 교도소(de)에서 아우구스트 슈나이트후버를 비롯한 돌격대 간부들을 처형할 때 슈나이트후버가 "제프! 무슨 일이냐! 우리는 무죄다!"라고 외치자 디트리히가 한 말이다.
- "슈나이트후버의 차례가 오기 전에 나는 자리를 피했다. 이제 충분했다"[49]: 긴 칼의 밤 당시 처형을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 중간에 퇴장한 이유에 대한 회고이다.
- "젠장, 그 암퇘지도 드디어 뒈졌군."[128]: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당시 디트리히의 발언이다.
- "왜 제6SS 기갑군이냐고? 전차가 6대밖에 없으니까!"[129]: 대전 말기 잦은 부대 손실에 대해 자조적으로 한 농담이다.
- (유대인 학살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어리석은 짓입니다. 유대인을 원치 않았다면 그렇게 말했으면 됐습니다. 그랬다면 그들은 떠날 수 있었을 겁니다. 저는 단 한 번도 반유대주의자였던 적이 없습니다. 어릴 적 유대인 가정 옆집에서 살았지만, 그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1943년 그리스에 있던 아내에게서 온 편지로 유대인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히믈러에게 가서 그 사실을 물었더니, 사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모아서 일을 시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때 이미 유대인들은 살아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 (율리우스 슈트라이허가 발행했던 『슈튀르머』에 대해) "읽어본 적도 없습니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의 『20세기의 신화』에 대해)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어려워서."[130]
- (히틀러에 대해) "누구도 히틀러와 그렇게 친밀해져서 사적인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엄격한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암살 미수 사건 이후 그는 점점 쇠약해지고 병들어 갔습니다. 어떤 상처를 입었을 것이고, 20년간의 긴장에도 갉아먹혔을 것입니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그런 것은 견딜 수 없습니다. (중략) 우리는 상황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131]
7. 3. 가족
제프 디트리히는 1921년 2월 17일 바바라 "베티" 자이들(Barbara "Betti" Seidl)과 결혼했으나, 자녀 없이 1937년 4월 이혼했다.[10] 디트리히는 "잘 지낼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132] 같은 해, 카를스루에(Karlsruhe)의 양조업자 하인리히 모닝거(Heinrich Moninger) 대령의 딸 우르술라 모닝거(Ursula Moninger)와 교제를 시작했다.[10] 당시 22세였던 우르술라는 카를-하인리히 브렌너(en]) SS 중장과 결혼한 상태였지만, 1939년 디트리히와의 사이에서 아들 볼프-디터 디트리히를 출산했다.[10] 1942년 1월 19일, 디트리히와 우르술라는 정식으로 결혼했다.[10] 부부는 이후 두 아들, 루츠와 게츠를 낳았다.[10]8. 경력
제프 디트리히는 1911년 독일 제국군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경리 담당 부사관으로 복무하다가 독일 전차 부대에서 복무했다.[19] 대전 후 1919년 5월 바이에른 공산당에 반대하여 자유군단에 잠시 몸을 담았다. 이후 주경찰로 복무하다 1928년 나치당에 가입해 히틀러의 경호 대장이 되었다. 히틀러는 그에게 "Chauffeureska"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19]
1930년 남부 바이에른 주의원으로 제국 의회에 선출되었고, 1931년에는 SS중장이 되었다. 1934년에는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의 지휘관이 되었으며, 프로이센 주의원을 겸임했다. 같은 해 6월 장검의 밤 사건 당시 SA 수뇌부를 제거한 공적으로 SS대장으로 승진했다.[19]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라이프슈탄다르테를 이끌고 파리와 됭케르크 공격에 참가했다. 그리스 및 유고슬라비아 침공 작전 동안은 여단으로 확장된 라이프슈탄다르테를, 바르바로사 작전에는 강화된 여단급의 SS 차량화 보병 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를 지휘했다.
노르망디 전투 당시 제1 SS 기갑 군단장으로서 연합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여 제6 기갑군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히틀러는 디트리히를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벌지 전투 당시에는 제6 SS 기갑군을 지휘했다. 1945년 4월 플라텐지 공세가 실패하자 히틀러는 디트리히와 휘하 장병들에게 소매띠를 반납하라고 명령했지만, 디트리히는 항명했다. 1945년 5월 8일, 그는 조지 패튼이 이끄는 미군에게 항복했다.[19]
8. 1. 친위대 계급
- 1928년 6월 1일, 돌격대지휘관[21][19]
- 1928년 8월 1일, 돌격대대지휘관[24]
- 1929년 9월 18일, 돌격대연대지휘관[21]
- 1930년 10월 10일, 상급돌격대연대지휘관[21][25]
- 1931년 12월 18일, 돌격대사단장[26]
- 1934년 7월 1일, 돌격대군단장[9]
- 1940년 11월 19일, 무장친위대 대장
- 1942년 4월 20일, 돌격대상급군단장 겸 무장친위대 상급대장 (계급장 착용 시작은 1944년 8월 23일부터.)[9]
8. 2. 수훈 내역
- Eisernes Kreuz|1914년형 철십자훈장de
- * 2급
- * 1급
- Panzerkampfabzeichen|전차돌격장de 은장
- Militärverdienstorden|바이에른 전공훈장de
- Schlesischer Adler|실레지아 독수리훈장de
- 황금 나치당원 배지
- 친위대 명예반지
- 혈액훈장
- 1938년 3월 13일 기념 메달
- 1938년 10월 1일 기념 메달 및 1938년 10월 1일 기념 메달 프라하 성 약장
- Eisernes Kreuz|1939년형 철십자훈장de
- * 2급
- * 1급
- 기사철십자훈장
- * 1940년 7월 4일, 기사철십자훈장
- * 1941년 12월 31일, 떡갈잎장식
- * 1943년 3월 14일, 떡갈잎·검장식
- * 1944년 8월 6일, 떡갈잎·검·다이아몬드장식
- 1941년/1942년 동부전선 동계전투 기장
- 전상장
- 조종사 겸 관측사 장 금장 및 다이아몬드 장 (Flugzeugführer- und Beobachterabzeichende)
- 크림 방패장 (Krimschild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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